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 앞에 서다
이성애
딸 바보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어릴 적에 외할아버지의 귀여움을 많이 받았다. 환하게 웃으시고 안아주시고 토닥거려주시던 외할아버지. 우리 가족은 거의 외가에서 많이 지냈다. 어머니의 삶이 고단할수록 우리는 외가에서 지내는 날이 많아졌다. 기억 저편에서 멈추어 있었던 거창 냇가의 조약돌과 잔잔히 소리 없이 흐르던 냇물이 다시 가슴 속에서 흐른다.
무료한 한 날 비라도 오면 처마를 따라 떨어지던 비를 손등에 맞았다.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촉감과 소리를 들으면서 놀았다. 가끔은 직장간 막내 이모의 화장품을 꺼내 얼굴에 바르기도 하면서 심심함을 달래기도 했다.
몰랐다. 친정어머니가 얼마나 힘든 삶을 살고 계신지를 그때는 몰랐다.
시간이 지나서야 알았다.
기억 속에는 아버지의 자전거도 있다. 자전거를 타고 외출에서 돌아오시면 집안을 둘러보시면 성에 차지 않았는지 오빠를 꾸짖던 아버지. 부지런히 소여물 끓이시던 아버지.
무섭고 엄했던 아버지는 유난히 나를 아끼고 귀여워하셨다. 무서운 아버지께서 유독 딸을 사랑해서인지 몸이 약하다고 9살에 학교에 보냈다.
오빠에게는 무서운 아버지이시고 나에게는 인자하신 아버지. 오빠는 늘 꾸중을 듣지만 나는 주로 칭찬을 들었다. 나에게 사랑을 많이 주시고 인자하신 아버지는 모든 가족에게는 엄격하고 무서운 분이셨다. 특히 어머니에게는 너무나 가부장적이고 독단적인 분이셨다. 아버지와의 삶은 어머니에게는 고통이었다.
고등학교 때 함께 잠을 자던 어머니가 아버지가 꿈에 나타나시면 벌떡 일어나셔서 중얼거리시면 집 안과 밖으로 소금을 뿌리셨다.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건만 아버지에게 보답은커녕 미운 감정만 남았다. 아버지는 오래전에 멀리 하늘나라로 가셨다.
오랜 세월이 지나고 이제 세월의 나이를 먹어서인지 아버지에 대한 미운 감정도 흐려졌다.
아버지,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초등학교 때 있었던 이야기
“아이고, 어디 갔다가 왔노?” 땅거미가 질 무렵 집에 들어서니 어머니께서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탄식하셨다. 아침에 언니에게 놀러 가니까 형부가 볼일로 대구에 간다고 해서 동생과 나는 따라나섰다. 어디에 갔는지는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다. 시내를 다닌 것 같기도 하고 서문시장도 갔던 것 같다. 무슨 음식을 먹었는지 기억에는 없다. 고령으로 돌아오는 금산재 구불구불한 고갯길을 넘어서 신나게 돌아왔다. 재미있고 신나는 나들이였다. 그런데 집에 돌아오니 어머니의 걱정과 안도를 만났다. 우리는 그냥 새로운 곳에 가고 싶어서 따라나섰는데 어머니에게 걱정덩어리를 하루 진종일 안겨드렸다. 어머니는 뒤늦게 우리 남매가 형부를 따라 대구에 간 줄 알고 너무 놀라고 걱정을 하셨다. 무사히 돌아와서 안도하는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때는 몰랐다. 왜 그렇게 걱정을 하셨는지.
세월이 지나서 생각하니 참 순수한 시절이었다. 돈도 먹을 것도 다 귀하던 시절에 어린 처제와 처남 데리고 여기저기 구경시켜 준 형부는 착한 사람이었다. 부모 일찍 돌아가시고 가진 것 없고 의지할 곳도 없는 형부에게 언니와의 만남은 행운이었다. 언니의 신접살림은 단칸방에서 시작했다. 그때 나는 철없던 나이라서 그런지 먹고살기 빠듯한 언니에게 자주 놀러 갔다. 가진 거 없고 열심히 노력하는 게 인생 밑천이었던 형부는 늘 처가 주변에 사셨다. 그러던 형부가 내가 고등학교 때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교통사고로 세상과 이별하셨다. 그 시절 나는 대구에서 고등학교 다녔는데 언니네 가족과 같이 살았다. 함께 살던 형부가 하루아침에 돌아가시고 나니 무서웠다. 세상이 적막이었다. 멈춤이었다. 정 떼려고 무섭다고 하던데 화장실 가는 것도 무서웠는데 세월이 지나니 무섭지도 않고 형부가 그립다가 잊어버렸다.
