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7장. 무당산(武當山)의 대 접전(接戰)
'너무! 너무 패도적이다!'
남궁혁이 자신의 아들을 바라보며 답답해오는 가슴을 쓸었다.
아들의 칼부림을 최대한 미루게 한 남궁혁의 염려가 바로 이것이었다.
비록 상대가 무림 명숙들을 몰살시키려한 사악한 세력이고 그들로 인해 목숨이 위태로웠다 할지라도 그들을 베어내는 아들의 칼은 절로 치를 떨게 만들었다. 지금은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태라 그런 것을 따질 형편이 아니겠지만 혈전이 끝나고 상처가 아물기 시작할 때쯤이면 과연 아들이 휘두른 칼에 목숨을 구했다고 감사의 말을 전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런 면에서 정파의 작태는 언제나 뻔했다. 악마의 칼, 마도의 칼을 몰아 내야 한다며 광분할 것이다. 남궁혁의 가슴이 천근 만근 무거워졌다.
"저런 죽일 놈!"
낙월봉이 이빨을 갈며 고함을 질렀다.
뻔히 두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할 일이었다.
순식간에 자신들의 최 정예병력이나 마찬가지인 척살대 세 명을 도륙 할 수 있는 사람이 저곳에 있을 줄은 몰랐다.
비록 내공이나 웅장함에서는 상대가 되지 않겠지만 정파무림의 모든 비전을 분석하여 최고의 살인 무학으로 탄생시킨 율자춘의 검결을 익힌 자들이 저들이었다.
충분한 여유를 두고 준비한 상태에서 정종무학을 익힌 사람들과 상대한다면 모르겠으나 지금처럼 예측하지 못한 곳에서 속전 속결로 나온다면 저들을 막을 수 있는 사람들은 없을 것이라 자부했다,
"크윽-"
다시 남궁우현의 칼이 추호의 망설임 없이 주춤거리고 있는 사내의 어깨를 가르고 지나갔다. 어깨에서 심장까지 비스듬히 갈라진 사내가 공포가 가득한 눈으로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며 쓰러졌다.
"물러서라!"
살귀의 칼이 다시 한 명의 척살대를 향해 겨누어지자 정신을 차린 누군가가 고함을 질렀고 남궁우현의 근처에 있던 혈영의 일원이 훌쩍 뒤로 물러섰다.
"모두 죽이고 말리라!"
암흑류의 기운을 온몸 가득 끌어올린 남궁우현이 물러나는 척살대 한 가운데로 뛰어들었다.
쨍-. 쨍강
"크윽-"
몇 마디 비명이 더 터지며 피보라가 튀어 올랐다.
"네 이놈!"
갑작스런 상황에 당황하는 무리들을 밀치며 손자겸, 등평부 등이 남궁우현 주위로 뛰어내렸다.
"이 죽일놈! 대체 네놈 정체가 무엇이냐?"
철가장의 집사 국상진이 칼을 빼들며 고함을 질렀다.
"더러운 간자놈들이 그걸 알 자격이 있더냐?"
남궁우현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국상진을 노려보자 국상진이 섬뜩한 기운에 움찔하며 한발 물러섰지만 곧 가슴을 진정시키며 서서히 살기를 피워 올렸다.
슈슈슉-
국상진이 기이한 자세로 기수식을 펼치며 남궁우현에게로 덮쳐갔다. 도무지 근원을 알 수 없는 사이한 칼부림이 남궁우현의 요혈을 노리고 혓바닥을 날름거렸다.
"허억! 어찌 저런...."
남궁우현의 잔혹한 칼부림에 놀라 뒤로 물러서 가슴을 진정시키던 백도 명숙들이 국상진의 칼을 보고 또다시 짧은 비명을 내질렀다.
국상진이 남궁우현을 향해 휘두르고 있는 칼은 자신들을 포위한 혈영척살대의 칼과 일면 엇비슷해 보였지만 그 보다는 훨씬 더 괴이하고 지독했다. 형과 식을 완전히 무시한 채 상대를 철저히 난도질하게끔 만들어진 방위를 짐작할 수조차 없게 만드는 칼이었다.
국상진의 칼이 남궁우현을 찌르고 지나가는 듯 착각을 일으키는 순간 남궁우현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흐릿하게 사라졌다가 일장 정도 옆에서 번쩍하고 나타났다.
