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일본 한신 대지진이 발생하다.
대구 상인동 가스 폭발 사고가 일어나다.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가 일어나다.
대한민국에서 케이블TV의 본방송이 개시되다
60년전
1935년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발표
남인수 가수데뷔.눈물의 해엽 발표
8월 13일 - 심훈의 소설 《상록수》, 동아일보 현상소설에 당선.
9월 15일 - 나치 독일, 유대인의 시민권을 박탈하고 갈고리십자 문양을 국기로 하는 뉘른베르크 법이 통과되다.
히틀러 수반에 오름
항저우(杭州)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진강으로 이동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의열단, 신한민족당, 대한독립당이 민족혁명당으로 통합
- 조선총독부가 소작쟁의 격증에 대비하여 소작관 110명 증원해 각 도,군에 배치
중국 항저우에서 이동녕, 이시영, 김구 등이 애국단을 중심으로 한국국민당 조직
최용건 1935년 8월 다시 요하 일대 중국인 항일부대들 지휘관들과 만나 함께 동북인민혁명군 제4군을 편성하고, 요하 유격대는 동북인민혁명군 제4군 제2사 제4단 참모장이 되었다.
적색농민조합원 558명이 검거되다.
50년전 외세에 의한 광복.오히려 손발이 묶임
대한민국 임시정부, 중국과 새 군사협정을 체결해 독자 군사행동권 획득
일제, 조선의 주요 도시에 소개령 발표
일제의 결전교육조치요강 선포로 조선의 국민학교 초등교과 이외의 학교 수업을 4월 1일부터 1년간 정지, 식량증산, 군수생산, 방공방위에 총동원
7월 - 한국광복군의 국내 탈환작전 결정, 총지휘 이범석
7월 16일 - 제2차 세계 대전: 미국이 플루토늄을 이용한 핵 실험에 성공
7월 24일 - 경성 부민관에서 열린 대의당 주최 행사에 대한애국청년단원들이 폭탄을 장치, 폭파시킴
8월 8일 제2차 세계 대전: 소련, 일본에 선전포고하면서 만주를 침공, 북한 웅기 상륙 작전 개시. 소련군이 한반도에서 발생한 유일한 태평양 전쟁.
8월 15일
소련군의 만주 전략공세작전으로 함경북도청진에서 일본 제국과 전투 중.
조선총독부, 소련군의 남하로 오전 9시에 여운형에게 총독부를 이양함.
9월 7일 - 미국 극동사령부, 38선 이남에 대한 군정을 선포.
9월 8일 - 하지 중장이 이끄는 미국군, 인천에 상륙.이날 상륙한 부대는 7사단 예하 육군 선발대였다.
9월 9일
미국, 서울 점령, 남한에 군정을 실시
미국은 이후 팽창주의를 포기하지않음.
서인시조 송순의 후예 송진우는 1945년 12월 27일의 모스크바 3상 회의 신탁통치 찬반 문제를 놓고 신중한 반탁론의 입장을 펼쳤다가 찬탁론자로 몰려 12월 30일 새벽 6시경 원서동 자택에서 한현우 등 6인의 총격을 받고 피살됐다.
40년전 소련에서 니키타 흐루쇼프 집권. 바르샤바 조약 기구 설립. 제1차 수단 내전 시작. 제1차 타이완 해협 위기 종결. 반물질이 최초로 인공적으로 생성됨. 중앙 조약 기구 설립
비구승과 대처승분쟁.
박인환의【세월이 가면】히트.
한미잉여농산물 협정,박인수 사건.
중립군 적성휴전감시단 축출시위.
관제데모조장말라는 대구매일신문테러.
최초야당 민주당 창당.충주비료공장 기공. 최초국산자동차 시발자동차제작.
북한은 협동농장가입운동 3년후 완료.
30년전 22,000명 월남파병.양화대교개통
박통 미국방문.60년만의 가뭄.7월 40년만에 최대홍수.사망300명
- 대한민국 정부, 한일협정 반대 시위 확산되는 고려대학교에 무장군인 투입.
대한민국 정부, 한일협정 반대시위 확산되자 서울에 위수령(衛戍令) 발동.
- 파키스탄, 인도와 전쟁상태 선포.
중국, 티베트 자치구 성립을 선언.- 경인선(영등포-인천) 복선 개통.
9월 21베트남 전쟁: 대한민국 최초의 월남파견 전투부대인 청룡부대 결단식 포항서 열림
1635년
후금 숭덕제 북원 멸망시키고 링단 칸이 소유하고 있던 원나라의 전국 옥새(大元傳國 玉璽)를 손에 넣게 되었다. 이것을 계기로 많은 소수민족군대가 합류하여 더욱 강대해졌고, 국호를 대청(大淸)으로 고쳐 청나라를 개국한 뒤 연호를 다시 숭덕(崇德)으로 바꿨다
1635.11.17 (조선 인조 13년) 국경에서 몰래 장사하는 것을 금지함, 밀무역 금지
120년전 이기는 1515년 선교감 첨정을 거쳐 그해 선교감첨정으로 빈전도감 낭청(殯殿都監郞廳)이 되었다
100년전 이기는 김안로 등의 탄핵을 받고 전라남도 강진(康津)에 유배되었다.전해 이이탄생에 이어 성혼탄생
90년전 명종즉위로 을사사화.윤원형의 승리하여 윤임,유인숙,유관이 제거됨
그전에 소윤 온건파 허자는 1545년(인종 1)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어 공조판서가 되었다. 1545년 인종이 갑자기 죽고 명종이 즉위하자 호조판서로 전임되었다.
강경파 이기는 우의정이 되자 대간에서는 그가 적임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계속 공격하였다.
이기의 자급을 승급한 것조차 옳지 않다고 계속 공격하였고, 이후 그는 김굉필, 조광조의 문인들에 대해 악감정을 품게 된다. 이들은 윤임과 가깝게 지냈는데, 이 때문에 그는 자연스럽게 윤원형, 윤원로, 윤춘년 등과 가까이 지내게 되었다.
윤원로가 이언적과 멀어지나 이기는 보호함.
사후 그는 윤원형등 함께 을사사화의 원흉(元兇)으로 지목되고, 사림에게 해를 가했다 하여 심통원, 이량, 이감 등과 함께 선조 초년 언관들의 맹비난을 받고 묘비(墓碑)도 제거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이산해는 숙부 이지함의 가르침에 6세 때 이미 글씨를 잘 써서 신동이라는 말을 들었다.
을사사화 때 친지들이 화를 입자 충청남도 보령으로 이주했다
80년전 정구는 1555년(명종 10년) 무렵에는 5촌 이모부인 오건(吳健)에게 역학을 배웠는데 시간이 되지 않아 건(乾)·곤(坤) 두 괘(卦)만 배우고도 나머지 괘는 스스로 유추해 스스로 깨달았다 한다.
이이는 1555년 20세에 금강산에서 내려와 다시 성리학에 탐독하며 유교의 진리를 통해 현실 문제를 타개하겠다는 다짐을 설파하며 《자경문》(自警文)을 집필하였다.
