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도제
김민호
“어머니 절 모르세요?”
“니가 누군데.......”
“아이참, 어머니가 날 낳고도 모르신다?”
“이 미친놈!”
“진정하세요, 어머니..........”
“기가 막혀,”
“저는 모자를 썼죠?”
“또.”
“눈매를 보셔요, 제가 누굽니까? 아버지 아들 어머니 자식이죠.”
“어디 사느냐?”
“단석고을 석가동이요.”
“내 귀에 털 나고 석가동은 처음 들었다.”
“석가동이요, 석가모니(釋迦牟尼)마을이란 뜻이에요.”
“날 훈계 하냐? 콩 씨 만 한 놈이........”
“아네요, 이곳은 옛날 신라 적에 부처가 탄생한 곳이지요. 원측법사, 김대성.......그리고.......‘목월’이도 이곳 출생이지요.”
“‘니’ 무슨 말을 그리 지껄이냐?”
“어머니 이곳에 있는 절에 놀러 오세요, 저도 가끔 그곳에 가서 스님과 놀기도 합니다.”
나는 이 꿈을 꾼 지 하루 이틀이 아니다 칠년쯤 되는가 한다. 잘 때도, 놀 때도, 밥을 지을 때도 일곱 살 난 녀석이 자기를 낳았다고 항상 주위를 쫓아다니고 있었다. 딸 영아와 같이 살지만, 백호대살을 맞아 가정이 풍비박산이 났고, 하루끼니 걱정을 해야 할 형편이다.
그나마도 영아가 아르바이트로 벌어오는 하루 일, 이만 원이 모녀의 끼니이다. 일이라고 해 보아야 학교 주변의 레스토랑인데 야간학교에 다니기 위해 용돈을 버는 일이다. 그것도 일자리가 없어 겨우 들어간 것이다. 그렇지만, 영아는 착실하고 인물이 반반하여 주인의 눈에 들어 그나마 끼니를 연장할 수 있는 것이다. 나로서는 천만다행한 일이기도 하지만 서글픈 생각이 마음에서 끓어오르면 속이 뒤집어지고 열이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르는 속병이 생겼다. 그로 인해 소화가 잘 되지 않고 얼굴이 노란빛으로 덮어오는 것을 거울로 확인하고 있었다.
오늘은 하는 수없이 찜질방에라도 가서 땀을 빼고 피로를 풀 생각으로 차를 몰았다. 경주북쪽에서 차를 몰아 국도로 영천, 대구방면으로 가다보면, 왼편 무열왕릉을 막 지나니 왼쪽에 석천탕이라고 있는데 그곳이 내가 즐겨 찾는 참숯찜질방이다.
“아이 구 김 집사 어서 와요, 요즘 잘 안 보이시는구먼?”
“그래요? 좀 바빴지요. 권사님은 잘 계신가요?”
나를 반겨주는 그녀는 교회에 권사인데, 그녀의 어머니는 무당이었다. 어찌하다 교회에 전도되어 권사까지 지위를 얻은 것이다. 나는 평신도이지만 집사라고 부르는 것이 그녀의 영업수단이었다.
그녀의 남편은 몇 해 전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남편이 남기고 간 땅과 집을 개조하여 증축하고 찜질방을 만들어 여생을 편안하게 살고 있는 여성이었다.
나는 학교선생의 아내로서 모든 사람이 부러워했지만, 사채놀이를 하다가 남편의 보증을 앉자 그에게 빚쟁이들이 달려들자 본의 아니게 서류상 이혼하고 말았다. 그 후 남편은 아이들과 나를 버리고 멀리 산골학교로 전근가고 말았다. 결국 기러기 가족이 되고 만 것이다.
이를 아는 그녀는 나를 반갑게 맞아주는 태도에 늘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집사님 옷장 키 여기 있습니다.”
“예, 고마워요.”
“아이구, 몸이 아직 처녀 몸이네요.”
“뭐요, 이제 나이가 있는데..........”
“우리 집 손님들 중에 제일 몸짱이지예, 누가 집사님 몸만큼 날씬한 사람 있습니까?”
“비행기 태우지 마세요.”
그녀가 한창 어려울 때 나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
“집사님 살기가 너무 어려워요.”
“즐겁게 살면 되지 왜 안 되나?”
“춤을 한 번 배워 볼까요?”
“하고 싶으면 해야지 어떻게 속에 넣고 있습니까?”
“그렇지요, 해보고 후회하는 게 낫지 안하고 후회하는 것 보다는.......”
