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곽경(郭鏡)의 처음 이름은 약노(若魯), 자(字)는 노이(魯以), 호(號)는 암곡(巖谷) 또는 초수(樵叟)이며, 시호(諡號)는 정의(正懿)이다. 그는 본래 중국 宋나라 사람으로 문연각(文淵閣) 한학사(翰學士)가 되었고 고려 인종11년 7명의 학사(學士)들과 우리나라에 와, 인종16년 등과(登科)하여 여러 관력을 거친 뒤 평장사(平章事)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고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에 올라 포산군(苞山郡)에 봉해졌다. 그런데 시조 곽경(郭鏡)에 관한 사정을 알 수 없어 구보(舊譜)에는 생존연대 등의 기록을 빼놓았었다. 그러던 것을 1930년 시조의 묘(墓)에서 지석(誌石)이 발견되었고 거기에서 자세한 내용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 내용은 앞서와 같고, 그가 중국 관서(關西)의 홍농(弘農)사람이라는 것과 고려 명종9년에 세상을 떠난 사실도 밝혀졌다. 현풍곽씨(玄風郭氏) 중에는 한때 본관을 선산(善山)·해미(海美)·강릉(江陵) 등 별관(別貫)을 써온 때가 있었으나 그들의 족보 첫머리에 으레 현풍곽씨(시조 곽경)의 후예라 써 왔기에 1976년 '丙辰大同譜' 때 대종회(大宗會) 의결(議決)로 본관을 현풍(玄風)으로 통일하였다. 현풍곽씨(玄風郭氏) 후손들은 시조 포산군(苞山君)의 봉호(封號)를 소중히 여겨 족보의 표제(表題)나 비명(碑銘)의 제면(題面) 등에는 포산곽씨(苞山郭氏)라 많이들 쓴다.
[本貫地]
현풍(玄風)은 본래 신라의 추양화현(推良火縣)인데 경덕왕이 현효(玄驍)로 고쳐 화왕군(火王郡)의 영현(領縣)으로 만들었고 고려초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현종 때 밀성군(密城郡)에 소속되었고 공양왕은 감무(監務)를 두었으며 조선조에 와서는 현감(縣監)으로 고쳤다. 1895년 창녕(昌寧)에 소속되었다가 복구, 군(郡)이 되었고 1914년에는 달성군(達城郡)에 병합하였다.
시조 곽경(郭鏡) 이래 고려말까지 11세 전후에 걸쳐 개성(開城)을 중심으로 경기 일원에 산거(散居)하였다. 조선초부터 종파(宗派)인 5세 곽기정(郭基正)의 후손들은 중부(中部)·호남(湖南)·서북(西北) 지역으로 세거지(世居地)를 개척하였고 차파(次派)인 5세 곽한정(郭漢正)의 후손들은 관향지(貫鄕地)인 현풍(玄風)을 중심으로 영남일대에 세거지를 확대함으로써, 현풍곽씨(玄風郭氏)를 크게 기호계(畿湖系)와 영남계(嶺南系)로 나누게 되었다. '丙辰譜'에 나타난 현풍곽씨(玄風郭氏)의 구성을 보면 기호계(畿湖系) 45파 · 영남계(嶺南系) 33파로 되어 있다. 그들의 세거지를 살펴보자. 기호계(畿湖系) 5세 곽기정(郭基正)의 후손 중 12세 곽항(郭恒)의 자손들은 곽항(郭恒)의 아들 대에 봉화(奉化)·괴산(槐山)·합천(陜川)에 정착하여 살다가 15세 곽의산(郭宜山)이 성종조 甲午年에 황해도 봉산(鳳山)으로, 18세 곽금정(郭今貞)이 충남 아산(牙山)의 온양(溫陽)으로, 17세 곽점산(郭點山)이 경남 남해(南海)로, 14세 곽성문(郭成文)이 세종25년에 평남 강서(江西)의 함종(咸從)으로 옮겨간 뒤에 이들 지역에도 자손들이 살게 되었다. 12세 곽종(郭悰)의 자손들은, 대체로 곽종(郭悰)의 손자인 곽겸(郭謙)의 대를 전후하여 용인(龍仁)의 박곡(朴谷)·음성(陰城)·청양(靑陽)·서산(瑞山) 등지에 나뉘어 정착하였고, 24세 곽성기(郭成畿) 이래로 함양(咸陽)에, 21세 곽희남(郭希楠) 이래로 평창(平昌)에, 19세 곽천애(郭天愛) 이래로 당진(唐津)에 일부가 자리 잡았던 것 같다. 