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8일: 여섯째 날: 모스크바로 출발
알혼섬에서 일찍 나와 이르쿠츠크로 돌아와서 앙가라강가에 있는 <자임까 리조트>에서 샤슬릭(돼지 꼬치구이 + 감자)과 브르쉐(양파 감자 전통 스프)로 점심식사.
<딸찌 건축 민속박물관>이 가까이 있었으나 아무래도 기차시간(17:00)이 늦을 것 같아 바로 이르쿠츠크 역으로 갔다. 일행들이 오랜 기차속생활을 위해 많은 살림살이를 가져왔기 때문에, 버스에 실린 짐이 너무 무거워 힘을 쓰지 못하여 의외로 시간이 많이 걸렸다는 가이드의 설명이다. <딸찌 건축 민속박물관>에는 17세기부터 시베리아에 정착했던 러시아인들의 가옥과 학교, 교회 등 여러 목조건물들이 있다는 곳이다.
현지시간 오후 5시에 기차를 탔다. 14량 기차인데 12호차 7번칸에 역시 4인승이지만 우리 두 내외가 점령했다. 17:00에 모스크바로 출발하는 69번 열차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르쿠츠크까지 탔던 009 기차보다 좋은 기차로 바뀌었다. 우리 칸의 차장도 신경질적인 나타샤에서 친절한 나탈리야로 바뀌었다.
8월 19일(일): 일곱째 날: 기차 속에서
아침 08:50부터 식당칸에서 예배를 드렸다. 박인걸 목사님은 시편 117편과 118편에 의거 말씀을 전하면서 찬양에 대해 무척 강조하셨다. 찬양을 통해 축복을 받는다고. 오직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은 찬양뿐이라고.
오늘은 제법 오래 서는 역이 세 군데나 있었다. 크라스노야르스크 역에서 10:35-11:15, 아칭스크 역에서 14:10-14:43, 마린스크 역에서 17:55-18:30. 기차가 정차할 때마다 일행들은 역에 나가 체조도 하고 간식도 사고, 지루함을 극복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모습들이 역력하다.
우리 내외는 기차 속에서 책을 읽고 글을 썼다. 시인 보리스 파스테르나크가 쓴 소설 닥터 지바고. 20세기 초 러시아의 모습을 생생히 전하는 한 편의 대하소설. 줄거리를 명확하게 요약하기 힘들 정도로 여러 인물의 시점으로 진행되고 있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는 본래 시인이었으므로 소설 속에 시적 표현들이 적지 않아 혹자는 서사시 혹은 시소설로 보기도 한다. 부록에는 '유리 지바고의 시' 25편이 실려 있다. 우리나라에서 ‘닥터 지바고’ 영화가 상영되어 흥행에 성공한 적이 있었다.
모스크바 부호의 아들로 태어나 8세의 나이에 고아가 된 유리 지바고는 그로메코 가에 입양되어 성장하고, 의사가 된 그는 그 집안의 딸 토냐와 결혼을 약속한다. 반면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불우한 환경에서 성장한 라라는 러시아 고위법관인 코마로브스키와 원치 않는 관계를 지속하지만, 이에 환멸을 느끼고 새해 전날 밤 무도회장에서 코마로브스키에게 총을 겨눈다. 여기서 라라를 마주친 유리는 그녀에 대한 호기심이 강했지만, 사라져 버린 그녀를 뒤로한 채 토냐와 행복한 결혼생활을 한다.
2년 후, 라라는 혁명가인 연인 파샤와 결혼을 하지만,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자 상처받은 파샤는 군에 입대한다. 1914년 1차 대전이 일어나고 군의관으로 참전한 유리는, 남편을 찾아 종군간호부가 된 라라와 우연히 만나게 되고, 이 둘은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유리는 모스크바로, 라라는 자신이 태어난 유리아틴으로 떠난다.
전쟁 후 혁명정부가 수립된 러시아에서 더 이상 예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유리와 그의 가족은 토냐의 고향인 유리아틴으로 가게 된다. 라라와 유리는 다시 만나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다. 토냐와 라라 사이에서 혼란스러워 하던 유리는, 라라의 관계를 알게 된 라라의 남편이자 빨치산 간부인 파샤의 지시로 빨치산 캠프로 끌려가 그들과 함께 생활한다. 유리는 그곳을 벗어나는 데 성공하고 쓰러진 그를 라라가 발견한다. 유리의 생사를 알 수 없었던 그의 가족은 이미 러시아를 떠났다. 이제 단 둘뿐인 유리와 라라, 둘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지만 유리는 라라를 위하여 그녀를 곁에서 떠나보낸다.
