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드
20162235
유승원
부재는 가급하고, 존재는 잔인하다. 모름지기 부재는 존재를 증명할 따름이다. 차가워 지니기 아린 바람이다. 누구나 각자의 이별이 가장 아프듯이, 나또한 나의 그녀가 부재함이 역겹도록 아프다. 신이 내린 이별보다 그녀와의 이별이 더 가슴 버겁다. 모쪼록, 그녀가 보고 싶다.
단 한 번도 여자 친구가 있어본 적이 없었다. 고백을 한 적도, 받아본 적도 없었다. 여자 친구의 존재 여부에 따른 장단점을 알지 못했다. 온통 둘러싼 푸르스름한 것들이 외로움인지는 깨달았으나 그조차 익숙해져 견딜만했다. 사랑을 말하는 노래 구절들에 개의치 않았다. 이성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동성에게 보다 관심 두지 않는 것이 동성애자가 아니라는 증표라 여겼다.
타인이 있음과 없음이 모두 불편했다. 아무리 편한 사이어도 그들의 눈치를 보았고, 그들이 없으면 없는 대로 허전함을 느꼈다. 보다 익숙한 것은 후자였다. 섣불리 먼저 연락하지 않았고, 불편한 곳에 어울리려 하지 않았다. 학교를 온통 빠졌어도 졸업장은 나오기에 졸업했다. 인문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대학에 가지 않았다. 갈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를 따지고 싶지 않았기에 그에 관해 생각하지 않았다. 가지 못한 것이 아닌, 가지 않은 것이 되었다고 여겼다.
매일같이 산본에서 충무로까지 사호선의 한복판을 한 시간 남짓 출퇴근했다. 오전 일곱 시 사십팔 분 지하철을 산본역에서 타지 못하면 지각했다. 다음 열차는 오십삼 분에 도착했는데, 오십삼 분 열차를 타면 뛰더라도 꼭 삼 분 지각했다. 사십팔 분 열차를 타기 위해선 목련 삼거리 정류장에서 일곱 시 삼십 분 이내에 마을버스를 타야했다. 능안 공원을 마주보고 있는 목련 삼거리 버스 정류장에는 1, 2, 3 번 버스가 도착했고, 모두 산본역으로 향했다. 2번 버스는 돌아가지 않아 삼십오 분에 타도 사십팔 분 열차를 탈수 있었다. 결국 일곱시 이십 분 이전엔 집을 나서야했다.
충무로 역에는 출구가 크게 두 갈래로 나뉘었는데, 회사에 가려면 지하철 열차 칸 1번 쪽에서 하차해 8번 출구로 나가야했다. 처음 출근하던 날, 지하철의 끝 부분에서 내려, 출근하는 숱한 인파 속에서 8번 출구를 찾다가 지각했다. 회사에선 한 정거장 다음인 동대문역사공원역이 가장 가까웠으나 5호선이 그러했다. 5호선을 완전히 통과해야 갈 수 있는 동대문역사공원역 4호선이나, 충무로역이나 걸어가야 하는 거리가 비슷했다. 동대문 역사공원역이 계단이 많고 한 정거장 멀어 이용하지 않았다.
일곱 시 사십팔 분 산본역을 통과하는 열차는 앉을 자리가 항상 없었다. 오이도 방면에서 탑승한 금정역에서 환승하려 일어나는 승객이 비운 몇 자리에 앉지 못하면 한 시간 내내 서서 가야했다. 금정과 범계만 지나면 지옥철이 됐다. 좌석과 좌석 사이의 공간에 네 줄로 서서 가곤 했다. 이따금 인덕원이나 정부과천청사 따위에서 내리는 승객이 간혹 있었지만, 한 달에 두어 번, 운이 좋은 날에나 그렇게 앉아갈 수 있었다. 퇴근길에는 여섯시가 못 된 시간에 과장 눈치를 살피다 칼퇴근보다 이른 퇴근을 하면 앉을 자리 하나는 있었다. 간혹 사당행 열차여서 오 분은 더 기다렸다 다음 열차를 타야하는 퇴근길이 가장 고단했다.
일은 편했다. 바투 놓인 모니터 두개 앞에 앉아 지시하는 작업을 해내면 됐다. 작업이라야 봤자 엑셀에 저장된 데이터들을 수정, 보완, 검열하는 따위의 일들이 주류였다. 점심시간은 열두시부터 한시까지였다. 마음껏 담배 피웠고, 다섯 개피는 더 태워도 찾는 사람 없었다.
작업이 많지 않아 근무 시간의 절반은 예능을 보거나 영화를 보거나 핸드폰을 만지며 시간 때웠다. 그럼에도 십 수 명의 근로자가 같은 사무실에 앉아있어야 하는 지 의문이 들었으나, 월급쟁이들이 그렇듯 의문은 제기하지 않았다. 월급만 제때 나오면 그만이었다. 적성과는 거리가 먼, 시간을 죽이며 돈을 버는 직장이었다.
