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다센(津田僊)의 농업삼사(農業三事)가 지니는 의의
구자옥*ㆍ김장규**ㆍ한상찬***ㆍ이길섭**** 1)
농정신편의 저자인 안종수는 1881년 4월 10일부터 7월 2일까지의 4개월간의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 일원으로 일본에 파견되었다가 일본의 선진 농학자인 쓰다 센(津田仙: 1837~1908)을 만나 그의 사상을 배우고, 그의 저서인 농업삼사(農業 三事)를 구해 왔다. 이를 기초로 하여 안종수는 농정신편이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농학적 신농서(新農書)를 쓰게 되었고, 이를 발판으로 서양의 실험론적 농학기 술과 사상이 우리나라에 소개된 것이다. 우리나라 종래의 전통⋅경험적 농학기술이 받게 되었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농업삼사는 일본의 농학자 쓰다센이 네덜란드의 농학자 Daniel Hooibrenk의 가 르침을 받아 저술한 일본 최초의 서구식 농학서(農學書)라 할 수 있다. 책이 담고 있 는 “농업의 3대 원리”를 저자는 자신의 서문을 통해 잘 요약하고 있다. 삼대법(三大法)의 첫째는 [atmospheric pipe](氣筒)이라 부른다. 벽돌로 만든 통 (筒)을 땅속에 조용히 통하게 하여 대기를 땅속에 흡입시킨다. 지질을 비옥하고 기름 지게, 가볍고 푸석푸석하게 함으로써 식물의 생육을 돕는다. 둘째로, 나뭇가지[樹枝]를 구부려서 본가지[本幹]의 생명력을 증대시킨다. 이것은 나무뿌리[樹根]가 흡입하는 곳의 가스(gas)는 본가지[幹]로부터 가지 끝에 도달하여 잎사귀 밑에서 흡수하는 탄소와 배합됨으로써 그 역할을 다 하는 것이다. 셋째는 매조법(artificial fertilization; 인공적으로 풍성하게 숙성시킨다는 뜻)이다. 과실의 증숙(增熟)을 돕는 법이다. 대체로 꽃술이 열릴 즈음에 마음대로 꽃가루의 배 합을 매개하여 그 결과를 크게 또 많게 한다. 이것을 곡류에 적용하면 알이 크며 양 또한 무겁고 수확도 많다.
* 한국농업사학회장, President, Soc. of K. Agricultural History ** 전 농촌진흥청 연구관, Former Senior Researcher in Plant Pathology, RDA. *** 전 안동대 교수, Former Prof. of Andong National University **** 농촌진흥청 사무관, Director, Agric. Sci. Library. RDA. 112266 농업사연구 제 9권 2호, 한국농업사학회, 2010. 12. 주제어: 안종수, 쓰다센의 농업삼사, 호이브렌크의 삼대법, 농정신편, 기통, 나뭇가지 구부림, 매조법
1. 1800년대의 아시아 및 일본 농학 한국ㆍ일본을 비롯한 대부분 아시아 나라들의 농학은 적어도 3000여년의 실제 역사 를 거쳐 다듬어진 중국(中國)의 농학기술과 과학ㆍ문화를 수용하여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기원전 여불위(呂不韋)의 「여씨춘추」(呂氏春秋)1)가 담고 있는 농업의 철학과 범승지(氾勝之)의 「범승지서」(氾勝之書)2)에서 발원하여 서기 500년대의 가사협(賈思勰) 에 의한 「제민요술」(齊民要術)3)로 재정리ㆍ집대성되기에 이르렀고, 이후의 수많은 중국 농학은 물론 이거니와 우리나라와 일본의 고농서(古農書) 및 농업기술도 이를 바탕[底 本]으로 하여 자체의 농학을 수립시켜 왔던 것이다. 오랜 세월을 이런 바탕에서 지내게 되었으나 16세기에 이르면서 한 나라의 안팎은 서 로 다른 나라들의 물결이 마주치는 충돌을 피할 수 없게 되었고 세상은 급변하게 되었다. 1) 중국의 경우 중국에서는 명나라 말기에 이르러 관료이며 대학자인 서광계(徐光啓: 1562-1633)4)가 출현하였다. 이 시기는 안으로 봉건 왕조의 수탈에 항거하는 농민기의(農民起義)가 일어 나고 밖으로는 동남해안의 왜구가 기승을 부리며 변방[만주]에서는 후금(後金)이 발흥하 여 전면적인 대치상황을 전개하고 있었다. 따라서 시대를 염려하는 학자들은 경세치용 (經世致用)ㆍ경세적용(經世適用)ㆍ명체달용(明体達用)과 같은 구호를 주장하는 분위기였 다. 이들 가운데서도 정치ㆍ외교ㆍ군사ㆍ과학ㆍ종교 및 농학 전반에 단연코 두드러진 활동을 한 사람이 곧 서광계(徐光啓)였다. 그는 1607년에 부친의 복상(服喪)으로 3년간을 향리인 상해(上海)에 내려와 집안의 1) 呂氏春秋: 중국 奏나라 呂不韋가 학자들에게 편찬케 한 史論書 「呂覽」이라고도 부름. 2) 氾勝之書: 기원전 100-200년 사이에 氾勝之가 편찬한 최초의 農書. 3) 齊民要術: 서기 500-550년 간에 후위의 가사협이 편찬한 종합농서. 4) 徐光啓: 中國 明나라 학자ㆍ정치가(1562-1633). 農學者로 저서에 「農政全書」가 있음. 쓰다센(津田僊)의 농업삼사(農業三事)가 지니는 의의 (구자옥ㆍ김장규ㆍ한상찬ㆍ이길섭) 112277 농장에서 직접 고구마ㆍ순무ㆍ면화의 재배ㆍ실험ㆍ관찰을 한 끝에 기후가 맞지 않는다 고 했던 복건성(福建省)을 주산지로 만들었고 1608년에는 「감저소」(甘藷疏)를 저술하여 그 기술을 일본과 조선에까지 파급시켰다. 1609년에는 추운 지방의 원산인 순무를 강남 (江南)에 파급하면서 「무청소」(蕪菁疏)를 저술하였다. 또 고향의 면화를 양자강 삼각주 에서 보리나 녹비작물과 윤작재배하도록 성사시키고 「길패소」(吉貝疏)를 저술하였다. 그 외에도 경제작물인 당광나무와 닥나무 재배기술을 널리 보급시켰다.5) 특히 상해에 살고, 한림원(翰林院)에 복직되는 사이에도 그는 쉬지 않고 「농정전서」 (農政全書)를 집필하는 데 몰두하고 있었다. 그의 관심은 남방의 벼와 구황작물의 생산을 북경 주위의 북방으로 끌어 올리는 데 있었으며, 그런 이유로 둔전(屯田)을 설치하고 제 방(堤防)을 쌓아 수해(水害)를 막았으며 수리(水利)로 땅의 소금기를 제거하기에 이르렀 다. 수많은 고농서(古農書)를 섭렵하고 노농(老農)들에게 자문을 받거나 기독교 선교사들 을 찾아가 서구의 농정ㆍ수리ㆍ기구제작의 새로운 기술을 습득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이 런 내용을 1614년에는 「선간령」(宣墾令)ㆍ「북경록」(北耕錄)의 주 농서로 저술하고 1627년 에는 마침내 중국 농학사의 큰 획을 긋는 「농정전서」(農政全書)를 저술하기에 이르렀다. 「농정전서」(農政全書)6)는 1637년에 진자룡(陳子龍)에 의하여 60권의 책으로 정리ㆍ편찬 되었는데, 편찬자는 이 책의 범례에서 “서광계는 평생토록 학문을 널리 하늘과 사람의 이치탐구에 두고 실용(實用)을 위주로 하였다. 농사에 이르러서는 심혈을 기울이지 않은 곳이 없었으며 모두 솔선하여 백성들의 가르침에 근원이 되었는데 이는 국가부강의 근 본이기 때문이었다. 고로 몸소 기구를 제작하고 작물의 맛을 직접 체험해 보며 수시로 채집하고 겸하여 방문하여 그 결과를 글로 써서 책을 이루었는데 그 속의 내용이 무척 정 성스럽게 꾸며져 있다. ……내용은 매우 넓게 포괄되어서 농업과 이에 관계되는 제도ㆍ문 물ㆍ지식ㆍ기술에 관하여 있어야 할 것 가운데 빠진 것이 없다”7)고 하였다. 즉 「농정전 서」는 중국의 역대 농학을 집대성하여 전통적 농사기술을 총정리하였을 뿐만 아니라 농 정ㆍ경영ㆍ수리ㆍ기계기구 등의 분야에서는 서양과학기술과 농학원리 및 방법을 이용 하고, 새롭게 변형ㆍ응용하여 중국의 것으로 발전시켰다는 면에서 그 우수성과 역사성 을 인정받게 되었다. 「농정전서」를 통한 서광계의 농학사상은 이전까지 농학을 뛰어 넘어 새로운 국면(局 5) 金亨錫(1995), 「明末의 輕世家 徐光啓 硏究」, 慶熙大 學位論文. 6) 農政全書: 1617년 출간된 徐光啓의 農書로서 中ㆍ韓ㆍ日의 農業技術 近代化를 이끌어 냄. 7) 陳子龍의 「農政全書 凡例」: 燕羽, p.270에서 重引함. 112288 농업사연구 제 9권 2호, 한국농업사학회, 2010. 12. 面)을 열었고, 조선 및 일본의 농학을 새롭게 이끈 역사성을 지닌다. 첫째, 농업의 영역 을 임업ㆍ잠업ㆍ목축업, 가내수공업과 수리ㆍ농기계기구ㆍ토목으로까지 포괄시켰다. 둘 째, 서구의 농업과학과 기술적 지식을 받아들이면서도 현지의 환경과 실정에 맞도록 시 험ㆍ재배하여 적용함으로써 실용성을 구현하였다. 셋째, 관련된 산업과 관계 속에서 농 (農)만을 앞세우지 않고 농(農), 상(商), 공(工)의 균형발전을 강구하였다. 넷째, 농촌의 빈 곤문제를 논하면서 생산력 증대와 함께 사회구조적 모순을 지적하면서 조운(漕運)과 인 구문제의 해결안을 제시하였다. 2) 조선의 경우 조선왕조 후기에 이르면서 실학(實學)의 학풍이 성숙되어 감에 따라 실학자들의 농 정론(農政論) 또한 농업기술론과 병행되어 강력히 대두되기에 이르렀다. 18세기에 접어 든 영ㆍ정조(英正祖)시대에는 소위 북학파(北學派)라 일컬어지는 학자들에 의하여 중국 과의 교류가 빈번해지고, 과학 기술을 수반한 농학기술에 특히 큰 영향을 받게 되었다. 이 가운데서도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것의 하나가 곧 중국의 「농정전서」(農政全書)였다 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정조는 권농책의 하나로 전국에 널리 농서를 구하는 “구농서윤음 (求農書綸音)”을 발표하자 곧 응지진농서(應旨進農書)들이 바쳐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서 서명응(徐命膺(1916-1787)8)은 세종조의 「농사직설」(農事直說: 1429)에 「농정전서」의 내용을 합쳐서 「동방농서집성」(東方農書集成)을, 박제가(朴齊家)는 「북학의」(北學議: 1778)9)를, 박지원(朴趾源)은 「과농소초」(課農小抄: 1799)10)를 지어 바치면서 농업기술론 을 「농정전서」에서 상세히 인용하였다. 결과적으로 조선의 농학은 이들 실학자들이 중 국 서광계의 「농정전서」를 수용하면서 서구의 농학사상과 기술을 받아들이게 된 결과를 빚었다. 이들 결과는 서호수(徐浩修: 1735-99)의 「해동농서」(海東農書)11)를 거쳐 서유구 (徐有榘: 1764-1845)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12)로 집성되었다. 뿐만 아니라 농학기술 이 아닌 농학이론13)이나 농기구제작법14)ㆍ농지제도15)에 이르기까지 「농정전서」는 우리 8) 서명응(1716-1787): 조선 정조 때 홍문관 대제학, 수어사 지냄. 