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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정의 수필세계
- 풍성한 의식의 흐름, 조용한 열정의 파동 -
권대근
문학평론가, 대신대학원대 문학언어치료학 교수
수필의 핵심은 원시의 정, 바로 수필의 향기다. 아무리 아름다운 꽃이라도 향기가 없으면 생명이 없는 조화나 다름없다. 꽃도 향기를 갖고 있고, 사람도 그 나름의 향기를 낸다. 수필에 있어서 문장이 매력적 요소라면, 향기는 절대적 요소다. 이 논리를 전제로 할 때, 박미정은 풍성한 의식과 조용한 열정으로 우리 시대가 잃어버린 인정을 수필 속에서 두레박으로 길어 올리고 있는 사람이다. 몸 속에 해맑은 수액이 흐르고 있는 작가다. 박미정은 신라대 사회교육원 문예창작 전임교수로 이십여 년 전 <한맥문학>으로 등단하여, 국제펜클럽, 한국문인협회, 부산시인협회, 부산여성문학인회 등에서 활동하며, 1996년 시집 <밤에 쓰는 시>, 2002년 시집 <아기발가락 끝에 찾아온 손님>, 2005년 시집 <지하철 이야기>(도서출판 말씀), 2007년 시집 <세상이 나에게>(도서출판 말씀)를 펴낸 바 있다. 현재 부산문인협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 그녀의 수필집은 자연의 빛깔과 인정의 향기가 서정이 되어 내면을 촉촉이 적시는 정감의 세계를 향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사소한 것의 아름다움과 인연의 소중함을, 모성과 그리움을 청량한 눈과 마음으로 그리고 있어 감동을 준다. 박미정의 수필은 한마디로 그리움이 있고, 인정이 있고, 구원이 있는 공간에서 출발한다. 작가의 시선은 언제나 자신의 내면에 머문다. 주로 자신의 심중에서 여울치는 물결의 무늬를 그려내는 일에 몰두한다. 그녀의 문학적 그림자 형상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견고한 인성'이다. 작가적 현실 세계가 삶의 기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삶'이라는 보편성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향으로 키를 틀고 있기 때문에 그녀의 작품은 문학적 향기를 발한다고 볼 수 있다.
좋은 수필이란 모든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가치 있는 체험과 세련된 정신세계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글이라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시적 발상으로 산문적 형상화를 이룬 글이다. 모든 수필의 가치 척도는 여기서 출발한다. ‘공감할 수 있는’의 성질은 문학의 보편성을, 가치 있는 체험은 구체성을, 세련된 정신세계는 날선 인식을 의미한다. 그리고 문학적인 형상화는 활어로 디자인된 감각적 표현을 뜻한다. 아마도 문학적 성취를 이룬 글이라면 이런 기준을 충족시켜야 마땅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삶의 창조적 내포를 담고 있는 참신한 의식이 작품 속에 넘실거려야 한다는 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박미정의 <해무를 벗기다>는 이런 준거를 충족시키고 있는 글들이라고 하겠다. 그녀의 글은 그녀가 살아가면서 남긴 흔적과 체온이며, 그것이 정서화되어 한 편의 드라마처럼 리얼하게 펼쳐진 삶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소설적인 감동을 주며, 언제까지나 사라지지 않을 연운을 남기게 될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보면 박미정은 삭막한 도시적 기계의 틀 속에서 인간성의 이해와 인간애를 추구하는 작가라 할 수 있다. 이 점은 작품을 직접 살펴보면 보다 명확히 알 수 있다. 삶의 문제를 마주한 자아 성찰적 작가가 시간의 길에서 만난 문학혼을 어떻게 수놓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수필의 숲에서 만난 생의 연금술이 지닌 힘이 어떨지 사뭇 궁금하다.
1. 추억의 영토에 핀 진분홍빛 향기
모든 예술이 그러하겠지만 문학이라고 하는 것에서 없어서는 안 될 정서가 있다면, 그 것은 ‘외로움’이라는 것이다. 인간에게 외로움과 허전함이 없다면 언제나 만족스럽고 꽉 있다는 느낌 때문에 행복할 수 있을런지는 모른다. 그 행복 속에서 인간은 지향하고자 하는 욕망이나 욕심이 없어지고 편안해질 것이며 평화로와질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인간은 이러한 만족감을 오래 누리고 있지를 못한다. 편안하다는 느낌이 오래 지속될 때 우리는 심심해지기 시작한다. 편안함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끝으로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그것 자체가 힘들고 고통스럽다는 정서를 대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작가를 위요한 습관화된 환경이 박미정 문학의 씨앗을 잉태했다고 하겠다.
수필은 자아와 그리움을 찾아 나서는 작업이다. 현재는 과거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여기서 자신의 과거를 잃고 현재에 묻힐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회상을 하는 가운데서 자신을 찾아 바로 세우는 일이 바로 수필적 생활이다. 포근하고 생명의 기운으로 가득 찬 의식의 산실이었던 유년기 속에 있는 흑백 사진처럼 아련히 남아있는 인정을 오늘날의 건조한 풍요와 대비해 촉촉한 모습으로 구체화한다. 대단한 필력이다. 다소 안정된 공간에서 박미정이 마주하는 수필적 공간은 유칠십년대의 애환을 담은 애련한 사진으로 인식된다. 하늘을 안고 들어온 햇살이 모인 과거의 모습이 그리움으로 다가오는 것은 추억은 언제나 아름답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막내딸이 씌워 준 사각모가 어울리던 한 해를 보내시고 다음 해 이른 봄날에 돌아가셨다. 나는 마지막 이별을 하는 곳에서 지금껏 본 꽃신 중에서 제일 예쁜 꽃신을 신으신 어머니를 보았다. 울음을 멈춰야 한다기에 멈췄지만 아마도 아름다운 꽃신에 놀라서 울음을 그쳤는지 모른다. 단정하신 어머니에게 너무 잘 어울리던 진분홍빛 꽃신을 신으시고, 계시는 그 세상은 어디쯤인지 알 수 없지만 봄마다 철쭉꽃 나들이를 즐기셨으면 좋겠다.
<철쭉꽃 이야기>에서 -
그녀는 시린 마음으로 한없이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인정스런 작가다. 고독한 세월의 그늘에서 작가의 어머니는 막내딸이 씌워준 사각모를 써보고 저 먼 곳으로 떠났다. 박미정의 문학세계를 이루는 가장 두드러진 그림자 형상은 존재에 대한 짙은 외로움과 가시지 않을 짙은 향기다. 모든 사람의 가슴 속에 공통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유독 그녀에게는 강하다. 그러기에 그녀는 천국에서도 어머니가 철쭉꽃 나들이를 즐기기를 원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자기를 표현함으로써 자기 존재를 드러낸다. 그녀의 대다수 작품들은 과거 회고적 그리움으로 생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녀야말로 눈물의 습기를 통해 황홀한 기적을 만나는 작가다. 수필을 씀에 있어서, 박미정은 수필이 실존적 불안을 표현하든, 소시민적 생활의 애환을 그리든, 병든 사회에의 저항과 분노를 나타내든 간에, ‘문학성’ 속에 그 대상을 용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각모가 어울리던 한 해’에는 벼랑 같이 느껴질 정도의 안타까움이 녹아 든 어구를 적재적소에 놓을 때까지 그녀는 감각의 촉수를 갈고 닦았으리라 본다.
문학성이란 말이 상당히 막연한 것 같지만, 따지고 보면 주제와 구성 그리고 표현의 공감도를 의미한다. 여기서 ‘울음을 멈춰야 한다기에 멈췄지만 아마도 아름다운 꽃신에 놀라서 울음을 그쳤는지 모른다.’라는 표현은 그녀의 수필가적 문재를 보여주는 공감의 지름길이라 할 수 있다. 어떻든 수필은 공감의 문학이기 때문에 멋과 맛뿐만 아니라 반드시 향기를 지녀야 한다. 그 향기는 솔직함에서 나오지 않는가. 또한 작품과 작가는 일치해야 한다. 수필적 삶의 진실이 그대로 자신의 수필 속에 투영될 때, 향기가 나오기 때문이다. ‘나는 마지막 이별을 하는 곳에서 지금껏 본 꽃신 중에서 제일 예쁜 꽃신을 신으신 어머니를 보았다.’는 대목은 박미정에 있어서 삶의 진실과 수필의 진실이 같음을 증명한다. 일상을 조탁하는 정서의 힘이 멋을 한껏 우려낸 결과라 하겠다. 수필 <서문 고갯길의 추억>을 보면, 그녀는 어둠 속에서도 환히 피어나는 피안의 세계를 가진 작가임을 알 수 있다.
