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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중학교 2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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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변/세계소식 스크랩 이승만 2부작 - 1부
임경미 추천 0 조회 174 12.02.22 00:09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한국사 傳>

 

이승만 2부작 - 1부


 

“대한민국 60년. 그 새로운 역사의 출발을 주도했던 초대 대통령은 이승만이었습니다. 1948년 그때 대한민국은 왜 이승만을 선택했을까요. 당시 그의 나이 74세, 조선말에 태어나 근대화를 열망했고 일제식민시대 대부분을 미국에서 보내며 독립운동을 펼쳤던 이승만, 그는 어떻게 대한민국의 수장이 될 수 있었을까요. 격동의 우리 현대사 그 한가운데에 이승만이 있습니다.”

 

 

 

1960년 4월. 부정선거 규탄으로 시작된 시위가 급기야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며 전국적으로 번져 나가고 있었다.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에겐 잊을 수 없는 날이 밝았다. 이날은 대통령으로서 근무한 마지막 날이다. 긴박했던 이날 경무대 상황이 미국외교문서(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RES 1952~1960)에 자세히 기록돼 있다.


1960년 4월 26일 오전 10시 35분

주미대사 매카나기와 UN군 사령관 맥루더가 이승만 대통령을 찾아와 90분간 긴박한 대화를 나누었다.


“지금 서울의 상황은 폭발 직전의 상황입니다. 각하께서(하야에 대한) 입장을 명확히 하셔야 합니다.”  傳 : 미국 외교문서


주미대사 매카나기(Walter P. McConaughy)는 강경한 자세로 하야에 대한 결단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대로 주저하시면 한국뿐만 아니라 우리 미국의 이해관계도 위험해 질 수 있습니다. 빨리 결단을 내리십시오.”


그러나 대화는 90분간 계속됐다. 결국 매카나기는 간곡한 어조로 이승만 대통령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좋습니다. 각하, 당신은 한국의 진정한 國父(국부) 아닙니까. 평생 동안 한국인들의 존경을 받아오신 분 아닙니까. 각하는 한국의 조지 워싱턴과 같은 존재입니다.”

 

한국의 진정한 국부. 그것은 이승만에게 보내는 최고의 찬사였다. 무거운 침묵 끝에 이승만 대통령이 입을 열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그 당시의 말.

“내가 젊었을 때에는 우리 국민들을 잘 알고 이해해 왔습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1)


 

 

“이날 주미대사 매카나기의 말처럼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진정한 아버지로 불려 왔습니다. 그리고 그의 젊은 시절은 한국의 민중들과 함께 해온 너무도 특별한 역사이기도 했습니다.  조선의 종말과 식민지 시대 그리고 대한민국이 탄생되는 우리의 현대사와 괘를 같이 해온 이승만. 그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서울 부암동의 우남관. 이승만의 귀중한 자료들이 보관되어 있다.  

 

“아주 귀중한 사진입니다. 이 사진을 보게 되면 여기 갓을 쓰고 있는 한분 계신데 바로 이분이 이 그룹에 우두머리 되는 청년 이승만이고…….” 

 

 

 

 

 


 

이승만이 한성 감옥에서 찍은 사진. 이승만은 1899년 근대화를 부르짖다 조선의 감옥에 투옥된다.

 

“이승만 박사는 다른 많은 정치범 중에서도 가장 죄질이 나쁜 죄수로 취급돼 가지고 중죄수 복을 입고 있었습니다.”


이승만은 일반 죄수가 아니었다. 그는 사형수였다. 최초로 공개되는 우남관의 이승만 문서 수장고.


 

“보시다시피 이방은 사방이 강철로 에워싸여진 방인데 이승만 대통령의 문서를 보관하기 위해서 일부러 따로 그 목적으로 준비한 방입니다.”

 

이곳은 대통령 재임시절 행해진 각종 외교문서 등 기록물 십오만여 쪽과 수백 장에 달하는 사진, 집필 원고와 편지들이 보관돼 있다.