“조금만 참는 게지 아이들 때문에 또 참아야 되고,”
“재혼하면 어떨까요?”
“몰라, 내사 혼자 사는 게 낫지 재혼해봐야 그놈이 그놈 아닌가요?”
“글쎄, 나도 하도 답답하니 그런 말 하는 것이지.”
“교회는 어쩌고?”
“우리 엄마가 무당인데, 교회가 문젠가요?”
“그야 그렇습니다.”
이런 그녀가 혼자 살기에는 경제적 바탕이 없어 별것을 다해 아이들과 생계유지를 해나가야만 했던 것이다. 무당의 당골이 될까 두려운 마음에 교회에 나간 것이다. 그녀로서는 천만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우선 식당을 꾸렸고, 다음으로 찜질방을 운영하게 되었다 그 건물은 남편이 죽고 유산으로 물려받은 것이다.
나를 보고 아직 오십 가까이란 생각을 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헬스는 기본이고, 이십대부터, 사교춤으로 단련된 몸매이다. 그것 때문에 가정불화가 일기도 했지만, 그로인하여 문제가 된 것은 없었다. 그때만 해도 남자들이 득실거렸지만, 요즘 사교댄스 장에는 남자들이 귀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
나는 그때부터 발을 끊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은 여유롭게 춤을 출 마음이나 틈을 주지 않는다. 권사도 대충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어느 누구보다 같은 교회 나가면서 동질감을 가지고 찜질방에 자주 들렀다. 그녀는 무당의 딸로 교회 믿는 사람에게 시집와 개종을 했고, 나는 유가 집안에 자라 어릴 때 유가의 엄격한 가풍이 싫어 탈출하여 교회에 나갔지만, 시댁은 유교집안이었다. 억지춘양으로 남편과 아이들을 가끔 교회로 끌고나갔다. 학교선생이라는 직업 때문에 집사칭호를 교회에서 주기도 했지만, 마음속으로 늘 죄스러운 마음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오늘은 울산 손님, 부산 손님들이 관광하다가 많이 들어왔지요.”
“복잡하겠네, 그럼.”
“꼭 그렇지는 않아요, 식당으로 가고 잠자는 휴게실에도 있어 찜질방에는 몇 없을게요.”
“알겠습니다. 나중 봅시다.”
“점심 먹은 게 체했나? 가슴이 답답하지........”
“그럼 쉬었다. 들어가지예.”
“가봅시다.”
여러 사람들이 수건을 머리에 쓰고, 숯불 찜질을 하고 있었다. 다섯 명이 앉아 있었다.
키가 큰 내가 들어가니 다들 멈칫하였다. 술집 마담이 들어온 줄 안 모양이다. 자리를 비켜주어 한쪽에 수건을 깔고 앉았다. 앉자마자 나는 트림을 하면서 오른 손을 가슴에 얹고 문질렀다. 한 아주머니가 나에게 다가오며 말을 건넸다.
“먹은 게 체한 모양이지요?”
“그런가 봅니다.”
“이때는 찜질방에 있지 말고 우선 나가서 내가 사혈을 해줄께요.”
“그래요.”
“밖으로 우선 나갑시다.”
그녀는 전문 사혈(瀉血)을 하는 사람이었다. 심천사혈법을 배운 사람이라 하였다. 이는 침 사혈법인데, 부항기로 우선 공기를 압축하여 혈자리에 모세혈관에 흡입력으로 가한다. 그런 후 침으로 무작위로 부항기흡입자리에 찌르기를 삼십에서 사십 여회 한 후 다시 부항기로 흡입하면 피가 모세혈관에 고여 있던 것이 부항그릇에 고이게 되면 휴지로 닦아낸다. 한 자리에 적게는 삼회 많게는 십회까지도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피가 응고되어 지렁이처럼 나오게 된다. 이런 피는 죽은피와 같은 것으로 탄소가 포함된 정맥혈의 피이므로 피냄새가 나지 않는다. 그녀는 이런 방법으로 나의 체기를 뚫어주었다.
“보살님, 보살님 절에 나가셔야 돼요.”
“왜요?”
“불성 기운이 꽉 찼네요.”
“그게 보입니까?”
“당신은 보살이지, 예수쟁이가 못 되 보여요.”
“어째서요?”
“사람이 보면, 느낌이 있잖아요? 지금은 집사님일지 모르지만, 결국 불 보살행을 할거요?”
“사실 나는 나이롱 예주쟁이예요.”
“어찌 그런 말이 나옵니까?”
