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부모님을 모시려는 꿈을 이룬 기적같은 생애
신명희(아내 김영미) 가정
1. 출생 배경 2. 통일교회 입교 3. 참부모님을 모시기 위한 기도와 정성 4. 나의 아내를 만나는 날 5. 아내를 맞이하기 위한 십자가의 길 6. 3년 임지동원 말씀의 전사로 활동 7. 참부모님 모심의 생활 8. 몽시 안내 및 쑥뜸 치료 9. 경호 책임 사명 완수 10. 참부모님의 제주도 섭리 11. 아시아포럼 사장으로 발령 12. 참부모님 고향 정주방문 13. 마무리
1. 출생 배경
강화도에는 단군 왕검의 세 왕자가 쌓았다는 정족산 삼랑성 사적(史蹟)이 있다. 거기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전등사 사찰이 있다. 마니산 정상에는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드리기 위해 쌓았다고 전하는 참성단(사적136호)이 있고, 산과 바다가 어우러져 계절마다 뿜어내는 색다른 단풍은 일품이다. 또한 고려의 수도였던 개경이 눈앞에 보이고, 남한의 수도인 서울이 지척(咫尺)에 있다. 한반도의 젖줄로 유명한 한강과 임진강이 바다로 흐르는 출구를 막는 중요한 요충지에 있다. 고려시대에는 몽골군과 40년을 싸운 항전의 역사가 있고, 조선시대에는 강화도를 나라의 심장과 같다고 하여 심도(沁都)라 했다.
나는 이런 유서 깊은 강화군 하점면 장정리의 봉천산(奉天山) 고을에서 태어났다. 봉천산(奉天山)은 받을봉(奉) 하늘천(天)자로 하늘을 받든다는 뜻이며, 참아버님의 호(號) ‘봉천(奉天)’ 이기도하다. 그래서인지 강화군에서는 봉천산 기슭에서 축복가정이 많이 배출되었다. 고령신씨 26대 후손으로 아버지(신대식)와 어머니(남정희)의 사이에서 태어난 나는 5남 4녀 중 막내였다. 그 당시는 보릿고개로 모두가 허리를 졸라매고 배고픔의 고통을 이겨야 하는 먹고 살기 힘든 시기였다. 그러나 부모님이 어려운 가운데 자수성가하시고 “하점면에서 제일 잘산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부유한 가정이었다. 덕분에 나는 남부럽지 않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
부모님은 농사일로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한시도 쉴 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셨다. 그러한 환경에서 자라서인지 두 살 위의 형(창희)과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농사일에 관심이 많았다. 그 시절에는 시설재배를 거의 하지 않는 상황인데, 형과 나는 비닐하우스를 지어서 실험 재배하였다. 5월에 벌써 가지, 오이, 호박, 상추 등 여러 가지 작물을 생산하여 판매하였다. 제철보다 일찍 나오는 작물들을 보면서 사람들은 신기해하면서 구입하여 수입이 좋았다. 마을 사람들이 우리를 따라 하기 시작했다. 마을의 수익 창출도 향상되었다. 그때 내 나이 12살이었다.
또, 집 마당 한쪽에 돼지우리를 짓고 학교를 오가며 아침저녁으로 먹이를 주어 정성껏 키우니 1년 후 어미돼지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와 먹이를 주려고 돼지우리에 가보니 돼지가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께 여쭈어 보았더니, 돼지 장사가 와서 팔라고 하여 파셨단다. 나와 한마디 상의도 없이 팔아 없애신 것이었다. 어린 마음에 돼지우리에 주저앉아 한참을 울었던 기억이 난다. 요즘 같으면 휴대폰이나 전화로 아들의 의견을 물어봄직 하지만, 그 때는 학교에서 수업하는 아들과 집에 계시는 아버지와의 의견교환이 불가능하였다. 또 자식의 의견보다 가장의 권위를 가진 아버지의 판단으로 일을 처리하는 것이 상례였다. 길을 지나가다가 복돼지 저금통을 보거나 시골에서 돼지 사육 현장을 볼 때마다 내가 사랑하면서 키웠던 돼지가 생각난다.
2. 통일교회 입교
강화중학교에 다니던 형(창희)은 2학년 때 기동전도대원인 1800가정 조선화씨로부터 전도되어 원리를 알게 되었다. 형은 머리가 좋아 학교에서 1등만 하는 우등생이었고. 초등학교 때부터 붓글씨, 글짓기, 웅변대회 등 각종 대회를 나가면 늘 우등상을 받곤 하였다. 하점초등학교는 전교생이 700명 정도였는데, 줄곧 6학년이 전교 학생회장을 맡았지만, 형은 5학년 때부터 2년간 전교 학생회장을 지낼 정도로 특출하였다. 교회에도 다니기 시작한 지 1년 만에 원리강의를 할 정도로 비범하였다.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형과 같이 공부를 하면, 형은 내게 공부는 가르치지 않고 매일 원리강의만 해주곤 하였다. 나는 그때부터 형 덕분에 원리를 알게 되었고, 중학교 2학년 때 자연스럽게 입교하여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 방학 때면 원리수련을 갔고, 7일 금식을 하니 부모 형제의 반대와 핍박이 시작되었다. 나는 학교에서 일찍 돌아와 소꼴을 베고, 각종 집안일을 도왔지만, 교회에 다니느라 일을 소홀히 하다 보니 반대를 더 받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서울에서 학교 교사와 장학사로 시무하는 숙부님이 오셔서 “통일교회는 음란한 이단 교회이기 때문에 다니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여 집안 식구들의 반대는 더욱 심해졌다.
그러나 반대를 하면 할수록 나는 교회에 더 열심히 다녔고, 부모님 몰래 방학 때마다 7일 수련과 학생 총회를 다녀오곤 하였다. 수련을 받고 오면 부모님께서는 혼을 내시며 수료증과 원리강론, 찬송가, 성가를 아궁이에 태워 버리셨다. 그것이 남아 있다면 귀한 가보가 될 것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형은 인천 제물포고등학교에 다니면서 인천교구 학생회장으로서 활동을 하였고, 나는 강화교회에 학생회장을 맡아서 학생회를 이끌어 나갔다. 전국 학생 총회 때면 형이 늘 원리강의, 웅변, 퀴즈 대회 등에서 상을 휩쓸다 보니, 고등학교 3학년 때는 협회에서 다른 사람도 1등 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며 원리강의 대회에 그만 나오라고 하여 채점 시간에 찬조 강의를 한 적도 있다.
형은 서울대학교 법대를 목표로 입시공부를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어느 날 불의의 사고로 스무 살 젊은 나이에 안타깝게 영계에 가게 되었다. 그때가 나는 꿈 많던 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너무 큰 충격을 받아 매일 형 생각에 눈물로 밤을 지새우곤 하였다. 함께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자고 형과 약속했는데,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면서 슬픔에 잠겨 공부를 소홀히 하였다.
그렇게 장기간 슬픔에 젖어 있던 중에 형의 기일이 되던 날이었다. 나는 형을 위해 기도를 하면서 형 생각과 슬픔으로 비통한 상태에 있었다. 그러자 하늘이 나에게 깨달음을 주시는 음성이 들렸다. “네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은데, 이렇게 수심에 잠겨 슬퍼만 하고 있으면 되겠느냐! 네가 할 일을 찾아 일어서라!” 몽둥이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그날 이후 마음을 정리하고 슬픔에서 벗어나 정상적인 생활을 하게 되었다.
3. 참부모님을 모시기 위한 기도와 정성
성화학생 시절 고등학교 2학년 어느 날 협회 정수원 총무부장께서 강화교회에 순회를 오셨다. 그 당시(1977년)에는 협회장이나 총무부장을 하늘같이 높은 어른으로 생각하고 귀하게 모셨다. 그런 분을 모시고 온 수행원과 기사가 어린 내 마음에 너무 부러워 보였다. 그래서 나는 그날, “다음에 내가 성장하면 참부모님을 모시겠다.”는 목표로 새로운 꿈을 갖게 되었고, 참부모님을 모시기 위한 기도와 정성을 들이기 시작했다.