북학파 시조로 「동방농서집성」 집필함. 9) 北學議(1778): 박제가가 청나라 풍속과 제도를 시찰하고 쓴 책. 10) 課農小抄(1799): 박지원이 중국의 기술을 도입하여 농업기술화 정책 개혁을 주장한 책. 11) 海東農書(1778): 서호수가 「농가집성」 「산림경제」를 저술하여 농업을 재정리한 책. 12) 林園經濟志: 조선 현종때 서유구가 펴낸 농서. 「임원경제십육지」라고도 함. 13) 徐浩修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기후ㆍ풍토가 남북 간에 차이가 있지만, 韓半島의 남ㆍ북이 중국 쓰다센(津田僊)의 농업삼사(農業三事)가 지니는 의의 (구자옥ㆍ김장규ㆍ한상찬ㆍ이길섭) 112299 의 농학기술과 농촌현장에 적용되었으며, 그 대표적인 사례 가운데 하나는 「농정전서」의 내용을 서유구가 인용하였던 종면이론(種棉理論) 및 목화 파종기에 지역분류를 적용한 사례16)에서 볼 수 있다. 한편 조선 후기에 계속되는 흉작은 식량정책에 심각한 영향을 끼쳐 여러 가지 구황 서적(救荒書籍)이 간행되었으며, 1763년 조엄(趙曮: 1719-77)17)이 일본으로부터 고구마를 들여온 뒤에는 고구마의 재배ㆍ저장ㆍ가공의 연구가 여러 학자들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강필리(姜必履)의 강씨감저보(姜氏甘藷譜)18)(1766)ㆍ김장순(金長淳)의 감저신보(甘藷 新譜)19)(1813)ㆍ서유구(徐有榘)의 종저보(種藷譜)(1834)20) 등이 그 예이며, 따라서 서 광계의 「감저소(甘藷疏)」21)는 이 같은 연구의 기본교재(敎材)로 활용되었다. 최한기(崔漢綺: 1803-1879)22)의 농정회요(農政會要)ㆍ수차도설(水車圖說)을 비롯 한 북학파(北學派) 이후 실학자들의 농학가 역시, 서양의 문물이 다분히 가미된 중국의 의 남ㆍ북과 각각 同一 高度上에 위치하고 있음을 들어, 農政全書에 나타나 있는 緯度別 작물재배법을 조선에 적용하려 하였다. 一 海東農書 凡例 5, 「農書」9,10: 金容燮, 앞의 책, p.330에서 重引. 14) 朴齊家는 北學議에서, “農具는 반드시 農政全書에 의거하여 제조하고, 좋은 쇠를 사용하 여 제조하라”고 강조하고 있다. 一(進北學議) 鐵, 「農書」6, p.89: 위의 책, pp.299-300에서 重 引) 한편 徐有榘도 농지제도의 개선에는 반드시 농기구의 개량이 필요함을 주장하였는데, 우 수한 농기구의 보급을 위해 林園經濟志를 저술하면서, 農政全書의 「農器圖譜」를 그대로 轉載하였다.-(林園經濟志 本利志 10ㆍ11, 「農器圖譜」: 위의 책, p.389에서 重引) 15) 朴齊家와 徐有榘는 농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종합적ㆍ현실적 방안으로 서광계의 屯田論을 참고한 그들의 둔전론을 구상하였다. -위의 책, p.395: 金容燮, 朝鮮後期農業史硏究, p.133: 徐光啓集卷5, 「屯田疏稿」墾田 및 農政全書ㆍ卷9, 「農事開墾」ㆍ下 參照. 16) 서유구는 林園經濟志에서, “徐光啓가 말한 緯度上의 氣溫差를 기준으로 우리나라의 種棉適 期를 따진다면, 영ㆍ호남의 해안지방은 비교적 조정이 가능한 지대로서 3월 3일의 淸明 전후 에, 호서와 한강 이남의 경기지방은 3월 중순의 穀雨 전후에, 漢北과 海西ㆍ關西지방은 4월 초의 立夏 전후가 알맞은 種棉期가 된다”고 하여, 서광계의 농업이론을 조선에 처음으로 응용 하여 이론화하였다. -위의 책, 「農功志」卷3, 種棉條. 17) 趙曮(1719-1777): 조선 영조 때 이조판서로 1761년 일본에서 고구마 씨를 도입함. 18) 姜氏甘藷譜(1766) : 현재 사라져서 원본은 없으며, 저자 미상이나 경험자 말을 모은 탓으로 오류가 많다고 함. 19) 甘藷新譜(1813): 金長生ㆍ宣宗漢 공찬으로, 宣이 구해온 고구마의 利奌이 많아서 전파를 주 장함. 20) 種藷譜(1834): 서유구가 中國이나 日本에 대비한 의견을 곁들여 적음. 21) 「甘藷疏」: 徐光啓 撰, 胡道靜校韓 참조. 22) 최한기(1803-1879): 삭령 최씨로 과학에 관심을 두고 「농정회요」, 「육해법」, 「수차도설」등을 집필함. 113300 농업사연구 제 9권 2호, 한국농업사학회, 2010. 12. 농서들인 농정전서(農政全書)ㆍ태서수법(泰西水法), 천공개물(天工開物)을 많이 참고하고, 또 실제로 중국농업을 견문한 경험에 입각하여 논술을 펼치고 있다. 이렇게 살펴볼 때, 농전전서(農政全書)는 조선 후기 농학발전과 농사기술의 향상에 많은 영향 을 끼친 하나의 이정표(里程標)였다고 할 수 있다. 그 뒤인 1876년, 일본과의 수호조약이 체결되면서 1880년 4월 10일부터 윤7월 2일까 지의 약 4개월에 걸쳐서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의 이름으로 비공식적인 일본 시찰단이 일본으로 파견되기에 이르렀다. 이들 신사유람단은 첫째로 새로운 문물의 도입을 중국 에서 일본으로까지 다변화하고, 둘째로 이들에 대한 파견의지가 우리 정부의 독자적이 며 적극적인 구미문화 도입에 있었으며, 셋째는 파견ㆍ수행된 모든 인원이 양반 출신으 로 신문물에 대한 안목을 넓혀서 영향력을 크게 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때에 진사(進士)였던 안종수(安宗洙)23)가 함께 수행하여 일본의 신진농학자인 쓰다 센(津田僊: 1837-1908)을 만났고, 그것이 인연으로 결실을 맺어서 쓰다센의 「농업삼사」(農 業三事)를 비롯한 일본 사토(佐藤) 가문(家門)24)의 「토성변」(土性辯)ㆍ「배양비록」(培養秘 錄)ㆍ「십자호분배례」(十字號糞培例), 그리고 중국 호병추(湖秉樞)25)의 「다무첨재(茶務僉 載)」를 저본(底本)으로 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신농학서(新農學書) 「농정신편」(農政新編)을 저술하게 되었던 것이다.26) 안종수의 「농정신편」에 대한 우리나라의 역사적 의의나 그 내용에 대한 기술은 뒷부분에서 재론할 것이다. 여하튼 우리나라 농학의 서구화나 근현대 화 시발점은 이렇게 형성되었고,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서구농학과의 직접 참여나 우 리나라 사람의 서구현지 직접 체험에 의하여 유도되기보다는 중국 서광계나 일본 쓰다센 등의 영향을 통한 간접적 과정을 통하여 처음으로 발달되었던 특색을 지닌다. 3) 일본의 경우 일본의 문화와 문명이 근현대화한 계기는 메이지(明治: 1868-1912)에 성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의 치적은 전반기(前半期)의 3시기, 즉 제 1기는 1880 년을 중심으로 한 시기로 일본의 실정을 무시한 채 외국의 선진문명만을 적극 도입ㆍ수 23) 安宗洙(1859-1895): “신사유람단” 이름으로 일본에 파견되어 津田仙을 만나고, 그의 영향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농서인 「농정신편」을 집필함. 24) 佐藤信淵(1769-1850): 집단 대대로 농학을 지켜서 가계를 이룸. 토성변ㆍ배양비분 등 「초목육 부경작법」 집필. 25) 湖秉樞: 중국의 농학자로서 「茶務僉載」 집필. 26) 農村振興廳(2002), 古農書國譯叢書 2, 「農政新編」 가운데 “解題” 安宗洙 著. 쓰다센(津田僊)의 농업삼사(農業三事)가 지니는 의의 (구자옥ㆍ김장규ㆍ한상찬ㆍ이길섭) 113311 용하던 시기, 제 2기는 1887년을 중심으로 하여 외국기술을 불신하는 대신 자국의 전통 농학 연구결과를 되찾고 노농(老農)을 존중하게 되었을 시기, 그리고 제 3기는 1893년을 기점으로 하여 농상무성(農商務省) 농사시험장을 설립하고 일본의 전통농학과 서구의 신진농학을 접목하여 일본의 신농학을 구축하던 시기로 나뉜다. 실제로, 일본 농학의 근현대화는 명치유신의 기본사상과 더불어 유래하고 전개되었 다. 또한 교육제도의 전개와 더불어 추진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의 명치유신은 농업생산과 지세(地稅)가 국가재정의 대부분이던 1868년에 별수 없이 농지의 대내적 개척과 농사개량이라는 한 마리의 토끼를 쫓겠다는 이념으로 출발 되었다. 1869년에는 민부관(民部官)을 설치하여 개간물산에 관한 공무(公務)를 개시하고 목초ㆍ사탕무ㆍ순무의 미국 종자를 도입ㆍ배포하기 시작하였으며, 1870년에는 민부관을 민부성(民部省)으로 개칭하면서 잠종제도 및 개간규칙을 공포하였다. 1871년에는 수도인 도쿄(東京)에 “서양농구치장(西洋農具置場)을 두고 일반 시민들에게 관람케 하였으며, 1872년에는 동경 신주쿠(新宿)의 95000평 땅에 내무성의 권업요출장소(勸業寮出張所)를 두어 농사시험장 구실을 하면서 각종 도입작물과 과수종을 시험ㆍ증식ㆍ배포케 하였다. 1873년에는 인접된 79000평의 땅을 매수하여 통합ㆍ확장하고 1874년에는 미타(三田)의 4만평에 부속시험지를 설치하였다가 그 뒤 곧 미타육종장(三田育種場)으로 개칭시켰다. 1875년에는 시모우사쿠니(下緫國) 미사토쓰카(三里塚[치바현])에 목양장(牧養場)을, 1879 년에는 고베(神戸)에 포도원을, 그리고 1880년에는 히메지(姫路[효고현])에 올리브원을 설치하여 일본농업의 구조와 내실을 개선해 왔다. 이렇게 얻어지는 일본 신농업(新農業)의 과학과 기술은 교육제도를 새롭게 만들고 확장해 가며 보급하게 되었다. 1872년에는 호카이도(北海道) 개척을 위하여 도쿄시바(東京芝) 증상사(增上寺)에 “호카 이도 농업교육 가학교(假學校)”를 설립하였다가 1875년에 삿포로(札幌)에 건물을 신축하고 개교하여 삿포로학교(札幌學校)로 개칭하였으며 1876년에 삿포로농학교(札幌農學校)로 개 칭하여 현재의 호카이대학 농학부로 발전하였다. 뿐만 아니라 1874년에는 신주쿠(新宿) 의 내무성(內務省) 권업료(勸業寮) 신주쿠출장소의 농학괘(農學掛)에 각종 농산물의 수 집과 농학실험을 수행하는 농사수학장(農事修學場)을 설치하고 선진국의 교사(敎師)를 초청하는 동시에 학생을 모집하는 절차를 밟았다. 이 수학장은 곧 코마바(駒場)로 옮기 고 1878년 1월에 메이지천황(明治天皇)의 명분으로 개교하여 “코마바농학교(駒場農學 校)”로 개칭하였다. 현재의 도쿄대학(東京大學) 농학부로 발전하였다.27) 학교의 개교 때 113322 농업사연구 제 9권 2호, 한국농업사학회, 2010. 12. 