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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수필문학관아카데미 21기-14강 자료(2023년 11월 13일)
1. 삶은 멸치 / 이호규
1) 나는 어릴 때부터 삶은 멸치를 싫어했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된장이나 국수 등에 들어있는 멸치는 싫어했다. 늘 일 때문에 바쁘신 어머니는 멸치 육수를 낼 시간이 없어서 국수나 된장을 끓일 때 통 멸치를 넣거나 멸치를 부수어 넣었다. 아무리 좋아하는 누른 국수라도 멸치가 들어가 있으면 밥을 찾거나 슬그머니 숟가락을 놓기도 했다. 삶은 멸치를 씹을 때 물컹한 그 느낌을 싫어했던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모든 멸치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마른 멸치나 볶은 멸치는 좋아했다. 입이 짧았던 탓도 있는 듯하다. 국에 들어있는 고기도 들어내고 먹을 정도였다. 비린내 나는 생선도 좋아하지 않았다.
2) 사람들은 저마다 좋아하는 음식, 싫어하는 음식이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세상을 살다 보면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싫어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언제 어디를 가더라도 사람이 모이면 꼭 그중에는 별난 사람이 있다. 내가 선택할 수 없는 모임에서는 더욱 그러한 경우가 많다. 학교 다닐 때도 그렇고, 직장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함께 하는 사람이 모두 내 마음 같고, 좋은 사람만 모여 살면 얼마나 좋을까 마는 세상사는 그렇지 못하다. 잠깐 만나고 끝나는 경우는 참고 견딜 수 있지만 거의 수십 년을 함께 일하는 직장은 조금 다르다. 그렇게 우리는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한평생을 부대끼며 갈등 속에 살아가야 한다.
3) 오래전, 직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여러 명이 함께 일하는 부서에서 직원 한 명이 갑자기 그만두었다. 하는 일이 조금 특별해서 아무나 일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같은 전공을 한 직원 중에서만 올 수가 있는데 마땅한 후임자가 없었다. 그 당시만 해도 인사 발령 전에 중요한 부서의 책임자에게는 직원 이동에 대해 의견을 묻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혹시나 모를 사고를 예방하기 위한 차원이라 생각되었다. 몇 년 전에도 사고를 일으키고 그만둔 직원이 있었기에 더 민감한 상황이었던 것 같다. 우리도 예상되는 추천 대상자 군을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는 있었다.
4) 어느 날, 부서 책임자가 조용히 불러서 인사 발령 대상자에 대해 의견을 물었다. 그 이야기를 같은 부서 동료들에게 물어보았다. 하나같이 그 사람 같으면 차라리 없는 것이 났겠다고 했다. 우리끼리 일을 나누어서 하더라도 그 사람은 안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우리 부서에 오게 되면 전체 분위기를 망쳐서 일의 능률이 떨어진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결국 그 사람은 우리 부서로 발령받지 못했다. 대신에 임시 직원 한 명을 추천받았다. 왜 그 사람이 그렇게 싫은지 자세한 이유를 부서 직원 누구도 말하지는 않았다.
5) 그리고 세월이 한참 흘렀다. 내가 중간 간부 직책을 맡은 상태에서 또다시 그 직원이 우리 부서로 발령을 받게 되었다. 그동안 직원들도 바뀌고 나이도 들어서 그런 반대 의견을 피력할 여건은 되지 않았다. 막상 우리 부서로 배치를 받고 보니 그 사람의 일하는 태도나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소문보다는 조금 달랐다. 나와도 비슷한 나이였지만 깍듯한 선임 대우를 하였다. 업무를 배우려는 태도가 적극적이며 부서를 위해 열심히 일하려는 모습이 엿보였다. 우리 직원들이 사람을 잘못 알고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6) 싫어하던 음식도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르니 수용의 폭이 넓어졌다. 삶은 멸치도 이제는 전용 용기에 넣어 육수를 내니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맛있는 영덕대게도 다리 부분만 먹다가 이제는 몸통까지 먹게 되었다. 생선도 좋아하지는 않아도 어느 정도 먹게 되었다. 나이가 드니 그만큼 음식에 대한 수용의 폭도 넓어진 것 같다. 해외에 나가서도 평소 접해보지 못한 야릇한 음식도 겁 없이 도전하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싫어하는 음식의 범위에 많이 줄어 더는 것 같다.