참부모님을 모시기 위해서는 성품과 마음가짐, 마음의 기준을 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갖추어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만 19세가 되자마자 운전면허시험에 응시하여 면허증을 취득하였고, 운수업을 하는 매형의 권유를 받고 영업용 화물차를 구입하여 운수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부모님이 차를 구입해 주시겠다고 했지만 나는 부모님에게 의지하는 것이 싫었고, 나 자신이 나태해질 것을 염려하여 일가친척들에게 350만원을 빌려 차를 구입하였다. 그 돈의 가치는 1979년 당시 강화에서 양옥집 한 채 값이 되었다.
나는 1년 안에 빌린 돈을 갚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새벽 4시부터 밤늦도록 열심히 일을 하면서, 밤을 꼬박 새우는 경우가 허다했다. 하루 네 끼를 먹어도 부족할 나이지만, 빚을 갚기 위해 식사를 거를 때도 많았다. 너무 무리하여 몸이 지치고 허리가 아파 운전하다가 아스팔트 위에 드러눕기도 하였다. 그렇게 고생하여 1년 만에 빚을 다 갚을 수 있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새벽 기도회에 참석하여 정성을 들였다. 교회에 필요한 강단용 참부모님 의자를 사들이고, 겨울이면 너무 추운 A타입 교회 성전에 대형 온풍기를 설치하고, 예배용 성전의자를 구입하는 등 어려운 교회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하고 헌신 봉사하며 신앙을 다져왔다. 주일이면 멀리 시골에 사시는 식구들이 두 시간씩 걸어와서 예배를 보곤 하였는데, 내 차로 이분들을 모셔오고 또 모셔 드리곤 했다.
그때 강화교회에 1978년 약혼 축복을 받은 대원들이 임지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명희씨는 앞으로 무슨 일을 하고 싶으세요?”고 물어보았다. 나는 서슴없이 “참부모님을 모실 겁니다.”라고 대답했더니, 그분들은 어이가 없다는 듯 그냥 웃고 말았다.
1980년 1월 추운 겨울날, 21일 수련을 받으러 가려고 준비하고 교회 성전에서 기도를 드리고 나왔는데, 갑자기 내 자동차에 화재가 나서 전선이 다 타버리고 뼈대만 앙상하게 남아 있었다. 원인을 알 수 없었다. 이 일을 수습하려면 수련은 포기해야만 했다. 사탄이 수련을 받지 못하게 하려고 나를 시험하는 것 같아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 차를 그냥 내버려두고 미련 없이 수택리로 갔다. 만약 내가 자동차 문제에 더 신경을 쓰면서 수련에 불참했다면, 결코 참부모님을 모시는 영광스런 기회를 못 가졌을 것이고, 축복가정도 안 되었을 것이다. 그 때를 생각할 때마다 내가 판단을 잘 했다고 자부한다.
4. 나의 아내를 만나는 날
1981년 5월, 중앙수련소에서 약혼 축복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축복을 받기 위해 운수사업을 하면서 40일 조식 금식을 하며 정성을 들였다. 나는 23살의 나이로 약혼 축복 대상자 자격요건에 미달되었지만, 성화한 형이 살아 있었다면 축복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형을 대신해서 축복을 받기로 마음먹었다. 인천교구장님을 찾아가 사정을 말씀드렸더니 바로 축복 대상자로 허락해 주셨다. 부모님께도 약혼을 하러 간다고 말씀을 드렸다. 혹시라도 반대를 하시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그동안 부모님께 신뢰를 쌓아서인지 “그래 내가 너를 믿는다! 참한 색시 만나기를 바란다.”하시며 바로 허락을 해주셨다.
중앙수련소 강당에는 약혼 축복을 받기 위해 선남선녀가 좌우로 앉아 있었고, 가운데 통로로 아버님께서 오가시면서 짝을 지어 주셨다. 아버님께서는 남자 또는 여자를 먼저 세워놓고 상대를 고르셨는데, 나는 서 있는 상대가 예쁘고 참하게 생겼으면 고개를 들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고개를 숙이곤 했었다. 그것은 비단 나만 그러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참이 지나도 아버님께서 나를 세워주지 않으셨다. “하늘은 자기 주관이 있으면 약혼상대를 안 해주시고, 모든 것을 하늘 앞에 맡기고 어떠한 상대를 해주어도 감사히 하겠다는 맘을 가져야만 해 주신다.”는 목사님의 말씀이 문득 생각났다. 그래서 나는 하늘 앞에 “하나님 아버지, 어떠한 상대와 해 주셔도 감사히 받겠습니다.”하고 기도를 드렸다.
그러자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1분 정도 지났을까! 저 앞 단상에 계시던 아버님께서 나를 보고 다가오시더니 일어나라고 하셨다. 그러시곤 다시 앞에서부터 여성들을 일일이 보시며 오시더니 한 사람을 일으켜 세우셨다. “너 일어나. 너!” 하신다. 그 여성은 그래도 고개를 푹 숙이고 일어나지 않았다. 아마도 내가 맘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옆 사람들이 “언니, 언니~ 일어나. 아버님께서 일어나라고 하셔.”라고 하자 그때서야 마지못해 일어났다.
아버님께서 대상에게 “이마에 머리 치켜 올려봐~ 귀 좀 보자” 그러시더니 “그래 좋다” 하신다. 그래도 대상이 머뭇거리고 서 있으니까 “야, 이 녀석아 너보다 더 나은 사람이야. 가서 만나봐.”라고 하셨다. 그때서야 나에게 걸어 나와 나란히 섰다. 그 모습을 보시더니 참아버님께서 “그래 됐다. 보기 좋다.”고 하셨다. 우리는 밖으로 나와 3시간 동안 서로 이야기를 나누곤 약혼 축복을 받기로 하고 참부모님께 경배를 올렸다. 우리들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 인연은 행복의 출발이 아니고, 시련과 역경의 시작이었다.
5. 아내를 맞이하기 위한 십자가의 길
약혼을 하고 대상과 함께 강화에 계신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기 위해 찾아뵈었다. 부모님은 “후덕하니 맏며느리같이 생겨 참해 보인다.”고 하시며 좋아하셨다. 나주 처가댁에도 인사를 드리러 갔는데 장인 장모님도 만족해하시며 좋아하셨다. 그러나 큰처남이 우리의 약혼을 한사코 반대하였다. 큰처남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장로교 노회장을 맡고, 또 태권도 관장으로 국기원 심사위원을 하고 있었다. 장로교에서는 가족 중에 통일교를 다니는 사람이 있으면 장로 직분을 유지할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큰 처형이 1800가정 축복을 받을 때에도 많은 반대를 하였고, 동생들은 절대 통일교회로 전도해서는 안 된다는 다짐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에서 만난 것이 아니라, 연애로 만났다고 거짓말을 하였다.
1981년 여름 어느 날, 나는 원주 일화 대리점을 운영하고, 대상은 합천교회에서 임지생활을 하고 있었다. 마침내 큰처남이 내가 통일교회에서 약혼한 사실을 알고 밤 11시에 전화로 노발대발하는 것이 아닌가. 화가 이만저만 난 것이 아니었다. 악의든 선의든 거짓말은 결코 오래가지 않는 법이다. 큰동서가 춘천에서 일화 대리점을 하고 있었는데, 내게 다음 날 동서 집으로 오라고 하였다. 나는 혼날 것을 각오하고 아침 일찍 춘천 동서 집으로 갔다.
큰처남이 이번에는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란 것을 알고 동서와 처형과 나는 큰처남이 어떠한 행동을 해도 우리는 말대꾸하거나 대들지 않기로 약속을 하였다. 자칫 큰 언쟁이 생겨서 축복을 받지 못하는 상황까지도 갈 수 있었기 때문에 잘못이 없어도 무조건 잘못했다고 하자고 약속을 했다. 그리고 만일에 대비하여 강원교구 목회자 몇 분을 오시게 했다.