“사실 어젯밤에도 꿈을 주었는데.........”
라고 하면서, 일곱 살 아이의 얘기를 그녀에게 늘어놓았다. 그녀는 얘기를 듣고 나더니, 빨리 영가 천도제를 올려주라고 했다. 천도제는 무당에게 가보면 삼백만원은 최하이고, 절게가면 보토 오륙백만원은 족히 든다했다. 지금 당장 나에겐 하루끼니 걱정을 해야 하는데,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
“돈 걱정은 할 것도 없어요, 돈 이만원만 하면 됩니다.”
“어디서 합니까?”
“삼봉사요.”
“그곳이 어디요?”
“대구방면으로 가다가 모량초등학교 셋길로 쭉 올라가면 들 가운데 농로 길을 따라 십리쯤가면 큰 못이 나와요, 그 못 이름이 삼학골 못이거든요? 오른쪽 밀개쪽으로 산길로 일키로쯤 가면 절이 있습니다.”
“그래요? 모량리예요?”
“예, 맞습니다.”
그곳은 내가 아는 곳이다. 그날 오후 차를 돌아 그곳으로 당장 가로수밖에 없었다.
학생시절 내가 아는 영호가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영호는 일찍이 어머니를 잃었다. 그는 본래 서울출생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육이오 당시 해병대 장교로 일본시대, 출생하여 영호의 어머니와 결혼 후 서울로 갔다가 영호의 어머니가 갑작스레 죽어버렸다. 영호는 겨우 한 살 밖에 되지 않았다. 영호는 어머니 얼굴을 모르는 아이였다. 그 후 그의 할머니가 등에 업고 이고 마을로 다시 내려온 게다. 영호는 어릴 적부터 명석한 아이로 이 동네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신동으로 소문이 났다.
영호가 고교시절 할머니와 함께 둘이 살 때, 오르막 초가삼간이었던 집에 우리 마을에 사는 영숙이와 함께 와 본 적이 있었다.
영숙은 육친의 고모뻘이자 초등학교 친구였다. 영호는 그 당시 치질을 앓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때인데, 동네 청년들이 우리들을 보고 영호네 집을 향해 휘파람불고, 야단법석이었다. 영호는 아픈 몸을 끌며, 청년들에게 다가가서 큰 소리로
“뭣 하는 짓이냐? 손님들한테.........”
그 소리를 듣자 청년들은 우르르 달아났다.
“촌놈들 가시나라 하믄 사족을 못 쓰는구먼........”
“우와 정말 대단테이.........”
“촌놈들.......아이가 이해해라 니그 동네도 마찬가지지?”
“점마들 4H회원들 아이가, 내가 총무거든?”
“학교 다니면서?”
“우리 동네가 경주시군에서 일등 했지, 경북대표로 일등 했지, 전국 간다. 아이가.......”
“동네 유지구먼?”
“유지는 아니더라도 동네 살림은 내가 계산을 해줬지, 초등학교 사학년부터, 농자금, 수리조합 수제, 소득세 계산은 내가 했거든.......”
영호는 차가운 책상에 너무 오래 앉아 항문 주변에 치질이 생겨 이틀간 대소변을 못 보고, 동네 친척 한의원에 가서 수술을 받고 요양 중이었다. 영호에 말에 의하면 런닝셔츠를 하나를 가져가고 난 다음 항문 밑 다리 사이에 끼우고 있었더니 넓적한 칼날이 상처에 깊이 박은 다음 돌려서 빼내더라고 하였다. 고름과 피가 셔츠하나로 모자라 할머니 속치마까지 찢어 버렸다고 하였다.
“아이 구 야들아 무섭더라 무서워........”
“죽을 뻔 했구먼요?”
“옛날에 수치질을 앓으면 이웃이 잠을 못 잘 정도로 아프다고 고함친다는 것 아이가?‘
“왜요?”
“그 살 깊이 곪는데 얼마나 아프겠노?”
“큰 경험 했네 호야는........”
“아이고 오줌똥을 못 누웠는데........”
“사흘 만에 세수하는 대야에 소변을 보는데, 피같이 붉은 소변인기라.”
“그러니 저리 얼굴이 형편없구나.”
“이제 살만하다.”
영호의 얼굴과 할머니의 생각이 떠오르는 곳이다. 추운 방바닥에 백년은 되어 보이는 이브자리 속의 솜털이 생각났다.