70년전 1565년 윤원형과 정난정을 사형에 처하라는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탄핵이 빗발쳤고, 윤원형은 그해 11월 18일에 경기도 강음현(江陰縣)에서 자결하였다.이이의 상소도 한몫하여 이조좌랑이 됨.
심의겸은 율곡 이이가 자신의 종조부 심통원 등을 공격하여 탄핵, 몰락시켰음에도 이이에게 사사로운 감정이나 원한을 갖지 않고 계속해서 친하게 지냈다. 심의겸은 이이를 인격적으로 신뢰하였다. 이이는 그런 심의겸의 인품에 탄복하여 을해당론 이후에도 심의겸을 구원해주려 노력했고, 심의겸은 이이를 서인의 정신적 지주로 추대하였다
이산해는 1565년(명종 21년) 1월 홍문관부수찬이 되고 이후 사간원정언이 되었다가, 5월 이조좌랑이 되었다
60년전 1575년 전배는 심의겸을 중심으로 하는 서인이, 후배는 김효원을 중심으로 하는 동인이 되었다. 서인의 주요인물은 박순(朴淳)·정철(鄭澈)·윤두수(尹斗壽) 등이고 동인의 주요인물은 류성룡(柳成龍)·이산해(李山海) 등이었으며, 각각 이이와 이황의 학문에 영향을 받고 있었으므로 학풍·학연을 배경으로 한 대립의 양상도 띠었다.
선조는 유교사상 확립을 위해 명유들의 저술과 경서의 간행에 힘써, 1575년 〈주자대전〉의 교정본을 간행
이산해는 1575년(선조 9년) 1월 왕명으로 2품 이상의 재상에게 지문(誌文) 제술을 명하였으나 예문관에서 선발된 유희춘(柳希春)이 스스로 사직하고 이산해를 천거하여 그가 대신 지문을 짓게 되었다. 2월 11일 대사간이 되었다.
광해군탄생
1575년(선조 8) 송익필42세 때 아버지 송사련이 사망하였고 그 해에 신사무옥이 송사련이 안처겸·안처근 형제의 대화를 엿듣고 폭로한 것이 밝혀졌다
50년전 전해 송익필은 제자 이귀와 이이구제 노력.이이사망후 송익필은 동인으로부터 '서인의 모주'(謀主)로 지목되면서 동인들은 그를 필사적으로 제거하려 하였다. 이후 율곡에 대한 비난이 그에게로 방향이 바뀐다.다음해 그는 환천됨.
전해 이산해는 이조판서가 되었다. 이에 서인 정철의 파인 김응생(金應生) 등이 한 사람에게 오랫동안 인사권을 주면 권한이 비대해질 우려가 있다고 공격했다.
1585년 1월 김우옹과 이산보 등이 입시하여 그가 서인들에게 공격받는 것을 공론화시켰다
44년전 서인당에 대한 처벌에 동인은 다시 강경파와 온건파로 의견이 나뉘어 갈등하게 된다.
40년전 피해다니던 송익필은 충청도 당진군 마양촌(馬羊村)에 집을 마련하게 되면서 안정된 만년을 보냈다.
이산해는 서인들의 반대를 견뎌내고 홍문관과 예문관 대제학직을 겸직한다. 이후 북인의 당수이자 정신적 지주로 있다가, 북인 내에서도 다시 기성 북인들에 불만을 가진 소북과 기성 세력인 대북으로 갈라졌는데 이산해는 홍여순과 함께 대북세력을 지지하였으나 소극적으로 관망하였다.
25년전 대북은 선조 33년(1600) 홍여순과 이산해 사이에 다툼이 발생해 이산해가 육북(肉北), 홍여순이 골북(骨北)으로 다시 나뉘었다.그러나 세자 광해군의 즉위를 반대하는 소북의 유영경과 경쟁하면서 골북과 육북은 다시 대북으로 통합된다.
장현광은 선조 28년(1595) 42년때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이 학행(學行)으로 천거하여 보은현감이 됨
30년전 이산해는 1605년(선조 38년) 이후 다시 선조의 뒤를 이을 임금 자리를 놓고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과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으로 갈라지자 그는 갈등을 봉합하기 어렵다고 판단, 대세를 따라 대북의 편에 섰다
장현광은 1605년 합천군수, 1607년 사헌부지평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1608년 《주역도설(周易圖說)》을 지었다.
20년전 - 오사카 전투의 패배로 도요토미 가문이 몰락하였다.
10년전 장현광은 이괄의 난 직후 사헌부장령으로 부임하여 왕을 알현했고, 난의 진압과 수습을 위해 노력하였다
10년후 1635.11.17 (조선 인조 13년) 국경에서 몰래 장사하는 것을 금지함, 밀무역 금지
북원 멸망해 몽고의 중심은 오이라트
17세기 초까지부터 대칸의 권력은 점점 약해지기 시작했다. 링단 칸이 죽고 난 1634년, 에제이 칸과 그의 어머니는 1635년 2월 만주기병대의 기습으로 인해 둘러쌓이게 된다.
그와 그의 어머니는 곧바로 항복하여 홍타이지에게 원나라의 옥새와 대칸의 칭호를 바치게 된다
10년후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 있던 인조(仁祖)의 적장자 소현세자가 귀국하였다. 이 때, 과학 및 천주교 서적과 지구의 등을 가지고 왔다.
- 소현세자가 급사하였다.
-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
20년후 크리스티안 하위헌스에 의해 토성의 위성 타이탄 발견.
조형이 이끄는 조선 통신사가 일본을 방문
30년후 아이작 뉴턴, 만유 인력 법칙 발견.
40년후1675년, 보르니칸이 숙부 루브증과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차하르외에 다른 몽골족까지 가세할거라고 믿었으나 모든 몽골족들은 등을 돌렸고 이로써 봉기는 실패하게 된다. 이것으로 몽골은 청나라에 완전히 정복되었다.
김수항은 2차예송직후 1675년2월 18일 다시 좌의정(左議政)이 되었으나 같은 해 숙종 즉위 후, 종실이었던 복창군 이정(李楨), 복평군 이연 등 두 형제의 추문을 들어 처벌을 주장하다가, 7월 17일 원지유배령(遠地流配令)을 당했다
50년후 5년전 경신환국때 남인을 강경처벌주도한 김만기는 1685년(숙종 11) 스승 송시열 등과 함께 증조부 사계 김장생의 미간행 저술, 시문 등을 모아 사계유고 27권(부록 3권 포함)을 간행하였다
60년후 소빙기로 불리는 냉해가 계속되었는데 한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리하여 잇단 흉년과 홍수·질병으로 인구는 오히려 감소되어 1693년에서 1699년 사이에 약 142만 명의 인구 감소 현상을 가져왔다.
박세채 사망.남구만 좌의정
1275년 고려 원종죽고 충렬왕 즉위.
남송 공제원년(1275년), 원나라 장수 바얀(伯顔)이 본격적으로 남송을 침공했다. 가사도(賈似道)의 군대가 무호(蕪湖)에서 궤멸 당해 강변에 있는 고을의 군수(郡守)와 신하들이 달아나거나 항복하자 가사도의 집안을 적몰(籍沒)했다. 문천상(文天祥)을 우승상(右丞相)으로 삼고 여러 차례 원나라에 사신을 보내 화의를 요청했지만 거부 당했다. 바얀이 장강 이북 땅을 거의 모두 점령했다.
