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과 동귀일체 혁명
한국혁명의 시원은 동귀일체 혁명으로서 동학농민혁명이고 그들의 사회적 이상은 두레마을 공동체였다. 그들의 사상과 철학은 시천주와 동귀일체를 중심으로하는 동학사상이었다.
세계사의 모든 공동체 혁명은 동귀일체를 지향한다고 할 수 있다.
동학농민군은 척양척왜와 보국안민(輔國安民),광제창생( 廣濟蒼生)의 기치를 들고 전봉준 장군의 지휘아래 고부에서 봉기하였다.오늘날 척양척왜의 자주의식이 동학농민혁명 당시보다 약화된 것 같아 안타깝다.
농민군의 첫번째 행동강령은 불살인 불살물이었다. 즉 사람을 죽이지말고 가축등 재산을 약탈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같은 정신은 오늘날 촛불혁명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것은 혁명을 위해서는 표트르 대제같은 야만적 방법도, 은행털이등 강도짓을 해도 무방하다는 레닌의 생각과는 크게 다르다. 10월혁명 당일 동궁을 습격한 최정예 볼셰비키 전사들은 동국습격후 바로 물욕에 사로잡혀 약탈에 들어섰다.
볼셰비키가 혁명의 전위조직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사실은 욕망의 집단체로서 그 단서가 드러난 것이다.
불살인 불살물은 인민의 것은 바늘하나 실하나 취하지 않는다는 중국 홍군의 행동강령보다 심원한 사상에 기반한다.즉 인내천과 경천물경의 사상이다.
오늘날 숭일숭미 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지배집단이나 서양의 사상과 철학에서 주체를 상실하고 숭미사상의 눈동자를 선진화로 착각하여 정신의 종살이를 하는 지식인들의 모습, 그리고 사인여천이 아니라 사물여천(황금,자본,부동산을 신으로 섬기는 물신주의)의 속물들과 비교할 때 동학은 그 주체성과 자주성이 참으로 놀라운 혁명적 사상이다.
용담유사 안심가엔 “개같은 왜적놈아 너의 신명 돌아보라,너희역시 하륙해서 무슨은덕 있었던가?”는 글귀가 있다. 하륙은 섬나라 일본이 조선에 상륙해 침탈하는 것을 말한다.
나라를 바로잡아 민중을 편안하게 한다는 보국안민의 정신은 촛물혁명의 나라다운 나라로 계승되었다.
동학농민군은 황토현에서 첫승을 거두고 이 여세를 몰아 전주성을 점령하고 정부와 전주화약을 맺었다. 1894.6.11. 전주화약이 선포되었다. 집강소의 농민자치와 두레마을 코뮌이 선포된 것이다.
전라도지역 53개 군현을 장악하여 기존의 권력기관대신 농민자치기관으로서 집강소를 설치하였다. 집강소는 관료기관이 아니라 12조 폐정개혁안을 집행하는 민중자치기관이다.
파리코뮌이 10주간 지속되었고 집강소는 4개월간 지속되었다. 파리코뮌 전사들은 독일군의 포위로 인해 뻬르-라세즈 묘지의 연맹병의 벽을 넘지 못하고 띠에르 군에 의한 대량학살을 당했고 동학농민혁명군은 외적인 일본군의 직접 학살에 의해 우금치 고개를 넘지못하고 대량학살을 당했다. 이후에 지주와 일본군의 합작으로 농민 30만명이상이 학살당했다.
신동엽시인의 서사시 금강 26장에는 이런 학살 장면이 기록되어있다.
“곰나루 함성뒤 석달지난 다음해 정월 보름날
서정리 역에선 왕병과 왜군, 동네 토반, 유림들이 합세
마을 농민 수물일곱명을 능지처참했다.
네 마리의 말허리에 감겨진 쇠줄로 사지를 묶어 사방으로 달리게 채찍한다.
눈벌판속 수십개의 모닥불을 피워놓고 온종일 술잔 기울이며
베푸는 장님들의 피의 잔치, 북소리 환호성
어쩌자는 걸까 바람버섯 찢는 걸까?....“
신동엽 시인이 표현했듯이 사랑밭에 두렛마을 심으려던 동귀일체의 푸른 하늘은 다시 쇠항아리와 먹구름으로 뒤덮였다.
언제쯤 푸른 하늘을 다시 보게 될 것인가?
동학농민혁명은 3.1운동, 독립운동, 4.19혁명,부마항쟁, 5.18 민중 혁명, 6월항쟁, 2008 촛불집회,2016 촛불혁명으로 이어졌고 지난한 민중항쟁의 역사를 통해 사회적 에너지를 축적해온 한국 민중들은 푸른 하늘-공동체를 현실화하기위해 먹구름 닦고 쇠항아리 찢어가며 현재 투쟁을 수행중이다. 시인이 말했듯이 찬란한 혁명의 날 즉 동귀일체 혁명의 날은 오리라
폐정개혁안 12조
1. 인명을 함부로 해치는 자는 목을 벤다.
