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우수영과 망해루, 용정마을을 지나는 여정(#13-14)
2023. 5. 14 (일) 날씨 : 맑음 기온 : 섭씨 13~24도
19.6km 5.5시간 동행 : 15명
우수영 국민관광지-청룡산-선두마을-법정스님 도서관-우수영 5일장-망해루-
임하교-예락리-용정리-학상마을-초동마을
<스승이란?>
최고의 스승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기보다 어디를 향해 나아가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는 사람이라고 인터넷상에 떠돈다.
매년 5월 15일 스승의 날을 맞아 제자들로부터 소식도 듣고 융숭한 대접도 받으며 즐거운 하루가 되었다.
가르침의 시간 속에서 스승과 제자는 만남이라는 공간에서 함께 했지만, 세월이 흘러 인연으로 기억되기는 쉽지 않다.
초등학교 교사 최문혁은 말했다.
“선생님의 기본 덕목은 아이들을 돕는 거예요. 아이들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법을 배우도록, 바르게 성장할 수 있도록.”(좋은 생각 6월호에서 펌)
교육은 가르침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오히려 배움의 기회와 깨달음의 계기를 주는 행위인지 모른다.
바로 앞의 현실을 알게 하거나 위기를 모면하는 기술을 가르치기보다는 어떤 방향과 길을 알려주는 도우미 역할이 진정한 스승이라고 말하고 싶다.
누군가에게 스승은 젊은 시절 많은 추억과 함께 한다.
못 낫거나 잘 났거나 자신의 생애에서 고마움을 느낄 수 있는 스승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자긍심이고 보람이다.
어려움에는 두 갈래 길이 있다고 한다.
슬퍼하고 원망하며 두려움에 허우적거리는 길, 다시 사랑하고 감사하며 함께 헤쳐 나가는 길.
멋진 제자들은 두 번째 길을 선택하여 자신과 이웃에게 기쁨과 사랑을 주고 있으니 감사하다.
우수영 국민관광지
서해랑길 13코스 안내도
<우수영과 충무사>
서해랑길 구간을 걸으면 자주 이충무공의 유적지와 만난다.
오늘도 울돌목에서 출발하여 청룡산에 오르고 이내 우수영 마을을 지나는데 임진왜란의 격전지와 전쟁 후 왜구의 침입으로 망가진 고을들을 본다.
명량대첩비의 이동과 성곽의 허물어진 모습에 조선의 아픈 역사를 다시 보게 된다.
13코스 16.5km에는 13척의 다 망가진 배들을 모아 왜군을 무찔렀던 이충무공의 흔적을 만나게 되는데
뒤틀린 역사의 현장을 되돌아보며 한미일과 북·중·러가 대치하여 냉전의 그늘 속으로 빠져드는 세계적 흐름을 상상해 본다.
청룡산에 오르니 예전 충무사가 있고 근처에 연리지가 있어 흥미롭다.
충무사는 동외리로 옮겨 명량대첩비와 함께 새로 조성되어 있다.
단출한 15명의 참가자가 청룡산 오솔길을 걷는 모습을 보며 백의종군한 후 13척의 배로 왜군에 맞서기 위해 동분서주했을 이충무공의 애틋한 심정을 떠올린다.
2002년 5월 25일 우리 산줄기 백두대간을 찾아 종주에 나섰던 귀연 산꾼들을 생각한다.
20년 동안 우리 산천을 찾아 전국을 휘젓던 발걸음이 엊그제 같은데 세월은 젊은 청춘들을 녹슬게 했다.
남해안과 서해안 바닷길을 걷는 15명이 명맥을 잇고 있으니 그 시절 만원 버스가 그립고 동행했던 산꾼들이 보고 싶다.
청룡산
충무마을
구 충무사
구 충무사에 있는 연리지(충무사는 명량대첩비가 있는 동외리로 옮김)
가까이 자라는 두 나무가 맞닿은 채로 오랜 세월이 지나면 서로 합쳐서 한 나무가 되는 현상을 연리(連理)라고 한다.
두 몸이 한 몸이 된다고 하여 남녀 간의 애틋하고 영원한 사랑과 흔히 비교되곤 하며 알기 쉽게 ‘사랑 나무’라고도 한다.
