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따슨 눈길 보내 주시고 그도 모자라 가끔 구수한 마음 얹은 엽서 한 잎 제가 몸 담고 있는 쪽으로 날려 주시니 너무나도 고맙습니다. 이렇게 인사도 늦고 매사에 게으른 아우를 용서하십시오. 전화기는 쉽고 가볍게 접근할 수 있지만 펜이라는 놈은 어찌나 까탈을 부리는지 부려먹기가 만만치 않더군요.
아무리 생각해도 저는 늦복이 많은 것 같습니다. 문화학교에서 좋은 선생님들과 선후배님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이 그렇습니다. 그 중 한 분이 형님이십니다. 그 뿐만 아니라 "편지가족모임"에 입회했을 때 팔 벌려 주시던 모습 어찌나 푸근하던지요. 서툰 것 투성이오니 아낌없는 지도와 편달 부탁드립니다.
형님, 또 묵은 해를 보내고 나이테 하나 더 두르며 새 해를 맞이합니다. 늙어간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요. 자꾸만 홀가분해집니다. 저는 젊을 때부터 빨리 늙어서, 빨리 자연으로, 빨리 귀향하고 싶어 했더랬습니다. 철딱서니 없게도 향기롭고 복된 소멸을 꿈꾸며 살았지요. 그럴리도 없겠지만 하늘이 다시 제게 알록달록한 젊음을 하사 하신다 해도 지금 이대로가 좋습니다. 그렇습니다. 형님, 지나간 것은 모두 소중한 이력이고 재산이기도 하니까요.
이제 뜨거운 피가 다 빠져 나가고 마른 가슴 하나 갖고 겨울나무 앞에 섰습니다. 감히 제가 나무를 닮아 보려한 적이 있었지요. 외람되고 건방지기 짝이 없었지요. 나무는 커녕 한 포기 풀만도 못하게 살아온 나날, 극에 달한 감성의 사치와 영적 허영이었다라고 고백 드립니다, 열에 들뜬 이웃에게 넓고 푸른 손을 내밀어 시원한 그늘 한 번 마련해 주지 못한 이기주의자입니다. 친구의 고단한 이마 잠시 기댈 어깨 내어 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나무를 경외하는 마음만큼은 세월이 가도 변하지 않고 사모의 정은 더욱 깊어 갑니다. 동안거에 든 나무의 겨울기도를 엿들어 보려고 귀를 세워 보지만 묵언수행 중인지 속내를 좀체 드러내지 않습니다.
얼마 전, 그 날은 동짓날이기도 하고 제 생일이기도 했습니다. 어릴 적 다니던 초등학교 뒷동산을 찾았습니다. 세상은 엄청나게 변했지요. 42년만의 걸음이었습니다. 유년의 기억을 밟으며 뼈에 새겨진 길을 따라 천천히 올랐습니다. 아득한 제 방황과 투정을 말 없이 들어 주며, 또한 말 없는 가르침으로 세상 사는 법을 준엄하게 내리며 제 등을 밀던 어머니 같은 산입니다. 태어난 모강을 찾아 새 생명을 풀어 놓고 만신창이의 몸으로 감사의 예배를 마친 뒤 조용히 자연으로 귀향하는 연어를 생각하며 한 발 한 발 산등성이로 향했습니다. 그 곳엔 당산목 한 그루가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저의 나무입니다. 스승이며 친구가 되어 주던 수호목입니다.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화장한 도시화의 손길이 혹시라도 이 곳을 범했을까봐 얼마나 마음 조렸는지 모릅니다."큰바위 얼굴"과 "빨강머리 앤"을 무척이나 동경하던 소녀는 이제 할머니가 되어 반 세기에 가까운 풍상을 등에 지고 그 앞에 섰습니다. 과연 지난 여름 ‘매미’의 힘은 대단했습니다. 제 나무는 한 쪽 어깨를 잃어버리고도 늠연히 제 자리를 지키고 있더군요. 군데군데 마른 버짐이 얹혀 있었고요. 오십 견으로 고생을 꽤나 했던 이태 전을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습니다.