2. 탐관오리는 발본해서 없앨 것
3. 횡포한 자주들은 엄징할 것
4. 유림과 양반들의 소굴을 토벌해 파괴한다.
5. 천민들의 군안(軍案)은 불지를 것
6. 종 문서는 불태워 버릴 것
7. 백정의 머리에 패랭이를 벗기고 갓을 씌울 것
8. 무명잡세등은 혁파할 것
9. 공사채를 막론하고 과거의 모든 부채는 무효로 할 것
10. 외적과 연락하는 자는 목을 벨 것
11. 토지는 평균분작(平均分作)으로 할 것
12. 농민군의 두레법은 장려할 것
동학사상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사상은 동학이다. 동학은 유불선의 기반에서 이를 지양한 사상이다.
그래서 유불선을 포섭한다. 서학과 대립하나 서학에 대한 직접적 반정립은 아니다.
수운의 말대로 여기 동에서 태어나고 여기 동에서 무극대도라는 천도를 득도하였고 그 천도에 이르는 학이기에 동학이다. 즉 서학에 대한 안티테제가 아니라 주체적 정립이다.
이돈화의 천도교 창건사에는 수운과 노승 송월당의 대화에는 다음과 같은 대화가 전해온다.
수운은 “나는 유도 아니요 불도 아니요 선도 아니요 , 그 전체의 원리를 사랑하오 천도는 아니 있는 곳이 없으므로 전체를 사랑할 수 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중략.......
무슨 진리든지 그 시대 사람에게 생혼을 불어넣어 줄 수 없고 그 시대의 정신을 살릴 수 없게되면 그것은 죽은 송장의 도덕일 뿐이요 이 시대는 불법이나 유법이나 기타 모든 묵은 것으로는 도저히 새 인생을 거느려 나갈 수 없는 시대이지요 다만 요할 것은 죽은 송장속에서 새로 산 혼을 불러 일으킬만한 무극지운을 파지하고 신천신지신인을 개벽하여야하지요 “(동경대전1,도올 김용옥.동경대전1,통나무,p221)
천지인 3재의 개벽 , 사상개벽,경제개벽,사람개벽이다.
동학의 주요사상은 시천주 사상과 만민평등의 동귀일체 사상이다.
시천주는 개별자의 절대적 신적 존엄성을 말하는 것이고 여기서 인내천, 사인여천이 연역된다. 동귀일체는 억조창생이 하나되는 사회적 실체이다.
동학을 종교로만 파악하는 측에서는 동귀일체를 사회적 실체가 아니라 영적실체로 축소환원시키고 있다.그러나 용담유사에 표현된 보국안민, 요순성세, 국태민안,태평성세, 억조창생 동귀일체에서 보듯이 동귀일체는 사회적 실체이다.
동학은 민중의 자유정신에 족쇄를 채우는 봉건시대 낡은 율법인 인의예지 대신 수심정기, 대국을 섬기는 사대주의와 물질을 신으로 섬기는 사물여천을 폐하고 사람을 하늘로 섬기는 사인여천으로 대체했다.
물론 수운이 삼강오륜등 전통윤리를 전면 부정한 것은 아니다.
현정세가 삼강은 전복되어 소멸하고 오륜은 점차 패악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요순지치나 공맹지덕이 이제 사회모순을 극복하여 태평성세를 실현하는데 시대적합성이 소멸되었다는 것이다. 용담유사에서는 이를 “요순지치 부족시 ,공맹지덕 부족언”,“누천년 이어온 유교의 운수가 다했다”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놀라운 경천동지할 혁명적 사상이 선포된 것이다.
“인의예지는 옛성인이 가르친 바요 수심정기는 내가 다시 정한 것이니라”(동경대전,수덕문)
수심정기는 자신의 마음을 비워 즉 근원을 맑게하고 욕념이 생기지않고 마음을 맑고 밝게하는 상태이다. 스토아 철학자들의 이상인 모든 정념으로부터 해방되는 아파테이아(무정념)의 경지, 주역의 적연부동의 경지라고 할 수 있다. 스토아 학파가 아파테이아 상태에서 로고스의 직관을 갈구한다면 동학은 로고스가 아니라 지기( 무한한 자연적 및 사회적 에너지)와 감응하는 것이다.
주역에서는 적연부동 상태에서 감이수통 천하지고한다고 한다.
동학의 사상은 모심(시천주), 섬김(사인여천),인내천, 동귀일체,경천물경(하늘과 물을 공경하라),수심정기에 의한 천인합일로 지기감응의 사상등이다.