서문고갯길은 나에게 아롱다롱 추억을 많이 안겼다. 나를 위한 이벤트가 여기에서 만들어졌다고 해야 할까. 삶에 대한 물음을 위해 때때로 이 길을 걷는다. 오선지의 선처럼 반듯해진 길은 낯설지만 불편하지는 않다. 높은음자리표의 아름다운 곡선에서 살아나오는 추억의 변주곡이 여기에 있다.
- <서문 고갯길의 추억>에서 -
<서문 고갯길의 추억>은 그녀가 살아왔던 시간들 중에서도 가장 짙은 ‘아롱다롱’ 추억을 동반하고 있는 작품이다. 아름다운 곡선의 향기가 서려 있던 시간들에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 수필의 특성 중 하나가 자조적 성격이다. 수필은 자기 자신의 내면을 보는 거와 같다. 수필 <서문 고갯길의 추억>에서 작가는 아름다웠던 추억의 변주곡에 초점을 둔다. 그러면서 평온했던 자신의 처지를 동일선상에 놓는다. ‘서문고갯길을 통영사투리로 서문까구막이라고 불렀다. 까꾸막은 언덕배기라는 말이다. 그 길을 하루에 두 번씩이나 왕복을 하다 보니 눈 감고 걸어도 어디에 돌부리가 있는지 없는지 훤하다. 길은 양면성을 보였다. 바쁜 등굣길은 숨차게 하고 하굣길은 숨쉬기를 가볍게 했다. 나의 변화무쌍한 숨을 고르는 것은 악기소리였다. 트럼펫 부는 소리와 피아도 건반의 실루엣은 악기 소리로 스크럼을 짜고 있는 아름다운 길이었다. 금관악기의 매력을 만나고 훗날 소녀의 기도, 엘리제를 위하여를 치게 하는 열정을 내게 준 것이 이 길이었다.’고 고백하는 작가는 이 수필에서 유년의 추억과 자신의 삶을 하나의 끈으로 묶는다.그 운명의 사슬이나 속성에 탐닉하며 편안하고 행복한 그리움의 정서를 드러낸다.
추억이 물결치는 수필은 <추억의 뱃고동 소리>다. ‘언제부터 어쩌다가 나는 이 소리를 잊고 살았단 말인가.’라는 작가의 독백은 분주한 현대적 삶 속의 반성적 성찰을 표백한다. ‘항구를 떠나는 배가 돌아올 것을 기약하는 소리여도 좋고 험한 파도 속에서 살아 돌아온 생명을 알리는 소리여도 좋다. 오늘은 추억 속의 그리움으로 이 소리를 듣고 싶다.’는 작가는 뱃고동에다 인간사를 투영하고, 자신의 삶까지도 포갠다. 바다의 딸로 태어난 것을 숙명으로 받아드리는 작가이기에 투사를 통해 짙은 공감의 근원을 여운에서 발견한다. 그리고 유년의 삶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투영한다. 뱃고동은 자기 존재를 스스로의 눈으로 응시하기 위한 수단이 된다. 따라서 이 수필은 자기 응시의 경로를 통해 견뎌온 삶의 향취를 풍긴다고 하겠다. 뱃고동의 여운과 유년의 삶을 연결시켜 정서적으로 풀어낸 것은 박미정 작가의 탁월한 문학적 재능을 뒷받침한다고 하겠다. 이런 이미지의 결합이 문학적 성과를 거두는 이유는 뭘까. 추억이라는 벼랑 끝 궤적을 연상케 하면서 바다를 낀 통영에서 태어난 까닭으로 부산 부두의 뱃고동소리를 들으며 성장 과정에서 놓쳤던 유년의 추억을 불러내어 그녀는 치유를 시도하기 때문이다. ‘뱃고동소리가 울리면 가던 길을 멈추고 여운이 사라지도록 숨을 고르며 듣기도 했다.’는 작가는 흔들림 없이 지켜왔던 자신의 삶을 뱃고동 소리를 통해 길어 올리고 있어 감동을 준다.
부산부두의 국제선터미널 앞을 지나는데 부-웅 우는 뱃고동소리가 가슴으로 밀려온다. 뱃고동 소리다. 갓길에다 차를 세웠다. 언제부터 어쩌다가 나는 이 소리를 잊고 살았단 말인가. 여운은 꼬리를 물고 순식간에 온 몸 속에서 소리의 진동을 재생시키고 있다. 항구를 떠나는 배가 돌아올 것을 기약하는 소리여도 좋고 험한 파도 속에서 살아 돌아온 생명을 알리는 소리여도 좋다. 오늘은 추억 속의 그리움으로 이 소리를 듣고 싶다.
- <추억의 뱃고동소리>에서 -
모든 것이 구족된 환경에서 문학은 설 자리를 잃는 법이다. 욕망이 좌절되고 꿈이 상처를 입을 때, 사람들의 마음에 정서가 생겨나는 것이다. 작가가 풀어내고 있는 이야기보따리는 그리움의 범벅인 것이다. ‘뱃고동소리는 영원한 추억의 소리다. 독서를 하게 했고, 일기를 빠지지 않고 쓰게 했으며, 우울한 마음을 쓰다듬어 주기도 했다. 바닷가에 살면 날이면 날마다 들을 것 같지만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는 게 그 소리다. 빌딩의 골목을 빠져나와 향수에 젖게 한 뱃고동소리의 여운을 가슴에 안고 시동을 건다. 너에게 전율한 이야기를 한 편의 수필에 옮겨 간직하고 싶다.’는 소망이 승화되어 한 편의 멋진 수필이 되었다. 작가가 ‘뱃고동소리가 시동을 걸어 주지 않았다면 쓸 건더기가 없어서 백지를 낼 뻔했다.’고 고백하는 것을 보면, 뱃고동 소리는 오늘날 박미정을 작가로 만든 씨앗이 분명한 것 같다. 작가가 탄 배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서있던 어머니의 모습이 아직도 그녀에게는 생생하다. ‘공주섬이 보이지 않고 남망산의 자락이 멀어질 때까지 어머니를 한동안 보고 섰다. 어머니가 고향을 지키는 등대처럼 보였다.는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사모곡이 되어 작가의 가슴에 남아 있다가, 박미정으로 하여금 그리움의 정서로 수필을 쓰도록 요구한다. 무릇 작가는 무지개를 쫓아가다가 놓쳐버린 소년의 안타까움을 지녀야 한다. 뱃고동소리의 여운을 문학의 씨앗으로 의미화시킨 수법이 대단해 보인다.
어느덧 장티푸스라는 고비를 다 넘기고 살았다싶으니 또 한 고비가 기다리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몽땅 빠져서 모자를 쓰고 다녀야 했다. 머리카락이 듬성듬성 나서 내가 보아도 사내아이 같았다. 아플 때도 머리카락이 빠지니까 모자를 쓰고 있어야 했다. 갑갑증이 났다. 모자를 안 쓰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혼이 나기도 했다. 5학년 때는 거의 봄에는 힘이 없어서 학교를 다니지 못했고 등교할 때는 꼭 모자를 쓰고나가야 했다. 친구들도 선생님도 귀엽다는 말로 ‘머서마’라고 부른다고 했지만 집에 오면 울기도 했다. 거울 앞에서 이 머리카락이 언제 다 자랄까하는 고민에 빠져서 우울한 날도 많았다. 세월은 그때처럼 머리카락 빠지듯이 흘러가 버렸다.
<꽹과리>에서 -
이 작품은 작가가 병마로 고통스러웠던 순간순간을 추억하는 글이다. 장티푸스에 걸려 위기의 순간을 맞은 모습을 담담하게 그려내면서 작가는 외모에 치중하는 십대의 솔직한 심정이 어떠한가를 보여주었다. 동시에 우정이 희미해져 가는 시대에 친구로서 어떻게 하는 것이 최선을 다하는 것인지를 당시의 영상을 통해 보여주고자 한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인간이 겪어야 하는 심리적 불안과 애환을 어찌 위 수필보다 더 절절하게 표현할 수 있겠는가. 절제된 감정으로 비통하기 그지없는 슬픔을 잘 다스려 서글픈 정조를 아프게 터치하고 있는 부분이 공감을 자아낸다. 인간적 향기가 묻어나는 글이라 할 수 있다. 모자를 쓰고 다녔기 때문에 머스마라고 부르는 소리에 울기도 했던 장티푸스에 대한 상념은 인간사의 굴곡을 잘 나타내고 있다. ‘세월은 그때처럼 머리카락 빠지듯이 흘러가 버렸다.’는 결말부 진술은 신변 소재가 문학수필로 승화된 이유다.