90년전 성공한 십자군인 포르투갈 초대왕 프랑스 보르고뉴출신 아폰수1세사망.
1185년 테무진은 자무카에게 패한다. 송나라 기록에 따르면 테무진은 자무카에게 패한 후 금나라의 노예가 된다.
71년전 1005년에 창건된 베네치아는 비잔티움 제국의 간섭에서 완전히 벗어나 독자적인 세력으로 발전했으며 결국 1204년 제4차 십자군 때에는 당대 최대의 도시이자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침공하여 함락.
약탈이후 제국을 분할하여 나누어가졌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제국의 3/8을 차지했다.
60년전 1215년
잉글랜드 존 왕이 귀족, 성직자, 기사들의 집단 요구로 대헌장에 서명
각훈이 《해동고승전》을 지음,
1215년 금선종 오도보가 바로 개봉으로 천도하자 칭기즈 칸은 그것을 반역으로 생각하고 징기스칸은 1215년 전쟁을 재개하여 연경을 함락시켰다. 그 뒤 중국 북부의 완전한 장악은 부장인 무칼리에게 맡겨졌다.
50년전
40년전 니케아제국 요안니스 3세는 영토를 확장하고 1235년 불가리아의 이반 아센 2세와 동맹을 맺어 테살로니카와 에페이로스를 손에 넣었다.
30년전 1245년 니케아제국 요안니스는 프리드리히 황제의 딸과 결혼하여 동맹을 맺고 라틴 제국의 압박하였다.
20년전 니케아제국 테오도로스 2세가 즉위하여 불가리아와 싸웠다
15년전 니케아 미하일8세은 베네치아 공화국의 적인 제노바와 동맹을 맺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하여 이듬해 나라회복.
10년전 이브샴 전투에서 시몽 드 몽포르의 군대와 맞선 에드워드 1세의 군대가 시몽을 전사시키며 승리, 왕정복고가 이루어졌다.
맘루크 왕조의 군대가 예루살렘 왕국의 하이파, 아르수프, 카이사레아 등을 점령하였다.
삼별초가 왜구정벌
10년후 원나라 군대가 참파를 정복, 복속시킨 후 북상하여 대월 쩐 왕조의 수도 탕롱을 점령하였다.
1284년 8월에 벌어진 2번째 전투에서는 오베르토 도리아와 베네데토 차카리아가 지휘하는 제노바 소함대 2척이 알베르티노 모로시니, 우골리노 델라 게라르데스카, 안드레오토 사라체노가 이끄는 수적으로 우세한 피사 함대를 크게 물리쳤다. 이 싸움 후 피사는 해군력을 다시 회복하지 못했다.
- 베네치아 공화국 해군이 제노바 공화국으로부터 키오스 섬을 장악하였다.
비잔틴 제국과 베네치아 공화국이 화해하였다.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가 writ Circumspecte Agatis 를 발표, 성직자와 교회의 권한을 축소시켰다
삼국유사 완료.
독일 뤼베크의 연금 제도가 처음으로 시행되었다.
20년후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가 웨스트민스터에서 모범 의회를 소집하였다. (이후 관례화)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와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가 전비 충당을 위하여 각각 성직자에게 과세하였다. 이에 교황 보니파시오 8세가 교황의 동의 없는 성직자 과세에 반발하며 필리프 4세의 프랑스 교회에 대한 과세를 금하였다. 이는 14년 후의 아비뇽 유수의 단초로 작용한다.
마르코폴로 귀국
일 칸국의 가잔 칸이 이슬람으로 개종하였다
30년후 트라키아의 아프로스 전투에서 카탈로니아 용병단이 비잔틴 제국군을 패배시켰다.
윌리엄 월레스가 글래스고 인근에서 잉글랜드 군에 체포되어 잔혹히 처형되었다.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가 성전기사단을 이단으로 고발하였다.
40년후 루이 10세가 랭스에서 대관식을 치렀다.
유럽대기근발생
- 몬테카티니 전투에서 피사 군대가 피렌체 공화국 - 나폴리 왕국의 연합군을 격파하였다.
- 모이리 고개 전투에서 스코틀랜드 국왕 로버트 브루스의 동생 에드워드가 켈트족과 연합하여 앵글로 - 노르만 군대를 격파하고 스스로 아일랜드의 황제임을 선포하였다.
50년후 아폰수 4세가 포르투갈의 왕이 되었다.
투글루크 왕조의 무함마드 이븐 투글루크가 델리 술탄국의 군주로 즉위하였다.
- 아즈텍 제국의 수도 테노치티틀란이 건설되었다.
- 중세 아랍의 탐험가 이븐 바투타가 고향 탕헤르를 떠나 여행길에 올랐다.
60년후 일 칸국의 분열과 합스부르크 가문의 확장
일본 남북조 시대의 개막.
130년후 꾸준히 영토를 확장하던 피렌체가 1405년 쇠퇴하는 피사를 지역민들의 반발을 제압하면서 사들였다
915년 궁예 정개 2년(915년), 그의 포악함을 보다 못한 왕후 강(康)씨가 자신에게 간언하자, "네가 다른 남자와 간통하고 있지 않느냐. 나는 관심법으로 보아서 다 알고 있다."며 쇠꼬챙이를 가져다 왕후의 음부를
지져 죽이고, 자신의 두 아들마저 죽였다. 소위 '관심법'이라 칭하다
60년전 855년 프랑크 로타르 1세. 855년 아들들에게 자신의 지위를 넘기고 프륌 수도원으로 은퇴했다.제국이 삼분됨
알프레드 영국대왕은 바이킹에게 데인로를 떼어줘 안정시킴.
성인으로 성장한 미카일 3세는 어머니와 테옥티스투스의 영향에서 벗어나서 삼촌 바르다스와 손잡고 A.D. 855년 11월 20일 테옥티스투스를 제거하고, 이듬해에는 어머니 테오도라를 궁정에서 몰아내었다.
50년전 미카엘은 첫사랑인 유도키아 잉게리나를 바실리우스와 결혼하게 하여 그녀를 황궁으로 끌어들였다( 잉게리나가 866년 낳은 아들 레오는 사실 바실리우스의 아들이 아니라 미카엘의 아들이라는 설이 있다.)
바이킹들이 영국을 대대적으로 침략하기 시작하였다.
애설레드 1세가 웨식스의 왕이 되었다.
후우마이야 왕조, 나바라 왕국과 카스티야 왕국공격
40년전카를 2세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즉위하였다.
황소의 난이 발발하였다
헌강왕 원년위홍을 상대등에, 예겸을 시중으로 삼다.
30년전 동로마 제국의 황제와 아바스 왕조의 칼리파가 동시에 왕관을 수여하며 아쇼트 1세의 아르메니아 왕국이 공식적으로 성립되었다. (바그라투니 왕조) 이로써 457년만에 자주적인 아르메니아 왕국이 부활하였다
20년전 데인족이 웨식스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동유럽 초원에서 유목 생활을 하던 마자르족이 아르파드의 지휘 아래 서쪽으로 이주하여 판노니아 평원에 정착하였다. 이후 마자르족의 국가인 헝가리 대공국이 건국되었다
10년전 아바스 왕조가 툴룬 왕조를 멸망시키고 마스르
(이집트) 지역을 재정복하였다.
