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젊은 시절을 어디에선가 잃어버렸다. 그게 어딘지는 알 수 없지만 하지만 우리는 언젠가는 조선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울면서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 우리는 마지막 아리랑 고개를 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37년 5월 초여름, 미국인 여기자 님 웨일즈(1907~1997)는 중국공산당 최후 근거지인 옌안에서 젊은 조선인 혁명가 김 산(1905~1938)을 만났다. 웨일즈는 중국공산당 혁명을 취재하다 루쉰도서관에 들렀다. 그런데 자신이 원하는 영문도서들이 한 조선인 청년에게 모조리 대출되었음을 알고 흥미를 느껴 도서관직원을 통해 김 산을 알게 됐다. 그 후 3개월간 20여 차례 인터뷰 끝에 슬픈 한국 현대사 속의 한 젊은이의 짧고도 치열한 생애를 책으로 기록했다. 그렇게 는 탄생했다. 김 산은 민족의 암흑기에 중국을 무대로 삼아 33살의 짧은 생애를 불꽃같이 살다 갔다는 점에서 '한국의 체 게바라'로 불린다. 체 게바라는 1950~60년대 중남미 혁명의 상징 인물이다. 김 산은 1905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났다. 3·1운동이 일어나자 14세의 어린 나이로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이듬해 집을 떠나 일본과 상하이, 베이징, 광둥, 옌안 등지를 누비며 항일투쟁과 중국공산당 건립에 투신했다. 또한 조선독립군 양성소인 중국 신흥무관학교를 찾아가 이동휘, 안창호 등의 독립지사로부터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일본어, 중국어, 영어가 가능하고 단테의 <신곡>을 비롯해 톨스토이즘과 아나키즘, 마르크시즘에 이르게 된 낭만주의적 지식인 혁명가였다. 1923년 중국공산당 청년연맹에 가입한 김 산은 공산주의 잡지인 <혁명>을 간행했다. 그는 중국공산당원으로서 광둥코뮌과 하이루펑 소비에트에 적극 참여하였다. 1929년에는 조선인으로서는 오르기 쉽지 않은 베이징시 조직부장에 임명되어 활동 하던 중 1930년 11월 20일 장개석의 국민당 경찰에 체포되어 고문과 심문을 받다가 1931년 4월 석방되었다. 그러나 조직부장까지 지낸 그의 귀환은 환영받지 못했다. 배신의 의심까지 받았다. 1933년 4월 그는 다시 국민당 경찰에 체포되었지만 입을 열지 않았다. 결국 전향 거부자로 일본영사관을 거쳐 조선으로 압송됐는데 이번에도 증거가 충분치 않아 풀려났다. 그러나 1934년 1월, 그는 일본경찰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베이징으로 탈출했다. 이때 중국 여인 조아평을 만나 결혼을 했는데, 김 산은 아내의 임신 사실도 모른 채 다시 옌안으로 향했다. 옌안에서 그는 홍군전사를 기르던 군정대학에서 교수로 일했다. 이곳에서 그는 운명의 웨일즈를 만난 것이다. 하지만 그는 다음해인 1938년 10월 19일 캉셩(康生)에 의해 전장으로 떠나는 길에 극비리에 처형된다. 그의 죄목은 반혁명죄와 간첩죄였다. 그의 최후는 중국공산당학교의 교수였던 최용수의 자료실에서 그의 처형을 지시한 문서를 찾아냄으로써 밝혀졌다. 김 산은 왜 처형됐을까. 중국공산당도 1983년 1월 27일에 김 산의 처형은 특수한 상황에서 발생한 잘못된 조치라며 그의 명예를 회복시켰다. “내 전 생애는 실패의 연속이었다. 우리나라의 역사도 실패의 역사였다. 나는 단 하나에 대해서만 -나 자신에 대하여- 승리했을 뿐이다. 그렇지만 계속 전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는 데는 이 하나의 작은 승리만으로도 충분하다.” 지식인들은 고난의 시기에 가장 먼저 변절한다. 김 산이 자신의 욕망과 유혹을 이겨낼 수 있었던 힘은 공산주의자였지만 어린 시절 기독교학교에서 배웠던 정의와 사랑, 톨스토이의 인본주의 영향이 사상적 바탕이 되었다. 