“야들아 양반이 뭔 소용 있냐? 공부가 뭐 필요 있나? 영호애비는 학교공부 해봐야 떠돌이 객이지만, 마일댁 ‘목월’이봐라, 서울 가 대학에 선생 안 하나.”
“목월이요?”
“그래 박영종이 말이다. 영호애비하고 건천학교 같이 안 다녔나?”
“그래요?”
“그러면 뭐 하노 다 소용 없제, 시대를 잘 만나야제.........”
영호의 아버지는 목월선생과 친구였다. 건천초등학교 동창임을 영호할머니를 통해 알았다. 아쉽게도 ‘영호’가 살던 집은 길이나 사라지고 없었다. 금이빨 송곳니를 가진 영호 할머니의 모습이 영호네 집터에서 서성거리는 모습이 떠올랐다. 승용차로 왔지만 삼십 여분이 걸린 것이다.
‘삼봉사’라는 입간판이 개울건너에 표시하고 있었다. 직진하면 산 계곡으로 가는 방향이고 삼봉사는 시멘트교량이 있는 우측으로 건너면 언덕길이 위에 삼봉사 일주문이 보인다.
‘영가천도제’에 이만 원이란 소리에 거침없이 달려온 내가 귀신에게 홀린 듯 했다.
절에 들어서자 나도 모르게 대웅전을 향해 두 손 모아 고개 숙이고 목례를 하였다.
“스님 계세요?”
“뉘시오.”
“경주에서 온 사람입니다.”
“들어오세요.”
“네.”
“오늘 날이 화창하네, 점심 공양은 하셨나요?”
“예.”
“안했으면, 우리 절 비빔밥 한 그릇하고 오시죠.”
스님은 내 속을 훤히 보는 것 같았다. 내가 고개를 숙이자마자 스님은 공양주를 불렀다.
“보살님 여기 비빔밥 한 그릇 준비하세요.”
“네.”
밥을 먹고, 스님은 천천히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었다. 정말 마음속으로 신기한 생각이 들었다. 마치 무슨 통고를 받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사실 배도 고팠다. 배고픈 설음은 겪지 않았지만, 아침도 먹지 않고 찜질방에서 그냥 올라 온 것이므로 목구멍이 포도청이랄 수밖에 없었다. 절밥은 맛이 좋았다. 오월의 녹음이 더욱 절밥향기를 더해주었다.
“스님 저 왔습니다.”
“불연이오.”
“불경을 모릅니다. 저는........”
“누가 처음부터 부처를 아는 이가 있소?”
“저는 울산의 보살 한 분이 삼봉사를 안내하며 오늘 처음 와 본 것입니다.”
“그게 인연이오, 수천만 사람들이 있지만, 그 보살의 말 한마디에 이곳 험한 절에 보살님이 오실 리가 만무하지요.”
“그야 그렇지만.........”
“그게 다 조상의 공덕이오, 아무나 이곳까지 발길을 닿게 한 답니까?”
혹시 찜질방의 보살이 전화를 해준 것일까? 라고 의심도 해 보았지만, 그건 그럴 수 있지만, 그 보살도 나에 대한 신상은 전혀 모르는 것이다. 그저 스님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이야기 하는 것뿐인데, 마치 준비나 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스님 저는 영가가 한 사람 있는데........”
“누군데요?”
“아이거든요?”
“어떤 아이요?”
“저는 일찍 신혼 때부터 저희 남편과 잠만 자면 아이가 생겨 오누이 둘을 놓고 산파수술을 열 번도 넘을 거예요.”
“그래요, 영가군요.”
“지금 수년째 일곱 살 난 아이가 주야장천으로 따라 다니거든요.”
“아하, 그 아이 때문에 못 볼일 다 보고 말았군요.”
“그렇기도 하겠지만, 내가 자기를 낳았다고 우기면서 나와 같이 거의 동고동락합니다.”
“그래요, 천도제를 백중날 올리고 천도하면 되지요.”
“어찌 하면 됩니까?”
“보살님 축원문을 쓰시고 영가 이름을 쭉 쓰세요.”
나는 우선 나의 축원문을 올리고, 영가들의 이름을 열세 명 정도를 박씨 일영, 이영.........십삼영으로 이름을 붙이고 영가 천도제의 영표(靈標)에 올렸다.
“스님 오늘부터 제가 이 절에서 기도를 하면 안될까요?”
“되지요, 왜 안 될 리가 있나요?”
“그럼 우선 스물 하루 동안 기도를 해 보겠습니다.”
“나무관세음보살..........”
나는 법당으로 우선 발을 옮기고 부처님에게 절을 올리고 백팔 배를 시작하였다.