에는 내무경(內務卿)인 오쿠보(大久保利通)에 의하여 천황에게 헌정되는 절차를 밟았을 만큼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이 학교는 2개년분의 상전록금(賞典祿金) 5423원을 기금화하 여 외국교사의 초청지원 및 학생들의 장학금으로 이용하였다. 1875년 이후 1881년까지 여러 공사립의 농학교들이 설립되었으며 1883년의 농업학 교 설립ㆍ운영 실태는 다음 표와 같았다.28) 공ㆍ사립별 학교명 소재부ㆍ현 창립 연한제 수업일수 교원수 생도수 공립 新潟勧農場新潟1875 3 252 4 19 農業傳習所石川1877 3 254 9 43 岐므農學校岐므 1878 4 244 9 36 農學校広島1879 3 209 5 32 福岡農學校福岡1880 3 252 7 38 郡山農學校福島1880 3 251 3 22 農學校鳥取1882 2 264 1 19 農事講習所山梨1882 3 216 5 15 사립 學農社農學校東京1875 5 252 8 80 獣醫學校東京1881 3 268 8 13 大張野農學校秋田1881 2 210 1 12 ※ [자료] 「文部省第十年報」(1882) 설립 당시의 이들 학교 교육은 외국의 선진된 농학기술을 신속히 가르쳐서 일본의 신기술로 대체하기 위한 데 있었다. 그러나 이들 학교의 농업기술은, 특히 코마바(駒場) 및 삿포로(札幌)농학교의 외국인 교사에 의한 교육에 근본적인 결함이 있었다. 일본농업 의 바탕을 이루는 벼농사에 대하여 아는 선생도 없었고, 그래서 실제적으로는 책상공론 (机上空論)에 그치고 말았다. 유일하게 도작(稻作)을 강의한 선생은 Gastaus라는 영국인 이었는데, 그의 도작지식은 일본으로 오는 도중에 열대지방의 미작(米作) 현장을 며칠 시찰한 것이 고작이었는데도 그것을 기초로 하여 일주일에 3-4시간을 강의한 것이었다. 삿포로농학교에서는 1888년에 이르러서야 일본인교사[南鷹次郎박사]에 의한 “일본농학 27) 矢島祐利, 野村兼太郎 編(1954) 「明治文化史」 第 5卷 “學術編”의 明治前期勸農事蹟輯錄(1939) 인용문 내용. 28) 日本 交部省(1882): 「文部省第十年報」. 쓰다센(津田僊)의 농업삼사(農業三事)가 지니는 의의 (구자옥ㆍ김장규ㆍ한상찬ㆍ이길섭) 113333 (日本農學) 강좌가 처음으로 시작된 지경이었다. 전통적으로 일본의 농사현장에서는 노농(老農)의 존재를 높이 받드는 관습이 팽배해 있었고 전대(前代)에도 천하 3노농(天下三老農)이라 불리는 나카무라(中村直上)ㆍ후나쓰 (船津傳次平)ㆍ나라(奈良專二)라는 독농가가 잘 알려져 있었으며, 당시에는 그 가운데 나카무라(中村直上)의 제자들은 임원리(林遠里)에서 스승의 기술을 계승하고 노동사상을 보존하며 각지의 수도작 교사로 채용되어 활약하고 있었다. 따라서 정부는 코마바(駒場) 및 삿포로(札幌)농학교를 제외한 모든 농학교를 폐지하는 대신에 전국농담회(全國農談會) 를 조직하고 노농들에 의한 강연회를 개최토록 하였다. 이때에 강연된 내용은 속기록되고 이를 「농사연설필기」(農事演說筆記)라는 인쇄물로 전국 각지에 보급토록 조처하였다. 사립대학교로서는 설립연대(1875년)가 가장 앞서고 수업연한(5년)이 길어서 철저한 교육훈련을 시켰으며 학생의 숫자(80명)도 다른 공ㆍ사립농학교(12-43명)의 2-6배에 달 하여 가장 적극적인 인재배출을 하였던 학교가 곧 쓰다센(津田僊)이 설립하였던 가쿠노 샤농학교(學農社農學校)였음을 앞의 표를 통하여 알 수 있다. 이 학교는 일본 역사상의 문예부흥기라 할 수 있는 메이지유신의 초창기(명치 8년)에 세워져서 한 때는 토쿄의 4 대사립학교 가운데 하나로 위치가 부상되었고 1882년도에는 전교생이 175명에 달하였으 나 일본인 가운데 기독교 선교사나 서양농학을 선도하던 외래교사들에 대한 철저한 양 이사상(攘夷思想)과 폭도적 반발, 그리고 일본식 전통농학과 노농숭배사상(老農崇拜思 想)에 충돌되어 정부의 교육폐지 정책이 발표되었고, 드디어 1884년에 폐교(廢校)되는 운명을 맞았다. 이런 경과 속에서 메이지유신 전반기의 제1차 발동기(發動期)인 외국의 선진농학기 술 도입ㆍ수용ㆍ직용(直用)체제는 무너지게 되었다. 그러나 코마바(駒場)과 삿포로(札幌) 의 농학교에서는 외국의 선진농학을 수정하여 존속시키면서 일본화ㆍ현지화하는 사업 을 지속케 하였다. 즉 도쿄의 코마바농학교 영국인 교사들은 3년의 계약임용을 마친 뒤 연장하지 않고 그 대신에 독일의 교사들로 대체되었는데, 이들은 우선적으로 일본 현지 의 작물과 토양, 비료를 적용하는 체험과 연구를 하였기 때문에 매우 새롭고 긍정적인 평가를 받게 되었다. 특히 수의학의 Janson은 1880년부터 1902년까지, 농예화학 Gerner는 1881년부터 1892년까지, 지질학의 Fesca는 1882년부터 1894년까지 장기간에 걸쳐 코마바 농학교에서 연구와 교육에 전념하였다. 반면에 호카이도의 삿포로농학교는 축산과 임업 에 집중하여 개척농사를 일으켰기 때문에, 비록 미국계 선진농업기술이라도 일본 전통 농법과의 충돌이 상대적으로 적었다고 할 수 있다. 113344 농업사연구 제 9권 2호, 한국농업사학회, 2010. 12. 당시에 후쿠오카(福岡) 현립농학교(縣立農學校)에서 교두(敎頭)로 근무하던 요코이 (橫井時敬) 박사는 서구의 농학과 일본의 전통농학, 그리고 이론과 실제를 융합시키는 데 전념하였던 몇 사람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의 회고담에 의하면, “많은 농학교를 세워 교육함으로써 일본농업은 실제로 엄청 나게 진보하였음에 틀림없다. 다만 국가 당국이나 농민들이 새로운 서양 농업기술에 기 대하던 바가 마치 도깨비방망이[鬼金棒]라도 되어서 원하는 대로 생산과 풍년을 이룰 것 이라 하였던 데 대한 실망이 문제였다. 당국이나 보수적 전통사상에 젖어 있던 농민은 물론 학생들까지도 불신ㆍ실망과 비판에 빠져 이들 학교교육을 등한시하고 배척한 성급 한 태도 때문에 서양식 농학은 성공할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이런 입장에서 코마바ㆍ삿포로농학교의 졸업생이나 요코이(橫井) 교수 같은 엘리트 들은 서양의 농학이론과 일본의 재래기술(수도작 포함)을 융합시키는 데 고전분투(苦戰 奮鬪)하였으며, 이들에 의하여 메이지유신 전반기의 두 번째 전개기(展開期)가 지탱되었 고, 드디어 세 번째 결실기(結實期)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요코이(橫井) 박사의 제자인 하시모토(橋本伝衛門)의 당시 회고에 따르면, “당시의 일본에서는 한 쪽으로 막부시대(幕府時代)부터 이어져 온 재래농법(在來農法) 배후에 노 농(老農)들이 버티고 앉아 서양농학을 무시하고 있어서, 적어도 농학 분야에 있어서만은 결과적으로 학리(學理)와 실제(實際)가 마치 물(水)과 기름(油)의 관계와 같아서 융합하 는 일 자체가 쉬울 수 없었다. 학리와 실제를 하나로 융합시키는 데는 촉매(觸媒)의 기능 을 더해야 하는데, 이들 촉매는 신식교육을 받은 농학도(農學徒)들일 수밖에 없으며, 이 들은 결국 논밭의 진흙땅을 갈고 가축을 사양하는 엄청난 분량의 실제수련을 쌓아야 그 기능을 갖출 수 있는 것이었다. 이 역할을 가장 선도적으로 해낸 인물이 곧 요코이(橫井) 박사이다. 이에 연유하여 그는 과학적 농학자(科學的農學者) 혹은 일본적 농학자(日本的 農學者)로 불리는 사람이 되었다. 또한 1888년에 그의 친구인 사카와(酒勾) 코마바농학 교(토쿄농림학교) 교유는 「개량일본미작법」(改良日本米作法)을 출판하고 이듬해인 1889 년에는 요코이(橫井)가 「도작개량법」(稻作改良法)을 출판하였는데, 이들 두 교과서는 서 양농법과 일본농법을 융합하여 새로운 일본농학의 탄생을 예고하는 동기를 만들었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1895년에는 농상무성(農商務省) 농사시험장이 신농학의 센터 구실 을 하도록 신설이 됨으로써 일본에서는 노농시대의 농학이 완전히 문닫히게 되었다. 쓰다센(津田僊)의 농업삼사(農業三事)가 지니는 의의 (구자옥ㆍ김장규ㆍ한상찬ㆍ이길섭) 113355 2. 쓰다센[津田僊(仙)]의 약력29) 쓰다센(津田仙)은 역사적으로 일본의 메이지유신 초창기의 일본농학을 뒤흔들며 정 신적인 희망과 인재육성이라는 실제에서 엄청난 변화를 몸소 일으켜 세운 인물이며, 또 한 우리나라의 안종수(安宗洙)30)를 통한 신농학 전파와 이수정(李樹廷)31)을 통한 기독교 전파에 동기가 되었던 인물이다. 쓰다센(津田仙)은 1837년(天保)에 녹봉(祿俸) 120섬의 사쿠라(佐倉)무사(武士), 즉 치 바현(千葉縣)에 있던 번사(藩士)의 집안에서 태어났고 어릴 때 이름은 “千弥”이었으나 뒤에 “仙”으로 개명하였다. 1844年에 한코[藩黌東西塾(小学校)]에, 1848年에 온고당(溫古 堂)에 입학하여 한학(漢学)을 배웠고, 15세에 “사쿠라이가(桜井家)”로 입양되면서 에도 (江戶)의 난학숙(蘭学塾)과 영숙(英塾)에 입학하여 양학(洋学)을 배우게 되었다. 1861년에 는 쓰다(津田榮七)의 서양자(婿養子)로 입적(그의 次女인 津田初子와 結婚)하면서 외국 어 전문의 막부관료로 일하고 6, 7개월간 미국에 체류하였다가 귀국하면서 일본 최초의 하이칼라 두발을 선보인 인물로 유명해지기도 하였다. 1867년(慶應 3年)에 31세가 되었 을 때에 막부의 요원인 오노(小野友五郎)의 수행원 자격으로 미합중국에 부임하여 3년 간 머물었고 미국의 문명과 특히 대규모 농업과 경영실태에 큰 감명을 받고 귀국하였다. 실제로 1871년에 1년 9개월간(1871.12.23-1873.9.3) 100여명의 구미시찰단에 끼어서 앞의 반년 미국 체류를 포함한 외에도 구라파에 파견되어 서구의 문물을 둘러보는 기회가 있 었다. 이들 과정 속에서 1973년 6월에는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개최되었던 만국박람회 (萬國博覽會)에 사노(佐野常民)를 수행하여 일본의 사무관 자격으로 참가할 기회를 가졌 다. 그 곳에서 네덜란드의 원예가(園藝家) 다니엘 호이브렌크(Daniel Hooibrenk(荷衣伯 連))를 만날 수 있었고 반년 간 함께 머물며 신기술을 배우고 귀국하였다. 그 이듬해 (1874) 5월에는 호이브렌크의 저서명 「Method of Cultivation, Explained by Different 29) 金文吉(2003): 「津田仙と朝鮮」- 朝鮮キリスト敎受容と新農業政策, 世界思想社. 30) 安宗洙(1859-1895):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신농학 교재인 「農政新編」을 저술(1881)하였다. 