요즘 뉴스에 온갖 나쁜 이야기들이 많이 나온다. 그때도 나쁜 일들이 있었기에 어머니께서 걱정을 많이 하신 거 같다. 착한 믿음은 결코 사람을 배신하지 않는다. 형부가 돌아가시고 수성구 어느 소박한 절에 맡겨 제사를 지냈다. 논과 밭이 보이는 길을 버스 창 너머로 보면서 형부 제삿날에 절에 가던 아련한 추억이 문득 생각났다.
어리고 어린 자식 놔두고 하루아침에 세상을 떠난 남편을 잃은 언니의 그 절망감은 세월이 얼마나 지나야 치유가 될까.
중학교 때의 이야기
중학생 시절 잠시 남문시장 인근에서 한 달간 살았다. 부산에서 대학을 다니던 언니가 엄마에게 “아이들 방학 때 대구에 가서 학원에 다니는 게 좋겠다. 더 열심히 공부에 집중할 것이다.” 하였다. 자녀 공부에 관심이 많은 엄마께서는 남문시장에서 장사하는 감나무 집 아들네 집으로 남동생과 나를 보냈다. 태어나서 한 번도 하지 않은 자취생활을 친척도 아닌 집에서 했다. 그 집은 한옥이었는데 주인 부부는 남문시장 가게에서 숙식하면서 장사해 집에 자주 오지 않았다. 가게가 좁아 주인집 어린 남매는 잠과 일상생활은 우리와 같이했다. 둘만 지내다가 우리가 있어 좋았는지 다정하게 잘 대해 주고 잘 따라서 친하게 지냈다.
나는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밥을 해서 엄마가 미리 마련해준 반찬으로 동생과 밥을 먹고 유신학원까지 걸어서 공부하러 갔다. 학원이 끝나면 남문시장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길을 익혔다. 차츰 길이 익숙해져 시내까지 주변을 탐색했다. 휴대폰이 없던 시절이라 엄마에게 연락할 때는 공중전화를 이용했다. 엄마는 우리 남매를 믿고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한 달간 유학 생활을 끝내고 집으로 왔을 때 많이 기특해하셨다.
우리나라에서 독일에 간호사를 파견하던 때다. 외사촌 언니가 독일 간호사로 갔다. 언어와 문화가 다른 그곳에서 간호사 생활이 얼마나 힘든지 모른 채 매달 보내오는 월급이 자랑이었다. 엄마에게도 꿈이 생겼다. 일곱 명의 자녀를 키우는 고단하고 힘든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찾았다. 딸 중 하나가 간호사가 되는 것이다. 언니는 노력해 엄마의 꿈인 간호사가 되었다. 보건소에 근무하다가 결혼 후 직장생활을 접었다. 그때 엄마의 섭섭함과 상실감은 무척 컸다. 다행스럽게 나에게 간호사가 되기를 강요하지 않으셨다. 그냥 좋은 가방 들고 예쁜 옷 입고 건강하게 자유롭게 즐기면서 살기를 바랐다.
지금 생각하니 엄마와 언니는 내가 작은 곳에 머물지 말고 더 큰 곳에 자리 잡기를 기대했다. 그때 낯선 곳에서 생활의 두려움도 모르는 채 학원에 다니고 일상생활의 모든 걸 책임졌으니 간이 컸다는 생각이다. 잠깐의 유학 생활이 인생에 얼마나 도움이 되었을까? 그래도 빗물이 모이고 모여서 냇물이 되고 강물이 되듯이 살면서 겪은 많은 경험이 모이고 모여서 지금이 있는 것 같다. 늘 지지해주는 어머니께 감사드립니다. (6.3)
아름다운 친구를 생각하면서_자유에 대한 욕구
시골 학교에서 낯선 대구에 있는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첫날 밤을 보내면서 나는 생각했다. ‘나를 도와주는 이는 없다. 오직 스스로 모든 걸 책임져야 한다.’ 긴장감으로 선잠을 잤다. 혼자 챙겨서 학교에 가는 것, 낯선 아이들 틈에 끼여 생활하는 것에 익숙해지기까지는 몇 달이 걸렸다. 외로움과 싸우고 독립성에 익숙해지기 위해 노력했다. 언제부터인지 자연스럽게 고향을 떠나 대구에 온 아이들과 친해졌고 서로 챙겨줬다. 그렇게 쌓인 우정이라서 그런지 각기 다른 대학을 가도 여전히 만났고 같이 여행도 다녔다.
