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건의 훈련과 성숙(디모데전서 4장 7-8절) 20240421 추가자료
경건주의(敬虔主義) 독일어 Pietismus 피에티스무스, 영어 Pietism 파이어티즘
16세기말에서 17세기에 형성되었던 개신교 정통주의 신학의 극복을 위해 17세기 유럽 서방교회 개신교회의 독일 교회에서 형성되기 시작하여 유럽 전역에 기독교인다운 경건 생활과 실천 중심의 종교 운동이다.
서방교회의 정통성을 강조하는 개신교 내부의 개신교 정통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신학적 개념보다 기독교인의 생활과 실천을 강조하는 사상이자 종교 운동이다. 독일에서 시작되어 유럽 전역과 미대륙까지 퍼진 기독교 활동이었다.
두 번째 종교개혁이라고 평하기도 하며, 더 나아가 유럽 계몽주의 운동의 배경으로 상호 직간접적 영향을 끼쳤고, 유럽 철학사상과 정치적 사상에도 그 영향을 남겼다.
경건주의는 경건한 생활을 강조하는 경건주의 책자에서 등장하였고, 경건주의자에 대한 개념도 경건주의 계열의 책자를 통해서 나타났다. 경건주의는 경건에 대하여 이론을 연구하는 개념적 활동이 아니라 개신교도의 경건한 생활을 형성하고, 이루기 위한 실제적인 생활 운동이자 사회적인 기독교 운동이었다.
경건주의의 개념은 매우 넓은 개념으로 경건주의 사고, 독서와 실천, 상업 활동, 사회 개화, 종교적 경험, 학교 설립까지 광범위의 영향력을 발휘했고, 17세기에서 18세기까지 영향을 주었고, 계몽주의 발전의 기독교적 배경을 마련하였다.
경건주의는 기독교인의 경건하고 올바른 생활과 가치관에 대한 운동이었고, 실제적인 생활을 개선하는 과정이 포함되었다. 기독교인의 생활과 가치관, 이성, 경험을 경건하도록 실천하는 과정이 따르는 종교이자 사회 운동이었다. 따라서 기존 유럽의 잘못된 관습, 특히 반이성적 활동과 기독교와 관련이 없는데도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된 만행 등에 대한 반성 및 개선을 강조하고 실천으로 옮겼다. 이 실천과정과 가치관은 유럽의 계몽주의 운동의 동시대적 배경이며, 기독교 운동으로 계몽주의의 실천에 직간접적 영향을 끼쳤다.
교회를 통한 경건주의는 유럽 전역에 계몽주의 운동과 활동이 발생하도록 하였다. 유럽의 계몽주의 사상과 활동은 개신교 경건주의와 뗄 수 없는 관계로 경건주의 사회적 발전 형태로 이해할 수 있다.
경건주의 발생 시대 배경 16세기에 서방교회는 종교 개혁으로 찬성파인 개신교회와 반대파인 천주교회로 나뉘어 국가별 또는 지역별로 구분되었다. 유럽의 중심사상과 사회 기본이었던 서방교회의 분리는 유럽사회의 정치, 경제, 문화에서도 개신교도와 천주교도의 대립으로 완전히 나뉘었다.
16세기가 지나고 17세기를 거치며 서방교회의 개혁 반대파 천주교회와 개혁 찬성파 개신교회는 완전히 교파로 분리되어 각자의 정통성을 강조하는 형국으로 변화하였다.
서방교회의 기독교인들은 서방교회의 양분 이후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혼란한 시기를 맞이했다. 서방교회 개혁 찬성파인 개신교회는 개신교 정통주의 신학으로 서방교회의 정통성을 주장했고, 개혁 반대파인 천주교회는 트리엔트 공의회를 거치며 서방교회는 분리되고 두 교파가 서방교회의 정통성을 주장하며 상호 대립하는 형국이 되었다. 이 상황에서 대부분이 기독교인이었던 유럽 사회에서 교리적으로 천주교와 개신교 중 어디에 속하는지에 대한 질문은 사회생활과 실생활에도 영향을 끼쳤다. 정부의 성향에 따라 개신교도의 상인협회와 천주교도의 상인협회가 따로 설립되었고, 교파 차이로 인한 동일 지역내에서도 사회적 교류 단절이 나타나기도 했다.
서방교회는 종교개혁의 찬성과 반대 입장에서 점차 교리적으로, 사상적으로 대립하였고, 그 교리가 신자들이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분리, 연합하는 기준이 되었다.