7) 우리도 나이를 먹고, 세월이 흐르면 좀 더 수용의 폭이 넓어져야 할 것인데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나이가 들수록 어린아이가 된다는 옛말이 실감이 날 때가 많다. 별것도 아닌 일을 가지고 평생지기와도 인연을 끊고 사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주변에 많다. 내 마음에 맞지 않는 사람도 좀 너그럽게 품어 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상대를 바꿀 수는 없으니 내가 바뀌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내 의식의 그릇을 키워서 상대를 내 그릇에 품을 수 있으면 최상의 경지가 아닐까? 모든 문제는 남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답이 있다는 자세로 살았으면 좋겠다. 아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작은 것 하나부터 실천하는 것이 소중하다.
* 누른 국수: 누른 국수는 콩가루를 넣어 누런 색을 띤다 하여 붙여졌다는 설과 밀대로 얇게 눌러 만든다 하여 누른 국수라 불렀다는 설이 있으며, 대구광역시의 향토 음식이자 대표적인 면 요리이다.
2. 순대란 /이정열
-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驅逐)한다
1 이곳에 올 때마다 순대는 막창순대만을 뜻하도록 제한하는 법안을 발의하고 싶다. 다른 식당에서 무심코 순대국밥을 주문했다가 분식집에서나 팔 법한 순대가 담겨있는 걸 보면 미리 종류를 물어보지 않은 나 자신에게 화가 나곤 했다. 설상가상으로 당면순대조차 푸짐하게 들어있지 않고, 손으로 국밥 그릇을 살짝 건드려보았을 때 옹기인 척하는 멜라민 용기라면 양 콧구멍으로 숨을 뿜어냈다.
2 여기서는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할머니 집에서 가까워 어린 시절부터 이곳 음식을 먹어왔기에 내 사전에 순대의 참고사진으로는 막창순대가 당연했다. 명절이나 제사 때마다 이 집 순대와 수육을 사다 먹은 건 물론이고 할머니 장례식 때도 삶은 돼지고기를 주문했다. 지금 사는 곳 부근에도 보쌈골목이 있지만, 막창순대를 내는 곳이 적을뿐더러 만족스럽지도 않다. 이런 연유로 순대가 당길 때는 함께 먹을 사람이 없더라도 예전에 살던 동네를 찾는다.
3 이 골목은 이름부터 돼지고기 골목이다. 나이 지긋한 택시 기사는 다 알아듣는다. 오늘도 순대국밥을 먹으러 왔다. 장사 잘 되는 국밥집은 밖에서부터 남다르다. 깔끔한 외관이 아닌 건 오랜 맛집의 필수 요소다. 이외에도 꼭 이것이 있어야 한다. ‘화기 엄금’이 벌겋게 써진 철갑문이다. 보통 그 안에는 LPG 가스통이 줄줄이 들어있다. 가스가 무슨 상관이냐고 궁금해할지도 모르겠다. 쉬운 예로 집에서 먹는 라면보다 밖에서 사 먹는 라면이 맛있는 이유는 남이 끓여줘서가 아니라 불에 있다. 용기 전체에 고루 열을 전달하는 영업용 화구는 가정용 가스레인지와 다르다. 가정에는 대부분 도시 가스관으로 LNG가 공급된다. LNG는 LPG보다 가볍다. 둘을 한데 섞어놓아도 LPG가 가라앉는다. 밀도 높은 LPG의 화력이 더 세서 훨씬 빨리 고온에 도달한다.