이러한 사상은 기존 양반과 지주의 뼛골을 때리고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그리스도라는 단독자를 통해 성육화하는 반면에 동학에서 신성은 모든 사람에게 내재되어 있다. 그만큼 평등하다. 시천주는 인간 각각에 내재되어 있는 신성을 그래서 모든 사람을 빈부귀천없이 하늘처럼 모시는 것이다. 노비,천민은 물론 모든 사람에게 신성이 있다.
수운은 득도후 여노비 2명을 해방하여 한 명은 수양딸로,한 명은 며느리로 삼았다. 시천주와 동귀일체의 세상에서 신분과 계급은 존재할 수 없다.
해월도 한국의 망국병폐로 서얼차별과 반상차별을 들었다.
동학농민혁명은 이같은 동학사상의 현실화를 위해 모든 신분차별을 철폐하고 모든 공사채를 무효로 하고 생산수단인 토지는 평균분작으로 하고 공동노동인 두레를 장려하는 두레마을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동학농민혁명은 동귀일체 혁명이다.
신분과 사대주의와 물신주의를 폐하는 그 혁명적 선언 ,서로섬김과 서로모심의 사상은 나 즉 우리 ,우리 즉 나가 되는 공동체를 형성하는 동귀일체 사상이다.
서양철학자 레비나스는 나치 수용소의 죽어가는 유태인의 얼굴에서 신의 현현 즉 인내천을 보았다. 그는 바울의 타인을 심판하지 말라는 윤리를 넘어 타인을 환대하라는 환대의 철학을 수립했다.(이 병창, 자주성의 공동체)
섬김과 모심은 자신이 주인의 자리에서 타자를 인정하고 사랑하고 책임지고 나아가 환대하는 서양철학의 한계를 극복하고 자신의 주인자리를 타자에게 내어주고 낮은 자리에서 타자를 섬기고 모시고 배우는 서로주체적 공동체 윤리이다.(김 상봉, 서로주체성의 이념)
사회 역사 혁명의 주체는 민중이다. 천인합일의 천은 민중이다. 천심은 곧 민심.민심은 곧 천심이다. 수운이 들은 천어 “오심(천심)이 여심(인심)이다.”(용담유사)는 이를 표현한다.
천심과 인심은 분리되지 않는다.
자신의 아집과 편견 , 사리사욕을 버린 수심정기의 상태에서 민중과 합일하여 지기( 민중의 무한한 사회적 에너지,대상적 본질력의 총체)를 받아들인다면 어떠한 시련과 난관에도 중도 좌절하지 않고 동귀일체의 사회혁명을 완수할 수 있다.
현대 사회학자 랜달 콜린스는 사회적 동력으로 정서적 에너지를 주장하고
사회학자 하르트무트 로자는 사회적 교류와 상호작용 그 자체로부터 사회적 에너지가 발생한다고 하는데 사회적 에너지는 민중지기와 같은 것이다. (울리히 슈나벨, 투게더)
5.18 민중혁명시 시민군 상황실장 박 남현은 다음과 같이 민중지기를 증언하고 있다.
“우리는 단순히 지역감정이나 개인감정으로 일한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그러한 힘이 쏟아져 나올 때는 그만한 상황이 전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누가 우리를 욕하고 나무랄 수 있는가?백 번의 공부나 학습보다 한 번의 행동에서 체득한 그 어마어마한 사건 나는 이것을 존중한다. 이것이 나에게는 생명으로 와 닿기 때문이다.”(박 남선 1988,2.23)
각자위심에서 동귀일체로 .....대립물의 투쟁과 상생
헤겔논리학에 의하면 적대적 모순의 양계기는 절대적 충돌(gegenstoß)을 통해 근거로 귀환함으로써 해소되고 지양된다. 마르크스는 사회안의 절대적 충돌을 계급투쟁이라고 한다. 계급투쟁을 통해 모순의 양계기인 임금노동자와 자본가가 근원적 동일성으로 귀환함으로써 모순이 해결된다. 투쟁과 귀환, 투쟁과 이행의 통일이 상생이다. 즉 동귀일체이다. 수탈자의 수탈이나 악무한적 투쟁에만 머무르고 귀환과 이행이 없으면 상생도, 동귀일체도 아니다. 조선시대 명화적떼와 동학농민군을 비교해보면 분명하다.
마르크스도 처음에는 계급투쟁을 일면적으로 강조했지만 파리코뮌혁명이나 러시아 농민공동체 연구를 통해 1875년 국가혁명에서 공동체혁명으로 대전환이후에는 수탈자의 수탈뿐아니라 공동체로 이행과 귀환을 중요시했다.
그리고 근대사회가 공동생산과 공동전유의 원시공동체의 보다 높은 형태로 귀환하고 있다는 모건의 선사학을 수용했다. 그리고 부정의 부정을 통해 토지와 생산수단의 공동점유를 토대로 임금노동자와 자본가가 모두 그 근거인 사회적 개인으로 이행한다고 주장하였다.
