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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기본 이해
가. 개 관
◆ 국 명 : 몽골(The Republic of Mongolia)
◆ 면 적 : 156.7만㎢(한반도의 약 7배)
◆ 인 구 : 약 300만 명
◆ 수 도 : 울란바타르(인구 약 120만 명)
◆ 종 교 : 티벳불교(95%), 이슬람교(5%), 샤머니즘
◆ 언 어 : 할하 몽골어
◆ 정부 형태 : 대통령 중심제
나. 몽골에 대한 기본 이해
용감함이란 뜻을 가진 몽골은 원래 하나의 작은 부족 명칭이었으나, 칭기스칸이 통일함으로써 민족 명칭으로 변화된 말이고 국가 명칭이 되었다. 몽고라는 명칭은 중화사상을 가진 중국인들이 주변 민족을 비하시키기 위하여 쓴 말이므로 몽골(Mongolia)로 불러야 옳다.
중앙아시아 동부에 위치한 내륙국가로 동으로는 만주의 대흥안령산맥, 서로는 중국의 신강위구르자치구, 남으로는 중국과 중국의 네이멍구자치구, 북으로는 러시아와 러시아의 토바공화국, 부리야트공화국과 접경을 이룬다. 남북거리 1,263km, 동서거리 2,406km로 전체 국경선이 8,114km에 이른다.
면적은 156.7만 ㎢로 한반도의 7배 크기지만 면적에 비하여 인구가 적은 나라이다. 이것은 과거 청의 인구 억제 정책이 만들어 낸 결과물이다. 현재 전체 인구는 279만 명이다. 사회주의 포기 후 국가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인구 늘이기 정책을 취하였다. 그 일환으로 아이를 낳으면 부모 모두에게 출산 휴가를 주고, 양육비를 국가가 보조하였다. 자녀 다섯 명을 낳으면 국가에서 훈장을 지급하였다.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낳아도 흉이 되지 않는 것은 유목민의 독특한 생활방식임을 이해할 수 있다.
평균고도가 1,580m인 고원지형으로 800-1,200m가 37%, 1,200-1,600m가 30.6%, 1,600m 이상이 32.4%를 차지한다. 남부는 사막지대, 중부는 초원지대, 북부는 타이가지대, 서부는 산악지대(알타이산맥)로 되어있다. 대륙성기후로 기온의 일교차와 연교차가 크며 강수량이 적고 겨울철이 길다. 우리 시간보다 1시간 늦다.
세계 10대 지하자원 부국으로 석탄, 구리, 석유, 텅스텐, 주석, 니켈, 아연, 금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으며, 인구보다도 몇 십 배나 많은 낙타, 말, 소, 양, 염소, 야크 등의 가축을 소유하고 있다.
17개 민족으로 구성된 국가로서 이례적으로 민족 간의 구별이 없다. 몽골인의 특징으로는 광대뼈가 불룩하게 튀어나왔으며 기골이 장대하다. 상체의 힘이 좋으며 팔의 힘이 세다. 할하 몽골어를 쓰며 1941년 이후 키릴문자(러시아어 알파벳 채용)를 사용한다. 국민 대부분이 티벳불교를 신봉하지만 샤머니즘이 무수히 산재하며 서부의 카자흐족은 이슬람교를 믿는다.
이 나라의 수도는 붉은 영웅이란 뜻의 울란바타르(Ulaanbaatar)이다. 2004년 현재 1인당 국민소득은 450달러이고 투그릭이란 화폐를 쓴다. 여성들의 사회활동이 활발하고 외국어 구사 능력이 남다르게 뛰어나다.
국가의 수반은 대통령이며 4년 중임제로 국민이 직접 비밀선거에 의해 선출한다. 행정부 최고기관인 내각은 수상과 장관들로 구성되어 있다. 수상은 대통령의 추천으로 국가최고회의에서 선출한다. 임기 4년의 국회는 내각책임제로 운영되며 의원수는 76명이다. 1992년에 신헙법이 발표되어 사회주의 체제로부터 새로운 사회, 경제 체제로 전환하고 있는 과정에 있다.
국기는 직사각형으로 3등분되어 있다. 중앙은 청색, 양측은 적색으로 되어 있고 좌측 적색 부분에 황색의 국가 상징인 소욤보로 구성되었다. 소욤보는 표의문자로서 아득한 옛날부터 자유와 독립을 상징하는 민족적 표상이다.