“그중 제일 먼저 제가 소개해 드리고 싶은 것은 영어 성경입니다. 이 영어 성경은 이렇게 작은 손에 쥘 만큼 작은 성경인데 여기에 이제 설명이 있는데 ‘To SyngMan Rhee’라 적여 있다. 그때는  ‘Brother 이승만’ 이라고 적여 놓고…….”

 

1903년 한성감옥. 청년투사 이승만. 만민공동회를 주도하며 고종임금에게 반기를 든 대가로 그는 사형수가 되었다. 그리고 이때 이승만은 나무 형틀과 족쇄를 찬 체로 이 영어 성경책을 읽어 나갔다. 서양선교사가 보내준 이 성경은 이승만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언제 끌려 나가 사형이 집행될지 모르는 극도의 긴장 속에서 성경을 접한 그는 기독교로 개종했다.


영어공부는 사형수에서 일반 정치범으로 감형된 후에도 계속됐다. 이승만이 일생 중에서 가장 열심히 공부한 것이 이때였다. 그의 영어 공부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케 하는 자료 하나가 우남관에 보관돼 있다.

 

“이것은 어떤 자료입니까?”

“예, 아주 깜짝 놀랄만한 아주 귀중한 자료입니다. 이것은 청년 이승만, 이승만 박사가 감옥에 있을 때 심심풀이로 영한사전을 만들었습니다. 그 원고가 이렇게 남아 있습니다.”


이승만이 만들었던 영어사전. 이것이 완성되었다면 국내 최초로 기록되었을 사전이다. 식민지 조선의 청년 이승만을 국제무대로 이끄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영어 실력은 이때 이렇게 형성됐다.

 

유영익 연세대 석좌교수.

“각종 영어책을 많이 읽었어요. 영어책과 잡지를 읽으면서 좋은 영어 표현이 있으면 한문 공부할 때 외듯이 다 외웠어요. 그러면서 자기는 한국에서 영어의 박사, 최고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이 영한사전 작업을 시작한 겁니다.” 

 

1903년에 들어서자, 이승만은 한성 감옥에 유명인사가 돼 있었다. 동료 죄수는 물론 간수들 까지 40여명을 기독교로 개종 시켰고 감옥에서 도서관을 만들어 한글과 영어를 가르치며 많은 개화 인사를 길러 냈다. 이승만이 품은 개화, 서구화에 대한 신념은 감옥에서 집필한 독립정신에 잘 나타나 있다.


“학문을 넓히며 교화를 힘쓰고… 각자가 자기의 지혜와 힘으로 강해져서 하나씩 떼어 놓아도 다 제힘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傳 : 독립정신 중에서


총 52편의 논설에서 이승만은 기독교 정신과 서양의 정치제도 그리고 미국의 역할에 주목했다. 1904년 8월 예정에 없던 특사 조처로 이승만은 감옥에서 풀려난다. 5년 9개월만의 일이었다. 이때는 러일전쟁 발발직후 일본이 대륙 침략에 야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본격적으로 조선 침략의 수순을 밟고 있던 때였다. 출옥하자마자 이승만은 새로운 계획을 실행에 옮긴다. 부모와 가족들을 남겨두고 미국행을 결심한 것이다.  

 

 

뛰어난 영어실력을 갖춘 조선 근대화의 젊은 지도자 이승만에게 미국은 당연한 선택이었다.


“어떤 자료입니까?”

“하버드라고 돼 있습니다. 하버드 대학을 다니실 때 이런 기억에 남을 중요한 자료들을 사진과 더불어 보관하기 위해서 샀던 책인데 그 속에 보게 되면 여러 가지가 들어 있습니다.”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미국 생활을 시작한 이승만은 조지 워싱턴 대학과 하버드, 프린스턴 대학에서 공부하며 당대 최고의 엘리트로 성장해 나간다.