이때에 중국의 호병추(湖秉樞)가 저술한 농서 「다무첨재」(茶務僉載)와 일본 사토신엔(佐藤信 淵: 1769-1850)의 「土性辯」 및 쓰다센(津田仙)의 「農業三事」를 저본으로 삼았다. 31) 李樹廷: 1882년 9월 조선에서 일본으로 파견된 수신사와 함께 궁정역사가의 신분으로 수행하 여 津田仙에게서 기독교의 복음을 받고 세례받은 뒤에, 성경의 마가복음을 우리말로 초역하였 을 뿐만 아니라 언더우드 선교사와 아펜젤러 선교사에게 우리말과 조선사정을 가르쳐 우리나 라에 기독교를 전파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함. 113366 농업사연구 제 9권 2호, 한국농업사학회, 2010. 12. Processes」와 같은 이름의 「농업삼사」(農業三事)라는 두 권의 신농학 농서를 집필하였다. 같은 해인 1874년 월에는 일본농업의 발달을 희구하던 동지들 8명과 함께 도쿄 아자 부(麻布)에 가쿠노샤(學農社)를 설립하였으며 이듬해인 1875년에는 미국 조지 워싱턴의 어구인 “Agriculture is the most healthful, most useful, and most noble employment of man” 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같은 장소에 농학교를 설립하였으며 1876년에는 월간지(月刊誌) 인 「농업잡지」(農業雜誌)를 창간하였다. 가쿠노샤농학교는 예과(豫科) 2년에 본과(本科) 3년의 5년으로 하되 별과(別科) 2년 제를 병설하였다. 예과에서는 보통학(普通學) 과정으로서 주로 영어(英語)에 치중하였고 영어에 숙달되도록 하였다. 서양농법은 수도작을 중심으로 하여 집약적인 소농경영(小 農經營)을 주제로 하던 일본농업의 실태에 비추어 볼 때 너무 조방적이고 대규모 경영원 리를 좇았기 때문에 일본에서의 적용에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원예 분야의 발달에는 영향을 미친 바가 컸던 것이 사실이다. 결과적으로 원예에 치중하던 쓰다센의 농업교육 에는 시설비가 많이 들면서도 많은 학생들을 수용하기가 곤란하였으며, 때마침 국ㆍ공 립농학교를 재정비ㆍ축소하던 차에 결국은 폐교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더라도 가쿠노샤 자체는 농학교의 폐교 후에도 농업관계의 도서를 출판하고 농원을 경영하며 종묘나 농 기구 판매 등을 통하여 기본정신에 따른 사업은 지속되게 되었다. 쓰다센은 1897년에 사업을 차남에게 넘기고 1908년 4월 24일에 딸의 가옥 신축연에 참석하였다가 귀가하는 열차 속에서 급성뇌일혈로 71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또한 가 쿠노샤는 1917년에 폐쇄되었고 「농업잡지」(農業雜誌)는 1920년에 폐간되었다. 다른 한 편으로, 쓰다센은 당시 8세 밖에 안되었던 때에 최연소자로 미국 유학을 시 켰던 그의 딸 쓰다우메코(津田梅子)를 통하여 일본의 유명한 여자대학교인 쓰다쥬쿠대 학(津田塾大学)을 창립하여 현재까지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으며, 살아생전에는 일본 에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데 고심하여 아오야마가쿠인(青山学院)의 원류라 할 수 있는 여 자초등학교와 코우쿄우가쿠샤(耕敎學舍)라는 두 학교의 창립을 이끌어내었던 인물이다. 1881년 4월에 우리나라에서 파견하였던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의 박정양(朴定陽) 일행에 섞여 조병직(趙秉稷: 1833-1901)의 세관담당 진사(進士)로 안종수(安宗洙)가 참여 하였다. 쓰다센은 안종수를 통하여 그가 배우고 체계화시킨 서구의 농학신기술을 전수 시키고 조선에 파급시킨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또한 1882년 9월에 조선이 파견한 수신 사(修紳士), 즉 궁정역사가의 한 사람으로 이수정(李樹廷)이 파견되었는데 쓰다센은 그 녀를 통하여 최초의 한글판 마가복음서를 번역케 하고, 조선에 기독교를 전파하였던 언 쓰다센(津田僊)의 농업삼사(農業三事)가 지니는 의의 (구자옥ㆍ김장규ㆍ한상찬ㆍ이길섭) 113377 더우드 및 아펜젤러에게 조선말을 가르쳐 기록하고 복음을 현실화하게 하였다. 3. 「농업삼사」(農業三事)의 내용과 농업과학사적(農業科學史的) 의의 일본의 근대화 역사에 있어서 문명의 꽃이라 불리는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의 농정사 상을 열었던 것은 대내외적으로 농학에 몰두하여 저술활동을 하였던 선구자들에 의하여 발원한다. 그 첫째로 꼽을 수 있던 인물은 일본의 에도(江戸)시대를 통하여 4대째 대를 물려가 며 농학을 연구하던 사토가(佐藤家)의 사토신엔(1769-1850)이 저술(1874년)하였던 「토성 변」(土性辯)ㆍ「배양비록」(培養秘錄)ㆍ「초목육부경종법」(草木六部耕種法)을 들 수 있다. 그는 할아버지 때부터 집안에 전래하던 농사원리를 체계화하여서 토양의 성질에 따른 분류기준을 마련하고 작물의 생육에 부합되도록 운영(경영)케 하였으며, 실제로 일본식 의 토양성질ㆍ분류ㆍ토양개량ㆍ지력배양(비배관리)의 상호연관성을 밝혔다. 그리고 영국의 Stephen이 저술한 것을 오카타(岡田好樹) 등이 번역한 「사씨농서」(斯 氏農書): 1875-1876년), 영국의 Wagiruson이 저술하고 오카다가 번역한 「영국농업론」(英 國農業論: 1878년), 또는 카와노(河野剛)의 「농가비요」(農家備要) 전편(1870)과 쓰다센(津 田僊)의 「농업삼사」(農業三事: 1874년) 등으로, 서양농학을 소개하는 책들이 쏟아져 출판 되었다. 그러나 이런 신농서(新農書)들의 독자들은 일반 농민들이 아니라 농업에 관심을 가 지고 있는 지식인층이었을 뿐이다. 당시의 일반농민들이 대상으로 찾고 즐겨 읽던 농서 는 「농업왕래」(農業往來)32)라 하는 계보의 책들로서, 에도시대부터 서민교육의 교과서 로 인정되던 인쇄물이었다.33) 1874년에 출간된 쓰다센(津田仙)의 서구식 신농업기술서 「농업삼사」(農業三事)는 주 로 ➀ 기통법(氣筒法), 즉 암거(暗渠)를 토양 속에 묻어서 배수(排水)와 산소(酸素, 大氣) 공급을 편리하게 해 주는 농사 기술, ➁ 언곡법(偃曲法) 즉 식물의 가지(枝)를 구부려 주 32) 「○○往來」의 往來란 왕복하는 手紙(편지, 문서)의 뜻에서 유래한다. 南北朝時代에는 「庭訓往 来」, 「喫茶往來」중의 手紙体裁 인쇄물이 있어서 서민들에게 요구되는 가르침을 수록한 교과서 구실을 하였다. 잠시 중단되었다가 다시 明治代에 이르러 성행케 되었다. 33) 都田農三郎(1972), 津田仙-明治の基督者 傳記農書. 113388 농업사연구 제 9권 2호, 한국농업사학회, 2010. 12. 어서 결실(結實)을 촉진시키는 농사기술, 그리고 ➂ 매조법(媒助法), 즉 꽃가루[花粉]의 교배(交配)를 도와서 결실을 돕게 하는 농사기술 등의 세 법을 기술한 책이다. 이들 세 원리는 서양농업 기술을 간결하고 선별하여 소개한 내용으로서 널리 환영을 받았을 뿐 만 아니라 실제 농가의 참고서였고 또한 초등학교[小學校]의 교과서에까지 채택ㆍ게재 되어 수만 부의 판매가 되기에 이르렀다. 쓰다센(津田仙)이 새로운 재배원리를 터득하여 배워들일 것으로 주장하였던 주요 포 인트는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었다. 첫째는 기통(氣筒)을 땅속에 묻어서 배수(排水)를 원활히 해주어야 한다는 데 있었다. 원천적으로 배수를 하는 목적은 홍수ㆍ침수에 의한 파괴적인 재해를 방지하고 농경 지의 수분조절, 토양침식의 방지, 제염을 하려는 것이다. 배수를 제대로 하면 이런 목적 달성과 함께 건토효과(乾土效果)34)를 통하여 지력증대, 토양물리성 개량, 토양온도 상승, 지내력(地耐力) 증진, 답전윤환식 이용도 증대 효과를 가져와 농업생산성을 높이게 된다. 본문에 인용된 내용에도 이들 내용을 문제점으로 들어 설명하면서 배수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배수를 위한 지표배수시설로서 경지의 경사도 구배에 따른 도랑파기와 그 밑에 배수통을 깔아 배수하는 지하(암거)배수 요령을 설명하고 있다. 지하배수는 논을 많이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의 경우, 경지정리사업에 의하여 논의 구획이 커지는데 따라 배수로까지의 거리가 멀어지게 되고 논바닥의 균평도(均平度)가 나빠지기 쉬워서 논에 담수된 물의 빠른 배제가 곤란한 문제가 되며, 지하배수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된다. 또한 약제 살포를 위한 낙수나 중간낙수 등의 물관리 신속조절이 요구되고 논밭의 윤환능력 도입에 따른 낙수조절 능력이 요구된다. 우선적으로 갖추어 야 할 배수시설은 지표배수의 완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하배수는 지표배수만 을 배제할 수 없는 지표잔류수와 땅 속의 중력수(重力水)를 신속하게 배제하여 지하수위 를 낮출 필요가 있을 때에 시설된다. 뿐만 아니라 점질토인 논에서는 지표잔류수가 오래 동안 소멸되지 않아서 농작물 재배관리에 지장을 초래하는 일이 많기 때문에 특히 지표 잔류수를 흙 속으로 일단 침투시켜서 이를 포장 밖으로 배제하게 된다. 이를 지하배수라 하며, 흔히 암거배수에 의하는 예가 많다. 34) 乾土效果: 토양을 볕에 말리거나 태워서 무효태 무기물의 흡수ㆍ이용을 활성화시킴으로써 작 물의 생육이 촉진되는 효과. 쓰다센(津田僊)의 농업삼사(農業三事)가 지니는 의의 (구자옥ㆍ김장규ㆍ한상찬ㆍ이길섭) 113399 본문의 배수통 설치는 곧 지하암거배수의 사례를 요령 있게 제시한 것으로 배수통 안에 나무뿌리나 껍질을 놓아서 오래 동안 부패하지 않고 견디며 망을 형성케 함으로써 배수기능이 무너지지 않도록 배려하고 있다. 또한 본문에는 배수조절을 통한 땅의 개량, 흙속 물리성 개량, 토성의 변화유도에 의한 제초, 경운작업의 용이성 증대효과, 비료효과의 활성화, 재해예방효과 등을 강조하고 있다. 