4 좋은 점만 있는 건 아니다. 가스통을 충전해서 사람이 직접 갈아야 하기에 더 비싸다. 비용 얼마 아끼려고 가스통에서 도시가스로 바꿨다가 파리 날리는 몇몇 맛집을 안다. 가스통이 사라진 자리에는 맛이 변했다는 사람들의 수군거림만 남았다. 이 식당은 다들 LPG를 쓸 때 장작을 땠고, LNG로 갈아타는 시기에 LPG를 쓴다. 다른 가게가 연료비를 줄일 때 따라가지 않는다. 국밥집에 뭐가 중요한지 알고 있는 식당이다. 가게 불이 꺼져도 육수 우려내는 솥은 잠들지 않는다. 대신에 가스비가 어마어마하게 나올 거다. 이 근처에는 아직 가스 집이 살아있다.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가스 집 사장이 이 집 사장에게 인사할 때는 다른 누구에게 보다 허리가 숙여질 거다.
5 스텐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섰다. 여느 때와 같이 그다지 넓지 않은 매장에 직원 여덟 명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가끔은 손님이 온 줄도 모르고 몇 명인지 묻지 않을 수도 있다. 고급 한정식집에 온 건 아니니깐 알아서 적당한 자리를 골라 앉아 돼지인지 순대인지만 말하면 그만이다.
“순대국밥 하나 주세요.”
혼자 올 때는 주저 없이 순대국밥을 주문한다. 둘일 때는 성별 상관없이 커플 세트가 딱이다. 국밥 두 개에 수육과 막창순대, 부속이 나온다. 남자 둘이라도 부족하지 않은 양이다. 이때도 내 국밥은 꼭 순대국밥으로 시킨다. 맛있는 막창순대는 흔치 않기 때문에 돼지보다는 순대를 많이 먹는 걸 선호한다.
6 이미 주문했지만 메뉴판을 쳐다봤다. 매번 보는 차림판이지만 ‘따로국밥’이 따로 없는 게 흐뭇했다. 밥을 말아놓은 국밥이 아니라 공깃밥을 따로 주는 메뉴에 돈을 더 받는 국밥집도 있다. 여기는 그렇지 않다. 기본이 따로다. 밥을 이미 풀어놓은 국밥은 밥알의 녹말이 계속해서 국물에 녹아들어 처음과는 국물 맛이 달라진다. 싱겁게 느껴지면 반찬을 과하게 집어먹게 되거나 중간에 간을 더 해야 할 수도 있다. 탕수육의 부먹찍먹 논쟁과 같은 듯 다른 맥락이다. 국물 맛을 유지하려면, 밥을 뜰 때마다 한두 큰 술 정도만 넣는 게 적당하다.
7 금세 나온 국밥을 한 번 저어주고 국물을 한 술 떴다. 피로도에 따라서 국물 맛이 다르게 느껴지니 간을 하기 전에 꼭 한 번씩 맛봐야 한다. 식탁 한편에 놓인 다대기와 소금통을 쳐다봤다. 뽀얀 국물을 그대로 즐겨서 빨간 국물은 취향이 아니고, 소금이라고 해서 국물의 기름진 맛까지 잡아주는 건 아니라 역시 새우젓을 넣기로 했다. 이 집 새우젓은 암만 많이 넣어도 쓴맛이 배어 나오지 않는다. 적당히 간을 맞춘 다음에는 순대 차례다. 한 입 크기로 썰린 막창순대를 건져내 옆으로 뉘었다. 겉절이의 야채 조금과 생마늘 한 쪽을 올리고 젓새우 두 마리를 보탰다. 육수에 있다가 나온 순대라서 간이 안 맞을지도 모르니깐 끝으로 쌈장을 손톱만큼 얹었다. 마무리한 막창순대를 보니 매끈하게 다듬은 옆면에 알록달록한 식용 장식으로 꾸며놓고 팔리길 기다리는 케이크가 떠올랐다.