개신교회 내부에서도 교회의 정통성, 즉 정통주의 신학의 교리적 강조에 중점을 두게 되었고, 개신교회의 설교와 선교도 기독교인의 태도와 실천보다는 교리의 인정에 중점을 두게 되었다. 점차 개신교회는 정통을 강조하는 교리 중심이 되어갔다. 개신교의 제도 중심화, 교리 중심화가 신앙의 실천, 변화의 경험을 막는 것에 대한 반성이 나타났고, 이 반성은 독일 개신교회인 루터교회의 내부에서 경건주의로 발생하여 점차 전 유럽 전역과 영국과 미주의 개신교회들로 퍼져갔다.
경건주의 특징 경건주의는 1600년대의 '경건성의 위기' 상황에서 그 정신적 특징이 나타났고 1670년대에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정통주의는 정통 교리가 무엇인지를 규명하고 고수하는 것에 힘을 쏟았다면, 경건주의는 정통 교리를 삶의 현장에서 실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봤다. 경건주의가 정통주의 교리와 신학을 배제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경건주의 발생 초기 상황에서 이 흐름에 있던 사람들에게 정통주의 신학은 당연히 전제된 것이었다. 이들에게 문제는 삶의 변화요 실천이었다.
경건주의 인물
1. 요한 아른트(1555-1621)
루터파 교회와 신학에 경건주의적인 사상을 들여온 요한 아른트(1555-1621)는 당시에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말하는 사람은 많지만 실제로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는 사람은 적다고 한탄했다. 이런 현실 때문에 '무신론자'(Atheist)들이 늘어난다고 했다. 이때 말하는 무신론자는 18세기 후반에 등장하여 19세기에 본격적으로 퍼진 무신론과는 다르다. 신앙인들의 삶이 그리스도를 닮지 않아서 기독교 신앙에 실망한다는 정도의 의미다.
그의 작품 <무엇이 진정한 기독교인가>는 필립 야콥 슈페너에게 영향을 미쳤다.
2. 필립 야콥 슈페너(1635-1705)
경건주의의 창시자로 불리는 인물이 루터파 목사요 신학자인 필립 야콥 슈페너(1635-1705)다. 슈페너가 쓴 《경건한 열망》(Pia Desideria)을 경건주의 방향을 제시한 책으로 본다. 1675년에 출간된 이 책에는 이후에 본격적으로 진행되는 경건주의 운동의 특징들에서 두 가지 외에는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시점을 확인할 수 있는 회심 체험과 타문화권 선교가 그 두 가지다.
슈페너 목사는 이 책에서 참되고 살아 있는 믿음이 없는 것이 교회가 타락한 원인이라고 진단한다.
이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방법이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그 구체적인 방법은 작은 모임을 만들어 성경 말씀을 묵상하며 서로 나누는 것이다. 진지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작은 모임에서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서로의 깨달음을 나누며 삶의 변화를 추구하는 모임을 '경건 모임'(collegium pietatis)이라고 한다. 슈페너가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자신의 목사관에서 1670년에 시작한 모임이며 이 유형의 모임이 경건주의 대명사가 됐다.
3.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케(August Hermann Francke)는 17세기 말과 18세기 초에 일어났던 독일 경건주의 운동을 종합적으로 완성한 신앙의 영웅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경건주의 창시자인 필립 야콥 슈페너의 영향을 받아 독일 개신교회의 갱신과 부흥을 주도했다. 동시에 그는 할레대학과 프랑케 재단을 통해 다양한 교육과 구제 활동으로 그가 살던 독일 동북부 지역의 도시인 할레를 놀랍게 변화시켰다. 그는 현재 독일 교육 제도의 기반을 확립했고 나아가 독일이 최초로 통일되는 초석도 놓았다.
나아가 프로이센 및 다른 나라들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덴마크 및 영국과 협력해 세계 선교에도 크게 공헌했다.
프랑케는 1663년 3월 12일 독일 북부인 뤼벡에서 태어난 후 3세에 고타로 이사해 자랐다. 1679년부터 에어푸어트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그 후에 킬과 함부르크에서도 수학했다. 그는 킬대학에서 공부할 때 신학자였던 코르트홀트 교수 댁에 머물며 슈페너를 소개받았다.
1684년에는 라이프치히대학, 이듬해에는 비텐베르크대학에서 잠시 공부하다가 다시 라이프치히로 돌아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가 라이프치히에 있는 동안 8명의 친구들과 함께 성서동지연구회(Collegium Philobiblicum)를 조직해
(1686년) 매 주일 오후에 두 시간씩 구약과 신약 성경 한 장씩 공부하면서 체계적인 성경 연구에 힘썼다. 1687년에 슈페너가 라이프치히에 와서 이 모임에 대해 여러 조언을 하면서 프랑케는 그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프랑케는 30세에 할레 근교 글라우하에 있던 성 게오르그교회 목사로 일하는 동시에 할레대학에서 헬라어와 근동어학 교수로 초빙됐다. 1692년부터 1715년까지 글라우하의 목회자로 섬긴 후 1715년부터 1727년까지는 할레의 성 울리히교회 목회자로 봉사했는데 그의 설교와 강의는 많은 사람에게 큰 감동을 줬다.