유영익 연세대 석좌교수

“학사 석사 박사 학위 세 가지를 다 5년 내에 받았어요. 5년 내에 다 받았어요. 그러니까 동양사람 중에 5년 동안에 학사, 석사, 박사를 끊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고 미국 역사에도 미국 사람 중에도 제가 알고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천재적 능력을 가진 미국 박사. 하지만 이승만의 명성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이승만의 오래된 앨범 속에 간직돼 있는 미국 대통령 테오도어 루즈벨트(1901~1909). 이승만은 1905년 그를 공식 면담하므로 정치 지도자로 미국 한인사회 화제의 중심에 서게 된다. 미국 독립의 역사의 현장이었던 필라델피아는 이승만과 특별한 인연이 있는 곳이다. 1919년 국내에서 일어난 삼일운동의 열기는 미국까지 번져 제1차 한인자유대회(4월 14일)가 필라델피아에서 열린다. 미국과 국제사회를 향해 조선의 독립을 외친 이 대회에서 이승만은 조선이 독립하면 기독교 국가 건설과 미국식 민주제를 실시하겠다고 주장한다.


미국각지에서 모여든 한인대표와 유학생 등 150여명이 참가한 이 대회는 2박 3일간 계속 되었다. 그리고 미국 최초의 의회가 열렸던 이곳으로 발길을 돌린다. 미국의 민주주의가 시작된 역사적 현장을 방문한 것이다. 그런데 이날 이승만은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앉았던 의자(Rising Sun Chair)에 앉는다. 독립이후 어떤 국가를 건설할 것인가 논의하던 그때 그가 주목한 것은 대통령의 의자였다.


“이승만이 필라델피아 독립기념관에서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의자에 앉았던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요. 미국 한인 사회에 총망 받는 독립운동가 하지만 이승만의 꿈은 여기에 머무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날 보여준 이승만의 모습 속에는 조지 워싱턴처럼 새 나라에 초대 대통령이 되겠다는 원대한 포부가 담겨 있었습니다.”


“삼십 대에 미국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정치인이 된 이승만이 영구 귀국하기 까지 주된 활동무대였던 것은 하와이였습니다. 당시 미국에서 가장 많이 모여 살았던 하와이에는 이승만에 대한 여러 가지 기억들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프린스턴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이승만은 30여년을 이곳 하와이에서 살았다. 이승만이 살았던 집 근처. 이것은 이승만이 심었다고 알려진 소나무다. 백년도 안 된 사이에 이승만의 소나무는 열대 야자수를 제치고 큰 키를 자랑하며 서 있다. 1920년대 이승만이 살았다는 집. 이승만의 집은 그동안 몇 차례 주인이 바뀌어 지금은 미국인이 살고 있다.

 

당대 최고의 엘리트였던 이승만의 계획. 이승만의 목표는 무엇이었을까? 이승만은 가장 먼저 교육 사업을 시작했다. 한인 이민자들의 자녀를 모아 학교를 세우고 한글과 우리역사, 세계사를 가르쳤다. 그는 수많은 제자를 배출해 낸 교장 선생님이었다.


메리 홍(100세)

“숙희야, 제 이름은 숙희인데 그렇게 저를 부르시며 ‘흰머리 좀 뽑아라’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그 분은 자리에 앉거나 할 때면 늘 손끝을 호호 부는 습관이 있었어요. 항상 그렇게 손가락을 불었죠. 왜 그렇게 손을 호호 부는지 궁금하더라고요.”


홀홀단신 하와이에 들어온 미국 박사 이승만. 베티 김(80세)


“학교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는데요. 갑자기 이승만 박사가 몸을 떨기 시작했어요. 이상하게 손을 떨면서 손가락을 호호 불었어요. 나중에 어머니한데 설명을 들었는데 그분이 감옥에 있을 때 고문을 심하게 받아서 생겨난 행동이라는 걸 알게 됐어요. 그래서 우리는 ‘와 그는 진정한 영웅이구나’라고 생각하고 그를 다르게 봤죠.”


하와이 한인들에게 이승만은 신비로운 존재였다. 근대화를 위해 고문을 받고 사형선거까지 받았다는 투사 이승만 그는 존경과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이승만에 대해 전해줄 이야기가 있다며 나선 이가 있다. 하와이 이민 2세대 로베르타 장이다. 그녀의 집에는 수백 개에 달하는 테이프들이 있다. 15년간 100여명이 넘는 하와이 한인들이 이승만에 대해 증언한 내용을 녹화한 테이프들이다. 현재 증언자들 중 대부분이 이미 사망한 상태 그들은 자신이 직접 만나고 경험했던 이승만을 이야기 했다.