나무 앞에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소박한 기원을 안은 올망졸망한 돌들이 귀엽게 쌓여 있었습니다.‘매미’도 민서들의 돌멩이 기도를 막무가내 쓸어버리기엔 너무 안쓰러웠을까요? 아니면 기도가 기도를 부등켜 안으며 얽히고 섥혀 악착같이 버텼을까요? 어릴 땐 미신으로만 보이고 삿 되게 보이기까지 했었는데요. 참, 눈물겹도록 대견한 자리 한 복판에, 보잘 것 없는 경과 보고서를 부끄럽지만 꾸밈없이 올렸습니다. 그리고 어린 목소리로 즐겨 불렀던 슈베르트의 ‘보리수’ 한 곡조, 저를 지켜준 보은으로 마음 모아 바쳤습니다. 엷은 솜구름 덮고 낮잠을 즐기는 줄만 알았던 가랑잎들이 귀도 밝게 제 노래에 깨어나 이구동성으로 "한 곡 더"를 외쳐대는 바람에 정지용의 "향수"까지 멀리서 들리는 산새 소리를 배경 음악으로 삼아 연거푸 불렀습니다. 살아 왔던 날들보다 더 잘 살 자신은 없습니다만 살아 왔던 날 만큼은 살아 보리라고 다짐하면서 말입니다.
언젠가 제가 형님께 짧게 말씀드린 적이 있는 걸로 기억합니다. 부모의 이혼으로 저는 고아원에서 자랐습니다. 고아원에서 자랐다는 것이 무슨 큰 자랑이겠습니까마는 그렇다고 가리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연약한 뼈와 근육과 정신을 단련 시킨 도장이며 아름다운 추억이 소복한 곳이기도합니다. 원장아버지는 그리 나쁜 분은 아니었지만 (개인적으로는 매우 고맙게 생각함) 원생들의 교육에는 관심을 두거나 신경을 쓰는 분은 아니었습니다. 초등학교 담임선생님(5~6학년 연임하셨고 함자는 韓,重字,雨字)께서 거의 편애에 가까운 사랑을 듬뿍 쏟아 부어 주셨기에 저는 학교에 가는 것이 가장 미안하면서도 즐거웠습니다. 중학교는 성명여중 장학생 선발 시험을 볼 수 있도록 참고서와 수련장, 학용품, 양초 등을 챙겨 주셨습니다. 조그만 변두리 학교라 전기도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형님, 아무리 생각해도 저라는 존재가 선생님께 큰 짐이 되는 것만 같았습니다. 시험은 열심히 공부하면 행여 합격 된다 하더라도 교복이나 책, 가방, 또는 신발, 차비 등으로 선생님께 폐를 끼칠 것이 불을 보듯 훤 했으므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2학기부터는 아예 학교에 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럴 때면 으레 앞에서 말씀드린 학교 뒷산 당산목을 향해 올랐습니다. 제 피난처였거던요. 나무 앞에 서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냥 좋았습니다. 나무에서 나오는 힘을 깊이 들이키면 마음이 너그러워지면서 정신의 키가 쑥쑥 자라나 세상 어떤 어려움도 이겨나갈 용기 같은 게 불끈 생겼습니다. 햇빛 받아 반짝이는 잎사귀들이 깨어 있도록 나즈막히 일러 주는 것 같기도 했거던요. 꿈의 눈 높이가 너무 높았나요? 형님, 저요, 대단한 욕삼꾸러기죠? 전 제 나무를 닮고 싶었거던요.그게 얼마나 어려운 건지는 너무 어렸고 철이 없었지요.