할레대학에서의 경건주의 교육의 확대 프랑케가 사역하던 당시의 독일은 30년 종교전쟁(1618-1648)으로 국토 대부분이 황폐화되고 설상가상으로 페스트가 휩쓸면서 인구가 급감하며 많은 고아가 생겨났다. 그곳에 살던 사람들은 대부분 하류층이었고 두 번의 대화재로 큰 피해를 본 글라우하는 재정이 거의 파산 직전이었다.
동네마다 술집이 많아 어른들뿐만 아니라 청소년들에게도 음주 문제가 심각했다. 학생들은 학비를 낼 수 없는 형편이었고 범죄가 증가했다. 그러다 보니 많은 노동자가 주일에도 일해야만 했다. 주일 성수를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늘어가니 교회의 재정 상황도 열악했고 일부 장로들은 헌금을 횡령하기도 했다.
하지만 프랑케는 이곳에 부임한 후 이러한 영적, 도덕적 타락 상황에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성경을 가르쳐 도둑질이나 다른 악행을 통해 수입을 챙기려는 어른들을 변화시켰고 학교에 다니지 않아 온갖 나쁜 짓만 배우며 자라는 가난한 어린이들을 교육하기 시작했다. 설교에 관해 대화하는 시간을 정기적으로 가지면서 성경을 더욱 자세히 설명해 줬다. 특히 부모들에게 자녀에 대한 책임을 강조하면서 금요일 저녁 모임에서 교육적인 주제를 다뤘다. 당시 주제 성구는 창세기 18:19이었다.
가난하고 굶주린 교인들에게는 매주 목요일마다 생필품과 식량을 나눠 주면서 영적 상담도 병행했다. 그러면서 주중 예배와 아침, 저녁 기도 모임에도 교우들이 참여하도록 격려했고 1699년에는 소책자인 가정교회 예배지침서도 발간했다. 나아가 할레대학에서 가르치면서 다시 성서 동지 연구회를 시작했다.
1695년 프랑케는 가난한 사람들을 더 돕기 위해 자신의 방에 헌금함을 준비했고 거기에 요한1서 3:17을 적어 놓았다. 약 3개월 후 한 귀부인이 큰 금액을 헌금하자 하나님의 응답으로 알고 이 기금으로 고아들에게 교리문답을 가르치기 위한 학교를 시작했다. 그는 책을 사서 아이들에게 나눠 주고, 할레 대학생들에게 하루 2시간씩 교사로 봉사하도록 했다. 1695년 부활절에 이렇게 빈민학교를 시작했는데 점차 학생 수가 증가해 더 큰 시설이 필요했고 교사들 수도 늘려야 했다.
이 중 실력 있는 아이들을 계속 키우기 위해 2년 후에 라틴어학교도 시작했고, 같은 해 할레에 프랑케 재단을 설립했다.
프랑케 재단은 점점 확장해 이듬해에는 초등학교, 고아원, 사범학교, 중학교, 실과학교, 기숙사, 보건원, 인쇄소 등을 포함하는 종합 교육 공동체로 발전했고, 1701년에는 본관도 개관했다. 본관 정문 위에는 이사야 40:31 전반부가 새겨져 있으며 그 위에 독수리 두 마리가 날고 태양이 비치는 그림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이 재단의 상징이다. 그는 성경학교도 설립해 많은 평신도에게 성경과 신학을 가르쳤으며, 극빈자를 위한 병원, 과부들의 쉼터, 가난한 학생들을 위한 무료 숙박소 등 다양한 기관들을 세웠다. 또한 프로이센의 귀족인 칼 힐데브란트 폰 칸슈타인의 후원으로 칸슈타인 성서공회(Cansteinsche Bibelanstalt)를 설립해 20세기까지 수백만 권의 성경을 저렴하게 출간, 공급했다.
이 일은 세계 최초의 성서 공회 사업인 동시에 성경을 신앙생활의 중심에 놓게 한 중요한 사건이었다. 나아가 그는 청소년 교육에도 역점을 뒀는데 이들이야말로 미래의 주역이기에 그들에게 참된 경건 사상을 교육하고 실천하도록 하는 일에 집중했다. 그 후 30년간 다른 여러 학교, 주택, 서점, 작업실, 정원과 약국 등이 들어섰다.