사무실의 두 개의 시계 중 하나는 시간이 흐르지 않았고, 하나만이 작동했다. 시계 초침이 매 초마다 째깍였고, 작업이 있을 땐 작업하는 소리로, 작업이 없을 땐 카카오톡을 보내는 소리로 타자치는 소리가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와 겹쳤다. 이따금씩 기침 소리가 들렸고, 아주 가끔은 누군가 낮게 코를 골았다. 화장실 앞을 누가 지날 때마다 들리는 어긋난 장판이 삐걱이는 소리가 개중 가장 큰 소리였을 터다.
몇 살 터울지지 않는 과장의 ‘이딴 식으로 할 거면 당장 그만두라.’로 시작되는 꾸중이 간혹 버거웠지만 다른 곳보단 낫다 여기며 견딜 만 했다. 과장은 시간이 칼인 사람이었다. 출근했을 때 단 한 번도 그가 자리에 없었던 적은 없었다. 사람을 내려 보는 시선을 지닌 사람이었으나, 모두에게 그런다는 점에서 공평한 사람이기도 했다.
방에서 썩히던 《인간 실격》을 사무실에 두었다. 사무실에서도 들여 보지 않는 건 매한가지였다. 온갖 sns조차 들여다 볼 것이 없을 때, 책을 봤다.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까지만 수십 번 보았다. 타인에게 무관심한 성격이 한 몫 했을 터다. 반년쯤 더 누군가의 부끄러운 생애를 알지 못했을까.
그녀와 우연히 만난 것은 꼭 한 번이었다. 약간의 우연이 더해진, 하나 하고도 넘치는 인연이 왔다. 주말의 오후, 친구가 간만에 불렀다. 숙취가 버거워 늑장부리다 도착한 맥줏집엔 그녀도 있었다. 엠티를 다녀오는 길이라던 그녀는 큼직한 나이키 맨투맨에 짧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 쪼리를 신었고, 하얀 백팩은 줄곧 앞으로 돌려 맸다. 청색 모자를 쓰고, 머리는 길게 내려 묶었다. 처음이자 마지막 우연이었다.
해가 막 기우는 시각에 맥줏집은 어울리지 않았다. 더욱 어울리지 않지만 우리답게도 술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녀는 중국식 술집인 그곳의 유린기를 좋아했다. 튀긴 닭을 몇 점 집지도 않고 친구는 약속이 있다고 떠났다. 조금의 우연이 포개졌다. 남은 것은 아직 많은 소주, 마찬가지로 수북한 안주, 중학교 동창이라지만 사실상 초면에 마주앉은 그녀와 나였다. 존대하지 않는 것이 신기한 사이였다. 마주앉은 우리는 막막하게 어색했다. 낯선 이와의 술자리도 간만이었지만 여자와 단둘이 술 마시는 것은 처음이었다.
들어가는 술만큼 말이 나왔다. 중학교를 같이 다니고도 그녀의 이름만 겨우 알았고, 그녀는 그마저도 몰랐다. 그녀와 나는 또래보다 이 년 늦게 대학에 입학했고, 학업에 열심이지 않았고, 미래는 우리의 어색함보다도 막막했다. 그녀는 무표정에 기반을 둔 채 적은 표정 변화만 얼굴에 띄는 데도 리액션은 좋은 편이었다. 그녀는 웃을 때 손으로 입을 가렸고, 하품할 때는 가리지 않았다. 이따금 손등을 위로해 손을 내밀었고, 그것은 시선을 모으고 말을 하겠다는 발언권의 신호였다. 우리는 제법 통했다. 삼차와 사차를 나섰고, 장장 열두 시간을 함께 했다.
반일을 붙어있었다 한들 낯가림이 심한데도 첫 만남에 친해진 것이 신기했다. 특별한 감성을 지녀 보이는 그녀와 친해지고 싶었고, 더 알고 싶었다. 번호도, 인스타그램도, 페이스북 친구도 그녀가 먼저 요청 했으니 문자 한 통 즈음 먼저 보내도 괜찮다고 자위해도 부족했다. 소심한 명분을 앞세웠다.
2016 9/11 3:56AM
“52바 4111
조심히 들어가. “
반 년만에 처음으로 퇴근 후 충무로가 아닌 동대문역사공원역으로 향했다. 집으로 곧장 향하지 않고 신촌으로 갔다. 종일 오늘은 일상을 지내지 않아도 됨이 반가웠다. CGV 신촌 아트레온에서 그녀가 좋아하는 배우가 나오는 영화를 단둘이 보았다. 우리는 썸은 아니었다. 그녀는 웃는 리액션에조차 답장해주지 않는 사람이었다. 우리의 연락은 자주 끊겼는데, 번번히 그녀가 답장하지 않았다가 후에 먼저 말 걸어주는 형식이었다. 그저 소박한 일상을 나누던 와중에 그녀가 지나가는 말로 건넨 ‘영화 볼래?’를 놓치지 않았다. 볼 사람이 없던 와중에 얻어걸린 것이라도, 정말 지나가는 말이었더라도, 진심이건 아니건 일상의 변화를 간절히 원했다.
