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이 희망으로 룻기 3:1~5, 4:13~17
오늘은 절망이 희망으로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겠습니다,
룻기는 구약의 복음서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으며 이방민족에 대한 하나님께서 관심을 많이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는 책입니다.
예수가 태어나신 유다지파에는 5명의 여인의 이름이 있습니다
다말(엘,오난,셀라, 유다=며느리이며 아내) 기생라합(기생), 룻(말론), 밧세바(헷족속 우리야)4명은 이방인이며 재혼한 여인입니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만이 유대인 처녀였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유대인들 뿐 아니라, 이방인들과 죄인들에게도 관련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과 죄인의 구원에 대하여도 지대한 관심이 있으심을 알수가 있는 것입니다.
룻기의 내용은
나오미와 룻의 가족은 베들레헴의 흉년 때문에 모압으로 이주하게 되었으며, 모압에서 남편과 두아들이 죽었습니다그리하여 두자부중 개종한 룻만 나오미와 함께 베들레헴으로 돌아오게 되었고,룻은 보아스의 밭에서 이삭을 주었으며 보아스는 이삭을 주을수 있도록 호의를 베풀었으며, 그 이야기를 나오미에게 하였다. 룻은 나오미의 가르침을 받아 보아스를 만나 고엘(기업무를자)이 되어 달라고 요청합니다. 보아스는 룻의 고엘이 되어서 기업을 물러 룻의 명의로 해주고 결혼하여 아이를 낳았는데 그 이름을 오벳이라고 하였습니다. 오벳은 이새를 이새는 다윗을 낳아 메시야의 계보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룻기의 내용을 유심히 살펴보면 모든 문제의 발단은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으로 이주하였다는 데서 그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모압의 룻의 가족에게는 절망의 땅이 되었습니다. 결국 룻과 나오미는 결단을 하여 베들레헴으로 돌아오게되었습니다. 베들레헴으로 돌아와 보아스를 통하여 희망을 얻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설교를 통하여 룻과 나오미가 어떻게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었는지 살펴서 우리의 삶에 있어서도 좋은 교훈이 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첫 번째 절망은 룻이 모압여인이라는 것입니다.(룻기1:4) 이는 근원적인 절망입니다
모압인들은 십대까지 뿐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는 것이 금지되어있습니다 (신 23 : 3)
이것은 마치 인류가 태어나면서 원죄를 가지고 태어나는 것같은 절망을 룻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12절]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 원죄
룻도 모압여인이라는 사실이 대단한 절망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룻은 이방여인에다가 이스라엘의 원수에다가 거기에다가 한가지 더 유부녀였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유대인의 아내 자격요건으로서는 최악의 자격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시야의 계보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롬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바로 이것이 복음입니다.
고대 희랍의 전설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솜씨 좋은 어느 조각가가 파르테논 신전에 장치할 석상을 만들기 위해 커다란 대리석을 정으로 쪼고 있었습니다. 열심히 대리석을 파 나가고 있던 조각가의 귀에 신음소리가 들렸습니다. 자세히 들으니 그것은 대리석이 내는 고통스러운 신음소리였습니다. 조각가가 "왜 신음소리를 내는가?" 하고 물으니 대리석은 "다신이 지금 나를 날카로운 정으로 쪼고 있지 않습니까? 내 몸에 붙은 살점이 이렇게 쪼개져 나가 땅에 버려지고 있지 않습니까?" 하고 불평을 했습니다. 그러자 조각가는 크게 노한소리로 꾸짓기를 "어리석은 대리석아 내가 너의 몸을 다듬어서 훌륭한 석상으로 만들지 않는뭉뚝한 덩이가 무슨 재주로 파르테논과 같은 거룩한 신전에 올려져 후에 사람들에게 존경과 찬양을 받을 수 있겠느냐 너의 고통은 일시적이다, 잠시만 참으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절망 그곳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뜻이 무엇인지 찾아야 합니다.
(약 5:13)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
절망에만 빠져있을것이 아니라 돌이켜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은혜를 다시 받아야 합니다
바로 땅을 얻었는 개념은 무한한 성장의 의미로 받을수 있습니다.
이제 땅을 되찾은 룻은 무한한 축복의 은혜를 받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두 번째 절망은 가족(남편 두아들=말론, 기룐)의 죽음입니다.(보호자의 상실)
룻 1:3~5를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3.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그의 두 아들이 남았으며 4. 그들은 모압 여자 중에서 그들의 아내를 맞이하였는데 하나의 이름은 오르바요 하나의 이름은 룻이더라 그들이 거기에 거주한 지 십 년쯤에 5. 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고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
나오미가 모압으로 이민 온 뒤 남편이 세상 떠났고, 거주한지 10년쯤에 두 아들도 다 죽었습니다.
그 이유중이 하나가 땅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생활의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라는 충분히 예상볼수 있습니다
결국 룻은 가족을 잃어버리는 절망적인 상황에 봉착하게 되었습니다.