8 알뜰하게 재료를 얹은 이 순대는 꼭 한 입에 넣어야 한다. 다양한 재료를 한꺼번에 씹을 때의 맛이 다르기 때문이다. 돼지 선지와 막창은 쿰쿰한 잡내가 없으며 진득하고 구수하다. 특유의 육향이 입안의 빈 공간을 채운다. 과하다 싶을 때 씹기 시작하면 겉절이의 새콤함이 느껴진다. 뒤이어 기름진 맛이 지루해질 때쯤 마늘이 알싸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9 순대를 감싸고 있는 막창은 씹는 재미를 선사하고 안에 있는 찹쌀과 다양한 돼지 부속이 으스러지면 알아서 강약 조절하는 자연풍 선풍기 같다. 이어서 뭉근하게 삶은 부추, 표고가 익히지 않은 야채와 함께 씹히는 게 느껴지면 식감의 종합선물세트가 따로 없다. 순대를 삼키고 나서 밥을 한 숟갈씩 국물에 적셔 먹으니 속에서 온기가 돌았다. 여느 식당의 공깃밥처럼 포슬하게 담지 않은 밥 한 공기는 포만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막창순대도 섭섭하지 않게 여덟 개쯤 들어있다. 다 챙겨먹고 나니 집에 돌아갈 때는 겉옷을 잠그지 않아도 쌀쌀하지 않을 거라는 자신감이 생겼다. 평소에는 똑바로 잘 걸어다니지만 왠지 없는 배를 내밀고 팔자걸음으로 걸어야 할 것만 같았다.
10 당면순대를 먹고선 느낄 수 없는 든든하고 기분 좋은 배부름이었다. 언제부터 순대가 당면이 대부분인 분식순대를 일컫는 말이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전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지금의 순대를 순대라 부르는 건 증류식 소주가 아닌 희석식 소주를 소주라 칭하는 것처럼 음식의 기준을 낮추는 용어다. 돼지라고는 선지 조금 섞어 순대라고 부를 것 같으면 우리가 사용하는 지폐에 희끗하게 보이는 은색 점선이 있다고 은 지폐라 부를 건가.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 (Bad money drives out good): 18세기 영국 제정고문이었던 존 그레샴이 엘리자베스 1세에게 쓴 편지에서 사용한 구절.
당시 영국 정부는 화폐 제조 비용을 낮추기 위해 은 함량을 90%에서 30%로 낮춘 주화를 같은 액면가로 발행하기 시작했음. 시장 참여자들이 은 함량이 높은 동전은 보관하기만 하고 신형 주화만 사용. 상대적으로 가치 변화가 크지 않은 금, 은 등의 귀금속 비중이 높은 화폐는 사용보다는 보관의 용도로 쓰이고, 실제 화폐의 용도로는 금속 함량이 높은 화폐만 돌아다니게 된 상황을 묘사한 말.
3. 첫 집/장금희
마침내 우리집을 장만하게 되었다. 마당이 제법 넓고 햇볕이 잘드는 남향집 반 양옥 새집이었다. 우리에게 이런 날이 오다니 뿌듯하고 기뻐서 꿈만 같았다. 김해 마산 대구로 옮겨 다니며 여섯 번 이사하고 팔 년 만에 마련한 새 보금자리였다.
1971년에 결혼을 하고 남편을 따라 회사가 있는 김해로 가서 신접 살림을 차리게 되었다. 총각 때 살던 자취방에는 전축 하나만 덩그러니 윗목을 지키고 있었다. 2년동안 우리는 교제하면서도 집에 대한 의논도 하지 않고 예식을 올리고 그냥 그 단칸 방에서 불평 없이 살았다. 다들 그렇게 사는 줄로만 알았다.
첫째 딸이 태어나고 그이가 마산 본사로 발령이 나서 경남 마산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처음엔 객지 생활에 낯설음도 있었지만 우리는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어린 딸의 재롱에 푹 빠져들게 되었다. 아기가 강아지를 유난히 좋아하길래 시골 장에 가서 조그만 강아지를 사와서 키우기도 했다. 앞뒤 가리지도 않고 단칸 셋방살이 주제에~. 일년 뒤 연년생으로 둘째 딸을 출산하게 되었다. 큰 욕심없이 어린 두 딸을 바라보며 누리던 소박한 행복도 오래 가지 않았다. 평소 감기를 자주 앓던 남편의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었다. 병원에 갔더니 폐 결핵 중증이란 진단을 받았다. ‘우리에게 이런 시련이 닥칠 줄이야!’ 눈앞이 깜깜하고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최선의 방법으로 남편은 휴직을 하고 마산의 가포 바닷가 어느 병원에 장기 입원을 하게 되었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출구는 보이지 않고 어둠만이 앞을 가로 막았다. 나는 얼이 다 빠져나간 사람이 되어 얼마동안 넋을 놓고 있었다. 옆에서 아무것도 모른 체 엄마만 빤히 쳐다보고 웃고 있는 어린 두 아기 눈과 마주쳤을 때 그제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애기 아빠를 꼭 살려야만 했다.
