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절 추라이 ( Chu Lai ) 지역 작전
1) 작전간 있었던 일화및 애로사항
2) 여단작전참모 로 근무하는 동안 수행한 작전
* 여단본부 작전참모 이건우 중령 *
청룡부대가 최초의 전투부대로 파월하고 난 다음, 8개월 후인 1966년 6월에가서 1968년 3월에 귀국했어요. 처음에가서 약 4개월 동안은 다낭에있는 미해병 제3상륙사단 사령부에 청룡부대 연락장교로 근무했어요. 그것이 끝난 다음에 66년 10월부터 67년 5월까지 제1대대장으로 근무 했습니다. 그렇게하고 67년 5월부터 68년 3월까지 그러니까 귀국할때까지 작전참모를 했습니다.
작전참모를 했기때문에 사소한 작전까지 다알아야 되겠지만, 기억이 잘안납니다. 그중에서 추라이 지역에서 실시한 주요작전은 용머리(용두) 1,2,3.5호 작전, 화마이뎁람 1,2호작전, 용화작전, 용로작전, 추수보호작전 등의 작전이 1967년 7월부터 12월까지 실시되었습니다.
이같은 작전중에서 특히 기억이 나는 작전은 내가 참모가 되자마자 한2~3개월 후에 실시한 용머리 2호작전(1967, 7, 15~17) 입니다. 이작전은 바딴간 반도부근으로 적의 보급선이 무기와 탄약을 싣고 들어오는것을 우리가 사전에 탐지하여 그보급선을 나포하는 작전 이었습니다.
그리고 추라이 지역이 월남군 제1군단 지역으로 적의 활동이 가장심한 지역이었는데, 그때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를 위한 작전 즉 화마이뎁람(아름다운 매화) 작전이라고 2번을 했습니다.
당시 지역내에서 적의 반대활동이 심했습니다만, 단시 월남 제1군단장과 협조가 잘되어서 전국에서 가장 좋은 투표율을 보였습니다. 그때 88% 인가 그렇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작전참모를 마칠무렵에 청룡부대가 추라이지역으로 부터 다낭남쪽 약12~15km 되는 호이안 전술지역으로 이동하는 비룡작전입니다.
그때가 마침 소위 말하는 구정사태로 여단선발대인 1개 대대를 보내고, 이어서 여단장을 비롯한 여단 본부가 이동하자마자 구정사태가 벌어졌습니다. 따라서 그때는 청룡부대가 완전히 이동을 완료하지 못한 상태에서 구정사태를 맞았기 때문에 상당히 고전을 했습니다만, 작전을 잘했기 때문에 큰피해는 없이 무사히 작전을 끝냈습니다.
용머리2호작전시 중공어선을 가장해서 무기를 싣고 입항하는 철선을 나포하고, 거기에 실렸던 무기를 1.200 여정이나 노획을 했는데, 그것은 운이 좋았습니다. 그이틀전에 아까말한 Third MAP (미 제3상륙 군 사령부) 에서 지휘관 회의가 있었습니다.
이때회의는 미 해병 제1사단장과 제3사단장, 그리고 청룡부대장이 참가하는 지휘관 회의 였는데, 그회의 마치고 돌아오기 위해서 헬리곱터를 타는데, 갑자기 Third MAP 정보참모가 뛰어왔습니다.
그리고서는 이사람이 하는말이 "오늘이나 내일사이에 적의 철선이 많은 장비를 싣고 남하하여 청룡 부대가 있는지역으로 상륙한다는 정보가 있다. 앞으로 구체적인 정보가 오는데로 수시로 알려줄테 니까, 이철선을 청룡부대에서 잡아달라"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얘기를 듣고, 헬리곱터를 타고 여단본부로 돌아오니까 계속해서 정보가 내려왔습니다. 그때 이배는 미해군에 의해서 포착되어 추격을 당하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적의 보급선(철선) 은 알지 못하는 사이 에 추격을 당하고 있는것입니다.
그러나 적의 상륙 예상지점을 정확히 파악하지못한 가운데 야간이 되었습니다. 그때 여단에서는 적의 예상상륙 지점에 대해 심도깊은 연구를 한결과 바딴간 반도로 상륙할것으로 판단하고, 이미 병력을 배치 해두고 있었습니다.
당시 바딴간 반도는 내륙까지 강으로 연결되어 있어 옛날부터 적의 해상 보급루트 였습니다. 그리고 적의 보급선은 7월 14일밤, 우리가 에상했던대로 바딴간 반도를 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15일 심야에 미 해군은 이배가 바딴간 반도로 상륙할것이 확실시 되자 이제까지의 은밀한 추적 에서 강압적인 추적으로 전환하여 포격을 가하면서 추격을 계속했습니다.