1708년부터는 일주일에 세 번씩 할레신문을 발행했으며 1709년에는 소녀 고아들을 위한 건물과 소녀들을 위한 학교도 문을 열었다. 이듬해에는 영국에서 온 학생들을 위한 영국 학교도 생겼고 1710년에는 식당과 기숙사도 건축해 2천 명의 학생을 수용할 수 있게 됐다.
그 결과 프랑케 재단은 1716년에 150명의 교사가 2천여 명의 학생들을 교육하는 명실상부한 프로이센 최고의 교육 기관으로 자리매김했다. 또한 사회 개혁 운동의 발상지가 됐으며 세계적인 네트워크를 갖춰 지금도 여러 나라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외국에 있는 독일 개신교회에도 영향을 줘 1740년경에 이르러서는 할레의 경건 운동을 모방한 학교와 시설들이 쾨닉스베르그, 할버슈타트, 뉘른베르크, 벡, 오스트프리슬랜드, 스톡홀름, 모스크바, 런던 등지에 설립됐다. 나아가 독일 개신교 최초의 선교, 디아코니 및 직업학교가 이곳에서 시작됐으며 수많은 개신교 찬송가가 지어졌고 처음에는 약 5만 권이던 도서관의 책이 나중에는 20만 권으로 늘어났다. 이런 사역을 통해 할레는 하나의 교육 도시로 변화됐다.
또한 이 재단 내에 약 2500명이 거주하면서 경건주의적 영감을 받은 사회 개혁이 이뤄졌다. 할레대학에 특히 프랑케의 영향이 큰 이유는 대학에서 교수하면서 당시 여러 사회 문제들에 뛰어들어 경건을 실천하며 모범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며 과감하게 일을 추진하자 그의 제자들이 계속해서 교육과 선교 사역을 감당했다. 그 결과 루터교회의 본산이던 비텐베르크대학이 가졌던 독일 개신교 신학의 주도권이 할레대학으로 옮겨져 지금도 할레대학은 '마틴루터대학교'라 불리며 비텐베르크대학은 할레대학의 분교가 됐다.
경건주의 교육 철학이 국가 통치 이념으로 발전 이처럼 프랑케가 시작한 할레의 경건주의 운동과 교육 철학은 한마디로 "인간의 변화를 통한 세계의 개혁"이었다. 할레대학이 유명해지자 전 유럽의 귀족들이 자녀들을 이 대학에 보냈다. 이렇게 우수한 학생들이 몰려 와 이 학교를 졸업해야 장교나 법관, 고급공무원, 의사, 목사 교수직을 받을 정도가 됐다. 기타 교사양성소인 '세미나리움'(Seminarium)도 중요한 교육 기관 중 하나였다.
결국, 이 할레에서 교육받은 자녀들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분야에서 활발히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역들을 전개해 나갔다. 프랑케는 결국 할레를 성시화해 하나님의 나라를 맛볼 수 있는 곳으로 만들었다.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프랑케를 만나 큰 감명을 받고 그의 경건주의를 통치 이념으로 삼았다. 후에 독일 통일의 주축이 된 프로이센의 흥왕을 위해 왕에게 제공한 국민 기초 교육과 군대의 훈련 방향에 관한 프랑케의 자문은 큰 영향을 끼쳤다. 프로이센의 미래 관리들은 이 학교에서 교육을 받아 근면, 성실성, 책임감, 정확성, 경건 등을 중요한 가치관으로 배웠고 이것이 현재 독일의 기초 교육으로 정착됐다. 왕실은 이 학교에 대해 세금을 면제해 줬고 그 결과 프로이센을 대표하는 공식 교육 기관이 됐다. 프리드리히 1세는 귀족들에게 근면, 절약, 책임 의식을 강조하면서 왕실 경비를 전체 국가 예산의 1%수준으로 낮출 정도로 솔선수범했다.
그 결과 프로이센은 국력을 축적해 1871년 독일 통일의 대업을 이뤘다. 현재 독일이 선진국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국민이 그만큼 정직하고 근면하며 체계적인 시스템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 뿌리는 프랑케의 경건주의 교육에 기원한다고 볼 수 있다.
경건주의를 통한 세계 선교 프랑케는 선교도 중시했다.
