2020년 11월 7일 토요일,
하늘도 푸르고 햇빛도 화창함, 저물어가는 가을을 보내기 매우 아쉬움 💐
아동비젼교실 우리들은 11시 , 2시 공연으로 나누어 < 남한산성 그날> 체험에 참여하기로 했어요
우리들은 부모님이 싸주신 맛난 도시락과 간식을 가지고, 교실로 모였어요
친구들, 형과 누나 동생들 청소년 봉사자 언니들도 하나하나 모두 모였어요
우리나라가 가지고있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14개중 11번째 유산인 남한산성을 향해 우리 모두는 출발했어요
남한산성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한남루라는 곳에서 하위무사들이 입었던 군복인 쾌자를 갈아입고 오늘 진행된 체험장소를 다녔어요
빨갛고 파란 쾌자를 입으니 멋져보였고 우리들 모두가 조선시대 살고있는 색다른 기분이었어요
행궁안에 있는 내행전 앞 뜰에서 갑자기 등장한 대장장이 서흔남과 함께 우리들은 얘기를 주고받으면서 오늘의 체험행사를 시작했어요
배가 꼬르륵 할때까지 여기저기, 산을 오르락 내리락하며 여러가지를 보고 듣고 체험했어요
남한산성은 처음에 백제를 세운 온조대왕이 백제의 수도인 하남위례를 지키기위해 세운 성이래요
그리고 조선의 16대왕 인조가 청나라의 12만 대군이 일으킨 전쟁,병자호란 때 피신한 성이기도 해요 이건 전부터 저도 알고 있던거예요
1636년 12월 14일에 인조가 남한산성에 숨기 시작하며 버티다가 47일 만에 제발로 산성밖으로 나가 항복을 한 가장 큰 이유는 남한산성으로 들어오는 모든 식량보급로가 청나라군의 포위에 의해 막힌거래요
그리고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강화로 피신한 왕자들과 왕의 가족들,그리고 대신들의 가족이 있는 강화도가 청나라군사들에게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왔던거래요
다급해진 모든 대신들은 왕에게 청과의 화친을 위해 항복해야 한다고 했어요
남한산성 영화에서도 나왔어요 임진왜란을 도와준 명나라와의 관계를 생각해야 하며 오랑캐 청나라를 임금으로 받들어서는 안된다는 김상헌과 그 무리들을 죽여야된다고 대신들은 아우성을 쳤대요
인조는 다음날 바로 청나라 황제 칸에게 나아가 왕의 옷인 곤룡포를 벗고 남색 신하복 차림으로 세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에 피가 나도록 머리를 땅에 조아렸대요 아버지와 아들, 임금과 신하의 관계로 섬기겠으며
큰아들 소현세자를 청의 볼모로 보내겠다는 약조를 했대요
실제 그해 두달 후 소현세자와 세자빈은 청으로 끌려가 9년을 억류당해 있었대요
남한산성은 알고보니 너무나 굴욕적인 역사가 있었던 장소였어요
정말 부끄럽고 슬퍼요
칸에게 머리를 조아린 인조는 자신의 백성에게도 머리를 조아렸어야 마땅 했어요!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다시는 이런 역사를 만들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
하지만 남한산성의 자랑스런 면도 있었어요
서양식대포를 가진 청의 황제 칸이 남한산성에 오기전까지는 청군의 침입을 47일 동안 막아낸 남한산성이었어요
남한산성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선정된 이유는 백제 때 지어진 남한 산성의 성 쌓은 기술이 세계유산이 될만큼 인정되었고 위기때에 산성도시로서의 역할이 높은 점수를 받았대요
남한산성은 그동안 동네에서 가까워 자주 가봤던 곳이라 하찮게 생각했었어요
오늘 남한산성에 대해 잘 알게 되어서 훨씬 친근하게 됐어요
이제 다른 사람한테도 소개할 수 있을거 같아요
다 끝내고 우리는 다시 한남루로 돌아와서 우리 옷으로 갈아입었어요
시작부터 약 두시간쯤 걸린 거같아요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어요
빨리 도시락을 먹고 싶었어요
행궁을 향하며 즐겁게 걸어갔어요.