산초 1세가 카시 부족과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도움으로 팜플로나의 바스크인 왕을 폐위시키고 즉위하였다
일본은 최초 시집
10년후 알폰소 4세가 레온 왕국의 왕이 되며, 갈리시아 왕국 간의 동군연합이 파기된다. 다만 포르투와 코임브라 백작령들은 여전히 갈리시아 왕국 하에, 카스티야 왕국은 레온 왕국 하에 놓여있는 사실은 변동 없다.
토미슬라브가 크로아티아의 왕이 되었다.
후당의 침입으로 전촉이 멸망하였다.
2차 조물성 전투
20년후 금산사에서 가까스로 탈출한 견훤은 과거의 적국이었던 고려에 귀순하였다.
- 신라의 56대 왕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함으로써 신라가 56대 992년만에 멸망하였다
30년후 왕규의 난이 발발하였다.3대 정종즉위
40년후 레히펠트 전투 : 아우크스부르크 근처의 레히펠트 평원에서 독일왕 오토 1세가 이끄는 군대가 마자르족을 격퇴하고 마자르족의 지휘관들을 사로잡은 뒤 처형하였다. 이 전투로 인해 마자르족의 서유럽 원정이 좌절되었다.
- 이드위그가 잉글랜드의 왕이 되었다
50년후 송나라군의 공격으로 후촉이 패망하였다.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니케포루스 2세가 이끄는 군대가 타르수스를 약탈하고 시칠리아 지방을 완전히 정복하였다.
60년후 고려경종즉위. 유럽 대지진.
555년 남량(南梁) 민제(閔帝) 원년 / 경제(敬帝) 원년 554년에 원제가 강릉에서 서위에 패해 소찰에게 살해되자, 왕승변과 진패선 등이 임시로 소방지를 양왕(梁王)으로 높여 국정을 맡게 했다. 이듬해인 555년에 강주를 떠나 건강에 입성하였고, 왕승변과 진패선 등이 황제로 옹립하려 했다
90년전 북위 풍태후 남편 문성제 사망하고 탁발홍 헌문제 즉위.
80년전 장수왕 백제 개로왕 전사시킴
60년전 495년 소지마립간 17년(495년) 8월에는 고구려가 백제의 치양성을 공격해 원군을 청해오자, 신라가 군사를 보내 고구려군을 무찔렀다
50년전
45년전 호씨 태자 낳자마자 북위고유 자귀모사제도 폐지.
40년전 선무제죽고 효명제 즉위.호씨는 영태후에 봉해짐
35년전 전해 우림의 변.무신의 난으로 문신직 가능하게 해줌.
30년전 525년 8월, 6진 중 파육한발릉에게 동참하지 않았던 유현진에서 두락주(杜洛周)의 반란이 일어났다.
6진의 군사는 북위의 토벌군을 여러차례 막아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후방으로 들이친 유연의 군대에 패해 525년, 20만에 달하는 무리가 투항하여 반란은 진정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북위는 이들을 기, 정, 연의 3개 주에 분산 배치하고 구휼 조치를 취하지 않아 반란의 불씨를 남겨두는 실책을 저질렀다. 곧 이들 6진의 투항병들은 다시 봉기하여 북위를 위기에 몰아넣었다.
25년전 북위 이주영이 관서의 최대 반란세력인 묵기추노가 포로로 잡히고 이전에 토벌군으로 파견되었다가 묵기추노에게 가담했던 소보인도 포로로 잡혔으며 마지막 할거 세력인 묵기도락까지 포로로 잡히면서 관중, 관서 일대도 평정되었다. 이로써 육진의 난이 끝났다.
20년전 . 535년 장안의 효무제는 여자 문제로 우문태와 사이가 벌어졌는데 효무제는 세 명의 사촌과 근친상간 관계였다. 하지만 우문태는 이 관계를 싫어했고 그중 하나를 죽였다. 효무제는 화를 냈고 자기가 화를 냈다는 것 때문에 인사를 하지 않는다든가, 궁에서 테이블을 쾅 치고 화살이 없는 빈 활을 당기는 것으로 표시했다. 결국 우문태는 효무제를 독살했고 그의 사촌 문제(文帝) 원보거(元寶炬)을 황제로 삼았다
10년전 545년 첩 이주씨의 형제인 이주문창(爾朱文暢), 첩 정씨의 형제인 정중예(鄭仲禮)가 임주(任冑)와 함께 이주문창을 리더로 삼아 고환을 암살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 음모는 들통났고,공모자들의 가족을 모두 죽였다
10년후 565년, 북주의 섭정 우문호(宇文護)는 윤공정(尹公正)을 북제에 평화 사절로 보냈고, 평화에 대한 보답으로 우문호의 어머니 원씨와 그의 고모 우문씨를을 북주로 보내려고 했다. 하지만 고담은 북주와 돌궐이 공격해올까 두려워해 우문씨만 북주로 돌려보냈다
20년후575년, 북주의 무제 우문옹은 항상 북제를 멸망시키길 바랬는데 가을 대대적인 원정을 계획했다. 몇몇 장군들은 진양으로 곧바로 쳐들어가자고 했지만 우선 그는 낙양으로 쳐들어갔다. 하지만 북주의 군대가 중담(中潭) 요새에 이르렀을 때 부복(傅伏)이 강력하게 방어하고 있었기 때문에 쉽게 함락하지 못했고 게다가 우문옹이 병들었기 때문에 후퇴했다. 그러는 동안 진나라의 진욱도 오명철을 시켜 팽성(彭城)을 포위했으나, 점령하지는 못했다. 다음해 평양점령
30년후 585년소종이 후량 3대 황제가 되었다.
요메이 천황이 일본 31대 천황으로 즉위하였다.
40년후 랑고바르드족이 테라치나를 포함한 이탈리아 중부의 몇몇 도시를 약탈하였다.
50년후 수양제 대규모 토목사업시작
60년후 615년 4차 침입. 수 양제는 고구려에 대한 깊은 원한과 집착으로 인하여 수군 대장 내호아로 하여금 비사성을 공격하게 하였고 이때 비사성이 함락되면서 여수 전쟁에서 최초의 성 함락이란 소득을 얻었다.그러나 수나라 내부에서 반란이 갈수록 거세져 내호아가 지휘하는 수군만으로 고구려를 침공하는 것도 사실 불가능한 일이었다. 철수
195년 로마 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전 황제 니게르를 지지한 파르티아를 응징하기 위해 원정대를 이끌고 메소포타미아 북부 지방으로 향하여 셀레우키아와 바빌로니아를 점령하였다
2월에는 이각과 곽사가 권력을 두고 서로 전쟁을 하게 되었는데 이 전쟁이 점점 격렬지고 나중에는 이각이 황제를 수레에 태워 자기 진영으로 끌고가 버렸다
90년전 105년 전한5대부터 84년동안 황제가 10번 교체됨
60년전 135년 제2차 유대-로마 전쟁에서 유대인 지도자인 바르 코크바가 베들레헴 근교의 바티르 마을 전투에서 전사하였고, 아키바 또한 처형당함으로써 로마 제국이 유대인들의 반란을 완전히 진압하게 되었다. 이를 진압한 이후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는 이런 일이 발생할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예루살렘 지역의 유대인들을 이주시키고, 유대인들 활동의 중심지였던 예루살렘의 이름을 아일리아 카피톨리나로 바꾸었다.