동학사상에서는 적대모순이 격화된 세계사적 현실을 12제국 괴질운수라는 전세계적 사회적 질병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한마디로 억조창생이 각자도생하는 각자위심의 사회이다. 이를 다시개벽(부정의 부정)하여 억조창생이 동귀일체( 근원적 동일성으로 귀환 )하는 것이다.
동학사상은 음양이 미분리된 태극에서 음양이 분리되어 차이 대립 모순으로 발현하는 각자위심의 사회를 다시개벽하여 보다 높은 형태로, 지양된 태극으로 귀환하는 것이다. 지양된 태극은 모든 대립과 모순이 해결된 무극이다. 무극은 지양된 태극이요 동귀일체이다.
노자의 도덕경 28장에서도 천하의 공식이 된 상덕은 어긋남없이 무극으로 복귀한다고 한다.
그것은 마치 공동생산과 공동전유의 원시공동체(태극)에서 생산자와 생산수단이 분리된 계급사회를 부정의 부정으로 (다시개벽) 보다 높은 형태의 공동체(무극)으로 귀환하는 (동귀일체하는 ) 모건의 선사학과 동일하다. 전자의 원시공동체는 생산력이 낮은 결과이고 후자의 무극공동체는 고도로 생산력이 발전한 결과이다.
부동귀에서 동귀일체로
동귀일체 사상에서 흥미있고 심오한 대목은 동경대전 입춘시와 용담유사에 등장한다. 수운이 아직 득도하기 직전해인 1859년 용담서사에 “도기장존 사불입 (道氣長存邪不入),세간중인 부동귀(世間衆人不同歸)”란 글귀를 써붙였다.
자신의 심신에는 도기가 넘쳐흘러 사악한 것이 침입할 수 없으며 자신은 세상사람과 같아지지 않으리라고 써붙인 것이다. 당당한 자부와 자기확신과 결의의 표현이다. 이 때 이름을 제우로 개명했는데 자신이 어리석은 대중을 구제하겠다는 경륜과 포부, 단호한 결단을 표명한 것이다.
하지만 이는 자신과 대중을 구별하는 지식인들의 흔한 지적 컴플렉스이자 위계적 감성이다. 레닌의 직업적 혁명가 조직론은 이러한 경우의 대표적인 사례이다.전위와 대중을 구별하여 대중을 의식화하고 지배하고 대상화하고 스스로는 무오류성의 신화를 확신하지만 사실은 아집과 독단일 수 밖에 없으며 노자의 도덕경과 용담유사에 의하면 자신이 항상 옳다는 병 즉 자시지벽일 뿐이다. 용담유사의 표현대로 한마디로 “우숩다”,“가소절창”이다.
레닌은 일평생 이 엘리트적 아집과 독선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했으며 결국 전시공산주의 시절 농민대중을 주적으로 간주하여 곡물을 강제몰수하고 저항하는 농민을 총살마저 했다.그러다 결국 평화적으로 봉기한 크론슈타트 혁명전사들을 대학살했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교육자가 교육되어야 한다고 포이어바흐테제에서 주장한 바 있다.
수운은 득도한 후에 자신이 대중과는 달리 탁월하다는 부동귀가 위계적 감성,지적 치기, 오만,독단으로 하나의 미망,수치임을 대각하였다.
자신의 무지, 오만,독단,뻔뻔함으로 기인오세한데 대해 수치를 느꼈다.
용담유사 교훈가에는 하느님이 네가 뭘 그리 잘났다고 세간중인부동귀하냐고 꾸짖었다고 되어있다.
“너도 역시(亦是) 사람이라 무엇을 알았으며,
억조창생(億兆蒼生) 많은 사람 동귀일체(同歸一體)하는 그 진리를
사십(四十) 평생(平生) 알았더냐.
세상사람들이 오다가다 부동귀 글귀를 구경해도 너의 비위 괜찮던가
억조창생의 재질 (능력과 특성)을 가려낸다는 것이 무슨 소용이며
총명노둔을 구분한들 무슨 소용인가?
세상사람 왜 저런가하고 의아탄식한들 무슨 소용인가
억조창생 동귀일체이다.“
총명노둔,빈부귀천 구별없이 다시개벽으로 억조창생 동귀일체한다.
수운은 세간중인부동귀를 지양하여 억조창생 동귀일체로 비약했다.
어리석은 대중을 구제하겠다는 제우의 방법은 부동귀가 아니라 동귀일체임을 득도한 것이다.