우리는 한남루에 도착하여 하위무사들이 입었던 쾌자를 갈아입고 내행전으로 올라가는 뜰로 갔어요 이때 커다란 목소리로
갑자기 등장한 대장장이 서흔남!
영화 <남한산성>에서
배우 고수가 서날쇠로 나왔던 실존인물 서흔남이어요.
조선왕조실록에 '서흔남'은 3번 나와요
🔅인조를 업고 남한산성으로 피난
청의 군사들이 한양으로 쳐들어오자 인조는 송파강을 건너 급하게 남한산성으로 피신해요.
하지만 날은 저물고 눈까지 내려 산길을 오르는 피난은 쉽지 않았어요.
남한산성에 오르는 중턱에서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을때 이들은 서흔남을 만나요.
"제가 임금님을 업고 남한산성으로 올라가겠습니다"
서흔남에게 업혀 남한산성에 도착한 인조는 그에게 소원을 물었어요.
"임금님의 곤룡포를 갖고 싶습니다"
이에 인조는 미소를 지으며 곤룡포를 벗어주었고,
후일 서흔남은 죽기 직전 곤룡포를 함께 묻어달라하여
곤룡포를 함께 묻어주었대요
내행전에서 진행될 스토리극 <왕이준 선물>의 제목을 아마 여기서 따왔나봅니다
쾌자를 입은 우리들 모습 ㅎㅎ
1636년 12월 14일 시작된 병자호란 때의 남한산성의 날씨는 추운공기가 살갗을 뚫고 들어왔을텐데요
오늘 우리들은
맑고 따뜻한 가을하늘 아래있어 추위와 굶주림이 실감나지는 않았어요
저 ..기 내행전 인조가 보여요 남한산성 안에 갇힌 모든 군사와 백성이 살을 에는 추위와 굶주림속에 인조의 고민은 깊어가고..
병자호란이 터지고 남한산성이 적들에게 포위되자 성은 고립되었어요.
이에 전국에 있는 근왕병을 불러모으려는 왕의 격서편지를 전달할 사람이 필요했는데요...,
청의 포위를 뜷고 격서를 전국에 전달할 묘안을 찾고 있는 인조.
"여기 모인 중에 나의 질문을 받을 용감한 이가 있는가..."
''예 제가 있습니다"
"어! 많이 본 뒷모습인데...어...어.. 엄태민이 아닌가요"
"자네는 무엇을 잘하는고"
."...때때마다 다르옵니다"
"푸하하하! 그럼 자네라면 어떻게 격서를 가지고 빠져나가겠는가"
"전투기를 타고 나가겠습니다"
"어.~어이 이사람아 지금은 조선시대가 아니던가 어쨌든 자네의 용감함은 칭찬할만 할세"
ㅎㅎ
서흔남은 남한산성 서문 밖 '널무니' 마을의 사노비로 대장장이, 기와장이등의 일을 했다고 해요.
이때 자원한 사람이 서흔남이래요.
그는 적진을 통과하면서 미치광이 흉내를 내어 무사히 통과해 경상도,전라도, 충청도, 강원도 등
전국을 다니면서 인조의 편지를 전했다고 해요.
천민신분을 벗어나 벼슬을 받은 서흔남
병자호란이 끝난 이후 서흔남은 전쟁에서의 공을 인정받아
훈련주부와 가의대부, 동지중추부의 벼슬을 받았대요.
이 사실은 조금있다가 있을 돌발퀴즈 문제기도 했는데 '아유..안타깝다 역사책을 앞으로 많이 읽을터이다'
천민이라는 신분의 벽을 뛰어넘은 조선의 실존인물이어요.
저..기 영월정이 보입니다 대금소리가 들리네요
숨이찼지만 아무도 불평없이 우리는 잘 걸어갑니다
이쯤에서 앉아볼까요
영월정에서 즐기는 풍류악.