50년전 - 질제가 후한 제10대 황제가 되었다.145년, 충제가 3살의 나이로 요절했을 때, 태위(太尉) 이고(李固)를 비롯한 대신들은 외척이 정사를 농락하지 않기 위해서 연장자를 황제로 세우려고 하였으나, 간신이자 권신인 양기는 자신이 손바닥안에서 가지고 놀 수 있는 어린 황제를 삼기 위해 질제를 세우고 이고를 죽였다
40년전 로마 제국과 파르티아 간에 전쟁이 발발하였다.
30년전아비디우스 카시우스 장군이 이끄는 로마 제국군이 파르티아의 크테시폰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로마로 돌아온 이후 전염병(안토니우스 역병)이 퍼져 많은 로마의 백성들이 죽었다.
차대왕이 연나부의 명림답부에게 살해되고, 신대왕이 차대왕의 뒤를 이어 고구려 제8대 왕이 되었다.
청류당은 저마다 입을 모아 환관의 죄상을 폭로하는 법정진술을 택해서 환관들을 물먹였다. 그대로 놓아두면 진짜로 큰일이 나겠다 싶은 환관들은 외척 두무(竇武) 등이 상주하여 간한 것을 기회로 청류당에게 관직을 박탈하고 이후 평생의 관직 진출을 막는 금고(禁錮)형을 내렸다. 이것이 1차 당고의 금(166년) 사건이다.
20년전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시리아 총독 아비디우스 카시우스가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였다
10년전 당고는 해제되었고, 황건적의 난 진압에 합세했던 청류파들은 당고의 해제를 통해 중앙으로 진출했으며, 황건난 발발 이전부터 청류파를 규합하며 재야의 거두로 떠올라 있던 원소가 하진을 지지하면서 하진과 십상시와의 대립은 깊어져 갔다.
10년후 원담이 남피에 도착한 조조와 싸웠으나, 격전 끝에 전사하였다.
조조가 30만 대군을 이끌고 북방 정벌에 나섰다
20년후 손권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위나라의 합비를 공격하였으나 장료, 악진, 이전이 이끄는 7천 군대에 패하고 퇴각하였다.
양평관에서 조조군이 장로군을 상대로 승리하였다
30년후 촉한의 승상 제갈량이 남만의 반란을 토벌하러 출전함
40년후 235년 로마 황제 알렉산데르 세베루스가 자신의 병사들에게 살해당하였다.
- 막시미누스 트락스가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50년후 전해 환도성이 불타고 245년, 재차 관구검이 밀고 내려오자 동천왕은 매구루라는 곳으로 도망쳐야 했다. 관구검은 현도 태수 왕기(王頎)를 보내 왕을 추격하였는데, 246년에 이르러 동천왕은 밀우와 유유의 계책으로 왕기의 선봉장을 죽이고 역습을 가해 왕기의 군대를 물리치는 데 성공하였다
55년후 일본의 고훈 시대가 개막하였다
왜와 신라의 갈등시작
60년후 255년위나라의 무장 관구검이 합비에서 문흠과 함께 사마사가 위의 황제 조방을 폐위한 것에 대한 죄를 묻고자 군사를 일으켰고, 사마사는 이에 직접 출병하였다가 진중에서 사망하였다. 관구검 또한 군세의 약화로 인하여 달아나던 도중에 안풍진 도위부의 백성인 장속의 활에 맞아 죽음을 당했다.
bc226년
연이 진의 공격을 받아 수도 계를 함락당하고 그 외 많은 영토를 잃었다. 연왕 희는 요동으로 도주하였다.
빼앗은 연의 영토에 진의 어양군, 우북평군, 요서군이 설치되었다.
50년전
40년전
30년전
20년전
20년후
30년후
40년후
50년후
bc586년 바빌론이 유대를 멸하다.
동주 간왕이 즉위하고 진, 초, 진, 송, 정이 서로 전쟁을 벌였고 오가 발흥했으며, 그 공격에 의해 초가 멸망 직전의 상태까지 갔다.
bc946년 서주 공왕즉위 치세 전반에는 할아버지 주 소왕 · 아버지 주 목왕의 영토 확대 노선을 계승했다. 그러나 후반에는 원정을 미루고 내정에 충실히 힘을 쏟았다.
중원갑자
1815년 인도네시아 탐보라(Tambora) 화산 폭발. 2년간 극심한 추위
150억톤방출.
유럽탈주러시 미국행.
엘바섬탈출후 워털루 전투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몰락.
60년전 나주 괘서 사건이 일어나다.
- 프렌치 인디언 전쟁: 에드워드 브래독 장군이 이끄는 영국군이 버지니아 주에 상륙하다.
- 프렌치 인디언 전쟁: 프랑스-인디언 연합군이 에드워드 브래독 장군이 이끄는 영군군을 급습하여 궤멸시키다.
- 뉴욕시에서 조지 호수 전투가 발생하였다.
- 1755년 리스본 대지진이 발생하였다
50년전이집트가 독립을 선포하였다.
- 영국 의회에서 북아메리카 식민지에서 강제적으로 실시한 최초의 과세법인 인지 조례법을 통과시키다.
이에 반발로 보스턴 폭동.
- 영국 의회에서 병영법을 실시하다. 이 법에 의거하여 식민지 인들은 강제로 주둔 영국군에 대한 숙박을 책임져야했다
40년전렉싱턴 전투: 미국 독립전쟁이 발발하다.
- 존 핸콕을 수장으로 하는 2차 대륙회의가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결의. 선언은 다음해
대륙회의에서 조지 워싱턴이 식민지 군대의 사령관으로 임명.
30년전 미 해군이 조직되다. 창설 당시 명칭은 대륙 해군(Continental Navy)
- 달러가 미합중국의 화폐단위로 채택되다
20년전 - 프랑스 혁명전쟁: 프랑스 군대가 네덜란드를 점령.
- 쿠를란트-젬갈렌 공국이 폴란드 분할의 여파로 러시아 제국에게 합병되어 멸망함.
루이 18세의 즉위에 대항하여, 프랑스 제1공화국은 루이 샤를이 사망한 이후 부르봉 왕가의 계승이 단절됐음을 선언.
- 프랑스 혁명을 분쇄하기 위한 영국, 오스트리아 제국, 러시아 제국 사이의 상트 페테르부르크 동맹이 체결.
10년전 3차 대프랑스 동맹군이 독일 전역에서 나폴레옹에게 참패하다.
-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영국군이 프랑스군을 격파. 하지만 제독 호레이쇼 넬슨은 전사한다.
-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가 프랑스에게 참패.