영화를 보기 전, 그녀는 처음 가 본 신촌을 구경시켜주었다. 그녀는 이화여대를 다녀 신촌 길이 빠삭했다. 기억하지 못할 맛집들을 비롯한 신촌 정보를 머리에 욱여넣었다. 지금에 이르러 기억에 남는 것은 커플들이 사라진다하여 이름 붙은 모텔촌 ‘버뮤다 삼각지대’ 정도이다. 영화가 마치고, 시간이 애매했다. 저녁을 먹기에는 늦었지만 영화 한 편 보고 헤어지기엔 아쉬운, 기가 막힌 아홉시 반이었다. 나는 기억하지 못했으나, 그녀가 다시금 일러준 자주 간다던 포차에 들렀다. 막차를 십 분 남긴 시간까지 술을 마셨다. 정신이 말짱했기에 시간을 확인하지 않더라도 시간이 어림 잡혔으나 양심에 걸렸다. 핸드폰을 보고 열두시 정각이 됐음을 일렀다.
한 주를 못 넘기고 추석 연휴 중이었다. 그녀가 친척집에서 돌아가는 길에 들렀다. 그녀는 결국 가던 길을 마저 가지 못했다. 막차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일러도 그녀는 가지 않았다. 우리는 취했고, 우리 집에서 잤다. 남녀칠세부동석이라지만 우린 혼숙했다. 꼴에 남자라고 머리에 스치는 시나리오들을 서둘러 털었다. 편한 척 용 써도 영 불편했다. 우리는 술기운에 뻗었고, 그녀가 먼저 일어났다. 줄곧 불러도 일어나지 못했더란다. 그녀는 침대에서 내려와 삭발한지 얼마 안 된 내 머리를 만지며 이름 불렀다. 반쯤 뜬 눈에 그녀가 가득했다.
그녀는 예뻤다. 그녀 뒤 큰 창으로 햇살이 들어 역광일지라도, 민낯일지라도, 얼굴이 부었더라도, 눈을 채 치켜뜨지 못하고 머리가 부스스할 지라도, 동생에게 빌린 다 늘어진 잠옷을 입었어도, 렌즈를 빼고 각진 뿔테 안경을 썼어도. 팔 한 번 뻗지 못하고 고개 돌려 다시 자는 척 해야 했다. 만연한 설렘은 심장으로 몰려와 몸 전체가 심장인 마냥 깊고도 크게 뛰었다. 더는 고개 돌려 그녀와 눈조차 맞추기 힘들었다. 까까머리의 감촉이 신기해서일지라도 좋으니 머리를 또 쓰다듬어줬음 싶었다.
그녀를 배웅하러 집을 나서기 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녀의 카드가 잠옷 주머니에 있음을. 더 이상 만남이 지속되지 않을까 겁났다. 전날 술김에 실수는 없었는지 되새겼고, 걸리는 것은 없음에도 두려움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카드 따위가 두려운 것은 아니었겠지만 얇디얇은 바지로 전해지는 직사각 플라스틱의 촉감은 모른 체 하고 바지를 갈아입었다. 소심한 나는 먼저 보자고 할 용기가 없을 게 뻔했다. 설계는 거기까지였다. 설령 그녀가 바빠 카드만 전해주었더라도 족했을 터다. 카드를 전해준다는 명목 하에 다시 본 날은 잊지 못할 밤이 돼버렸다.
직장을 다니며 그녀를 만나면 하루 서너 시간밖엔 자지 못해도 좋다고 실실거리며 그녀를 만나러 매일 다녔습니다. 주어진 백일이 채 못 되는 시간 동안, 다신 없을 최선을 다했기에 그녀가 떠나도 아프지 않으리라 믿었지만 그건 오만이었습니다. 그저 함께라면 막연히 행복했던 순간들이 그녀에겐 무턱대고 좋지만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친구로는 괜찮지만 여자 친구로는 별로라던 그녀의 자평을 궁금해 한 건 크나큰 죄였나 봅니다.
비가 쉼 없이 우산을 때립니다. 잔잔한 반동은 우산살을 타고 내려옵니다. 손아귀에 잡혀 파동이 멎습니다. 진한 비 냄새를 담은 바람은 집요하게 미처 여미지 못한 옷 틈을 파고들어 살과 맞닿습니다. 돋아난 닭살이 둘의 만남을 증명합니다. 비가 오는 화요일이 가까운 월요일의 신촌 거리는 한산하네요. 그녀를 만나러 올 일이 사라졌으니, 신촌에 올 일이 없어 마지막으로 한 번 거닐었습니다.