병마로 고통스러웠던 자신의 모습을 오래 지켜봐야 했던 박미정에게 허약함이 아픔으로 각인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어느덧 장티푸스라는 고비를 다 넘기고 살았다싶으니 또 한 고비가 기다리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몽땅 빠져서 모자를 쓰고 다녀야 했다..‘는 표현은 폭발적인 정서적 환기를 불러일으킨다. 서러운 심사를 간결한 문학어로 처리한 대목에서 작가적 역량을 엿볼 수 있다. ’사는 동안 우리는 어려운 상황을 만난다. 나도 친구처럼 누군가에게 꽹과리 쳐 주고 싶다. 우리 둘은 오래전부터 닮은 게 많다. 그때 신나게 쳐 주던 꽹과리를 소리를 기억한다. 나도 친구처럼 꽹과리를 잘 칠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산다는 게 무언가. 슬픔에 빠진 이웃을, 친구를 위해 회복을 돕는 꽹과리를 쳐 주는 일 아닌가. 꽹과리 소리가 울린다. 친구가 불현듯 보고 싶다.‘는 결말부 의미화 진술은 스스로도 주체할 수 없는 문학적 광기가 느껴지게 하는 대목이다.’ 여기서 우리는 현상의 추상성을 개념으로 설명하기보다는 구체화로 묘사하려고 노력하는 작가정신을 만날 수 있다. 언어의 디자이너를 연상케 할 정도로 박미정의 글은 실감과 함께 상상력을 주면서 손맛을 느끼게 한다. 격정의 순간에도 감정의 절제를 통해 품격을 갖추려고 한 것도 좋았다. 그녀는 우리의 몸과 마음에 신선한 바람을 채워주는 작가인 것이다.
2. 존재의 근원을 연 사모곡의 숨결
박미정은 영롱한 빛살들로 가득 찬 그리움의 세계를 가진 작가다. 박미정 문학을 이루는 또 하나의 견고한 줄기는 근원에 대한 본능적 편향성, 어머니로의 지향성이다. 그 그리움의 귀착지는 어장을 지켜낸 어머니다. 작품 하나하나에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정서가 없는 게 없다. 한마디로 절절한 사모곡이다. 이는 그만의 독특한 정서라기보다 모든 사람의 가슴 속에 공통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 수필들이 존재의 근원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직조되고 있다. 어떤 경우든 삶을 윤택하게 하는 것은 인간의 순수 지극한 정성, 모정이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이 사실은 작품 <아침수다> 가 입증한다. 겉에서 보면 자매간의 소통이 화소가 된 것 같은 인상이 강한 작품이나 주제의식은 모정에 있다. 사람들은 물질적 변혁만 이루면 인간이 안고 있는 모든 아픔이 허물을 벗고 한 순간에 환한 모습의 꽃으로 피어날지 모른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눈에 드러나는 현란함은 한때 사람들을 현혹시킬 수는 있지만, 그 자체가 완전한 행복의 실체는 아니다. 물질만으로는 생명을 틔울 수 없고, 진정한 가치를 창조하기 위해서는 무한대의 ‘정’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박미정의 수필적 정서는 이러한 작가를 최고로 여기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에서 비롯된 인간적 향기라 하겠다.
스스로 관리하는 ‘어머니의 아흔’은 나에게 대단하다. 자신이 개발한 요체조를 날마다 하시고 사소한 것에 화내지 않으시고 남의 말이나 흉을 보지 않으신다. 우리가 남의 말을 하면 그렇게 할 일이 없느냐고 꾸지람을 하신다. 신문을 손에서 놓지 않으시고, 유머감각도 뛰어나서 이야기가 재미있다. 문학과 역사의 해박한 지식을 들으면 스스로 메모지를 챙기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친정에 가는 속마음은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싶은 마음이 앞설 때가 많다. “아흔인데 이 만큼 잘 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내 엄지손가락 두 개를 세워 보이면 박장대소하시는 귀여운 아흔의 어머니다.
- <아침수다>에서 -
인간에게 소중한 것은 자신의 삶이 갖는 의미에서 스스로 만족하는 것이다. 그 충족의 기쁨 없이 삶은 무의미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단지 살아있는 것만으로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엄숙하게 운명을 받아들이려는 마음씀에 기인하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무엇에 의지해 자기를 지탱할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다. 적막이라도 따뜻하다면, 차라리 괜찮은 것이다. 이 역설의 낯설게 하기가 주는 미학은 그녀를 무한한 포용성의 얼굴을 가진 작가로 부각시킨다. 삶을 원망하고 현실에 불만을 토로한다고 해서 삶의 질이 어느 한 순간에 돌변하여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 수필은 한 가족이 아침 수다를 통해 소통함으로써 행복을 찾아가는 상황 제시를 통해 우리 시대 어머니의 상을 다시 반추한다. 사랑하는 한 사람의 일상사에 담긴 추억이 긍정적이며 낙관적인 인생관과 버물어져 탄생한 것이어서 공감을 준다. 일상사의 사소함에서 출발된 행복들이 노정된 이 글은 인간적 삶의 소중한 경험이요, 수필가는 그 경험의 전파자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잔잔한 감동을 만들어낼 수 있는 이 끈끈한 혈연의 연대라는 것을 이 수필은 말해준다. 순수한 연모와 향기 나는 모성애보다 더 가치롭고 아름다운 것이 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아침 수다에는어머니의 등장이 대부분이다. 어쩌면 우리들의 수다는 어머니가 만들어 준 무대일지도 모른다. 당신의 일상이 맑고 흐림에 따라 우리들의 수다도 맑고 흐리고 비가 내린다.’는 멘트가 살짝 가슴을 찌르면서, 여운의 맛을 준다. 이런 맛이 있어 문학성이 생겨나고 공감도가 형성되는 게 아닐까.
친정어머니는 내가 친정에 가면 시인이 온다고 나의 시를 낭송해 주신다. 몇 날 며칠을 외웠다고 하시면서 앵-콜을 하라고 주문하시고는 또 한 편의 시를 낭송하시면 우리는 박수를 아끼지 않고 어머니는 박수의 여운을 다 즐기신다. 여든 여덟이 되던 해 어느 날, 자기가 일이 하기 싫은 이상한 병에 걸렸다면서 손수 지으시던 밥 짓기를 서서히 그만두셨다. 깔끔하셔서 거의 남의 손을 빌리지 않으셨는데 정말 하기 싫으셨던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당신이 하시고자 하는 대로 보기로 했다. 어머니는 멋이 있으신 분이다. 일흔이 되는 해에 대만과 일본을 우리 어머님과 함께 여행했다. 사돈과의 여행이었다. 일본 가이드는 꽤 젊고 자기 일에 자부심이 강한 사람이었는데 어머니는 그 사람과 많은 이야기를 하셨다. 역사에 관해서도 일본말로 거침없이 했다. 가이드는 자기가 만난 사람 중에 가장 품격 있는 일본말을 구사했다고 했다. 1988년 가을이었으니까, 해외여행을 개방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의 일이다.
- <그래, 니는 할끼다>에서 -
이 수필의 핵심은 자신이 선물한 시화「아흔의 물보라」를 떼서 안 보이는 곳에 두라고 한 어머니를 달랠 해법을 찾는 가운데에 있다. ‘아흔’이 주는 숫자에 눈물보다 끈적한 모정의 향기와 그리움의 미학이 펼쳐져 있다. 모성과 그리움의 미학을 주제로 하는 수필은 현대사회의 특성상 여성 수필에서 필연적으로 자주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친정어머니는 작가가 친정에 가면 시인이 온다고 딸의 시를 낭송한다. 자식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자식에 대한 기대와 자부심은 어른들의 존재이유다. 자녀에게 주는 일종의 아름다운 격려다. 그것은 새로운 자기 탐색을 위해서도 보람 있는 일이지만 작가적 삶의 영토 확장에도 바람직한 일이다. 또한 그것은 얽매인 일상의 생활에서 새로운 창조의 기쁨을 누리는 희열이라고도 할 수 있다. 여기에는 필시 모성의 원리가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특히 모성 체험과 같은 자녀와의 관계성은 여성의 도덕적 인식을 구성하는 요체다. 여성에게는 무조건적이고 희생적인 모성성을 요구하는 어머니라는 위치가 가장 확실하게 그녀에게 존재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여기서의 모성 이데올로기는 여성의 위치는 가정이며 여성의 임무는 가족 구성원을 돌보고 그들에게 정서적 안정을 제공하는 사회적 통념을 의미한다. 작가는 가이드의 말을 빌려, 어머니의 일본어 실력이 보통이 아님을 전한다. 문학은 간접화의 원리에 의해 문학성이 생성되는 것이다. 모정의 원리가 뜨겁게 솟구치는 대목이다.