그러기를 석 달이 다 되어가면서 음력 칠월 보름이 가까워 왔다. 절에서는 백중천도제 준비로 큰 스님이하 여럿 스님과 공양주 및 법당을 돌보는 보살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나의 기도는 참회였다. 마흔 넘게 살아온 내가 무엇을 위해 살았는가, 누구를 위해 현재 나는 누군가? 과거 어디서 왔는가? 내 자신은 나인가........등 수많은 의문이 번뇌를 일으키기 시작했고 그 번뇌의 파도는 멈출 줄 몰랐다. 각 의문의 번뇌를 잠재우거나 파문을 없애기 위해서 고요히 숨죽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길 몇 일 되었는지도 모른다. 해가 넘어갔는지, 떠오르지도 몰랐다. 금세 이십일이 지나가고 백일이 지나고 수일, 수십, 수백이 흘러간 세월이 칠년이 되었을 뿐이다.
“보살님 오늘이 백중일입니다. 천도일이란 말이예요. 오늘은 손님이 많이 옵니다.”
“그래요.”
“보살님의 수령동자님과 영가들도 천도합니다. 서원하세요, 환생을 바라고 성불 서원을 세우세요.”
“네 감사합니다. 지장보살......”
음력 칠월 백중이었다. 벌써 주차장에는 차량들의 엔진소리가 이어지고 경내에는 수많은 보살들과 승려, 신도들이 천도제 행사객이거나 주관자 입장에서 바쁘게 움직인다. 삼봉사 사찰 마이크는 확성기를 통해 송만공스님의 구성진 염불소리가 흘러내렸다.
이곳 산사에는 꾀꼬리들이 무더운 여름철을 보내기 위해 산사의 숲 그늘에서 엄숙한 사찰 경내를 놀란 듯 바라보며 지저귀고 있었다. 염불 가락이 멈추더니 확성기가 삐 소리와 함께 침묵이 흐르더니
“경내에 계시는 모든 신도 여러분 잠시 후 칠월백중 천도제를 올리겠습니다. 모두 참석해주시고 대웅전으로 오시기 바랍니다.”
마이크 소리가 멈추자 대웅전으로 사람들이 속속 모여 들였다. 다섯 명의 비구성과 참선기도를 하고 있는 선방의 승려들........... 수도자들이 뒤를 이어 대웅전 마루바닥에 방석을 깔고 제 각각 자리를 잡고 앉았다.
“개법장 진언 옴아라다 옴아라다 옴아라다.........”
목탁과 요령소리, 쇠북과 어북을 울리면서 천도제는 시작되었다. 천수경, 신묘장구대장구대다라니경, 금강경,을 비롯하여 영가 천도의뢰 문서인 신도각각의 축원문을 한 장 한 장 들고 주지승은 읽고 축원해주기를 오전 내내 하고 있었다. 그러자 사시공양과 더불어 끝없는 행사였다.
그 순간마다 나는 그저 참회할 뿐이었다. 배속에 든 핏덩이의 영혼들을 우선 새로이 육신을 쓰고 환생하는 서원이었다.
“영혼들아 부디 환생 하거라, 내 잘못이 많다. 내 어이 죄인 줄 몰랐겠냐........좋은 부모만나 부디 부디 잘 자라서 훌륭한 부처님 되어라, 이 어미를 용서해다오......”
나는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하였고, 엉엉 울기 시작하였다. 내가 큰소리를 내어 울면울수록 대웅전의 목탁소리와 요령소리는 더욱더 컸고, 대웅전 바깥 법당에는 비구니승과 비구승이 승무를 하고 있었다. 그 회중에서 울려 펴지는 바라소리와 징소리가 내 울음을 더욱 크게 만들었다. 그러자 주승이 축원문을 들고 을미생 사월 이십이일 김씨 수령자 김동자 칠세 일호 이호 ---십이호 하면서 나의 축원문을 들고 읽고 있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큰절을 올리면서 서른여섯 번을 절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스님의 모든 사람들의 축원이 끝날 때까지 그대로 앉았다 섰다 하면서 절을 하였다. 아마 오천 배는 했을 것이다. 저녁때가 되가는 듯하였다. 대중들이 일찍 가는 이는 비빔밥을 한 그릇 먹고 가고, 특별한 볼일이 있는 사람들만 경내에 있었다. 인파는 오백명도 더 모였다 한다.