그러자 적의 보급선이 다시 도주하기 위해 선수를 돌리는 순간 청룡부대의 포격이 집중되어 조그마한 암초에 좌초시켰습니다.
이어서 날이 밝기를 기다려 청룡부대의 특공대와 제1대대가 적의 선박을 수색하여 무기를 노획하게 된것입니다. 그때까지도 그배는 불타 폭발하고 있는데, 우리요원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그배를 수색 했던것 입니다.
그리고 7월 19일에는 테로이 매복전투가 있었는데요. 테로이 (The Loi) 매복전투는 용머리 2호 작전이 7월 15일~ 17일까지 있었는데, 바로뒤이어 7월 19일 제1대대의 1개분대가 용머리 2호작전에 격침된 선박으로 부터 무기를 인수하기 위해 왔다가 복귀하는 월맹군 1개중대를 1번도로 좌측의 The Loi(4) 에서 격멸시킨 전투입니다.
테로이 지역은 바로 청룡부대의 여단본부, 제1대대본부, 그리고 남쪽에 쾅나이(Quang Ngai) 성의 성청 소재지인 쾅나이 와 연결된 1번도로의 좌측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제가 바로 제1대대장을 지냈기때문에 제1대대지역을 잘아는데, 아까 말씀한바와 마찬가지로 바딴간 반도가 적의 해상 수송루트입니다.
이곳에서 암암리에 어선을 가장한 적의 정크선이 야간에 보급물자를 싣고 바딴간 반도의 내륙으로 흐르는 Song Tra Khuc(江) 을 따라 내륙으로 이어지는 보급루트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야간에는 어떤 고정된 시간에 달빛을 이용하여 거의 매일같이 보급물자를 수송하는 대열이 바딴간 으로 부터 내륙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추라이로 이동하기 전까지는 그같은 보급추진이 거의 매일같이 있었는데, 우리 가 추라이 지역을 평정하다시피 하자, 그들의 보급활동은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그래서 아까말한 바딴간 반도의 용머리 2호작전과 테로이 매복전투는 연결된 작전이라고 볼수있어요. 왜냐하면 월맹군이 바딴간 반도에 보급선이 무사히 도착할것으로 판단하고, 그보급품을 내륙으로 수송하기 위한 하나의 스케줄로 가지고 있었다고 볼수있지요.
그래서 그날도 하나의 예정된 루트를 따라서 적의 병력이 이동할것으로 판단했지요. 이때문에 매복 경험이 많은 분대장과 분대원으로 편성해서 평시보다 강화된 매복을 했습니다.
그러다 밤늦게 이상한 물체들이 움직이는 것을 방견해 확인해 보니까 틀림없이 보급대열 입니다. 그래서 적들을 충분히 유인해 가지고, 1개분대의 병력으로 1개중대의 병력에 대해 일제히 사격함 으로써 적을 소탕 섬멸했습니다.
다음에 용화작전에 대해서는, 1967년 9월 5일부터 10월 30일까지 장장 55일간의 용화작전이 실시된 바딴간 반도 지역은 미국이 적극적으로 월남전에 개입하겠다고 발표한후 최초로 미 해병 제3사단을 상륙시킨 곳입니다.
그때 베트콩의 완강한 저항을 받아 많은 피해를 냈어요. 그래서 미해병의 상륙작전 교범에 상륙작전시 전과및 피해 비율을 새로 연구를 해야 되겠다는 검토안이 나왔습니다.
그이유는 바딴 간반도의 상륙작전이 정규전하의 상륙작전 보다도 더많은 피해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바딴간 반도는 그정도로 적으로 부터 많은 피해를 받고 격전했던 지역입니다.
그후 우리 청룡부대가 바딴간 반도 지역을 맡았는데, 청룡부대가 이지역을 인수한후로 내가 대대장 할때만 해도 두차례의 평정작전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지역은 해안이 너무가깝고, 보급루트가 멀기 때문에 우리가 많은 병력을 주둔시킬수 없었어요.
그래서 작전하고서 다시부대기지 로 돌아오고 그랬는데, 어려운 작전을 해서 소탕했지만 작전후 얼마 있으면 다시 적의 지역이 됩니다. 그와같이 적의 보급루트이고 중요한 지역이고, 베트콩 활동에 용이한 지역이기 때문에 내가 대대장 끝나고 난 다음, 나하고 교대한 대대장이 여단장의 지시에 의해서 새로 투입된 제5대대와 함께 실시한 바딴간 반도 평정작전이 용화작전 입니다.