그밖에 원주(原州)·수원(水原)·김제(金堤)·천안(天安)·횡성(橫城) 등지에도 많이 살았던 것 같다. 12세 곽돈(郭惇)의 자손들은 15세 곽원부(郭元富) 이래로 황해도 수안(遂安)과 전북 김제(金堤)에, 곽성(郭惺)의 자손들은 곽성(郭惺)의 대 이래로 청주(淸州)를 비롯하여 청원군(淸原郡) 일대에, 곽정의 자손들은 당진(唐津)·대구(大邱) 등지에 나뉘어 살았으며, 그 중 일부는 13세 곽충(郭冲)이 황해도 서흥(瑞興)으로 옮겨간 뒤 그곳에 정착했다고 믿어진다. 그리고 11세 곽유의의 자손들은 일부가 16세 곽맹원 곽수향 이래로 보은과 경기도 이천에, 15세 곽치생 이래로 황해도 장연에, 13세 곽몰 이래로 정읍에, 18세 곽우 이래로 시흥에 옮겨가 세거했으며, 일부는 14세의 대에 곽득형이 연산조에 임실의 주천에 퇴거한 것을 비롯하여 파주 영암 무안 등지에 터를 잡았던 것 같다. 20세 곽충양의 대 이후에 나주 영광 완주 고창 영양 고흥 등지와 함흥 홍원 길주 괴산 울진의 평해 부산 등지로 산거해 갔던 것으로 보인다. 11세 곽유예의 자손들은 12세 곽사가 단종손위 때에 벼슬을 버리고 아들 곽득창과 함께 금산의 천황동에 은거한 뒤에 충남 금산 일대를 세거의 터로 삼았고, 일부는 13세 곽득하 이래로 상주 청주 보은 등지에 정착했다고 믿어진다. 또한 11세 곽승산의 후손들은 경북 인동에 정착하고, 12세 곽해의 자손들은 곽해가 여말에 광주 산막동에 은거한 이래로 그 후계가 지금의 광산에 자리잡은 것을 비롯하여, 13세 곽사령 이래로 전남해남에, 15세 곽자정 이래로 진도에, 17세 곽수종 이래로 고흥의 흥양에 나뉘어 살게 되었다. 그밖에 장성 함평 남해 등지에도 일부가 살았던 것 같다. 7세 곽일신계인 11세 곽려의 자손들은 대체로 14세 곽호의 대 이래로 지금의 평남평원과 강원도 홍천 강릉 정선 등지에 산거하였고, 7세 곽우현계로 15세 곽윤성의 자손들은 곽윤성의 아들 곽수원이 조선조를 섬기기를 거부하고 충남 옥천에 많이 살았으며, 그밖에 대전 영동 대덕의 회덕 등 충남 일대에 세거하였다. 한편 영남계 5세 곽한정의 자손들 중에서 10세 곽윤명의 후계는 선대부터 세거해 온 경북 달성의 현풍과 창원 고령 칠곡 등지에 많이 살았고, 곽윤명의 동생인 곽윤광의 후계는, 14세 곽수령 곽우의 대를 전후하여 경북 영천 전북 완주에 정착하였고 그 중 일부가 대구 청도 등지로 옮겨 갔던 것 같다. 14세 곽승양의 자손들은 형풍 고령 창원에 주로 세거하고 일부가 곽승양의 증손 곽후인의 대부터 울진에 자리 잡은 것을 비롯하여 19세 곽홍목 이래로 울산에, 17세 곽몰 이래로 고려에 가 살았으며, 20세 곽몽해의 대부터 5대에 걸쳐 합천 성주 완도 밀양 함안의 칠원 경산의 자인 등지에 터를 굳히게 되었다고 믿어진다. 곽승양의 동생 곽승화의 자손들은 현풍 의령 창녕에 주로 세거하고 곽승화의 대 이래로 창녕에 세거하였으며, 19세 곽순 곽동의 대를 전후하여 일부가 대구 의령 선산 합천의 삼가에, 다시 25세 곽몰의 대에 이르러 사천 진천 상주 임실 거제 진주 고성 김해 영천 등지에 산거해 갔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4세 곽승문의 자손들은 대구 청도 창녕에 많이 살았다. 1930년경 현풍곽씨는 충남 금산군 남일면, 전남 진도군 군내면, 경북 달성군 현풍면 유가면 구지면, 경남 남해군 서면, 황해도 봉산군 초야면, 평남 용강군 다미면 등지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었다. 오늘날 대표적 집성촌의 하나로 경북 달성군 현풍면 대동리 솔례마을을 꼽는다. 솔례에만 120여 가구가 모여 살고 있으며 이웃의 현풍 논공 고령 유가까지 합치면 1천여 가구에 달하는 현풍(포산)곽씨 마을이다. 6.25때 동네가 몽땅 불에 타 뿔뿔이 흩어졌던 자손들이 다시 모여 곽씨 동족부락을 형성하여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氏族史]