그녀가 알바하던 연세대 정문의 맥도날드 골목으로 들어가면 우리 자주 가던 지하의 자그마한 술집이 있었습니다. 간판엔 꿀맛 포차라 적혀 있었으나 모든 안주에서 꿀맛대신 불맛이 나는 포차였습니다. 그곳을 지나치면 곧바로 후추를 잔뜩 뿌려주는 유명한 곱창 집이 있었고, 더 들어가 자그마한 언덕을 오르면 나오는 ‘파이홀’이라는 종종 가던 카페가 나옵니다. 신촌역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그녀가 ‘레즈 공원’이라 부르던 자그마한 공원이 나왔습니다. 신촌 한 바퀴를, 열한시 무렵 그녀와 헤어지긴 아쉽고 막차시간은 남았을 때 그랬듯이, 그렇지만 혼자서 천천히 걸었습니다.
돌아오는 택시에선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습니다. 택시 기사는 엑셀과 브레이크를 아끼지 않고 밟았습니다. 눈물은커녕 하품만 내뱉으며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발길이 과격한 기사의 택시 연비가 걱정될 따름이었답니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깊은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마지막이었던 깊은 잠이었네요. 제발 꺼지라던 그녀에게 역겨울 만큼 들러붙고서도 버림받느라 지쳤나 봅니다.
버려진 저는 방에 틀어박혀 울기만 했습니다. 우느라 잠들 틈이 없었고, 쪽잠마저도 울며 잤습니다. 어떨 때는 소리 지르며 울었고, 어떨 때는 울음이 터져 나왔고, 또 어떨 때는 마른 눈물이 볼에 질질 흘렀습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기에, 도무지 빠른 시일 내에 아무 것을 할 수 없을 것 같기에 직장을 그만두었습니다. 문자 한 통이면 정리되는 회사였습니다. 그만두어도 잡지 않는다던 과장은 언행이 일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일어나면 제구가 잘되는 투수의 공 마냥 기분이 아래쪽 구석구석에 콕콕 박혀있습니다. 의식이 괴로워 눈 뜨고 있는 자체가 벅차 잠을 원하면서도 악몽이 두려워 벌벌 기었습니다. 하품하지 않아도 눈물이 흘렀는데, 그걸 또 당연하게 닦아낼 만큼 눈물이 잦아졌습니다. 지긋한 일상에서 머릿속으로 자살을 연구했습니다. 수면제를 먹을까. 아파트에서 추락할까, 번개탄을 피울까, 손목을 그어볼까, 실행에 이어지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녀에게 편지 썼습니다. 매우 스산함에도 몹시 그녀가 보고 싶더군요. 순하디 순한 그녀가 꺼지라고 소리칠 만큼 못미더운 존재가 된 이상 그녀를 더는 잡을 수 없었습니다. 다만 그녀의 안녕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얼마나 빛나는 존재인지 잘 알지 못하고 스스로를 비하하던 그녀의 존귀함을 일러주고 싶었습니다. 더불어 아픔조차도 공유하고 싶었습니다. 그녀와의 이별을 피부에 새기며 울면서 써야 했습니다. 고통의 연속이었으나 울면서라도 쓰는 것이 그러지 아니하는 것보다는 덜 버거웠습니다. 그녀가 편지를 읽고 울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내심 기뻤던 까닭은 그녀가 아픔에 공감했을 거라는 추측이 앞서서 일까요.
더는 자기라 부를 수 없는 자기야. 이 편지까지만 자기라고 부를래. 봐주라……. 우선 미안. 무어라 보탤 것도, 뺄 것도 없이 정말 내가 미안. 자기는 잘못한 게 없는데도 항상 미안해해서 지레 걱정이 앞선다. 헤어지자 말하게 만들어서 미안해. 무한히 감사할 따름이야. 이제 모든 걸 과거형으로 말해야 하겠구나. 진실로 내 인생에 가장 사랑스럽고 소중한 사람과 함께한, 가장 행복하고 즐거웠던 나날들이었어. 인생 최고의 것들이니 이토록 날 아프게 하는 거겠지. 많이 아프지만, 어떻게 그 순간들을, 그리고 자기를 잊겠어. 잊기는 글렀고, 잊고 싶지도 않아. 그냥 조금이라도 무뎌지기 바라봐야지.
숱한 아쉬움 속에서도 후회는 없어. 볼이 땅겨서 잠이 깼는데, 미소 짓고 있더라. 꿈에 자기가 나왔었거든. 한참을 자기 꿈꾸는 동안 웃고 있었나 봐. 볼이 다 아플 정도로. 눈앞의 자기를 바라보는 건 물론이고, 자기에게 안겨서 좋아했던 살 냄새와 숨 냄새까지도 다 맡을 수 있었는데. 신기할 정도로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안보고 있으면 더 보고 싶은, 안고 있어도 더욱 껴안고 싶은 자기였는데.