어머니는 시간이 날 적마다 장독을 닦으셨다. 장독은 닦을수록 반짝거려서 윤기가 자르르 흘렀다. 내가 짙은 고동색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 때 윤기 흐르던 장독에 반한 까닭이다. 나는 장독 안이 항상 궁금했지만 건드리다가 깨기라도 할까봐 아예 장독대에 올라갈 엄두도 내지 않았다. 어머니는 장날에 저자를 봐 오시면 먹을거리는 곧장 장독에 보관했다. 내 마음대로 꺼내지 못하고 어머니나 언니가 꺼내주면 먹을 수 있었는데 웬일인지 홍시는 끝도 없이 나왔다.
<장독대>에서-
<장독대>라는 작품은 자식을 향한 부모의 정, 부모를 향한 자식의 정이 어떠한가를 교차적으로 제시해주는 수필이다. 현대인들은 자식들에게 능력되면 대학까지 보내주고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불편 없이 살 수 있게 해주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부모의 도리를 다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것도 돈이 있고 여유가 있는 부모만이 베풀 수 있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물질적인 도움이 아니다. 아무리 황금만능주의 사회라 하더라도 부모와 자식 간은 물질이 전부일 수 없다. 박미정은 이런 진리를 ‘장독대’라는 제재를 통해 잘 보여준다. ‘어머니는장날에 저자를 봐 오시면 먹을거리는 곧장 장독에 보관했다. 내 마음대로 꺼내지 못하고 어머니나 언니가 꺼내주면 먹을 수 있었는데 웬일인지 홍시는 끝도 없이 나왔다.’는 문구는 모정의 무한한 신비함이다. 어머니와 자식간에 오고가는 사랑의 화음이 감동을 준다. 장독대의 상징성에 뭉클한 감동이 드는 것은 모녀지간의 애정이 그만큼 절대적이며, 애틋하고 간절하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서 혈연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주고자 한다. 부모와 자식간의 정이 예전 같지 않은 요즘이라 이런 글이 더욱 가슴에 와닿는다.
박미정 수필세계가 보여주는 또 다른 한 모습에는 모성의 따스함이 스며나고 있으며, 진솔한 고백이 반성적 성찰의 원리로 승화되어 순진무구한 인정의 미학이 구축되어 있다. 수필 문학이 지닌 특징 중의 하나는 개인적 체험을 보여주는 데 있어서 가공하지 않고 사실을 그대로 노출시킨다는 점이다. 독자로부터 공감을 얻게 되는 것은 그 소재가 특별해서라기보다 작가의 진솔함이 인정에 뿌리내려 있어서일 경우가 많다. 박미정 수필의 최대 강점은 체험의 진실성이요, 진한 모성 원리의 표백에 있다. 이것이 독자로부터 공감을 얻게 할 뿐만 아니라 수필문학으로서의 가치와 문학성을 담보해 주는 것이다.
3. 식물성의 발현과 긍정미학의 추구
박미정 수필의 세 번째 큰 물줄기는 향토서정과 휴머니즘의 추구라는 사상성으로 집약될 수 있다. 고향의 추억을 통해 보편적인 것에 도달하는 것이 박미정 문학의 본령이다. 인간에게는 본능적으로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있다. 이와 함께 인간에게는 본능적으로 과거에 대한 추억이 흐르고 있는 것이다. 귀소성이란 인간으로서 어쩔 수 없는 본능적 속성이다. 그런데 현대에 와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태어나고 자라던, 또는 오랫동안 살아오던 고향에서 계속 살지 못하고 고향을 떠나서 살고 있다. 특히 도시 문명의 확산과 산업 사회 진입 이후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 살게 되었다. 작가는 찬란한 유년시절을 고향에서 보내고 지금은 결혼을 해서 부산에서 살고 있다.
어장을 접은 지 십오 년이 되었다. 오늘 새한테 눈총을 주려고 새벽부터 설친 것은 내 실수이나 새로 인하여 잊었던 꿈을 찾았다. 나는 아직 꿈을 꿀 수 있다. 대박이다. 이제부터 새꿈을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 그물과 함께 쓸려가 버린 사라진 꿈을 되찾아 준 쩌렁새가 날아다니는 허공에는 새소리가 널린다. 쩌렁, 쩌렁 하늘이 울리는 걸 보니 꽤 더울 모양이다. 앞 산 끝보다 높이 날았다가 다가와서 소리 짖는 짓이 재롱스럽다.
살아간다는 것은 늘 새로움과 만나는 것이리라. 일상이 새로움인데 새로움이 새삼스럽게 발견된다고 생각되는 것은 왜일까. 어제도 그제도 쩌렁거렸을 새가 오늘 다가왔다. 쩌렁새의 비상을 보며 나의 비상을 꿈꾼다면 너무 주술에 걸렸다고 할 것 같지만 그래도 좋다. 오늘은 쩌렁새로 인하여 꿈을 발견한 날이다.
- <쩌렁새>에서 -
박미정은 비상을 꿈꾸는 작가다. 쩌렁새의 그 작은 몸짓과 큰 울음소리에 귀 기울이고 눈여기는 작가다. 수필 속에는 식물성적인 고향 노래의 향연이 다채롭다. ‘나는 새를 꿈에 보면 좋은 일이 생겼다. 큰 손자가 태어날 때도 새를 보았고, 어장을 할 때도 꿈속에서 내가 새처럼 날아다니면 재수가 있었다. 자주 꾸지는 않았지만 용왕제를 지낼 날을 잡고 나면 꿀 때가 있었다. 내가 날아다닌 꿈을 꾼 그 해는 바다가 우리 것이었다. 태평양에서 작업하는 오징어 트롤 여러 척도 그랬으니 손을 비벼주는 할머니는 내게 한번 씩 물었다. 어젯밤에 꾼 꿈은 없느냐고……. 꿈에 나는 날개 없이 날아다니는 새였다.’는 진술은 작가의 꿈에 영성이 작용하고 있다는 증거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실현을 위한 상승심리와 함께 긍정효과에 대한 믿음이 싹트게 마련인 것이다. 더욱이 시인이 되고 문학성에 대한 욕구가 강해지면서 많은 작가에게 미래에 대한 꿈은 가장 가까운 벗으로 자리 매김되는 것이 상례다. 성공과 멀어져 있는 여성으로서 꿈이 있는 생활 공간이 자연스럽게 작가를 자기 긍정 속으로 밀어 넣고 있는 것이다. 꿈 속에서 생명을 가지는 무수한 새들의 날갯짓은 어쩌면 인간에게 희망을 주기에 안성맞춤이므로 작가는 향수에다 쩌렁새라는 제재를 투여해서 긍정미학의 효과를 수필화했다고 볼 수 있다.
아들은 바다를 잃는 아버지를 보았다. 잃은 바다는 아무리 넘실대도 가라앉았다. 바다는 아팠다. 아버지가 떠난 바다는 한동안 깃발도 보이지 않았다. 없다. 아이를 손잡고 백사장을 거닐며 상처가 사라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한때는 바다 일부를 호령하며 잘 나가던 아버지의 부(富)를 보았고 부(富)라는 허무의 성(城)에서 슬픈 삶을 보았던 아들, 지금은 어떤 마음으로 바다를 보는 것일까. 기다리는 동안 내 마음은 바람을 만난 물결처럼 출렁이고 뜨거운 파도인 양 철썩거리는 소리로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고요하게 보내도 좋을 시간에 떠오르는 바다는 언제나 그랬듯이 고민의 화두를 준다.