그의 다음 말은 그 자신과 또 다른 많은 조선청년들이 어떤 마음으로 살며 자신들의 삶을 인정했는지 상상하게 한다. “수천 명의 앞서 죽은 사람들이 수많은 손가락을 가진 하나의 손이 되어 나에게 앞으로 나가라고 명령을 내리고 있다. 그들의 지식도 그들과 함께 죽었다. 내가 그들과 함께 나누고 있는 그 지식은 나와 함께 살아남아서 나 또한 죽을 때까지 창조적 역할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김 산의 삶은 쿠바와 볼리비아혁명 등을 위해서 자신을 바쳤던 순수한 영혼 체 게바라를 닮았다. 혁명을 위해 이국에서 몸 바친 것은 물론이고, 누구의 지시에 위해선지 모르고 희생된 것도 비슷하다. 비록 역사의 거친 풍랑 속에서 실패한 혁명가이기는 했으나 그의 희생이 헛되지는 않았으며 그 자신의 말대로 ‘자기 자신에게 만은 승리함’으로써 그의 정신과 사상 그리고 발자취는 후손들에게 큰 영향과 감동을 주고 있다. 김 산은 그 시대에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그랬듯 공산주의자이기는 했지만 그를 공산주의자로만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부분이 많다. 공산주의자이기 이전에 독립 운동가였고, 시인이었으며 사상가였다. 톨스토이적 인류애 혹은 휴머니즘적 감성을 가진 따뜻한 가슴과 차가운 머리를 가진 아름다운 혁명가였다. 그의 훌륭한 인품과 사상, 신념은 독립운동을 같이 했던 동지들 뿐 아니라 중국인 때로는 그를 투옥하던 일본인들 그리고 그의 전기를 쓴 미국인 님 웨일즈 조차 감동시켰다. ================= [님 웨일즈의 '아리랑'을 읽고] 님 웨일즈는 '중국의 붉은 별'을 쓴 에드가 스노우의 부인으로서, 1930년대 중국의 공산 혁명이 진행 중이 던 시기에 중국에 들어간 미국인 저널리스트이다. 그 녀는 젊고 아름다웠고, 활동적인 여인으로서, 남편인 스노우가 모택동, 주은래, 주덕등이 참가한 중국 공 산당의 '장정(長征)'에 대한 책인 '중국의 붉은 별' 쓸 당시에 그녀는 중국의 연안에서 한 조선인 공산 혁명가를 만나게 된다. 그것은 그녀가 자주 가던 도 서관에서 그녀가 관심을 가진 대부분의 책을 빌려가 읽고 있는 한 사람에 대한 호기심을 지니면서부터 시 작된 만남이었다. 수많은 책을 빌려가 읽고 있던 그 사람은 김산이라는 이름을 가명으로 님웨일즈의 인터 뷰에 응한 장지락이라는 조선인 공산 혁명가였다. 조선이라는 나라에 대해, 단순히 일본애 순종하는 조 용한 식민국가로 알던 님 웨일즈에게 있어 김산의 존 재는 매우 이체로운 존재였는데, 단순한 호기심에서 시작된 인터뷰는 22일간이나 계속 되었으며, 놀랍게 도 그 인터뷰는 이전에 한번도 영어 회화를 해 본 적 이 없는 김산과 직접 영어로 진행되었다. 영어로 된 책만을 읽어 이룩한 영어를 인터뷰에 직접 이용할 정 도로 평소 방대한 독서를 한 김산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 김산이라는 인물과의 인터뷰는 님 웨일 즈 자신의 본래 구상이었던 어려 혁명가들과의 인터 뷰의 일부로서가 아니라 독립적인 한권의 책으로서 엮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인터뷰는 1937년에 있었으며, 1938년 김산은 홍구에 강생등 중국 공산당에 의해 비밀리에 처형을 당했다 고 하며, 님 웨일즈는 김산과의 약속에 따라 김산과 의 인터뷰가 있었던 2년 후를 지나 1941년에 이 책 을 처음 출간하게 된다. '아리랑'이라는 이책은 리영 희 교수등 한국의 수많은 지식인에 의해 일본어판이 비밀리에 일본으로부터 들여져와 읽혔으며, 1980년대 에 들어와서야 한글판으로 당당히 출판이 될 수 있었 다. 이 책은 한 공산주의자의 전기이며, 아직 혁명에 성공하지 않은 한 혁명가의 험난한 여정의 기록이다. 이 책은 일제 하에서 11세의 어린 소년이 32세의 혁 명 지도자로 성장하기까지의 사실적인 이야기를 마치 소설과도 같이 역동적으로 그리고 있다. 이 책은 사 실을 바탕으로 했다는 무게와, 폭풍과도 같은 삶이 지니는 드라마틱한 감동이 함께하고 있으며, 혁명가 라면 누구가 부딛치게 되었을 현실적인 문제들과 갈 등에 대한 고뇌를 진솔하게 이야기 하고 있다. 