국장은 영원한 번영을 상징하는 하얀색의 둥근 연꽃 모양을 묘사하고 있고, 중앙에는 몽골의 주권과 독립을 상징하는 흰 말과 황금색의 소욤보로 구성되어 있다.
축제 및 공휴일은 차강사르(음력 1월 1일), 여성의 날(3월 8일), 어린이날(6월 1일), 나담 축제(7. 11 - 7. 13)가 있다. 나담 축제는 가장 큰 명절로써 지방정부에서 선발된 대표들이 씨름, 활쏘기, 말타기로 솜씨를 겨룬다.
수도와 지방도시에서는 여름에 초원으로 나갔다가 겨울에 집으로 돌아와 생활한다. 지방의 유목민들은 게르라는 천막집을 짓고 살며 가축을 몰고 풀을 찾아 이동생활을 한다. 게르를 방문할 때 주의사항으로는 문지방을 밟으면 안된다. 시계방향으로 들어가 주인이 권하는 자리에 앉는다. 주인이 대접하는 것은 입에 맞지 않더라도 먹는 시늉을 해야 한다.
몽골에서의 금기사항은 상대방에 손가락질을 하면 안된다, 발을 밟으면 악수를 청하면 된다, 모든 자연물을 경배하기 때문에 산, 물, 바위 등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보호해야 한다.
육류와 유제품의 음식이 대부분이며 보츠(만두), 효쇼로(호떡), 럅샤(양고기국수), 수태보다(쌀과 우유로 만든 죽) 등이 있으며 특별한 음식으로는 허르헉(염소나 양을 통에 넣고 달군 돌과 함께 끓임)과 아이락(말젖을 발효시킨 음료수)이 있다. 아이락은 지역과 만든 사람의 솜씨에 따라 맛이 다르다.
유명한 관광지로는 테를지, 멍근머리트, 바트숨베르솜, 하르허린, 체체를렉, 허르거 분화구, 차강노르, 홉스골, 고비사막, 알타이산맥, 어터겡 텡게르 등이 있다.
또한 소련 다음으로 사회주의를 건설했으며, 당시 사회주의권 국가들에게 육류를 공급했으며, 소련 다음으로 사회주의를 포기한 나라이다.
현재는 민주주의 체제로 진행하고 있으며 경제적인 면에서도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도입하여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하지만 수도인 울란바타르에서는 변화의 속도를 피부로 느낄 수 있지만 다른 지역은 옛날 모습 그대로여서 다른 시대에 발을 들여 논 것이 아닐까 하는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우리와 전혀 다른 이국적 풍광과 태고적 신비로움을 간직한 자연 환경과 이질적인 유목문화가 방문객의 발목을 잡는 중요한 요인 중 하나이다.
다. 명승지
1) 자이승 전망대
1930년대 동몽골의 할가강에서 소련과 몽골의 연합군이 일본의 관동군을 격파한 것을 기념하는 전승 기념관이다. 전망대에는 하과수렝 장군의 동상이 있다. 전쟁에서 죽은 무명용사와 영웅을 기념하기 위한 기념관은 울란바타르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언덕에 세웠다. 전망대 뒤에는 어워(서낭당)라는 돌무더기가 있고 가운데 박혀있는 나무에는 푸른색의 천이 물색으로 매어져 있다. 몽골에서는 푸른색은 하늘을 뜻한다.
2) 이태준 기념관
자이승 전망대 밑에 이태준 기념관이 있다. 최근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후배들이 십시일반으로 모금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대암 이태준 선생은 1883년 11월 21일 경남 함안에서 태어났다. 1907년 세브란스의학교(현 연세대 의대)에 입학하여 1911년 제2회로 졸업하였다. 김필순, 주현칙과 함께 안창호 선생이 만든 청년학우회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을 하였다. 세브란스 인턴 근무 중 1912년 중국 남경으로 망명하여 기독회의원에서 의사로 일하다 처사촌이 된 김규식 선생의 권유로 1914년 몽골 후레로 가서 동의의국이라는 병원을 개설하였다. 특히 화류병 퇴치에 앞장섰다. 몽골 최후의 복드항 주치의가 되었고 복드항의 임질을 고쳤다고도 한다. 1919년 몽골 최후의 훈장인 에르데닌오치르를 받았다. 1921년 2월 러시아 백군에 의해 피살되어 38세의 일기로 마감하였다. 묘지는 성산인 비그르트산에 있다고 전한다. 1980년 한국정부는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태준 기념관은 현재도 계속 만들어 가는 과정에 있다.