생각 다 못해 낯선 객지에서 살 엄두가 나지 않아 아무런 대책도 없이 처녀 때 살았던 대구로 무작정 거처를 옮기고 말았다. 기댈 곳 없는 대구도 낯설기는 마찬가지였다. 돌아보니 셋방살이 서러운 사연들이 구구절절 많았던 시절이었다. 인심 좋은 세대주가 있는 반면 애들 여럿이 있는 세입자들은 셋방 구하기도 녹녹지가 않았다.
마산서 대구로 처음 와서 어느 집에 방을 얻게 되었다. 그 집 주인 아주머니는 애기 우는 소리가 나기만 하면 시끄럽다며 잔소리를 퍼붓기 시작했다.
이사 소식을 전해 들은 친정 엄마가 고향에서 오셨다. 엄마가 와 계셔도 여전했다. 며칠동안 지켜 보신 엄마가 보다 못해 주인 아주머니께 ‘다 같이 ‘자식 낳아 키워본 사람들이니 불편하더라도 좀 참고 이해해달라’ 고 주인 아주머니께 간곡히 부탁했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속을 끓이시던 엄마는 나와 아무 상의도 없이 근처 어디에 방을 새로 얻었다면서 이사를 서두르셨다. 엄마 하신 말씀이 ‘신랑이 옆에 없으니 얕잡아 보고 그러니 용해 빠진 네가 이집에 살다가는 곧 말라 죽겠다’ 면서 이사까지 해주시고 가셨다. 12일만에 결국 그 집을 나오고 말았다.
이집 저 집 전전하며 셋방살이 하는 동안 좋은 사람도 만나 도움을 받으며 값진 세상살이도 배웠다, 남편을 병원에 보내고 애기들만 바라보고 있을 수만 없어 옷 수선을 얼마동안 해 보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수입은 없고 남편은 꼭 살려야 하고 망망 대해에 나홀로 파도를 헤치며 노를 저어 가야 하는 선장이 되어야 만했다. 무엇이던 해보려고 해도 주위에서는 다들 무모한 도전이라고 극구 반대만 했다
나는 처녀 때 배운 양재 기술 하나만 믿고 아무런 대책도 없이 큰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하나의 문이 닫히면 다른 하나의 문이 열린다고 했다. 하늘의 도움인지 우연히 돈놀이하시는 계주 아주머니로부터 산통 13개월짜리 1번을 어렵게 타내어 자금을 마련하게 되었다.
눈물 어린 우여곡절을 겪으며 동네 시장 입구 몫이 좋은 자리에 드디어 “코스모스”라는 간판을 걸고 의상실을 차리게 되었다. 그때부터 나와의 사투는 시작되었다
우리 외에도 그 상가 건물에는 약국. t v가게. 국수 집. 이불 집. 등이 세 들어 열심히들 장사를 하고 있었다. 그 당시만 해도 고만고만한 애들이 2~3명씩 다 딸려 있어 골목과 안 마당에는 항상 아이들 소리로 왁자지껄 했다.
주인 아주머니가 2층에서 자주 내려다보고는 시끄럽다며 조용히 하라고 고함을 질러대곤 했다. 어느 날 월세 주러 갔더니 난데없이 점포 비우고 나가라고 했다. 애들 소리가 시끄러워 낮잠도 한번 제대로 못 잔 다는 것이 이유였다. 미안하고 죄송하다고 빌고 빌었다. 알고 보니 집집마다 초비상이었다.
복날에는 주인 비위 맞추느라 수박이랑 돼지 고기 선물 공세를 다투어 하기도 했다. 어느 날 호출이 와서 올라갔더니 정말 안되겠다며 당장 점포를 비우라고 했다. 일년도 되지 않았는데 그런 횡포가 어디 있겠는가.