8월 20일: 여덟째 날: 기차 속에서
누웠다, 앉았다, 책을 읽다, 글을 쓰다, 시간과 싸우는 여행이다. 아마도 이 쓴맛이 있어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시베리아 횡단열차 여행을 버킷리스트라 하는가보다.
점심에는 식당에서 양배추와 감자로 만든 스프 300루불, 돼지 목등심 구운 것 369루불. 아침 저녁은 이마트에서 사온 전투식량이라는 것에 뜨거운 물을 부어 먹었다. 반찬은 오직 여행용 고추장과 일회용 미역국, 일회용 된장국. 햇반은 입이 까다로운 아내의 몫이다.
오늘은 노보시비리스크에서 54분(00:11-01:05), 예까쩨린부르그에서 43분(22:31-23:14)을 정차하여 역사 밖에도 잠시 나가 시가지 야경을 볼 수 있었다. 하루 내 기차 속에서 자다 깨다 하다 보니 어두운 밤이라 해서 잠이 깊이 들지 않아 밤나들이도 좋았다.
나는 보리스 고두노프를 읽고 군중의 이중성에 대해 생각했다. 우리나라 상황과 연결시켜 소설을 구상 중이다.
이 장편 희곡의 배경은 1598년부터 1605년까지 러시아와 폴란드다. 차르의 아들인 황태자 드미트리가 피살당한다. 백성 대부분은 보리스 고두노프가 황제 자리를 욕심 내 황태자 드미트리를 살해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아무도 내색하지 못한다. 크렘린 궁전에서 보리스 고두노프의 장엄한 대관식이 거행된다. 한편 젊은 수도사 그리고리는 죽은 드리트리 황태자가 자기 또래인 점을 생각해 음모를 꾸미기 시작한다.
보리스 고두노프가 황제에 오른 지 5년이 지나고 아들 표도르에게 언젠가 차르가 될 사람이니 선행을 쌓으라고 당부한다. 보리스의 자문관이, 폴란드에 있는 어떤 젊은이가 드미트리 황태자라고 주장하면서 군대를 모아 크렘린 궁을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보고한다. 보리스는 드미트리 황태자를 살해한 기억을 떠올리며 괴로워한다.
죽은 황태자와 약혼한 사이인 폴란드의 공주 마리아나는 드미트리(실은 그리고리)를 보고 황태자가 죽지 않고 살아 있다고 믿는다. 그녀는 드미트리(그리고리)에게 자신을 사랑한다면 어서 러시아로 진격해 황제 자리를 되찾으라고 설득한다. 그렇게 되면 자기가 황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드미트리(그리고리)와 그의 군대가 모스크바 부근까지 진격해온다. 크렘린 궁전에서는 러시아의 원로들이 모여 대책을 협의하고 있다. 회의석상으로 뛰어든 보리스 황제가 드미트리의 환영이 쫓아오고 있다고 소리치며 공포에 질려 있다. 군중들이 크렘린 궁전으로 몰려들자 보리스는 군중에게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간청하고 숨을 거둔다. 군중은 그저 ‘그가 죽었다’고 환호할 뿐이다.
고두노프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군중은 ‘역사의 주체세력’이라는 힘을 가진 집단이다. 군중 개개인, 그리고 앞에서 선동하는 사람 개개인은 거짓이 있고 간교한 마음이 있을지 모르나, 일단 많은 사람이 뭉치면 내세우는 캐치프레이즈에 몰입하여 순수하고 힘이 있다. 그러나 군중은 어리석고 변덕스러워 언제 바뀔지 모른다. 고두노프에서 군중은 고두노프가 황제를 죽였다는 것도 알았지만 추대했고, 그리고리가 가짜라는 것을 알면서도 황제로 추대했다. 히틀러를 추종하던 것도 군중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적지 않은 군중들의 시위가 있었고 그로 인해 정권이 바뀌기도 했다. 그 사이에 불순한 몇몇은 약삭빠르게 자기 잇속을 챙기기도 했다. 순수한 마음으로 참여한 사람들이 손해를 보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8월 21일: 아홉째 날: 기차 속에서
오늘은 시베리아 횡단열차 여행의 마지막 날이다. 별로 오래 정차하는 역도 없어 종일 책읽기에 시간을 보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르쿠츠크까지 73.45시간, 이르쿠츠크에서 모스크바까지 88.11시간, 총 161.56시간을 기차 속에서 있는 셈이다.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쌉싼열차(우리나라 KTX에 해당하는 특급열차)로 4시간을 합하면 166시간 총 7일간의 온전한 기차여행이다.