현풍곽씨라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도덕가문으로 친다. 조선조 때 정려가 12개나 되어, 12정려는 <현곽>의 대명사로 통한다. 정려란 충신 효자 열녀들 기리기 위해 나라에서 그들이 살던 고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는 일이다. 삼강이 유교사회의 기본적 가치관이었던 옛날에는 정려가 하나만 나도 그 가문과 고을의 자랑거리였다. 하물며 12정려라면 그 가문의 영광은 당시 조선 천지에 뻗칠만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곽문의 정려는 전국 각지에 여기저기 서 있어 가문의 자랑으로 삼고 있따. 1117년 출생하여 1179년 10월15일 사망한 곽경의 묘지는 문헌상 경기도 파주군 적성에 있다고 전해오고 있으나 실전되었고, 문헌에 의거하여 설치했던 제단도 1980년 군사지역으로 편입됨에 따라 철수하고 용인군 외사면 박곡리에 대덕사(시조사당)를 건립하여 향사를 받들고 있다. 그의 후손 중 안방(세조 때 익산군수)이 첫째 청백리로 꼽힌다. 충효열의 뿌리는 그로부터 내리기 시작한다. 그의 현손에 <도>자 항렬의 8형제 중 월 릉 일 3형제가 특히 빼어나고 이들은 대부분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적을 무찌름으로써 당시 영남 일대에서는 <현풍팔도>로 이름을 떨쳤다. 3형제중 곽몰 일가는 <일문삼강>집으로 유명하다. 그는 임진왜란 때 안음현감으로 호남의 황석산성을 고수하다 장렬히 전사했다. 이때 두 아들 이상 이후는 '아버지가 임금을 위해 죽었는데 어찌 아들이 아버지를 위해 죽지 않으랴'(부사어군 자불가사어부호)하며 뒤따라 전사했다. 이어 딸과 며느리 신씨도 남편들이 전사하자 '아버지가 죽고서 내가 살아있음은 남편이 있기 때문이거늘 남편까지 전사하니 어찌 내가 살리오'(부사이생 위부재고야 금부피해 하몰생)하고 스스로 목매 죽으니 곧 충에 부사하고 효에 자사하고 열에 부사함으로써 일문에 삼강이 한꺼번에 나온 것이다. 곽준의 형 월은 특히 활을 잘 쏘았으니 그의 아들이 홍의장군으로 유명한 망우당 곽재우(충익공 1552~1617)다. "우리 역사상 미증유의 국난인 임진왜란으로 전국토가 초토화되어 갈 때 이 나라를 구한 사람은 바다의 이순신 장군과 육지의 의병들이었고 의병 중에서도 제일 먼저 일어나 가장 큰 공을 세운 이는 망우당 선생이었다"고 원로 사학자 이선근박사는 말한 적이 있다. 홍의 장군의 탄생지이자 의병의 발상지는 경남 의령이다. 제철을 맞아 연초록으로 뒤덮인 남산 밑에는 72년 의령 군민들의 성금으로 세워진 국내 최대의 의병탑(높이 27미터, 가로 5.5미터)이 장엄하게 서 있다. '의조실록'에 따르면 장군이 의병을 일으킨 것은 왜군이 부산포에 첫발을 디딘지 열흘이 못되는 1592년 4월22일이었다. 장군은 생가인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 마을 앞 정자나무에 북을 매달아 울리며 의병을 모았다. 후세 사람들이 이름붙여 현기촌. 세월이 흘러 꼭 390년. 수령 520년의 노거촌(높이 15미터 둘레 7미터)는 5본의 지주에 의해 몸뚱이를 유지한 채 바람이 불 때마다 장군의 호령소리를 느끼게 한다. '흰 기운이 남방에 가득 차니 바다에서 오는 악한 기운 때문이로다. 7,8년 뒤에는 바다가 반드시 편하지 않아 우리나라가 전쟁으로 괴로워지겠구나' 어느날 문경세재 마루턱에 30대 선비가 남쪽을 바라보며 이렇게 읊조렸다. 그는 조선 명종7년(1552) 8월28일 경상도 의령현 세간리 외가에서 항해도감사 곽월의 셋째아들로 태어난 곽재우이다. 3살 때 어머니를 여읜 그는 눈에 광채가 번뜩이고 성품이 밝고 호탕해 일찍부터 주위 사람들의 촉망을 받았다. 8세가 되던 해 그의 부친 곽월이 지은 용연정에 올라 공부했고, 15세가 되자 도굴산 보리사에 들어가 학문을 익혔다. 이때 그는 남명 조식의 눈에 들어 외손녀 사위가 된다. 40세까지 그는 대자연에 묻혀 낚시와 독서로 세월을 낚고 있었다. 임진왜란이 난 것은 그가 41세 되던 해. 파죽지세로 조선을 휩쓰는 왜군에 분노한 그는 팔뚝을 걷고 일어섰다. 