10년후볼리비아 독립.
니콜라이 1세 즉위.
- 데카브리스트의 난 발발.
20년후 페르디난트 1세가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제로 즉위하다.
- 찰스 다윈을 태운 비글 호가 갈라파고스 제도에 도착하다.
- 텍사스에 거주중이던 미국인들이 멕시코에 반발하여 봉기를 일으키다.
- 마오리족을 비롯한 뉴질랜드의 원주민들이 독립을 주장하다.
- 헬리 혜성이 지나가다.
30년후 - 미국 의회가 텍사스 공화국의 연방 가입을 승인
- 플로리다가 미합중국에 가입.
40년후 전해 미국에 이어 에도 막부와 러시아 제국이 일본 시모다 시 조라쿠지에서 러일 화친 조약을 맺는다.
- 알렉산드르 2세가 러시아 제국의 차르로 즉위하였다.
- 태평천국의 난: 태평천국군이 안후이로 진격하다.
50년후 미국에서 링컨 암살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미국의 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이 죽었다.
흥선대원군 경복궁 중건 계획 발표.
- 미국 남북전쟁: 오클라호마 준주의 토슨 요새에서 남부동맹의 스탠드 웨티 장군이 남군 부대 마지막으로 항복을 했다.
러시아 제국 군함이 원산에서 통상을 요구했다
60년후 2년전 징병제도입한 일본 1875년 9월 20일 - 개방강요 위해 강화도 연안에 파견된 일본 함대가 강화도를 불법 침입하여 조선 수비대와 전투를 벌인 운요호 사건 발생.
2년후 사이고 다카모리상대로 세이난전쟁
청 광서제 즉위하나 1875년부터 1881년부터는 큰어머니인 동태후가 섭정하였고 1881년부터 1889년까지는 큰어머니이자 이모인 서태후가 섭정을 하였다..
1455년 칼리스투스3세가 교황로 즉위하자 발렌시아의
보르지아가문이 대두된다.
1457년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다.
영국 장미전쟁 - 랭카스터와 가와 요크 가의 전쟁시작
60년전 1395년
정도전, 정총 등이《고려사>를 펴냄
한양의 이름을 한성으로 바꿈
50년전 헨리 4세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잡힌 요크 대주교 리처드와 노포크 남작 토마스가 처형되었다.
명나라의 장군 정화의 대함대가 쑤저우를 출항하였다. (1차 항해)
40년전 백년전쟁 1415년 아쟁쿠르 전투에서 잉글랜드 군이 대승을 거두다
30년전 트루아 조약에 따라 마침내 부르고뉴파는 헨리 6세의 잉글랜드군에게 수도 파리의 성문을 열어주고, 샤를은 쫓겨나면서 아르마냑파와 함께 시농으로 피신했다.
20년전 샤를 7세는 부르고뉴의 잉글랜드-부르고뉴 동맹파기를 획책하여 1435년 프랑스, 잉글랜드, 부르고뉴의 삼자협의에 의해 잉글랜드의 주장을 물리치고 프랑스-부르고뉴 동맹(아라스조약)을 체결하는데 성공했다. 영국군은 설상가상으로 요크파와 랭커스터파의 대립이 슬슬 수면 위로 부상하고 있어서 제대로 전력 투입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1436년 4월 파리에서 잉글랜드 주둔군에 반대하는 봉기가 일어났을 때 아르튀르 드 리슈몽 원수가 파리로 진군해 파리를 탈환하는데 성공하면서 프랑스 쪽으로 승기가 크게 기울었다.
10년전 1444년 이루어진 로렌 원정의 용병대를 재편성해 1445년 상설군인 <칙령대>를 설립했다. 귀족은 예비군으로 등록되고 평민은 각 교회구의 일정 숫자만큼 징병이 이루어져 훈련, 군역과 맞바꾸어 세금이 면제되었기에 자유(franc)라는 이름이 붙여져 자유사수대(francs archers)로 조직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군비편성으로 샤를 7세는 노르망디를 지배하는 잉글랜드군 토벌의 군대를 파견했다.
10년후 루이11세는 1465년 불평귀족들의 반란이 일어나 콩플랑 및 상모르양 조약으로 일부 왕령을 동생에게 넘기는 조치를 취했다
20년후 루이11세는 1475년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4세와 피키니 조약을 체결하여 백년전쟁을 완전히 종결시켰다.
30년후 리차드3세 죽고 영국 헨리7세 튜더왕조창건
40년후 샤를8세가 친정을 하자 마자 이탈리아에 대한 관심이 생겨서 이탈리아 전쟁을 개시했으며, 1494년에는 피렌체를 점령했다.
1494년에 샤를 8세는 2만 5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나폴리로 향했다.후사없이 4년뒤 사망
50년후 루이12세는 이렇게 전쟁이 잦았음에도 불구하고 상비군제도의 정비, 도로 건설, 수리시설 개선, 농민 보호, 관료조직의 확충, 지방관습법 편찬, 소송제도의 개선을 단행함으로써 1506년 투르에서 열린 삼부회에서 '국민의 아버지' 칭호를 얻게 되었다
51년후 체사레 탈옥후 나바라로 망명했지만 사망
60년후 1515년
스위스 동맹이 이탈리아를 넘보았는데, 마찬가지로 이탈리아에 큰 관심을 보이던 프랑스와 싸우다가 크게 대패하였다. 스위스는 그 이후로 현재까지는 자신들의 영토를 지키는 것 외에는 다른 전쟁을 하지 않았다.
우즈베크인이 히바 칸국의 아랍샤히드 왕조를 창시했다.
. 18살의 메리는 52세의 노인루이12세와 결혼을 하게 된다. 그러나 결혼한지 3개월 만인 1515년, 그는 침실에서 격심한 활동을 하다가 복상사(...)했다. 이에 왕위는 루이 12세의 사촌조카이자 사위가 되는 프랑수아 1세에게 가게 되었다
프랑스 프랑수아 1세 즉위첫 번째 르네상스형 군주로 취급받는다. 그의 치세에 프랑스는 거대한 문화적 진보를 이룩하였다
1095년 고려헌종 즉위하여 360년후의 단종과 같은 삶을 산다.
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십자군 전쟁을 선포하였다.
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아데마르 주교와 툴루즈의 레몽으로 하여금 십자군을 지휘케 하였다.
무라비트 왕조 군대가 레콘키스타 세력에 대한 반격을 개시, 기독교도 들로부터 리스본을 탈환하였다.
60년전 1035년에 크누트 대왕이 죽고 하레크누드가 덴마크 왕에 올랐다. 당시 그는 덴마크에서 왕위를 지키는 것만 해도 빡셌기 때문에, 일단 잉글랜드 왕 노릇은 접어두고 섭정인을 잉글랜드로 보내는 선으로 그쳤다. 그 섭정인이 그의 배다른 형, 해럴드 1세다
50년전 참회왕 에드워드가 웨스트민스터 애비의 건축을 시작하였다.1045년 에드워드는 고드윈의 딸 에디스와 결혼하였고 고드윈과는 사위-장인 관계가 되었다. 이 무렵의 고드윈 일가는 잉글랜드 남부 전부를 지배하고 있어 강력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송나라의 발명가 필승이 활판 인쇄술을 발명하였다.