르베르타 장

“모두 70세 이상 된 분들만 인터뷰를 했습니다. 1993년부터 인터뷰를 시작했는데 그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었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기억합니다.”


이승만을 직접 보고 겪었던 하와이 이민 1세대의 증언. 테이프 속에는 충격적인 내용이 담겨져 있다.

  

미니 유 1905년 출생 2006년 사망.

“내가 이승만은 어떻게 아냐고? 그때 내가 어려서 잘은 모르지만….”

“그런데 이승만이 당신 아버지를 죽이려 했다는 걸 어떻게 아시죠?”

“왜냐하면 누군가가 곡괭이를 들고 와서 뒤에서 찍었거든 그래서 병원에 실려 갔지. 다음 날 우리 오빠가 꽃을 팔기 위해서 준비 중이었는데 이번에는 누군가가 뒤에서 다른 무기를 가져와서 공격을 했지. 그래서 두 번이나 병원에 입원 했었어.”

“그게 이승만이 한 거라고 생각하세요.”

“그의 조직원들이 한 짓이지.”

 

찰스 정 1909년 출생 1997년 사망.

“이승만이 나에게 자신의 사제가 되라고 권하면서 맹목적으로 따르라고 말씀하셨어. 그래서 이렇게 대답했지 선생님 제가 어디든지 따르겠습니다. 하지만 맹목적으로 따를 순 없습니다.”


이민 초기 하와이 한인사회에서 벌어진 크고 작은 사건들 속에 이승만이 있었다.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증언자들은 그때 있었던 작은 일들까지 생생하게 기억한다.

 

아인스공 배 1919년 출생 1998년 사망

“내 기억으로는 이승만의 집이 참 아름다웠어. 그 집 마당에서 많이 뛰어놀았지. 나를 부르면서 ‘백순아 백순아 이리와 나하고 놀자’”


그리고 이들에게 이승만은 하와이 한인사회에 분열과 대립의 상징이었다.  

 


  

헤이즐 정 1911년 출생 2004년 사망.

“이승만이 당시 교회를 분열시켜 놓았지. 이승만의 교회 아니면 감리교회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어.”


유원식 1907년 출생 1998년 사망.

“한국 사람들 간의 적대심이 강렬해졌지. 자세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승만과 국민회가 갈라서게 된 거지.”


로베르타 장이 모은 증언과 기록은 초기 이민 세대가 겪은 상처에 대한 이야기다. 하와이 한인사회는 이승만과 함께 시작된 이 상처를 한동안 간직하고 있었다.


“(기록 작업을 통하여) 어떤 결론을 얻게 되었나요?”

“인터뷰와 관련 조사를 하면서 하와이 한인사회가 이승만으로 인해 얼마나 나쁜 영향을 받게 되었는지 알게 되었죠. 그래서 그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이 있어요. 100명 이상 인터뷰를 하였는데 과반 수 이상의 사람들은 이승만이 한인사회에 위험한 인물이었다는 걸 기억하죠. 다들 돌아가셨지만 그 분들은 제가 이 일을 하는 걸 매우 기뻐했어요.” 로베르타 장(75세)


“뜻밖의 놀라운 이야기들입니다. 이 테이프의 내용에 따르면 과거 한인사회가 두 파로 갈라져서 극도로 대립했고 테러까지 벌어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이승만이 있었다고 증언하는데요. 이건 어떻게 된 사연일까요. 그때 하와이에선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요.”


메리 홍 할머니는 하와이 이민 1세대 중 몇 안 되는 생존자 중 한명이다.


“한국 나이 100살이요. 명동 교회 땅에서 (태어)났어요. 그런데 세 살에 부모, 어머니하고 하와이에 왔어요.”


메리 홍이 하와이에 건너온 것은 1912년 일제 점령을 견딜 수 없었던 부친의 선택이었다. 하와이 이민이 시작된 것은 1902년. 102명이 처음 이민선 캘릭호를 탄 뒤 3년 동안 이민 길에 오른 이가 7200여명에 달했다. 이들은 대부분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당 35센트 노동자로 일했다. 그러나 하와이 이민자들은 주권을 잃은 조국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1907년 국민회를 결성해 열성적으로 독립에 나섰다.