*가장이 없다는 것은 가정의 보호자요 책임자가 없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특히 그 지역은 여자들을 무시하는 문화권에 있었습니다. 예수님당시에도 5000명을 먹이신 기적에도 여자의 수를 세지 않았습니다(마14:21) 그런 상황을 고려한다면 룻과 나오미가 격었을 고통을 우리는 충분히 생각해 볼수가 있을것입니다. 취직하기도 어렵고 남자들에게도 늘 무시의 대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보호자없는 가정은 마치 지휘관 없는 부대처럼 당황하며 방황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원히 변함이 없는 지휘관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야 늘 승리할수 있습니다. 결국 룻은 새로운 보호자를 찾아 떠났습니다.
그래서 보아스를 만나 고엘의 의무를 청구하였습니다. 보아스는 룻에게 남편이 되어주고 아이까지 주었습니다
룻 4:16-17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16. 나오미가 아기를 받아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니 17. 그의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지어 주되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하여 그의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버지였더라”
나오미가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뒤 보아스와 룻 사이에 오벳이 태어났는데, 동네 사람들이 그 오벳을 나오미의 아들이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나오미가 타국 땅에서 두 아들을 다 잃었으나 고향으로 돌아와 새로운 아들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룻은 모압땅에 들어가서 남편을 잃어버리는 절망에 빠지게 되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남편과 아이를 다시 찾았습니다. 그것도 메시야 계보에 들어갈 자녀을 낳게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러자 주변의 여인들도 나오미을 축북을 축하해 주었습니다
룻 4:14-15 “14.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오늘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하지 아니하셨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15. 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이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곧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네 며느리가 낳은 자로다 하니라”
절망에 빠진 자들이 주님께 돌아오면 주님은 비록 모압족속(이스라엘과 원수)과 같은 사람이라도 모두 용납해 주시며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요1:12 영접하는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어떤출신 사람이든지)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뿐만 아니라 주님께 구원의 축복을 받은 자들은 그 이웃에게도 인정을 받게됩니다.
고엘되신 주님께서 가장을 잃은 룻의 가정에게 사랑으로 보호자되시며 삶을 책임져 주신다는 것입니다.
모압에서 얻은 세 번째 절망은 신앙의 사명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사명의 상실)
룻 1:1에서 보았듯이 나오미는 흉년을 피해서 가족들과 함께 고향 유다 베들레헴을 떠났습니다.
그저 그 땅에 흉년이 들어 더 이상 그 땅에서는 살 수 없어서 그 땅을 떠났습니다.
그들에게는 그저 하루하루 먹고 사는 것 그것이 사는 이유의 전부였습니다.
그 이상의 것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런 신앙의 모습도 나타날 수 없었습니다.
(창12장 아브라함의 경우- 가는곳마다 제단을 쌓음, 하나님의 명령으로 떠남)
그런데 룻 4:14를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오늘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하지 아니하셨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그리고 4:17 후반부를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하여 그의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버지였더라”
룻기 기자는 한 마디로 나오미가 다윗 왕의 할아버지를 얻어 양육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오미가 신앙의 사명을 얻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명의 관점에서 볼 때 룻기는 사명 없이 살던 사람들이 사명자가 되어 하나님의 구속사의 매우 중요한 도구로 쓰임받게 되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명 없이 살아갑니다.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 어떤 길로 나아가야 할지를 모른 채 어쩔 수 없이 살아갑니다. 그저 주어진 삶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쩔쩔매매 살아갑니다.
죽지 못해 살아갑니다. 그 인생이 행복할 리가 없습니다. (연예인의 자살- 최진실)
이제 우리는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만 하는 신자가 아니라 나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그 사명을 위하여 적극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겠습니다
스위스의 사상가 카알 힐티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라는 명저에서 “내 사명을 깨달은 날이 내 생애 최고의 날”이라고 했습니다.
빌게이츠도 자신의 사명을 깨닫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일을 갖고 있고, 출근 하는 길은 언제나 즐겁다. 항상 새로운 도전과 기회, 배울 만한 것들이 기다리고 있다. 만약 스스로의 일을 이 정도로 즐긴다면, 체력이 소진될 일이 없을 것이다."
사명은 우리의 삶의 의미를 갖도록 합니다. 그리고 사명은 우리에게 열정을 갖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그래서 자기 사명을 찾고 그 사명을 향해 달려가는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이야 말로 축복받은 삶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룻의 가정에 있어서 절망의 문제가 나타나게 된 것은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땅으로 이주한 후에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모압으로 이주한 후에 룻의 가정이 잃어버리게 된것들은
1.베들레헴에서의 삶의 터전인 땅을 잃어버렸습니다.(생활의 상실)
2.모압땅으로 가서 남편과 두아들을 잃어버렸습니다.(보호자의 상실)
3.룻의 가족(엘리멜렉은 유다지파 믿음의 가정)이 모압으로 가서 신앙의 사명을 잃어버렸습니다.(사명의 상실)
결국 절망의 끝에 다다라서 더 이상 물러날수가 없게 되었을 때 룻과 나오미는 결단을 내려 베들레헴으로 돌아오게 되었고 보아스(기업무를자, 고엘)를 만나게 되어 모든 문제를 해결 받게 되었습니다.
진정 영원한 고엘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분은 자신의 몸과 피로 십자가위에서 우리의 죄값을 치루셨습니다
우리 또한 그리스도인들도 주님과 같이 사랑하는 고엘(기업무를자)이 되어 살아가야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