"허억!"
목표를 놓친 국상진이 깜짝 놀라며 흐트러진 중심을 다잡고 칼을 다시 쳐들었다.
"저것은!"
"마. 마환보!"
누군가의 입에서 있을 수 없다는 듯한 불신의 비명이 흘렀고 그 동요는 순식간에 장내로 퍼져나갔다.
"제왕성의 개!"
자신으로 인한 장내의 동요와는 아랑곳없이 남궁우현이 나직이 으르릉거렸다. 그리고 뒤집어쓴 핏물보다 더 지독한 살기를 피워 올리며 국상진에게로 다가들었다. 자신을 쳐오던 국상진의 칼은 화천옥의 양피지에서 본 그 검결에 뿌리를 같이하고 있었다. 그 악마적인 검결로 인하여 부친이 주정뱅이로 전락하고 부친의 그런 모습은 한창 감수성 예민하던 유년의 나이에 부친에 대한 원망과 반항을 일삼게 했다.
"죽이고 말리라! 제왕성의 졸개들!"
"무슨 미친 소리냐?"
두 번씩이나 자신에게 제왕성을 운운하는 남궁우현을 보고 정작 국상진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함을 질렀다. 국상진으로서는 제왕성과 상관없이 율자춘의 검을 익혔을 뿐이었고 남궁우현에게는 율자춘은 곧 제왕성이 만든 괴물이었다. 둘 다 율자춘의 계략 깊은 곳까지는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죽어라!"
다가오는 남궁우현의 지독한 살기를 잠재우려는 듯 국상진이 다시 사이한 검초를 뿌렸다.
씨잉-
남궁우현의 넓은 도가 섬칫한 소리를 내며 허공을 갈랐다.
따다다-당-땅
수 십 개의 병장기가 한꺼번에 부딪히는 음향이 울렸고 그 사이로 그 음향만큼의 빛무리가 번쩍거렸다.
"크윽-'
국상진이 찢겨져 너덜거리는 손아귀를 부여잡고 급히 뒤로 물러섰다. 움켜진 손가락 사이로 선혈이 낭자했지만 놀란 가슴은 그런 것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방금 남궁우현에게 가닥가닥 막혀진 그 검결을 처음 대했을 때는 전율을 느끼다 못해 소름이 끼쳤다. 그리고 온 밤을 하얗게 지새우며 수년에 걸쳐 갈고 닦았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단 한 가닥도 남김없이 차단 당한단 말인가!
"어떻게 이럴 수가!"
국상진이 눈을 부릅뜨고 남궁우현을 노려보았다.
넓은 칼을 늘어뜨리고 자욱한 살기를 내뿜고 있는 남궁우현은 지옥에서 걸어 나온 살인마의 모습 그대로였다. 몇 번을 다시 보아도 저놈이 들고 있는 칼은 무겁고 두꺼운, 폭이 넓은 도였다. 그것은 마주칠 때의 육중한 느낌으로도 충분히 확인이 되었다. 그런데 어떻게 저 무거운 도가 자신의 검로를 한 가닥도 놓치지 않고 따라와 석벽처럼 빈틈없이 막을 수 있단 말인가!
'저 놈이야 말로 진정한 악마의 칼을 가진 놈이다!'
방금 저놈은 의도적으로 모든 초식을 막기만 했었다. 만약에 저놈이 막는 대신 잘라 왔다면 자신은 잘려진 검로와 함께 치명상을 입었을 것이다. 국상진의 심장이 자신도 모르게 떨려왔다. 그것은 옆에서 지켜보던 손자겸 등도 공통적으로 느끼는 바였다.
'저놈이었던가?'
손자겸이 미간을 꿈틀거리며 남궁우현을 노려보았다.
은하전장과 풍림방, 그리고 남궁세가에서의 참패의 원인이 결국 저놈이었던 모양이다.
'아니 최소한 세 놈 이상이었다는데!'
손자겸이 빠르게 염두를 굴렸다.
'그렇다면 어디엔가 더 있을지 모른다! 최대한 빨리 끝내야 한다!'
휘익-
손자겸이 긴 휘파람을 불었다.
그 휘파람 소리와 함께 산 아래쪽에서 한 겹 더 포위하고 있던 인원들이 날아들었다.