현대 농법에 이르러 토양진단이나 시설자재 및 작업의 기계화로 일을 능률있게 할 수 있도록 바뀌었을 뿐, 배수에 관한 필요성, 목적, 원리 및 효과 등은 이미 완벽하게 터 득하여 기술화하고 있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둘째는 나뭇가지를 구부려서 식물을 기르는 기술로서 이는 나뭇가지의 유인 기술을 이른다. “무릇 식물의 가지를 구부려 주면 그 가지는 활력(活力)이 줄어드는 반면에 줄 기[幹]는 굵어지고 새로운 싹을 틔우며 꽃이나 열매도 많이 맺게 된다.”는 것이었다. 이 는 식물 눈(芽) 사이의 정아우세현상(頂芽優勢現象:apical dominance)35)을 설명한 것으로 서 특히 과수학에서는 열매를 얻기 위한 가지유인기술로 매우 중요하게 정착된 요결의 하나이다. 이는 체내 호르몬 작용을 곁들여 설명되어야 할 사항이지만 당시의 사정으로 기대하기 어렵다. 그러나 가지를 유인하는 처리로 변화가 야기되고 이 결과가 과수나무 의 생장ㆍ결실ㆍ과실 생산과 연결 지어 일어나는 생산성 변화에 대한 관찰에는 하등의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나 나무의 나이테 숫자나 나뭇결의 모양과 연관 지어 해석한 대목 에는 이상이 있었다. 여기에 나무줄기를 동여매어 생장의 차이를 유도하는, 즉 환상박피 적 처리(Girdling)36)는 매우 놀라운 관찰결과라 할 수 있다. 또 이런 현상을 보리밟기의 월동효과가 아닌 현상으로 긍정적인 해석을 내리는 대목으로 발견된다. 쓰다센의 관찰 력이나 응용력은 실로 놀라운 바 있어서, 이를 가지나 줄기의 만곡도를 유도하여 과수목 처럼 뿌리의 비대생장을 촉진시키려는 착상은 매우 기발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겠다. 셋째는 꽃의 암술과 수술을 인위교접시키는 매조법(媒助法)을 응용하는 인공교배법 이다. 과수나 채소류에 있어서는 곤충이나 바람에 의하여 수분(授粉)이 되어야 하는데 이 런 조건이 불비한 경우에는 인위적으로 수분을 해 주어야 한다. 이를 인공수분[人工媒 助]이라 하는데, 쓰다센의 책에는 이 원리를 이용한 벼나 보리, 밀과 같은 자가수정작물 35) 頂芽優勢現象: 가장 윗부분의 눈(芽)에 호르몬 효과로 영양세력이 집중되어 생장현상이 가장 두드러지게 되는 현상. 36) 환상박피적 처리: 과수나 임목의 아래 둥지의 겉둘레를 따내주거나 동여매어서 지상부의 영 양 이동을 막음으로써 수세를 보강하는 기술. 114400 농업사연구 제 9권 2호, 한국농업사학회, 2010. 12. 에 대한 인공수분 기술까지 쓰여져 있다. “모든 꽃에는 암술[雌蕊]과 수술[雄蕊]이 있고, 암수가 서로 만나서 교배한 뒤에야 열 매를 맺을 수 있다. 벼꽃이 처음 필 때에 그 꽃가루가 바람에 날려 가거나 비에 손상되 면 열매에는 쭉정이가 많이 생기고 결국에는 흉작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인공수정이 필 요하다.” 그 방법은 삼끈[麻索, 굵기는 가는 나뭇가지 만하게 한다.]으로 굵은 버팀줄을 만들 고, 양털을 꼬아 가는 실을 만들어 버팀줄에 연결하여 아래는 늘어뜨리는데 그 길이는 1자 정도로 한다. 또 작은 대나무 줄을 이용하여 콩만한 크기의 납구슬 1개를 아래에 매 달아 양털실 밑에 붙이며 반드시 4-5치의 거리를 띄워서 납구슬 1개를 매단다. 그 버팀 줄이 길면 1-2개 혹은 10여개를 매달기도 한다. 버팀줄이 짧은 것은 한 두 사람이 다루 고, 긴 것은 십여 사람까지도 다룬다. 갓 떠낸 꿀[生淸]을 가져다가 얼음과 잘 섞어서(농 도가 알맞으면 아교처럼 손에 붙는다) 양털실에 살짝 발라 부드럽고 촉촉하게 한다. 두 사람이 각기 버팀줄의 한 끝을 잡고 한낮에 벼이삭 위로 골고루 흔들어대어 아직 피지 않은 꽃들이 서로 교배하도록 다그쳐서 열매가 빨리 맺히도록 한다. 그러나 이 방법은 비가 내려 습기가 있거나 바람이 불 때에 사용하게 되면 아무런 효과가 없다. 벌꿀은 꽃 술의 영양분이다. 따라서 반드시 갓 따낸 꿀을 써야 좋다. 납구슬은 벼이삭을 건드려서 점액을 전달한다. 인공수정을 시행하기 위하여 만든 실은 다 쓴 뒤에 바로 맑은 물에 깨 끗이 빨아서 따로 둔다는 것이었다. 이 방법은 처음에 네덜란드의 농학박사인 호이브랜크(Daniel Hooibrenk)씨가 보리이 삭에 사용한 뒤로부터 세계 여러 나라가 이를 본받았으며, 일본 가쿠노샤(學農社)의 쓰 다센[津田仙]이 가져다가 벼꽃에 사용하였는데 조화를 돕는 좋은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 다. 이 방법은 알곡의 무게와 크기를 증가시키고 또 영양분을 배가시키기 때문에 지력도 증진된다. 실제로 쓰다센은 1877년에 아카사카궁전의 천황 거처에서 천황ㆍ황후ㆍ황태자가 참 석한 가운데 매조법 농사를 시연하고 융숭한 칭찬의 대접을 받기도 하였다. 벼와 보리 이외에도, 또 먼지털이를 이용하여 옥수수[玉蜀]ㆍ기장[黍]ㆍ메밀[蕎麥]ㆍ유 채꽃[油菜花]ㆍ포도(葡萄) 및 여러 과일나무에 이 방법을 쓰게 되면 모두 좋은 효과를 볼 수 있다고 하였다. 모든 꽃이 암수 수술을 수분케 하여 교배가 된 이후에 결실하는 점에 차이가 없다. 그런데 안종수가 인용하였던 일부의 농업삼사 저자였던 쓰다센[津田仙]은 자가수분과 쓰다센(津田僊)의 농업삼사(農業三事)가 지니는 의의 (구자옥ㆍ김장규ㆍ한상찬ㆍ이길섭) 114411 타가수분의 차이, 그리고 화곡류의 경우에는 자가수분을 하는 구분을 미처 알지 못하였 던 것으로 이해된다. 자가수정을 하는 식물은 벌레나 바람의 매조가 없이도 수정, 결실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포장 상태에서 버팀줄을 이삭 위로 끌거나 양털실을 흔들어 끄는 요령 자체 는 참으로 훌륭하고 독창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본 인용문에도 이 방법은 오스트리아의 호이브렌크가 보리밭에 적용한 기술을 일본 의 쓰다센이 벼꽃에 응용한 것이라 소개하고 있다. 이 서술에는 사례가 잘못 전해졌거나 시행결과의 평가가 부풀려졌을 것으로 보인다. 부기하기를, 먼지떨이로 옥수수, 기장, 메밀, 유채, 포도 등에 인공수분시켜 좋은 효 과가 있었다고 한 부분에도 작물사례 전달에 다소 오류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인공수분은 벌을 방사하거나 수분수(授粉樹)를 심는 따위의 처리로, 대개는 과수나 과채류(수박, 호박 등)의 포장에서 권장되고 있는 기술이다. 두과류작물(주로 화기 구조 상 용골변이 있어서 곤충의 비래(飛來)에 의한 Tripping37)이 되어야 하는 클로버 종류 사 례)에서도 채종을 위하여 필요하다. 다만, 이런 원리를 이용하여서 작물의 임실과 등숙을 촉진시키려 했던 의도나 포장 의 특성에 맞도록 고안하였던 버팀줄, 털실줄, 먼지떨이 등의 사례는 독특하고 창의적이 었던 것으로 가치가 있다. 넷째, 「농업삼사(農業三事)」에는 외국의 재배 사례를 소개하기도 하였다. 즉, 삼의 비 배관리 요령에 대하여도 프랑스, 폴란드, 프로시아의 사례가 있다. “프랑스에서는 삼을 심을 때 거름은 구비나 검불더미 또는 칠면조의 깃털을 섞어 쓴 다. 그러면 특별히 자양하지 않아도 그 실은 매우 광택이 난다. 또 동물의 뿔, 발굽, 털가 죽은 따뜻하고 부드러우므로 기계로 잘게 썰어 거름으로 사용한다. 폴란드 사람들은 보통 죽은 말로 거름을 만들어 짐승의 뿔과 섞어 쓴다. 대개 가축으 로 만든 거름 중에서 양과 말 두 종류는 그 효과가 가장 오래 간다. 거름은 분량을 정해 그 반은 가을갈이 즈음에 뿌려 밭을 갈고, 나머지 반은 봄에 다시 밭갈 때 사용한다. 프로시아 사람들은 흙덩이를 부수고 60일간 내버려 둔다. 만일 잡초가 자라면 거름 정량의 반으로 콩을 심고, 그것이 자라면 밭을 갈아 묻는다. 다시 거름의 나머지 반을 섞 어 삼씨를 파종한다. 대개 곡류의 씨앗을 건조한 곳에 저장하면 10여 년이 지나도 전혀 37) Tripping: 알팔파 등의 두과류 교배시 벌 따위가 날아와 꽃의 용골변에 앉아야 그 무게로 용 골변이 밑으로 쳐지고 가운데 주두와 수술이 접촉되어 교배를 이루며, 이런 현상을 일컬음. 114422 농업사연구 제 9권 2호, 한국농업사학회, 2010. 12. 손실될 염려가 없다. 그 반대로 삼씨는 상하기 쉬우므로 토기 속에 넣어 시렁 위에 놓아 두어야 한다. 숫줄기[雄莖]는 비교적 빨리 자라지만, 암줄기[雌莖]는 숫줄기가 발산한 화분(花粉)을 받아 열매를 맺은 후에나 자라게 된다. 만약 동시에 수확하고자 한다면 숫줄기는 벌써 시들어 버릴 것이다.” 또 삼대 물담그기에 대한 이탈리아의 사례는 “이탈리아 사람들은 따로 만든 못이 있 는데 돌로 쌓거나 목판으로 만든다. 젖은 조짐이 있는지 살펴본다. 매번 5-6일째가 되면 못물에 갑자기 따뜻한 기운이 생기고 약간 끓어올라 발효가 된다. 이것은 줄기가 다 젖 었다는 징조이다. 또 줄기와 잎이 아직 덜 자란 삼은 아주 빨리 젖고, 그 실은 선명하고 희고 밝으며 섬세하고 광택이 있다. 흐르는 물에 담그고 나뭇가지로 동바리를 엮어 물살 이 옆으로 흐르게 한다. 삼 줄기가 물에 젖을 때 증발되는 냄새는 독이 있다. 그 더러운 물이 흘러 닿는 곳의 물고기와 새우는 다 죽어버리고, 만약 사람이 호흡하면 곧 졸도해 버린다. 파리 사람들이 이 때문에 사망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프랑스에서는 법으로 정하 여 못에 삼 담그는 것을 금지시킨다고 하였다. 삼 껍질 벗기기는 러시아의 예를 들어 “삼 껍질을 벗기는 방법으로 러시아에서는 옛 날부터 눌러 벗기는 기계가 있어 삼 줄기를 벗길 때 껍질이 손상되지 않아 아주 편리하 다. 대게 일찍 파종하고 속히 수확하면, 삼 줄기가 부드러워 꺾이어 손상될 걱정이 없고 또 충해도 면하게 된다. 러시아에서는 1866년 3월 19일 처음 삼씨를 파종하여 6월 13일 에 수확하고, 같은 달 15일에 또 같은 밭에 파종하여 9월 상순에 수확한 두 번의 파종 예가 있었다”고 하였다. 삼의 작부체계로서는 “폴란드에서는 봄에 삼을 심고, 다음에 호밀[來麥]을 심으며, 그 다음에 보리[牟麥]와 거여목[苜蓿]38)을 심는다. 이것을 첫째 방법이라 한다. 둘째 방 법으로 처음에 삼을 심고, 다음에 순무를 심으며, 그 다음에 호밀을 심는다. 러시아에서 는 처음에 삼을 심고, 다음에 호밀을 심으며, 그 다음에 감자를 심고, 그 다음에 보리를 심는다. 일반적으로 거름은 적당히 잘 썩혀서 쓰면 벌레가 생기지 않는다”고 하였다. 