- <바다는>에서 -
바다는 그녀에게 푸른 깃발을 흔들며 옛이야기를 해보자고 손짓하지만 적당한 거리에서 그리움의 대상이다. 그녀는 혹독한 바다를 남편과 함께 온몸으로 부딪치며 살아왔다. 박미정은 바다를 잃은 사람이기 때문에 겪을 수밖에 없는 트라우마를 바다 체험을 통해 노출시키고 있다. 작품<바다는>을 통해 아버지의 바다와 남편의 바다에 얽힌 추억을 손자 수민의 바다사랑을 통해 역설적으로 음미하고 있다. ‘바다는 아팠다. 아버지가 떠난 바다는 한동안 깃발도 보이지 않았다. 없다.’라고 묘사하는 데서 그녀의 정서를 압축해서 간접화하는 문학적 역량이 드러난다. 추억의 뒤안길에서 만나는 바다에 중요한 삶의 의미를 주면서 메타포로 작용하게 하는 수법도 대단히 전략적이다. 아버지가 떠난 바다의 허무를 인식하는 작가에게 바다는 고민의 화두다. 이 부분은 그녀가 관조의 세계를 지닌 작가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서구에서는 주로 자연을 도전과 정복의 대상으로 인식했던 데 비해 동양에서는 자연을 어디까지나 신뢰와 조화의 대상으로 보아왔다고 할 수 있다. 바다는 그녀에게 한마디로 삶의 터전이었다. 바다의 질서 안에는 단순한 변화뿐만 아니라 삶의 양태가 내재되어 있다. 그것은 작가가 바다를 좋아하는 손자를 향해 전하는 메시지라 볼 수 있다. 박미정의 수필적 지향이 일상의 현실을 단순히 기록하는 데서 더 나아가 바다의 숨소리와 그의 맥박, 의도를 점철해 가는 발견과 깨달음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것은 수필의 문학성을 더하는 일로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맏며느리에게 내가 지녔던 염주를 주었다. 얼른 받아주어서 고마웠다. 내원정사에서 그들 이야기를 많이 한 손길이 묻었으니 좋을 듯했다. 아낌없이 주고 싶지만 그러지 못해 안타깝다. 이층 누각에 범종루가 있다. 드나들면서 그 자리에 멈춰본 지가 오래다. 종은 바람 속에서도 움직이지 않았다. 때가 되어야 울린다. 시도 때도 모르고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은 여기에서 침묵을 배울 일이다. 배우는 것은 죽을 때까지라고 하더니 정말 그렇다. 침묵연습을 하고 사천왕문을 빠져나온다.
- <침묵연습>에서 -
사찰순례에 대한 작품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안식뿐만이 아니다. 잊고 있거나 잘 모르고 있었던 것에 대한 향수와 우리가 진짜 돌아가야 할 세계에 대한 발견과 인식이라는 측면에서 종교적인 소재의 발견은 의의가 있다고 보겠다. 박미정 수필에서 발견되는 불교를 소재로 하는 수필에서 발견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가치는 작가의 모성원리뿐만 아니라 삶의 반성적 성찰대에 자신을 세우는 데 있다. ‘이층 누각에 범종루가 있다. 드나들면서 그 자리에 멈춰본 지가 오래다. 종은 바람 속에서도 움직이지 않았다. 때가 되어야 울린다. 시도 때도 모르고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은 여기에서 침묵을 배울 일이다.’라고 일침을 놓은 이 대목은 작가 자신에 대한 완고할 정도의 애정이며, 자기를 실존케 했던 운명적 존재에 대한 애착이라고 볼 수 있다. 박미정은 자신을 껴안아 자신을 배반하지 않는 모습으로 범종루 앞에 서있다. 현실이 각박하게 전개되고 있지만 그 누각 앞에서는 맏며느리에 대한 애정의 향기가 서려 있다. 그 시간과 공간에 깨달음과 그렇지 못한 사람에 대한 일침이 빠질 수 없다.
작가는 아들과 함께 내원정사를 다녀온 후, 크고 작은 일이 있을 적마다 부리나케 이 절에 다녔다. 불안할 때, 무엇인가에 의지하고 싶어하는 것은 인간의 생득적인 감성이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종교는, 타인들의 눈에는 하찮게 보일지 몰라도 그 당사자에게는 마냥 아름답고 소중하게 느껴지는 법이다. 종교적 소재에 관한 근래 수필들 중에서 이처럼 진지하게 삶의 진리에 천착해 보인 수필이 있었던가. 흔들리는 자신을 다 잡고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작가의 모습이 신성한 구도자처럼 느껴지는 것은 기원에 대한 진정성 때문이리라. 더욱이 부모로서 기원의식은 인간으로서 당연한 일일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휴머니즘의 추구다. 종교란 원래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어머니의 품속과도 같은 것이며, 우리의 삶과 인간성을 성숙시켜 주는 곳이기 때문에 그곳에 대한 발거음마저 상실한다면 그것은 곧 인간성의 상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오후 늦게 서야 명숙이를 찾았다. 골목도랑을 한참 빠져나가면 있는 큰길도 지나서 논두렁을 옆을 지나는 도랑에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고 했다. 나는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무서움증이 덮쳤다. 소름이 돋아 바깥을 나갈 수 없었다. 아니 돌아 볼 수도 없었으며 밖이 보이는 창문은 더욱 볼 수 없었다. 밖이 무서웠다. 방 안에서 엉엉 우는 것 밖에 하지 못했다. 주룩주룩 내리는 비가 무심했다. 아까보다 설 하다고는 하지만 비는 오는 것을 멈출 줄 몰랐다. 다음 해에 초등학교 간다고 좋아하던 명숙이는 그해 장마와 함께 떠나서 돌아오지 않았다.
얼마 전에 고향으로 내려가서 내가 살던 골목을 찾았다. 출발할 때는 내릴까 말까 엉덩이를 들썩이던 비가 본격적으로 내렸다. 명숙이를 앗아간 작은 도랑은 복개되어 얼굴을 달리했다. 겉으로 서너 뼘밖에 안 되는 사라진 도랑 폭을 얼핏 그리면서 지난 생각들이 오갔다. 참 많이 변했다. 하지만 그때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은 것은 나에게 장마는 항상 불청객이다.
- <장마>에서 -
박미정의 수필 <장마>에서 우선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따뜻한 인정이요, 휴머니즘이 뿜어내는 거친 호흡이다. 수필이라고 하면 누구나 쉽게 쓸 수 있는 글이란 생각을 하기 쉽다. 그러나 수필은 제재에 대한 철학적 통찰을 통해 문학적 방식으로 쓰여야 할 글이다. 그것이 문학적 방식인가 아닌가는 이 수필 ‘출발할 때는 내릴까 말까 엉덩이를 들썩이던 비가 본격적으로 내렸다. 명숙이를 앗아간 작은 도랑은 복개되어 얼굴을 달리했다.’처럼 구체적 형상을 통해 자기 고유의 의미와 가치를 나타내는 표현인가 아닌가하는 점에 따라 구분된다. 옛날의 선인들은 자기 성찰적인 글쓰기를 중시하였으며, 수필적인 방식을 통해 선비 정신을 길렀다. 작가는 고향 친구를 앗아간 비에 저항하면서 친구를 생각해 본다. 그 근거, ‘두 손을 모으고 기도했다. 제발 돌아오게 해 달라고 빌고 빌었다. 장대 같은 비는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라는 항변이 자뭇 문학적이다. 여기서 장마비는 그녀에게 트라우마다. 박미정의 수필은 일상의 생활 속에서 얻은 체험을 ‘장마’이라는 구체적 형상으로 제시했기 때문에 미적 감동을 준다.
이렇게 따뜻한 온기를 지니지 않고서 어찌 감동을 주는 한 편의 수필을 쓰겠는가. 박미정 역시 어느 여성 작가와 마찬가지로 생명의 소중함과 우정의 중요성을 느끼는 마음이 있는 작가이기에 그녀에게 장마는 지금까지도 변한지 않는 불청객의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때는 모든 것이 풍성하고 마음도 넉넉했고 옹기종기 작은 초가지붕들의 낮은 담장 사이 정감이 오가는 평화로움 그대로였다. 이웃간의 정은 무엇인가를 가슴에 지니고 살 수 있게 해주는 역할은 한다. 고향은 그러한 의미에서 박미정에게 위안의 장소여야 마땅하다. 그러나 고향에서 뛰어놀던 골목은 그녀에게 아픔을 수놓고 있다. 그래도 발길이 그곳으로 향하는 것은 삶의 자양분을 키워 준, 궁핍한 시대의 은혜로운 모정과 우정이 깃든 곳임을 잊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는 박미정이 귀소적 회귀 심리 속에서 고향을 못 잊어 그리며 살아가고 있음을 말해준다고 하겠다. 이 수필은 ‘장마’를 제재로 휴머니즘을 담아낸 수필이라고 하겠다.