큰동서는 다른 곳으로 피신해 있었고, 처형이 임신 9개월이었다. 처형과 나만 만나기로 하고 기다리고 있으니 잠시 후 처남이 몹시 화가 난 모습으로 들이닥쳤다. 목회자분들이 와 계신 것을 보고 처형과 나만 남고 다들 나가라고 완강하게 주장하니, 목사님들은 하는 수 없이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처남이 우리 두 사람을 안방으로 들어오라고 하더니 무릎을 꿇으라고 하였다. 처남은 오늘 너희 둘 다 죽이고 나는 자수하기 위해 춘천경찰서가 어디에 있는지 찾아보고 오는 길이라며 겁을 주었다. 거친 자세로 방을 한번 휘~ 둘러보더니 벽에 걸려있는 참부모님 존영을 보고는 두 손으로 잡고 확~ 뜯어내어 방바닥에 내동댕이쳐 버렸다. 그러자 방바닥에 유리조각이 흩어지고 존영과 액자는 산산조각이 났다. 참부모님께 송구스럽고 죄송스러워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지만 이를 악물고 참아야만 했다.
이후 종이 한 장을 꺼내더니 우리가 약혼 축복을 받기 위해 거짓말을 한 내용을 하나하나 따져 물었다. 이미 질문 사항을 상세히 적어왔다. 나는 하는 수 없이 통일교에서 약혼 축복을 받았다고 시인을 하며 거짓말을 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그러자 사정없이 내 뺨을 때렸다. 온 힘을 다해 후려치니 나는 유리조각이 흩어져 있는 방바닥으로 나뒹굴 수밖에 없었다. 계속해서 하나하나 따지면서 계속 뺨을 때렸다.
얼마나 맞았을까?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임신 9개월 만삭인 처형을 발로 걷어찼다. 나는 뺨을 십 수대 맞았지만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악에 바쳐 눈물도 나지 않았다. 너무 억울해 도저히 참을 수 없었지만, 이를 악물고 견뎌내야만 했다. 만약 여기서 대들었다가는 축복은 고사하고 생명도 부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분위기는 험악하였다.
“너희들은 절대로 결혼할 수 없고 당장 헤어지라.”고 윽박질렀다. 만일 통일교에서 결혼을 한다면 그때는 나도 어떻게 할지 장담할 수 없다며 결혼은 절대 안 된다고 하였다. 나는 “지금 이 모습을 보고 계실 하나님은 얼마나 안타깝고 서러워하실까?”라고 생각하였다. 너무 억울하고 분하였지만, 하나님과 참부모님의 심정을 생각하며 축복을 받기 위해 이를 악물고 참을 수밖에 없었다.
한참 후 나는 집을 나와 강화로 가기 위해 버스에 몸을 실었다. 버스 안에서 나는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아파서가 아니었다. 지금 이 모습을 보시고 가슴 아파하실 하나님과 참부모님께서 그동안 기독교인들로부터 핍박을 받으시며 고난을 당하신 서러움을 생각하니 너무도 분하고 참을 수가 없었다. 춘천에서 강화까지 가는 5시간 내내 눈물을 흘렸다. 손수건이 다 젖어서 물이 주르륵 흘렀다. 눈이 퉁퉁 부어서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내일은 아침 일찍 군 입대를 하는 날이라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러 가야 하는데 차마 이 얼굴로 인사를 드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강화교회로 갔더니 교역장님이 내 얼굴을 보시고 자초지종을 들으시고는 마음 아파하시며 위로해 주셨다. 교회에서 잠을 자고 다음 날 아침 일찍 부모님에게 인사만 드리고 훈련소로 향했다.
몇 개월 후 장인어른께서 위독하시다는 소식을 듣고, 아내가 합천에서 임지생활을 하다가 간병을 하기 위해 나주 고향집으로 갔다. 장인어른은 말씀도 하지 못하시고 사경을 헤매실 정도로 위독하셨는데, 건넌방에서 큰처남이 아내의 목을 잡고 “결혼을 하면 면도칼로 얼굴을 그어버리겠다.”고 위협을 하였다. 아내가 겁을 먹고 비명을 지르니 안방에 누워 계시던 장인어른께서 갑자기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며칠 전부터 숨이 차서 일체 말씀을 못하셨는데, 아내가 지르는 소리를 들으셨는지, 혼신을 다해서 “네 이놈!” 하셨다. 그 소리가 들려 모두 깜짝 놀라 달려갔다. 장인은 힘들게 나지막한 소리로 “내가 결혼을 승낙했는데, 네가 왜 반대를 하느냐!”고 나무라셨다. 그제야 큰처남이 “아버지,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하며 노기를 누그러트렸다.
그러고 나서 다시 장인어른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며칠 후 영계로 떠나셨다. 말씀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마지막으로 유언을 하듯이 우리의 결혼 허락을 하시고 눈을 감으셨다. 그 후 큰처남은 두 번 다시 우리의 결혼에 대해 거론하지 않았다.
6. 3년 임지동원 말씀의 전사로 활동
내가 원주에서 일화 대리점을 운영하고 있을 때, 남자들도 3년 임지 동원령이 내려졌다. 사업 때문에 많은 고민이 있었지만 나는 하늘 뜻에 순종하기로 했다. 임지로 출발하는 날,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고 가기 위해 강화 집으로 갔다. 엄하신 아버지께는 차마 말씀을 드리지 못하고 어머니에게만 임지를 간다고 말을 했다. 어머니는 일화 대리점은 어떻게 하고 가느냐고 하시며 말리셨다. “어머니, 사업이 문제가 아닙니다. 저는 하늘에 뜻을 이뤄 드리기 위해 임지로 가야 합니다.” 하며 어머니를 설득하였다. 그래도 안 된다며 극구 반대하시는 어머니를 뿌리치고 가방 하나 달랑 들고 집을 나섰다. 그러자 어머니께서 마당까지 달려나와 나의 손을 꼭 잡고 “꼭 가야만 하느냐?” 하시며 눈물을 흘리셨다. “네. 어머니 저는 임지로 가야 합니다. 지금 임지를 가지 않으면 나중에 너무 후회할 것 같습니다. 저는 이 길을 꼭 가야만 합니다.”라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어머니께서는 낙심을 하시고 “그럼 몸 건강히 잘 다녀오너라.” 하시면서 내 손을 힘없이 놓으셨다.
어머니의 그 모습을 보고 서 있으니 불효를 하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어머니에게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아 절을 올리고 뒤돌아서 버스정류장으로 달려갔다. 나는 동네 어귀에서 뒤를 돌아보니 어머니께서 옷고름으로 눈물을 훔치시며 떠나는 아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보고 서 계셨다. 나는 임지를 출발하면서 뜻길을 몰라서 반대하시는 부모님을 3년 임지 기간 동안 교회에 나오시도록 전도하겠다고 하늘 앞에 다짐하였다.
나의 임지는 서울 제기동이었다. 교회에 도착해보니 교회가 아닌 가정집이었다. “430가정 이상 수도권에 동원하라.”는 명령에 따라 순종하는 마음으로 식구도 없이 어렵게 목회를 하시는 남호현 목사님의 가정교회였다. 집이 너무 좁아 임지 생활을 할 수가 없어서 교회장께서 고려대학교 앞에 작은 월세 방을 얻어 주셔서 다른 대원 한 명과 함께 생활하였다. 한 달에 21일은 전도활동을 하고 10일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사업을 해야만 했다.
