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충일에 5/ 김순향
1. 현충일 아침이다. 초여름 녹색바람이 산드럽다. 일어나자마자 태극기부터 찾아 조기를 달고 손녀에게 문자를 보낸다.
“아빠 도움을 받아서 동생과 함께 조기를 달아 보렴!”
2. 할 일을 다 한 듯 기분이 가뿐해서 산책을 나선다. 산책이래야 아파트 단지 내를 한 바퀴 도는 것이지만, 오늘은 동별로 태극기가 게양 되어있는 수를 꼼꼼히 확인한다. 내 기분도 태극기가 펄럭이는 세대의 숫자에 따라 좌지우지되기도 한다.
3. 이럴 수가 있을까! 칠백 세대가 살고 있는 큰 동네에서 조기를 단 집이 칠십 세대가 되지 않는다. 어떤 동에는 태극기가 대여섯 집만 달려있다. 아쉬운 마음에 관리실에 조기를 달 수 있도록 홍보 방송을 해달라고 부탁한다.
4. 각 행정기관에서도 국군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공식적인 행사를 한다. 그러나 드러나는 행사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나라를 위해 싸우다 전쟁터에서 산화된 국군용사들의 고마움을 국민들 가슴에 심어주는 것 또한 중요한 일이다. 현충일 전날이나 아침에라도 조기 달기를 홍보해 주었으면’하는 바람은 나만의 욕심이었을까!
5. 내가 특히 현충일 조기를 다는 일에 관심을 갖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현충원이나 국군묘지에 안장되어 세상에 왔던 존재를 알리기라도 하는 국군들은 그나마 나은 셈이다. 그들의 영혼은 찾아주는 이들이 있어 위로라도 받는다. 그러나 흔적 없이 사라져 간 수많은 무명 인사와 용사들의 넋을 위로해 줄 방법은 오로지 조기 게양과 일 분간 울리는 사이렌 소리, 그리고 묵념뿐이다.
6. 그 무명 인사 속엔 내 피붙이도 있어 현충일엔 마음이 더욱 숙연해진다. 그리하여 나는 현충일 조기 게양에 정성을 다했고 가까운 이들에게도 조기 달기를 권했다. 그러나 오늘 우리 동네만 봐도 몇몇 사람만 현충일의 의미를 되새기고 있을 뿐, 그저 하루 노는 날로 퇴색되고 있어 안타깝다.
7. 요즈음은 학교에서도 경축일이나 현충일 의식을 하지 않으니 자라는 세대들이 의식 노래를 알 턱이 없다. 게다가 요즈음 현충일에 다는 조기에 대해 반발을 보이는 측도 있다. 북한이 주적이라 알고 살아온 사람과 주적이 아니라는 교육을 받고 있는 사람들 간의 간극 차는 크다.
8. 한국 전쟁을 겪은 나는 지금의 내 나라가 더없이 소중하고 자랑스럽다. 북에서 내려온 공산당은 내 외가를 풍비박산을 내버렸다. 살림뿐 아니라 둘째와 넷째 외삼촌까지 끌고 가버렸다. 두 분의 생사는 아무리 알아내려고 애를 써도 알 수가 없었다. 지금은 연세로 보아 타계했으리라 짐작만 하고 있을 뿐이다. 삭정이 빈 가슴으로 평생을 살았을 두 외숙모와 졸지에 두 아들을 잃은 내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의 이지러진 삶을 보상받을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더구나 친정을 생각하며 흘린 어머니의 눈물이 지금도 내 가슴에 흥건히 남아있는데, 어찌 내가 북한을 주적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9. 햇빛이 사위어 가는 저녁 무렵 조기를 내린다. 그까짓 국기가 뭐라고, 국기를 달지 않는다고 애국심이 희석되느냐고 항변하는 사람도 있을게다. 그러나 그냥 단순히 조기를 다는 것이 목적은 아니지 않은가? 자라는 아이들과 함께 조기를 달면서 자연스레 현충일에 대한 교육이 이루어지고, 대를 이어 훈습 되어갈 수 있음을 모르는 사람이 많은 것 같아 몹시 안타깝다.
10. 시원한 바람을 쐬러 방천둑에 나가니 노란 금계국과 개망초가 지천이다. 손에 들려있는 까만 수첩을 내려다본다. 우리 아파트 동별 국기게양 기록이다. 오래전 이사 와서부터 올해 현충일까지의 태극기가 달린 세대의 숫자가 적혀있다. 경축일과 현충일에 태극기를 다는 것이 나라 사랑이라 생각하고 혼자서 용을 쓰던 흔적이다. 시간 흐를수록 휘날리는 태극기 수가 줄어들었고 앞으로 더 줄어들 것이다. 특히 오늘은 처참하다. 거칠게 밀려오는 파도를 막을 재간이 없어 이젠 나도 놓을 수밖에 없음을 깨닫는다.
11. 흔적을 지우며 떠내려가는 강물을 배웅한다. 강물은 물결치는 대로 살라고 내게 교훈을 준다. 내년에도 현충일은 왔다가 잘 지나갈 것이고 나도 무심히 평범한 일상을 이어가 갈 것이다. 그래도 귀에는 아직 현충일 노래가 쟁쟁거린다.
겨레와 나라 위해 목숨을 바치니
그 충성 영원히 조국을 지키네
조국의 산하여 용사를 잠재우소서
충혼은 영원히 겨레 가슴에
님들은 불멸하는 민족혼의 상징
날이 갈수록 아아 그 충성 새로워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