서울사람 다 됐는데, 초행길이던 신촌 지리도 다 알게 됐는데, 정말 입에 안 붙던 자기란 말이 입에 다 붙었는데, 이제 쓸모없겠다. 사실 많이 울었어요. 정말 많이. 방 안 구석구석부터 바깥마저도 모조리 자기와의 흔적이 무성하더라. 비 맞은 강아지처럼 굴지 말라했지만, 미안해. 조금만 더 이러고 있을게.
매달리고 싶은데 잡지도 못하겠어요. 자기 스케줄도, 자기 알바하는 곳도, 자기 집도, 학교도 아는데 못 찾아가겠어. 찾아가도 더는 나를 봐주지 않을까 겁나. 함께 시선 맞추던 자기 눈빛과 다를까 봐, 너무 두려워. 우리가 다시 만나더라도 또 버려지면 정말 미칠 것 같아, 무서워.
다 감수하더라도 곱절의 값어치가 있는 게 자기와 함께 하는 것임을 알지만, 모르겠어. 내가 변했나봐. 거머리가 되겠다던 말은 허언이 아니었는데. 변하지 않겠다는 말 또한. 내가 거대한 짐이었기에 자기가 항상 아무 생각도 하기 싫어한 것 같아 죄스럽다. 나만 자기에게 의지하고 자기에게 힘이 못되어 준 것 같아. 자기는 항상 예쁘고 사랑스러웠어. 단 한 번도 진심 아닌 적 없었어. 나 거짓말 싫어하잖아요.
이걸 쓰고 있는 지금도, 자기가 편지를 볼 그 때도, 그리고 그 이후에도 자기는 더더욱 예쁘고 사랑스럽겠지. 그 옆에 있을 수 없어서 속상하다. 더 이상 곁을 나눌 수 없을뿐더러, 일상을 공유하지 못하겠다. 각자 그리는 미래에 더는 서로가 존재하지 못하겠다.
아무렇지 않게 지내기엔 자기가 내게 아무렇지 않은 사람이 아니었잖아. 제발, 부디 자기는 나 없어서 더 기모찌 해졌으면 좋겠어. 보란 듯이 잘 살아요. 부탁이야. 그래도 가끔은, 정말 이따금씩은 내 생각 해주라. 더는 간섭할 주제도 못 되는 거 아니까 여기까지만 할게. 그다지 사랑한 내 자기야.
어릴 적 천둥번개가 치면 외출한 엄마가 돌아오지 못할까, 베란다에서 서성이며 창밖을 내다보던, 설령 번개가 내게 올까 고개는 내밀지 못하던, 그러나 엄마는 오지 않던 그 시절처럼 불안이 항시 뇌에 새겨졌습니다. 정신과를 제집 드나들 듯이 다녔습니다. 졸피뎀 없이는 옅은 잠도 들지 않았고, 알프라졸람이나 아티반을 먹고도 일상생활이 버거웠습니다. 식은땀이 목덜미를 적시고, 옥죕니다. 손이 마구 떨리고, 무엇도 잡히지를 않습니다. 꼭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고, 죽고만 싶습니다. 숨이 쉬어지지 않고, 심장은 당장이라도 멎을 것만 같습니다. 심장소리는 갈수록 커져만 갑니다. 어떤 소음도 메워버리는 심장 뛰는 소리에 죽지 않았음을 실감하면서도, 매 박동이 마지막 심장 박동일 것만 같습니다.
무척이나 좋아했던 잠이 괴로워졌습니다. 학교를 빼먹고도 수업이 다 끝날 무렵까지 태평하게 깊고 오래 잠들던 지난날들은 어디 갔는지, 굉장히 옅고 짧게 잤습니다. 그마저도 악몽에 시달리기 일쑤였죠. 더는 그녀 꿈조차 달콤하지 못했습니다. 꿈에 그녀가 나오는 날에는 깨자마자 극심한 두통에 시달렸습니다. 그녀를 만나던 시절보다도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의사들은 약을 늘려주었지만, 매일 용량과 종류가 늘어나는 수면제와 안정제들조차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럭저럭 나쁘던 부모와의 사이가 좋아졌을 리는 없습니다. 부모는 그런 저를 가만 두지 못했고, 그 애정과 관심이 버거웠습니다. 정신과에 다니는 것을 아니꼬워했고, 방에 틀어박혀 있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좋지 않은 사이에 좋지 않은 상태의 저는 불행한 결과를 나을 뿐이었습니다.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한 달, 석 달, 반 년, 지인들이 이별에 둔감해지는데 걸리는 시간이었지만, 그 날들이 다가와도 전혀 괜찮아지지 않았습니다. 헤어지고 꼭 여섯 달이 되던 날, 그녀에게 전화 했습니다. 홀로 적잖이 술을 마셨고, 늘 떠오르는 그녀 생각이 격해져 울었고, 늦은 새벽이었죠. 맞습니다, 주책. 우습게도 별 볼일 없는 근황을 적당히 나쁘게 전했습니다. 다시 만나면 안 되느냐고 물었죠. 정신병자임을 고하면 받아주지 않을까, 그건 숨겼답니다. 그럼에도 또 차였습니다. 처음 자살을 기도했습니다. 틈틈이 모아놓은 졸피뎀 십 수 알을 마시던 소주에 들이켰습니다. 그녀에게 다시 전화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잠 들 때까지만 받아달라며 아무 말 없이, 그렇게 있었습니다.