동귀일체는 그동안 수많은 학자들이 주장하였던 공정, 정의, 자유, 평등, 우애 ,무계급사회, 절대정신의 현현태, 구체적 보편체, 절대공동체, 인간적 사회적 현존재,사회적 관계의 앙상블 등 그 모든 것을 포함하고 넘어서는 심오하고 , 단순명료하고 이해하기 쉬운 개념이다.
동귀일체의 역사적 현실태는 요순성세, 동학농민혁명,프랑스 파리코뮌, 러시아 농업공동체 혁명,5.18 민중혁명, 6월항쟁,2016 촛불혁명등에서 나타났다.
요순지세는 모든 사람이 요순이 되었다. 즉 동귀일체가 되었다.
수운은 동학론에서 “요순지세 민개위요순”으로 표현했다.
용담유사 권학가에서 수운은 “요순성세 그 때라도 일천지하 많은 사람 사람마다 요순일세 ”라며 요순지세의 동귀일체를 말하고 있다.
그리고 “쇠운이 지극하면 성운이 오지마는 현숙한 모든 군자 동귀일체 하였던가?”
나라의 운세는 쇠락이 극점에 다다르면 성운으로 변증법적 반전이 오지마는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동귀일체가 되어야 하는데 현실이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일세상 저 인물은 도탄중에 있지않는가? 사지에 함몰된 출생들아 보국안민 어찌할 것인가?”하며 우국충정의 마음을 표현했다.
파리코뮌혁명
파리코뮌 혁명은 국가주의 혁명이 아니라 공동체혁명이다.
무엇보다 상비군, 억압적 경찰기구를 해체하고, 관료기구를 해체하고 입법, 사법, 행정의 모든 지위를 선거로 선출하고 , 국가를 코뮌연합으로 대체하여 국민의 통일성을 유지하고자했다. 코뮌은 노동자의 정부이자 국민의 정부였다. 즉 동귀일체를 형성하였다.
마르크스의 프랑스 내전에서 이러한 동귀일체를 설명하고 있다.
“코뮌이 빠리에서 성취한 전환은 진정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2제정시대의 저속한 파리의 흔적은 더 이상 없었습니다. 더 이상 파리는 영국의 지주들, 아일랜드의 부재지주들, 미국의 이전 노예소유주 그리고 벼략출세자들,러시의 이전 농노소유주 그리고 왈라키야의 보야르들(토지귀족)의 집결지가 아니었습니다.
시체공시장엔 더 이상 시체가 없었으며,야간 강도도 없고, 절도도 거의 없고, 거리는 2월혁명이래로 현실적으로 처음으로 다시 안전해졌고 그리고 그 어떤 경찰도 없이
그렇게 된 것입니다.
코뮌의 한 구성원은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살인, 강도,사람에 대한 폭행등을 듣지 못했습니다.경찰이 그의 모든 보수적 친구들을 베르사이유로 함께 휩쓸고 간 것아닌가 싶습니다. ”
화류계의 여인들은 가족과 종교 그리고 무엇보다 재산을 갖고 도피한 남성 즉 자신들의 보호자의 자취를 따라갔습니다.그녀들 대신에 영웅적이고 고결하고 자기희생적인 파리의 진정한 여성들이 표면에 떠올랐습니다. 일하고 생각하고 투쟁하고 피흘리는 파리는 새로운 사회를 준비하느라 문앞에 식인귀들이 문앞에 있다는 것도 망각한 채 역사적 창의성의 열정에 빛나고 있었습니다. “(마르크스, 프랑스내전.1871))
모두가 하나되어 역사적 창의의 열정에 빛나는 것 그것이 동귀일체 혁명의 형상이다.
러시아 농민공동체 혁명
러시아 농민공동체 혁명은 레닌주의와 크게 대립한다. 마르크스는 러시아 농민공동체를 연구한후 자본론 시초축적론에서 서술한 생산자와 생산수단의 분리라는 자신의 주장을 서유럽에 한정하는 것으로 수정하고 나아가 러시아 농민공동체는 러시아 사회 재생의 요소이자 우월성의 요소라고 주장하였다.
반면 레닌은 농민공동체는 해체되어야 할 중세적 유물,소농의 마을,분할지 보유를 위한 조합으로 간주하고 농민공동체 , 협동조합, 집단 경작을 웃기는 소리로 매도하고 토지의 국유화를 강력 주장하였다.
그러나 1917.2월혁명과 10월혁명사이에 농민들은
농민공동체를 통해 지주토지를 강제로 몰수했다.쿨락의 개별농장,자본가의 대농장도 접수했다.즉 지주적소유, 자본가적 소유, 개별적 소유등 모든 사적소유를 지양한 것이다.
토지몰수와 재분배 주체는 개인이 아니라 농민공동체였다.
지주토지를 몰수하여 소소유로 사적분할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 소유로 전환시켰다.