인테리어 값이 얼마인데~ 우리집 어려운 형편을 아무리 사정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잠도 못 자고 속은 타 들어 갔다. 고민 끝에 서문 시장에 가서 화려하면서도 세련된 무늬가 있는 천으로 멋진 드레스를 한 벌 지어서 올라갔다. 언제 이사 가느냐고 묻길래 웃으며 “이 옷 한번 입어 보세요” 하며 드레스를 내어 놓았더니 표정이 싹 달라졌다. 입고는 거울 앞으로 가더니 “아이고 애기 엄마 솜씨가 보통이 아이구만”하셨다. 키가 늘씬한 체격이라 장닭이 그만 공작새로 변했다. 약발은 주효했다. 그 옛날 신혼 방에 가구 대신 사과 궤짝 엎어 놓고 살아온 얘기부터 시작해 칠성 시장 난전에서 장사해 돈 모은 얘기를 줄줄이 풀어내었다. 저린 발 주물러가며 얘기 다 들어주었다. 그 뒤 내가 지어준 화려한 원피스를 걸친 체 한껏 폼을 잡고 계추에 나가시던 아주머니 모습이 지나간 드라마 한 장면처럼 스친다.
어느새 세월은 반세기가 지났다. 우리 인생에 파도 없는 바다 있을까. 바람 없는 들판 있을까. 지나온 내 삶의 여정 중 가장 큰 고비로 닥친 새파란 시절. 사방이 다 막히고 갈 길을 잃었을 때 주어진 운명에 순응하며 땀과. 눈물로 마련한 의상실과 우리집. 나에게는 그 감회가 색다르다. 빚도 다 갚고 몇 년 동안 애 태우던 남편의 건강도 찾아 복직하게 되었다. 최악의 여건 속에서 시작한 나의 코스모스 의상실을 5년만에 잘 마무리하고 말았다.
한살이라도 더 젊었을 때 불어 닥친 내 인생의 고비. 그 고비를 넘기며 한층 더 튼실한 정신의 근육을 일찍이 키워 준 나의 시련에게 언젠가부터 다행이었다고 스스로 위로를 해 주곤 한다. 우리 코스모스 의상실을 찾아준 고객 분들과 이웃들. 그리고 남편과 우리 가족을 버리지 않은 우주의 모든 신께도 감사드린다,
의상실 하고 있을 때였다. 그날은 애들이 낮부터 해가 질 때까지도 보이질 않았다. 걱정이 되어 온동네를 찾아 다니다 혹시나 하고 새 집에 가 보았더니 빈 집에 우리 애들이 놀고 있었다. “아빠 우리 집이 좋아. 너무 좋다” 매일 오고 싶다는 딸을 보며 코 끝이 찡하다고 했다. 그 며칠 전 우리집이라고 아빠가 한번 데리고 간 적 있었는데 꿰나 먼 거리여서 어린 애들이 찾아 갈 줄은 생각도 못 했다고 한다.
당장 의상실을 다 접고 우리 집으로 들어가 살림만 하고 살았다. 그동안 쌓인 피로에 휴식이 필요했다.
지금과는 달리 골목엔 항상 동네 아이들이 신나게 떠들고 웃는 소리가 정겨웠던 시절이었다. 늦둥이 막내 딸도 그 집에서 낳았다 학교에 입학한 첫째가 교문 앞의 노란 병아리를 사와서 한참동안 키워 보기도 하고 마당에는 나팔꽃과 조랑 박 넝쿨을 올렸다 초가을 잘 익은 조랑박을 따다 식구들이 모여 조랑 박에다 누가 제일 예쁜 그림을 그리는지 상품 걸기도 했다, 명절에 우리 애들이 모이면 저희들 어릴적 살았던 그집 얘기를 하곤한다.재작년 추석때 추억을 되살려 볼겸 모처럼 딸들과 옛집을 한번 찾아 가 보았더니 주위 환경도 몰라보게 변해 있었고 우리집은 3층 빌라가 되어 있었다. 눈 감으면 아련히 그려지는 우리집. 사랑하는 우리 가족의 행복과 고운 추억을 함께 키우던 우리집. 잊지 못할 첫 집이었다.