나는 임지를 출발할 때 다소 경제적인 여유가 있어서 돈을 넉넉하게 챙겨 임지로 나올 수도 있었지만, 일부러 그러지 않았다. 선배들이 그랬듯이 고생을 하면서 뜻길을 가기 위해 한달 생활비 정도만 가지고 임지로 출발하였다. 얼마 후 가져온 돈도 다 떨어지고 매일 삼시 세끼를 라면으로 때우곤 하였다. 영양부족으로 앉았다 일어나면 하늘이 노래지고 어지러워 쓰러질 것 같았다. 나는 21일 동안은 가가호호를 방문하면서 전도활동을 하고, 10일간의 사업기간에는 일화 용인공장에 폐병을 납품하는 광명교회 식구 분의 주선으로 난지도 쓰레기 매립장에서 화물차에 폐병을 싣고 용인 병공장까지 운반하는 힘든 일을 했다.
폐병 자루는 무게가 60~70kg 정도 되었다. 혼자서 200자루 이상을 큰 트럭에 싣고 용인까지 배달해야만 했다. 그때는 지게차가 없었기에 전부 어깨에 메고 실어야만 했다. 보광동 대원 한 명도 같은 일을 하였는데, 너무 고되고 힘들어서 늑막염이 걸려 그만두었다. 그만큼 힘든 중노동이었다. 마치 참아버님께서 흥남 감옥에서 비료 포대를 어깨에 메고 싣는 모습을 연상케 할 정도로 고된 일이었다.
그 무렵 나에게 좋지 않은 소식이 들려왔다. 원주 일화 대리점을 동서에게 맡기고 임지로 나왔는데, 불과 몇 개월 만에 부도가 났다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임지생활을 포기하고 수습해야 할 상황이었지만. 임지를 지켜야 한다는 마음에 사업장 수습을 동서에게 맡기고 사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임지사업부에 동원되어 펀드레이징을 하던 아내가 이 소식을 듣고, “부모님이 아시면 걱정하시니 내가 사업을 해서 대리점에 투자한 돈을 벌어 놓을 테니까 알리지 말자.”고 제안하였다. 아내는 임지 3년 기간을 수료하고 그 후 3년 동안 주일 외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하루도 쉬지 않고 떡 가방을 메고 서울 시내를 다니며 떡을 파는 사업을 했다. 어느 날은 가방을 메고 계단을 굴러 온 몸이 상처투성이가 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아내는 다음날 또 가방을 메고 나갔다. 그런 아내의 모습을 보니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그 후로 지금까지 물질적으로 큰 힘이 되어준 아내에게 미안하고 정말 고맙고 자랑스러웠다. 아내는 강화교회가 어렵다는 소식을 듣고 매달 십일조를 강화교회로 하였다.
이후 협회에서 기동대원들을 재편성하였다. 나는 서울 제2기동대로 소속되어 강서교회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때 박규남 기동대 대장이 순회를 오셨는데, 다음 순회 장소로 가실 때 운전도 서툴고 길을 잘 몰라서 내가 목동교회까지 모셔 드렸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한 달 후 협회 기동대 사무실에서 “기동대장님이 전국 순회를 해야 하는데 함께 모시고 다니자.”는 부탁을 받았다. 그 후 지방순회를 몇 차례 모시고 나서 협회 기동대 사무실에서 계속 근무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10개월 후 박 기동대장님이 승공연합 총장으로 발령이 났다. 나에게 같이 가자고 해서 승공연합에서 근무를 하게 되었다. 며칠 뒤 협회장께서 “왜 협회 직원을 허락도 없이 마음대로 데려가느냐?”고 꾸중하시며 다시 협회로 돌아오라고 하셨다. 박 총장님은 마지못해 협회로 다시 돌아가라고 하셨다. 1년 동안 협회에 근무하면서 이재석 협회장님을 모시게 되었다. 1985년 11월 참부모님께서 귀국하시자 협회장께서 그동안 고생이 많았다며 “이제부터 한남동에 가서 참부모님을 모시라.”고 지시하셨다.
이 협회장께서는 “그동안 내가 지켜보니 모시는 분에 대해 말을 함부로 옮기지 않으며, 모심의 생활을 신앙적으로 열심히 하고 모범적이었다. 한남동에 가서도 지금과 같이 참부모님을 모시면 좋아하실 것이다.”라고 하시면서 나를 보내주셨다. 그때부터 참부모님을 모시게 되었다. 드디어 고등학교 2학년 때 참부모님을 모시겠다고 다짐했던 간절한 꿈이 7년 만에 이루어지게 된 것이었다. 정말 꿈만 같았다.
지난날들을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니 다 연결이 되어 있었다. 임지에 동원되어 활동하게 하고, 대리점 사업이 부도났는데도 임지를 지킨 것, 또한 박규남 기동대 대장이 순회 왔을 때 길을 몰라 내가 안내하게 한 일, 승공연합으로 갔을 때 다시 협회로 돌아오라고 하신 협회장의 말씀 등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서 내가 참부모님을 모시게 하도록 배후에서 역사하신 과정이었다. 모든 것이 하늘 앞에 감사했다.
그리고 임지를 출발할 때 다짐했던 또 하나의 꿈인 가정복귀의 소망이 이루어졌다. 아들이 가는 신앙 길을 이해하지 못하고 반대만 해오시던 부모님을 설득하여 강남교회에서 7일 수련을 받으시게 했다. 7일째 되는 날, 부모님이 수련을 받으시고 어떻게 변하셨을까 하고 마음 졸이며 강남교회로 찾아갔다.
수련소에 도착하자 어머니께서 기다리셨다는 듯이 나를 보고 달려 나오시면서 내 양손을 덥석 잡으시더니 “얘야, 너는 어떻게 이렇게 좋은 말씀이 있는 교회를 알고 다니게 되었니? 우리 자식들 중에 네가 제일 낫다. 우리 아들이 자랑스럽구나. 내가 그동안 아무것도 모르고 반대만 해서 미안하다.” 하시며 눈물을 흘리시는 것이었다. 나도 “어머니, 감사합니다.”하며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다.
임지 출발할 때 하늘 앞에 다짐하고 기도했던 소원들이 다 이뤄진 것이었다. 그 후 부모님은 3만가정 기성축복을 받으시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시며 나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주셨다.
7. 참부모님 모심의 생활
꿈이 현실로 이루어진 내 나이 스물 다섯 살, 철없는 시절에 참부모님을 모실 수 있었다는 것은 지금 생각해보면 상상할 수도 없는 기적 같은 일이었다. 나는 참부모님의 신변과 안위를 위해 늘 기도와 정성을 들였고, 모심의 생활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하루 세 시간밖에 안 주무시며 섭리를 이루시기 위해 동분서주하시는 참부모님을 안전하게 잘 모시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고, 신경 써야 할 일도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나의 개인생활은 상상도 할 수 없었고, 가정을 뒤로한 상태였기에 명절이나 집안 행사에 거의 참석할 수 없었다. 2남 2녀의 자녀가 있었지만 아이들의 입학식과 졸업식에도 참석하지 못하였다. 참부모님을 모시는 기간에는 나 스스로 절제된 수행생활을 하는 자세로 집에 가서 잠을 자지 않았다. 혹시라도 종적인 절대기준이 흐트러질까 염려해서였다.
심지어 나를 낳아준 아버지께서 성화하셨을 때도 가지 못하였다. 그때는 참부모님께서 한국의 대표기업체인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코오롱, 대우조선소, 포항제철 등을 방문하시고, 국회의장을 만나시는 등 중요한 일정이 있었다. 그렇게 정성을 드리시는 참부모님 일정에 혹 누가 될까 봐 말씀을 드릴 수가 없었다. 순회 일정을 다 마치고 나서 참아버님께 말씀드렸더니 다녀오라고 하셔서, 마지막 날에 아버지를 영계에 모셔드려야 했다. 이것은 나에게 가슴 아픈 사연으로 새겨져 있다.
