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의 『백일법문』 上
개정증보판.
발행인: 원택스님
2562. 5. 4.
제2부 중도사상
제4장 중도사상의 독창성
3) 대승의 중도 (3) 임제스님의 중도
이제 선종을 보겠습니다. 선종 하면 임제종을 최고로 치는데 임제스님도 이런 말씀을 하셨는지 의심할 수 있습니다. 육조스님의 최후의 유촉으로 중도를 말씀하셨는데도 그것을 잊어버리고 중도니 쌍차니 쌍조니 말을 하는 것은 순전히 교이지 선은 아닐 거라는 말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선종의 최고인 임제종도 불교이기 때문에 중도의 근본원리를 벗어나서는 법을 설하지 못합니다. 임제스님은 불•법•승 삼보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는 마음이 청정한 것이고, 법은 마음이 광명한 것이고, 도는 어디에서나 청정과 광명이 걸림 없는 것이다.
佛者는 心淸淨是요 法者는 心光明是요 道者는 處處無礙淨光是니라
『鎭州臨濟慧照禪師語錄』
’마음이 청정하다‘는 말은 쌍차입니다. 일체 차별 망견을 다 버린 것을 마음이 청정하다고 합니다. 망상의 구름이 다 벗겨졌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일체 망상을 다 버리니 새파란 하늘이 열립니다. 쌍차가 되면 마음의 광명이 비칩니다. 허공이 청정하여 해가 비치는 것은 자연의 이치입니다. 마찬가지로 일체 변견을 다 버려 쌍차가 되면 마음의 광명이 비치니 쌍조입니다.
여기서 ’도道‘는 ’승보(僧寶)‘를 말하는데 ’어디에서나 청정과 광명이 걸림이 없다.“라 하였습니다. 하늘이 새파랗다고 하면 해가 드러났다는 것이고, 해가 드러났다고 하면 하늘이 새파랗다는 것입니다. 청정하면 광명이 있고, 광명이 있으면 청정 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청정과 광명이 걸림이 없는 것입니다. 광명이 곧 청정이고 청정이 곧 광명입니다. 이것을 ‘승(僧)’이라고 하였습니다. ‘승’은 본디 화합(和合)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잘 지낸다는 의미도 되겠지만 청정과 광명이 걸림이 없는 중도를 증득한 사람만이 승가(僧伽)의 자격을 가질 수 있습니다. 중도를 깨치지 못하면 차별 변견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승(僧)이 아닙니다. 이것이 임제스님이 선언한 중도의 공식입니다.
임제종이라고 하니 특별히 불교 밖에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화성이나 금성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표현하는 방법이 다를 뿐 임제종도 불교입니다. 다시 한 번 말하자면 마음이 청정한 것을 부처라 한 것은, 모든 변견을 버린 것이 청정이므로 쌍차입니다. 마음이 광명한 것을 법이라 한 것은, 청정하면 자연히 광명이 나오므로 쌍조입니다. 청정과 광명이 걸림이 없음을 승이라 한 것, 차조동시(遮照同時)입니다. 임제종 역시 표현은 다르지만 근본 입장은 육조 스님이 유촉하신 중도에 입각해 있습니다.
또 임제종에는 임제의 삼보 외에도 입제 가풍의 근본으로 여기는 사료간(四料簡)이 있습니다.
어떤 때는 사람은 빼앗고 경계는 빼앗지 않으며
어떤 때는 경계는 빼앗고 사람은 빼앗지 않으며
어떤 때는 사람과 경계를 모두 빼앗고
어떤 때는 사람과 경계를 모두 빼앗지 않는다.
有時엔 奪人不奪境이오 有時엔 奪境不奪人이오 有時엔 人境俱奪이오 有時엔 人境俱不奪이니라
『鎭州臨濟慧照禪師語錄』
어떤 때는 사람은 빼앗지만 경계는 빼앗지 않습니다. 주관은 버리지만 객관은 버리지 않고 그냥 둔다는 뜻입니다. 어떤 때는 객관은 부정하지만 주관은 그대로 둡니다. 결국은 주객主客을 다 버리기 위해서입니다. ‘어떤 때는 사람과 경계를 모두 빼앗는다.’ 즉 주관과 객관을 완전히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과 경계를 모두 빼앗으면 사람과 경계를 모두 빼앗지 않는 것이 됩니다. 사람과 경계가 완전히 성립됩니다. 다 빼앗는다는 말은 쌍차이고, 다 버리지 않는다는 말은 쌍조입니다. 이 쌍조는 사람과 경계가 서로 융합하여 자재함을 말합니다. 이것이 유명한 임제스님의 사료간입니다.
물론 참으로 깨치지 않고서는 이 사료간을 호호탕탕(浩浩蕩蕩)하게 온전히 쓸 수가 없습니다. 다만 말로 표현하자니 이렇다는 것입니다. 사료간의 근본 골자는 양변을 완전히 빼앗고, 그와 동시에 양변을 그대로 빼앗지 않습니다. 그러면 자연히 쌍차쌍조입니다. 임제 사료간도 중도를 알아야 알 수 있지 중도를 모르면 모릅니다. 그래야 참으로 임제의 정법을 알 수 있으며, 거기에서 방(棒)도 할 수 있고 할喝도 할 수 있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변견에 떨어져 집착하여 임제스님과는 영원히 등지고 맙니다.
여기에서 임제스님을 증거로 끌어온 것은 중도가 순전히 교리적인 이론이 아닌가 하는 오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중도는 『임제록』에서 정식으로 말한 삼보 법문에도 담겨있고, 또 사료간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어떤 때는 주관을 그대로 두고 객관을 빼앗고, 어떤 때는 주관을 빼앗고 객관은 그대로 둡니다. 이것이 육조스님이 말씀하신 ‘오고 감이 서로 원인이 된다[去來相因]’는 것입니다. 결국 주관과 객관을 완전히 다 버리고, 또 주관과 객관을 다 버리지 않습니다. 이것이 쌍민쌍존雙泯雙存이고 차조동시(遮照同時)가 되어 자재무애하고 호호탕탕한 종풍宗風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제 중도가 쌍차쌍조雙遮雙照이고 차조동시遮照同時인 것을 짐작 했을 것입니다. 이 문제를 참으로 해결하려면 깨쳐야 합니다. 깨지지 못 하더라도 대강 짐작이라도 하려면 이 법문을 자세히 들어야 합니다.
해일(海日) 寫經合掌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