'무서운 놈!'
손자겸이 내심 침음성을 흘렸다.
장강수로연맹의 총채주 담우개의 빈틈없는 계획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교활하고 치밀한 그자는 이중의 포위망을 제안했다. 최 정예병인 척살대 수 십 여명을 이끌고 거기다가 자신들이 가세한 이번 계획에서 담우개는 혹시라도 포위망을 뚫고 도주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니 한 겹의 포위망을 더 주장했고 손자겸 등은 코웃음을 쳤다.
자신들 네 명만으로도 자신이 있었고 척살대는 그야말로 천라지망 역할을 할 것이었다. 그러나 담우개는 먼젓번의 실패를 언급하며 이중의 포위망을 강력히 주장했고 그래서 체면을 구기며 받아들인 것이었는데 이렇게 맞아떨어질 줄이야!
"모두 모여서 두 개의 검진을 만들어라! 그리고 최대한 빨리 저 놈들을 처치하고 자리를 떠나자!"
손자겸의 외침과 함께 신속하고 절도 있게 두 개의 검진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한 개는 남궁우현을, 나머지 한 개는 무림맹숙들을 둘러쌌다
"쳐라!"
손자겸의 신호와 함께 두 개의 검진이 풍차처럼 돌아가며 속에 갇힌 목표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악마 같은 놈들!"
남궁혁이 신음성을 흘리며 쉴 새 없이 찔러오는 칼을 막았다. 그리고 다른 검진 속에 갇힌 아들 우현을 바라보았다. 이미 몇 명의 무리들을 더 베어버린 우현이 자신보다는 부친이나 명숙들이 염려되어 어서 검진을 파해하고 빠져나오려 서두르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러나 손자겸의 신호에 따라 남궁우현을 둘러싼 검진은 이젠 적극적인 공세는 펼치지 않고 다가오면 뒤로 빠지고 물러나며 치고 들어오고 하며 남궁우현을 가두는데 주력하였다. 그러다 남궁우현이 다른 쪽이 신경이 쓰여 주의가 분산되는 순간이며 어김없이 악랄한 칼날이 찔러 들어왔다.
반면 명숙들을 둘러싼 다른 한 쪽의 검진은 압도적인 수적 우세를 무기로 하여 처음부터 사생결단을 내려는 듯 악랄하게 몰아붙였다.
이젠 명숙들의 호위무사로 온 젊은이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쓰러졌고 명숙들 역시 크고 작은 부상을 입으며 허물어지기 일보직전 이었다.
"크흑-"
결국 종남파 장문인 강문옥의 한 팔이 허공에 떠오르며 피분수가 터져 올랐다.
"강형!"
평소 친분이 두터웠던 형산파 장문인 좌무양이 급히 강문옥을 부축하며 날아드는 칼들을 막았지만 어깨와 등이 불에 데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살이 쩍 갈라졌다.
"이놈들-"
남궁우현이 이리떼에게 둘러싸인 대호처럼 칼을 휘두르며 쳐 나갔지만 둘러싼 무리들은 남궁우현의 전면은 철저히 회피하며 측면이나 후면에서 달려들다 남궁우현이 몸을 돌려 정면으로 대면하게 되면 저만치 물러나고 도 다른 측면이나 후면에서 공격해 들어왔다.
남궁우현을 검진 속에 가두고도 십 여명의 동료를 더 잃은 혈영의 무사들은 철저히 정면 승부는 피하며 뒤를 괴롭혔다. 그렇게 되면 머지않아 중과부적이 된 명숙들과 남궁우현이 서서히 스러져 갈 것이다.
"아악-"
날카로운 비명성이 울리며 아미의 유운(流雲)사태가 심장 깊숙이 박힌 칼을 잡고 무릎을 꿇었다가 고목처럼 쓰러졌다.
"유운사태!"
태성목이 처절하게 외쳤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이러다간 개죽음을 면할 수 없다!'
남궁혁이 눈길을 돌렸다.
"우현아! 여기는 더 이상 신경 쓰지 말고 너 혼자라도 빠져나가거라! 그래서 오늘의 일을 모든 정파무림에 알리거라!"
그러는 순간에 날아든 칼이 남궁혁의 허리를 할퀴었고 그것을 본 남궁우현이 포효를 터뜨리며 무작정 앞으로 치고 나갔다.