살아가는데 정말 필요한 것은 지식보다는 지혜, 사랑, 인내 같은 거라고 생각하며 언젠가 제 힘으로 공부하리라고 다짐했지요. 진부한 말 같지만 인생은 긴 마라톤이 아니겠습니까? 형님, 망 육십의 나이에 검정고시를 거쳐 방송대 국문학과 공부를 시작한 것은 제 나무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하여튼 그 때의 제 좁은 소견으로는 선생님 곁을 떠나는 것만이 선생님의 짐을 덜어 드리는 길이라고 여기면서도 가슴이 마냥 시렸습니다.
그 때부터 선생님과의 피 나는 추격전이 벌어지고, 어쩌다 잡히는 날이면 거의 탈진될 만큼 체벌세례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선생님은 저를 아끼셨고 장래를 생각하시고 가르치려 애 쓰셨습니다. 어린 제자는 선생님을 존경하고 그 분의 의중을 알았기에 혹독한 체벌이 전혀 섭섭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맞는 것이 행복했고 사무치게 고마웠습니다. 선택된 은총의 체벌이었으니까요. 사제간의 미묘한 싸움은 고집 센 제자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제가 공부를 전혀 하지 않았으므로 "장미전쟁’은 ‘백일전쟁’으로 막을 내리고 제 개인사에 울퉁불퉁한 빗금으로 남아 있었지요. 졸업식을 마친 후 선생님께서 제게 다가 오셔서 하시던 이 말씀이 지금도 살아서 제 귓전을 맴돕니다.“정숙이는 커서 이 다음에 꼭 훌륭한 시인이 되도록 해라.”
수소문 끝에 선생님 댁 전화번호를 알 수 있었습니다. 형님, 저는 한 숨도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혹시라도 돌아가셨으면 어쩌나 싶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는데. 선생님과의 통화에 성공했습니다. 처음엔 잘 모르시는 것 같았습니다. "매천초등학교 8회 졸업생이며 고아원에서 자라던 김정숙입니다”라고 말씀드렸더니 기억 하시더라구요. 깜짝 놀라시는 것 같았습니다.
선생님을 뵙기 위해 나서는 길은 왜 또 그렇게도 설레던지요. 늦게나마 공부한다는 것이 제 발걸음을 떳떳하게 만드는 거 있죠? 게다가 조상 전래의 문화유산인 시조문학을 연마하고 있다는 것이 더욱 더 뿌듯해져 오더라구요. 그 날은 2003년을 떠나보내는 12월 31일이었구요. 형님께서 제게 엽서를 보내시는 날이기도 했습니다. 손가방 속에는 세세로 물러 받은 자랑스러운 우리말로 그 동안 바늘에 수 없이 찔려 가며, 한 땀 한 땀 수 놓았던 습작 중에 가려 뽑은 정형시 10편 정도가 깨끗한 봉투 속에 얌전하게 들어 있었습니다.
형님! 괜시리 콧부리가 찡해 왔습니다, 저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겁니까? 선생님께 가는 길이 자꾸만 뿌옇게 흐려왔습니다.
좋은 한해 되시고 형님 가정에 행운이 가득 하시길 빕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아우 정숙 드림.
첫댓글 찡합니다.언니 삶의 페이지마다 영근 투명한 소금기에 가슴 적십니다.언니를 보면 막연한 질문에 해답을 얻은 거 같은 힘을 얻어요.늘 그자리에 서 있어 주시길 바래요.언니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
언니 ... 두꺼운 가마솥에 투박한 사골뼈와 뻑뻑하고 뿌연 곰국입니다 ...너무 진하군요
이부자리 속으로 가는 길이 자꾸만 뿌예질 거 같습니다. 내내...... 오늘 밤 내 영혼을 울리게 만든 좋은 글 감사 드립니다. 오늘 밤 쉬이 잠들 수 있을까요?
함께 나눌 수 있는 '새미님'들이 있어 행복합니다. 선생님 만나 뵙고 반 세기 가량 막혀있던 가슴 속의 옛이야기들을 풀어 놓으니 후련했습니다.
아름다운 사람. 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