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 옥희언니
공장 근로자들은 날마다 시간에 맞춰 시계추처럼 움직인다. 수 백 명 사원들이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건조해졌다. 대부분이 감성을 잃어버린 것이란 걸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여덟 시간을 꼬박 서서 움직이는 작업의 반복 그리고 그 후에 오는 피로감으로 잠을 자고, 일어나면 또 같은 일이 기다리고 있고, 그러는 사이 하늘도 보지 않게 되고, 꽃들에게서 시선도 멀어지고, 세상은 나와 별개로 돌아가는 것처럼 변해버리는 것이다.
내가 이상한 아이가 된 것은 그들이 잃어버린 감성과 오감이 살아 있었던 것이다. 나는 매일 변함없이 다가오는 시간을 같지만 늘 변하는 자연처럼 순간, 순간을 반기고, 기쁘게 누린 것이다. 똑 같이 주어진 환경이지만 나 밖의 모든 걸 스크린의 영상으로 보았다면 나는 직접 내가 영상이 되어 보는 것의 차이에 있을 것이다. 그들은 나의 말을 왜곡시켜 웃음의 매개체로 삼았다. 나는 그들의 반복되는 대화의 주제에 섞이고 싶지 않았다. 스스로 혼자를 고집했다. 나에게는 그들이 관객이었고, 그들에게 나는 무대 위에서 조명을 받는 연기자였다. 그러므로 그들과 나의 거리는 아주 가까웠음에도 어울리지 못했다. 어울리지 못해도 즐길 수 있었던 것은 누구도 손해 보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그냥 한 말조차도 개그로 듣는 그들의 웃음은 나의 존재 이유일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의 존재가 누군가를 웃게 하고 삶에 생기를 준다면 얼마나 기쁜 일인가.
나는 그들의 웃음 속에 존재하는구나. 하는 일종의 위안이 되었다. 그들이 몸을 비비꼬며, 언니, 꽃이 너무 빠아알개요. 하며 소리내어 웃는다. 주어와 술어 사이에 수식어 하나 더 넣는다는 것만으로 웃음을 줄 수 있어서 다행이다. “언니, 이 꽃 좀 봐요. 향기가 너무너무 달콤해요.” 하고 말하면 그 말은 금방 이상하게 부풀어져 유행어처럼 번진다. 나는 그런 나를 사랑하고 대견스러워 했는지도 모른다. 일종의 승리감, 엄마의 구속으로부터의 해방감을 자연에 아름다운 수식어를 붙여 표현한 것일지도 모른다.
다른 사원들과 어울리지는 못했지만 주목받고 있음에 안으로 자족했다. 다만 대구한일여자실업고등학교 개교 첫 입학생이었으나 그 해를 넘기지 못하고 자퇴서를 낸 것이 잘했다는 확신은 들지 않았다. 자퇴서를 낼 때의 마음은 검정고시로 고졸학력을 인정받고 친구들보다 빠른 대학 진학을 하자는 거였다. 학교를 그만뒀다고 일이 더 수월한 것도 아니고 혼자서 공부를 할 수 있을 정도로 피로도가 줄어드는 것도 아니다. 맘과 달리 책을 펴면 학교에서보다 더 잠이 왔다. 이런 날이 계속되자 불안했다. 불안감이 자리 잡자 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줄었다.
기숙사에서 외출이 허락되는 날마다 공부를 할 수 있는 주간 일자리를 찾아보았지만 없었다. 공무원 시험을 쳐볼까 했지만 호적상의 나이가 실제와 5년이나 차이가 나서 응시자격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이부터 고치기로 했다. 각 학교의 졸업 증명서와 보건소에서 신체검사를 받아 법원에 호적정정 신청을 해서 본 나이로 바꾸었다. 나이를 바꾸었다고 아무런 준비도 없이 바로 공무원 시험을 볼 수는 없었다. 회사를 나오면 숙식을 해결할 곳이 없었고, 자취를 하면서 공부만 할 수 있는 형편도 못 되었다. 한 달 십여 만원의 월급을 받아서 집에 보내고 남은 돈은 용돈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집을 떠난 사회생활도 내 생각처럼 만만치 않다는 깨달음이 슬펐다. 기숙사에서 혼자 공부를 해봐야겠다고 결심도 해 봤다. 8시간 꼬박 서서 땀 흘리며 일을 하고 퇴근을 해 씻고 나면 파김치가 된다. 여러 명이 함께 사용하는 세면장이다 보니 씻는 것도 줄을 서야 했다. 청소하고 밥 먹는 시간 등 단체 생활에 정해진 규칙이나 의무 사항도 잘 지켜야 했다. 이 모든 것을 지켜 책을 펴면 눈꺼풀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는 것은 학교에서와 같았다.
기숙사 생활에서 가장 큰 즐거움은 외출과 면회였다. 외출은 내가 원한다고 아무 때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외출이 허락되는 날과 시간도 정확하게 지켜야 했다. 정해진 규칙을 세 번 이상 어기면 기숙사에서 퇴소된다. 어떤 면에서 남자들의 군생활과 비슷했다. 기숙사에 있으면서 가장 반가운 일은 누군가 면회를 올 때이다. 정문에서 기숙사까지는 몇 백 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데 경비실에서 면회 왔다는 연락이 오면 사감은 외출하는 날이 아니라도 세 시간 정도의 외출증을 끊어주기 때문에 나가서 면회자와 식사도 하고 이야기를 나누다 들어올 수가 있다.
나는 면회 올 사람이 없기에 기다리지도 않았다. 명절이나 3교대 근무 특성상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하루 외박이 될 때가 있다. 그럴 때 점촌 집에 가기 때문에 일부러 부모님이 나를 찾아올 리도 만무했다. 그래서 면회는 생각도 하지 않았던 까닭에 사감이 나의 이름을 부르며 면회라고 해 귀를 의심했다. 옥희언니가 면회를 왔다. 옥희언니는 나랑 같은 조에서 일하다 두 달 전에 퇴사를 했다. 놀랍고 반가워 나는 정문까지 단숨에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