서걱-
살점이 갈라지는 느낌이 등줄기를 훑고 지나갔지만 그 대가로 앞에 있던 무리들의 목을 두 개는 더 날리며 검진을 빠져나와 명숙들과 합류할 수 있었다.
"이젠 더 이상 두개가 필요 없다! 검진을 하나로 합치고 저놈들을 도륙하라!"
손자겸의 외침에 따라 검진이 하나로 형성되었고 또다시 쉴 새 없는 공격이 이어졌다.
쨍- 쨍
남궁우현의 가세로 명숙들의 위험이 많이 줄어들었지만 남궁우현의 등에서 흘러나오는 피의 양이 결코 적지 않아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염려스러웠다.
"어서 혼자라도 빠져나가시오 공자! 그래서 오늘 일을 모든 무림에 전하시오."
누군가가 비장한 소리로 외쳤지만 남궁우현은 아랑곳 않고 날아드는 칼을 쳐냈다.
혈영의 존재는 이미 알고 있었던 일, 자신이 죽더라도 모두 잘 막을 것이다. 단지 너무나 갑작스레 다가온 죽음이 한스러울 뿐이었다.
'다들 한 번만! 단 한 번만 더 보고 죽었으면!'
다가드는 사내의 허리를 동강내며 터져 오르는 핏물 속에서 아련히 두령의 얼굴이 떠올랐다. 악마 같은 칼을 들었지만 유달리 수줍음이 많았고 마음이 약해서 남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던 사내!
그 얼굴이 언뜻 다시 한 번 떠올랐다.
"두. 두령!"
악마의 칼이 춤을 추었다
"크아악-"
"크악"
"아아악-"
시퍼런 빛이 번쩍거릴 때마다 너 댓 명의 몸뚱이가 한꺼번에 양단되어 무너지고 자욱하게 피보라가 피어올랐다.
막으면 막는 대로, 피하면 피하는 대로 부딪히면 부셔내고 쳐 오는 것은 잘라버리며 쥐 떼를 사냥하는 오소리처럼 천호의 칼이 아수라도를 펼치고 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저 놈들에게 당해서 지옥으로 떨어진 것인가?'
남궁우현이 현실감을 상실하며 얼결에 주춤거리며 물러나는 사내 한 명의 목을 자르며 다시 두령의 모습을 찾아 고개를 돌렸다.
"우-"
"개 잡종들아-"
긴 사자후와 우뢰와 같은 철도정의 목소리가 들리며 신도기문 철도정, 화천옥, 형일비, 임무열등이 마환보의 신법으로 순식간에 다가들었다. 그리고 짚단을 베듯 혈영의 무리들을 베어 넘겼다.
"크악-"
"아악-"
한 발 먼저 도착한 천호에 의해 반수 가량 줄어든 인원들이 다시 가세한 후기지수들에게 속절없이 도륙 되었고 자욱한 피비린내가 장내에 진동했다.
"오랜만이오! 국집사!"
철도정이 피를 뒤집어 쓴 채 얼이 빠진 국상진을 보고 이빨을 드러내고 웃었다.
"귀. 귀신!"
국상진이 새파랗게 질리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죽었다고 여긴 철가장의 장남 철도정이었다.
"어허! 무림을 장악하고 군림하려는 사람이 그렇게 간담이 작아서야 쓰겠소!"
철도정이 다시 으스스한 표정을 지으며 국상진에게로 다가들었다.
"고. 공자! 대체 이것이 어찌된 일이오?"
국상진이 일어나 앉을 생각도 못하고 미적미적 엉덩이로 바닥을 밀며 뒤로 물러났다.
"지옥에서 국집사가 보고 싶어 기어 나왔소."
철도정이 피가 뚝뚝 떨어지는 칼을 흔들거렸다.
"살려주시오 공자!"
"죽을 짓을 하긴 한 모양이군!"
쌔액-
철도정의 칼이 국상진의 목을 잘랐다. 그리고 떠오른 수급을 천참만륙(千斬萬戮)했다.
처참한 모습에 손자겸, 낙월봉, 등평부가 멀찌감치 물러서며 퇴로를 살폈다.