내가 사우디아라비에서 파견 근무할 때, 로마에서 비엔나까지 완행열차를 타고 하루하고 한나절을 여행한 기록이 있다. 그때는 경유 역에 도착할 때마다 수녀, 학생, 주부, 직장인 각종 사람들이 오르고 내리면서 내 옆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주고받았지만 이번에는 마누라와 단 둘이서 한 칸을 차지하고 여행을 하게 되어 책을 많이 읽게 되었다. 특히 이번 여행에서는 푸슈킨의 작품을 읽고 생각하는 바가 많았다.
<푸슈킨의 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슬픈 날엔 참고 견뎌라
즐거운 날이 오고야 말리라
마음은 미래를 바라나니
현재는 한없이 우울한 것
모든 것 하염없이 사라지나
지나가 버린 것 그리움이 되리라
어렸을 때 이발소에 걸렸던 그림에서 많이 읽었던 기억이 있고 그 이후에도 여기저기서 적지 않게 대했던 시(詩)다. 이성으로 받아들이면 진부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감성으로 받아들이면 감동을 줄 수 있다. 시는 내적으로는 감동을 주기 위한 것인 동시에, 외적으로 리듬 + 은유로 우리를 즐겁게 해준다. 물론 감동은 언제나 모두에게 동일한 모습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에게 개별적 상황에 따라 다르다. 동일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시간과 장소에 따라 느낌이 다를 수 있다. 이발소에 걸린 액자에서 읽으면 감동이 없었을지라도 시베리아 횡단열차 안에서 읽으니 남다른 감동으로 다가온다.
8월 22일: 열 번째 날: 모스크바
04:11에 모스크바 야로슬라블역에 도착하였다. 홀리데이 인 호텔에 체크인하여 샤워와 식사를 마치고 10시에 모스크바 시내구경에 나섰다. 굼 백화점 – 크렘린 – 붉은 광장 – 성바실리성당 – 모스크바 교외 꿀축제가 열리는 마을 – 아르바트거리 – 노보데비치수도원 – 참새언덕 – 홀리데이인호텔.
러시아는 9개의 시간대를 가진 광활한 대지와 험난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모스크바 강 유역에 자리 잡은 모스크바 시는 13세기부터 러시아의 문화, 정치의 역사의 무대가 된 곳이다. 현대적인 건물의 신도시와 오랜 전통의 구시가지로 나누어지며 아름다운 성당과 건물들이 많다. 1327년에는 블라디미르 - 수즈달 공국의 수도가 되었으며, 이후 모스크바 대공국으로 발전하여 18세기 초까지 제정 러시아의 수도였다. 표트르 대제에 의해 한때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수도가 옮겨지기도 했으나 1918년 이후 러시아의 수도이며 현재 크렘린에는 푸틴 대통령의 집무실이 있다.
오전에는 <굼 백화점>과 <크렘린>을 방문하였다. 레닌 묘 맞은 편에 있는 <굼 백화점>은 1893년에 지어진 국영백화점으로 붉은 광장 옆에 있다. <붉은 광장>은 수많은 역사의 산 현장으로, 구 소련시절 혁명기념 퍼레이드를 자주 하던 모스크바의 심장이라 할 수 있다. 붉은 광장에 들어서면 <성 바실리 성당>이 보이고 크렘린 성벽이 보인다. 이번 여행에는 단 하루만 모스크바에 머물기 때문에 외관만 주마간산 격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나로서는 2015년에 찾았을 때는 내부까지 자세히 보았기에 서운함이 적었다.