심대승 박필 등 의령고을의 장사들과 친족, 하인 등을 모아 의병의 깃발을 치켜 들었다. 붉은 비단으로 군복을 지어 입고 양쪽에 날개를 단 투구를 써 백마에 올라타니 사람들은 그를 <하늘에서 내려온 홍의장군>이라 불렀다. 각지에서 약탈을 일삼던 왜군이 전라도 땅으로 들어오기 위해 정암나루에 이르렀다. 여름비가 내린 뒤라 땅은 질고, 진군은 어렵자 왜군은 선발대를 보내 마른 땅을 골라 나무를 꽂아 표시를 했다. 이를 안 그는 밤이 되자 나무를 빼 진흙에다 옮겨놓고 이튿날 적을 기다렸다. 왜군은 곽재우의 계략에 말려들었고, 이어 패주하게 된다. 야스꾸니(안국사 혜경)의 2만군을 물리친 것이다. 그의 이러한 전략과 용병술이 세상에 알려지자 인근 고을 백성들은 너도나도 그의 깃발 아래 모여들기 시작했고, 곽재우는 왜군에게 공포의 대상이 됐다. 곽재우는 유명한 진주대첩에서도 수훈을 세운다. 왜군은 전세가 소강상태에 빠지자 진주성 공격으로 전세를 타개하려 했다. 진주성은 호남의 공창지대로 들어가는 전략적 요충지. 진주목사 김시민은 전황이 위급하자 곽재우에게 구조요청을 했다. <홍의장군>이 출진했다. 심대승은 진주교외의 비봉산에 올라 그의 전략대로 어지럽게 나팔을 불고 또 밤에는 막대기 하나에 횃불을 다섯개씩을 달아 마구 흔들어 적을 교란했다. 곽재우군의 기스작전과 성중 수비군의 협공으로 왜군은 큰 희생을 내고 퇴각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임진란 3대첩의 하나인 진주대첩이다. 광해군에게 많은 직언을 하다가 끝내 유배까지 당했던 장군을 가리켜 후세 사가들은 "난전에는 선생이었고, 난중엔 위풍당당한 장군이었으며, 만년에는 풍월을 즐긴 도인이었다"고 평한다. 당시 조정은 곽재우의 충정을 시기하는 사람이 많았다. 백면서생으로 민족을 구하려 했던 그가 조정의 명령없이 의병을 일으키자 경상순찰사 김수는 왕에 대한 반역이라 상소했다. 이에 격분한 곽재우는 김수에 대한 팔조수죄란 격문을 만들어 의병의 동요를 막았다. 그러나 끝내 홍여순의 모함에 걸려 영암에 유배되는 어처구니 없는 풍파를 겪기도 했다. 3년의 유배생활을 끝낸 그는 얼마 후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고 서울에 올라갔으나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죽이려 하자 이를 간하는 상소를 하고는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광해군7년(1617) 4월10일 66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난국에 처했을 때 그가 보여준 <구국의 의지>는 현풍 후손의 정신 속에, 한민족의 역사속에 저류가 되어 흐르고 있다. 문집 '망우당집'이 전한다. 이밖에도 중종 때 문과에 급제, 장령 사간을 지내고 시국이 어려워지자 벼슬을 버리고 운문산에 칩거했다가 명종 초 을사사화(1545)에 연루되어 숨진 경재 곽순, 임진왜란 때 중봉 조헌의 휘하 막료로 청주에서 왜군을 격파하고 금산 전투에서 전사한 곽자방, 임진 정유재란 때 의병을 일으켜 전훈을 세운 망우당의 4촌 괴헌 곽재겸 등이 돋보이는 현풍 인물들이다. 곽문의 또다른 인물 중 면우 곽종석(1846~1927)이 있다. 구한말 영남의 대표적 유학자로, 호남의 민재 전우와 쌍벽을 이룬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조약 폐기와 매국척신들의 처형을 주장하는 소를 올렸다. 1919년 2월 파리 만국평화회의에 보내는 장서를 지어 제자인 심산 김창숙을 시켜 상해에서 영문으로 번역, 가져가게 했다. 소위 '파리장서'로 불리는 이 성명에는 137명의 유림이 서명했으며 민족자결의 원칙에 따라 한국의 자주독립을 호소하는 내용으로 전문 2674자의 순한문으로 된 것이다. 결국 이 일이 탄로가 나 옥고를 치렀고 1963년에 그에게 건국공로훈장이 추서되었다.