우리들도 얼쑤 좋~다
배운대로 추임새를 넣었어요 ㅎㅎ
우리는 조선의 후예다
이제 활쏘기를 배우러 숭렬전을 향합니다
양궁과 국궁에 대해 그리고 국궁쏘는법을 배웠어요
활시위를 당기기에 팔이 힘들어요
숭렬전에 나라의 무사태평을 빌기위해 남한산성을 세운 백제의 시조 온조대왕에게 참배하러 왔어요
숭렬전은 일년에 두번만 문을 열어 들어가기 힘들대요
숭렬전의 온조대왕 사당은요.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옮겨와 청나라 군사와 맞서 싸울 때였어요.
그날도 인조는 밤이 깊도록 청나라 군사 와 대치하면서 우리 군사들을 돌보다가 몹시 피곤하여 깜박 잠이 들었어요.
그런데 꿈에 웬 사람이 나타나 “적이 높은 사다리를 타고 북쪽 성을 오르는데 어째서 막지 않는가” 라고 호통을 치는 것이었어요.
난데없는 사람의 출현에 놀란 인조가 누구냐고 물었더니,
“나는 성주 온조대왕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요.
이에 놀라 잠에서 깨어난 인조는 꿈에서 들은 대로 즉시 북쪽 성 근처를 살펴보게 했어요.
그랬더니 과연 꿈속에서와 같이 청나라 군사가 북쪽 성벽을 오르는 것이었어요.
인조는 즉시 군사들에게 명령을 내려 몰래 성벽을 오르던 청나라 군을 물리쳤다는 이야기예요.
이렇게 온조대왕의 은혜를 입은 인조는 병자호란이 끝나 서울로 돌아온 이후, 남한산성에 온조대왕의 사당을 짓고 봄·가을로 정성껏 제사를 올렸대요
우리는 숭렬전에서 오늘 배운 모든 내용을 퀴즈로 맞혀보고있어요
"퀴즈를 너무 잘하는구나" "남한산성체험극을 집중해서 들었나보다"라고 인조왕이 칭찬해주셨어요 헤헤
신난다 상품권이다
부모님이 정성들여 싸주신 맛있는 김밥을 잘 먹었어요
도시락을 먹고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도 하고 있어요
우리들의 가을소풍
남한산성 그 날은
즐겁고 신나는 하루였어요🎵🎶
📒소현세자
조선의 제16대 왕 인조의 맏아들.
소현세자는 1612년(광해군 4) 음력 정월 4일에 태어나 1625년(인조 3) 정월에 왕세자(王世子)로 봉해졌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났을 때에는 이원익(李元翼), 신흠(申欽)과 함께 전주(全州)에 내려가 분조(分朝)의 업무를 담당하기 위해 무군사(撫軍司)를 설치했고, 전쟁이 끝나자 강화도로 피신했던 인조를 호위해 한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해 12월 참의(參議) 강석기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이했다. 1635년(인조 13) 모친인 인열왕후가 죽어 상을 치르다가,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인조와 함께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 그리고 이듬해 2월 세자빈과 함께 인질이 되어 청나라의 수도였던 성경[盛京, 지금의 선양(瀋陽)]으로 끌려갔다. 그 뒤 소현세자는 1640년(인조 18)과 1644년(인조 22) 봄에 인조의 병문안을 위해 잠시 귀국했을 때를 빼고 9년 동안 청나라에 억류되어 있었다. 1644년 청나라가 산해관(山海關)을 넘어서 명나라의 수도인 베이징[北京]을 점령하자, 그해 가을에는 베이징으로 옮겨졌다가, 1645년(인조 23) 음력 2월에야 억류에서 풀려나 귀국할 수 있었다.
소현세자는 청나라에 인질로 억류되어 있으면서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외교 창구 역할을 했다. 병자호란 당시 조선은 청나라에게 명나라와의 외교관계를 단절하고, 청나라가 명나라를 정벌할 때 지원군을 파병하겠다는 등의 약속을 하였으나, 오히려 친명배청의식이 강화되어 청나라와 자주 외교적 마찰을 빚었다. 소현세자는 청나라 황제의 행사와 사냥 등에 참여하며 청나라 고위인사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며, 조선인 포로의 속환문제와 청나라의 조선에 대한 병력 지원요구 등 여러 정치·경제적 현안을 맡아 처리했다. 베이징에 있을 때에는 독일의 예수회 선교사이자 천문학자인 아담 샬(Adam Schall, 1591〜1666)과 교류하며 천구의와 천문서, 천주상 등을 선물로 받기도 했다. 당시 소현세자와 아담 샬이 주고받은 편지 내용은 라틴어로 번역되어 전해지는데, 그 편지에서 소현세자는 서학(西學)의 보급에 강한 의지를 드러내기도 하였다.