레닌과 로자가 이를 소소유제 형성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공동소유,분할경작은 소생산이지만 소소유는 아니다. 공동소유, 분할경작은 트랙터 콤바인등 기계를 농민공동체가 전유한다면 공동경작,공동전유로 발전할 수 있다.
농민들은 토지의 사적소유, 매매, 임노동제,임차제도에 반대했다.
이것은 완전한 사회주의적 강령이다.
반면 중국의 토지개혁은 개별농민소유제 수립이었기에
토지 매매, 임대, 농업노동자 고용을 허용했다.
임시정부와 사회혁명당 우파는 제헌의회 소집시까지 기다리라고 했지만 농민들은 제헌의회없이도 짜르를 타도했다고 하면서 농민공동체를 중심으로 지주토지를 점거하였다.
그리고 몰수된 토지는 농민공동체가 관리하고 생계기준과 노동기준에 따라 경지를 분배했다.지주라도 스스로 경작할 의사가 있으면 경지를 분배했다.
농촌프로레타리아 자본가 지주 모두 공동체로 귀환하였다.즉 동귀일체가 된 것이다. 그리고 필요에 따른 분배와 능력에 따른 분배를 결합시켰다.
수탈자에 대한 수탈이 단순한 수탈이 아니라 상생으로 되었다.
농민공동체에서 토지와 노동의 권리는 하나의 기본권이었다.
이같은 농민공동체는 전시공산주의시절 레닌의 소농주적론에 의해 공격을 받았고 1930년 스탈린의 강제적 집단화에 의해 해체되었다.
5.18 민중혁명
5.18 민중혁명도 동귀일체를 형성하였다.
1.절대적 공포와 항쟁공동체체의 형성
반란군은 비상계엄의 전국확대,국회해산, 김대중 및 재야인사 연행, 학교휴교령, 학생운동지도자 예비검속등, 군의 학교 점령등 전면적 공포를 주었다.
전남대는 휴교령이 떨어질 경우 학교앞에서 모이자고 사전 약속되어 있었으므로 학생들은 교문앞에서 시위를 시작하고 연이어 금남로로 진출하였다. 5.18 오후 4시까지는 반란군은 금남로등 도심에는 배치되지 않았으므로 그 시간에 투쟁대오를 형성할 수 있었다. 저녘에는 일부지역에서 각목, 솨파이프, 식칼등으로 무장해 오히려 반란군을 격퇴할 수 있었다.
반란수괴가 헌정유린으로 집권하기 위해서는 민중저항을 억압해야 했으며 억압을 위해서는 절대적 공포를 유발해야 했다. 이를 위해서 반란군이 사용한 방법은 광주공동체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전시적 폭력이었다.
살인공수는 광주 공동체 전체를 적으로 삼아 진압봉으로 무자비하게 내리쳐 피투성이를 만들고 이를 말리는 할머니 할아버지등도 무차별하게 곤봉으로 내리치고 여성의 가슴을 대검으로 희롱하거나 난자하고 임산부 배를 가르는 등 인륜성을 철저히 유린하였다.
반란군은 인륜성과 공동체를 철저하게 유린했다.
그래서 5.18 민중혁명은 인륜성 수호를 위한 공동체 혁명이었다.
시민들은 절대적 공포로 인해 저항에 나서지 못하는 자신에게 수치,증오,모멸감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마음 약한 베드로가 닭울기전 예수를 세 번 부인한 자신의 비겁함에 대한 모멸감이었다. 아울러 개인적 이해관계의 근저에 놓여있던 인륜성,존엄성,사회적 본능을 자각하게 되었다.
시민들은 점차 너와 나의 경계,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서게 되었다.
죽음 자체가 일상적이 되어 생사자체가 목숨건 투쟁이 아니라 평범한 운명으로 받아들인다.
“우리 가신 님들을 따라 다같이 죽읍시다!”라는 슬로건이 20일부터 나온다.
나의 자유를 위해 나의 인간으로서 존엄을 위해 다같이 생명을 내걸자는 것이다.
이로서 5.18 민중혁명은 인륜성을 죽음으로 사수하는 공동체 혁명으로 되었다.
시민들은 집회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자연발생적으로 돌, 쇠파이프, 화염병등(1850.5.18.녹두서점에서 김 상집, 윤 상원등이 한국현대사 최초 화염병 제작 ) 시위도구를 갖추게된다.
살인공수는 20일 저녁부터 수세로 몰린다.
20일부터 나오는 “우리 가신 님들을 따라 다같이 죽읍시다!”라는 슬로건은 항쟁공동체의 정신이다.
20일 오전부터 대인시장 아주머니들이 시위대에 제공할 주먹밥을 만들기 시작했다.
전 옥주 ,차 은숙씨등이 자연발생적으로 19일 밤 12시부터 집회선동자로 나서게 되었다.