3) 자연사 박물관
1921~1924년 사이에 이 박물관을 위한 전시물의 일부는 기증 방식으로 주민들로부터 받아들인 것이며, 귀중한 가치가 있는 전시물 중에는 구입된 것도 있고, 고고학 조사단으로부터 입수한 것도 있다.
1924년 말에 국립박물관으로 개조되었고 1940년부터 1941년에 걸쳐 지방지 박물관으로 개칭되었다. 1956년에 새로 조직되고, 오늘날의 명칭인 자연사 박물관으로 불리어지게 되었다. 현재 자연사 박물관에는 이 나라의 환경과 자연을 알 수 있는 약 2만 점의 전시물이 보존되어 있다. 이 나라의 풍부한 자원과 희귀한 금속, 여러 가지 보석과 세공용반귀석(細工用半貴石), 그리고 민간요법과 현대 의학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는 약 5백 종의 약용 식물을 포함한 2천 종 이상의 식물 표본이 보존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관심을 끄는 것은 고생물을 전시한 전시실로 거기에는 고비 사막에서 발견된 거대한 공룡이나 도마뱀류의 뼈를 포함한 고생물학 조사단의 발굴품이 전시되어 있다. 방문객들의 시선을 모으는 것은 거대한 공룡(타보르사우르스)의 전시 골격으로 자연사 박물관의 자랑거리의 하나로 꼽는다.
자연사 박물관에는 약 7,000만 년 전의 공룡들로 가득하였다. 관람객들은 공룡들이 다시 환생하여 이 공간을 지배하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든다. 알모사우르스, 바르스볼드, 모나미쿠스, 파키스팔로 사우리아, 오스트리히 라이크 카니보르스 디노사우르스, 오스트리히 라이크 디노사우르스 갈리미노스, 몸무게가 2톤 - 3톤이나 되는 제일 크고 거대한 자이언트 이쉬 타보르사우르스가 압권이다. 타보르사우르스의 전신뼈 화석, 디노사우르스의 앞발 화석, 맘모스의 이빨 화석, 코뿔소 화석, 공룡알 화석이 전시되어 있는 고생물관이 유명하다.
다른 전시실에는 몽골지역에 살고 있는 각종 야생동물들인 사슴, 곰, 독수리, 눈표범 등이 박제되어 있고, 다른 나라에서 온 동물들도 전시되어 있다. 어린이들을 위해 교육용으로 만들어 놓은 전시실도 있다.
4) 역사박물관
이 박물관은 1931년 인민혁명 10주년 기념일에 개관되었다. 1971년 몽골인민혁명 50주년 기념일 전날 이 박물관은 전면적으로 개편되고 특별히 세워진 건물로 옮겨졌다.
역사박물관에는 6천 점 이상의 전시물이 있고, 그 중에는 혁명 전의 몽골의 모든 생활 조건과 몽골에 있어서 인민권력 수립 후에 일어난 근본적인 변화를 특징짓는 다량의 물적(物的) 기념물이 포함되어 있다. 역사박물관에 전시된 유물과 유적은 몽골지역의 인류 발생기, 씨족제도의 발생과 붕괴, 부족연합시대의 초기 봉건제, 여러 유목민 국가와 몽골 제국, 만주족 지배와 사원의 봉건적 신권정치 시대를 망라하고 있다. 또한 19세기 전반의 몽골 민중생활과 생활 습관을 알 수 있는 남성, 여성의 민족의상과 장신구의 표본이 전시되어 있으며, 내부의 집기와 독특한 일상용품과 함께 전시되어 있는 펠트제 유르트의 내부는 주목할 만하다다. 그리고 다양한 농경기구 등 최근까지 상용되고 있었던 것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전통 민족 악기도 전시되어 있다.