하지만 1645년 음력 2월 귀국한 소현세자는 그해 음력 4월 26일에 창경궁(昌慶宮)의 환경전(歡慶殿)에서 갑자기 죽었다. 그리고 고양(高陽)의 소경원(昭慶園)에 매장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소현세자가 병이 갑자기 위독해져서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진원군(珍原君) 이세완(李世完)의 아내가 염습(斂襲)에 참여하고 나와서 '시신이 온통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에서 모두 피를 흘리고 있어서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것 같았다'는 증언을 남겼다는 내용도 기록하고 있다(인조 23년 6월 27일). 소현세자가 청나라에 억류되어 있을 때 포로로 잡혀간 조선 사람들을 모집해 둔전(屯田)을 경작해서 곡식을 쌓아 두고는 그것으로 진기한 물품과 무역을 한 것을 인조가 못마땅하게 여겼고, 인조에게 총애를 받던 소용(昭容) 조씨가 세자와 세자빈을 헐뜯어 소현세자가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소현세자가 죽은 뒤에 인조는 세손(世孫)인 이석철이 있는데도, 소현세자의 동생인 봉림대군(鳳林大君, 제17대 효종)을 세자로 삼았다. 당시 영의정 김류(金瑬) 등 대신들이 반대했는데도 인조는 봉림대군을 세자로 봉했고, 이듬해인 1646년(인조 24)에는 소용 조씨를 저주하고 임금의 음식에 독약을 넣었다는 혐의로 소현세자의 세자빈 강씨를 죽였다. 그리고 1647년(인조 25)에는 소현세자의 세 아들을 모두 제주도로 유배 보냈다. 당시 12세와 8세였던 이석철과 이석린은 이듬해 제주도에서 죽었고, 4세였던 이석견도 효종 때인 1656년(효종 7)에야 유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처럼 인조가 소현세자의 세자빈과 자식들에게도 무자비하게 대한 것으로 미루어볼 때, 소현세자의 갑작스런 죽음에도 인조가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첫댓글 코로나로 인해 소풍도 못가는데, 이렇게 좋은 날~~ 우리나라 역사를 알아가는 좋은 프로그램 만들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가을이 지나가고 있음을 알려주는 남한산성~~ 넘 좋았습니다. 현민이는 활쏘기가 가장 재미있었다고 합니다.
선생님 모두모두 넘넘 고생 많으셨습니다.
어린 학년인데도 힘든기색 없이 오르락내리락 잘도 걸어주어서 고마웠지요 훗날 국가대표 양궁선수로 빛나게 될지도 몰라요
체험학습은 우리아이의 꿈을 만나고 찾게 해주는 의미가 있는것 같습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전례가 없는 코로나 상황속에서 현장체험 학습을 고민하던중 '아 남한산성'을 선생님으로 부터 추천 받고서 바로 이거구나 공감이 갔습니다
차량운행으로 직접 체험은 못했지만 사진과 글을 통해 아이들의 표정을 보고 역사의 산교육은 바로 이런 거구나 마음 깊이 느껴본 하루였습니다.
여기에 천민 서훈남믜 활약상은 우리가 아는 남한산성의 역사를 다시 보게하는 백미였습니다
수고하신 선생님들과 멀리서 봉사 하러온 청소년봉사단원들에게 감사합니다
소풍을 멈춘 상태에서 부모님이 싸주신 도시락과 간식도 아이들에게는 '백미'였습니다 ㅎ 체험시간 중간중간 "나의 양식' 을 떠올리며
''내가 ㅇㅇ 싸왔는데 나눠먹을래 ?"
"응 고마워 " 주고받으며 흐뭇해하는 아이들 얼굴이 떠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