1702년에 덴마크-할레 선교회를 설립하자 경건주의 예찬자인 덴마크 왕이 인도 식민지에 선교사를 파송했다. 1705년에 개신교 첫 해외 선교사로 치겐발크를 인도 남부에 파송했다. 그가 보내온 편지를 프랑케가 책으로 펴낸 "동방에서의 복음 전파"라는 선교 보고서는 영국의 존 웨슬리에게도 큰 감동을 줬다. 또한, 프랑케는 오리엔트 신학연구소를 세워 학생들은 성경과 함께 아람어, 시리아어, 아랍어, 터키어, 중국어 등도 배웠다. 이들의 활동은 선교를 위한 밑거름이 됐고 영국 왕 조지 1세와 헤른후트 공동체의 지도자였던 친첸도르프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프랑케의 제자 루돌프는 그리스 정교회와 관계를 맺어 그리스 학생들이 할레대학 및 오리엔트 신학연구소에서 교육을 받았다. 할레대학 출신의 샤르쉬미트는 모스크바로 가서 사역했으며 많은 신학생이 뒤를 이었다. 글뤼크는 모스크바에 김나지움을 세웠고 교사들이 할레에서 왔다.
그 후 많은 러시아 유학생들이 할레에서 공부했고 이들은 러시아가 서방에 문호를 개방하는 데 일조했다.
1728년에 칼베르크 교수는 할레에 유대인을 위한 선교사 훈련원을 세워 선교사들을 동부 독일과 중동부 유럽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파송했다. 뵈메는 영국 성공회 내의 기독교 지식진흥회(SPCK, Society for Promoting Christian Knowledge)와 연결해 경건주의 책들을 영어로 출판했다. 할레 출신 선교사들은 모라비아 교도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으며, 영국과 미국에 부흥 운동을 일으켰고 형식화되던 독일 교회도 생명력 있게 변화시켰다.
이렇게 할레대학은 18세기에 약 60여 명의 선교사를 파송했고 창설된 지 30-40년 만에 약 6천 명의 목사를 배출해 세계 각국에 복음을 전파했다. 그중에는 영국 브리스톨에서 고아의 아버지로 사역했던 조지 뮐러와 한국과 중국에 복음을 전했던 칼 귀츨라프가 있다. 노르웨이는 그린란드의 초대 선교사 한스 에게데와 부흥사 한스 닐손 하우게를 배출했다. 프랑케는 1727년에 소천해 할레에 묻혔으나 프랑케 재단은 계속 발전했고 동독 시절에 어려움을 겪었으나 통일 이후 재건돼 현재 45개 단체에 약 4천 명이 일하고 있다.
프랑케의 삶이 주는 교훈 먼저 그는 모든 일에 오직 성경을 기준으로 삼았다. 성경 원어에 능통했고 성령의 조명도 강조하며 성경 연구 운동을 일으켜 교회를 갱신하고 나아가 성경적 경건을 실천해 수많은 인재를 길러 냈다.
둘째로 그는 위기 상황 및 여러 문제에 대해 구체적 대안을 제시하고 해결해 나갔다. 고아들이 많아지자 고아원을 세웠고 가난한 어린이들에게 무상 교육을 했으며 소녀들에게도 교육의 기회를 제공했다. 또한, 학교뿐 아니라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여러 기관을 설립해 삶의 모든 영역에서 진정한 변혁을 추구했다. 한국 교회도 사회 개혁의 주체가 되어 높은 자살률, 저출산 및 고령화, 소득 불평등의 심화 및 불공정한 한국 사회의 여러 문제에 대해 연합해 실제적 대안을 제시하고 실행해 나가야 할 것이다.
셋째로 프랑케의 사역을 통해 할레는 하나님 나라를 구현하는 공동체가 됐으며 독일 교육 제도의 틀을 다졌다. 한국의 근대사에도 선교사들과 선각자들이 기독 교육을 통해 위대한 인재들을 배출해 독립 및 근대화에 큰 공헌을 했지만 21세기에 들어와 많은 기독 학교들이 세속화되고 사명감을 잃어가고 있다. 따라서 이 프랑케 재단의 총체적 사역에 대해 더욱 깊이 연구하면서 새로운 기독 교육 운동을 일으키고 이를 통해 세계 선교에도 공헌해야 할 것이다.
넷째로 프랑케의 교육은 단지 건물을 짓고 성경을 가르치는 것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교육 목적과 수단 및 교수법 등을 학문 체계로 발전시켰으며 이를 구현할 기관들도 설립했다. 또한, 실습 위주의 교육을 접목해 직업학교 설립의 근간을 마련했다. 현재 독일은 직업학교가 아닌 김나지움 학생들도 10학년(한국은 고1) 때 2주간 다양한 곳에서 실습하면서 장래 자신의 진로를 탐색할 기회를 주는데 이런 부분은 한국의 기독학교와 공립학교도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프랑케는 전 세계에 선교의 모범을 보였다. 그의 경건주의 교육은 모든 영역에 걸쳐 기독 인재를 길러 냈으며 독일을 넘어 여러 나라에 복음을 전했다. 여러 나라에서 온 유학생들이 할레에서 공부한 후 돌아가 자기 나라에 유사한 학교를 세우고 선교사들도 파송한 것은 프랑케 재단이 열방을 섬기는 축복의 통로가 되는 사명을 충실히 감당했다고 말할 수 있다.