또한 봉건 체제 때 몽골 노동인민의 고통스런 생활을 말해주는 사진이나 전시물, 혁명가들이 <서약>같은 몽골 혁명가의 투쟁을 나타내주는 문서와 물품들, 몽골과 인민정부가 공포한 초기 범령과 결의, 유명한 혁명가와 그들이 남긴 희귀한 원고가 있다. 박물관의 전시물들이 말해 주는 것은 1921년 몽골의 지도하의 인민혁명의 승리, 자본주의를 거치지 않고 봉건제로부터 사회주의로의 이행이 가능하다는 레닌의 학설 등을 실현하고, 또한 내외 침략자로부터 조국을 지킨 풍부한 경험, 국민 경제와 문화의 발전, 혁명의 민주주의적, 사회주의적 단계의 과제 실현을 위한 역사적 투쟁의 진전, 혁명에 의해 생겨난 몽골 인민의 혁명적 투쟁과 노동의 전통이다.
특히 선사시대의 유물과 유적은 우리문화와 비슷한 점들이 많기 때문에 눈여겨보아야 한다. 사슴돌, 선그림의 바위그림, BC 7,000년 - BC 2,000년 전의 동물뼈에 사람 얼굴이 그려진 유물들이 우리문화와 친연성이 있다. 이 시대의 집자리 유적 밑에 사람를 구부려 넣은 무덤이 있다. 그리고 청동기시대의 스키타이와 오르도스 계통의 문화가 한반도로 전파되었다. BC 100년 - AD 100년경의 흉노시대 비단옷도 눈길을 끈다. 옷장식이 화려하다. 과거나 현재나 몽골인들은 현실을 중시한다.
흰색과 검은색의 말총은 칭기스칸을 상징한다. 아라비아에서 도입된 녹색 염료는 칭기스칸의 후손만 사용하였다.
쿠빌라이칸 시대에 만들어진 황제복음이라는 글씨가 분명한 비문에는 황제라는 글자를 두 칸 앞에 썼다. 그렇게 쓴 것은 세계를 황제 밑으로 둔다는 뜻을 분명하게 담았다. 1246년 몽골제국에 왔던 카르피니를 통하여 구육칸이 교황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그 편지가 1920년 발견되어 세상에 공개되었다.
하늘 아래 모든 땅은 몽골의 땅이니 너희들도 복종하라. 그렇지 않으면 즉시 천명이 내릴 것이다.
정예 기마군단과 회회포로 무장하여 바그다드를 공략하고 헝가리까지 진출한 자신감으로 교황을 압박하였던 것이다.
다양한 민족들의 전통 복장, 유목민들의 생활용품은 유목민들의 역사와 문화를 알고자 하는 관람객에게 유용한 자료를 제공할 것이다.
5) 수흐바타르 광장
정부 종합청사, 문화궁전, 국립 오페라극장, 발레극장 같은 사회주의 시절에 만들어진 대형 건물로 둘러쌓인 광장에는 수흐바타르가 칼을 빼어든 기마동상이 있다. 수흐바타르는 1921년 중국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고 새 국가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이다. 수흐바타르가 민족적인 성향을 나타내자 소련은 재빨리 그를 제거하였다.
만일 우리 모두가 공통된 노력과 의지가 있다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이루지 못할 것이 없고, 배우지 못할 것이 없으며, 실패할 것이 없다.라는 문구가 동상 하단에 새겨져 있다.
6) 복드항 겨울 궁전
복드항 겨울 궁전은 토올강가에 위치하고 있다. 입장료를 내야 하며 사진 촬영과 비디오 촬영시는 별도의 요금을 내야 한다. 토올강 상류에 복드항 여름 궁전이 있었다고 하는데 파괴되었으므로 위치를 확인할 수 없다.
복드항은 티벳불교를 받아들인 이후에 나타난 지도자를 말한다. 정치와 종교의 지도자인 복드항은 8대로 끝났다. 복드항은 끊임없이 서쪽으로부터 이동해 왔는데 8대 마지막 복드항이 정착한 곳이 울란바타르이다. 8대 복드항인 젭춘담바호탁트가 1924년까지 20년 동안 몽골인을 통치한 곳이다. 사회주의 혁명의 와중에서 울란바타르는 몽골의 수도가 되었다.
자나바자르상이 유명하며, 자나바자르가 직접 제작했다는 보살상은 젖가슴이 드러난 모습이다. 복드항이 눈표범의 가죽 150장으로 만든 회의장도 볼거리이다. 박물관으로 쓰였으므로 혁명의 와중에서 파괴되지 않았다.