다음날 거품을 입에 물고 뻗어 있었다고 하더군요. 그게 참사랑인줄 알았습니다. 사실 지금도 그렇고요. 그녀와 더는 함께이지 못할 바엔 그녀를 마지막으로 떠나는 것이 참 아름다워 보입니다. 볕 없는 일상에 크나큰 행복이었던 그녀에게 진심으로 감사함과 동시에 그녀의 공백은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음을 느꼈고, 잠에 취해 눈 뜨지 않길 원했습니다.
끝나지 않길 원했던 잠에서 깼습니다. 입가에 본드처럼 들러붙은 하얀 거품을 떼어냈습니다. 약기운이 채 가시지 못했는지, 멍함에도 다음 행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저는 알고 있습니다. 침착히 다시 자살을 준비했습니다. 전날에 쓰지 못한 유서는 마찬가지로 쓰지 않았고, 누군가에게 연락 따위도 하지 않았습니다. 담배 여섯 개비를 느긋이 태우는 동안에도 마음은 바뀌지가 않습니다. 샤워를 마치고 조금은 차려입었습니다. 블라인드에 가려진 창밖이 제법 궁금하지만 미련 갖지 않으려 돌아섭니다. 갈증과 허기가 치밀지만 죽은 후에 오물을 쏟아낸다던 기사가 떠올라 구역질이 납니다.
목을 맸습니다. 도구는 별 대단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있을 법한 후드티였습니다. 분홍색이었죠. 핫핑크. 언제부턴가 핑크가 그토록 좋더라고요. 모자의 끈을 끄집어 화장실에 있는 봉에 걸어 매듭지었어요. 변기를 딛고 올라섰습니다. 침을 한 번 삼키고, 목에 걸어봅니다. 체온보다 낮은 끈이 턱 아래 깨에 와 닿자 온몸에 소름이 번집니다. 목이 졸리고 숨이 막힙니다. 금세 메마른 입안에 혀만이 공허하게 맴돕니다. 번진 소름들이 거둬지며 그 면적의 피가 증발하는 것 같습니다. 봉을 붙잡고 아무리 힘을 주어도 힘이 들어가지 않아요. 두껍지 않은 끈조차 끊어진다거나 하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조금만 더 참으면 꼭 죽겠는 고통이 이어집니다만 발버둥 치다 엄지발가락에 걸린 변기를 딛고 서고자 온힘을 쏟았습니다.
의자에 홀로 앉아있다. 가로로 긴 타원형의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여러 사람이 앉아 있지만 서로 교류는 없다. 오십 미터나 됨직할까 싶은 복도를 두서명이 한 없이 줄지어 돌고 있다. 열 개가 못 되는 방문은 모두 열려 있고, 출구는 굳게 닫혀 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약을 먹고, 밤이 되면 약 기운에 취해 잠이 드는 이곳은 사삼병동이다.
핸드폰은 물론, 거의 모든 개인 물품을 소지하지 못하는 곳, 화장실 자물쇠가 문 가장 아래에 달려 있어 밖에서도 문을 열 수 있는 곳, 볼펜을 소지하지 못하는 곳, 마찬가지로 어느 종류의 끈도 소지하지 못하는 곳. 몇 중으로 보안된 대문에 ‘폐쇄병동’이라고 대문짝만하게 쓰여 있는 곳, 그 문을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는 곳이다. 창문밖엔 철창이 쳐져 있고, 화장실을 제외하곤 모조리 씨씨티비의 감시 하에 있으며, 화장실마저도 문이 항시 열려 있어야 한다. 책을 반입 할 때에는 책갈피의 용도로 달려있는 줄을 잘라야 하며 연필조차 간호사에게 빌려 사용해야한다. 주어진 약을 먹지 않으면 사단이 나고, 식사를 얼마나 남기는지 조차 확인한다.
지나친 폐쇄와 보수적인 환경에 답답하면서도 안락함을 느낀다. 어째서 정치 성향에 보수가 존재하는 지 깨달을 정도로. 사회와의 단절에서 오는 행복도 존재한다. 아무 생각하기 싫다던 그녀처럼 아무 생각이 필요 없는 곳이지만 생각이 많아질 수밖에 없는 곳이다. 생각이 부질없음을 깨달으면 사삼병동의 안락을 느낄 수 있다.