비배관리에 있어서는 구비, 칠면조털, 말의 사체나 뿔과 같은 활물(活物)을 쓰는 요 령, 녹비로 콩을 심어 갈아엎는 방식 등을 과감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삼유의 윤기가 섬 유강도, 마의 크기생장 등과 관련지은 판단이었던 것이다. 별도의 격리된 못에서 삼을 물에 담가 불리고 발효시키는 요령이나 그 담근 물의 독 38) 거여목[苜蓿]: alfalfa, 개자리. 쓰다센(津田僊)의 농업삼사(農業三事)가 지니는 의의 (구자옥ㆍ김장규ㆍ한상찬ㆍ이길섭) 114433 성에 따른 못물 사용금지 사유를 평가한 부분 또한 냉철한 과학적 시각을 가지게 되었 던 징표라 평할 수 있다. 삼을 벗기는 데 사용되는 기계와 기계적 편리성이나 능률을 깨닫게 한 대목은 가히 선식농법의 지침서로 훌륭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농서인 농업삼사(農業三事)는 일본의 농학자인 쓰다센[津田僊]이 출간 (1874)한 일본 최초의 서구식 농학서이면서 동시에 우리나라의 안종수가 편찬한 농정 신편의 저본으로 활용되었던 책이다. 본래 농업삼사란 화란의 농학자 Hooibrenk(荷衣伯連)씨가 농업에 관하여 다년간 시험을 거쳐 최근에 발명한 세 가지이다. 이 방법은 모두 초목(草木) 배양에만 그치지 않아 매우 유익한 사항이 많으므로 이를 행하는 것도 또한 매우 용이하다. 이 방법을 습득하여 사용하면 수 배의 이익을 얻는 것 에 조금도 의심이 없다. 첫째: 밭을 비옥하게 만들기 위하여 기와로 만든 통을 땅 속에 묻는 것이다. 둘째: 초목의 가지를 구부려 줄기[幹]를 굵게 하고 또 열매를 충분히 맺게 한다. 또 가지와 잎을 많이 돋아나게 하는 것이다. 셋째: 초목의 꽃을 교접시켜 많은 열매를 맺게 하여 그 가지[枝納]를 늘리고 혹은 과 실 초화(草花)의 별종을 만드는 것이다. 호이브렌크(荷衣伯連)씨는 이 방법을 통해 세상 명예를 얻을 수 있었다. 그 하나의 증거로 프랑스황제 나폴레옹(拿破倫) 3세 시절 특별 히 사리[理事]의 모든 관원에게 명령하여 실제 시험을 시키고 그 발명된 농학에 큰 득이 있음을 칭찬하여 7년간 황제 자신이 몸에 지닌 장식을 벗어 친히 호이브렌크(荷衣伯連) 씨의 가슴에 걸어주고 그 공을 Region d’noneur 훈장으로 표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농학의 세 가지 원리는 당시의 세상 사람들에게 기독교와 같은 종교의 새 로운 모습만큼이나 놀랍고 생소하며 믿음이 가지 않던 이야기였을 것이다. 그러나 책의 서술 방식이 이론적이기보다는 현장의 구체적인 Manual로 쓰여 있고, 단기간에 그들 기 술을 실증적으로 보여 줄 수 있었기 때문에 쉽사리 믿음을 얻었고 보급될 수 있었다. 114444 농업사연구 제 9권 2호, 한국농업사학회, 2010. 12. 4. 서구농업의 길라잡이: 일본의 「농업삼사」(農業三事)와 우리나라 의 「농정신편」(農政新編) 농업삼사는 일본의 농학자 쓰다센(津田仙: 1837-1908)이 화란의 농학자인 Daniel Hooibrenk의 가르침을 받아 저술한 일본 최초의 서구식 농학서(農學書)라 할 수 있다. 책 이 담고 있는 “농업의 3대 원리”를 저자는 자신의 서문을 통하여 잘 요약하고 있다. “올 정월에 나는[津田仙] 영광스럽게도 오스트리아 빈(비엔나)에서 개최된 박람회에 파견되어 그 나라의 만국심사관 자리에 끼었다. 그 때 오스트리아의 유명한 농학연구자 호이브렌크(荷衣伯連(Hooibrenk))씨와 친분을 쌓았다. 이 분이 최근에 발명한 삼대법(三大法)을 나는 운 좋게도 대략 파악하는 기회를 얻었다. 원래 이 분은 수십 년에 걸쳐 부지런히 연구한 저력으로 이전의 현자들이 발겨하지 못한 묘리(妙理)를 발명하여 자기 나라(오스트리아)에 큰 득이 되고 사람들에게 널리 이 로움이 되게 하였다. 농학현장에서의 일대 공덕을 펼친 일이라 해야 할 것이다. 삼대법(三大法)의 첫째는 [atmospheric pipe](氣筒)이라 부른다. 벽돌로 만든 통(筒)을 땅속에 조용히 통하게 하여 대기를 땅속에 흡입시킨다. 지질을 비옥하고 기름지게, 가볍고 푸석푸석하게 함으로써 식물의 생육을 돕는다. 이는 초목의 거름[糞]을 흡수하게 하여 대개의 공용(功用)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보통 대 기가 땅속으로 흡입되는 것은 약 1자 5치보다 깊게는 다다르지 못하여 지금 이 통(筒)을 설치하여 대기의 침입을 촉진함으로 깊게 얕게 자유자재로 거름(糞料)의 양분을 닿게 하 여 경작의 수고를 덜게 한다. 둘째는 나뭇가지를 구부림[incline]이라 한다. 나뭇가지[樹枝]를 구부려서 본가지[本幹]의 생명력을 증대시킨다. 이것은 나무뿌리 [樹根]가 흡입하는 곳의 가스(gas)는 본가지[幹]로부터 가지 끝에 도달하여 잎사귀 밑에 서 흡수하는 탄소와 배합됨으로써 그 역할을 다 하는 것이다. 이 ‘구부리는 법(偃曲法)’ 에 의해 이미 흡입하여 저장하고 있던 양분으로 본가지[幹]를 장대(長大)하게 하고 꽃과 열매를 증식시키며 지엽(枝葉)을 우거지게 한다. 이 모두 사람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것이 없다. 흡사 인공적으로 초목의 생명을 지배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셋째는 매조법[artificial fertilization; 인공적으로 풍성하게 숙성시킨다는 뜻]이다. 과실의 증숙(增熟)을 돕는 법이다. 대체로 꽃술이 열릴 즈음에 마음대로 꽃가루의 배 합을 매개하여 그 결과를 크게 또 많게 한다. 이것을 곡류에 적용하면 알이 크며 양 또 쓰다센(津田僊)의 농업삼사(農業三事)가 지니는 의의 (구자옥ㆍ김장규ㆍ한상찬ㆍ이길섭) 114455 한 무겁고 수확 또한 많다. 나(津田仙)는 오스트리아 비엔나 외곽에 있는 보리밭에서 호 이브랭크(荷衣伯連)씨 및 박람회의 일등사무관인 다나카요시오[田中芳男]와 함께 이 방 법을 설치하여 수확기에 이르렀는데, 보통 성숙이 보리와 비교하니 정말로 두 배의 양을 얻었다. 나(津田仙)는 또 비엔나 시에서 포도나무로 시험하니 한 그루 나무(6년 전 척박한 땅 에 심은 것)로 3백 3십여 송이의 열매를 얻었다. 호이브랭크(荷衣伯連)씨와 함께 이것을 박람회 과실진열장에 가지고 갔더니 보는 사 람들이 모두 그 배양의 효험을 경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부언하자면, 올 7월 때마침 프랑스의 신문을 보자니 작년에 포도주 5병을 수확한 나 무에 이 방법을 적용해서 올해는 105병이나 얻었다는 기사였다. 이러한 것이 어찌 그 명 백한 증거가 아니겠는가? 이는 자고(自古)로 유럽의 석학들이 대를 거듭하여 경쟁하여 학예의 진보를 도와 경 세제민(經世濟民)의 진일보를 가져왔다. 물리학에서 여러 가지 공예(百工技藝)에 이르기 까지 모두 정성을 쏟아 왔다. 무릇 증기와 전신, 의학이나 화학과 같은 분야는 사람의 생 명을 구하고 행복과 이익을 제공한다. 모두 크고 넓어서 문물창명(門物昌明)의 결정체라 할만하다. 단지 농업 한 분야에서는 겨우 간편한 기계사용법 같은 것들이다. 선구자의 도움이 없다 할 수는 없지만 그 시행가치에 관해서는 고금에 일찍이 특별 한 차이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하물며 천연배합(자연배합)을 매작(媒妁)하고 천조 (天造)의 영고성쇠를 돕는 것에 있어서는 어쩌겠는가? 아! 아- 호이브랭크(荷衣伯連)씨의 3대 발명에 의해 유한한 인력, 유한한 토지로 모 든 한계를 없앤다. 이로 인해 이것을 보고 호이브랭크(荷衣伯連)씨는 번뇌한다. 농학현 장에 중요한 덕을 베풀 뿐 아니라 거의 천기(天機)를 인간에게 누설하여 자연이치의 기 교를 빼앗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이것을 조, 차, 쌀과 보리, 산림, 과수들에 실 시하면 그 넓은 이익이야 이루 헤아릴 수 없다. 나(津田仙)는 바라건대 지금 이 방법을 천하에 전파하면 몇 년 지나지 않아 위로는 정부 세입(歲入)을 증가시키고 아래로는 백 성들의 재산을 증식시켜 귀천 없이 하늘이 부여한 행복을 누리기를 바란다. 따라서 나는(津田仙) 호이브랭크(荷衣伯連)씨에게 들은 삼법(三法)을 필술(筆述)하여 남 김없이 널리 세상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제공하고 또 천하에 큰 보람이 되기를 바란다.” 이상은 「농업삼사」를 집필한 쓰다센(津田仙)의 글이다. 새로운 문명을 대하는 마음가짐은 언제 어디서나 필요한 일이다. 과학인 경우에는 114466 농업사연구 제 9권 2호, 한국농업사학회, 2010. 12. 놀라움과 불신을 수반할 수 있지만 신속히 실증되어 믿음을 만들어내기 마련이다. 농학자가 아니었던 우리나라의 안종수가 쉽게 신식농학서인 농정신편을 썼던 것 이, 비록 매국노로 오인되어 참살된 뒤에, 머지않아 각종 신식학교에서 교재로 채택되어 가르쳐지게 되었던 사례와 흡사하다. 농업삼사는 비록 일본의 책이었지만 우리나라의 농사를 근현대적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었던 농정신편의 저본책자였다는 점에서 농업사학적 사료로 가치를 인정케 한다. 농정신편은 안종수(安宗洙: 1859-1895)가 1881년 말에 편찬을 완료하여 1885년 여 름에 출판한 우리나라 최초의 구미(歐美) 농학서이다. 이 책에 서문을 쓴 시강원문학(侍講院文學) 신기선(申箕善)이 문장에 “이 농법은 서 양인의 법에서 나온 것이 많다. 서양인의 법이라면 예수의 가르침이고 그 법을 본받는다 는 것은 그 가르침에 복종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도(道)와 기(器)의 구분을 알지 못하 는 말이다. 도는 만고에 바꿀 수 없어도 기는 때에 따라 바뀌어 일정하지 않은 것이다. 비록 오랑캐의 것이라도 백성에게 이롭다면 시행할 수 있는 것”이라 하였다. 1882년 8월, <우두신설>로 유명한 지석영(池錫永)은 “우리나라 국민을 개화시키는데 도움이 되는 10개의 서적 가운데 농정신편을 포함시켜 하루 속히 이 내용을 교육시켜 야 한다” 고 고종에게 상소하기도 하였다. 1885년 광인사(廣印社)에서 4백 부를 인쇄하고 전국에 보급하였고 1905년에는 박문 사(博文社)에서, 그리고 1931년에도 조선총독부에서 식량증산의 일환으로 한글판 1권을 인쇄, 보급한 바 있다. 