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절망은 없다.(6월 28일 금요기도회 설교)
성경 : 요나 3:1-10(구약 1288)
오늘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두 번째로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라는 명령으로 시작됩니다. 요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명령을 받았지만 니느웨로 가는 것을 원하지 않고 피하여 도망하다가 물고기 뱃속에서 삼일을 지내게 됩니다.
물고기 뱃속에서 삼일을 지내다가 다시 밖으로 나오게 된 요나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고 요나는 그 말씀에 순종해서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니느웨는 본래 하나님을 섬기는 성이 아닙니다. 그곳은 우상 숭배가 만연하고 온갖 죄악으로 가득한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요나의 선포를 듣고 왕에서부터 온 백성에 이르기까지 금식하며 하나님의 도움을 간구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 도시가 회개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간구할 것이라고는 아무도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방인의 도시요 죄악의 도시인 니느웨가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회개하여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이방 나라가 회개하고 돌아서서 하나님을 향해 기도함으로 구원 받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명령하셨을 때 이미 그 도시가 회개할 가능성이 있었음을 하나님께서는 아셨던 것입니다. 니느웨가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서 금식하며 기도한 것은 하나님께는 불가능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그 도시가 하나님께 겸비하여 기도하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역사하심으로 그 도시가 회개하고 멸망에서 벗어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멸망할 수밖에 없던 도시가 생명을 얻게 된 것처럼 하나님 안에 절망은 없습니다. 오늘 이 밤에 기도하는 가운데 니느웨가 구원을 얻은 것처럼 우리에게도 어떤 절망도 없다는 것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간구하는 밤이 되시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절망은 없다.”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1. 하나님 안에서는 실패란 없습니다.
요나는 어떤 면에서 보면 실패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니느웨로 가서 말씀을 선포하라고 했는데 요나는 그 말씀에 불순종해서 다시스로 도망을 갔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그가 도망가는 길에서 타고 있던 배는 풍랑을 만나서 침몰의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풍랑의 원인이 요나에게 있는 것이 밝혀지고 결국 그는 바다에 던져지고 말았습니다.
바다에 던져진 요나는 실패한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바다에 던져진 요나를 하나님께서 물고기를 보내셔서 물고기 뱃속에 머물게 하셨습니다. 물고기 뱃속에서 요나는 하나님께 기도했고 물고기는 요나를 해안가에 토해냈습니다.
요나 개인적으로 보면 물고기 뱃속에서 나오기까지는 절망적인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물고기 뱃속에 회개하고 기도하고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인도를 받으므로 그는 실패자가 아니라 성공적으로 사역을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 1절에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로 요나에게 임하니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요나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의지하였더니 하나님께서 그에게 다시 기회를 주셨고 성공적으로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영국의 시인 골드 스미스는 ‘우리의 최대의 영광은 한 번도 실패하지 않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실패할 때 마다 일어나는데 있다.’ 라는 말을 했습니다.
제임스 존스는 ‘영웅이 참으로 위대한 점은 한 번도 절망하지 않는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클레멘트 스톤은 “모든 아픔과 고난은 보다 좋은 유익을 낳는 씨앗이다.” 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실패할 수 있고 실패할 가능성이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실패했더라도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다시 일어나서 결국에는 성취하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미국의 가장 위대한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은 많은 실패를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는 주법원의 서기가 되려다가 실패했으며 그가 사랑하던 여자가 일찍 세상을 떠나는 슬픔을 경험했으며,
1831년에는 사업을 하다가 동업자의 배신으로 실패 했으며,
1832년에는 주의원에 출마했다가 낙선을 했습니다.
1833년에는 사업에 실패하여 7년 동안이나 빚을 갚아야 했고,
1836년 고민을 너무 많이 해서 신경쇠약 환자가 되었고,
1838년에는 하원의원에 출마했다가 낙선했고,
1855년에는 상원의원에 출마해서 낙선했습니다.
1856년에는 부통령에 출마했다가 낙선했고,
1860년에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아브라함 링컨은 수없이 많은 실패의 상황에서도 언제나 굳건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모든 역경을 이기고 승리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링컨 자신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연약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결코 실패하지 않는 분이십니다. 그가 비록 약하고 부족하고 실패를 거듭할지라도 하나님은 그를 들어서 사용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실패할 수 있고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시련 가운데 있어도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너무나 많고 실수가 많고 실패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고 결코 절망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들어서 사용하시기를 원하시고 결국에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많은 약점과 부족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라볼 때 하나님 안에서 실패를 넘어 성공과 축복으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오직 주 안에서 성공과 축복의 길로 나아가는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하나님은 버리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도망이나 가던 겁쟁이였으며 불순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요나가 불순종해서 물고기 뱃속에서 지냈지만하나님은 요나를 들어서 니느웨를 구원하는 큰일에 사용하셨습니다.