그런데 작전개요를 보면 아시겠지만 그작전은 1개대대가 1개중대를 증원받아 가지고 작전하게 되는데 작전할때마다 같은지역에 상이한 부대가 들어가서 정찰및 탐색을 실시합니다.
그러면 지난번 작전때에는 없었던 동굴과 지난번 작전때에는 발견하지못한 새로운 적의 보급소 등이 새로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동굴작전을 해서 그당시 제2중대가 동굴작전에서 박격포 81mm, 60mm 를 위시해서 많은 전과를 올렸지요.
제2중대장이 직접 동굴에 들어가서 작전을 하고 그랬는데, 중대장하고 소대장들이 그작전이 끝난 다음 에 무공훈장을 받고, 월남정부로 부터 훈장을 받고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다음에 실시한 용로작전은 1967년 11월 10일부터 12월 21일까지 여단책임지역내에서 추수보호작전 과 함께 실시된 작전입니다. 당시 청룡부대는 비밀리에 호이안(Hoi An) 지역으로 이동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에따라 여단은 차기 호이안 지역의 작전을 위해 그동안의 작전에 지친 장병들의 휴양과 지역내에서 작전을 마무리하는 한편 주민들과 유대를 강화한다는 3가지의 목적으로 용로작전을 실시하게 되었습 니다.
작전명칭이 용로작전인 것은 추라이 해변에 휴양소를 마련하여, 각부대들이 중대단위로 이동하여 교대로 휴양을 했는데, 용이 먼길을 간다는 뜻으로 용로작전으로 명명 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청룡부대는 용로작전을 마치면서 제3대대를 선두로 하여 12월 21일과 22일 양일간에 걸쳐 해상과 공중기동으로 호이안지역으로 이동하게 되었지요.
작전참모로 근무하는동안 일화, 또는 그동안 밝히지 못한 사항에 대해 얘기할것은 상당히 많습니다. 그중에서 용머리 2호작전때 일로 "적의 철선이 바딴간 반도로 올것이다" 하는 정보를 입수한후 그작전이 끝날때까지 근 3일동안 여단장과 참모요원들이 작전을 계획하고 실시했습니다.
이때 헬리곱터 지원이 곤란하다는 미 해병대와 언쟁을 하다시피 하면서 지원을 받아 작전을 수행하는 동안에 괴로움은 이루말할수 없었는데, 모든장병이 성공적으로 수행해 준것이 지금도 자랑스럽게 기억에 남습니다.
그리고 그때의 전과를 차지하기 위하여 청룡부대와 미 해병대, 그리고 월남의 해병대까지 가세하여 경쟁이 치열했었습니다. 특히 우리가 철선을 완전히 포위하고, 청룡부대의 특공대가 배에올라가서 적재된 무기를 노획 했는데도, 월남의 해군들은 이철선을 자기네 들이 나포했다고 하기위해서 그 지역으로 들어오려고 그랬어요.
그때 우리는 청룡부대의 특공대에 의해서 배를 완전하게 포위했고, 거기에 있던 모든 무기를 특공대 손에 의해서 배로부터 해안으로 운반한후 다시 해안에서 청룡부대 본부까지 운반되었습니다. 그후 월남정부에서는 이 전과를 높이 찬양하면서도 이전과의 반은 자기네들에게 달라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작전참모로 근무하는 동안 작전하기 힘들었던 일들은 지휘체제에 관한 일입니다. 청룡부대에는 맹호나 백마부대 등 육군부대와 달리 미 해병 제3상륙군 사령부의 작전지역에 위치하고 있고 그들로 부터 많은 지원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작전수행은 주월사의 통제를 받아 수행하게 됩니다. 경우에 따라 미 Third MAP 에서 청룡부대 에 직접 작전을 요구하는 경우에도 주월사의 승인을 받아 작전을 수행합니다.
이과정에서 미 Third MAP 와 청룡부대, 주월사와 청룡부대 사이에서 미묘한 차이점 같은것이 있었 습니다. 또한 Third MAP 는 한국해병대의 용맹성을 믿고 우리의 능력을 초과하는 과도한 작전을 요구해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청룡부대가 너무 용감한 작전을 해왔기때문에 더많은 작전을 요구당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작전참모 로서는 그것이 오히려 영광스러운 일이지만, 우리의 능력과 맞추어 작전하지 못한경우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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