4. 네오필리아의 추구와 심미적 안목
박미정 수필이 거처하는 또 하나의 공간은 자기표백이다. 그녀는 자신의 모습을 진정한 자아의 영토에서 낮추는 작가다. 생을 조용히 사유할 수 있는 자세를 갖춘 작가다. 인생을 칼칼하게 씻어내기 때문이다. 모든 수필이 지녀야 하는 공통적 요건 중에 하나가 대상을 바라보는 심미적 안목이다. 심미적 안목이란 화려하거나 현란한 언어 구사와 거창한 주제와 경이로운 소재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수필 작품을 통해 이르는 효과에 중요한 조건이 되지만, 인간의 흥건한 정이 배어 있고, 사물을 바라보는 날카로운 통찰력이 자리하며, 독자로 하여금 공감을 유발할 때, 문학적 미학은 완성된다. 수필은 어떤 문학보다 미학적 정서를 요구하는 글이므로 수필가는 정이 풍부한 사람이라야 한다. 무심한 사물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정은 인간의 심리 중에서 가장 원시적 요소다. 그러나 그것이 물상을 사랑하는 데에 이르기 위해서는 어디까지나 객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에서 가능한 것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그녀가 존재론적 차원에서 소재에 접근하고 있다는 점이다.
작가로 가는 길에 걸림돌 같은 글쓰기를 극복하는 것도 혼자 해야 한다. 작가의 핵이 되는 글쓰기는 시간 죽이기의 홀로서기다. 많이 읽고 귀동냥한 한 것이 많아서 팔도벼슬을 할 것 같지만 쓰는 일을 밥 먹듯이 하지 않으면 그림의 떡이다. 발품을 팔아야 한다. 글은 쓰면 쓸수록 어렵다는 것을 경험하지 않으면 쓰는 작업이 보배롭게 여겨지지 않는다. 시간을 아껴가며 쓰는 글이 스스로에게 귀하지 않다면 누가 귀하게 볼까. 생각하면 아찔하다. 작가가 되고자 한다면 벼랑 끝에 서도 써야 한다는 각오는 잊지 말아야 함을 전한다.
<도랑 치고 게 잡고>에서 -
수필의 소재를 ‘생활’과 ‘자연’에서만 찾으려 하는 작가가 있다면, 소재의 빈곤과 작가의식의 부재를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 될 뿐이다. 수필은 우리네 삶의 모습이다. 수필 쓰는 일은 삶을 통한 선택된 체험을 상상력으로 재창조하고 재구성하는 일련의 문학적 경로를 통해 예술로 승화시키는 작업이다. 그 소재가 어찌 ‘생활’과 ‘자연’뿐이겠는가. 그 표현 방식이 어찌 ‘고백’뿐이겠는가. 수필가들은 폭넓은 소재를 통하여 그 작품세계를 확장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수필이 "인간학"이라는 새로운 틀에 맞추어 좀더 그 지평을 넓혀 갈 수가 있을 것이다. 수필가도 문학인이기 때문에 뚜렷한 자신의 문학관을 가져야 한다. 수필이 생활인의 애환만을 크게 받아들인다면, 작품세계를 스스로 좁히게 된다. 박미정의 문학관을 엿볼 수 있는 <도랑 치고 게 잡고>라는 수필이 보여주는 메시지의 한 축에는 예리한 작가의식이 투과된 문학정신이 잡고 있어 평자를 안도하게 했다. 송나라 구양수가 말한 삼다 중에서도 그녀는 다작을 강조한다. 수필이 이처럼 수준 높은 문학적 향취를 띠는 이유는 ‘벼랑 끝에 서도 써야 한다는 각오는 잊지 말아야 함’을 전하기 때문이다.다작에 대한 작가의 확고한 믿음이 오늘 이 수필집의 출판을 가져 왔다고 하겠다.
시인은 항상 새로운 과제를 제기하고 추구한다. 그 방법론에 있어 각자 다른 양상을 띠지만 삶에 직관으로 연결해 자기실현의 경지를 펼친다. 자기실현은 무의식을 의식화함으로써 가능하며, 삶의 미분화된 공간을 드러내 보임으로써 자기 정화의식을 갖는다. 하지만 나의 시는 독자들에 의한 좋은 채점의 시각을 은근히 기대하며 바늘을 허리에 꿰게 하는 충격을 일부러 가하지 않는다. 측은지심을 억지로 느끼게 하는 소모성으로 진실을 오도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본질적인 삶에서 보편적인 공유경험을 통해 더도 덜도 아닌 있는 그대로 이해해 주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에 시의 쓰임을 갖고자 한다.
- <내 시에는 비빌 언덕이 있다>에서 -
자신의 치부가 될 수 있는 이야기를 아무데서나 하면 안 된다. 그리고 하고 싶지 않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수필이란 장르는 자기 이야기를 진솔하게 하라고 덕석을 펴 놓아서 좋다. 덕석이 편안해서 미주알고주알 해야 한다. 부리던 멋은 다 벗어 던지고 립스틱도 바르지 않고 집게로 뺀 눈썹줄이 그대로 드러나는 민낯의 글맛을 맛보고 싶다. 씁쓸하고 담백해서 메뉴에 없는 비빔밥 맛일지라도 한국 맛에 가깝기야 할 것이다. 절반의 성공이다.
<여러 소리>에서 -
작가에게 있어 뚜렷한 자신의 문학관이 존재하느냐 안 하느냐는 매우 중요하다. 창작물은 표현 의도에 의한 결과물이고, 그 의도는 수필이라는 그릇을 어떻게 보느냐에 다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본질적인 삶에서 보편적인 공유경험을 통해 더도 덜도 아닌 있는 그대로 이해해 주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에 시의 쓰임을 갖고자 한다.’는 그녀의 문학관은 작가가 진실한 삶을 최고의 창작 모토로 삼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새로운 것을 추구해야 한다는 네오필리아적 가치관과 함께 진실에의 탐색은 작가의 모습 가운데서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진수이며 작가적 삶에 있어서 영롱한 에센스가 될 것이다. 문학은 어디까지나 존재론적 총체의 부가여야 한다. 정말 작가로서 성공하고자 한다면 많이 써야 한다. 수필이 궁극적으로 표현하는 대상은 자신이 아니라, 그가 속한 환경과 이에 대처하는 인간의 보편적 성향이다. 수필은 총체적이고 추상적인 현실을 보다 심미적 가치를 지닌 삶의 실상으로 구현하는 작업이다. 가슴이 서늘하거나 후끈한 인간미가 배어 나오지 않은 글은 작품이라고 할 수 없다. 비록 개인사적인 문제를 가지고 글이 출발하더라도, 그것을 통해 인간의 보편성을 발견하고 새로운 가치 발견의 문을 열어야 할 것이다. 언제나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큰 관심사는 나는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명제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문인으로서 확고한 자리를 굳히기 위해서는 문학성에 대한 자기 기준을 가져야 한다. <내 시에는 비빌 언덕이 있다>에서는 문학정신이, <여러 소리>에서는 수필문학의 특성이 잘 드러나 있다.
아끼면 쉬 쓴다고 아끼지 말라는 말이 있다. 아끼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 애지중지하던 시간이 만나지 못할 시간으로 바뀌었다. 흥망성쇠도 순간에 있다. 알게 모르게 경험으로 믿게 된 나의 철학은 할 수 있을 때 하는 것이다. 한다는 것은 선물이라는 처세도 들어간다. 지금 눈앞에 일어나는 일이 그런 순간이라면 내려놓아야 한다는데 생각이 닿는다. 의미 있던 시간이 때로는 아무 의미 없는 시간이 되는 세상사의 일에 내가 무슨 힘이 있다고 왈가불가하겠는가. 순리는 아니지만 그것도 나의 삶의 한 순간이라면 따를 수밖에 없다. 하늘도 내려놓아야 하는 때가 있었는데 이런 일이야 대수가 아니다.