즉, 혁명가 그룹 내에서의 당파적 갈등, 혁명가로서의 삶 과 사랑하는 여인의 연인으로서의 삶 사이의 갈등 같 은 것들...그리고 사선을 넘나드는 긴박함, 일본경찰 로부터의 고문과 회유, 첩자들과, 국민당 정부군의 추격과 도피, 병마와의 싸움.... 이 책은 혁명가들이 겪어야하는 모든 고통의 박람회와도 같으며 그 수많 은 난관과 싸우며 승리한 위대한 인간의 승리의 기록 인 것이다. 이 책에서는 수 많은 동료 혁명가에 대한 얘기들이 나오면서, 자주 "그는 19xx도에 어디서 죽었다" 라는 첨언이 덧붙여지는 것을 보게 된다. 수 많은 혁명가 들은 당대의 지성인들이었다. 그들은 무엇을 위해 투 쟁하였으며, 무엇을 향해 자신의 목숨마저 내던질 수 있었을까. 이 책을 읽게 된 동기는 뜻밖에도 하이텔과 관련이 있다. 나는 어느날 밤, 대화실에서 '중국의 붉은 별' 이라는 책을 읽은 감동을 열에 들 떠서 얘기를 시작 했는데, 한 젊은 이가 "그 책을 쓴 에드가 스노우의 와이프 님 웨일즈가 쓴 '아리랑'은 읽어보셨나요?"라 고 하면서, 이 책을 권했던 것이다. 마치, '아리랑' 을 읽지 않은 이는 386세대가 아니라는 듯한 묘한 뉘 앙스가 스며있었는데, 자신은 이 책을 후배들에게 꼭 필독서로 권했으며, 자신의 선배들도 자신에게 이 책 을 권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아리랑'에서와 같은 혁명의 열 정을 간직한 젊은 그룹은 사라지고 없다. 덩달아 피 보다 진한 혁명가들의 유대도 사라지고 없다. 지금 근근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유대란 겨우 '스타크래 프트'에 참여하는 자기 길드 내에서의 유대 정도이거 나, 리니지 게임 속에서 같은 기사단? 내에서의 유대 정도가 아니겠는가. 사회는 부유해졌지만, 열정과 정신은 고갈되고 있는 시대에서 이 책은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게 될 것인 가. 오늘날 혁명은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닐 것인가? 출처: https://orangecastle.tistory.com/69 [시사랑_백업] 공동저자 님 웨일즈(nym wales)가 본 김 산 후리 후리한 키의 사내 "순간 눈앞엔 세인의 이목을 끌만한 후리후리한 키의 사내가 실내의 광선 속으로 나타났다. 그는 태연자약한 자태로 정중하게 허리는 굽혀 인사했고,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면서 내 얼굴을 조용히 응시하는 것이 아닌가? 비가 억수로 퍼붓는 날씨여서 창호지를 바른 창문으로는 충분한 광선이 들어오지 않아 컴컴했지만, 선명한 얼굴모습이 도무지 중국인 같진 않았다. 어찌 보면 거의 에스퍄냐인 같기도 했다." 망명자 이즈음 이 조선인이야말로 '반란자형의 인물'이라고 단정을 내리고 있던 터였다. 위험한 지하혁명운동을 계속하면서 살아온 망명자인 그는 소박하고 침착했다. 또 우울하면서도 자제력과 민감성과 경각심을 겸비한 자였다. 표정이 풍부한, 수척한 얼굴엔 감옥생활이 엮어낸 창백함이 서려 있었다. 그러나 총명하고 영채로운 눈매는 솔직하고 아량 있는 풍모를 여지없이 드러냈다. 이에 퍽 고무적인 인상을 받았다. 가장 매력 있는 인물 중 한 사람 김산이란 이 인물이 자못 독특한 인물이라는 것, '이런 인물과 더불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귀한 기회가 결코 두 번 다시 오지 않으리라'는 것도 명백한 일이었다. 그는 근래 7년동안 동양에서 만난 가장 매력 있는 인물 중 한 사람이었다. 그해 여름동안 적잖게 고생하면서, 원고를 쓰는 손에 오는 심한 경련으로 고통을 받으면서 대략 25명에 달하는 혁명가의 자전을 쓰고 있었는데, 김산은 내가 만난 혁명가중에서도 좀 체로 찾아볼 수 없는 몇 가지 특성을 구비하고 있었다. 처음엔 그런 특성을 분석해 낼 수가 없었으나, 오래지 않아 '그의 특성을 단정하는게 무엇인가'를 알았다. 그는 투철한 의식과 두려움을 모르는 자주성과 완전한 신심을 가지고 있었다. 견해는 명철하고, 주장은 단정적이었다. 그건 분명 모든게 이론적으로나 경험적으로 주도 면밀한 사고를 거친 견해였고, 사려 깊은 추리를 가한 후 도출해낸 주장이었다. 