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벽정의 추억 (1)
<서벽정 "윗 산정" 모습과 초입의 광경 >
<서벽정에서 결혼한 이 배원 씨의 딸 혼례를 구경하는 사람들>
당시 많은 부를 가진 이 배원 씨의 큰 아들 이집천 씨는 1930년대에
함라산 기슭에 누벽정이라는 별장을 짓기
시작했다 한다. 건립비도 당시 200만 원이 넘게 들었고 건립 기간도
4년이 넘게 걸렸다 한다.
당시 2만 여평의 산 기슭을 다듬어 인공 공원을 만들었으며 맨 위에는
대규모의 연회용 별장 "윗산정"이라 있었고 그 밑 전망 좋은 곳에는
육각정인 "가운데 산정"이 있었고 그 아래에는 본채인 "아래산정"이 있었고
살림집은 따로 있었고 온실까지 구비한 그 당시의
어마어마한 시설이었다 한다.
당시 대들보로 쓴 나무는 압록강변에서정원석은 제주도에서
가져다 썼으며 전부 화강암으로 깍아서 공사를
하였다 한다. 올라오는 길에는 겹벚꽃을 심고 온갖 희귀 화초를
모아 심어서 경치가 가히 한폭의 그림 갈았다 한다
당시에 이리 군산 등지에 와 있던 일본 사람들이 많이 찾아와
관광을 하였으며 당시 일본의 그림 엽서에도 소개가
를 할 정도였다 한다.
그 당시 서벽정을 지은 기술자는 경복궁을 지은 기술자였다 한다.
<서벽정으로 올라가는 시집가는 가마와 꾼들>
당시 이곳이 북적 거릴때는 한 끼에 쌀 한 가마니의 밥을 하여
전국의 한량들이 모여 그림과 시를 치며
어울리는 장소였고 한달 유지비도 그때 돈 백만 원이 넘었다 하니 가히 그 규모와
그 시절의 부를 향유한 사람들의 도내뿐만 아니라 국재 최초의
자연 공원식의 별정이었다 한다.
지금은 그 영화는 토지개혁이라는 정치의 변화를 만나 후손들이 뿔뿔이 흩어져
그곳에 문기둥 굴뚝들만 덩그러니 남아 쓸쓸히 옛 영화를 말해줄 뿐이다.
<가마 위에 올려진 호랑이 가죽과 사진사>
<누벽정에 같이 있던 안채의 모습>
<신부의 가마에 덮여 있던 호랑이 가죽>
< 그 시절 혼인에 함 속에 들어가 있던 예단 품목>
<옛 영화는 간데 없고 덩그러니 기둥만 남은 현제의 터 >
해방과 6.25를 거치면서 남의 손에 넘어간 이 큰 재산을 유지 관리비가
감당하지 못해 남의 손에 넘어가며
흔적도 없이 지금은 빈 땅으로 둔갑해 덩그러니 야산으로 남아있어 남아 있는
손들은 가끔 그 동산에 오르며
옛 조상들의 흔적을 더듬을 뿐이다.
지금까지 보존되였더라면 훌륭한 전라북도의 관광 자원이
되었을 텐데 아쉬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