한국에도 이 경건주의 교육이 체계화돼 해외 학생들이 와서 교육 선교 모델을 배워 자기 나라에 적용할 수 있는 모범을 보여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이 분야에 종사하는 기독 교육자들이 더욱 협력하면서 교회와 함께 노력해 나가야 할 것이다.
4. 니콜라스 루트비히 폰 친첸도르프 백작
친첸도르프는 1700년 드레스덴의 경건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신성 로마제국의 세습 귀족인 그는 루터파 경건주의 전통에서 자랐다. 그의 할머니 헨리에타 카타리나 폰 게르스도르프 남작 부인의 영향 때문이다. 남작 부인은 성경을 원문으로 연구했고, 찬송시를 독일어와 라틴어로 작곡했다. 그녀는 초기 경건주의자들인 슈페너와 프랑케와도 라틴어로 서신을 주고받았다.
친첸도르프는 어려서부터 할머니의 거주지인 헨너스도르프 성에서 모임을 가질 때마다 경건주의 선교사들의 서신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1710년 친첸도르프는 독일 경건주의와 개신교 선교의 중심지인 할레의 귀족 학교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6년 동안 프랑케의 영향을 받는다. 1705년 프랑케 집에서 인도 선교사로 파송된 바르톨로메오 치겐발크와 하인리히 플뤼차우를 만났다. 그는 할레에 있는 동안에 4명의 친구들과 함께 '겨자씨 한 알'이라는 소그룹을 구성했다. 이들의 관심사는 기도와 그리스도를 위한 대의에 있었다.
친첸도르프는 그룹 동료인 프리드리히 폰 바텐빌과 함께 이교도를 개종하는 데 모든 힘을 기울이기로 서약한다. 비록 자신들이 선교사가 될 수 없다 할지라도 아무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이교도들에게 더 큰 관심을 갖기로 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할레의 경건주의는 젊은 백작의 신학적 입장에 큰 영향을 제공했다. 할레 경건주의는 개인이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종교적인 헌신과 그리스도인의 삶의 안내서인 성경에 대한 신뢰, 그리스도에 대한 온전한 헌신을 강조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관심을 신조와 교리의 일치보다는 관계적인 신앙에 초점을 둠으로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의 중요성이 무엇인지 깨닫게 했다.
친첸도르프는 할레에서 학업을 마친 후, 당시 귀족들의 관례에 따라 비텐베르크대학에 입학했다. 이후, 작센 선제후의 법률 자문관이 되고자 법학을 공부했다. 사실 그는 일하지 않고도 먹고 살 수 있을 정도의 재산을 물려받았고, 특출한 지성인으로 학문을 독학으로 연구할 수 있는 수준을 갖췄다. 그러나 친첸도르프의 최종 목표는 그리스도의 나라를 위한 섬김이었다. 그는 지속적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향해 나아갔고, 십자가 신학은 그의 중심 주제였다. 그는 비텐베르크에서 신학 수업을 들으며 기도와 금식, 헌신적인 삶에 몰두했고 성경을 헬라어로 읽었다.
참된 그리스도교는 구세주이신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경험하는 것이며, 이는 모든 신조와 교리들을 초월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비텐베르크에서 세상을 전적으로 포기하고 구세주를 따르기로 작정한다.
친첸도르프는 견문을 넓히고 사교적인 관계를 위해 독일, 네덜란드, 프랑스를 여행했다. 신분을 갖춘 이들이 왕족이나 종교 지도자들을 만나고, 박물관을 방문하는 것은 일종의 기사여행(騎士旅行, Cavalier Tour)으로써 당시의 관례였다. 이를 통해 귀족 사회의 생활과 놀이, 사교 및 파티를 경험하는 기회를 가졌다. 그는 여행을 통해 세상에 깊이 파고들어 갈수록 주님이 자신을 지키신다고 확신했다. 나아가 세상의 그 어떤 위대한 자들에게도 구세주의 은총과 선하심을 증거할 수 있었다. 그는 뒤셀도르프의 미술관에서 이탈리아 작가 도메니코 페티의 작품인 〈가시 면류관을 쓰신 예수님(Ecce Homo)〉을 감상하며 헌신을 다짐한다.
그림 아래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나는 너를 위해 이 일을 하였건만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하였느냐?" 비록 그리스도를 사랑했음에도 자신이 그분을 위해 실제로 한 일은 거의 없었다. 그는 그림 앞에 무릎을 꿇고 그리스도의 섬김을 위해 자신을 바치기로 다시금 헌신했다. 이제부터 주님이 이끄는 것은 무엇이든 하겠노라고 결심했던 것이다.