"헉-"
몸을 날리려는 순간 퇴로를 차단하며 서 있는 한 명의 화상과 다른 한 젊은이의 모습에 반사적으로 칼을 뽑았다.
정휴와 형일비였다.
"그동안 안녕 하시었소, 등호법님?"
"네 놈은 형일비!"
등평부 역시 죽은 국상진처럼 귀신을 본 듯 경악했다.
"공동의 호법으로서는 만족 할 수 없었던가요? 내 보기로는 당신의 사람됨에 비하면 그 자리도 과분한 것이라 생각되오만!"
형일비가 서서히 칼을 들어 올렸다. 전의를 상실한 등평부가 쉴 새 없이 도망갈 구멍만을 찾아 눈을 반짝거렸다.
펑. 퍼엉-
뒤에 서 있던 손자겸이 낙월봉과 등평부의 등에 장력을 날렸다.
"으윽-"
무방비 상태에서 장력을 맞은 낙월봉과 등평부가 정휴와 형일비에게 날아갔고 정휴와 형일비가 반사적으로 칼을 휘두르는 순간 손자겸은 신형을 날려 까마득히 멀어져갔다.
"더러운 놈!"
날아오는 등평부를 양단한 형일비가 뒤따라 갈 듯한 자세를 취하자 정휴가 저지했다.
"놔둬! 저놈 임자는 따로 있으니까!"
칼을 옆에 있던 나무둥치에 툭툭 두드리며 피를 털어 내는 정휴의 발 밑에는 화산의 낙월봉이 처참한 모습으로 참수되어 있었다.
"지옥 갈 중놈!"
형일비가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정휴를 쳐다보았다.
"이놈아! 칼을 든 놈은 너나 할 것 없이 똑같이 지옥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두령이 누누이 이르지 않았더냐!"
정휴가 철컥하고 도갑에 도를 집어넣으며 걸음을 옮겼다.
"이놈 정휴야!"
소림의 주해대사가 망연한 표정으로 마지막 처단을 하고 걸어오는 정휴를 불렀다.
"안녕 하셨습니까. 사숙조님?"
정휴가 물씬 피 냄새를 풍기며 주해대사를 보고 미소 지었다.
"이놈-"
"이 녀석 살아 있었구나!"
생신지 꿈인지 분간이 안가는 지옥도가 걷혀진 후 각 문파의 명숙들은 사라졌던 자파의 제자들에게 달려들어 어깨를 흔들고 얼굴을 만져보며 넋이 나간 표정으로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이게..... 이게 어찌된 일이냐?"
곧이어 공통된 물음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던져졌다.
"우선은 상처들을 치료하십시오. 그런 다음 모든 것은 천천히 그리고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명숙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제자들의 부축을 받으며 사찰 안으로 들어갔다.
"이런 개같은 일이!"
손자겸이 두 식경도 더 쉬지 않고 경공을 펼쳐 달려오다 작은 계곡 가에서 숨을 돌리며 머리를 물 속으로 푹 담갔다가 들어올려 세차게 흔들었다.
살을 에는 초겨울 계곡물의 한기도 손자겸의 뇌리에는 전달되지 않았다.
"그놈들이었어!"
손자겸의 공포에 질린 눈이 얼른 자신이 달려온 길을 살폈다.
그들이 펼치던 경공은 전설속의 마환보였다. 악마가 아닌 보통의 인간으로서는 익힐 수 없다고 전해진 그 악마의 신법이 지금 나타난 것이다.
그 경공이라면 자신이 마무리 죽어라고 달려도 그들을 따돌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수 십 번도 더 뒤를 살폈지만 다행히 추적의 낌새는 발견하지 못했다.
"후-"
한 번 더 긴 한숨을 내쉰 손자겸이 벌컥벌컥 계곡물을 들이켰다.
정말로 가공할 만한 존재들이었다. 그들이 은하전장, 풍림방, 그리고 남궁세가의 혈풍을 종식시킨 의문의 힘이었던 것이다.
그 힘은 자신들이 생각한 것 보다 수 십 배는 더 강했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극강할 지도 몰랐다. 미처 그들의 힘을 다 견식하기도 전에 자신들이 이끌고 간 혈영의 척살대가 눈 깜짝할 새 괴멸되었고 국상진, 등평부, 낙월봉도 칼 한번 제대로 휘둘러보지 못하고 불귀의 객이 되었다.