백 평도 안 됨 직한 공간에 환자가 오십 여명에 달한다. 머리를 수일은 감지 않은 듯한 환자, 머리가 너무 길거나, 너무 짧은 환자, 말이 너무 많은 환자, 아무 말도 않는 환자, 했던 말을 하고 또 하는 환자, 몸은 멀쩡함에도 대소변은커녕 숟가락질조차 못하는 환자, 뾰족한 도구가 존재하지 않는 이곳에서 과자 봉지로 쪽지 접어 모서리로 손목을 긋는 환자, 손을 아무리 넣어도 구토를 하지 않는다며 피가 나도록 입에 손을 밀어 넣는 환자 등, 사회에서 쉽게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구성원들이다. 그들이 전부인 이 폐쇄된 곳에서 유일한 낙은 하루 이삼십 분 가량 주치의와의 면담이었다.
질끈 묶은 머리칼에 하얀 피부, 수수한 얼굴, 그리고 웃는 모습이 어여쁜, 퍽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그녀에게 호감, 어쩌면 그 이상의 감정이 있었다. 그러나 머피의 법칙이 그러하듯, 그러한 그녀라면 약혼자가 있기 마련이다. 애초에 넘볼 수 없었겠으나 감정을 접고 적절한 호감로만 그녀에게 충실했다.
모든 걸 털어놓았다. 때로 그녀는 정신학적으로 분석하기도 하고, 대안책을 내어주기도 하고 해결책을 내어주기도 하지만, 그저 들어주기도 하는 사람이다. 고해성사처럼 비밀보장은 당연하다. 적잖은 병원비가 부족하다 느낄 정도로 그녀는 완벽한 주치의였다. 경우에 따라 다르겠으나, 정신과 면담이라고 그다지 무거운 분위기는 아니다. 가벼운 농담도 주고받았고, 안부를 묻기도 했습니다. 의사와 환자 사이는 지켜야 했으나, 서로 존중하는 사이에서 그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상태가 악화되지 않았던 까닭은 진정 그녀 덕이라고 믿고 있고, 그게 사실이기도 하다. 그러나 호감이 있는지라 그녀에게 밑바닥을 보여줄 순 없었다. 본성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정신병자이지만 그녀에게만큼은 기억에 남는 환자이길 원했고, 기왕이면 좋은 쪽이길 원했다. 밑바닥을 드러내면 상태가 호전된다 할지라도, 원치 않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밑천이 다 드러나기 전에 퇴원했다.
벌써 세 번째 입원이었다. 손목을 그을 때 가장 아프지 않은 것은 커터 칼이라던 과자 봉지를 접던 환자의 말이 맴돌았을 뿐이다. 종이에 베이는 느낌과 흡사하더라. 크레셴도와 아첼레란도로, 왼 손목 위에 십오선지 즈음 그었다. 손목 좀 긋는다고 죽겠냐는 추측은 행하면서 확신하게 되었다. 도무지 죽을 양의 피가 나오지 않았다. 흉터가 예쁘게끔 손목에 진 주름과 수평을 맞춰가며 그었다. 멈추었을 땐 팔꿈치에 맺힌 핏방울이 팔꿈치에서 떨어지던 순간이었다.
정신병동 퇴원은 군대의 전역과 닮았다. 두 번이나 앞서 퇴원을 경험했어도, 전역 전 날 군인처럼 잠 이루지 못했다. 기존의 수면제에 추가 수면제를 세 번이나 먹고도 잠들지 못 해 눈만 감은 채로 날을 세웠다. 퇴원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담배를 사는 일이었다. 아무에게도 아무도 아니라는, 노래를 찾아 들었다. 음원사이트에서도 찾을 수 없어 유튜브에서 들어야했다. 자존감 없는 제목부터 소심해빠진 가사까지 마음에 드는 노래였다. 비가 적잖이 왔으나, 우산은 사지 않았다. 폭삭 젖어 꼴이 우스워지겠지만, 개의치 않았다.
신호를 기다리며 담배 비닐을 벗기다 그저 문득 눈에 들어왔을 뿐이다. 새하얀, 그리고 적절히 도톰한, 허벅지에 시선이 꽂혔다. 병원 맞은편에서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리는 그녀는 틀림없이 내 주치의였다. 그녀는 고개를 기울여 검정 우산을 어깨 사이에 끼운 채 핸드폰을 들여 보고 있었다. 체크 난방에 짧은 바지를 입은 그녀였다. 병동 내에서 볼 땐 무릎까지 오는 의사 가운을 입고 있어 처음 보는 그녀의 허벅지였다. 그저 ‘만져보고 싶다.’라는 충동이 일었을 땐 이미 쭈그려서 그녀의 허벅지를 껴안고 입 맞추고 있더라. 혀까지 내밀었던가. 신호는 바뀌고 그녀에게 달려갔던 것일까. 들려오는 비명에 어느새 감은 눈을 떴을 땐, 더 이상 허벅지가 아닌 무릎이 시야에 선했다. 무릎에 진 주름까지도 기억이 난다.