7) 간단 히드(사원)
현재 몽골에서 가장 큰 사원으로 19세기 중엽에 건축되었다. 과거 공산정권 하에서 유일하게 종교 활동을 보장받았던 곳이다. 1937년 스탈린의 종교 탄압 때 이 사원도 숙청 대상이었으나 외국인의 관광시설로 만들기로 하였으므로 파괴당하지 않았다.
입구에 돌사자 2마리가 있다. 2층으로 된 사원을 만들 때 못을 하나도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안에 20톤 규모의 높이 26m를 자랑하는 위풍당당한 미그지드 장라이식 불상이 안치되어 있다. 이것을 주조할 때 모든 몽골인들이 돈을 내었다. 현재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큰 불상이다.
입장료를 내야 하며 사진 촬영과 비디오를 촬영하려면 별도의 요금을 내야 한다.
8) 초이진 람 히드(사원)
울란바타르에 있는 티벳불교의 대표적인 사원이며 만주인이 통치하던 시대 몽골 건축의 걸작품이다. 17세기에서 20세기까지의 회화, 주조, 자수, 조각품, 몽골식 아플리케가 보는 이로 하여금 발길을 돌리지 못하게 한다.
자나바자르가 조각한 석가모니와 신의 나무, 청동상이 있다. 자나바자르의 초상도 있다. 등신불이 2개 있으며, 18살 처녀의 정강이뼈로 만든 악기도 있다. 몽골인들은 3의 배수인 9를 좋아한다.
입구에는 사천왕상이 있고 안에는 흥인사라는 간판이 보인다. 중국, 만주, 몽골, 티벳불교가 혼재되어 있는 모습이다. 라마교라고 알고 있던 상식은 수정되어야 한다. 티벳불교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
9) 하르허린에 세워진 에르덴 죠 히드
하르허린은 울란바타르에서 서쪽으로 약 420km 정도 떨어진 곳이다. 넓은 초원에 아스팔트 포장도로가 적막하게 뚫려 있다. 끝없이 펼쳐지는 평원이 때로는 지겹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막혀있는 공간 속에서의 지친 삶에서 오는 낯설음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하르허린은 우브르항가이의 아이막(도청)으로 초기 몽골제국의 수도였다. 중국 문헌에는 화림 또는 화령으로 쓰여 있다. 쿠빌라이칸이 베이징으로 천도하기 전까지 약 20년간 몽골의 물류 중심지였다. 오르콘 분지에 있는 도시로 동쪽에서 서쪽으로 갈수록 부채꼴 모양으로 넓어진다. 투르크어로 검은 자갈밭(카라코롬)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화산활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도시 한복판으로 오르콘강이 흐르고 에르덴 죠 히드가 있으며, 인구는 약 17,000명이 살고 있다.
하르허린은 1235년 칭기스칸의 셋째 아들로 몽골의 제2대 황제가 된 우구데이칸에 의해 몽골고원의 중앙부에 해당하는 오르콘강 상류에 건설되었다. 이후 뭉케칸에 이르기까지 20여 년간에 걸쳐 몽골제국의 수도로 번성하였으며, 세계 물류 중심지로 만들기 위하여 동서 2-3km, 남북 4-5km인 거대한 성을 쌓았다. 유라시아 각지에서 많은 사절, 전도사, 상인 등이 모여들어 물건들로 넘쳐났다. 네 개의 성문을 통하여 몽골인, 사신, 군인, 장사꾼이 서로 다른 문으로 드나들었다. 쿠빌라이칸에 이르러 수도를 중국 내부에 있는 대도(현재의 베이징)로 옮긴 뒤에 이곳은 화림행성의 소재지에 불과한 지방 도시가 되었다. 그 후 명의 침입과 내분으로 여러 차례 불에 타서 폐허로 남게 되었다.
원이 명나라에 쫓겨 몽골고원으로 왔을 때 하르허린은 다시 몽골제국(북원)의 수도가 되었으나 그 뒤에는 역사상에서 그 모습을 감추었다. 1889년에 최초로 하르허린의 유적이 발견되었으며, 1948~1949년 소련 고고학자의 조사로 전모가 밝혀지게 되었다. 현재 궁전 중심지는 독일이 발굴하고 있다.