나는 기도에 열중하다보니, 그 수를 헤아리지 못하였다. 나는 내가 거하는 뒷문 쪽방으로 와서 산 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보살님 오늘 회양 했지요.”
“네 잘 된 것 같습니다.”
“하산하실 겁니까?”
“우리 집 아저씨가 오면 가야죠.”
“이제 어쩔 겁니까?”
“계속 공부 해야지요.”
“그래요, 알고 보니 어떻습니까?”
“인연이 두꺼운 걸 알았습니다.”
“네, 관세음보살.......”
“눈물이 많이 납니다.”
“부처님 가피를 입으셨구먼요.”
“뭘요 이 천한 여자를........”
“아니예요, 불성은 그렇지 않아요, 누구나 불성이 있는데, 못 깨달아 그러지요.”
“그렇습니까?”
“보살님은 큰 행을 얻었습니다요.”
“별 말씀을..........”
“이 오백명 중생중에 보살님의 얼굴에 부처님 서기가 비쳤어요.”
“어떻게요?”
“부처님의 지혜에 비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까? 천에 하나도 많지요.”
“네........”
“앞으로 종종 부처님을 뵈오러 오세요.”
“인연 지었으니 와야죠.”
“보살님 제가 꿈을 꿨거든요? 아마 보살님 수령동자 천도 꿈인 것 같아요.”
“말씀해 보시죠.”
스님은 나에게 꿈 이야기를 털어 놓았다. 내가 첫날 절에 오자마자 그날부터 그 아랫마을 석가동에 사는 일곱 살쯤 돼 보이는 사내아이가 모자를 쓰고 매일 삼봉사에 올라왔다 한다.
그 스님의 말을 빌리자면 꿈속에 주고받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스님 저와 딱지를 한 번 치세요?”
“이놈아 니가 이길 것 같냐?”
“해봐야지요.”
“처음은 니가 이기고, 나중은 내가 이겼지. 오늘은 그만 하자.”
“네, 안녕히 계십시오.”
이튿날, 사흗날.......딱지치기 아니면, 팽이치기, 자치기, 갖은 놀이기구로 스님을 괴롭히면서 이김질을 하였고, 하루는 포기하고 마을로 내려가고는 다시 오지 않았다 한다.
“보살님 바로 그 수령 동자가 보살님에게 따라 다니던 동자인 것 같습니다.”
“스님 어찌 그리 본 듯이 이야기 하십니까?”
“꿈이던 생시든 같은 것 아닙니까? 깨면 꿈이요, 잠자면 꿈인 것을........”
“그렇죠, 인간들은 꿈은 아님으로 생시오, ‘생’으로 알지요.”
“다 같은 거요, 헛것이면 ‘허’이고 ‘생’이면 ‘살’이고, ‘허’와 ‘살’이 다르지 않지요.”
“오늘 같이 천도가 되었을까요?”
“되었지요, 이제 꿈이나, 헛것으로 안 나타난 걸요.”
“네, 기도 중에는 없었습니다.”
“성불하셨구먼요.”
“뭘요 이제 시작이지요.”
“꿈이 크시구먼.........”
“커야지요, 예전에 컸는데, 이제는....... 숨죽었습니다.”
“그래요, 그 수령 동자가 아랫마을과 인연이 있는 모양이던데요.”
“글쎄요.”
“잘 생각해보세요.”
틀림없는 사실이었던 것이었다. ‘영호’와 관련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어느 해 여름 역시 산부인과에 소파수술을 해야 하는데, 이제 복강경을 해야 한다고 마음먹었다. 한 두 번도 아니고, 산부인과 의사에게 돈을 보태준 수없는 처지가 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어 복강경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때 ‘영호’가 수술을 하고 복강경을 하라고 권유한 일이 있었다. 아마 그 아이는 ‘영호’와 관련이 있었던 모양이다.
‘영호’도 고고시절 사십리 길을 마다않고 걸어서 현곡 가정리 골짜기 까지 날 만나기 위해 오간 적 있었다. 물론 교회예배 인도관계로 왔지만, 청소년기의 불장난과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타락론으로 인류의 죄악을 규명했던 때이므로 감히 아무렇게나 놀아 날 수 없었다. 어른이 되고 성년 되어 다시 살아났던 ‘불놀이’가 주마등처럼 지나가면서 ‘수령동자’의 꿈속 말이 가슴을 아리게 하였던 것이다.
“예 스님, 인연없는 중생이 어디 있습니까?”
“그렇지요.”
“스님 편안히 좀 쉬세요. 큰 행사에 얼마나 육신이 고달프십니까?”