살인공수의 폭력으로 쓰러진 시민을 택시에 태웠다는 이유로 택시기사에게도 무차별 폭력을 행사하자 5.20일 저녁에는 버스와 택시 200여대가 전조등을 켜고 경적을 울리며 시위대에 참여하였다. 5.20일 23:00시 광주역 부근에서 계엄군의 최초발포로 시민 2명이 사망하였다.
5.21일 13:00시 애국가와 함께 살인공수의 집단발포가 있었고 연이어 광주시민은 장갑차, TNT확보, 지방무기고에서 칼빈소총 확보, 시위대 전남대 병원 옥상에 기관총 (LMG) 2 정 설치등 일련의 무장을 갖추었다.
모든 혁명에서 방법이란 어떤 선험적 관념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계급역관계와 투쟁형태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처음에는 비폭력적 평화적 방법으로 시위를 했지만 살인공수의 무자비한 폭력과 발포에 대응하다보니 시민들도 점차 각목, 솨파이프, 화염병등으로 무장하고 발포이후에는 장갑차, 기관총, 칼빈소총으로 무장하게 되었다.
살인공수는 15:30 분 도청에서 조선대로 철수하고 항쟁공동체는 해방공동체로 발전되었다.
동귀일체의 형성과 반란군부의 분열공작
광주의 각계각층은 하나로 묶였다. 계급적 이해관계를 넘어서 공동체의 위기에 대응하기 위하여 하나로 묶였다.20일부터 대인시장 아주머니들은 길거리에 솥을 걸어 시위대에 김밥,주먹밥을 해주고 상점주인들은 음료수 빵등을 공급하고 차주들도 자기 생산수단인 차량을 시위도구로 내주었다. 일부 농민들이 무수장삼을 걸쳐입고 죽창들고 시위에 참여하였다. 해방광주 첫날 5.22일 시민궐기대회에서 광주시 양대폭력조직인 오비파와 화신파의 두목들이 시민들의 투쟁에 협력할 것을 약속하였다. 황금동 술집아가씨들도 세숫대야에 시위대가 씻을 물을 담아놓았다. 그리고 헌혈에도 적극 앞장섰다. 삶과 죽음의 경계, 너와 나의 경계가 무너진 동학의 동귀일체의 경지가 열리었다. 그러한 동귀일체는 단지 감정이나 상상의 정신적 공동체가 아니라 투쟁과 연대의 현실적 공동체였다. 시민들은 단지 아리랑 노래에서도 동귀일체를 체험하고 피끓는 전율을 느끼고 일체감과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죽음마저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거대한 사회적 에너지,민중지기의 체험은 향후 한국사회 총체적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한편 항쟁공동체를 최 정운교수는 절대공동체로 파악하고 있는데 절대공동체 개념이 모호하다.여기서 최 정운 교수의 절대공동체가 사회적 경제적 현실적 공동체가 아님은 분명하다. 최교수는 절대공동체를 절대정신의 현현태로 파악하거나 아니면 정신적 정서적 일체감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사유재산 관념은 완전히 용해되어버렸다. 그러나 이 상태는 공산혁명처럼 누구의 재산을 빼앗아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재산을 모두를 위해 나눔으로써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시민들은 상행위를 존중했고 서로의 재산을 보호해주었다. 또한 이 재산의 나눔은 각자가 공동체를 위해 목숨을 걸고 적과 싸우는 존재인한 당연한 것이었고 따라서 이 나눔은 개인의 생명과 공동체의 삶이 일치됨으로써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또한 인간의 존엄성이 절대공동체에서 객관적으로 확인된 이상 사회적 지위를 차지하기 위한 생계를 넘어선 개인의 재산은 아무런 필요도 없었다. 당연히 이곳에서는 모든 개인이 지고의 존엄성을 인정받는 이상 계급도 없었다. 나아가 이곳에는 개인이 죽음의 공포로부터 자유로운 이상 유한성이 극복되고 시간이 아무런 의미를 갖지않는 영원의 공간이었다. 또한 죽음의 공포를 절대공동체로 극복하는 경험은 모든 세속적 감각과 번뇌로부터 해방이었다. 여기에는 우리의 일상생활의 모든 욕망과 이상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전체적인 삶, 그 자체만이 있을 뿐이다. ”(최 정운,오월의 사회과학, 오월의 봄, P186)
현실적 공동체는 생산자와 생산수단의 분리가 지양되어야 하는데 최 교수는 가상적 관념적 공동체를 절대공동체로 주장하고 있다.
마치 사유재산 관념이 소멸 용해됨으로써 절대공동체가 실현될 수 있다고 망상한다.
해방광주의 유한성, 상대성, 계급성으로 인해 반란군부의 직접적 대립물로서 임시혁명정부는 수립되지 못했으며 그대신 관변수습파 즉 투항파가 형성되었다. 생산계급에 대한 전유계급의 국민적 전쟁도구로서 반란군부의 성격은 철저하게 은폐되었다.