성 입구에 있는 길이 2m, 높이 1m의 거대한 돌거북이 옛 영화를 말해주고 있다. 귀부만 남아있는 돌거북의 비석이 세워져 있었을 거북의 등에는 몇 푼의 돈과 조그마한 돌들이 덩그러니 놓여져 있다. 이런 이유에서인지 이곳을 찾는 외국인들은 108개의 커다란 기둥으로 둘러싸여 있는 에르덴 죠 히드를 하르허린 시대의 유적으로 착각한다.
이 사원의 입장료는 무료인데 절의 내부를 보려면 입장료를 내야 하고 사진이나 비디오를 촬영하려면 별도로 요금을 지불해야 한다. 이 사원은 몽골 최초의 티벳불교 사원으로 칭기스칸의 29대손인 브타이칸이 1596년에 세웠다. 폐허가 된 궁전터의 석재를 이용하여 사원을 건립하였다. 이 사원을 건립할 때의 심정은 부처님의 전지전능한 힘을 통하여 선조들이 세계물류의 중심지로 삼았던 영화를 재현하려는 몸부림이었을 것이다.
못을 하나도 사용하지 않고 건물을 지었다. 불교의 백팔 번뇌를 상징하는 108개의 흰 기둥이 드넓은 광야에 솟아 있다. 99개의 탑은 둘레에 있고 9개의 탑은 사원 안에 있다. 사원의 건물은 모두 62동이었는데 외적의 침략으로 불에 타서 현재는 18동만 남아 있다. 스탈린시대에는 3개의 건물만 남기고 모두 파괴하였다. 승려들은 죽이거나 시베리아로 유배당하였다. 하지만 많은 수의 동상, 전통 탈 탕카는 보존되었다. 이것들은 가까운 산에 묻거나 주민들의 게르에 숨겨졌기 때문에 보존될 수 있었다. 1944년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고 1965년 박물관으로 지정되었다.
18살 처녀의 대퇴부뼈로 만든 악기도 있고, 1대 복도항인 자나바자르의 초상도 있다. 황금불탑이 남북으로 2개가 가로놓여 있다.
서사에는 과거, 현재, 미래를 나타내는 나이든 삼불이 있는데 흙으로 만든 다음 금으로 도금을 하였다. 벽화에는 8가지 성물이 표현되어 있다.
중사에는 가운데 모셔진 불상이 부처의 젊은 시절 모습이고 해와 달, 앞에는 부처를 지키는 남녀 수호신, 뒤에는 부처의 사상을 관장하는 부처의 제자 8명이 새겨져 있다. 좌측에는 극락세계를, 우측에는 건강, 행복을 나타내는 부처가 있다.
동사에는 가운데 모셔진 불상이 부처의 어린 시절 모습이다. 좌측에는 평화, 우측에는 황교의 수장을 나타내는 부처가 있다.
아요시의 상은 금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큰 눈을 통하여 과거, 현재, 미래를 관찰한다고 한다. 참이라는 불교음악을 할 때 쓰는 탈과 복장도 있다.
사원의 북동쪽에는 행복과 번영의 광장으로 불리는 곳에 거대한 게르 터가 있다. 높이 15m, 지름 45m, 8개의 기둥을 설치하였던 구멍이 보인다. 브타이칸이 겨울철에 돌아와 사용한 게르이다. 300명 정도가 이곳에 들어와 회의를 하였을 것이다.
10) 하르발가스
하르발가스는 하르허린에서 약 4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유적인데 840년 - 920년에 위구르시대에 만들어진 도성이다. 우브르항가이와 아르항가이의 경계에 있는 호통트 솜(군)에 있다. 옛날 호통트인들은 이슬람교를 믿었다. 현재 몽골에서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들은 카자흐족들 뿐이다.
거대한 오르콘 분지 속에 폐허가 된 성벽만 남아 한 때 이곳을 지배하던 위구르시대의 존재를 알리고 있었다. 흙으로 쌓은 성벽을 따라 관개수로의 흔적도 있고, 도망자를 감시하였을 망루도 남아 있다. 망루였을 높은 곳에는 어워(서낭당)가 터를 잡고 있다.