 

 

 

안필영 도산 안창호의 아들.

“당시에 한인 이주 노동자들은 한 달에 35달러 씩 벌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 중 상당 액수를 한국의 독립을 위해 기부했던 거죠. 그렇게 국민회가 만들어졌죠. 가입비 10달러, 매년 회비 10달러 등 항상 많은 돈을 기부했어요.”

  

하와이 이민자들은 국민회에 세금처럼 의무금을 납부했다. 국민회는 당시 최대 인력과 최대 자금력을 갖춘 독립운동 조직이었다. 1913년 그 하와이에 독립운동에 큰 뜻을 품은 두 남자가 들어온다. 이승만과 박용만. 두 사람은 한성감옥시절 옥중 동지로 만나 호형호제하던 막역한 관계였다. 박용만은 미국에 들어와 네브라스카 대학을 졸업하고 한인군사조직을 만들었던 독립운동가다. 박용만은 이곳 하와이에서 대조선 국민군단(1914년 창설)2)을 조직했다. 구한말 군인과 하와이 노동자들이 주축이 된 국민군단은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며 밤이면 군사 훈련을 받았다. 기념일엔 시가행진으로 미국인들에게 그 위용을 자랑하기도 했다. 하와이 가할루 지역이 국민군단이 만든 병학교가 있던 곳이다. 국민회의 지원 아래 이들은 일제와 싸워 이길 수 있는 군사력을 길러 내는데 온 힘을 쏟고 있었다.


그러나 이승만과 박용만 그 절친한 관계는 오래 가지 못했다. 이승만이 박용만의 국민군단에 반기를 들고 나선 것이다. 프린스턴 대학의 박사 이승만은 그들의 무장투쟁 노선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당시 이승만은 교육을 통한 인재양성에 주력하고 있었다. 그의 계획은 미국인 같이 국제사회가 인정하는 교양인, 지식인을 길러 내는 것이었다.


이곳 하와이대 신문 자료실에는 당시 이승만의 생각을 알려주는 기사가 남아 있다. 1915년 6월 17일자 호놀룰루 스타불레틴 신문에 기고한 이승만의 글3). 여기에서 그는 스스로 반일이나 반일 감정을 부추기는 일을 하지 않는다고 항변하고 있다.


“우리는 어떤 반일적인 내용도 가르치지 않는다. 다만 보편적인 인류애를 강조할 뿐이다. 이 지역 일본인 신문들은 내가 반일 감정을 일으킨다는 오해를 하지 말길 바란다.”


하와이대 역사학과 최영호 교수

“박용만과 이승만이 개인적인 사이에도 충돌이 있긴 하겠지만, 내가 보기에 가장 큰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독립을 어떻게 쟁취해야 하는가’ 하는 방법에 대해서 이 두 사람이 대표하는 노선이 전혀 다른 것입니다.”


결국 이승만은 하와이 한인사회의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국민회 회장 선출과 자금 사용의 문제를 제기 했고 이 과정에서 국민회 측과 다툼과 논란이 불거졌다. 심지어 테러까지 자행될 정도로 사태는 심각했다.


유원식 1907년 출생 1998년 사망.

“우리 아버진 박용만 지지자였어. 그런데 이승만 지지자들에게 몰려 있었지. 그리고 서로 감정이 격해지면서 위험한 상황이 됐고 우리 가족은 다른 섬으로 도망가야만 했지.”


이렇게 시작된 분열과 대립은 수십 년간 계속 됐으며 하와이 법원에 이승만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소송이 10건이나 벌어졌다.


에드워드 김 1914년 출생 1999년 사망

“아주 끔찍한, 끔찍한 싸움이 있었지. 내가 기억하기로는 이승만이 우리 집에 찾아왔었어. 그리고 우리 아버지를 설득하면서 조직의 대표 자리와 통제권을 넘기라고 했지. 당시 국민회가 안정적인 자금을 가지고 있었거든. 그리고 국민회 대표 자리를 둘러싸고 아주 큰 싸움이 벌어졌지. 이승만의 지지자들이 몰려 왔고 총격까지 발생했어.”