<크렘린 궁전>은 수즈달 공국 시절 1156년 나무로 만든 요새로 시작되었다. 1237년 침입한 몽골에 의해 파괴되었으나 1271년 모스크바 대공국 시절에 재건되었다. <붉은 광장>의 남동쪽 끝에 위치한 <성 바실리 성당>은 1561년 완공이 되었는데 이반4세가 몽골족을 몰아낸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웠으며,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이라 한다. 49m높이의 중앙탑과 양파 모양의 8개 탑들로 구성되어 있다.
오후에는 제법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스케줄에도 없는 꿀 축제장을 방문하였다. 동행한 여행사 회장님이 러시아에 사는 친구가 추천하였다고 극찬하였지만 일행들은 시큰 둥했다. 다양한 꽃에서 채취한 꿀을, 임시전시장 안에 있는 자그마한 여러 개의 점포들이 경쟁적으로 팔고 있었다. 우리 일행 몇몇만이 꿀을 샀을 뿐이다. 모스크바의 역사와 예술 현장을 방문하기도 부족한 시간을 낭비한 것이다.
<푸쉬킨 동상 앞에서> <빅토르 최 추모벽>
꿀 축제장에서 돌아와 <아르바트 거리>를 걸었다. 보행자 전용도로이자 문화 예술의 거리에는 푸슈킨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여 세워진 푸슈킨 부부 동상을 비롯하여, 한국계 가수 빅토르 최를 추모하는 사진과 추모문구가 가득한 벽화를 볼 수 있었다.
아르바트는 모스크바 문화와 예술의 거리로 1490년대 초부터 형성되었으며 러시아의 예술인들이 모여 살던 곳이다. 러시아가 사랑한 락 영웅인 빅토르 최(1962~1990)의 추모벽 앞에는 생화 꽃다발이 많이 놓여 있다. 그는 1990년 교통사고로 사망을 하였으나 아직도 많은 러시아 젊은이들이 우상처럼 받들고 있다는 것이다.
러시아 국민 작가 푸슈킨(1799~1837)은 1831년 결혼을 하고 잠시 이곳에서 살았으며 이를 기념하는 패가 건물외벽에 박혀있다. 또한 푸슈킨 부부 동상도 크게 세워져 많은 관광객들이 사진 찍기에 열심이다. 그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고 그의 아내 나타리아를 짝사랑하는 프랑스귀족 단테스와의 결투에서 부상을 입은 후 38세에 요절한다.
<노보데비치 수도원 옆 호수가에서>
<도보데비치 수도원>도 외곽에서만 살펴보았다. 크렘린 남서쪽 모스크바강변에 위치하고 있으며 12개의 탑이 있는 하얀색 석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가까이에 역사적인 인물(체홉, 고골, 흐루시쵸프, 쇼스타코비치, 옐친 등)이 잠들어 있는 공동묘지가 있다. 해 질 무렵 수도원 옆 호수 건너편에서 바라보는 수도원의 모습이 아름다워 이번 여행에서는 호숫가를 오래 거닐었다. 차이콥스키가 이 호수에서 ‘백조의 호수’에 대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호수에는 검은 오리, 흰 오리들이 여유롭게 헤엄치고 있었다.
차이콥스키의 <백조의 호수〉는 〈호두까기 인형〉, 〈잠자는 숲 속의 미녀〉와 함께 차이콥스키의 3대 발레음악이다. 내용은 왕자가 사냥을 간 숲 속의 호숫가에서 백조가 인간으로 변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마법에 걸려 낮 시간에 백조로 살아가야만 하는 오데트 공주에게 반한 왕자는, 변치 않는 사랑을 받으면 저주에서 풀려날 것이라는 말을 듣고, 오데트 공주에게 사랑을 맹세하고 다음날 있을 무도회에서 그녀와의 결혼 발표를 약속한다.
궁전 무도회장에서 오데트를 기다리는 왕자는, 악마 로트바르트가 데리고 온 딸 오딜을 오데트로 착각하여 오딜과 결혼을 발표하고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자 악마는 본색을 드러내고 오딜과 함께 사라진다. 자신의 잘못을 알게 된 왕자는 영원히 백조로 살아야만 하는 오데트에게 가서 용서를 구하는데 이 때 이 둘을 갈라놓기 위해 악마가 다시 나타난다.
<백조의 호수〉의 결말은 연출자에 따라 다르다. 악마와 싸우다 두 사람이 함께 죽거나, 왕자는 죽고 오데트는 백조로 남거나, 사랑의 힘으로 악마를 물리치는 것으로 결말을 맺는다.