제1권인 원(元)에서는 서두에 22면에 걸쳐 소황태(燒蝗台)가 현미경으로 본 벼꽃과 보리꽃, 벼꽃매조도, 온도계, 농기구 등 종래의 농서에서 볼 수 없는 70여종의 도해(圖 解)가 들어 있고, 이어서 본문의 순으로 되어 있다. 본문에서는 토양의 종류와 성질을 풀 이한 「토성변(土性辨)」과 작물의 배양법(培養法)이 풀이되고, 제2권인 형(亨)에서는 거름 의 종류를 풀이한 「분자법(糞苴法)」에 이어 거름의 처방격인 「분배방(糞培方)」을 풀이하 였다. 제3권인 이(利)에서는 「육부경종(肉部耕種)」이 풀이되고 있는데 육부란 각종 작물을 부위별로 나누어 뿌리작물, 줄기작물, 껍질(섬유)작물, 잎작물, 뿌리, 줄기, 껍질, 잎 작물 을 풀이하였고, 제4권인 정(貞)에서는 화훼류와 열매작물을 다루었는데 열매작물에는 곡 류, 채소, 열매작물을 풀이하고 있다. 이 분류방식은 일견 그럴 듯하나, 꽃작물에 꽃이 아닌 목화가 포함되거나 옻나무가 쓰다센(津田僊)의 농업삼사(農業三事)가 지니는 의의 (구자옥ㆍ김장규ㆍ한상찬ㆍ이길섭) 114477 열매작물로 분류되는 등 다소 혼란스러운 감이 있다. 이와 같은 작물의 분류방식은 인용 문헌과 관련이 깊다. 안종수는 농정신편을 편찬함에 있어 3가지 농서에서 초록하고 있다. 첫째는 일본 사토가[佐藤家]의 농서이며, 둘째는 중국 호병추(湖秉樞)가 저술한 다무첨재(茶務僉載), 그리고 셋째로 쓰다센의 신농서인 농업삼사(農業三事) 등이다. 그 첫째인 사토가는 본래 대대로 의업을 하다가 사토신게이(佐藤信淵: 1769-1850)의 고조부 때부터 농학으로 바꾸어 계속 농학을 가학(家學)으로 삼은 가계이다. 농정신편 제 1권에 나오는 토성변(土性辨)은 사토신엔의 조부 사토신엔[佐藤信淵]이 저술한 것 을 사토신엔이 다시 증보한 토성변의 한문으로 초록한 것이며, 농정신편의 배양법은 사토신엔의 배양비록(培養泌錄)권1의 7장과 8장에서 초록한 것이다. 농정신편제2권 의 분자법(糞苴法)은 전기 배양비록권2, 권3, 권4, 권5 등에서 초록하고, 농정신편제2 권의 분배방(糞培方)도 사토신엔의 십자호분배례(十字號糞培例)에서 초록한 것이다. 또 농정신편3권과 4권에 나오는 육부경종(六部耕種)은 사토신엔의 초목육부경 종법(草木六部耕種法)을 한문으로 초록한 것이다. 다만 농정신편제3권에 나오는 잎 작물 중 차(茶)에 관한 풀에는 사토신엔의 초목육부경종법의 해당부분을 초록하면서 중 국의 호병추가 저술한 다무첨재(茶務僉裁)를 일본인 죽첨광홍(竹添光鴻)이 일어로 번 역한 책을 참고한 것이며, 농정신편제1권에 나오는 차의 제조와 관련된 그림 4쪽은 죽 첨광홍(竹添光鴻)의 번역본 뒷부분에 수록된 그림을 모사한 것이다. 그렇다면 구미농서 의 요소가 다분한 쓰다센의 농업삼사(農業三事)는 어디에 인용되어 있단 말인가? 구미농학의 풀이는 여러 곳에 분산되어 기술되고 있다. 이를 예시하며 다음과 같다. 첫째로 농정신편제1권에 나오는 벼꽃과 보리꽃을 현미경으로 본 그림, 벼꽃이 핀 논 의 매조도(媒助圖), 각 국의 농기구(러시아, 폴란드, 이태리 등), 온도계 등이 그것이다. 둘째로 농정신편제1권의 토성질론(土性質論)과 토질해석법(土質解釋法) 등이 다. 여기에는 토양성분을 화학면으로 풀이하고 있는데 포타시윰, 소디움, 규산, 산화철, 산화망간, 유산, 인산, 마그네시아, 클로르, 브로미움, 아이오딘, 플로오린(불소) 등의 원 소명을 비록 한자(漢字)나 영어식으로 표기하였다. 또 초목성질(草木性質), 작물생리 (作物生理), 배수술(徘水術), 토지휴한법, 경종교대법(Crop Rotation)도 구미농학 을 인용한 농업삼사에서 초록하여 농정신편제1권에 편입한 것이다. 셋째로 농정신편제3권은 껍질작물 중의 프랑스종마[佛國種麻], 프로시아종마[種 麻]법 등도 농업삼사에서 인용된 구미농학이며 농정신편제4권의 2쪽에 걸친 벼꽃 114488 농업사연구 제 9권 2호, 한국농업사학회, 2010. 12. 의 매조법(媒助法)도 농업삼사에서 인용한 구미농학이다. 이 점에 대해서 벼꽃은 자 가수정작물이라 굳이 이러한 매조법이 필요 없음에도 이 무렵만 하여도 구미제국에서 조차 그런 사실을 몰랐던 것 같다. 또 밀재배에 있어서 스코틀랜드나 런던의 품종을 든 것도 농업삼사에서 인용된 것들이다. 이렇게 볼 때 농정신편의 구미농학은 일본농서를 초록하는 사이사이에 안종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만을 초록하여 넣은 것이다. 농정신편의 편찬자인 안종수는 진사 출신으로 영농경험이나 농학의 원리를 익힐 기회가 없었으나 다행히 일어를 해독할 능력이 있어 농정신편을 엮을 수 있었다. 이제 농정신편의 내용을 농업사적 관점에서 평가하여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농정신편은 최초로 구미농학을 우리나라에 소개한 책이다. 화학용어를 도 입하였다거나 작물의 생장을 식물생리학적 인과관계로 풀이하였다거나 작물의 생식생 리를 밝힌 것 등은 이 시기에 우리가 미처 몰랐던 내용들이다. 둘째로 농정신편은 농학뿐 아니라 당시의 우리 과학 전체 중에서도 가장 먼저 구 미의 과학을 도입한 선구적인 과학서였다. 그 후 1887년 정병하(鄭秉夏)는 농정촬요(農 政撮要)를 썼고, 1888년 지석영(池錫永)이 중맥설(重麥說)을 써 구미과학 도입에 농학 이 선도적 역할을 굳힌 것이다. 셋째로 농정신편은 일본을 통해 구미문물을 도입한 결과가 되며 이때까지 청나라 일변도의 새 문물수입에서 그 대상이 이원화된 것이다. 당시에, 어떤 점에서는 천주교와 연루되었던 17세기 중국의 서광계(徐光啓)나 기독교 전파와 관련이 깊었던 19세기 일본의 쓰다센(津田仙), 그리고 같은 시대의 우리나라 안종 수(安宗洙)가 공통적으로 기독교 전래와 연관이 있으면서도 각각 제 나라의 전통농업 터 전 위에 서구의 새로운 농학기술을 도입ㆍ체계화ㆍ보급하였던 장본인이었다는 점이 특이 하다. 따라서 경위는 다르지만, 서구인을 끌어들이고, 그네들의 종교에 따르며, 전통을 탈 피한 새로운 서구문명을 끌어들였기 때문에 수많은 사회적 배척과 오해 및 편견의 박해 를 받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지식층들 속에서도 도(道)와 기(器)가 충돌하는 사상적 갈 등이 있게 마련이었다. 이 문제를 가장 잘 표현하고 대응사상을 정리하여 제시한 내용이 안종수의 농정신편에 제시되어 있어서 당시대의 이해를 위하여 참고로 제시한다. 농정신편(農政新編)의 서문은 1918년에 신기선(申箕善)이 쓴 글이다. 개화기를 맞 쓰다센(津田僊)의 농업삼사(農業三事)가 지니는 의의 (구자옥ㆍ김장규ㆍ한상찬ㆍ이길섭) 114499 아서 옛 것을 버리지 못하고 새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우리네 선비들의 고루한 생각 을 개탄하며 쓴 글이다. “차라리 수양산(首陽山)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다 굶어 죽을지언정 어찌 배부르고 따뜻한 것에 눈이 팔려 이방(異邦)의 법을 모방하겠는가? ……(중략)…… 아! 이는 도(道) 와 기(器)의 구분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대체로 아득한 옛날부터 우주 끝까지 가도 바꿀 수 없는 것을 도(道)라 하고, 때에 따라 변하고 바뀌어 일정하지 않은 것을 기(器)라고 한다. 무엇을 도라고 하겠는가? 삼강오륜(三綱五倫)과 효제충신(孝悌忠信)이 이것이니 요임금과 순임금[舜] 주공(周公)과 공자(孔子)의 도는 해와 별처럼 빛나서 비록 오랑캐 [蠻貊] 땅에 가더라도 버릴 수 없는 것이다. 무엇을 기라고 하겠는가? 예악(禮樂)과 형정 (刑政), 복식(服食)과 기용(器用)이 이것이니 당우(唐虞: 요순의 나라)와 하은주 삼대(三 代) 때에도 오히려 덜고 보탬이 있었거늘 하물며 수천 년 뒤인 오늘 날에 바뀌는 것 쯤 이겠는가? 진실로 시대에 합당하고 백성에게 이익이 된다면 이것이 비록 오랑캐[夷狄]의 법일지라도 시행하지 못할 바가 무엇이겠는가.” “대개 중국 사람들은 형이상학(形而上學)에 밝은 사람들이므로 그들의 도는 천하에 홀로 존귀하다. (반면에) 서양 사람들은 형이하학(形而下學)에 밝은 사람들이므로 그 기 가 천하에 상대할 자 없다. 중국의 도를 가지고 서양의 기를 받아 시행한다면 지구 위의 오대주(五大洲)는 평정할 거리도 못된다.” 1800년대 후기, 즉 개화기 동서양 문명 충돌현상에서 빚어지는 한 사조(思潮)를 이르 는 이야기다. 이 시기는 많은 실학자(實學者)들이 출현하여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처신 을 치켜세우며, 여러 서양의 나라들에게 문호를 개방하던 때였다. 이 때를 통틀어 개화 기라 하는데, 개화(開化)란 말 또한 주역(周易)에 나오는 “개물성무(開物成務) 화민성 속(化民成俗)”의 두문자 첫 글자를 따서 만든 용어이다. 즉 서양의 과학기술을 도입하여 국가를 부강하게 하자는 자강정책(自强政策)의 뜻을 함축하여 치켜든 기치라 하겠다. 농정신편의 저자인 안종수는 1881년 4월 10일부터 7월 2일까지의 4개월간에 신사 유람단(紳士遊覽團)의 일원으로 일본에 파견되었다가 일본의 선진농학자인 쓰다센[津田 仙: 1837-1908]을 만나 그의 사상을 배우고, 그의 저서인 농업삼사(農業三事)를 구해 왔다. 이를 기초하여 안종수는 농정신편이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농학적 신농서 (新農書)를 쓰게 되었고 이를 발판으로 서양의 실험론적 농학기술과 사상이 우리나라에 115500 농업사연구 제 9권 2호, 한국농업사학회, 2010. 12. 소개된 것이다. 우리나라 종래의 전통, 경험적 농학기술이 받게 되었던 충격은 이루 말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본문에 인용된 신기선(申箕善)의 서문은 안종수의 농정신편이 생소한 서양의 기계 론적, 실증적 농학기술과 사조, 그리고 동양의 전통적 종교인 유불선에 대하여 새로운 정서의 기독교적 문명에 연루된다는 데 배척하는 기존 선비사상과 태도를 개탄한 사연 이다. 또한 이들에 대한 일단의 대응논리였던 것이다. 물론 안종수가 쓰다센 자택을 방 문하여 벽걸이로 걸려 있던 기독교의 산상화훈(山上華訓)의 한 구절을 보고 유심한 흥미 와 관심을 보였으며 이들 친구인 이수정(李樹廷)에게 소개했던 것은 사실이다. 