범중엄과 한기가 추진하던 경력변법이 중단되었다. 다만 이후 왕안석의 개혁에 영향을 주었다.
40년전 고드윈은 1053년에 죽었지만 해럴드를 비롯한 그의 아들들의 세력이 커졌고 1057년이 되어서는 머시아를 뺀 잉글랜드 전역이 이들 손에 들어간다. 이 무렵부터 에드워드는 정치를 점차 멀리하고 매일 사냥이나 다니게 된다.
사생아출신 노르망디공작 기욤은 노르망디 귀족반란을 최종제압.
다음해 프랑스 앙리1세 물리침
플랑드르공주 마틸다는 기욤의 행위에도 결혼.
30년전
1065년 에드워드는 해럴드의 동생인 토스티그가 백작으로 있던 노섬브리아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토스티그는 반란을 진압하고 싶었지만, 협상가로 파견된 그의 형 해럴드는 도리어 그를 비난했다.
1066년 병오년 1월 5일, 에드워드 왕은 사망했고, 다음 날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매장되었다. 문제는 누가 왕위를 이을 것인가였다. 에드워드 왕은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후계자가 명확치 않았다. 노르만 공국의 윌리엄 1세는 자신에게 넘기기로 이미 약속했다고 주장했고, 해럴드 2세는 왕이 죽기 직전에 자신에게 왕국을 부탁한다는 유언을 했다고 주장했다.
월리엄이 제압하고 왕위에 오름.
20년전 1075년 월리엄1세는 잉글랜드백작인 로저와 랄프반란 진압
10년전 돔즈데이북 정확한 인구파악
- 송철종이 북송 제 7대 황제가 되었다. 섭정이 된 선인성렬황후 고씨가 신법의 폐기를 선언하였다
10년후 하인리히 5세가 아버지인 하인리히 4세를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자리에서 물러나게 했다.
십자군이 지리 왕조의 수도 알 마디야를 공격하였다
20년후 여진족이 금나라를 세웠다. (아골타의 칭제)
바르셀로나 백작 - 피사 공화국 연합군이 메노르카 섬을 점령, 발레아레스 제도를 손에 넣었다.
30년후 1125년 아바스 왕조의 칼리파 알 무스타르시드가 셀주크 제국에 대항하여 거병하였다.
로타르3세 독일왕즉위
전쟁왕 알폰소 1세가 카스티야 군대를 이끌고 알안달루스를 습격하였다.
베네치아 함대가 로도스, 사모스, 레스보스 섬을 약탈하고 키오스를 정복하였다.
40년후 1135년스티븐이 잉글랜드 왕국의 왕이 되었다.
헨리 1세의 딸 마틸다가 스티븐에게 반기를 들었다.
셀주크 제국의 바그다드 지배가 끝났다.
묘청의 묘청의 난이 발발하였다. 대위국을 건국해 연호를 천개로 사용하였다.
악비의 남송 군대가 수차가 달린 배로 양요의 반란군을 패배시켰다.
50년후 1145년 고려의 문신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완성하였다.
무와히드 왕조가 자이얀 부족의 항복으로 틀렘센에,또 오랑에 입성하였다.
60년후 1155년 송나라 화의파 진희사망.교황이 잉글랜드 국왕의 아일랜드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하였다.
잉글랜드의 브리스톨이 왕립 헌장을 받았다
735년신라성덕왕 다시 김의충을 당에 하정사로 보냈는데, 2월에 부사 김영이 당에서 죽어 당으로부터 광록소경 벼슬을 추증받았다. 돌아오는 의충에 부쳐 당은 패강(浿江) 이남에 대한 신라의 영유권을 60년만에 완전히 승인했다
80년전 무비는 왕황후와 소숙비를 모두 제거하고 655년 새로운 황후로서 즉위하게 된다. 또한, 황후가 되는 과정에서 자신의 친정이 한미한 것을 탓하며 이를 반대했던 장손무기나 저수량 등의 쟁쟁한 원로 대신들을 정치 공작을 통해 모조리 죽이거나 귀양 보내며 그 정치적 두각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60년전 675년 신라와 당, 매소성 전투신라와 당이 벌인 크고 작은 싸움이 18번인데, 모두 신라가 이겨서 당병 6,047명을 죽이고 말 200필을 더 얻었다고 설명한다.
고종은 아들 이융이 피로 토하고 죽음
무후는 고종이 병으로 인해 정사를 보지 못하게 되자 본격적으로 대신 정치를 했으며, 675년엔 아예 수렴청정을 선언한다.
50년전 685년 아브드 알 말리크가 우마이야 왕조의 칼리프가 되었다.
픽트족의 군대가 노섬브리아인들을 상대로 승리하였다.
유스티니아누스 2세가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40년전 696년 거란의 이진충이 반란을 일으킨다
30년전 705년 말년에 측천무후는 병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않아 눕게 되었고 주위에서 물러나라는 압박을 받아 당시 황태자로 있었던 아들 이현(중종)에게 양위했다. 이로 인해 당나라는 다시 부활했다.
왈리드 1세가 우마이야 왕조의 칼리프가 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 2세가 불가르족과 동맹을 맺고 콘스탄티노플로 진격하였다
20년전 겐쇼 천황이 일본 44대 천황이 되었다.
우마이야 궁전이 건설되었다.
우마이야 왕조군이 레온을 점령하였다.
카롤루스 마르텔이 아우스트라시아의 궁재가 되었다.
힐페리히 2세가 프랑크 왕국의 왕이 되었다
10년전 우마이야 왕조 군대가 프랑스 부르군디 왕국의 오툉을 공격, 약탈하였다.
카롤루스 마르텔이 바이에른을 공격하였고, 전투 중 바이에른의 공작 그리모알드를 살해하였다.
20년후안녹산의 난이 발발하였다.
상경용천부가 발해의 수도가 되었다.
압바스 왕조의 칼리파 알 만수르가 개국공신 아부 무슬림을 크테시폰의 궁전으로 불러 살해하였다. 그의 시신은 티그리스 강에 버려졌다.
30년후 혜공왕즉위.충담사가 대표적인 10구체 향가인 안민가를 작곡하였다
40년후 바그레반드 평원에서 아바스 왕조군이 아바스 왕조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아르메니아군을 진압하고 아르메니아군의 지도자를 죽였다.
김은거반란
50년후 발해의 왕 문왕이 수도를 동경 용원부로 천도하였다.
코르도바의 그랜드 모스크 건설이 시작되었다.
프랑크 왕국 카롤루스 대제의 2차 이베리아 원정, 바르셀로나 북쪽의 호세스 (Roses) 일대 점령
원성왕이 신라 제 38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60년후 795년카를대제 795년 작센 족이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카를은 일찍이 충성을 맹세했던 작센족의 분리독립 기도를 비열한 반란으로 규정하고 강경하게 진압했다
375년 발람베르가 이끄는 훈족이 동고트족을 남쪽으로 몰아내다. 게르만족의 대이동이 시작되다.