그 시절에는 참아버님께서 새벽에 일어나셔서 아무런 연락도 없이 갑자기 외투 하나 걸치시고 성지나 교회를 방문하시는 일이 잦으셨다. 시도 때도 없이 사전에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느닷없이 출동하시는 경우도 많으셨다. 그럴 때면 경호원과 운전기사들은 여간 당황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실수하지 않고 참부모님을 잘 모시기 위해 경호원 숙소에서 자지 않았다. 정문 초소 앞에 있는 조그만 방에서 선잠을 자면서 늘 긴장된 생활을 했다. 잠을 자는 중에 다른 사람의 걸음 소리에는 깨지 않고 아버님께서 걸어 나오시는 발걸음 소리에는 잠에서 번쩍 깰 정도로 예민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참아버님께서는 성정이 급하셔서 기다리는 것을 싫어하셨다. 그래서 나는 새벽에 일어나 옷을 입고 나가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잠을 잘 때 옷을 벗어 책상 위에 가지런히 얹어 놓고 재킷과 넥타이, 양말은 차 트렁크에 항상 실어 놓았다. 넥타이와 양말을 착용하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서다.
새벽에 아버님 발자국 소리만 들리면, 벌떡 일어나서 급히 바지만 입고 1분 안에 차로 모시고 출발하곤 하였다. 아버님께서 한남동을 떠나신 지 수십 킬로가 지나서야 숙소에서 뛰어올라온 경호원들이 무전기로 어디로 가고 있느냐고 연락해 오면, 아버님께서는 “그 무전기 끄라구! 이 녀석들 미리미리 준비 안 하고, 뭐 하러 따라오는 거야!” 하시며 호통을 치셨다.
어느 날 설악산을 가시는 길이었다. 양평쯤 지나고 있을 때 “설악산까지 몇 킬로 남았나?”라고 물으셨다. 나는 목적지까지 남은 킬로 수와 차 계기판에 기록된 km 숫자를 보고 암산하여 “아버님, 설악산까지 124킬로 남았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놀랍게도 1분 후 길 옆에 설악산 124킬로라는 이정표가 세워져 있었다. 그때는 내비게이션이 없어서 전국 지도를 머릿속에 다 그리고 있어야 했고, 목적지까지 몇 킬로 정도라는 것은 계산하고 있어야만 했다.
돌아오시는 길에도 중간쯤에서 아버님께서 또 물으셨다. “서울까지 몇 킬로 남았나?” 나는 또 차 계기판에 남은 거리를 보고 “아버님, 130킬로 남았습니다.” 라고 말씀드렸는데, 잠시 후 우연인지 모르지만 길가에 서울 130킬로라는 표지판이 또 보였다. 그러자 아버님께서 “너는 몇 킬로 남았는지 어떻게 알았나?” 하고 물으셨다. 나는 목적지까지 거리와 차 계기판의 수를 계산하여 말씀드렸다고 하니 아버님께서 참 기특하다고 칭찬해 주셨다.
어느 날은 예고도 없이 새벽 6시에 나오시더니 속초로 가자고 하셨다. 먼 길을 가실 때는 미리 알려주셔서 준비를 하는데 그날은 아무 준비도 없이 출발을 하였다. 속초에 거의 다 왔을 때 아버님께서 다시 경주로 가자고 하셨다. 아침도 안 드시고 동해안을 따라 경주로 향했다. 가끔 경주에 가시면 코오롱 호텔에서 주무실 때가 있어서 뒤따라오는 수행원들이 경북교구에 미리 연락하여 호텔예약을 하였다. 경주쯤 도찰했을 무렵 다시 부산으로 가자고 하셨다. 부산교구에 연락하여 코모도호텔을 예약하였다. 아침 점심도 드시지 못하셨기에 부산교구에서 차에서 드실 김밥을 준비해 왔다. 그러나 길가에서 교구장의 인사만 받으시고 다시 광주로 가자고 하셨다. 급히 광주교구에 연락하여 신양파크 호텔을 예약했다.
그러나 참아버님은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잠시 쉬시고, 광주 고속도로 톨게이트에서 교구장 인사만 받으시고 다시 서울로 가자고 하셨다. 한남동에 도착하니 새벽 2시가 다 되었다. 하루 동안 20시간을 논스톱으로 달린 셈이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아버님께서는 며칠 후 전국 순회행사가 예정되어 있어서 정성을 드리기 위하여 미리 그날에 한반도를 한 바퀴 돌아보시는 조건을 세우시면서 기도를 하셔야 하는 뜻이 있으셨던 것으로 나는 생각하였다. 참아버님께서는 제주도에서도 가끔 중요한 일이 있을 때 섬을 한바퀴 도시면서 기도와 정성을 드리시곤 하셨다. 다니시면서 관심과 애정과 사랑을 쏟으시면서 정성을 드리는 것이었다.
1998년 미국 이스트가든에 있을 때의 일이었다. 새벽에 갑자기 아버님께서 허드슨강으로 낚시를 가자고 하셔서 모시고 나갔다. 뉴욕의 봄 날씨는 우리나라 장마철처럼 비가 많이 오고 싸늘한 바람이 거세게 분다. 그날따라 날씨가 춥고 하루 종일 비바람이 몰아치며 파도가 거세어 도저히 낚시를 할 수가 없었다. 평소에 그런 날이면 아버님께 낚시 그만 하시고 들어가시자고 진언을 드린다. 그러나 그날은 아버님께서 우비를 쓰셨지만 밖에서 그 비를 다 맞으시고 한자리에 앉으셔서 미동도 하지 않으시고, 심지어 화장실도 가지 않으셨다. 가져온 김밥과 음료수를 드렸지만 하나도 드시지 않으셨다. 배안의 분위기는 숙연하고 긴장되었다. 그런 분위기라서 감히 귀가하시자고 말씀을 드릴 수가 없었다.
새벽 5시부터 저녁 8시까지 15시간을 한자리에 앉아 계시면서 파도와 싸우고 계셨다. 아니 사탄과 판가리 싸움을 하고 계셨다. 우리들은 아버님의 그 심중을 다 헤아리지 못하지만 분명 아버님께서는 지금 어떠한 일을 놓고 정성을 드리시는 것이 분명하였다. 해가 지고 어두워진 한참 후에 아버님께서 일어나시는데 다리가 굳어 걸음을 걷지 못하셨다. 한참을 주물러드리고 나서 부축하여 조금씩 걸으시는데 옷은 비에 다 젖어 있었다. 이상한 냄새가 나서 나는 깜짝 놀랐다. 하루 종일 생리적인 현상이 있었을 텐데 정성 드리시느라 그만 그 자리에서 지리신 것이었다.
그 정도로 심각한 싸움을 하셨던 것이었다. 그 후에 참아버님께서는 미국 양키스타지움에서 축복식을 하신다는 선포를 하셨고, 예수 석가모니 공자 소크라테스 등 4대성인들의 축복식을 해 주셨다. 참아버님께서는 4대 성인들의 축복을 해주시기 위해 하늘 앞에 그렇게 힘든 조건을 세우셨던 것이다. 아버님의 그러한 심중을 감히 누가 헤아려볼 수 있단 말인가?
한번은 내가 우연히 신문에서 우리나라 자동차 종류가 256가지가 된다는 기사를 보았다. 5일 후 참아버님께서 한국 자동차가 몇 종류가 되느냐고 물으셨다. 나는 서슴없이 “아버님 한국 자동차가 256종류입니다”라고 말씀드렸다. 즉석에서 답변을 하는 나를 의아해하시면서 “너 그거 어떻게 알았나?”고 하셨다. 며칠 전에 신문기사를 보았기에 바로 말씀드렸다고 하니 “그래?” 하시며 좋아하셨다. 아버님께서는 나에게 생각지도 않은 질문을 하실 때가 자주 있었다. 그 이후 나는 아버님께서 물어보실 것에 대비하여 신문기사와 일반상식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시간이 날 때마다 각종 정보나 뉴스를 수집하고 정리하는데 시간을 보냈다. 여유를 가질 수 없이 바쁜 나의 일정이었다.