 

 

 A) 출운호 사건이 실린 신한민보

 B) 이승만 관련 법정기록들



 


이 모든 불란은 이승만이 하와이 최대 조직 국민회를 장악하면서 일단락됐다. 이로써 모든 인력과 자금이 이승만에게 집중됐다. 1919년 하와이 이민자들이 국민회에 내는 의무금 증서에 이승만의 사인이 선명하다. 자금을 관리하는 총책임자가 된 것이다. 그리고 1918년 한인 사회에 충격은 준 재판이 열린다. 국민군단을 이끄는 박용만이 미국 법정에 서게 된다. 그는 하와이에 정박 중인 일본군함 이즈모호를 폭파하려 한다는 혐의를 받고 있었다. 이 사건으로 독립을 위해 군사훈련을 하던 국민군단은 결국 해체됐고 박용만은 하와이를 떠났다.


그런데 사건이 일어난 직후 교민신문이었던 신한민보(1918년 6월 27일)는 이 사건의 배후 인물로 이승만을 지목했다. 이승만이 일본군함 이즈모호 폭파 계획을 비난하며 증인으로 나섰다는 것이다. 신한민보는 이승만을 고발하는 동시에 이승만이 법정에서 국민군단을 비난한 내용을 자세하게 보도했다.


메리 홍

“이승만 박사는 항상 분열의 원인이었죠. 그 당시 한인들은 정말 서로 적이었어요. 첫 세대는 말이죠.”

  

클레런스 최 1917년 생

“나의 부모님은 항상 이승만을 집으로 초대하곤 했지. 그는 항상 한국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염려하고 있었어. 그렇게 여러 차례 우리 집에서 이승만을 만나게 된 후 우리는 이승만을 존경하고 따르게 됐지.”


1924년 이승만은 그의 지지자들을 모아 국민회와는 또 다른 동지회라는 단체를 결성했다. 동지회는 총재에게 복종할 의무를 규약으로 삼고 있었고 이승만은 이 동지회의 종신영원총재였다. 동지회는 지금도 하와이에서 명맥을 유지하며 이승만을 최고의 정치가 위대한 영웅으로 기억하고 있다.


김창왕 동지회 회원

“전 세계에서 다시 볼 수 없는 정치가며 외교가며 교육가며 또 종교가예요. 이 박사의 생애를 잘 보면 과연 이런 사람이 다시 전 세계에서 특히 한국 사회에서 다시 나올까. 난 의심스러워요. 왜냐면 그런 분을 찾을 수가 없으니까.”


고영희 동지회 회원

“그는 한국 역사상 최고의 정치가입니다. 이승만 박사가 아니었다면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없을 것입니다. 이승만 박사는 성경책 속의 예수님과 같습니다.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의해 십자가에 박히셨습니다.”


하와이 한인사회를 장악한 이승만은 그의 뜻을 펼치기 시작한다. 1919년에는 워싱턴 구미위원부를 조직하며 각종 국제회의에 참석해 한국의 상황을 알려나갔다.


최영호 하와이 주립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내가 보기에는 이승만이 사람들을 아주 사교와 외교를 정말 잘한 것 같아요. 어디 가나 주요 요직에 있는 인물들을 골라 내 가지고 이 사람들과 접촉해서 그 사람들과 친교를 가져요. 그리고 그 사람들을 조직하는 거예요. 미국 내에서 이승만을 반대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지지하는 사람들을 보면 아주 숭배할 정도예요.”

  

이승만은 1919년 대한민국 공채를 발행4)하기도 했다. 독립이후에 상환한다는 조건이 붙은 공채. 당시로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또한 이승만의 노력으로 미국 체신청이 태극 마크가 들어간 우표5)를 공식 발행하기도 했다. 외교 활동가 이승만, 그의 화려한 이력은 이렇게 만들어져 갔다.


“하와이 한인사회에 분열과 대립이라는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이승만은 독립운동의 조직과 자금을 자신에게 집중시키며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독립은 외교와 독립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 그의 확신이었습니다. 한동안 하와이에 남아 있던 상처는 바로 이런 이승만의 과도한 신념의 결과입니다.”


