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쪽 바다 포구 마을 강진에 이르러 먼저 찾아갔던 곳이 북산 산자락에 자리한 김영랑 생가였다. 겨울 햇살에 엷은 봄빛이 섞여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는 맑은 날이었다. 「전라남도 지방 문화재 89호 영랑 김윤식 생가」라는 군덕지가 없는 깨끗한 표시석처럼 일대는 정갈한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었다.
대문 앞 넓은 뜰에 서 있는 그의 시비 앞에 서서 (자연석에 그의「모란이 피기까지는」이 새겨져 있었다) 조용히 전문을 읊는다. "5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든 날/ 떠러저 누은 꼿입마져 시드러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최도 업서지고/ 뻐처 오르든 내 보람 서운케 문허 졌느니." 그 동안 가슴 밑바닥 어딘가에 묻혀 있었던 찡한 것이 되살아났다.
피 같은 것인지 모른다. 다시 한번 끝까지 읽지 못하고 얼른 고개를 돌리고 만다. 햇빛을 퉁기고 있는 흙을 밟으며 대문을 향한다. 쇠 문고리가 달려 있는 묵직한 나무대문을 밀 때 오랜만에 나무 삐걱이는 소리를 듣고 어릴 적 대구 남산동 집 대문을 밀 때 듣던 정다운 시간이 되살아 나는 것을 느꼈다.
복원에 관계한 분들 알뜰한 마음씨를 읽을 수 있었다. (김영랑 시인이 대구와 인연을 가졌던 것은 내가 태어나기 약 13년 전의 일이다. 그가 16세 나던 1919년 희문의숙 3학년을 중퇴한 그는 구두 밑바닥에 독립선언문을 숨기고 고향에 나타나 강진에서 3·1 독립 운동을 모의한 일이 발각되어 영랑은 붉은 벽돌 담장이 겹으로 쌓여 있던 대구 형무소에서 6개월간 복역하였던 것이다.)
이 시인이 태어나고 자랐던 아담한 몸채는 초록색 대숲에 아늑하게 안겨 있었다. 뒤로 돌아가서 탄탄한 꽃망울을 달고 있는 동백나무를 바라본다. 둥치 굵기로 미루어 제법 나이를 먹은 듯하다. 그의 「마당앞 맑은 새암을」에 나오는 우물은 덮개로 가려져 있어서 번득이고 있을 물 비늘은 내려다 볼 수 없었다. 어린 영랑이 그의 얼굴을 비추어 보기도 했었을 샘. 물 거울이 되어 있는 샘 바닥을 향하여 소리를 지르면 메아리처럼 윙윙 울리어 오던 내 어린 시절의 샘을 겹쳐 볼 수밖에 없었다. 돌을 던지면 흐트러지던 내 모습. 벌써 65년 전의 샘.
모란 나무는 중국 서부 원산이다. 우리 나라에 도입된 목본 모란은 중국에서 들어 온 것이다.『삼국유사』에 의하면 모란이 우리 나라에 들어온 것은 신라 선덕여왕 때의 일이다. 그것은 당 태종이 보낸 그림으로 홍색, 보라색, 그리고 흰색으로 그린 것으로 이와 함께 모란 씨 3 대가 왔던 것이다. 선덕여왕 즉위 만 2년만에 분황사가 창건되고 그 경내에 삼룡어변정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우물이 있다.
경주 분황사에 들리면 나는 전탑 옆에 서서 모란을 머리 속에 그려보는 버릇이 있다. 이 절에 모란이 없기 때문에 생긴 버릇이다. 내가 그리는 것은 선덕여왕이 궁성 뜰에 심었던 상상의 모란이다. 향기가 없다는 그 모란이 뜻밖에도 전라도 강진 태생의 한 시인에 의하여 시의 향기로 아름답게 형상화 된 것은 또 무슨 인연인지 모르겠다.