나는 2015년 모스크바국립대학에서 열린 세계문예창학회때 문화유산이 많은 항구도시 블라디미르와 수즈달은 물론, 톨스토이의 출생지며, 1862년 결혼한 뒤 귀향하여 48년동안 살았던 <야스나야폴랴나>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러시아의 소설가 톨스토이(1828-1910)의 사유지였던 이곳은 지금 톨스토이 기념 종합박물관이 되었으며, 모스크바에서 남쪽으로 160㎞ 지점에 있다. 1763년 증조부 볼콘스키가 사들인 이곳에서 톨스토이는 1828년 태어났으며 1910년에 죽어 스타리자카스('옛 숲'의 뜻) 언덕 위에 묻혔다.
톨스토이 기념종합박물관은 널따란 공원 안에, 신고전주의 양식의 볼콘스키 대저택(2만여권의 장서가 보존되어 있다), 하인들의 집, 마차 차고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야스나폴랴나는 그의 장편소설 《전쟁과 평화》(1864∼1869)에도 등장한다. 톨스토이가 그리스도교 무정부주의자가 된 이후 이곳은 추종자들의 순례지가 되었다. 1850년대 후반에 톨스토이가 농민을 위해 이곳에 세웠던 학교는 문학박물관이 되었다. 이번 여행에서는 방문할 수가 없었다.
8월 23일: 열한번째 날: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쌉싼 열차를 타고 모스크바 출발(09:40) - 상트페테르부르크 도착(13:30) – 겨울궁전(에르미타쥐 미술관) - 상트 도미나 호텔 투숙.
러시아 북부 황량한 습지대에 수 만개의 말뚝을 박아 건설한 인공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레닌그라드 주에 있으며, 표토르 대제 때(1712년) 러시아 제국의 수도였다. 18세기 표트르 대제가 만든 이곳은 101개의 섬과 500개의 다리로 연결된 물의 도시로, 운하 변을 따라 바로크와 고전주의 건물이 즐비하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중심도로인 <넵스킨 대로>는 해군성에서 알렉산드르 넵스키 수도원까지 4.5㎞로 뻗어 있는데 최고의 호텔, 많은 레스토랑과 카페, 상점들, 음악당 등이 위치하고 있다. 1710년에 처음으로 길이 뚫리게 되면서 습한 늪지대였던 이 곳은 페테르부르크를 대표하는 문화, 상업의 중심지이자 가장 아름다운 거리 중 하나로 손꼽히게 되었다.
네바강변에 위치한 광장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세운 러시아 황제 표트르1세(1672~1725)의 <청동기마동상>이 뱀을 밟고 강을 바라보고 있다.
<에르미타슈 박물관>은 1711년 건립된 건물자체가 호화로운 미술품이라 할 수 있으며, 겨울궁전으로서 역대황제의 거주궁전으로 쓰였던 곳이다. 이 건물을 지은 예카테리나2세는 독일인으로 남편을 퇴위시키고 러시아의 황제가 되었다. 지금은 파리 루브르박물관, 영국 대영박물관과 함께 세계 3대 박물관으로 손꼽힌다.
소장품은 루브르나 대영박물관과 달리 모두 돈을 주고 산 것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미술관 1층은 주로 러시아를 비롯하여 고대 그리스, 로마, 이집트 문화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고, 2층은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리타의 성모> 등이 유명하며, 3층은 마티즈의 <춤>, 고갱의 <과일을 든 여인>과 피카소의 작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관광객의 발길이 가장 많이 머무는 그림은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라고 한다.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 앞에서>
8월 24일: 열두번째 날: 상트페테르부르크
여름궁전(분수공원) - 페트로파블롭스키 요새 – 네바강 수로 유람 - 성 이삭성당 –– 석식 – 공항출발(23:00)
<여름궁전에 있는 중앙정원과 분수대>
표트르대제가 1714년부터 9년에 걸쳐 완공한 <여름궁전>은 러시아 황제의 권위와 위엄을 과시하기 위해 프랑스 베르사유궁전에 버금가는 궁전으로 만들려 했다는 것이다. 러시아와 유럽 건축가들이 총동원되어 만든 20여개의 궁전건물과 화려한 분수, 7개의 아름다운 정원이 있다. 특히 64개의 분수와 255개의 조각으로 조성된 폭포가 장관이다. 가장 인기가 있는 건물 앞 분수는, 삼손 분수 등 그리스 신을 형상화한 금색의 조각상들이 바로크 예술 아름다움을 과시하고 있다.