이 시대의 물류기지 역할을 했을 성터에는 위구르시대의 영화는 간데없고 한가롭게 가축들이 풀을 뜯고 있다. 깨어져 나뒹구는 비석도 위구르시대의 퇴락과 비운을 웅변해주고 있다. 유목문화에서는 주인이 바뀌면 전시대의 것들은 철저하게 파괴되는 전통이 있다. 지금 위구르인들은 중국의 서쪽 끝자락인 신강위구르자치구에 터를 잡고 살고 있다. 텐산산맥의 찬물을 증발을 막기 위하여 지하로 수로를 만들어 포도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11) 체체를렉 민속박물관
1724년에 건립한 자야 반티타 히드를 민속박물관으로 쓰고 있는데 몽골에서 두 번째로 큰 박물관이다. 박물관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1937년 스탈린시대의 숙청에서 파괴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입장료가 있고 사진과 비디오 촬영을 하려면 별도로 요금을 지불해야 한다.
정원에는 어린 아이가 늑대젖을 빨고 있는 투르크인의 조상설화가 부조된 비석과 앞면에는 태양, 뒷면에는 달이 새겨진 사슴돌이 있다.
18살 처녀의 대퇴부뼈로 만든 악기가 있으며, 사원으로 사용하는 중심 건물에는 몽골인들의 풍속, 전통 생활 도구, 무기류, 말안장 등의 민속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우리의 전통 결혼식의 풍습에서 볼 수 있는 족두리, 연지곤지는 몽골과의 문화적 교류가 있었음을 알려주는 유물이다. 고려 후기 몽골의 지배를 100년 동안 받았으며, 제주도를 말 사육장으로 내어주기도 했었다.
12) 타이하르 촐로, 허르거 분화구, 차강 노르
타이하르 촐로는 이흐 타미르강가에 우뚝 솟아오른 거대한 촐로(바위)이다. 초원을 정신없이 달리다 보면 강 건너 산과 겹쳐져 보이지 않다가 가까이 다가가면 갑자기 솟아오르는 듯한 느낌으로 마주치기 때문이다.
위대한 바타르나 영웅이 나타나 타이하르 촐로 꼭대기에서 바위를 던져 거대한 뱀을 죽이고 백성들을 구한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타이하르 촐로를 지나 차강노르까지 가는 길은 주변의 화산 지형과 어울려 전혀 새로운 볼거리를 제공한다. 용암대지 아래로 촐로트강(철원의 한탄강과 비슷하다)이 흐르고 화산재가 흙처럼 쌓였다. 큰 나무를 어워(서낭당)로 모신 곳이 있는데 온통 푸른색의 물색을 나뭇가지에 걸어놓아 장관이다. 나무 둘레에는 많은 돌들을 모아 놓았다. 화산 활동으로 생겨난 지형 가운데 허르거 분화구가 특히 유명하다. 2,200m 높이에 거대한 분화구가 만들어졌는데 물은 고여 있지 않았다.
차강 노르는 타이하르 촐로에서 북서쪽으로 타리아트 솜(군)에 있는데 화산 활동에 의해 생겨난 호수이다. 물이 워낙 맑아 차강(하얀) 노르(호수)라고 한다. 절벽 위에서 보면 바닥의 지형과 물고기가 훤히 보인다. 연어 종류의 큰 물고기가 많아 낚시로 각광을 받고 있다. 몽골인들은 아주 옛날에 물고기를 먹지 않았다. 아침에 허르거 분화구 쪽에서 뜨는 일출은 아주 기막힌 장관이 아닐 수 없다.
13) 홉스골
러시아의 부리야트 공화국과 접경지역인 타이가 산림지대에 있는 몽골에서 가장 큰 호수로 이 물은 바이칼로 흘러간다. 여름철에는 관광객을 위해 무릉 또는 하트갈까지 국내선 비행기가 운항을 한다. 비가 오면 하트갈 가는 비행기는 운항하지 않기 때문에 무릉 가는 비행기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승마와 낚시와 트레킹을 할 수 있다. 트레킹은 말을 타고 설산이 보이는 곳까지 가는 코스이다. 낚시는 오물이라고 불리는 연어를 잡는다. 이 연어는 홉스골에서 성장하다가 모천으로 올라가 알을 낳는다. 이 연어는 홉스골이 곧 바다이다. 우리나라의 동해안으로 회귀하는 연어는 바다로 나가 성장하고는 강으로 올라와 알을 낳고 생을 마감한다.