“그런데 1940년대 접어들면서 한반도 전역에는 은밀하고도 빠르게 이승만이라는 이름이 번져 나갑니다. 태평양 건너 이국 땅 미국에 살고 있는 독립운동가 이승만. 전설처럼 들려오는 그의 소식에 민중들은 설레기 시작했습니다.”


독립기념관에는 1942년에 있었던 이승만의 연설. 그 육성원본이 보존돼 있다.


“나는 이승만입니다. 미국 워싱턴에서 해내, 해외에 산재한 우리 2천 3백만 동포에게 말합니다.”


미일전쟁6)이 발발한 뒤 전쟁 상황을 알려주는 미국의 소리 방송에서 뜻밖에도 이승만의 목소리가 흘러나온 것이다. 멀리 미국에서 전해져온 이승만의 연설은 전설처럼 한반도 민중을 사로잡았다.

  

 

“내가 워싱턴에서 몇몇 동포와 미국 친구 친우들의 도움을 받아 미국 정부와 교섭하는 중이며 우리 임시정부의 승인을 얻을 날이 가까워 옵니다.”


당시 이 라디오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소수였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과정에서 내용이 부풀려지고 첨가되기도 했다.

 

 

문제안 전 서울 중앙 방송국 기자

“힘은 많지 않지만 그러니까 아주 막연하게 저 하늘에 있는 구름 같이 먼데 아주 알 수 없는 곳인데 우리나라를 다시 만들려고 하는 우리를 지키려는 누군가가 있다. 이런 것을 아주 가냘픈 희망이지만 그런 게 있다.”


이때 워싱턴에 머물고 있던 이승만의 공식 직함은 중국의 중경 임시정부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1941년~1945년). 그는 임시정부에서 외교를 담당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단파 라디오 방송으로 인하여 이승만의 신화가 탄생하고 있었다.


문제안 전 서울 중앙 방송국 기자

“막연하게 이승만이라는 사람이 도망을 갔는데 도망간 사람이 미국에 가 있는데 우리 임시정부에 대통령이라고 하고 미국에서 방송을 했다더라. 그러니까 그 방송을 했기 때문에 일반에게(알려졌고) 방송을 이승만 박사가 미국에서 했다더라. 그 얘기가 아주 결정적으로 이승만 박사를 대통령으로 알리게 됐지.”


이때 많은 사람들이 이 방송을 듣다가 일본경찰에 잡혀 갔는데 이들에 따르면 임시정부가 중국이 아닌 미국에 있고 이승만이 대통령이라는 소문까지 퍼지기도 했다.7) 이승만 신화는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가고 있었다. 1945년 8월 15일 고대하던 해방이 이루어졌고 이승만도 고국 땅을 밟았다.


“10월 20일 서울 군정청 넓은 마당에서 승리에 빛나는 연합군과 때마침 30여년 만에 돌아오신 이승만 박사를 환영하는 식이 성대하게 개최되었다.”


수많은 인파가 몰려 이승만의 귀국을 환영했다. 미군정청과 모든 언론 좌우익 지도자들까지 그의 귀국을 반겼다.


임종명 교수 전남대학교 사확과

“한국에 있지 않으면서 식민지 치하에서 친일 협력의 시비로부터 자유로웠고 뿐만 아니라 해방 직후에 격렬했던 좌우의 경쟁으로부터도 한발 물러서 있었기 때문에 그는 당시에는 정치적 부채나 정치적 흠결이 없었습니다.”


당시 이승만은 주로 이박사로 불렸다. ‘당대 최고의 엘리트’, ‘미국 박사 이박사’, 그것은 이승만에 대한 존경과 기대가 담긴 호칭이었다.