80년 초는 모든 일이 양파껍질처럼 벗겨도 벗겨도 진실은 숨겨져 있을 때였지만 우리의 속내는 훤히 들여다보이는 유리처럼 서로의 마음을 너무나도 잘 알고 지냈다. 뭉쳐서 9박 10일간 설악산 여행은 아직도 아련한 추억으로 남았다. 한 친구는 이미 우리 곁에 없다. 20대 중반 친구는 여행 중 교통사고로 다른 세상으로 떠났다. 4명이 잘도 뭉쳐서 다녔는데 사고가 나던 날, 친구는 여행 중 버스가 전복되어 그 자리에서 우리 곁을 떠났다. 장례식이 끝난 후에 우리는 알았다. “사고 당시에는 경황이 없어서 연락을 못 했다. 유품을 정리하다가 수첩에 깨알같이 적힌 글들을 보니까 생각이 나서 전화했다.” 울먹이며 말씀하시는 친구 어머니의 슬픔에 찬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맴돈다. 그렇게 친구는 추억만 남겨두고 갔다. 가슴에 슬픔을 담아두다 보니 그저 조용하게 20대를 보냈다.
결혼해서 양육과 살림 사느라고 바쁘게 지내는데도 친구는 가끔 꿈에 나타났다. 함께 걸었던 길에서, 같이 독서 토론했던 다방에서, 설악산의 구석구석 다녔던 그 산등성이에서 만난다. ‘나는 잘 있어. 보고 싶을 때는 꿈에서 만나자.’ 하듯이 말없이 웃는다. 어떨 때는 친구는 솜이불처럼 낙엽이 덮인 늦가을 경주 토함산의 그 숲에 4명이 나란히 누워 함께 웃으며 손을 맞잡았던 그때의 순진하고 착한 모습으로 꿈속에 나타난다. 빛나는 젊음이 있던 그 시절로 친구는 나를 데리고 간다. 그리고, 때 묻지 않은 아름다운 모습으로 환하게 웃음 짓는다. 내가 힘들 때는 "힘들지? 용기를 내"라고 하듯이 말없이 아름답게 웃는다. 그러면 나는 힘든 걸 잊고 웃는다. 잊지 않고 나를 찾아주는 내 친구를 생각하면서 자유로운 삶, 내 의지대로 살겠다는 마음으로 오늘도 나는 내 마음에 귀를 기울인다.
사랑과 소속에 대한 욕구
어머니는 결혼생활이 너무 힘들어서 도저히 못 살겠다는 생각으로 걸어서 부모님이 계신 거창까지 가셨다고 한다. 정작 헤어지지는 못하고 가부장적인 아버지와 사시긴 사셨지만 헤어져 사신 거나 다름없는 삶을 사셨다. 지금도 아버지가 꿈에라도 나타날까 봐 두렵다는 어머니의 굴곡진 삶 속엔 우리의 삶도 있다.
형제가 많고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어서 그런지 우리는 외가에 자주 가 있었다. 외가에서는 우리에게 살갑게 잘해주셨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께서 아껴주셨던 기억은 세월이 많이 흘렀는데도 늘 가슴 속에 그리움으로 남아있다.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 집을 나간 아버지. 바람이 나서 새 사람을 만나 살림까지 차렸으니 우리 가족에게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곱지 않다. 말년에 병으로 투병하실 때 집으로 돌아오셨다. 집으로 돌아오신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원망도 있고 그리움도 있다. 아버지의 사신 삶은 다 모르지만 나에게 끼친 영향은 크다.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살았다. 그래서인지 사랑과 소속에 대한 욕구 강도가 크다. 욕구는 거의 이루어진 편이다. 믿음과 사랑이 있었기에 가정은 늘 화목하다. 앞으로도 지금처럼 서로 존중하고 아끼면서 살았으면 한다.
고우신 우리 어머니
남동생이 셀카로 찍은 어머니의 사진을 보내왔다. 주간보호센터에서 초등학생처럼 그림에 색칠하는 어머니, 마이크를 쥐고 노래하는 어머니, 뭔가를 조물조물 만들고 계신 고우신 우리 어머니. 고마운 동생과 전화통화를 하고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다.
“제주도에서 언제 왔노? 시어머니 잘 계시느냐? 부모님 잘 모셔야 한다.”