타이가 산림지대에는 동화 속 주인공같은 산악 유목민들이 살고 있는데 차탕이라고 부른다. 몽골말로 순록을 따라 다니는 사람들이라는 뜻인데 부족 전체가 순록을 따라 다니며 산다. 순록은 사슴류 가운데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가축화한 동물이다. 차탕의 유목은 반야생 반가축인 순록의 무리를 사람들이 따라다니며 기르는 형태이다. 이같은 유목은 시베리아 일대와 북유럽, 그린랜드에서 행해진다. 북유럽 핀란드의 랩족, 시베리아 중부의 투바족과 사모예드족, 시베리아 동북부의 츄크치족이 그 주인공이다. 이들 가운데 가장 원형적인 형태로 순록 유목을 하는 것이 차탕이다.
차탕이 순록을 가축으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소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금은 인간이 순록을 길들일 수 있는 물질이었다. 순록은 인간에게 젖과 가죽과 고기를 제공한다. 그렇다고 해서 차탕이 순록을 함부로 잡아먹는 것은 아니다. 단지 늙은 순록만을 골라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식량으로 삼는다.
현재 몽골에는 순록이 500마리 정도 남아 있다고 한다. 한약재로 순록의 뿔이 잘리면 암컷을 임신시키지 못한다.
홉스골에 관광객들이 몰려오면서 또다시 순록의 수난은 시작되었다. 호숫가에 순록을 묶어 놓고 사진을 찍을 때 돈을 받는다. 호숫가에 묶인 순록은 모기에 물리고 먹이가 충분하지 않아 생존에 치명적이다. 매년 5-7마리 정도가 죽는다. 그러면 다른 곳에서 그만큼 사온다.
원통형 뿔 모양의 집을 짓고 산다. 벽은 순록의 가죽으로 덮었다. 차탕은 현재 200명 정도 뿐인데 근친결혼에 의한 폐해가 나타난 결과이다. 깊은 산림에 살다보니 다른 혈통을 만나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무척 유명한 브이(샤먼)이 여행객들을 위해 점을 쳐 준다.
14) 고비사막의 옐링암, 공룡의 언덕, 홍그링 엘스
고비라는 말은 몽골어로 식물이 자라기 어려운 자갈이 많은 건조지대를 의미한다. 결코 황량한 불모의 땅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자갈이 많은 토양으로 연간 강수량은 50mm 미만으로 적지만 지하수가 풍부하다.
국토의 21%를 차지하는 고비사막은 동남부에 위치한다. 다른 사막과 달리 모래색이 다갈색으로 이루어진 대지이다. 고비사막에 있는 거반사이칸 국립공원은 울란바타르에서 남서쪽으로 340km 떨어져 있다. 초원과 나무와 바위와 모래로 이루어져 색다르고 신비롭다.
알타이산맥 끝자락에 있는 옐링암은 독수리계곡이라고도 하는데 입구에서 입장료를 받으며 각종 동물을 박제하여 놓은 박물관이 있다. 산양, 눈표범, 검은 꼬리 가젤, 구부러진 큰 뿔을 가진 아르갈리라 불리는 야생 양, 야생 낙타의 서식지이며 누운 향나무의 서식지로도 유명하다. 계곡으로 들어가면 은은한 향나무 향기가 은밀하게 관광객을 유혹한다. 계곡 안에는 여름철에도 1m 두께로 얼음이 얼어 있어 아주 시원하다.
바얀자그 숲에 공룡의 언덕이 있는데 지금도 공룡알 화석, 공룡 호박, 공룡뼈가 출토되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공룡뼈 화석들이 지표면에 들어나 있었다고 한다.
홍그링 엘스는 노래하는 모래언덕으로 폭이 20km, 길이가 180km로 끝없이 이어져 있다. 인적이 드물고 모래가 아주 깨끗하여 신비감이 더하다. 밤하늘의 별이 장관이다. 크고 총총한 별을 아주 낮은 위치에서 볼 수 있다.
울란바타르에서 자동차를 타고 올 수 있으며, 오믄고비의 도청 소재지인 달란자그가드까지 국내선 비행기를 타고 와서 자동차로 돌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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