어느 날은 대일밴드를 지갑에 넣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2개를 준비하였다. 며칠 후 어머님께서 새 구두를 신고 걸으시는데 발뒤꿈치가 벗겨지려고 빨갛게 부풀어 올랐다. 어머님께서 아파하시며 대일밴드를 찾으셨다. 나는 얼른 지갑에서 밴드 2개를 꺼내어 발에 붙여 드렸다. 그러자 어머님께서는 빙그레 웃으시며 미소를 지어 주셨다.
나는 하늘이 먼저 아시고 나에게 준비할 수 있도록 안내해 주심에 감사드렸다. 그 후 나는 항상 부모님께서 필요로 하시는 물건들을 준비하고 다녔고, 모시는 언니들이 갑자기 필요한 물건들이 있으면 나에게 달려오곤 하였다. 그때마다 신기하게도 부모님이 필요로 하시는 물건들이 나에게 있었다.
그리고 나는 학생 때부터 사진 찍기를 좋아해 늘 카메라를 가지고 다녔다. 참부모님을 모시면서 사진과 비디오를 찍어 기록을 남겼고, 앨범을 제작하여 참부모님께 보여드렸더니 사진을 참 잘 찍는다고 하시며 카메라를 사 주셨다. 또한 녹음기를 항상 휴대하여 언제 어디서든 부모님의 모든 내용을 역사에 남기기 위해 녹음을 하였다.
8. 몽시 안내 및 쑥뜸 치료
나는 참부모님을 모시면서 실수하지 않고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몸과 마음을 정갈하게 하고 늘 기도와 정성을 들였다. 그래서인지 하늘은 무슨 사고나 큰일이 일어날 것을 미리 꿈에서 보여주시고, 대처할 수 있도록 영감을 주셨다.
어느 날 참부모님께서 미국에서 귀국하신다는 연락을 받고, 귀국하시기 전날까지 차량을 정비하고 완벽하게 준비를 마쳤다. 그런데 그날 밤 꿈에 엔진오일이 새는 것을 보여주셨다. 전날 엔진오일을 다 교환하여 이상이 없을 텐데 하면서도 다시 점검을 해보았다. 놀랍게도 정비공장에서 엔진오일 볼트를 꽉 조이지 않아 오일이 새고 있었다. 꿈에 오일 누수 현상을 보여주지 않으셨다면 큰일을 치를 뻔했다.
그렇게 참부모님을 모시기 시작한 지 7개월쯤 지났을 때, 너무 신경을 많이 써서인지 신경성 위장병과 과민성 대장증후군이라는 병을 앓게 되었다. 매일 설사를 하고 음식을 먹어도 소화가 되지 않아 맵고 짠 음식은 먹지 못하였고 김치도 물에 씻어 먹어야만 했다. 코피가 나면 지혈이 되지 않아 한 사발씩 쏟았고, 체중이 10kg이나 빠져 도저히 모심의 생활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장거리 운전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체력이 나빠져 있었다. 정신력으로 버틸 수밖에 없었고 서울대학교병원, 경희대 한방병원, 연세세브란스병원 등 유명하다는 한의원을 다 찾아 다녔지만 치료가 되지 않았다. 의사들마다 한 결 같이 “이 병은 신경을 쓰지 않아야 낫는 병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신경을 안 쓸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젊은 나이였지만, 긴 병에 장사 없다고 7년간 아픈 몸을 이끌고 참고 견디며 모시다 보니, 오후 일정을 소화하려면 오전에 잠시라도 누워있어야만 할 정도로 기력이 쇠약해져 있었다. 나는 죽을 것만 같았고 이제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하늘 앞에 간절한 기도를 3번 드렸다 “하나님 아버지! 제가 아직 할 일이 많이 있습니다. 이 젊은 나이에 저를 이대로 버리시려 하시나이까? 참부모님을 더 모실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며칠 후 기도를 드리고 잠을 자는데 “쑥뜸을 떠라!”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 보니 꿈이었다. 그 후 나는 단전 위에 쑥을 뭉쳐 직뜸을 뜨기 시작했다. 백일정성을 들인다는 심정으로 이를 악물고 뜸을 떴다. 경호원들 5명과 같이 뜸을 뜨기 시작했는데, 너무 아파서 일주일 만에 다들 포기하였지만 나는 결코 포기할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다섯 뜸부터 시작하여 보름 정도 지났을까, 몸에 기력이 생기며 점점 좋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너무 절실했기 때문에 뜨거워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아팠지만 중단할 수가 없었다. 뜸도 쌀 알 정도의 크기로 시작했던 것이 점점 커져 2개월이 지날 무렵에는 밤알 정도로 커졌다. 횟수도 하루 다섯 개로 시작했던 것을 30개가 넘도록 떴다. 점점 차도가 생겨 병이 하나하나 사라지기 시작했다. 120일간 뜸을 뜨고 나니 몸 안에 있는 병이 싹 사라지고 건강을 완전히 회복하게 되었다.
어느 따듯한 봄날 아버님을 모시고 한남동 정원을 거닐다 잔디밭에 앉아 이런저런 말씀을 나누다가 쑥뜸 간증을 하게 되었다. 아버님께서도 북한에 계실 때 얼굴에 사마귀 같은 것이 있었는데 쑥뜸을 떠서 치료하신 적이 있다고 하시며 쑥뜸으로 모든 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말씀을 해 주셨다. 그 후 부모님을 모시고 미국 본토나 알래스카, 브라질 등 남미를 갔을 때 가는 곳마다 식구들이 모이면 쑥뜸 간증을 하라고 하셨다. 그 이후 참부모님도 쑥뜸을 꾸준히 뜨셔서 건강을 유지하셨고, 한때 식구들 사이에 쑥뜸이 유행하기도 했다.
9. 경호 책임 사명 완수
1996년 임도순 회장님이 경호실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아프리카에서 국가메시아로 활동하셨기 때문에 참부모님 행사의 의전과 경호경비, 운전 등 모든 것을 경호부실장인 내가 책임지고 수행해야만 했다. 그때는 전국대회 행사가 자주 있었다.
어느 날 성남체육관에서 행사가 있을 때였다. 그날따라 아버님께서 컨디션(condition)이 안 좋아 말씀에 힘이 없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매일 전국 순회를 강행하시고, 간부회의를 주재하시며 보고를 받으시는 등, 한시도 쉬지 못하시는 일정의 연속이었다. 말씀하시는 중에 곧 쓰러지실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나는 단상 위로 달려 올라가 힘들어하시는 아버님의 팔을 부축해 단상 아래로 내려와 귀빈실로 모셨다. 아버님께서는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셨다. 힘없이 누워 계시는 아버님을 주물러 드리며 보고 있으니 마음이 아파 눈물이 났다.
단상에 많은 귀빈들이 앉아 있었지만 아무도 아버님께서 힘들어하시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아버님을 늘 주시하고, 일거수일투족을 살폈기에 컨디션 상황을 인지할 수 있었고, 즉각 실천하였다. 행사 때는 부모님의 안전과 안위를 위해 신경을 쓰며, 말씀하시는 톤이나 몸의 움직임 등을 항상 예의 주시해야만 했다. 사탄 세력과 싸우시는 참부모님과 함께 나도 긴장의 연속이었다.
또, 과거에는 참부모님께서 귀빈실에 대기하고 계시다가 행사가 시작되면 미리 이동하셔서 강당 문 앞에 한참을 서 계시다가 사회자가 “참부모님께서 입장하시겠습니다.” 라고 하면 힘들게 입장하시곤 하셨다. 그러나 나는 행사장에 도착하면, 미리 걸음걸이로 귀빈실에서 강당까지의 동선(動線)에 몇 분 몇 초가 소요되는지 미리 걸어서 계산해 보고 철저히 준비하였다. 만일 1분 30초가 걸렸다면 무전기로 경호원들에게 연락하여 행사 시작 1분 30초전에 연락을 하라고 하였다. 그러면 참부모님을 모시고 출발해서 대회장에 도착할 때쯤 사회자가 곧장 “참부모님께서 입장하시겠습니다.”라는 멘트를 하게 되고, 참부모님께서 기다리지 않으시고 곧바로 입장 하실 수 있었다. 그 외 모든 행사를 철저히 하다 보니 참부모님께서 늘 흡족해하셨다.