기억의 조각이 이래저래 흩어졌다. 백 세를 넘기지 못하고 안타깝게도 시어머니께서 돌아가셨을 때 친정어머니께서 많이 슬퍼하셨건만 바로 잊으셨다. 돌아가신 지 40여 일이 지났는데도 안부 전화할 때마다 “시어머니 잘 계시느냐?”고 하신다. 그리고 “부모님께 잘해야 복 받는다. 잘해라” 말씀하신다. 울 어머니는 세상 이치를 참 잘 아시고 마음도 넓고 좋으신데 세월을 이길 재간은 없으신가 보다.
초등학교 때, 어머니께서 곱디고운 한복을 입으시고 학교에 오셨다. 울 선생님 만난다고 오셨다. 딸이 자랑스러웠는지 먹고살기도 바쁜데 일 팽개치고 오셔서 선생님 만나 뵙고 가셨다. 바람에 치마가 휘날리자 손으로 치맛자락 살짝 잡으신 고우신 우리 어머니. 별난 아버지와 사신다고 고생도 많으셨는데 그 고생도 우리들의 웃음으로 다 녹아버렸는지 용하시게 잘 버티고 버티셨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우리 어머니는 새색시 때 도저히 못 살겠다고 거창까지 그 멀고 먼 길을 걸어서 친정으로 가셨다. 자식이 있으니 어쩌라. 다시 집으로 오셔서 별난 아버지 비위 맞추시며 사셨다. 그러다 보니 자식이 일곱이나 되었다.
신명여고 다닐 때 예절관에서 며칠간 교육을 받을 때 어머니께서 한복을 곱디곱게 입고 오셨다. 먹고살기도 바쁜 데 다 팽개치고 오셨다. 딸이 자랑스러웠는지 금산재 굽이굽이 돌고 돌아 넘고 넘어서 오셨다. 시골서 대구로 유학 온 딸이 대견했는지 오셔서 딸의 큰절을 받으시고 자랑스러워하셨다.
대학에 떨어져 낙담해 있을 때 어머니께서 오셨다. 그리고는 “대학에 가라. 예쁜 구두 신고 책 들고 대학 다니는 네 모습 보고 싶다.” 하셨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의 말씀에 따라 대학에 갔다. 어머니의 보호와 격려로 여태까지 편안하게 잘 살았는데 세월이 우리 어머니의 기억을 가져갔나 보다.
“시어머니 잘 계시느냐?” 부모에게 잘해라”
이미 다른 세상으로 가셨건만 친정어머니의 기억 속에는 늘 웃음 띤 시어머니가 계신다.
겁 많은 곰
그녀는 덩치가 큰 이웃사촌이다. 아이들 어릴 때 도서관에 가다 보면 집 앞 골목에 앉아서 이웃들과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는 그녀를 늘 만난다. 키가 크고 뚱뚱한 데다가 억센 억양이 세상에 무서울 게 없어 보인다. 골목 지킴이인 그녀와 막연히 인사만 하는 사이로 지내다가 어느 날 말을 섞었다. 형식적인 인사에서 조금씩 속내를 털어놓다 보니 어느 순간 다정한 이웃이 되었다.
그녀가 십오 년 전쯤 말했다. “뭔가 보람된 일을 하고 싶다”라고. 함께 봉사활동을 했다. 만나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그녀의 수수한 매력에 빠졌다. 가까이하는 사람들의 온갖 걱정을 도맡아 한다. 사람들이 예사롭게 타고 오르내리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탈지 말지 망설이며 벌벌 떤다. 문화 탐방에서 케이블카를 탔을 때다. 불안한 마음에 아래로 펼쳐지는 아름다운 경치를 보지 못한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눈을 감고 내릴 때까지 두려움에 긴장했다. ‘어릴 때 어떤 충격이 있었을까? 칠십을 바라보는 나이인데 아직도 극복 못 했을까? 가슴 속에 어떤 응어리가 있을까?’ 내색하지 않지만, 내 마음은 안타깝다.
그녀는 요리를 잘한다. 많은 양의 요리도 척척 해낸다. 맛도 일품이다. 복지관 대형 가스레인지 뜨거운 불 앞에서도 용감하게 요리한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솜씨를 뽐내지 않는다. 힘이 들어도 푸념하지 않는다. 봉사활동 하기 전에는 밖에 음식은 절대로 입에 대지도 않을 뿐 아니라 물도 마시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그녀가 봉사 현장에는 먹기도 잘하고, 이웃을 위해 음식도 맛있게 한다.