27일 새벽 시민들은 거리로 나오지 않았다. 만약 물질적 이해관계에 의한 현실적 공동체가 형성되었더라면 시민들은 27일 새벽 모두 거리로 나섰을 것이다.
한편 반란군부는 22일 시민으로 위장한 프락치들을 침투해 집회장소에서 선동하는 전 옥주 차 은숙씨를 간첩으로 매도해 체포했다.
25일은 장계범을 도청에 침투시켜 독침조작사건을 연출했으며 그리고 도청주도로 투항파로 관변수습파를 만들어 항쟁파에 대립시킴으로써 혼란을 초래했다,당시 투항파의 주장은 무기를 반납하고 반란군부에 항복하자는 것으로 반란군을 헌정유린세력이 아니라 현실적 합법적 국가권력으로 인정하는 것이었다.
헌법제정권력으로서 민중과 시민군의 승리의 담보는 투쟁과 무장의 전국적 확대였다.
처음에는 무장이 지역방위대로 확대되었으나 곧 투항파에 의해 무기회수가 실시되어 지역방위대는 와해되었다. 투항파의 논리는 생명보호를 위해 안전사고의 위험회피나 질서를 위한다는 것으로 계급적 편견이거나 허황된 논리 아니면 굴종적 논리였다. 26일에는 투항파가 무조건 무기반납을 결정해 시행하려고 하자 윤 상원 박 남선등 항쟁파에 의해 무력저지 되었다.
도청 무기고 수비대는 도청에 있던 TNT의 뇌관을 항쟁지도부 몰래 반란군의 폭약전문가를 동원하여 제거하였다.
항쟁지도부가 시민이 아니라 시민군을 투쟁주체로 한 도청사수 전술은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전술이었다. 시민들은 여러 시행착오를 겪은후에 25일 최종적으로 김 종배를 대표로, 윤 상원을 대변인으로 하는 민주시민투쟁위원회라는 항쟁지도부를 결성하고 최종적으로 요구사항을 정리하였다. 그러면서 현 과도정부 즉각퇴진, 전 두환 처단, 계엄령해제, 민주인사들로 구국 과도정부 수립, 민주정부 수립을 요구하고 최후의 일각, 최후의 일인까지 투쟁할 것을 결의했다.
도청사수와 6월항쟁
윤 상원 전사의 말대로 도청을 죽음으로 사수했기에 함께 죽지 못한 죄, 미안함, 부채감으로 인해 향후 민주화 투쟁의 동력이 되엇다.
5.18 민중혁명시 시민군 상황실장 박 남현은 다음과 같이 혁명적 민중지기를 증언하고 있다.
“우리는 단순히 지역감정이나 개인감정으로 일한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그러한 힘이 쏟아져 나올 때는 그만한 상황이 전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누가 우리를 욕하고 나무랄 수 있는가?백 번의 공부나 학습보다 한 번의 행동에서 체득한 그 어마어마한 사건 나는 이것을 존중한다. 이것이 나에게는 생명으로 와 닿기 때문이다.”(박 남선 1988,223)
민중지기를 직접 간접으로 체험한 산자들은 다시 투쟁의 힘을 얻었다.
5.27일 새벽 도청에서 박 영순 학생의 마지막 방송에서 언표된 “ 계엄군이 쳐들어 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우리를 잊지말아주십시오” 말은 광주 아니 한국 민중들의 가슴에 대못이 되고 피멍이 되고 문신이 되었다.
이후 박관현 열사는 교도소 단식투쟁중 사망했다. 그러한 가열찬 투쟁은 군부독재뿐아니라 공범인 미국을 향해서도 미문화원 점거투쟁등을 통해 행해졌다. 결국은 6월항쟁에서 백만 시민들이 시청앞에 투쟁으로 집결하여 동귀일체를 이루고 민주화를 실현했다. 그리고 나아가 광화문에 200만 시민이 동귀일체를 이루어 촛불혁명을 수행하였다.
한국혁명은 동학농민혁명을 시원으로 하는 보국안민의 동귀일체 혁명이다.
도올 김 용옥선생님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우리는 스스로의 혁명을 논해야 한다. 동귀일체를 통하여 보국안민을 달성하는 새로운 혁명을 논해야 한다.”(김 용옥 역, 용담유사, 통나무,p237)
21세기 혁명은 동귀일체 혁명이다.
19세기가 부르주아 혁명의 시기이고 20세기가 사회주의 헉명의 시기라면
21세기는 동귀일체 혁명의 시기이다. 개인의 절대적 존엄과 존엄한 개인들의 동귀일체이다.
이를 위해 사상개벽, 경제개벽,사람개벽이 요구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