올림픽 체조경기장 행사 때였다. 보통 부모님께서 행사를 마치고 퇴장하실 때는 주로 내가 앞에서 부모님을 모셨는데, 그날은 왠지 뒤에서 경호하면서 모시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행사 후 참부모님께서 퇴장하실 때는 관중들이 박수 치고, 함성을 지르기 때문에 분위기가 어수선하여 뒤에서 누가 달려와도 알아차리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참부모님을 모시고 관중석 옆을 지나가는데 이상한 느낌이 들어 순간적으로 뒤를 돌아보니 어느 젊은 사람이 위해를 가하려고 아버님께 달려드는 것이 아닌가! 경호원들이 여러 명 있었지만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순간 나는 그 사람을 낚아채어 바닥에 내동댕이쳐 제압을 했다. 1초만 늦었더라면 큰 봉변을 당하실 뻔했다. 하늘이 나에게 대처할 수 있는 순발력과 영감을 주신 것에 감사했다. 그 외에 그동안 모셨던 많은 이야기가 있다.
10. 참부모님의 제주도 섭리
참부모님의 많은 섭리 가운데 제주도 섭리를 빼 놓을 수가 없다. 한국에 계실 때는 제주도 복귀를 하시기 위해 한 달에 5번 이상을 방문하시면서 기도와 정성을 드리셨다. 그 중에 가장 가슴 아프고 잊을 수 없는 사연이 있다. 2011년 11월 27일, 참아버님께서 성화하시기 9개월 전, 제주도를 갑자기 방문하셨다. 점심 오찬을 드신 후 제주도에 있는 통일그룹 재단의 사업체와 토지를 둘러보자고 하셨다. 나는 아버님 차에 함께 탑승하여 안내를 하였다.
저녁 늦게까지 한곳도 빠짐없이 돌아보시고 침울한 표정으로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한참 후 나에게 내일 제주도 도지사를 만나서 한라산에 케이블카를 설치하도록 권유하라고 지시하셨다. 그날 밤 1시까지 말씀을 하시고, 5시에 훈독회를 하자고 하시며 침소로 들어가셨다. 그런데 새벽 3시에 갑자기 아버님께서 찾으신다는 연락을 받고 달려갔다. 아버님께서는 밤새 한숨도 주무시지 않으시고 심각한 표정으로 훈독회를 하자고 하셨다. 아버님께서는 시작하자마자 말씀을 이어 가셨다. 그동안 내가 제주도를 복귀하고 뜻을 이루기 위해 많은 정성을 드렸는데, 그 뜻을 다 이루지 못한 것이 너무나 가슴 아프고 안타깝다고 하시며 말씀 중에 연신 눈물을 흘리셨다.
6시간 동안 물 한 모금 드시지 않으시고 제주도가 책임을 다 하지 못했다 하시며 아침도 드시지 않으시곤 바로 일어나 걸어 나오셨다. 그리고 당신의 성화를 예견이라도 하신 듯 “오늘 내가 제주도를 마지막으로 다녀간다.”고 하시며 흐느끼셨다. 그리고 곧바로 헬기에 탑승하시고 상공에서 제주도를 한 바퀴 돌아보자고 하시면서 창밖으로 보이는 제주도 땅을 내려다보시면서 통곡에 가까운 소리를 내시면서 눈물을 흘리셨다. 지금까지 아버님께서 그렇게 슬퍼하시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아버님께서는 그것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아셨던 것이었을까? 그 후 제주도를 다시는 찾아 주지 않으시고 9개월 후 성화하셨다.
11. 아시아포럼 사장으로 발령
2001년 참부모님께서 나를 제주도 수산업체인 아시아포럼 사장으로 임명하시면서 “너 제주도 가서 말뚝 박으라!”고 하셨다. 그러나 나는 “한 3년쯤 있으면 다른 곳으로 인사이동이 되겠지?”라는 생각을 했다. 일흥수산이란 회사가 있었는데 IMF 때 부도 처리되었다가 아시아포럼으로 새롭게 출발했다. 그러나 아시아포럼 또한 은행 빚이 수십억원에 달해 경영상 어려움이 많았다. 아버님께서 나를 보내시면서 “네가 가서 그 회사를 한번 살려 보라.”고 하셨다. 나는 아버님께 이 회사를 부도 처리하고 새로운 회사를 설립하는 것이 더 좋을듯하다는 진언을 드렸지만, 아버님께서는 50억이 아니라 100억이 들어도 그 회사 그냥 살리라고 하셨다. 나는 3년 이내에 적자를 흑자로 돌리겠다는 결심을 하고, 그 이후 어려운 회사를 살리기 위해 한 번도 양복을 입고 출근을 하지 않았다. 직원들과 함께 현장에서 물건을 만들고 직접 배달을 하였다. 온갖 고생을 하면서 노력한 결과 4년을 맞이하는 해부터 흑자로 전환이 되었고, 10여년 만에 은행대출금을 다 청산할 수 있었다.
아버님께서 그 회사를 살려보라고 지시하신 말씀을 한시도 잊어본 적이 없었고, 나는 그 말씀을 이뤄 드리기 위해 온갖 고생을 하였다. 참부모님께서 나의 승리 보고를 받으시고 “수고했다.” 하시며 회사명을 아시아포럼에서 아시아해양으로 새롭게 지어 주셨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니 하늘이 늘 함께해 주셨기 때문에 사명을 완수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20여 년간 아시아포럼을 책임지고 갖은 고생을 했던 내용은 차후에 기회가 있으면 다시 기술하고자 한다.
12. 참부모님 고향 정주방문
나에게 또 잊을 수 없는 꿈이 이루어진 것은 참부모님의 고향인 정주와 안주를 방문할 수 있었던 것이다. 2001년 기관 기업체 관계자들과 함께 평양 순환비행장에 도착하여 북한 안내원들의 안내를 받으며 참부모님께서 운영하시는 평양 보통강호텔에 도착하였다. 말로만 듣던 북한 땅, 실제로 도착해 보니 가슴이 벅차고 한편으론 두려움도 있었다. 말과 행동을 조심해야 하고 도청(盜聽) 때문에 호텔 안에서도 말을 함부로 할 수가 없었다. 평양 시내를 둘러보며 모란봉 을밀대에서 내려다보이는 능라도와 대동강이 아름답게 보였지만 그곳에 사는 주민들의 모습은 초라하고 남루해 보였다.
참부모님의 고향인 정주와 안주를 향해 가는 길에서는 1960년도에나 볼 수 있었던 목탄차가 보였다. 가을 들녘에 배가 고파 벼 이삭을 주워 까먹는 아낙네들을 볼 때 가슴이 아팠다. 정주까지 가는 길은 고속도로라고 하는데도 우리나라의 70년도에나 볼 수 있었던 시멘트 시골길만도 못했고, 휴게소도 없어 지나다가 여관방 화장실을 이용해야만 했다. 참부모님께서 태어나신 고향 땅 정주와 안주는 옛날 모습 그대로였고 참부모님의 얼과 숨결이 살아있는 것만 같았다. 아버님의 일가친척들이 모두 나와 우리를 환영해주었다. 그러나 그 모습에서 힘들고 어렵게 살아가는 현실을 볼 수 있어 안타깝기만 하였다.