누가 생각해도 회개할 것 같지 않았던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의 전도를 듣고 모두가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3-8절까지를 보면
3:5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은지라”
3:6 “그 일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왕복을 벗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 위에 앉으니라”
3:7 “왕과 그의 대신들이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여 이르되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 떼나 양 떼나 아무것도 입에 대지 말지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3:8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 옷을 입을 것이요 힘써 하나님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요나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사명을 주셨을 때 모든 것이 절망적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또 한 편으로 요나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내서 니느웨에 외치라고 하실 때 그들이 회개할 것이란 가능성을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요나가 믿는 하나님은 불가능이 없으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게 절망적인 사람은 없기 때문에 니느웨 사람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3-4절을 보면
3:3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사흘 동안 걸을 만큼 하나님 앞에 큰 성읍이더라”
3:4 “요나가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여기에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내가 가서 전한다고 이 성에 사는 사람들이 내 말을 듣겠어 하나님께서 전하라고 하시니까 전하지만 전해봐야 소용없는 일이야 이런 생각을 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전하지 않고, 하루만 적당히 전하면서 하나님 제가 명령대로 전했습니다. 이렇게 대답하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입니다.
또 하나의 가능성은 하나님께서 보내셨다는 것은 내가 가서 전하면 이 사람들이 회개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4:1-2절을 보면
4:1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4:2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요나는 4장에서 니느웨가 회개하므로 하나님께서 멸망하시려는 뜻을 돌이킨 것에 대해서 싫어하고 성질을 냈습니다. 내가 이럴 줄 알았습니다. 이 성은 당연히 멸망해야 할 성인데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실 때 이 성 사람들이 회개할 껄 아시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닙니까? 하고 항의를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나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면 인애 즉 사랑이 크신 분이시기에 재앙보다는 은혜르 주시는 분이심을 내가 알았기 때문에 니느웨로 가라 하실 때 내가 도망간 것입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요나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버리는 분이 아니시고 망하게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망하게 하실 때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고 망하게 하시는 것은 더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을 요나는 알았습니다.
우리가 믿음 안에 살아가는 한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결코 버리거나 망하지 않게 하시고 우리를 통해서 이루실 하나님의 역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서 놀라운 일을 행하시고 우리를 축복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3. 하나님께 절망적인 환경은 없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두 가지 절망적인 환경을 발견하게 됩니다.
먼저 요나에게서 발견되는 절망적인 상황은 2장에서의 상황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절하고 다시스로 도망가다가 풍랑을 만났고 물고기 뱃속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가 처항 상황은 절망적인 상황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런 절망적인 환경에서 요나를 건지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셨습니다.
두 번째 상황은 니느웨입니다. 니느웨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도시입니다. 요나가 그 도시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기는커녕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는 도시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것은 절망적인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나가 가서 말씀을 선포하매 절망적인 도시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오늘 우리가 경험하게 되는 상황들은 요나가 처한 상황과 비교해 보면 결코 절망적이지 않습니다. 요나 자신이 처한 상황도 그렇지만 니느웨란 도시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할 가능성은 결코 없어 보였습니다.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서는 것을 기대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요나에게 헛소리 하지 말라고 핍박하고 심하면 죽일지도 모르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역사하심으로 절망적인 상황의 도시가 희망의 도시가 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어린 소년 다윗이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형들이 나가 있는 전쟁터에 갔다가 골리앗이 이스라엘을 희롱하는 소리를 듣고는 참을 수 없는 거룩한 분노를 느꼈습니다. 그가 골리앗과 싸우겠다고 할 때 그의 형들은 야단을 쳤습니다. 누가 봐도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는 것은 절망적인 상황입니다.
그러나 삼상17:45-47
17: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17:46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17:47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라고 선포하면서 담대하게 나아가 물매를 던져 골리앗을 쓰러뜨렸습니다.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절망적인 상황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고 믿음으로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다해도 우리가 볼 때는 절망적이지만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면 그것이 희망이 되고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이 니느웨 같이 불가능할 것 같은 상황이라고 해도 하나님 안에서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니느웨도 회개하십니다.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께서 나를 향해 계획하신 일들이 반드시 실현된다는 것과 우리가 비록 실패와 절망의 환경에 있는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한 절망이 아닌 새로운 희망과 새로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상황이 아무런 희망도 보이지 않는 상황이라도 하나님이 하실 일을 기대하며 기도하는 밤이 되고 응답받는 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