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주간 특별새벽기도회(십자가의 회복) 2일차 - 고난을 넘어 열방으로 (박상은 원장-안양샘병원)
* 설교자의 설교내용을 필자의 묵상과 결부하여 재구성한 것으로, 실제 내용과 의도와는 다를 수 있습니다(개인적인 간증부분은 문맥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요약되었습니다).
1 수 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린지라
2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3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4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
5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마가복음 2:1-5)
우리 인생의 여정에는 chronos와 kairos가 있습니다. 전자의 평범한 일상 가운데 예기치 않게 찾아오는 후자의 kairos가, 각자의 인생에 적어도 두 번씩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 kairos의 순간은 예수님을 영접하게 된 시점입니다. 이를 기점으로 이전의 삶과 이후의 삶을 명확하게 갈라놓았던 잊지 못할 순간으로 우리는 기억합니다.
두 번째 kairos의 순간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실수하거나 범죄하였음을 깨달았을 때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를 3번 부인한 이후, 그때의 순간을 잊지 못하고, 이후의 삶을 전부 예수를 위해 바쳤습니다. 다윗은 밧세바를 범한 이후 이를 감추려다 저지른 더 큰 잘못을 뒤늦게 뉘우치고 얼마나 처절하게 자신의 잘못을 하나님께 고하고 정결케 됨을 간구하였는지 모릅니다(註-시편 51 참고).
저에게도 그러한 두 번째 kairos의 순간이 있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잘 아시는 아프간 피랍 사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2007년 여름). 당시 샘물교회는 이와 같이 건강하고 역동적인 교회가 어디에 있나 라는 자부심으로 충만해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왜 하필 우리 교회에 이런 시련을 허락하신 것일까 강한 의문이 들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늘같이 치솟았던 우리 교회의 교만과 자부심이 우리의 죄과였음을 깨닫게 되고 나서는 하나님 앞에 무릎꿇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2007년 어느 새벽, 2사람의 죽음 뒤로 무사히 남은 21명의 아프간 피랍자들이 인천국제공항으로 돌아왔습니다. 새벽임에도 많은 사람이 운집해 있어 이들을 환영하는 인파인 줄 알았지만 환영의 박수 대신 날계란이 날아드는 참상과 비난의 여론을 귀환자들은 목도하여야만 했습니다. 매국노라는 낙인이 찍힌 그들의 표정은 수심 그 자체였습니다. 무사히 돌아온 사람들을 반갑게 맞아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가족들은 오열하고 무사함을 확인한 뒤의 안도함으로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울음조차도 그 슬픔을 표현할 수 없는 이들이 있었으니, 그곳에서 피살당한 배형규 목사님과 심성민 형제의 가족들이었습니다. 당시 귀환일정에 맞추어 저희 병원에서 전인치유병동센터를 개원하기로 하였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첫 환자들은 귀환한 21명의 지체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피랍지에서 50여일 동안 토굴 등에 갇히며 겪은 상처와 아픔을 씻어내고 다행히 지금은 일상으로 돌아가 삶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배형규 목사님의 서재에는 ‘온전한 헌신은 마지막 것을 드리는 것이다’라는 글귀가 적힌 액자가 있었습니다. 평소 가졌던 그 생각대로, 그곳에서 흘린 순교의 피로 온전한 헌신을 증명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순교한 토마스 선교사를 파송한 영국에서는 당시의 선교가 너무 무모했고 실패한 선교였다고 비난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한국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그 누가 토마스 선교사의 죽음이 헛된 것이고 실패한 선교였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아프가니스탄에서 흘린 두 사람의 순교의 피가 결코 헛된 것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늘 읽은 중풍병자 이야기를 통해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함께 나누기 원합니다. 생명의 복음이 없던 130여 년 전 우리나라에는 중풍병자의 네 친구가 있었습니다. 영국, 미국, 캐나다, 호주입니다. 이곳에서 머나먼 조선 땅으로 복음을 들고 온 선교사들이 중풍병자와도 같은 우리나라를 예수님께로 인도해 주었습니다. 이제 그런 축복을 받은 우리나라가 현재 중풍병자와도 같은 아프가니스탄, 남부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해 주어야 할 친구의 위치에 서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해 주려고 하기보다 우리는 그저 그 나라를 예수님께로 인도하기만 하면, 예수님께서 치료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남부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 중 말라위와 짐바브웨는 지금도 100만 명 이상의 에이즈 고아들이 돌봄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의료인의 숫자는 턱없이 부족하고, 시설의 열악함으로 허망하게 생명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가장 가까우면서도 갈 수 없는 북한 땅의 의료사정도 매한가지입니다.
이제는 선교지가 따로 없습니다. 예수를 품은 자라면 누구나 선교자적인 사명을 감당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실제로 타문화권에 복음과 자신이 가진 것을 헌신하며 파송되는 선교사와 대비되어 일상의 평범한 삶에서 그리스도적인 가치를 드러내며 살아가는 이들을 ‘선교인’이라는 명칭이 사용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선교인으로서 가져야 할 원칙들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는 우리 각자는 세상으로 보냄받았다는 (목적)의식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성공한다고 하는 것이 세상적인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내신 목적대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성공입니다. 그렇기에 다른 사람들이 어떠한 삶을 살고 있는지와 자신의 모습을 비교하며 살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평가받게 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Coram Deo). 우리는 비교의식에 사로잡혀 목적지가 다른 사람과 속도경쟁을 하다가 자신이 가야 할 목적지가 아닌 다른 사람의 목적지를 향하는 잘못을 범할 때가 많습니다. 나의 삶의 궁극적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 누구로부터 자신의 삶이 평가받게 될 것인지를 항상 놓치지 않아야겠습니다.
그 다음은 우선순위를 올바로 세우는 삶입니다. 응급실에서의 우선순위를 놓치다가 사람의 생명을 놓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골절된 뼈가 동맥을 찔러 피가 터져나오는 것을 막느라 정작 기도가 막혀서 질식사하게 될 상황을 보지 못한 채 허망하게 숨을 거둔 사례가 있었습니다. 응급실은 ABC라는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Air way(기도 확보), Breathing(호흡 확인), Curculation(혈액 순환)이 그것입니다. 눈앞에 솟아오르는 피에 정신을 쏟느라 정작 사람의 목숨과도 직결되는 ABC 우선순위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사례에서 우리는 급한 것만 하다가 정작 중요하고 우선적으로 하여야 할 일들은 못하고 세상을 떠나는 것은 아닌가 돌아보게 됩니다. 죽음 앞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삶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돌아보게 되는 후회는 하지 않는 삶을 살도록 합시다.
영원한 것을 위해 영원하지 않을 것을 과감하게 허비하며 사는 삶이 선교인의 삶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 그분의 말씀을 위해, 한 영혼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시간과 정력과 재물과 같은 썩어질 것들을 낭비하며 사는 그러한 삶이 우리 각자에게는 어떠한 것인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