4. 외숙모의 고등어탕 / 이원규 1
1) 음식은 인간을 살 수 있게 하는 원천이다. 에너지를 공급하여 동물로서 살아가게 한다. 그리고 음식에는 추억과 사랑과 감사가 있어 인생이 풍요로울 수 있다. 어떤 음식은 아버지를 생각나게 하고, 어머니를 그리워하게 하기도 하며, 친구가 보고 싶어지게도 만든다. 자식을 향한 사랑을 담거나 남편에 대한 애정으로 음식을 만들기도 한다.
2) 음식은 추억이다. 어려서 학교 수업을 마치고 시골 장터를 어슬렁거리다 아버지를 만나 장터에서 국밥을 먹어본 중년에게 장터국밥은 가슴이 먹먹하고 그리움이 머리를 울리는 추억이 된다.
3) 음식은 사랑이다. 땔나무로 밥하던 시절에 겨울 아랫목 이불 밑에 놓여 있던 따뜻한 공기밥은 어머니의 사랑이다. 그래서 우리는 음식에다 사랑을 한 숟가락 넣으라고 하는지도 모른다.
4) 음식은 감사를 나타낸다. 잔치집의 음식은 귀한 시간을 내어 참석한 사람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다. 평소 베풀어 준 은혜에 대한 고마움을 식사 대접으로 나타내기도 한다. 밥 한번 먹자는 말은 함께 한 시간이 고맙다는 표현이기도 하다.
5) 나에게 고등어탕은 외숙모가 베풀어 준 의 사랑이고 감사에 대한 추억이다. 고등어탕은 진한 추어탕을 닮았다. 처음 한두술 뜰 때 약간 비릿한 맛이 나는 것을 빼면 정말 독특하고 진한 맛이 우러나는 추어탕과 닮아있다.
6) 시골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타향인 대구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게 되면서 사촌형의 자취방에서 한 해를 지내고, 어머니의 주선으로 쌀만 주기로 하고 비산동 미나리깡에 지어진 단독주택인 외삼촌댁에서 더부살이를 하게 되었다. 외숙모가 워낙 덕스럽고 음식 솜씨도 좋아서 내 집처럼 서스럼없이 지냈고, 친구들도 더러 놀다 가곤 하였다. 7) 때로는 외조부모님과 같이 방을 쓰기도 하고 이종사촌 형이나 누나와 지내기도 하였고, 남동생 둘도 대구의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같이 더부살이를 하였다. 외사촌 동생이 연년생으로 태어나고 대학에 진학하면서 이년 반을 잠시 자취한 것을 제외하면 결혼할 때까지 외숙모 밑에서 살았었다.
8) 외숙모가 끓이신 고등어탕은 구수하고 감칠맛이 있어 아주 좋아한 국이었는데 사실 고등어탕이 맞는지 정확하게 기억하지는 못하고 있다. 그래서 이름도 확실하게 알고그리운 고등어탕도 먹고 싶어 몇 년 전에 외숙모께 부탁을 드렸었다.
“숙모님, 예전에 추어탕처럼 끓인 물고기탕 언제 한번 해 주세요.”
“그때는 돈이 없어서 그렇게 했는데 너무 미안했었다.”고 말씀하시는 외숙모의 표정이 너무 슬프게 느껴져서 나는 그때 맛이 좋았었다거나 그것이 고등어탕이 맞냐고 물어보지도 못하고 말았다. 그 후로는 아예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 사실 그 당시 외숙모는 자전거로 우유 배달을 하기도 했었다.
9) 섬유업에서 자수성가한 외삼촌은 생신 때마다 열 남매인 외갓집 형제 자매들을 모시고 잔치를 하셨다. 우리 삼형제 가족과 이종사촌들도 참석하면 서른명 정도의 인원이 되어 시끌벅적한 잔치 분위기가 조성되고, 솜씨 좋은 외숙모께서 진수성찬을 차렸건만 나는 소박한 고등어탕이 없어 아쉬웠다.
10) 고등어탕은 철없던 시절에 얹혀 살았던 것에 대한 미안함과 감사이며, 어려운 형편에 생질에게 맛있는 음식을 먹이려는 외숙모의 사랑이었다. 지금 내게는 그립고 아름다운 추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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