-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서 -
끊임없는 구도의 길로 자아를 내모는 세계에 대한 정면적 대결로 빚어지는 박미정의 자기 고백록은 두 가지 측면에서의 의미 있는 성찰을 제공한다. 하나는 그가 보여준 반성적 자기 성찰이 근래 수필의 한 경향인 내성적 경향을 긍정적인 의미에서 심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견고한 문학적 장치와 유추를 동반하면서 고백을 ‘고백’ 아닌 것으로 끌어올리는 힘이야말로 박미정의 문학적 저력을 확인케 한다. 다른 하나는 그의 수필이 행하는 작가적 자기반성이 문학적 가치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제공한다는 점이다. ‘알게 모르게 경험으로 믿게 된 나의 철학은 할 수 있을 때 하는 것이다.’라는 결단의 꽃을 피우려는 결연한 자세 없이는 글쓰기에 대한 반성적 통찰 또한 가능하지 않다. 이런 ‘하면 한다’는 결연한 의지로 영원히 멈추어지지 않을 구도의 행보를 계속해 나간다. 수필 속에는 자기만의 철학이 있기에 잔잔한 감동이 있고, 포근하게 느껴지는 정감이 있다. 깊은 깨달음의 경지가 느껴질 뿐만 아니라 수수하면서도 소박하고, 은근하면서도 조용하고 은은한 향취가 풍겨난다. 그녀는 깊은 의식과 상념으로 감성을 체계적으로 정리 압축하고, 다양한 시각과 풍부한 상상력으로 인간과 삶을 예리하게 살피고 있다. ‘순리는 아니지만 그것도 나의 삶의 한 순간이라면 따를 수밖에 없다.’라는 현실 지향적 태도는 평소에 영혼과 마음을 늘상 갈고 닦은 까닭이리라.
5. 견고한 인성과 우리-되기의 힘
박미정은 다 태우지 못한 삶의 갈망들이 들끓고 있는 작가다. 심기 속에 전류처럼 정이 따뜻하게 흐르는 작가다. 이 수필집은 일상에서 꽃피우는 인연의 소중함과 견고한 인성의 노래로 수놓아져 있다. 흔히 수필은 자신의 심적 나상이라고도 하고 독백의 문학이라고 하는데, 박미정의 수필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자기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이웃의 인연과 만남의 소중함을 수필적 소재로 취택하고 있는 것이 특이한 점이다. 현대는 다양한 욕구가 충만해 서로 좌충우돌하지만, 자신 이외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눈을 돌리거나 귀를 기울일 수 있을 만큼 여유가 없는 단절과 소외로 특징되는 시대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오늘을 사는 사람들은 고독과 외로움으로 고통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실 속에서 수필을 쓴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문학이 문학만을 위한 작업에만 충실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만은 분명한 것이다. 아래 작품 <해무를 벗기다>는 여행에서 마주친 자연과 사람의 만남으로 성립되는 소중한 관계가 정겨운 파도처럼 넘실거리고 있어 감동을 준다. 판에 박은 듯한 안내문 같은 정보전달, 소개 형태의 기행문 형식에서 탈피하고 있어 감흥을 준다. 주제의식이 문학적으로 형상화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적 감촉, 개인적 체취가 강하게 풍겨 기행수필로서 조금도 손색이 없다.
백성이 오직 나라의 근본이라 여긴 그 분의 일화는 많다. 그 중에 하나를 빌리자면 ‛누렁소와 검은 소이야기’인데 농부가 한 이야기를 새겨들어, 삶에 남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 귀감으로 삼았다 한다. 누가 현자인가 모든 사람으로부터 배우는 사람이 현자라는 말이 있다. 방촌(厖村)이라는 호에서 그를 더 짐작케 한다. 시원하게 눈과 귀가 쏴아-아 뚫린다. 더 자세히 보려고 안경을 닦는다. 안개 속에서 파도 소리를 찾는다. 순간 나는 강을 바다로 착각하고 있었다. 강은 연신 파랗게 웃으며 바다처럼 짙푸른 물푸레나무의 인자한 웃음으로 다가온다. 시간이 역사를 조명하듯 오늘의 해무도 시간이 벗긴다.
- <해무를 벗기다>에서 -
자기 정서의 표출이라는 자기 구원만으로 수필가의 사명을 완수했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수필가가 그려내야 할 수필적 주제는 인간애의 정신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수필의 매력은 작가의 내면 풍경에서 나오는 체취를 음미하는 데 있지 않는가. 바로 인연의 소중함과 만남의 축복이다. 작가는 기행을 떠나서 황희 정승의 삶과 만난다. 박미정이 청백리 황희 정승의 정신세계에 푹 빠져들고 있는 이유는 누구보다도 ‘백성을 근본이라 여긴’ 황희 정승의 ‘누렁소와 검은 소이야기’ 가 작가에게 큰 감동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팔랑 귀가 되고 싶지 않은 것은 바른 삶의 실천자로서 인간의 체취가 물씬 풍기는 작가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독립적 자아로 세계와 마주 서는 작가의 세계관이 작용한 때문이라고 하겠다. 박미정의 <해무를 벗기다>는 이 수필집의 제목으로 선택될 만큼 작가의 애착이 강한 작품이다. ‘안개 속에서 파도 소리를 찾는다. 순간 나는 강을 바다로 착각하고 있었다. 강은 연신 파랗게 웃으며 바다처럼 짙푸른 물푸레나무의 인자한 웃음으로 다가온다. 시간이 역사를 조명하듯 오늘의 해무도 시간이 벗긴다.’라는 결말부 진술은 ‘이것’을 가지고 ‘저것’을 만들어 낸 형상화의 백미다. 파주 반구정에서 황희 정승의 선비다운 모습을 접하고, 그 인정의 넉넉함으로부터 삶의 의의를 깨닫게 한다는 측면에서 유의미한 글이다. 특히 작가가 ‘해무’라는 제재를 통해서 시간과 역사에 대한 인식을 삶의 변증법과 연결시킨 대목은 단연 압권이라고 하겠다.
어느새 두 번째 가을을 맞이하고 있다. 첫 출근처럼 거울 앞에서 머무는 시간이 많다. 나의 표정과 몸짓이 그들에게 한국의 거울로 비칠 테니 스트레스를 털어낸다. 드라마를 통해 한국에 대한 막연한 기대나 꿈을 꾸고 온 여성들이 많다. 그런 여성에게는 실망감이 한국에서의 첫 경험이다. 꿈과 현실은 엄연히 다른 줄 알면서도 한국에서는 이루어 질 수 있다는 생각을 빨리 떨어내지 못할 때는 안타깝다. 의식과 무의식처럼 적극적 또는 소극적인 극의 모습을 이완시켜야 한다. 한국어를 가르치기 전에 그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배려가 필요하다.
- <우리 반, 우리들은>에서 -
박미정의 <우리 반, 우리들은>수필을 읽으면, 그녀의 글은 하나같이 삶의 원형, 삶의 진리를 파헤친 지혜서란 생각이 든다. 그녀는 마음을 차분히 가라 앉혀주는 위안과 인간의 정신을 고원한 곳으로 이끌어주는 힘을 가지고 있다. 세상에 우연은 없다는 것은 논리학을 배운 사람이라면 다 안다. 인과율에 의해 삶은 계속되어지는 것이다. 그녀는 이런 삶의 변증적 법칙을 ‘봉사활동’을 통해 실천하고 있다. ‘우리’라는 단어는 그 어떤 장치보다도 사람을 하나로 모우고, 경직되고 얼었던 마음을 데우는 역할을 한다고 의미화한 데서, 그녀가 중요시하는 게 무엇인지,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어쩔 수 없어 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필연으로 여기며 사는 길은 봉사의 실천이라 할 수 있다. 배치나 장치를 만들어 권력을 확고히 하는 것보다는 열린 자세로 다문화 여성들에게 다가감으로써 작가는 튼튼한 공존의 도덕적 모럴을 구축하게 되는 것이다. 삶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삶의 법칙에 따르지 않으면 살아갈 수도 진화 발전할 수도 없다. 삶의 법칙에는 몇 가지가 있으나 그 가운데서도 피할 수 없는 것이 "인과율의 법칙"이다. 이 지구상에 생명이 탄생하고 난 이래 이것을 위반하지 않고 현재까지 왔기 때문에 인간은 지금도 인연을 소중히 여기며 살고 있고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원리를 작가는 ‘우리’라는 말로 풀어헤치고 있다.