나뭇가지가 서로 이어지면 연리지(連理枝), 줄기가 이어지면 연리목(連理木), 뿌리가 이어지면 연리근(連理根)이라 한다.
연리목은 가끔 볼 수 있으나 가지가 붙은 연리지는 매우 희귀한데, 가지는 다른 나무와 맞닿을 기회가 적을 뿐만 아니라 맞닿더라도 바람에 흔들려 좀처럼 붙기 어렵기 때문이다.
연리지에 관한 유명한 일화는 당나라의 유명한 시인 ‘백거이’가 당나라 6대 황제 현종과 양귀비의 애틋한 사랑에 대한 ‘정한가’라는 시에 잘 나타나 있다.
재천원작비익조(在天願作比翼鳥) 하늘에서 나면 비익조가 되고
재지원위려연리지(在地願爲連理枝) 땅에서 태어난다면 연리지가 되리
천장지구유시진(天長地久有時盡) 비록 하늘과 땅이 다한다 해도
차한면면무절기(此恨綿綿無絶期) 우리의 맺힌 한이 끊어질 날 있을까!
우수영 여객터미널
우수영 문화마을 상징탑
전라우수영은 조선시대 전라우도에 설치했던 수군의 본영이다.
조선시대에는 도마다 수군이 조직되었으며, 특히 국방상 중요한 지역인 경상도와 전라도는 좌우로 나누어 수영을 2개씩 두었다.
전라도의 경우 좌도는 여수, 우도는 해남에 수영이 설치되었다.
해남은 남해와 서해가 만나는 군사적 요충지이며, 앞바다는 물살이 빠르고, 양도라는 섬이 외부로부터 전라우수영을 가려주어 천혜의 요새를 이룬다.
고려시대 전라도 지역의 수영은 1377년 지금의 군산 지역에 설치되었다.
그러나 전라도 남쪽 지역에 왜구의 침입이 빈번해지면서, 지금의 전남 함평, 목포 지역으로 이전하다가 1440년(세종 22) 현재 위치인 해남으로 옮겨왔다.
1479년(성종 10) 여수에 전라좌수영이 들어서면서 전라우수영으로 바뀌었고, 영암, 무안, 함평, 진도, 해남의 7개 고을과 수군진 20여 곳을 관할하게 되었다.
전라우수영은 관할 구역은 물론 병선, 수군 등의 규모도 좌수영의 약 3배에 이르렀다.
정유재란 당시에는 명량대첩의 배후기지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전쟁 이후 왜구에 의해 수영이 초토화되었고, 이후 1632년부터 1669년까지 수영 내의 건물들이 재건되고 중창되었다.
1895년(고종 32) 새로운 군사제도 시행에 따라 없어질 때까지 약 340여 명의 지휘관이 파견되었으며, 이들의 임무는 해안방어, 조세의 운송, 봉화의 관리, 섬의 치안 등 다양했다.
우수영 문화마을
법정 스님 생가 전시장
법정스님 생가
우수영 마을 옛 건물
울돌목 우수영 마을은 수영을 설치할 때 주민들이 직접 축성하였고, 명량대첩에 대승한 다음 날 왜군에 의해 마을이 불바다가 되어도 그 아픔을 딛고 터전을 재건하며 살아왔다.
1688년(숙종 14)에 우수영에는 명량대첩 승전비가 세워졌는데 일제강점기 때 일본군들이 승전비가 걸림돌이 되자 이를 철거하여 경복궁 뜰에 묻었다.
해방 이후에 주민들이 승전비를 찾아내 해남으로 옮기려 시도했으나, 그 비용이 없어 마을 주민들이 직접 걸 궁을 하며 어렵게 기금을 마련해 승전비를 되찾아 왔다.
1970년대 이후 우수영 마을은 저잣거리와 면사무소, 우체국 등 타 관공서와 초등학교 영외 이전으로 급격히 쇠퇴하며 폐촌 위기에 처했다.
주민들과 해남군에서 주민들의 정신을 담은 소~울(SOUL)이라는 이름으로 추진해 대한민국 최고의 우수마을로 거듭났다.
명량대첩비(鳴梁大捷碑)는 1597년 9월 16일의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끈 충무공 이순신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1688년(숙종 14) 3월 이곳 문내면 동외리에 건립했다.