물론 낙월봉과 등평부는 자신의 탈출을 위한 재물이 되었지만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들을 희생시키지 않았다면 그들뿐만 아니라 자신도 그들과 함께 육신이 동강나 뒹굴고 있을 것이다.
손자겸은 다시 한 번 그들의 무시무시한 칼을 떠올리며 진저리를 쳤다. 그와 함께 온몸의 기운이 쭉 빠져나갔다.
"이것으로 끝인가?"
이제껏 자신이 이룬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간 것이다. 무당의 장문인 자리도, 혈영천하 이후의 보장된 새로운 자리도 모든 것이 그 악마 같은 놈들 때문에 뜬구름이 되어 버렸다.
"마냥 이러고 있을 수만은 없다!"
손자겸이 얼른 고개를 쳐들고 해를 바라보았다.
쉬지 않고 달려간다면 오늘 해가 떨어지기 전에 무당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제일먼저 자신의 처소에 숨겨놓은 혈영과 관련된 흔적들을 지워야 한다.
그리고 앞으로 자신의 행적을 추측할 만한 단서들을 없앤 후 율자춘이 준 잠마혈경 주해서를 가지고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또 다른 경지에 이르고 다시 출도 한다면 그 악마 같은 놈들과도 대등하게 한판 겨뤄볼 수도 있는 일이다. 이제까지 자신의 행위가 어떻든 간에 강호에서는 칼이 곧 법이다. 강한 칼 한 자루만 들고 있다면 그 어떤 것도 잘라 버릴 수 있는 것이다. 비난도, 찬사도, 운명마저도.....
가슴속으로 손을 넣어 보았다.
어떤 보물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잠마혈경 주해서가 듬직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흐흐... 우 하하하!"
가슴 가득한 공포와 걱정을 날려 버리려는 듯 대소를 터뜨렸다
"이것만! 이것만 있으면 아무것도 문제될 것이 없다!"
손자겸이 다시 한 번 보물을 쓰다듬듯 가슴속에 있는 잠마혈경 주해서를 쓰다듬은 후 신형을 날렸다.
'아직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모양이군!'
해질 녘이 되어서 무당에 도착한 손자겸은 자신에게 깍듯한 예를 표하는 문도들을 보고는 후 하고 한숨을 쉬었다. 급히 처소로 들어온 손자겸은 혈영과 자신을 연관시킬 수 있는 모든 증거물들을 싸들고 장원 옆 소나무 숲 속으로 들어갔다.
푸쉬시-
삼매진화에 의한 불꽃이 종이에 붙었고 때 마침 휘익 하고 불어오는 바람에 활활 타올라 순식간에 모든 것이 잿더미가 되었다.
"이젠 떠날 일만 남았군!"
손자겸은 무당의 웅장한 전각을 바라보았다. 고색 창연한 기와지붕과 아름드리 대전기둥이 자신의 몰골을 비웃는 듯 했다.
"조금만 기다리거라!"
손자겸이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내 지금은 초라한 승냥이 모양으로 쫓겨가지만 다시 돌아오는 날에는 천하를 오시하리라!"
한참을 더 무당 곳곳을 둘러보던 손자겸이 뒤쪽에서 나는 인기척에 재빨리 몸을 돌리며 인기척의 주인을 찾았다.
"사. 사형!"
초췌한 모습의 한중광이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사형?"
손자겸이 황망한 얼굴로 한중광을 쳐다보았다.
지난 십 년 동안 자신의 처소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은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광인이 되어서 그렇겠지 싶었지만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율자춘을 통해서 알게 되었고 그 후로부터는 남들에게는 폐인으로 알려졌다, 지금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젠 무공으로나 단전에 쌓인 공력으로나 그 어느 것도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사형을 앞지르고 있지만 그 앞에서 대책 없이 위축되는 것은 조금도 달라진 게 없었다.
"차가운 날씨에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시려고?"
손자겸이 가라앉은 음성으로 사형의 건강을 걱정했다.
"....."
"우리가 처음 만난 것이 언제였던가? 열 살 때 이든가.... 열 한 살 때 이든가.....?"
"사형이 열 한 살이고 제가 여덟 살 때였지요!"