미당 서정주는 이 선배 시인의 시를 두고 "유음이 살아 비록 애상일지라도 답답하지 않고 그 영롱성이 마치 찬란한 색감을 느끼게 할 정도"라고 상찬 했던 일은 이미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즉 기들리고 잇슬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미당은 영랑 시에 흐르고 있는 가락에서 빛깔을 느꼈던 것이다. 그의 가슴에서 뚝뚝 떨어졌을 모란 꽃잎은 과연 어떤 빛깔이었을까
영랑이 한국전쟁때 복부에 포탄 파편을 맞고 47세의 아까운 나이로 타계했던 해 청마 유치환은 국군 제 3사단 종군시인으로 동해안을 따라 북상하고 있었다. 그의 시집『보병과 더불어』(문예사 1951)에는 또 다른 모란이 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시집에는 군복을 입고 완장을 찬 그가 38선이란 간판을 배경으로 앉아 있는 그의 사진이 수록되어 있다. 할로모자를 쓰고 있다. 청마가 보았던 모란은 붉은 색 모란이다. 청마가 영덕에서 쓴 「홍모란 - 영덕에서-」란 작품의 마지막 연을 이 자리서 인용한다. - 이제 의무대의 다 쓰러진 문전으로/ 떠 메여 온 한 촌부의 그 어깨진/ 저녁 으스름에/ 홍모란처럼 번져 난 죽지의 선지피! 청마가 5살 위인 모란의 시인이 9·28 수복때 서울에서 포탄 파편을 맞아 숨졌다(9월29일)는 사실을 알았다면 「홍모란」이란 그의 시가 어떤 모습을 보였을까.
영랑 생가를 물러나서 백련사를 찾아가며 나는 지상에서 사라지고 만 청마 생가를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그의 생가는 도로확장에 자취 없이 사라지고, 그 유약국 집도 남의 손에 재작년에 개조하여 여인숙이 되어 버려 옛모습을 찾아 볼 수 없었다"는 것이 작가 김용성이 르포의 증인들 - 권재순(부인), 유치진(친형), 유치선(누이) 등 - 한테서 들었던 기록이다(한국일보 연재 시리즈·『한국 현대 문학사 탐방』, 국민서관, 1973). 유서 있는 자리들이 개발이란 이름으로 지워지고 마는 현실 가운데서 영랑 김윤식의 생가가 알뜰하게 복원 유지되고 있는 사실은 본받을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이 도심지에서 떨어져 있는 자연 조건 때문인지 또는 이 고장 사람들 심성 때문인지는 알 길이 없다.
언젠가 순천 선암사 입구 도로 한가운데 서 있는 한 그루 나무를 위하여 키 작은 나무 말뚝에 끈을 감은 울을 만들어 길이 두 갈래로 갈라지게 한 것을 보고 고개를 끄덕인 적이 있다. 생명에 대한 사랑의 표현의 한 아름다운 형태를 보고 나는 흐뭇했었다. 길을 위하여 나무를 희생시키지 않았던 것이다. 거꾸로 나무를 위하여 길을 희생시킨 것이다. 돌로 쌓은 아치형 홍교(승선교)를 지나도 숲은 계곡을 떠나지 못하고 따라온다. 이따금 나무 둥치에 나무 이름을 써놓은 예쁜 이름표가 달려 있다. 예를 들면 「말채나무 - 층층나무과 - Cornus walteri Wanger - 낙엽 활엽 교목으로 주로 계곡의 숲 속에 자란다. 용도: 목재는 재질이 좋아 가구재, 무늬목, 합판재로 사용. 꽃과 열매가 아름다워 공원에 식재할 만한 수종이고 잎은 지사제로 사용한다」.
지금 나는 휴대용 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돋보기로 읽으며 그대로 소개할 따름이다. 순천시라는 인쇄가 마크와 함께 끝에 붙어 있다. 범종루에서 1백 미터 남짓한 곳에서 산길이 꺾어지는 모서리에 서 있는 한 나무가 달고 있는 명찰이다. 말채나무라 - 앞으로도 이런 나무를 보면 이름을 불러 줄 수 있을까. 이런 정성에 보답이라도 하듯 나는 순천시의 이 소개에서 빠진 부분을 심심풀이로 조사했다. 말채나무 흰 꽃은 6월에 핀다고 한다. 모란이 필 때와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그 이름표가 나무 잎새들이 싱싱한 연두색 옷을 벗고 초록색 깊이를 더할 무렵 다시 이 고장을 찾아오라는 무언의 숙제 같았다.
파스칼의 섬세한 정신(esprit de finnesse)이란 감성적 인식을 말하고 있다. 나는 이번 남도 나들에서 그 실제적 표현을 만났던 것이다. 해남의 숙소에서 수원에 살고 있는 벗 박성룡 시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의 고향이 해남 땅 끝 마을이란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는 그의 출생지가 토말비가 있는 위도상의 땅 끝이 아니라 해남반도의 최남단 화원(花源) 반도의 남쪽 땅 끝으로 그 마을이 실제적인 땅끝이라 말했다. 그것도 하나의 발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