그는 추수자로서가 아니라 지도자로서 사물을 관찰하고 문제를 사고하고 있었다. 조선혁명의 중요한 영도자인 만큼, 그건 당연한 일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표면적으로는 거동이 온화하고 예절이 바르며 경건하여 은거생활을 하는 사람 같았지만, 내면세계에는 거대한 위력이 잠재하고 있었다. 결코 무해한 인물이 아니었다. 충실하고 헌신적인 나의 벗이 될지도 적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자신의 죽음과 타인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나 지적으로 부식 당하거나 타락되는 일도 없거니와 도피하는 일도 하지 않는 인물이란 생각이 들었다. 중국과 조선의 현대사 원형을 창조해낸, 대비극·대재난의 백열속에서 단련되고 형성된 사내였다. 뿐만 아니라 시련을 이겨낸 의지와 결의로 강철같은 도구로써 뿐만 아니라, 감각과 지각을 구비한 인간으로서 준엄한 시련 속에서 출현된 사내기도 했다. 성실하나 불행한 사람 이튿날 오후 김산은 여태껏 보여주지 않았던, 무던히도 기뻐하는 기색을 드러내며 찾아왔다. 그리하여 누구나 다 즐거워하고 화기를 띠고 있는 연안에선 보기 드문 성격을 그가 하나 더 가지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김산은 낙천적인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그렇지만 너무나도 성실한 사람이었고, 불행한 사람이었다. 외국어 능통 처음 얼마동안 그의 영어가 더듬거리는 바람에 다소 애를 먹었으나, 그 사이에 놀라울 정도로 늘어서 술술 이어져 훌륭하게 표현하기에 이르렀다. 그의 어휘는 대단히 풍부했다. 비록 발음은 그다지 정확하지 못 한데가 많았지만, 모두가 독서에 의해 습득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일본어 실력도 대단했다. 중국어는 더 말할 나위 없이 유창했으며, 몽골어도 조금 할 줄 알았다. 독일어와 라틴어도 의학을 공부하면서 습득하고 있었다. 특이한 두뇌의 소유자 그는 유랑하는 조선인 혁명가였으므로, 이같이 특수하고 폭넓은 갖가지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또 국외자였기 때문에 비로소 3개국의 모든 운동과 인민에 대해 투철한 견해를 가질 수 있었다고 본다. 반생간 경력은 극동 전체의 만화경과 같은 광경을 그대로 그려냈다. 생생하고 참신한 해석이었다. 뿐만 아니라 미구에 '김산을 유달리 재미있고 복잡한 감정과 개성을 갖고 있는 특이한 두뇌의 소유자라고 본 추측이 옳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의 지적생활은 단순하지도, 안이하지도 않았다. 정치투쟁과 혁명투쟁에 대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문제로 충만 되어 있었다. 그가 그런 문제들을 해결한 방법은 실제적으로나 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진 흥미로운 것들이었다. 무엇보다도 신기한 건 그가 다만 그 같은 여러 경험들을 훌륭한 얘기로 조리 있게 서술했다는 사실이다. 이상주의적인 시인 김산은 현대에 있어서 가장 피비린내 나고 가장 험악하며, 가장 혼란한 대동란 한복판에 뛰어든 민감한 지식인 - 그의 근본 바탕은 이상주의적인 시인이며 작가 -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이미 환상을 상실하고 있었으나, 그렇다고 차가운 눈초리로 인생을 관조하는 그런 심술쟁이는 아니었다. 사물을 속성 그대로 인식하였지만, 동시에 그 변화와 진보를 긍정하였다. 고뇌와 패배는 그의 꿈을 파탄시킬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그의 사상에 더욱 깊은 의의를 부여해 한층 더 불타오르게 할 따름이었다. 그는 아디까지나 객관적인 사물의 주인공이었으며, 주관적인 언어의 노예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