손자겸도 옆에 있는 나무 그루터기에 앉으며 대답했다. 그때를 생각하면 언제나 마음이 편해지고 자신도 모르게 얼굴에 웃음이 떠오른다. 현재 자신이 무당의 장문인이든 또는 누구의 몇 번 째 제자이든 그런 것은 무의미했다. 오직 복사꽃 만발하던 봄날의 개구쟁이만 있을 뿐이었다.
개구리를 잡아 온갖 해괴한 장난을 치다 사부에게 혼줄이 나고 벌을 받는 자리에서도 교대로 망을 보며 장난질을 일삼던 그 순간들이 기억의 강을 따라 물결치며 흘렀다.
"후후... 그때 사숙의 신발에 넣어 두었던 개똥 냄새가 아직도 코 속에 생생하군!"
"푸 하하하..."
손자겸이 일장광소를 터뜨렸다.
한참을 어린애처럼 웃고 난 손자겸이 깊숙한 눈빛으로 사형 한중광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사형! 어인 일로 그때 얘기를...?"
대답 없이 무심히 석양을 응시하던 한중광의 얼굴에 처연한 슬픔이 어렸다.
"문득 옛 기억이 떠오르더군... 그래서 사제 얼굴이나 한 번 볼까 하고....!"
말끝을 흐린 한중광이 부스스 일어서며 손자겸의 얼굴을 한 번 더 쳐다보고는 천천히 몸을 돌려 처소로 향했다.
'뭔가 이건?'
손자겸이 어이없는 듯 사형 한중광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십 년 넘게 칩거한 사형이었으나 자신은 주기적으로 사형의 처소를 찾았다. 그때마다 사형은 멍한 눈으로 다른 곳을 응시하였지만 어쨌든 가장 최근에 찾은 것도 며칠 전 이었다. 그런데 자신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니! 그리고 십 년 넘게 한 발짝도 나오지 않은 처소를 떠나 이곳까지 와서 자신의 얼굴을 보고 가다니!
'어디로 떠나려는 건가?'
고개를 숙이며 생각에 잠겼던 손자겸이 깜짝 놀라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떠나려는 사람은 바로 자신이었다! 그리고 사형은 그 사실을 알고 마지막으로 자신을 보러 온 것이다!
회동 장소에서 도망치는 동안 내내 가슴속에 남아있던 의문점이 풀려 나가는 순간이었다. 그들의 악마적인 무위로 보아 자신을 따라잡고 도륙 내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들은 단 한 명도 자신을 추격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사형과 그들은 교류가 있었고 자신의 처단을 원치 않는 사형으로 인하여 여기까지 살아 온 것이다.
'이것이었던가!'
초췌하고 피폐한 사형의 모습 앞에서도 오금을 제대로 펼 수 없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무의식적으로 천적을 알아보는 모든 동물의 본능처럼 손자겸 자신의 감각도 사형 한중광 앞에서는 본능적으로 경계의 신호를 보내며 심장을 뛰게 만들었다.
사형은 지금도 자신에게는 변함 없는 천적이었고 가장 위험한 존재였다.
"이익-!"
손자겸이 괴성을 지르며 칼을 뽑아 들었다.
저 인간과 같은 하늘아래 있는 한 자신은 언제나 패배자일 뿐이고 뱀 앞의 개구리일 뿐이다. 자신이 지금 이런 모습이 된 것도 어쩌면 저자 때문일 지도 모른다.
언제 어떤 순간에도 넘을 수 없었던 벽! 그 벽을 넘어뜨리고 뛰어넘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 악마의 유혹에 넘어갔고 지금 초라한 도망자 신세가 된 것이다!
멀찌감치서 멀어져 가는 사형 한중광의 초라한 뒷모습마저도 자신을 비웃는 것 같았다.
"깨부수고 말리라!"
광기 어린 눈빛을 한 손자겸의 신형이 쏜살같이 날아와 한중광의 몸을 두 동간 낼 듯 칼을 휘둘렀다.
쨍-
아름드리 소나무 뒤에서 불쑥 나타난 이가송이 손자겸의 칼을 막았다.
"이놈! 네놈이 어떻게....!"
얼굴에 붉은 핏줄이 굵게 돋아난 손자겸이 놀란 눈으로 이가송을 쳐다보았다. 삼 년의 세월이 지난 후라 몰라보게 성장했지만 사형의 두 제자 중 한 놈이 분명했다.