“부처님의 몸인데, 어찌 중생의 육신으로 생각하시겠습니까?”
“성불하십시오.”
“나무관세음보살”
스님과 삼봉사 대웅전을 뒤로하고 권처사가 차를 가지고 데리러 오기만 기다렸다.
권처사는 절에서 만난 홀아비였는데, 내가 가장 어려웠을 때 후원자가 되어주고 동행자가 된 사람이다. 오갈 때 없는 나를 그도 아무것 없으면서 전 재산을 나에게 준 것이나 다름없었던 자로 내 인생의 동반자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렇지만 그는 나에게 해방 놓는 자가 되고 말았다. 마구니로서 뜻은 역할로 마장을 펼치는 자였다. 어느 듯 인연이 된지 수년이 흘렀다.
그를 만난 것은 황용사였다. 그 절은 아이들의 아버지와 자주 다니던 절로 경주시 황용동에 있는 절이다. 그곳 주지승은 전라도 강진 사람으로 해인사에 동문 출가하여 불국사 원주스님으로 재직하다가 이 동네 사옥을 한 동 구입하여 불사한 절이 황용사이다.
그 스님은 생식을 하는 스님으로 합천 해인사 성철스님이 생식을 가르쳐준 스님일 뿐만 아니라 같은 도반이기도 하다.
여름 방학 때면 가족과 더불어 며칠씩 쉬다가 오가고 한 절이기도 하다. 그런 인연이 되어 마음이 심란하거나 울적할 때 혼자 들리곤 하는 절이었다.
그곳에서 권처사를 스님의 소개로 만난 것이다. 권처사는 지금은 나의 후견인이나 다름이 없다.
“보살 또 기도하는가요?”
“왜요?”
“우리가 이렇게 사는 게 맞나요?”
“우리는 부부의 연으로 만난 게 아니지요.”
“이제 우리는 도반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뭐요? 내가 중이 되란 말이요, 머리 깎고 미쳤나? 이 여자가 삼봉사 갔다 오더니 신 들렸구먼?”
“이제 우리 제자리로 돌아갑시다. 좀.......”
“아이구 나는 우야꼬 다 살았다. 다 살아 있는 것 없는 것 전부 바치고 중 될라고 그랬구먼 아이고 내 팔자야, 설고, 섧다. 권동문 팔자가 가관이다. 그래도 재출발 하려고 하였더니 중 팔자가 왠 말이고.......”
“보이소 얼라가 울기는 뭣 때문에 우노 누가 죽었나 교통사고 났나 참 기가 막히는 소리 다하고 있네.......”
“내 팔자 한탄하는 것이지. 우리 어머니가 불쌍하지........엉엉......흐흑.....”
“그건 그렇고 차분히 이야기나 합시다. 아이들처럼 운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고”
“그래 말 잘했다. 기도 한다고 참고 참았는데, 어찌 그리 매정하게 배신하나........”
“배신이라니 내가 딴 남자와 정을 통했나?”
“그건 아니지만, 머리 안 깎은 중이 된 것 아이가?”
“중이 별거가? 그래 일심으로 기도 염불하고 업장소멸하고 참회와 평정심 갖는 거지”
“중 다 됐네 뭐! 인자 내가 필요 없구먼.......”
“그럴게 아니라 당신도 팔자고 나도 팔자지........”
그와 나는 울며불며 언쟁이 오갔다 그는 부부처럼 지내길 원했으나 나는 허락할 수 없었다. 그것은 오누이 아디들 때문이었고, 이혼녀의 자식이라는 누명을 씌울 수 없었다. 나이가 쉰이 다 되어가는 마당에 부부의 정열을 태울 수 있는 청춘이 아니다.
어떻게 하든 권처사를 설득시키고, 부처님에게 서원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두 사람은 한 집안에 살지만 방은 따로 쓰고, 한 방에 잔다면 한 사람은 침대, 한 사람은 방바닥에 잠을 자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한 방에 있어도 나는 그리 염불로 밤을 세우고 하루를 보내는 일이 일과였다. 그도 어찌 할 수 없는 것은 알아차리는 듯 했다.
일전에 싸울 때 그가 염주를 잘라 버리고 호신불상을 깨버렸던 일이 후회하고 참회하는 마음을 보여 이때다 싶어 나는 더욱 더 열심히 기도를 하였다.
얼마 후 그는 나에게 다가오며 진심어린 표정으로 무거운 입을 열었다.