이런 논리는 한 세기 앞선 때부터 바람 불던 실학이나 실사구시적 논리와 일맥상통 하는 것이었지만, 안종수가 배척받았던 근원에는 기독교에 대한 연루성과 무관하지 않 은듯 하며, 결국 안종수는 무관한 죄명으로 유배생활을 하다가 풀려나 나주참서(羅州參 書)로 재직하던 중 군중들에게 맞아 죽고 말았다. 그의 죽음에 대하여 김윤식(金允植)이 속음청사(続陰晴史)에 쓴 내용은 “南嶺南之義域守 爲暴徒所害纙州參書安宗洙 亦爲暴徒 所害云云” 하는 것이었다. 그의 저서는 신기선, 지석영의 지지와 광인사(廣印社)의 도움 으로 세상에 출간의 빛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이 책은 1905년에 박문사(博文社)에서 재출간되고 1931년에 조선총독부에서 한글번 역판으로 보급된 바 있으며, 개화기의 서양식 최초학교들에게 교재로 채택되어 가르쳐 지기도 하였다. 2002년에는 농촌진흥청에서 <고농서국역총서> 2권으로 번역, 출간되기 도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고난을 통하여 서구문명의 충격은 해소의 실마리를 찾게 되었으며, 이 매듭의 실마리를 신기선은 “도(道)와 기(器)”의 개념 분별과 융합원리 및 사상(思想) 으로 풀었던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의 역사적 문제는 고루한 전통문명에만 발목이 잡혀서 세계열강 가운 데 버림받을 것이 아니라 동양의 형이상학적 도(道)와 서양의 형이하학적 기(器)를 분별 있게 모두 받아들여 이를 융합하는 지혜를 창출해내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중국을 바탕으로 하는 진리는 동서고금을 통하여 어느 경우에도 틀리지 않는 형이상 학이며, 여기에 서양의 진리인 언제 어디서라도 끊임없이 개선되고 바뀌어야 하는 효율 (생산성) 위주의 형이하학을 접목하는 지혜를 이른 것이었다. 오늘날에도 인문(人文)과 과학(科學)이 조화롭게 어루어져야함을 밝히고 있다. 또 과학(科學: Science)와 기술(技術: 쓰다센(津田僊)의 농업삼사(農業三事)가 지니는 의의 (구자옥ㆍ김장규ㆍ한상찬ㆍ이길섭) 115511 Technology)이 그러하고, 동양의 생기론(生氣論)과 서양의 기계론(機械論)이 그러하며, 기 초(基礎: Basics)와 응용(應用: Application)의 절차가 또한 그러하다. 남(男)과 여(女)가 그 렇고 정신과 육체가 그러하며 양(陽: Positive)와 음(陰: Negative)이 그렇다. 이런 두 성분 간에는 획일이 없고 주부(主副)가 없으며 다소가 없고 고저가 없다. 마치 바늘과 실처럼 서로의 형상과 기능은 천차만별로 다르지만 이들 둘은 하나로 융합되어 함 께 쓰일 때에 비로소 바느질이라는 소중하고 위대한 역사적 실체를 창조하는 것이다. 하물며 세계열강 속에서 뒤처지고 멸시받으며 구걸에 가까운 어두운 삶을 지탱하던 당시의 우리나라 처지에 이런 지혜는 더 이상 재론할 여지조차 없었을 것이다. 우리나라 의 산업사회화는 한 세기 뒤늦었던 역사를 갖는다. 이유를 따질 필요가 구태여 없다. 더욱이 반세기 가까운 일본의 식민주의적 간섭이 있었고 광복 이후 1970년대에 이르 기까지 20여년 이상에 걸친 6⋅25 동란 및 그 후유증의 세월이 있었다. 이런 속에서도 30 여년 가까운 짧은 세월 동안에 사회적 민주화와 경제적 산업화가 이루어졌고 2000년대 이래 과학, 정보, 지식사회에 이르는 길목에서는 세계 10여 째의 경제대국으로 발판을 굳 히기에 이르렀다. 세계가 놀라고 역사가 부러워하는 시대에 진입하고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문화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으며 우리는 또 한 번 긴장과 혼란에 빠져들게 되었다. 지난 수십 년간에 오직 경제 제1주의적 삶에 몰두하여 기(器)에 빠져 있었고, 이에 걸맞은 도(道)의 병행을 할 겨를이 없었던 탓이다. 과거 우리의 전통적 문 화와 가치관을 돌보지 않아 잃고 손상시키며 함부로 취택하면서 획일적 삶을 살아 왔기 때문이다. 쌀을 제외한 거개의 먹을거리가 값싼 중국, 동남아 또는 미국, 호주 등속의 나라에서 무차별로 수입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환란을 일으켜 정리할 대책을 우리는 찾지 못하고 있으며, 그 가능성의 불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먹는다는 것, 즉 농업은 국가라는 나무가 뿌리를 내릴 땅이며 뿌리가 먹을 물인 것이다. 115522 농업사연구 제 9권 2호, 한국농업사학회, 2010. 12. 참고문헌 呂氏春秋 氾勝之書 齊民要術 金亨錫(1995), 「明末의 輕世家 徐光啓 硏究」, 慶熙大學位論文. 農政全書 陳子龍, 農政全書 凡例, 「燕羽」, p.270 재인용. 北學議(1778) 課農小抄(1799) 海東農書(1778) 林園經濟志 姜氏甘藷譜 甘藷新譜(1813) 種藷譜(1834) 徐光啓 撰, 甘藷疏, 「胡道靜校韓」. 農村振興廳(2002), 古農書國넓叢書 2, 「農政新編」. 矢島祐利, 野村兼太郎 編(1954) 明治文化史 第5卷 「學術編」. 日本 交部省(1882), 文部省第十年報. 金文吉(2003), 津田仙と朝鮮-朝鮮キリスト敎受容と新農業政策, 世界思想社. 都田農三郎(1972), 津田仙-明治の基督者 傳記農書. 쓰다센(津田僊)의 농업삼사(農業三事)가 지니는 의의 (구자옥ㆍ김장규ㆍ한상찬ㆍ이길섭) 115533 Historical Significance of Daniel Hooibrenk’s Method of Cultivation Explained by Three Different Processes Guh Ja-OckㆍKim Chang-KyuㆍHan Sang-ChanㆍLee Kil-Seob Abstract In 1880, a group of Korean visited Japan to learn and introduce western cultures. One of the member was Ahn Jong Soo and there he met Tsuda Sen. Ahn got Tsuda’s book Hooibrenk’s Method of Cultivation Explained by Three Different Processes and other literatures. After returned home, Ahn studied these books and based on the knowledge obtained he published the first agricultural book in Korea “Nong Jeong Shin Pyeon(農政新編)”. This book has a great historical significance in modernizing Korean agriculture. Here we hope that if we utilize the wisdom of old scientists and literatures, there might be ways to solve various threatening factors and worldwide hunger problems. This book written by a Japanese Agricultural Scientist Tsuda Sen deals with the overall cultivation technology of Asian countries in the 19th century. He insisted on that the fundamental cultivation methods were influenced by more or less 3,000 years history of Chinese cultivation technology, science and culture. He also mentioned the background and development history of cultivation and modernization in China, Korea and Japan. Hooibrenk’s method of cultivation by three different processes is; The first is Atmospheric pipe method where brick-made pipes are laid under the ground to help inhalation of air into the soil. It will change the soil texture to fertile, light and soft and finally help the plant growth. In turn, it will result in reducing farmers’ labour for cultivation. 115544 농업사연구 제 9권 2호, 한국농업사학회, 2010. 12. The second is Incline method where the twigs are inclined to help the stalks’ vigor. The gas sucked by roots will reach to the edge of twigs through stalk and together with carbon absorbed by the leaves, it will assist the growth of stalks, flowers and fruits be increased and twigs and leaves be luxuriant. The third is Artificial fertilization method. This is a good way of increase and maturation of fruits. By mediation of pollen during flowering stage, the grains become large, heavy and finally results in a reach harvest. Key words: Ahn Jong Soo, Tsuda Sen, Hooibrenk’s Method of Cultivation Explained by Three Different Processes, Nong Jeong Shin Pyeon(農政新編), Atmospheric Pipe Method, Incline Method, Artificial Fertilization Metho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