길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고서 든 감정은 수치와 함께 아이러니하게도 분노였다. 눈이 마주친 그녀는 그새 우산과 핸드폰을 내던져 자유로워진 손으로 입 가렸다. 그것을 가만히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나를 알아보았을 테다. 그녀에게 잘 보이고 싶었다. 그녀의 허벅지가 시야에 들어오지만 않았더라도, 나는 나쁘지 않은 환자였을 터다. 테가 부러져 굴러 떨어진 안경을 챙기지도 않고 손바닥을 땅에 짚고 일어나 그대로 주먹 쥐었다. 말라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그녀의 복부엔 살집이 제법 있었다. 같은 지방이라면 그걸 모아 그녀의 양쪽 가슴에 보탠다면 사이즈가 몇 컵이나 될까, 그녀의 복부를 주먹으로 치며 든 생각이었다.
배를 움켜쥐며 엎어지는 그녀를 내려다보니 긴 머리칼이 보였다. 숙인 고개에 머리칼이 바닥에 닿을 듯 늘어졌다. 머리다발을 왼손으로 움켜쥐어 그녀의 머리를 일으켜 올렸다. 그녀의 왼뺨은 오른 손바닥으로, 그녀의 오른뺨은 오른 손등으로, 왕복 세 차례 팔을 휘둘렀다. 그제야 도망쳤다. 그녀의 머리칼들을 바닥에 내치고서 달렸다.
다섯 움큼이나 되는 약을 물과 함께 넘겼다. 퇴원과 함께 받아온 한 달 치 약들. 항우울제, 보조 항우울제, 안정제, 응급 안정제, 수면제, 보조 수면제, 또 보조 수면제들이 그 목록이다. 오백 미리 생수가 부족하여 한 병 더 사와야 했다. 수면제를 먹으면 으레 그러하듯, 어느 순간부터 의식이 끊길 것이고, 잠들 것이다. 하루 분의 잠이 밀린 상태에다 과다 복용하였으니 더욱 그럴 것이다. 처음 수면제를 처방 받던 날 약사가 자기 전 약을 복용하고 돌아다니면 픽 쓰러진다고 겁준 것에 거역하고 싶어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악취에 신고 당해 집에서 썩은 채로 발견되느니, 밖에서 발견 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그보다도 이미 집엔 경찰이 대기하고 있을 것 같았다.
밤을 새면 꼭 이렇습니다. 햇볕이 물이라도 된 것 같아요. 온몸에 내리쬐는 햇볕 속에서 숨이 막히고 눈이 찌푸려집니다. 절로 윙크하게 되어, 한 쪽 눈 밖에 뜰 수 없습니다. 한 쪽 눈이더라도, 거의 매초마다 그려보았던 나의 그녀 얼굴은 눈에 선합니다. 앞머리 없이 넘긴 긴 생머리, 평균보단 좁아 보이는 볼록한 이마, 쌍커풀 없이 크지 않던 눈, 높지 않던 콧대, 새끼손가락조차 들어가지 않을 법한 콧구멍, 꼬리가 살짝 올라간 작은 입, 날렵한 턱선까지. 계속 만났더라면, 오늘이 일주년이란 생각이 납니다. 더는 눈을 뜨고 있고 싶지 않습니다. 눈을 뜨면 어디에 있을까요. 지금 감아버린 눈이, 다시 뜰 일이 생길까요. 눈이 뜨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더불어 선택의 여지가 주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우유부단해서 한참을 고민하고 있을 테니까요. 천국과 지옥의 갈림길 앞에서 나 같은 놈은 지옥을 가야한다고 자책하며 지옥을 갈는지도.
첫댓글 학교 다닐 때 과제로 냈던 소설이 메일에 있길래 올려놔요. 참고로 이기호 교수님한테 에이쁠받았어요. :)
이기호.. 버니 쓴 소설가. 뭐 암튼.
긴 글의 문제는 (퇴고) 다듬기가 고역이라는 것과 자칫 길을 잃듯 연관성을 잃는다는 것.
소설로 하기에는 너무 '날것'인 자기 이야기로 가득하고, 수필이라 하기에는 너무 장황하고 끊어짐.
그럼에도 나쁘지 않은 건 의미 있음. 곧 주제가 다가온다는 것?
여하튼.. 이런 글을 손 볼 땐, 각 구성을 따로 만질 것.
그럼 군더더기를 상당 부분 줄일 수 있음.
또 하나 소설로 하려면 그녀의 시점과 나의 시점이 교차 하도록 구성하는 것도.
먼저는 수필로 확 다 가지치기 하듯 잘라버리는 작업도 나쁘지 않을 듯.
나름 잘 꾸려보면 작품은 되겠으나 굳이 이걸 에이뿔까지?.이기호의 안목이 영..
추가로, 단어의 선택이나 그 의미의 전달에 좀 더 신중하길.
나름 고생한 글인 것은 인정함.
그러나.......
가슴은 차갑게, 머리는 더 차갑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