네바강을 사이에 두고 겨울궁전인 에르미타쥐 박물관과 마주 보고 있는 토끼섬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는 상트 페테르부르크 건설의 초석이 된 곳이다. 표트르 대제는 1703년 스웨덴에게 정복당했던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새로운 수도로 삼고자 했다. 그 당시 러시아는 스웨덴과 전쟁(1700~1721)을 치르던 중이었으므로, 이 도시에 세워진 최초의 건축물은, 도시의 섬 중 하나에 세워진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였다. 표트르 대제는 1703년 네바강 삼각주에 위치한 이 섬에 스웨덴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한 요새를 짓기 시작하는데 처음에는 흙으로 지었고 1706년부터 다시 돌로 성벽을 쌓기 시작했으나 표트르 대제는 성벽이 완성되기 전에 죽었다. 예카테리나 2세에 의해 화강암 요새 형태로 완성되었다.
내부에는 <페트로파블롭스크 성당>과 표트르 대제의 동상, 박물관, 정치범 형무소 등이 있다. 이곳에는 매일 정오에 대포를 발사하는 행사가 있다. 요새의 남서쪽에 위치한 <트루베츠코이 성채>는 완성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정치범 형무소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1918년 형무소는 폐쇄되었고 1924년부터 예전 형무소의 모습을 재현해 놓은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곳에는 반란을 꾀했다는 죄목으로 수감되었다 숨진 표트르 대제의 황태자 알렉세이를 비롯해 도스토옙스키, 막심 고리키 등 저명인사들이 수감되었던 곳이다.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에서 동쪽으로 200여 미터 떨어진 네바강변에 자그마한 집이 한 채 있는데 이곳이 바로 이 도시의 첫 번째 건물인 <표트르 오두막집>이다. 표트르 대제가 요새를 짓기 시작하던 1703년부터 1208년까지 실제 거주하면서 요새 건설을 지휘 감독하던 곳으로 3일 만에 완성한 목조 주택이었다.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벽돌 건물로 재건축되었으며 1930년에 박물관으로 개관하였다. 내부에는 대제의 침실과 서재 등 모습이 그대로 재현되어 전시되고 있으며, 18세기 초 대제가 직접 만들었다는 실제 배의 모습도 전시되어 있다.
요새를 나와 한 시간 가량의 <네바강 투어>를 가졌는데 네바강에서 청동기마상, 이삭 성당, 여름정원, 에르미타쥐 박물관, 스몰니 사원 등 주요 명소들을 둘러볼 수 있었다.
우리 숙소인 상트 도미나 호텔 가까이에 있는 <성 이삭 성당>(1818~1858)은 40여년에 걸쳐 지은 것으로, 100kg의 황금을 돔에 입힌 러시아 최대의 정교회로 유명하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이삭이 아니라, 러시아의 성인 이삭을 기념한 것으로 표트르 대제의 탄생일이 5월 30일은 성인 이삭의 축일이기도 하다.
마지막 밤을 그냥 보낼 수 없어 많은 일행들이 우리 숙소에서 네바강을 따라 롯데호텔까지 산책을 나갔다. 마침 늦게까지 문을 여는 작은 백화점(Au Pont Ronge)에서 마뜨로쉬까 인형을 샀다. 다산을 상징한다는 가이드말을 들은 적이 있어 크고 좋은 것을 샀다. 아들 내외가 손녀를 하나 낳고 더 이상 낳지 않겠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아들내외에게 줄 선물로 산 것이다. 아내는 기회만 되면 네 살짜리 손녀에게, 동생이 있으면 재미있게 놀 수 있을 것이라고 엄마아빠보고 ‘동생을 낳아 달라’ 말하라고 부추겼다. 처음에는 손녀가 좋아하더니, 며칠이 지나서는 동생이 있으면 자기 장난감을 나눠주어야 한다고 동생이 필요없다는 것을 보니, 아마도 엄마에게 설득을 당한 모양이다. 앞으로 국민의 의무로 출산의 의무를 헌법에 명시해야 저출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