다음 일정으로 묘향산 보현사 절을 둘러보고, 묘향산 지하에 김일성 김정일 기념품을 전시해 놓은 기념관을 관람하였다. 다음날 참부모님께서 설립하신 평화자동차 공장을 방문하기 위해 남포로 출발하였다. 한 시간 정도 달려가는 고속도로는 편도4차선으로 비교적 넓은 도로였지만 길이 평탄하지 않아서 차가 많이 흔들렸다. 그런데 한 시간을 달려가는데도 마주 오는 차가 23대 밖에 보이지 않았다. 나는 안내원에게 지나는 차도 없는데 왜 도로를 이렇게 넓게 만들어 놓았느냐고 물었다. 그의 대답은 “남쪽에 가장 넓은 고속도로가 몇 차선입네까?” 그 당시 경부고속도로가 3차선이었다. “남쪽보다는 넓어야 하지 않습네까!”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헛된 경쟁심에 웃음이 나왔다.
남포 평화자동차 공장에 도착하여 자동차가 생산되는 모습을 보며 참부모님의 위대하심을 알 수 있었다. 그 외 많은 일정이 있었지만 대한민국 모두의 소원인 남북통일이 하루 빨리 이루어지길 마음속으로 기원했다. 남북 왕래가 자유로워지면, 참부모님의 고향을 방문하여서 지난날의 추억을 상기하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찾아보고 헌신 희생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13. 마무리
내가 17세 때 참부모님을 모시겠다며 정성을 들인지 7년 만에 그 꿈을 이루었고, 17년간 큰 사고 없이 참부모님을 모실 수 있어서 하늘 앞에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그동안 온갖 시련과 고통이 있었지만 참부모님 모심의 생활을 천직으로 여기고 모셨던 그때가 제일 행복했고 자부심도 느낀다. 또한 평생을 같이할 배필을 만나기 위해 고난과 무거운 십자가를 등에 지고 견뎌야만 했던 약혼과 축복의 어려움을 감당할 수 있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참아버님께서 부탁한 제주도 사업을 하늘이 이끌어 주심도 또한 감사드린다.
참부모님을 모실 때는 개인생활은 전혀 생각할 수도 없었다. 오직 참부모님의 신변 안위를 위하는 희생 봉사의 생활이었다. 아내는 내가 모심의 생활을 충실히 잘할 수 있도록 늘 뒤에서 협조하면서 가정을 홀로 돌보며 자녀들을 반듯하게 키워 주었다. 아무리 감사해도 부족한 심정이다. 아내는 막내며느리이지만 맏며느리처럼 시댁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 시부모님을 공경하고 형제간에 우애할 수 있도록 헌신과 배려로 역할을 다 해 주었다. 나는 늘 감사하게 생각한다.
얼마 전엔 천정궁에서 40여 년간 참부모님을 모시고 있는 분이 나를 칭찬해 주셨다. “지금까지 보아왔지만 신명희씨처럼 철저하게 참부모님을 모신 분은 볼 수 없었다.”는 심중의 말을 들려주었다.
요즘도 참어머님께서 천정궁 직원들에게 가끔 나의 이야기를 하시면서 “신명희처럼 모심의 생활을 하라.”고 말씀하신다는 전언을 들었다. 힘들고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나에게 가르쳐 주시고 깨달음을 주신 스승이자 부모이신 참부모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
나 신명희는 늘 긴장된 생활로 지난 세월동안 참부모님을 안전하게 모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그런 나를 늘 사랑으로 인도하시고 보호해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드린다. 나에게 주어진 복덩어리 아내를 사랑하며 감사한다. 하늘이 주신 귀한 선물인 자녀들과 함께 더욱 행복하고 아름다운 축복가정을 이루어서 하늘 앞에 영광을 올리기 위해 앞으로도 최선을 다할 것이다.
(2023년 9월 5일)
첫댓글 조응태님 댓글
자서전을 소개합니다. 27년간 참부모님을 모신 신명희-김영미 가정의 감동적인 스토리입니다. 함께 감동과 은혜를 공유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승석님 댓글
김영미 권사님
신사장님 자서전
넘 감명깊게 잘읽어서요
한 열번 읽어서요
오늘하루 참 좋아습니다
이광수님 댓글
신명희 형제님의 감동적인 삶의 스토리,은혜롭게 읽었습니다.
수고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이홍규님 댓글
신명희(김영미) 가정 자서전
감동입니다.🌼🌼🌼🌷🌷
김인숙님 댓글
자서전 잘 읽었습니다.
감~~~동 입니다.
참부모님 모시는 생활을 생생하게 전해 주셔서 감사 합니다.
신명희님 답글
뜻을 알고 살아온 지난50 여년간을 돌이켜보면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 왔다고 하지만 하늘앞에 너무도 부족한 삶을 살아 온것을 직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부족한 저의 자서 내용을 쓰면서 별로 내 놓을것도 없는 , 자랑스럽지도 않은 내용을 쓰려니 많이 망설이며 고민을 했습니다
부족한 저의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최지원님 댓글
자서전감동그자체입니다.
처음뜻길따라출발할때을생각나게하네요.
감명깊게잘봉독하였습니다.
윤재의님 댓글
일편단심의심정으로 뜻길을 살아온
신명희 형제님 그삶의자체가
참으로 아름답게 빛나네요.
서울제2기동대활동을 함께한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고맙습니다.
앞으로도 건승을기원합니다.
백종희님 댓글
신사장님
자서전 감동이네요.
오랜시간 참부모님 모시면서 참으로 은혜로운 삶과 동시에
늘 긴장되고 정렬된 삶이 얼마나 힘드셨을까요!!
멋지십니다~
늘 건강하세요~
정혁순님 댓글
신사장님 가정의 자서전!
오랫만에 참부모님의 심정을 느끼며 초창기 신앙의 발로를 생각케 해 주세요. 그 옛날 부흥회때마다 마음의 각오를 하면서 마음을 추스렸듯이 저혼자 부흥회를 하고 수련회에 참석했을때의 감동을 받는 은혜로 아침을 엽니다. 그동안의 모심의 생활에 박수를 보냅니다. 존경스럽습니다. 감사합니다.
이경숙님 댓글
자서전을 통해 모심의생활의 진수를 느끼고 또 느꼈습니다.
신면희님 가정에 사모님도 정말로 고맙고 감사합니다. 대단히 수고들 많으셨습니다.덕분에 감동의 선물같은
아침을 힘차게 엽니다. (땀)(땀)(땀)(촛불)(촛불)(하트)(최고)(최고)
권영옥님 댓글
자서전 읽으며
축복 받고 강화 임지 생활이 생각 납니다.
가끔씩 트럭에 대원들을 태우고
강화의 유적지 이곳저곳을
구경시켜주며 대원들을 살뜰하게 챙겨주던 신사장님!
자서전을 읽으며
잠시 40여전의 기억들이 스쳐 가네요~
많은 세월이 흘렀는데
일편단심 참부모님 여정에 한결같은 심정으로
뜻길을 함께 걸어오시느라
수고 많으셨고 존경합니다.
늘 건강하세요~
문효중님 댓글
신명희 사장님의 자서전을 읽으면서, 느끼는 바가 많습니다.
특히, 참부모님을 어떻게 모셔야 잘 모시는지의 표준과 정도를 지극한 정성과 최선을 다하는 삶으로 보여주시고, 실천하셨습니다. 참으로 귀감이 되는 삶을 사셨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하늘의 더욱 크신 축복이 함께 하시길 축원드립니다. 존경합니다.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신명희사장님
정성을 다해 쓰신 자서전 쉬지 않고 단숨에 읽어내려갔습니다
철저한 준비와 정성으로 참부모님이 발이되어 모심의 생활을 하신 공적이 참으로 놀랍고 대단하시고 존경스럽습니다
김영미사모님을 맞기 위해 받은 핍박의 내용이 가슴을 아프게 하네요 용기 있는 자만이 미인과 복덩이를 얻을수 있는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하시는 사업 대박나시고 복덩이 사모님과 네자녀와 함께 참부모님의 사랑아래 행복하고 건강하게 사시길 기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