"원한다면 네놈도 같이 죽여주마!"
손자겸의 눈에 일렁거리는 살기가 야수의 그것처럼 어두워진 숲 속에 혈광을 뿜었다.
"사제! 제발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이곳을 떠나게! 내 마지막 소원일세!"
한중광이 이가송을 제지하며 애원을 하다시피 채근했다.
이가송 저놈이 억누르고 있는 살기를 끌어올리면 사제 손자겸은 단칼에 처단되고 말 것이다! 비록 순간의 욕심으로 사마의 길로 빠졌지만 평생을 같이해온 사제가 아니던가! 그런 사제가 자신이 안고 와 키운 제자놈에게 죽임을 당하게 할 수는 없었다.
쨍- 쨍강
이성을 잃은 손자겸이 두 사람 다 죽이고 말겠다는 듯 몇 번의 칼을 더 휘둘렀고 이가송이 넓은 도를 휘둘러 그 칼을 막았다.
"그러고 보니 네놈 역시.....?"
넓고 무거운 도에 빛살 같은 빠름! 그리고 숨막힐 듯 뿜어 나오는 살기!
혈영의 척살대와 등평부 등을 두 동강 낸 그 놈들의 칼이었다!
그놈들이 쫓아오지 않은 것이, 그리고 사형 한중광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이 하나로 귀결되었다. 그렇다면 사라졌던 백도무림의 후기지수들이 그 무지막지한 힘의 장본인들이었단 말인가?
"크큭-!"
손자겸의 입술이 비틀리며 자조적인 웃음이 세어 나왔다.
"크 하하하... 정말 악연인 것 같소! 사형 당신과 나는....!"
손자겸이 칼끝으로 한중광을 가리키며 실성한 듯 웃었다.
"당신이란 벽을 뛰어넘기 위해 내 모든 것을 걸었는데 결국 허사였군. 허사였어....크크"
손자겸이 하늘을 우러르며 괴소를 흘렸다.
"개 같은.....!"
하늘을 향해 저주를 퍼 붇던 손자겸이 다시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이가송과 한중광을 노려보았다.
"떠나십시오. 사숙!"
이가송이 짤막하게 한 마디 하고 입을 굳게 다물었다.
"떠나야지! 그곳이 내 체질에 더 어울리기도 하고....."
손자겸의 말에 한중광이 반가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래 사제! 정말 잘 생각했어! 그 곳에서 모든 걸 잊고 살게나....!"
"후후....!"
손자겸이 음울한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칼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곳은... 그곳은 바로... 지옥이다!"
휘익-
쌔액-
두 줄기 칼바람이 일었고 손자겸의 목이 허공으로 솟구쳤다가 바닥에 뒹굴었다.
"크- 흐흐흑...."
한중광이 자리에 무너지며 피보다 더 진한 오열을 토했다.
"......"
"사부....!"
이가송이 한중광을 불렀지만 목 없는 손자겸의 시신을 안고 오열하는 사부의 통곡은 그치지 않았다.
"야-아아악-!"
한참 동안 오열하는 사부 곁에 고개를 숙이고 서 있던 이가송이 미친 듯이 칼을 휘두르며 쏘아져 나갔다.
우지끈- 쿵-
아름드리 고송들이 무웃단처럼 베어져 넘어가고 잠자리를 찾아 숲으로 날아든 야조들이 푸드득 푸드득 날아 올랐다.
"크- 흐흑- 두령! 난. 난 어떻게 해야 하오....!"
마주치는 바람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귓전으로 날렸다.
"이 더러운 칼을 얼마나 더 휘둘러야 한단 말이오 두령!"
깡- 까강-
바위에 부딪친 칼날에서 불꽃이 튕겨 올랐다.
"백도의 정기를 흐트려 사숙에게 칼을 들이대게 한 사특(邪慝)한 무리들을 없앤 후엔 버릴 수 있을 것이오!"
침울한 음성이 미친 듯이 바위를 두드리고 있는 이가송의 뒤에서 울렸다.
"부두령!"
임무열이 묵묵히 이가송을 응시하며 묵상처럼 서 있었다.
"크 흐흐흑..."
임무열의 허리께를 부여잡은 이가송이 임무열의 가슴에 머리를 쳐 박고 통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