375년 발렌티니아누스가 죽자 로마제국의 서방은 발렌티니아누스의 두 아들, 그라티아누스와 발렌티니아누스 2세에게로 분할되어 상속되었다
백제 근구수왕 즉위,광개토왕 탄생
소수림왕은 계속 백제와 충돌하였다. 375년에는 백제의 수곡성(水谷城)을 빼앗음
62년전 닌토쿠천황즉위(실제론120년후. 400~433년.가상의 천황.웅략기1년까지 기록미상456년)
60년전 315년 로마 시에서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이 완공되었다.
탁발선비족 대나라 건국.
50년전 제1차 니케아 공의회 : 로마 제국의 니케아에서 열린 이 공의회에서는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선고한 뒤 파문했고, 예수의 신적 본질과 성부와의 관계를 논리적으로 정립한 아타나시오스의 삼위일체론을 교리로 선포했다. 또한 니케아 신경을 채택했다.
로마 제국의 전 황제 리키니우스가 고트족과 모의해 반란을 꾀하였다는 의심을 받아 처형당하였다.
사마연이 동진 제 3대 황제가 되었다.
샤푸르 2세가 사산조 페르시아를 직접 통치하기 시작하였다.
40년전 예루살렘의 거룩한 무덤 성당이 완공되었다.
사무드라굽타가 굽타 왕조의 왕이 되었다.
30년전 345년에는 고국원왕 남소성을 전연이 빼앗아갔지만 조치하지 않았다
20년전- 전진의 초대 황제 부건이 부청의 반란을 진압하였다. 이후 부건이 사망하자 부생이 전진 2대 황제가 되었다.
전량의 장조가 전량 6대 국왕 장요령을 살해하고 7대 국왕이 되었다
10년전 사마혁이 동진 7대 황제가 되었다.
- 프로코피우스가 반란을 일으켜 자기 자신이 로마 제국의 황제임을 선포하면서 트라키아와 비티니아의 통제권을 손에 넣었다
10년후 전진 제3대 황제 부견이 장안을 함락시킨 서연의 군대를 피해 도망치다가 요장에게 살해당했다. 이후 부비가 전진 제4대 황제가 되었다
이듬해 북위 건국
20년후 테오도시우스 1세 사후 로마 제국이 동로마 제국과 서로마 제국으로 분열되었다. 이후 아르카디우스가 동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고 호노리우스가 서로마 제국의 황제가 된다.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이 패수에서 백제군을 섬멸하였다.
고트족이 그들의 지휘관인 알라리크 1세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30년후 아신왕이 죽고 전지왕이 백제 18대 국왕이 되었다.
모용덕이 죽고 모용초가 남연 제2대 황제가 되었다.
백제의 왕인이 일본에 한학을 전하였다
40년후 호우총이 만들어졌다.
50년후 발렌티니아누스 3세가 서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기독교 신학자, 철학자인 아우구스티누스가 신국을 지었다.
혁련창이 하나라 2대 황제가 되었다
60년후 435년 반달족의 지도자 가이세리크가 로마와 평화 조약을 맺었다.
보름스의 주민들이 서로마 제국의 장군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아이티우스는 훈족 군대를 동원하여 도시를 파괴하였다
눌지 나제동맹이후 역대의 왕릉을 수리하고 시조묘에 제사지내다
북위태무제 12년차 북쪽의 유연, 동쪽의 북연, 서쪽의 북량과 북하, 남쪽의 유송 등 사방의 적들을 모두 물리치고 화북을 통일하여 중국의 남북조시대를 열었던 북위 역사상 최고의 정복 군주.
불교의 삼무일종의 4대 법난 중에 자랑스러운 필두로 불린다
15년 티베리우스집권
60년전 bc46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율리우스력으로 달력을 고치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국가개조를 위한 각종 개혁을 실시하다.
50년전 주몽2년 비류국의 왕 송양이 고구려에 항복하였고, 고구려의 동명성왕은 비류국의 땅을 다물도(多勿都)라 하고 송양을 이곳의 주(主)로 임명하였다
40년전
30년전로마 제국이 노리쿰 지방을 병합하였다.
말갈이 백제의 북쪽 국경을 공격하였으나 온조왕이 군사를 이끌고 이를 격파하였다.
메종 카레가 건설되었다
20년전 부여왕 대소가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어 유리명왕에게 인질 교환을 제안하였다. 유리명왕은 부여를 두려워하여 도절태자를 인질로 보내려 했으나 도절은 이에 응하지 않았고, 인질 교환은 결렬되었다. 이에 화가 난 대소왕은 5만의 군대를 보내 고구려를 공격했으나 큰 눈이 내리는 바람에 실패하고 돌아갔다
왕봉은 죽기 전에 누이 효원황후와 조카 성제에게 왕망을 돌봐주라고 부탁하였다. 왕망은 황문랑(黃門郞), 사성교위(射聲校尉)가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당시 명사들과 그의 숙부 성도후 왕상, 효원황후 등은 모두 왕망의 행각을 성제에게 고했고 성제도 결국 왕망이 어질다고 인정했다. 영시 원년(기원전 16년), 신도후, 기도위, 광록대부, 시중으로 승진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망은 오히려 더욱 검소하게 살고 의복과 물건을 손님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명사들을 문하에 끌여들여 많은 권문세가들과 사귀었다. 그의 명성은 더욱 높아져서 높은 벼슬아치들이 앞다투어 그를 추천하였다.
10년전 서기 5년 왕망은 평제가 점점 성장하자 부담을 느끼고 그를 독살했다. 왕망은 이미 자신이 황제에 오를 수 있도록 조정과 민심을 손아귀에 넣었지만 원태후의 반대로 두 살 난 유영(劉嬰)을 황태자로 삼았다. 그
10년후 적미의 우두머리들은 한고조 유방의 손자인 유장의 후손 유분자를 추대하여 천자로 삼고는 서기 25년 9월에 이르러 장안을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경시제 유현을 살해한 적미군을 격파하여 관중을 평정하고 광무제 후한건국.
20년후 36년에는 촉 지방에서 할거하던 공손술을 토벌하여 중국을 통일한다. 통일 후 유수는 백성들을 위해 노비를 해방하고, 죄인들을 석방하고, 수리 사업을 일으키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30년후 로마의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사바리아(현재 헝가리의 솜버트헤이)를 건설하였다.
후한의 마원이 북방의 흉노, 오환을 토벌하기 위한 원정을 떠났다.
40년후 55년 네로2년차.
50년후 전해 신라의 구양성을 공격하였으나 신라의 탈해 이사금이 기병 2천명을 보내는 바람에 졌다. 그후 66년 다시 와산성을 빼앗고 수비병 2백을 주둔시켰으나 신라에게 곧 다시 빼앗겼다
로마 황제 네로를 암살하는 계획이었던 피소의 음모가 발각되어, 세네카, 루카누스를 포함한 이 음모에 연루된 이들이 처형당하였다.
60년후 장제가 후한 제 3대 황제가 됨
다루왕 75년 음력 10월에 또 신라의 와산성을 공격하여 함락하였다. 그러나 76년 음력 9월에 신라가 군사를 보내는 바람에 와산성을 다시 빼앗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