이순신이 해남 전라우수영과 진도 사이의 울돌목 해협을 흐르는 급류를 이용하여 13척의 배로 133척의 일본 함선을 격침 혹은 격파하여 해전을 승리로 이끈 사실을 기록한 비석이다.
숙종 임금은 명량대첩의 의의를 기리고 그 뜻을 후손에게 영원히 전하기 위해 비석을 세우도록 했다.
비문은 1686년에 쓰인 것이나 비가 건립된 것은 2년 뒤인 1688년이며,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박신주가 건립했다.
비석은 받침돌 위에 비 몸을 얹고, 구름무용 무늬를 새긴 머릿돌을 얹었다.
비문은 예조판서 이민서가 짓고, 판돈령부사 이정영이 해서체로 글씨를 썼으며, 홍문관 대제학 김만중이 횡서로 된 제자 ‘통제사 충무 이공 명량대첩비(統制使忠武李公鳴梁大捷碑)’ 12자를 써서 1688년 3월에 건립했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패전, 만행, 약탈 관련된 기록이나 자료, 유적지는 모두 소각하거나 철거한다는 정책을 시행했다.
다수의 일본인이 문화재를 도굴하거나 왜란 관련 유적지를 훼손, 철거하는 데 앞장섰다.
1942년 전라남도 경찰은 명량대첩비 등을 철거하라는 조선총독부의 지령을 받았다.
경찰은 인부, 목수, 학생들을 동원하여 높이 2.67m, 폭 1.14m나 되는 비석을 500m 떨어진 우수영 선창으로 옮겼으며 비각은 흔적도 없이 제거했다.
조선총독부는 한때 대첩비를 아예 없애버릴 계획을 세웠으나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고 서울로 옮겨 경복궁 근정전 뒤뜰에 묻었다.
1945년 광복이 되자 우수영 지역 유지들은 명량대첩비를 되찾아 복구하기 위해 ‘충무공 유적 복구 기성회’를 조직하고 전라남도 경찰부와 조선총독부에 수소문한 끝에 대첩비의 소재를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운반 수단이 좋지 않았던 당시로서는 대첩비를 우수영으로 옮기는 일이 쉽지 않았다.
결국 미군정청(美軍政廳)에 협조를 요청하여 비석을 미군 트럭에 실어 서울역으로 옮긴 후 목포까지는 열차로, 목포에서는 다시 선박을 이용하여 우수영 선창으로 가져왔다.
1947년 이곳 해남 남쪽 끝 해안지역 학동리에 비석을 다시 세웠다.
이충무공 명량대첩비
우수영 오일장(4, 9일)
망해루(望海樓)는 북문과 서문 사이의 토성 부분에 해당하는 망해산의 정상 부근에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장흥 진관도, 해남 현지도 등의 자료에 명칭이 표시되어 있다.
표기로 볼 때 장흥 진관도 등에서는 북문과 서문선상에 위치한 토성 상부에 있었으나 예외적으로 해남 현지도에서만 성 밖에 있는 것으로 특이하다.
누각의 규모는 12개의 초석과 정면 3칸 중앙에 어칸을 두고 좌우에 협칸을 둔 구성이며, 측면 2칸의 규모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붕의 형식으로 우진각 지붕의 형태를 취했는데 지붕의 용마루는 다른 건물과 양성마루로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와와 많은 백자편이 출토되었는데, 그중 1679년(강희 18년(康熙 十八年)이라는 명나라 명문과 망와(지붕의 마루 끝에 세우는 와당이 달린 암막새)가 출토되어 망해루의 건립 시기를 추측할 수 있다.
망해루는 전라우수영의 망루인데 구 충무사의 남장대(정해루)와 북장대가 더 있었는데 성과 함께 성루로 건설되었다.
망해루 현판
우수영 장터를 둘러보고 일행들은 서상마을 망해산에 있는 망해루에 올랐다.
다시 복원된 누각에 오르는 길은 가파른데 기대가 컸지만, 막상 오르니 시야가 터지지 않아 갑갑했다.
누각 바닥에 도시락과 반찬들을 펼치니 근사한 잔칫상이 되었다.