“나라연, 나도 절로 가야겠소, 우선 황용사로 들어가 기도한 후 결정하겠소,”
“정말이요?”
“그렇소.”
“필요한 것은 준비나 좀 해주시오.”
“그러지요.”
“스님이 받아 줄랑가?”
“스님이 중 된다는데, 머리 안 깎아 줄자 어디 있겠소?”
“여하간 나도 머리를 깎고 중이 되겠소?”
그의 굳은 결심은 바로 실행에 옮겨졌고 황용사에 출가했다. 석달여간 황용사 토굴에서 불경과 예법 등을 익히고 주승이 추천한 종단에 들어가 도첩을 받아 울산 유정사에 거하였다. 유정사는 우리나라 조동종파인데 그곳 스님의 내력은 이러하였다.
황용사 주지승이 옛날 유발상자가 있었다. 한 방에서 삼백여일을 같이 먹고 자고 하면서 도를 닦은 처사였다. 그는 주역을 달통하고, 천문, 지리, 법학, 철학 무엇 하나 달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는 승려들을 공부 가르치는 정도의 실력이 있었다.
“스님 저도 공부 좀 할까요?”
“무슨 공부?”
“절 공부요.”
“좋지.”
“언제?”
“지금이요.”
“농담도.......”
“오늘 당장 스님 방에 자면서요.”
“그래.........”
“예,”
“그럼 해봐, 나는 누워서 안 자니께.......”
“스님은 장좌불와 하십니까?”
“오래 됐지........”
그때부터 삼백여일을 같은 방에서 공부한 스님이다. 그의 법명은 법혜선사이다. 그는 딸 둘을 둔 자로 부처에 뜻이 있어 그만 산으로 들어오고 말았다.
그가 속가에서 번 돈이 있어 절을 구입하여 대웅전을 중수하고 산영각을 짓고, 원각사 모형 탑물사로 세상에 금방 이름이 났다. 그 절이 유정사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와불상도 성조하여 수많은 관광객이 줄을 잇고 있다.
권처사는 법명을 법혜선사의 ‘호’명을 빌려 ‘범일’이라는 명호를 받았다. 나는 가끔 옷이며, 용돈을 모아 범일스님을 찾아 간다. 법당에 예를 올리고 천수천안 대자대비 관세음보살에게 다시 한 번 서원을 부탁하고 물러섰다.
“스님계십니까?”
“뉘시오.”
“경주 ‘나라연’입니다”
“어서 오시오.”
“그간 강령하셨습니까?”
“그러다마다 중생이 편안치 않으면........”
“날은 추운데.......”
“아 그건 내 걱정이 아니고 범일이 걱정이구먼?”
“아--아닙니더”
“뭐 맞구먼, 먹을 것 좀 가져 오셨나 맛 좋은 부월초 말이오.”
“범일스님 반가운 손님 오셨어.......”
“누구신데요?”
“나와 보면 알지 내 방으로 와보셔.”
“네 그러지요.”
내가 만나 본 범일스님은 완연한 승려가 되었다. 의복이며 걸음걸이 말씨 등이 스님의 모양으로 변신하였다.
“안녕하세요 스님!”
“관세음보살.......별고 없으셨고요.”
“옷가지와 먹을 것이예요.”
“이제 이런 것 필요 없는데, 중질 잘 하고 있잖아요?”
“물론이죠, 어련히 알아서 잘 하실라고.........”
“고맙소, 보살님 우리의 인연이 법연이 아니었던가요?”
“그럼요, 불은이지요, 모두가 다......”
그 후 범일스님은 유정사를 떠나 동해바다의 물결이 바위를 철썩이는 감포 쪽으로 암자를 구하였다. 물론 자비로 구했지만 사가의 도움이 있었을 것으로 본다.
암자랄 것도 없지만 토굴과 같은 것으로 스님은 혼자서 수행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곳은 신도들이 노보살님들이 여러 명이 있고 범일스님의 시봉을 잘 받들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무사히 수도생활을 하기만 기다릴 뿐이고 부처님에게 염원할 뿐이다.
나와 맺은 모든 인연들
수령동자와
태중영가들
삼봉사 봉우리
무지개 고갯길
외길 늘어져
무명 업장을
벗어 놓으며
흰구름 떠가는
창공이 부르네,
나도 모르게 천도제 때 읊은 시구가 되 뇌어진다. 오늘도 내일도 나는 국선당 가폐를 지키며 불연들을 찾아 헤맨다.
첫댓글 박사님! 한참이나 읽고 갑니다.........건강하세요
성불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