친첸도르프와 헤른후트 공동체의 사상과 선교 헤른후트 공동체는 친첸도르프와 분리될 수 없다. 1722년 그는 에르트무테 도로테아 폰 로이스와 결혼한 후 드레스덴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보헤미아와 경계를 둔 작센의 베르텔스도르프로 이주했다. 그의 아내는 친첸도르프의 친구인 하인리히 29세의 누이로 두 사람은 신분의 계급이나 서열보다 영혼을 얻고 주님의 부르심에 즉각 응답하기로 서약했다. 그곳에서 친첸도르프는 크리스티안 다비드를 만난다. 그는 종교의 자유를 찾아 보헤미아와 모라비아로부터 피난 온 이들을 받아 줄 것을 요청했다.
5년 후, 베르텔스도르프에는 300명의 모라비안이 거주했고, 그들은 이곳을 "주님의 피난처"(Herrnhut, 헤른후트)라고 불렀다. 이런 배경에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정착시키려는 친첸도르프의 열정이 담겨 있다. 그는 공동체 안에서 영적인 성장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증대하기 위한 많은 조항을 구성원의 합의로 이끌어 냈다.
선교를 포함해 초기 헤른후트 공동체의 활동은 성령을 통한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선교란 하나님의 어린양에 대한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가 확장되는 것이다. 어린 양의 사랑을 타자에게 나누고 그들을 구원의 팔로 감싸 안으려는 열망이 선교를 위한 촉매가 됐다. 이와 관련해 두 개의 사건이 중요하다. 하나의 사건은 동역자 슈팡엔베르크에 따르면, 1727년 5월 12일 친첸도르프가 헤른후트에서 형제회와 함께 구세주를 위해 헌신하기로 맺은 언약이다. 그때 종교적 다툼, 자기 사랑, 자기 의지, 불순종, 자유로운 생각 등과 같은 죄를 고백했다. 더불어 그곳에 모인 이들은 모든 것이 성령의 인도하심이라고 고백한다.
또 하나의 사건은 헤른후트 공동체가 그 해 8월 중 한 주간을 기도와 금식으로 모인 형제회의 '오순절 사건'이다. 이때, 성령의 강한 역사를 체험한다. 그들 가운데 운행하시는 성령의 임재는 여름 내내 공동체의 연합과 영적 갱신을 불러일으켰다. 8월 13일까지 지속된 모임은 자신들의 거처가 진정 하나님이 계시는 곳으로, 기쁨과 환희만이 그들을 지배했다. 슈팡엔베르크는 이 사건을 "성령의 세례를 받아 오직 한 사랑을 경험한 것"이라고 기록했다. 또한 다비드 니취만은 "헤른후트는 그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살아 있는 공동체가 됐다"고 말했다. 두 사건 이후 형제회는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하기로 고백한다.
헤른후트에서는 사랑의 식탁과 서로의 발을 씻겨 줌, 축제와 찬양 예배, 찬송을 발표하는 일들로 성령의 사랑을 표현했다. 형제회가 오순절을 체험한 후 공동체는 훈련, 친교, 예배에 대한 공적인 책임을 밴드(Band)라는 조직으로 발전시켰다. 친첸도르프는 이 조직에서 기도에 대한 강조와 선교 사역에 대한 열정을 고취시킨다. 공동체 내 성령의 사랑이 전파돼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를 방문하기 시작했다. 경건주의 소그룹이 대륙의 개신교에 퍼져 갱신을 불러일으키도록 노력했던 것이다.
헤른후트 공동체의 영성 헤른후트 공동체가 복음 선포위해 열심을 다할 수 있었던 동력으로 그들 안의 영성에 주목할 필요. 지면 관계상 세 가지만 언급 한다.
첫째, 개인성(개별성)을 존중, 공동체 안에서 친밀한 교제를 통해 믿음이 X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성장할 수 있다. 이 배경에는 18C의 만연한 낙관적인 태도도 한몫했다. 헤른후트 공동체는 밴드와 클라쎄 같은 다양한 소그룹을 활용했다.
둘째, 생활에서 말씀을 실천하고 적용하는 공동체 영성. 1727년 시작된 밴드는 10년 뒤, 100여 개 그룹. 그는 1730년대 밴드와 병행해 시작. 다양한 소그룹의 목적 신앙 교육이나 신자들 위한 규칙 공이 아니다. 실제 삶의 현장에서 X인으로 자각에 중점. 생활에서 말씀을 실천, 적용이 X인 공동체 영성의 최종 목표다.