그녀가 아프다. 어딘가 아픈지 말하지는 않는다. 아들과 병원에 갔다 왔다고 한다. 아파서 약을 먹는다고 한다. 나는 용감하게 혼자서 병원에 가는데 그녀는 아들이나 며느리를 꼭 데리고 간다. 그러면서도 장애인을 위한 봉사 현장에서 휠체어 미는 걸 주저하지 않는다. 음식을 나누기 위해 가스레인지 뜨거운 불 앞도 무서워하지 않는다. 그런 그녀지만 세상은 아직도 무섭단다. 그녀는 겁 많은 곰이다. 그녀는 어려움이 있는 이웃을 통해 상처를 치유 중이다. 어릴 적 상처가 무엇인지 몰라 보듬어 줄 순 없지만 나는 상처를 치유 중인 그녀를 좋아한다.
슬픈 눈빛의 단순한 그
슬픈 눈빛의 그는 매일 버스 정류장에서 기다린다. 언제 올지도 모르는 사람을 하염없이 기다리다 버스에서 내리는 나와 마주친다. 나도 그가 막연히 좋아 만나다 보니 사귐이 시작되었다.
같은 학과에 유별나게 친절하고 모든 일에 적극적인 친구와 자주 어울려 다녔다. 그의 본가인 가창에 놀러 가기도 하고, 시내 동성로에서 만나기도 했다. 만날 때마다 꼭 다른 친구들을 불러 모았다. 그 어울림에서 친구의 고등학교 동창인 슬픈 눈빛의 그를 만났다. 그는 열아홉 살에 아버지를 암으로 잃었다. 슬픔은 가슴에 꼭꼭 묻어도 눈빛은 감출 수가 없다. 슬픈 눈빛을 가졌지만, 조용한 성품이라 만날수록 좋은 감정이 생겼다. 그 역시 내가 좋았는지 매일 버스 정류장에서 나를 기다려 자주 만나곤 했다. 자연스레 결혼을 약속했다. 장남이고 이런저런 이유로 엄마의 반대가 있었지만 무난하게 결혼했다.
1985년 결혼할 때 13평 신평리아파트 살 돈이 충분했다. 평수가 작다는 이유 하나로 독채 전세로 신혼을 시작했다. 집값이 갑자기 올랐다. 세상 물정을 몰라도 너무 몰랐기에 경제적으로 힘들었다. 너무 뛴 집값에 집 살 엄두를 못 내도 결혼생활은 행복했다. 첫딸을 낳을 때는 세상을 다 가진 양 좋았다. 우린 행복한데 어머님이 걱정이 많으셨다. 손자를 봐야 한다는 것이다. 수년간 거듭거듭 하신 어머니의 불공에도 둘째 딸까지 낳았다. 어머님의 허탈함을 채우지 못했다.
몇 년을 더 전세살이하다가 어머님이 연로해져 본가에 들어가게 되었다. 전셋돈 받아 놓은 것을 알고 남편의 친한 친구가 사업에 돈이 필요하다고 사정해 차용증과 어음을 받고 돈을 빌려주었다. 바로 부도가 났다. 가진 돈 다 잃어 기가 막혔다. 세상 물정에 어두운 우리는 그래도 절망하지 않았다. 살다 보면 내리막이 있으면 오르막도 있으리라 생각하며 열심히 살았다. 살면서 사람이 내 마음 같지 않다는 것. 친구도 잃고 돈도 잃는 일은 이번 한 번만으로 족해야 한다. 마음의 경계선은 지켜야 한다. 가족보다 더 소중한 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슬픈 눈빛의 남편은 세월과 함께 본성으로 돌아갔다. 남편은 순수하고 단순하다. 살아가는데 단순은 불편하지 않고 편리하다. 나를 많이 의지해 복잡한 일은 모두 내 몫이다. 오늘도 남편은 “얼마 산다고.” 하면서 홈쇼핑에서 마음에 드는 물건을 바로 주문한다. (7.1)
어머니의 틀니
초등학교 때 이가 조금 썩어서 며칠 치과에 다녔다. 의료보험도 없는 시절에 이를 덮어씌웠다. 투정 부리지 않고 혼자 치과에 가는 딸이 대견했는지 갈 때마다 엄마는 웃으면서 치료 잘 받고 오라고 말씀하셨다. 지금 생각하니 적잖은 치료비인데 당연한 듯 치료를 받았다. 그때는 아프지는 않았다. 그런데 오늘은 마음도 몸도 아프다.