“미국 박사라 함은 당시 세상을 만들어 가고 그리하여서 조선에 해방을 가져다 준 그 미국에서 박사까지 된, 그래서 그 박사가 가지고 있는 지식과 통찰력이라면 여러 어려움에 직면했던 조선 민족에 갈 길을 제시해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승만이 가는 곳마다 수많은 열렬한 지지자들이 모여들었다. 사람들은 그의 연설에 귀 기울였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뉴스거리가 되었다. 가히 이승만 신드롬이라 불릴 만큼 그는 최고의 인기 정치인이었다. 1945년 12월 중도파로 알려진 선구회에서 실시한 여론조사는 당시 이승만에 대한 민중들의 평가가 어떠했는지 보여준다. 가장 양심적 지도자가 누구인가 묻는 질문에 이승만은 1위가 아니었다. 이승만은 조선을 대표하는 혁명가도 아니었다. 그러나 누가 대통령으로 적합한가 하는 질문에는 단연 이승만이 손꼽혔다. 이승만의 학식과 외교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24살의 조선의 감옥에서 근대화의 지도자로 성장하고 미국 유학시절을 거쳐 정착한 하와이에서 분열과 대립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해방을 맞이한 그때 사람들은 이승만의 탁월한 학식과 경험을 주목하고 있었다.


“최초의 미국 박사, 미국인처럼 영어를 잘하는 사람, 뛰어난 외교 활동가, 민중들에게 이승만은 특별했으며 이러한 이승만의 천재적인 능력과 경험에 대해서 미국은 물론 좌우익의 지도자들까지도 큰 기대를 걸게 됩니다.”

 

 

“그 특별한 지도자였던 이승만의 해방이후 계획은 무엇이었을까요. 일찍이 대통령이라는 원대한 포부를 품고 있었던 이승만 앞에 새로운 역사가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1) 'In my younger days I certainly knew my people well and even now felt myself certainly one of them'   傳 : 미국외교문서


2) 1914년 6월 10일 오아후 섬 가할루 지방 아후마누 농장에서 설립되었다. 박용만의 주도하에 하와이 대한인국민회의 연무부(鍊武部)를 확대·개편한 것이었다. 국민군단의 창설을 위한 재원은 안원규(安元奎)와 박종수(朴鍾洙)가 1,500a(에이커)의 파인애플 경작 도급(都給)을 기부하고, 박태경(朴泰敬)·한치운(韓致雲)·이치영(李致英) 등이 그해의 농사수입을 기부하여 마련됐다. 이에 박용만이 하와이 군사령부의 비공식 승낙을 얻어 미국 군제에 따라 편재하고 목총을 써서 훈련했다. 장차 만주·시베리아에서 일본군과 광복전쟁을 할 것을 전제로 한 훈련이었다. 조직으로는 군단사령부·경리부·제작소·병학교·훈련대·별동대 등이 있었고, 박용만이 단장을 맡았다. 기숙사를 마련하여 낮에는 경작하고 저녁에는 제복을 입고 군기를 갖추었다. 북·나팔 들과 목총 350여 점을 갖추어 정식 군대에 비해 손색없는 훈련을 했으며, 미군이 쓰는 영문서적 28가지를 교과서로 사용했다. 농장 주인이 준 목재를 가지고 학도들의 손으로 영문(營門)을 건축하고 1914년 8월에 낙성식을 거행했다. 학도들은 군사훈련과 군사학을 배웠고, 순번을 정해 농장에서 경작도 했다. 학도가 처음에 103명에서 300여 명까지 늘어나는 등 국민군단은 1916년 10월까지 훌륭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동안의 경비는 경작도급 수입금과 특별의연금을 합하여 7만 8,642달러에 이르렀다. 이 가운데 군단경비가 5만 8,442달러, 나머지 경비는 2만 200달러에 이르렀는데, 만주·시베리아에서의 무력항쟁을 위해 적립된 것이었다. 도급계약이 끝나갈 무렵 이승만이 군사훈련보다 외교선전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하와이 한인사회에서 물의를 일으키고, 박용만이 실전을 위해 극동지방으로 감으로써 유지가 어려워졌다.


3) 이승만 박사, ‘나는 어떤 반일적 내용도 가르치지 않았다.’


4) 9월 1일.


5) 1944년 7월 미국 체신국 발행.


6) 1941년.


7) 이승만이 미국에서 조선 임시정부를 조직하고 대통령이 되어 독립운동을 하고 있다.


 

# 제작권과 저작권은 한국방송 <한국사 전>에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상업적인 목적으로 사용하지 않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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