수요일은 그녀를 만나러 가는 날이다. 대연동 M시장 안에 있는 아담한 4층 건물에 잠시 머무는 그녀들을 만나기 위해 2006년 6월부터 ‘문학으로의 초대’ 프로그램으로 자원봉사를 시작했다. 일 주일에 한 번 가지만 그녀는 나의 정다운 이웃이다. 일 주일마다 새 얼굴이 있고, 출산해서 보이지 않는 사람 등 거의 다섯 명 정도의 그녀가 나를 기다린다. 초면인 그녀는 첫 만남이 어색해서 나로부터 멀리 떨어져 앉아서 얼굴을 쉽게 보여주지 않는다. 반복되는 일이라 첫 날은 관계만 맺는 일로 끝난다. 사실 관심은 두지만 그녀의 마음이 편안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 <그녀>에서 -
자기 삶에 대해 누구나 쉽게 부끄러움을 내비칠 수 있는 건 아니다. 이런 차원에서 이 작품은 인간의 체취에서 풍기는 향기를 더해주는 글이다. 수필은 인간을 위하여 그리고 인생을 보다 낫게 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작가가 자기 자신보다 남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작가의 진술처럼, 첫 만남이 어색해서 나로부터 멀리 떨어져 앉아서 얼굴을 쉽게 보여주지 않는 건, 자신만의 울타리를 만들어 나를 가두는 것으로 스스로의 고립이다.작가는 이런 여성들을 심리를 최대한 배려한다. 이런 타자와 우리-되기는 언제나 가슴 뭉클하게 하는 힘이 있다. 수필은 힘의 문학이다. 그 힘은 작가의식으로부터 나오지만 인간애의 고양으로부터도 나온다. 생각이 머물지 못하고 인정들이 들고 나는 시간이 제각각이며 말에 칼날보다 아픈 비수가 실려 가듯 건조한 마음이 바로 무관심이다. 주제를 제재에 담아 문학적으로 조리해내는 일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박미정의 역량이 빛나는 것이다. 이 작품은 한국에 와서 아직 적응이 서툰 그녀를 위해 쏟는 정성이 존재와 삶에 대한 자각과 잘 어우러져 잔잔한 감동을 준다. 추상의 세계를 서정적 묘사를 통해 구체화하려는 문학적 기법을 통해 나름대로 문학성을 부여하려는 노력이 묻어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제재를 통해 주제를 우려내는 솜씨의 탁월성이 수필가 박미정의 가장 큰 강점이라고 하겠다.
야외 수업 가는 날이었다. 나는 앞자리를 멀미하는 학생에게 내어 주고 중간 쯤 그녀 옆에 앉았다. 피곤해서 눈을 감았다. 가만히 어깨를 내어 주면서 기대라고 하지 않는가. 너무 낯선 제의에 망설이니까 집에서 자연스럽게 하는 일이란다. 나보다 더 작은 어깨가 나를 편안하게 할 줄 몰랐다. 나를 따라 행진하면서 그녀는 한 번도 지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열정이 한국과 베트남을 잇는 가교가 될 것으로 믿는다.
- <귀여운 외교관>에서 -
그녀의 작은 바람이라면 서로 도우며 오순도순 사는 것이다. 봉사자로서 다문화가정의 사람들과 교유하면서 느끼는 심회를 소망으로 의미화한 수필이 <귀여운 외교관>이다. 이 작품에서 그녀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조화’요, ‘공존’이다. 작가는 앞자리를 멀리하는 학생에게 내어주고 중간쯤 그녀 옆에 앉는다. 공존의 전제는 한 발 물러설 수 있는 양보정신이요, 비움의 철학이다. 이처럼 그녀는 타자의 존재를 연민의 대상으로 바꾸어 놓은 작가다. 이 수필이 감동을 주는 것은 한국어와 문화를 열심히 배우는 베트남 여인을 ‘귀여운 외교관’으로 의미화한 대목이다. 어려운 입장에 있는 다문화 가족을 위해, 한 몸 희생하고자 하는 작가에게 박수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다. 수필이 구원의 문학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이 작품은 건강한 가정을 바라는 작가의 건강한 인식이 녹아 있어 뜨거운 감동을 자아낸다. 그녀는 사람들을 새롭게 결속시키는 힘을 가진 작가다. 긴 인생을 바보처럼 살아가는 것도 필요하지만 어제보다는 오늘, 오늘보다는 내일의 향상을 목표로 삼아 자신을 비워내며 이타적인 사랑을 실천하려는 정신이 후회 없는 인생을 보내는 방법일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바란다. 현대적 삶의 어두움은 바로 이기심에서 출발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내면에서 치솟는 이 끊임없는 안락을 원하는 이기심과의 싸움에서 지기 때문이다. 아직은 낯설고 갈 길은 멀다고 하면서도, 서툴고 모자라는 이 여인이 한국과 베트남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하리라 믿는 작가는 분명 이 세상을 안개처럼 부드럽게 감싸는 어머니의 손길을 가진 작가라 하겠다.
III.
박미정 수필집은 “수필은 삶의 문학이다”라는 명제에 답하고 있어 성공적이다. 이 수필집의 작품들은 정말 사람답게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생각해야 할 문제, 가슴 깊이 담아두어야 할 가치 있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측면에서 감동적이다. 수필이 궁극적으로 표현하는 대상은 자신이 아니라, 그가 속한 환경과 이에 대처하는 인간의 보편적 성향이다. 수필은 총체적이고 추상적인 현실을 보다 심미적 가치를 지닌 삶을 실상으로 구현하는 작업이다. 가슴이 서늘하거나 후끈한 인간미가 배어 나오지 않는 글은 작품이라고 할 수 없다. 비록 개인사적인 문제를 가지고 글이 출발되더라도, 그것을 통해 인간의 보편성을 발견하고 새로운 가치 발견의 문을 열어야 할 것이다. 언제나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큰 관심사는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명제이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차원에서 박미정 수필은 존재 의의를 지닌다. 그녀는 보다 인간적인 향기로 이 세상의 매듭을 만들며, 풀어나가고자 할 뿐이다.
수필의 본령은 인간 구원에 있다는 허드슨의 정의처럼 박미정은 득실거리는 사회의 군중 속에서 무엇보다도 추억을 추출해 내어서 렌즈 밑에 정착시키고 그것을 멋스럽게 확대시키고 있는 점에서 돋보인다. 무엇보다도 내면 풍경을 그림을 그리듯 감각적으로 구체화하는 데서 문학성이 빛난다. 언어의 활용면에서 문학수필의 멋을 한껏 우려내고 있어 읽을 만한 수필집이라 하겠다. 다섯 부류로 나누어지는 수필적 특성이지만 가장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이 사모곡이다. 어머니는 존재의 시원이다. 기억해 놓는 일만 해도 가치로운 일이다. 그런 어머니의 삶을 통해서 살아가는 지혜를 배우기도 하고, 그 가운데 자신을 반성하기도 하고, 사람답게 사는 방법을 독자에게 일러두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지 박미정의 수필이 주는 첫인상은 눈물겨운 따스함이다. 인간의 아름다운 마음이야말로 가장 고귀한 것으로 삶을 윤택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해주었다고 하겠다. 박미정 수필가가 걷는 인생의 길은 자기실현과 봉사의 길이니만큼 더욱 더 향기로운 여인으로 성장해서 더 멋진 수필을 써내리라 확신해 본다.
박미정의 수필집은 가장 진솔하고 자연스럽게 자신의 삶을 담는 그릇이다. 수필은 단순히 경험한 것을 이야기로 써서는 안 된다. 수필 쓰기를 통해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창출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수필집에는 작가의 인품과 덕성이 거울에 비치듯 드러나 있다. 그래서 유난히 인간적 향기가 짙게 풍긴다. 어머니의 삶에 대한 이야기는 큰 감동을 준다. 어떤 작품보다도 이 작품은 작가의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낸다고 하겠다. 박미정의 수필은 현란한 색채로 나타나는 허욕의 삶이 아니라 드러나지 않는 색처럼 겸허한 삶을 그려낸 한 편의 멋진 수채화라 하겠다. 가족을 다루면서도 가족사적인 문제에 머물러만 있지 않고 시선을 공동체적인 삶에 겨눔으로써 언제나 삶 속에서 작은 행복들을 기대하고 꿈꾼다. 이런 따스한 체온을 전해주는 작가이기에 우리는 그녀의 다음 작품에 더 기대를 걸 수가 있는 것이다. 앞으로 우리 사회의 모순을 정조준하며, 부드러운 필봉을 휘두를 때, 박미정은 의식있는 작가로서 크게 주목받을 것으로 보인다. 좋은 수필을 위한 작가의 문학관이 우리들의 기대에 크게 부응하리라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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