1985년 현재 전체인구 127,322명
[시조묘소] 경기도 파주군 적성면 무건리에 있으며, 매년 11월 두째 일요일에 향사한다.
현풍 곽씨 시조 등 玄風郭氏 的 始祖 等...
시조 포산군 곽 경(郭 鏡)을 대덕사(大德祠)에 모신다. - 소재지 : 경기도 용인시 외서면 박곡리(양력 10월 첫째 일요일 향사)
송(宋)나라 귀화성씨(歸化姓氏)로 알려진 현풍 곽씨(玄風郭氏)는 중국(中國) 관서(關西) 홍농(弘農) 출신인 곽 경(郭 鏡)이 고려(高麗) 인종(仁宗 : 제 17대 왕, 재위기간 : 1122~1146) 때 우리나라에 들어와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를 지내고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포산군(苞山郡)에 봉해졌으므로 처음엔 관향(貫鄕)을 포산(苞山)으로 하였으나 조선조(朝鮮朝)에 이르러 포산현(苞山縣)이 현풍(玄風)으로 개칭(改稱)됨에 따라 현풍(玄風)을 본관(本貫)으로 하게 되었다.
일찍이 영남 내륙(嶺南內陸)에 뿌리를 내린 현풍 곽씨(玄風郭氏)는 고려중기(高麗中期)에서 조선조(朝鮮朝)에 이르기까지 충(忠)·효(孝)·열(烈)의 가통(家統)을 이어 우리 나라의 대표적(代表的)인 도덕 가문(道德家門)으로 알려졌다. 현풍 곽씨(玄風郭氏)의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시조(始祖) 포산군(苞山郡)의 현손(玄孫) 기정(其正)이 고려조(高麗朝)에서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역임했고, 그의 아들 응(膺)은 충렬왕조(忠烈王朝)에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와 감찰어사(監察御史)를 지냄으로써 명문(名門)의 기틀을 다졌다. 고려(高麗) 충숙왕(忠肅王) 때 좌리공신(佐理功臣)에 녹훈된 부는 수사도(守司徒)에 올라 포산군(苞山郡)에 봉해졌고, 제학(堤學) 원진(元振)의 9세손(世孫) 안방(安邦)은 세종(世宗) 때 해미 현감(海美縣監)과 익산 군수(益山郡守)를 지내면서 청렴한 성품으로 선정(善政)을 베풀어 뒤에 청백리(淸白吏 : 청렴한 벼슬아치)에 녹선(錄選)되었으며, 그의 아들 승화(承華)는 어려서 김종직(金宗直)의 문하(門下)에서 학문(學問)을 연마하여 김굉필(金宏弼)과 더불어 당대의 양재(兩才)로 불리웠다. 현풍 곽씨(玄風郭氏)는 특히 안방(安邦)의 현손대(玄孫代)에서 주(走)자 항렬의 8형제가 크게 현달하여 <현곽8주(玄郭8走)>로 명성을 떨쳤는데, 그중 월(越)·율·준 3형제가 빼어났다.