맛있게 버무린 나물과 먹을거리들을 여럿이 먹으니 더없이 즐거운 점심이 되었다. 과일과 커피 그리고 음료수들이 더해지니 시골밥상은 풍성했다.
산꼭대기님이 우수영 시장에서 사 온 찐빵도 인기 있었고, 끈질기게 버티며 데이트를 즐기던 커플이 들려주던 음악 선율도 감미로웠다.
망해루를 내려오며 보이는 우수영은 이 고장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었으며 성곽 터 발굴 모습과 방죽샘을 만나 실감이 났다.
서해안을 따라 걷는 길은 남쪽 바닷가 남파랑 길보다 볼거리가 많은데 남도 이순신 길인 ‘조선 수군 재건로’도 특이했다.
정유재란이 있었던 1597년 당시 관직에서 파직당하여 백의종군하던 이순신 장군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되어 군사, 무기, 군량, 병선을 모아 명량대첩지로 이동한 구국의 길을 역사 스토리 테마 길로 조성한 것이다.
충무공의 또 다른 애국정신이 깃든 길을 따라 걸어보는 것도 의미가 있기에 기회를 만들어보고 싶다.
망해루
전라우수영 서측 성벽 구간:
서측 성벽과 치성(雉城 적을 효율적으로 공격하기 위하여 성벽을 외측으로 돌출하여 쌓은 부분), 외황(외항 : 적이 성벽에 쉽게 접근할 수 없도록 성벽 외부에 파 놓은 도랑. 폭 3~7m, 깊이 0.8~1.5m, 길이 48m) 등이 발굴 조사로 성벽은 외측을 돌로 쌓았고 내측은 흙을 다져 쌓은 편축식 성벽으로 확인되었다.
우수영
방죽샘
우수영 성 안에 있는 우물이다. 잘 다듬은 기다란 판석을 사각형으로 잘 짜 맞추어 조성한 우물. 성안 사람들은 “방죽샘”이라고 불렀다.
해안가 석상
양파 수확 모습
양정마을을 향하며 만난 석상의 얼굴 모습이 이채로웠는데 남녀의 구별과 미소 짓는 표현을 찾기가 힘들었다.
양파를 캐는 농부를 만나고 이내 양정마을을 벗어나 제방을 걸어 임하도가 보이는 임하교에 도착했다.
누런 곡식들이 익어서 풍요로워 지는데 반해 인간의 삶은 장년에 접어들면 그 지혜의 끈이 약해진다.
동행이 되어 걷다 보면 각자의 처신과 살아온 비법이 문득 소개되고 흥미를 끈다. 어쩌면 나약한 인간이 겪게 되는 처지가 비슷해 지는 것은 아닐까!
양정마을 제방
임하도 교량(임하교)
임하도
임하도는 동서 두 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육지에 가까운 섬을 안 섬, 조금 떨어진 섬을 바깥 섬이라고 한다.
섬의 형태가 말처럼 생겼기 때문에 이마도(二馬島)로 불렸다고 한다.
섬의 삼림이 울창해지면서 임하도(林下島)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예락리 농경지
용정 방조제
학상마을
황금 들판(밀밭)
예락리로 향하는 갈림길에서 잠깐 길을 착각하여 헷갈렸지만, 바닷길을 버리고 농경지를 우회하여 제대로 방향을 잡았다.
시골 동네를 몇 번 돌아 용정 방조제 교량을 지나니 넓은 들판이 나타나고 황금물결 밀밭이 바람에 일렁인다.
늦게 오는 후미를 기다려 13코스 종점인 학상마을을 지나 고갯길을 넘으니 목적지 초동마을이 나타난다.
오시아노 해변까지 가려던 계획을 수정하여 초동마을에서 마치기로 연락한다. 커다란 둥구나무 쉼터에서 맛깔스러운 안주로 몇 순배 맥주를 마시니 너무 시원하다.
단출한 15명의 행진이 미약하게 보일지 몰라도 강화도를 향해 가는 발걸음은 장대함을 일깨운 13코스의 아름다운 여정이었다.
초동마을 뒤풀이 모습
초동마을
첫댓글 반가운 얼굴 몇분 보이네요 모두들 건강하시지요
예! 이젠 소수 몇 명이 걷는 귀연이 되었네요. 옛 추억이 그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