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여 년 전, 서울에서 아파트 생활할 때였다. 어느 날, 애들이 강아지를 키우고 싶다고 하길래 극구 반대하였다. 나의 어린 시절에는 개를 집안에 키우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 할 일이었다. 그 시절에는 독꾸, 쫑, 메리라는 이름으로 마당에서 키워졌다. 성견이 되면 어느새 어떤 용도로 사라졌거나, 혹은 팔아버리고 새로운 강아지를 데려다 키우고 그랬다. 그런 의식이 있는 나로서는 집안에 개를 키우는 것은 용납이 되지 않았다. 그런 나에게 개를 키우자고 하니 나는 “데리고 오면 그날로 물 끓이고 된장을 바르겠다.”로 엄포를 놓았다.
며칠이 지나자 아내는 애들과 작당하고 개를 한 마리 데리고 왔다. 아내도 작정하였는지 먼저 선수를 쳤다. “ 결혼하고 이날 이때까지 당신 하라는 대로 했는데 이제 나도 나 하고 싶은 대로 하겠다.” 하고 싸울 기세였다. 아내의 강력한 태도에 그날은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지나자 나도 강아지에 점점 익숙해지고 있었다. 퇴근 후 집에 돌아오면 애들이 인사도 하기 전에 제일 먼저 반겨주는 게 강아지였다. 나도 모르게 어느새 강아지를 안게 되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났다. 주말부부로 당진에서 근무할 때의 일이다. 현장 업무를 하던 중 숲속 아래 계곡에 버려진 종이 상자 안에 강아지 한 마리가 있었다. 처음 볼 때 병이 나서 버렸나 하고 사무실로 복귀하였다. 그러나 마음이 영 내키지 않아 아내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였더니, 일단 동물병원에 데려가서 진찰을 한번 받아보라고 하였다. 병이 들었으면 시청에 연락하여 처리하기로 하고, 버려진 그곳을 다시 찾아갔다. 한두 시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낑낑대며 울고 있었다.
동물병원에서 별 탈이 없이 건강하다는 진단이 나왔다. 주말부부로 혼자 전원주택 생활하는 아내에게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아내가 개를 무척 좋아해서 한번 키워 보기로 하였다.
강아지의 이름을 뽀미라 지었다. 뽀미는 생기발랄하였다. 사람들을 좋아해서 누구에게라도 붙임성 있게 달라붙었다. 이웃들은 뽀미를 귀여워해 주었고 우리가 여행을 갈 때면 주변에 맡길 정도로 이웃들이 뽀미를 좋아했다. 간식을 사다 주기도 하고 뽀미를 자기 집으로 데려가 놀기도 하였다. 그만큼 뽀미는 동네 개였다. 주변 이웃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런 뽀미가 어느 날부터 뒷다리를 질질 끌면서 앞다리로만 걷는 것이었다. 병명은 적혈구 증가증으로 선천적인 불치병이었다. 수의사의 이야기로는 두서너 달에 한 번 정도는 피를 뽑는 사혈 치료 해야 한다고 했다. 피가 너무 뻑뻑해서 한쪽 다리는 피를 뽑고 한쪽 다리는 수액을 넣어 피를 묽게 해야 혈액순환이 잘된다는 것이다. 혈액순환이 잘되지 않아 가끔 뒷다리가 마비가 와서 앞다리로만 걷는 것이였다.
주기적으로 치료받던 뽀미가 연말 밤늦은 시간에 발작이 시작되었다. 너무 늦은 시간이라도 상황이 급박하여 병원 수의사에게 전화하였는데, 하필 그날 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상중이라 하였다. 어쩔 수 없이 다음날 다른 동물병원에 데려가기로 하였다.
다음 날 아침, 동물병원이 문을 열자마자 응급으로 뽀미의 치료를 부탁하였다. 치료받을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하며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오후에 동물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치료가 끝났으니 데려가라는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뽀미가 사망했다는 이야기였다.
동물병원을 들어서는 순간 아내는 눈물을 펑펑 쏟아냈다. 마지막 인사도 못 하고 이렇게 보냈다고 슬피 울었다. 곁에서 보고 있는 내가 ‘내가 죽어도 그렇게 울 수 있을까’ 할 정도였다. 사체 처리에 대하여 병원에 문의하니 병원에서는 폐기물로 취급하여 처리한다고 했다. 가족처럼 지냈던 뽀미를 쓰레기로 취급받아 버려지는 건 원치 않았다. 여기저기 수소문하여 뽀미를 동물장례식장에서 화장하기로 하였다.
몇 해 전, 동물장례식장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부정적이었다. 세상이 어쩌다가 이제 동물까지 화장하고 장례까지 치러준다는 말인가 하고 별로 탐탁지 않게 생각하였다.
그랬던 내가 뽀미를 위해 동물장례식장을 찾았다. 동물장례식장은 사람의 장례식장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수의, 유골함 등 종류별로 있었으며 봉안당으로 조성된 추모관도 있었다. 장례식장 예약할 때 사진을 보내달라고 하여 몇 장 보내주었더니, 모니터에서 뽀미의 사진이 반복되어 나오고 있었다. 그 앞 상차림에는 평상시 좋아하는 간식, 물이 놓였다. 그리고 양쪽에 촛불이 켜져 있었고 향도 피울 수 있도록 향대도 있었다. 화장하기 전에 뽀미에게 보내는 편지를 아내와 딸아이는 적었고 그것을 화장할 때 같이 태워 보내주었다. 유골함을 건네받은 우리는 수목장으로 처리하였다. 그날 집으로 돌아와서 아내와 딸과 같이 뽀미와의 추억의 사진을 공유하였다. 그만큼 우리 가족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아내는 뽀미를 하늘나라에 보낸 날부터 삼일 정도 두문불출에 식음을 전폐하고 큰 슬픔에 잠겼다. 친정 부모님이 돌아가셔도 이렇게까지는 하지 않았는데…. 나도 삼일간은 뽀미가 먹던 밥그릇, 물그릇 그리고 평소 잘 가지고 놀던 장난감, 방석 등을 그냥 그대로 두었다. 뽀미를 보낸 그 날 밤 나는 강아지 때부터 지금까지 정들었던 추억을 생각하면서 이런저런 생각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졌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생명을 다한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리고 이별이라는 것은 사람이나 동물이나 차이가 없다. 하나의 생명체가 꺼져감에 많은 생각이 들었다. 모든 생명은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 나도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적은데 죽음에 대하여 생각하니 우울함이 몰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