나는 아무 걱정 없이 치과 진료 의자에 눈을 감고 누웠다. 간호사 두 사람이 내 팔이 미세하게 떨린다면서 내가 마치 유리창 너머 사람인 양 아무렇지 않게 대화가 이어졌다. 간호사는 이를 심기 위해서는 피가 필요하다고 내 팔에 피를 뺐다. 나는 떨고 있었다. 잠시 후 선생님께서 잇몸을 마취한 후에 시술이 시작되었다. 드릴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나는 마음이 아팠다. 60살 넘은 나이에 주책없이 시어머니 생각으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행복했던 날을 떠올리려고 노력했지만 떠나기 전의 당신 생각뿐이었다.
온몸을 천으로 감싸고 있어서 시어머니의 고통은 볼 수 없었지만 평온한 얼굴이셨다. 영원한 이별 의식은 시작되었고 슬픔으로 여기저기 울음이 터져 나왔다. 장례지도사가 틀니를 가져왔는지 물었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집을 나설 때 틀니를 챙겨 왔었다. 관 속에 틀니를 넣어 드렸다.
내가 결혼했을 때 어머님은 노인이셨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연세로는 노인이 아니셨는데 노인이셨다. 치아가 성치 않아서 틀니를 해 드렸다. 얼마나 힘드셨을까? 그때는 몰랐다. 한동안 식사도 제대로 못 하셨을 텐데 그 고통을 몰랐다. 겪어봐야 안다고 나는 지금 임플란트한다고 고통과 함께 누웠다. 얼마 전 주전부리로 엿이 많이 들어간 강정 먹다가 앞니가 뚝 부러졌다. 치아에는 자신 있었는데 치아가 대책 없이 부러졌다. 미처 생각 못 한 일이 생기니 ‘아! 죽음도 이렇게 갑자기 찾아올 수 있겠다.’ 생각이 들었다.
백수가 다 된 어머님께서는 정신이 맑으셨다. 우리가 잊은 온갖 일들을 기억하시고 옛날에 있었던 일화를 실타래 풀어내시듯 많은 일화를 재미있게 말씀하셨다. 다친 날 “대문 밖에서 누군가가 불렀다. 부르는 소리에 밖으로 나왔는데 넘어졌다.” 겨울이었지만 언 땅도 없었는데 어머니는 넘어지셨다. 혼자 못 일어나셔서 바닥에 넘어진 채 한참을 누워 계셨는데 우연히 동네 분이 발견하고 집으로 모셔졌다. 시누이님의 황급한 전화와 함께 119차로 어머니를 대구로 모시고 오신다 해서 남편과 나는 병원에서 걱정을 안고 기다리고 있었다. 초조하게 2시간 정도 기다려도 오시지 않아서 시누이께 전화했다. 병원에 가시지 않겠다고 완강하게 거부를 하셔서 그냥 집에 계시기로 하셨다고 한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난 후 우리 부부는 의성으로 가서 고집 센 어머니를 119에 태워서 대구 병원에 왔다. 고관절이 완전히 부러졌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 그 고통을 어떻게 견디셨을까. 우여곡절 끝에 수술은 했지만 두 달도 못 되어서 어머니는 시름없는 세상으로 훌훌 가셨다.
딸에게
살아온 날을 돌아보니 많이도 살았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꿈많던 시절에 꾸었던 그 많은 꿈은 다 이루었는지 스스로 돌아보면서 이제는 아름답게 삶을 정리하는 꿈을 꾼다.
누군가에게 필요할 거라고 가지고 있던 물건들도 이제는 나에게 필요 없는 물건이라면 정리해야겠다.
돌아보니 누군가가 아니라 이제는 ‘나’가 중심이다.
내가 죽으면 화장해서 어머니 묻은 곳 바로 아래에 묻어다오.
그리고 간소하고 현대적인 감각으로 해줬으면 한다.
혼자 남은 아빠는 두 딸이 잘 챙겨줬으면 좋겠다.
스스로 하기보다는 무엇이든 챙겨주기를 바라는 사람인 만큼 세심하게 신경 써서 돌봐주기를 부탁해.
아빠가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살 수 있도록 딸들이 곁에서 많은 힘이 되어줘라.
딸들아,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해서 살아라.
지금처럼 서로 의지하면서 사이좋게 살아라.
가정에 충실해라.
인생을 즐기면서 살아라.
여유를 가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