마지막, G나라 사역은 차별 없다. 목회자와 평신도 구별은 사역의 구분, 섬김과 봉사의 차원에서 나뉘지 않는다. 여성의 역할도 중요, 공동체 내에서 아이들도 충분히 존중한다.
G이 각자에게 주신 달란트는 세상을 섬기고 돌보는 일에 온전히 사용될 때, 신자 개개인이 X의 몸인 살아있는 공동체를 경험할 수 있다. 이 일은 십자가에서 자신을 온전히 내어놓으신 X의 보혈과 보혜사 성령이 공동체 안에서 일하심을 본받는 제자도에 해당한다.
책소개 <청교도에게 배우는 경건> 루이스 베일리 지음 생명의말씀사
종교개혁의 결과 성찰하고 반성하며, 수동적, 법정적인 칭의, 전가된 의(義)에 만족함이 아니라, 실제적 삶의 변화, 경건과 성화의 삶을 추구했던 대표적 사람들이 독일의 경건주의자들이에게 영향 준 중요한 책 중 루이스 베일리(Lewis Bayly)의 《청교도에게 배우는 경건》이다. 그는 영 국교회(國敎會)의 사제로 후에 주교되지만, 청교도적 신념을 가진 경건한 사람이었다. '청교도의 교과서'라 불릴 만큼 청교도의 신앙과 경건에 결정적인 영향 미쳤고, 기독교 역사에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힌《천로역정》의 저자 존 번연(John Bunyan)도 아내가 지니고 있던 이 책을 숙독함으로써 영적 생활을 시작하는 데 큰 도움을 받았다고.
이 책은 ‘이론’과 ‘실천(연습)’로 구성. X를 닮아가는 경건이론을 다루는 제1부 'G의 본질과 속성' '타락한 인간' '거듭난 신자' '경건의 연습을 방해하는 7가지 장애물'을 다룬다.
특히 경건 연습을 방해하는 장애물 중 오해하는 교리들 언급이 개신교회 문제점 잘 지적.
예, “육에 속한 사람은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는 교리는 선행이 전혀 필요 없다며 남들에게는 선행하며 자신은 하지 않아도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고 스스로를 위로한다”(p.152)
“G의 영원하신 교리와 J의 변치 않으시는 작정 교리를 들을 때, 육에 속한 사람은 '내가 이미 구원 받도록 예정되었다면 나는 어차피 구원 받을 것이고, 지옥에 떨어지도록 예정되었다면 무슨 짓을 하든 아무 소용 없을 거야. 그러니까 경건한 행위 해서 뭐하겠어?'”
“사람에게 선행할 자유의지가 없다는 교리를 들을 때 육에 속한 사람은 자신의 타락한 본성을 억제하거나 제압할 힘이 자기 안에 전혀 없는 듯 타락한 의지에 자신을 다 맡김으로써 G을 죄를 만드신 인분으로, 인간을 필연 속으로 몰아넣으신 분으로 만든다”(p.156),
“타락 후 아무도 G의 율법과 계명을 다 지킬 수 없다는 교리를 들을 때 자연인은 다른 사람들처럼 자기도 죄를 짓는 것이 당연하다고” 등 오해를 성경에 근거해 반박. 경건을 방해로 성경 및 주요 교리 '악한 본보기' '세상에 받을 형벌의 유보' 'G의 긍휼의 그릇된 가정' '악한 친구들' '경건의 연습은 고달프다는 거짓 두려움' '회개를 늦추는 것'을 들고 있다.
제2부 구체적 X를 닮는 경건의 실천(연습) ‘하루를 경건하게 시작하기’ ‘성경을 가까이하기’ ‘일평생 G과 동행하기’ ‘하루를 경건하게 마무리하기’ 등. 그는 경건 연습을 위한 아주 구체적이고 세밀한 방법을 제시. 경건한 생활 잘하는데 필요한 생각과 말과 행동을 다스리는 법을 언급 “자신의 비참함과 G의 긍휼을 묵상하라” “인기에 영합하지 말라” “작은 죄라도 애통하라” “하루를 살더라도 경건하게 살라” “말에 책임을 지라” “순결하고 진실되게 말하라” “담대히 진리를 말하라” “비난을 받아들이라”
“G의 존전에서 말하라” “은밀한 죄를 두려워하라” “원수를 두려워하지 말라” “공의를 바로 집행하라” 등 경건 생활에 필요한 지침을 성경에 근거해서 간곡하게 권면한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딤후 3:5)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 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딤전 6:5) 명목상의 X인들이 넘쳐나는 한국 교회에 베일리의 이 책이 잠든 영혼을 깨우는 파수꾼의 외침이 될 것.
첫댓글 아멘 아멘
감사합니다
참으로. 귀한말씀. 감사합니다
좋은정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