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과꽃
그 이후 바다, 강으로 떠났다
엉거주춤 뒷모습 보이는 불씨 물고, 어디로부터 일어선 바람으로 갈기 세우고, 딱히 내세울 것 없는 혓바닥과 넓은 품 내어 바다로 떠났다
문득 피었다 지는 무슨 과꽃, 내지른 불길,
패인 가슴 넘어 열쇠 집 하나 짓는다
하루 마치고 언제나 푸른 실핏줄 타고 바다로 갔었다
하루 마치기 전에 붉은 강에 바다 한 품 떠나온다
달팽이가 낸 길에서 솟는, 결코 메워질 수
없는 한 부분이 뜨거웠으므로
하루 마치고 또 마치고
바다의 뼈에 걸려 넘어지고 또 넘어지고,
헐거워진 어머니 거기 있으므로,
어여쁜 알갱이 하나 물고 돌아오기 위해
지금부터 먼 날 나뭇잎마저 떨어지고 나면
바다에 조금씩 강 들어오고
빈 강에 밀듯이 바다 들어오고
그 숨결에서 하늘이 뚝뚝거리는 풍경 들어오고,
조금씩 아프며 나란히 누워있던 강과 바다 무엇이든 다 하지 않고, 그렇다고 남겨 두지 않은 조각 잠, 그 잠을찾는가, 돌아오는 길은 안개 속, 탯줄 잡은 손에 안개 휘감는다 오래전부터 한번은 마치 그렇게 하고 싶었던 일인 양 달이 뜨는 쪽으로 끝점 표지판 부레처럼 세웠으나 하루에서 하루가 넘어가는 날숨 들숨 살고 있던 강은, 바다는, 알아챘을까 볼 수 있는 눈 속에서 사는 강으로 떠난 바다는 온전한 섬 찾았을까
지금 일렁이는 불결에 불과할지라도 그곳에 자리한 불, 그림자 대답할 것이므로 그 후로 불강[火江], 바다로 떠났다
돌의 문
안개, 바위 지나 모가 난 해 속에서 달려 나왔다 그리고 그곳에 데데한 저녁 부풀어 오르고 뻗어 나갈 곳 찾아 돌 속으로 들어간다 앞다퉈 혀돌기 세우고 있는 돌의 문, 마른 눈 떨구지만 밤새도록 일어서는 길 좁히며 먼지 가라 앉혀야 한다 쓰고 있는 껍질에서 나와 먹어치운다 벽 타고 앉아 이름 새긴다 그 틈에서 머뭇거리는 걸음에 바퀴 갈아 끼운다 저녁은 일어서지 말고 돌아가라 숨소리 낮게 반 내림 건반에 내려앉으라 그때 마침 껍질이 벗겨졌다 물 밖의 기댓값인가 모서리에게 눈을 쏟아 낼 거야 바퀴 구르며 앞동선다 저녁 삼키면 안 돼 물음표 지우지 마 또 껍질 벗겨지고 고개 끄덕인다 이것은 누구의 껍질인가 돌의 문 버석대고 바퀴 일제히 구른다 비릿하고 엉성한 멍투성이 하늘 그곳은 벌써 누군가 햇살 먹어치우며 체온 증류시키고 있을 거야 달려가야겠다 누구든지 있는 힘껏 돌의 문 열어라 가시 찍어 던져 버리라 그리고 누구는 어둠을 붙잡고 횃불 만들어라
이건 꽃이니까
소행성 빠져나온 듯 옆에 와 앉은 사람 된소리 낸다
그 얼굴에 비친 내 얼굴이 계속 나를 쳐다본다
한 뼘쯤 옆으로 비켜 앉아 보았으나 아무래도 눈을 깜박여
아는 체할 것 같다 이렇게 파르르 떨 필요는 없는데
들불처럼 번지는 신열 같은 온기가 자주 나타난다
허기 굴절시키며 오는 꿈 꾸고 있다는,
부서지고 홰치는 볕살 벽 모퉁이에서 부화를
꿈꾼다는, 벽 모퉁이에서 몸 부비며 속닥거린다는,
세금고지서에 부서지는 달꽃이라는, 그런 내력이
있었다는, 알 만했다 입자의 미세한 움직임이라는,
날개 들어 올릴 수 있다는, 맹물 가슴에 박힌
얼얼한 돌기가 아직도 굼틀거린다는, 눈먼 떠돌이
가라앉힌다는, 그들 소식이 삭발한 산등성이
타고 앉아 있다는, 그믐달 위로 모르는 듯 지나간다는,
그림자에 의해 바삭거리는 늦잠이 기어다닌다는,
잎 버린 겨울에 떠오르는 어머니도 없이
낮게 흐르는 밀물 기둥
사방으로 뻗은 눈빛 거슬러, 이건 꽃이니까
시선
나는 장대높이뛰기나 멀리뛰기를 잘한다 아마, 보다 더 높이 더 멀리 뛰는 이가 많을 것이나 어느 누구 하나 나처럼 하지 못한다.
출판사 서평
이현애 시인의 시는 참신한 이미지의 조합으로 쌓아 올린 하나의 건출물, 그중에서도 방이 여러 개 딸린 큰 성과도 같다. 입구에서부터 시작하여 의미가 연결되는 회랑을 지나 각 이미지의 방이 주는 참신한 감각에 감탄하면서도 동시에 어느새 하나의 큰 성의 전체를 감상할 수 있게 되는 구조적인 조형미를 갖추고 있다. 이현애 시의 미학은 곧 철학적 사유를 직설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이미지를 쌓아 올린 언어의 조합으로 건축한 구조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독자가 곱씹고 새기게 한다는 데에 있다. 그 이미지의 참신성이 주는 신선한 충격도 빼놓을 수 없는 감상 포인트이다.
이는 이성적인 철학적 사유의 깊이와 감상적 표현의 센스의 적절한 균형과 조화를 통해 가능할 수 있다고 하겠다. 앞의 요구를 달성하려면 철학적 사유의 샘물을 길을 수 있어야 하며, 뒤의 요구에 응답하려면 언어의 묘미를 살려 내어 나만의 언어 미학을 구사해야 한다. 이현애 시인은 이 양자를 조화시키며 확립하고 있다. 그의 작품들이 모호함 때문에 난해한 기류를 만나는 것 같은 특성이 있으면서도 참신하게 읽히는 이유가 있다. 바로 위에서 밝힌 것처럼 명징한 사유의 깊이를 갖고 이를 독특한 표현에 담아 시어의 맛을 살리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