1556년(명종 11)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兵科)로 급제한 월(越)은 문무를 겸비한 인물로 선조조에서 의주 목사(義州牧使)를 지내며 시폐(時弊)를 논하는 상소를 올렸고, 호조 참의(戶曹參議)를 거쳐 청송·남원 등지의 부사(府使)를 역임했다. 한편 율은 일찍이 당대의 석학(碩學) 조 식(曺 植)과 정 구(鄭 逑)의 문하에서 글을 읽고 학행으로 벼슬에 등용되어 홍산 현감(鴻山縣監)과 예천 군수(醴川郡守)를 지냈으며, 임진왜란 때 초계 군수(草溪郡守)로 있으면서 왜군 방어를 잘하여 예빈시 부정(禮賓寺副正)으로 특진되었으나 군내(郡內)의 유생들이 유임시켜 달라는 상소로 초계 군수에 재임되어, 순찰사 김성일(金誠一)이 “팔도고을이 초계(草溪)만 같다면야 ......”하고 개탄했을 만큼 선정(善政)을 하였다. 특히 임진왜란 때 김 면(金 沔)이 의병을 일으키자 그 막하에 들어가 공을 세웠고, 1597년(선조30) 정유재란(丁酉再亂) 때는 안음 현감(安陰縣監)으로 김해 부사(金海府使) 백사림(白士霖)과 함께 호남(湖南)의 목구멍이라던 황석산성(黃石山城)을 지키다가 성이 함락되자 호상(胡床)에 걸터 앉아서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는 무저항으로 죽음을 당했다. 그의 아들 이상(履常)·이후(履厚)도 그 아버지를 안고 적을 꾸짖다가 죽음을 당했고, 딸 이문호(李文虎)의 아내도 남편이 포로가 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으니 <일문삼강(一門三綱)>의 가문으로 일컬어져 나라에서 정려(旌閭)를 세워 표창하였다. 목사(牧使) 월(越)의 셋째 아들 재우(再祐)는 현풍 곽씨(玄風郭氏)가 자랑하는 인물로 1552년(명종7) 의령현(宜寧縣) 세천리 외가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질박(質朴)하고 효성이 지극했으며, 일찍이 남명(南溟) 조 식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는데 조 식이 자기 외손녀를 재우의 아내로 삼게 하였다. 1585년(선조 18)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로 급제한 재우는 왕의 뜻에 거슬린 글귀 때문에 파방되고 나이 40이 넘자 벼슬을 단념, 낚시질로 세월을 보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아버지 월의 무덤을 찾아가 “아버지께서 만약 계셨다면 왜놈들의 창궐이 어찌 걱정되겠습니까?”하고 울며 하직한 후 임진년 4월 27일에 의병을 일으켜 항상 붉은 비단으로 만든 첩리를 입고 스스로 <천강홍의 대장군(天降洪衣大將軍)>이라 칭하면서 의령·삼가·합천·현풍·창녕·영산 등지에서 크게 무공을 세웠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는 경상좌도 방어사(慶尙左道防禦使)로 창녕의 화왕산성(火旺山城)을 지켰고 관찰사 김 수와의 불화로 대관(臺官) 홍여순(洪汝諄)의 탄핵을 받아 영암으로 유배되기도 했으며, 1613년(광해군 5) 광해군이 인목왕후의 소생인 영창대군을 죽이려 하자 신구(伸求)하는 상소문을 올리고 혼탁한 조야(朝野)의 기강이 문란함을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낙향, 비슬산(琵瑟山 : 경상북도 달성군과 청도군 사이에 있는 산)으로 들어가 세상과 인연을 끊고 솔잎을 씹으며 일생을 마쳤다. 그밖에 재우(再祐)의 종형(從兄)인 재겸(在謙)은 임진왜란 때 금강 방어에 전공을 세우고, 정유재란 때에는 재우와 함께 화왕산성에서 의병을 거느리고 싸워 부호군(副護軍)에 임명되었으며, 자방(自防)은 의병장 조 헌(趙 憲)의 휘하에 들어가 금산의 전투에서 장렬하게 순절하여 현풍 곽씨의 의맥(義脈)을 이었다. 고종 때의 거유(巨儒) 종석(鐘錫)은 이 황의 학문을 계승한 스승 이진상(李震相)에게 성리학을 이어받아 이기설(理氣設)을 주장한 학자로 한일합방이 되자 고향에 은거하다가 3·1운동 때는 전국 유림들의 궐기를 호소했고, 한국의 자주독립을 호소하는 장서(長書)를 지어 만국평화회의에 보내는 등 민족자결원칙에 의한 조국의 광복을 위해 헌신하여 충의의 가문인 현풍 곽씨(玄風郭氏)를 더욱 빛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