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가을 평화누리공원 콩 축제를 둘러보고
정성영
늦가을이라지만 아침저녁으로 꽤 쌀쌀하다. 엄동설한이 코앞에 다가온 듯 가을이 떠나가고 있다. 하긴 며칠 전 전국적으로 올겨울 첫눈이라고 한바탕 하얀 눈이 퍼붓긴 했다. 그래도 아직은 울긋불긋 단풍 구경도 하는 만추의 기분이 싹 가신 것은 아니고 조금은 남아 있지 싶다.
남들은 단풍 여행이다 해외여행이다 떠들썩 한데 맨날 <방콕> 신세를 못 벗어나고 있으니 형편이 말 아니다. 그런데 기쁜 소식이 날아 왔다. 콩들이 축제를 연단다. 콩들이 축제를 열다니 남들은 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물으실지 모르겠다. 서울 장안에 소문이 파다하다. 옛날에 심청 낭자가 눈먼 자기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맹인잔치를 열었듯이 아마도 내 짐작이긴 하지만, 콩들이 여름내 무더위 속에서도 자신들을 올곧게 키워 준 농부들의 사랑과 노고에 보답하기 위한 보은 행사를 벌리는 모양이다. 하긴 뭐 콩들이 무슨 행사를 하겠나.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다 사람들 자신이 잘 먹고 잘살자는 뜻에서 벌리는 행사이지만 말이다. 억지 춘향으로 <콩들의 축제>라고 말을 했지만 한편 생각해 보면 또 그럴 듯 한 말이라는 생각도 든다.
콩들의 축제에 덕 보고 즐기는 쪽은 어차피 사람이고 사람을 위한 행사다. 소문을 듣고 좀이 쑤셔 동료 몇이서 죽이 맞아 아침 9시에 서울에서 길을 떠났다. 옛날 같으면 비포장 황톳길에 덜컹거리며 완행버스를 타고 갔겠지만, 시대를 잘 만나 돈 한 푼 안 들이고 땅속을 가는 지하철로, 땅위를 달리는 전철로, 다시 안락의자에 편안히 앉아가는 관광버스에 몸을 실고 콩 축제가 벌어지고 있는 임진각 평화누리 공원을 3시간여 만에 느긋하게 내렸다. 드넓은 공원 광장에 이미 수많은 사람이 마치 시골 대목 장날 장꾼처럼 인산인해였다.
풍물패의 꽹과리 소리 북소리 징 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가을 하늘 아래 왁자지껄 흥청흥청 대단한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옛날에 어렵던 시절 놀 거리도 없고 구경거리도 없던 때 초등학교 가을 대운동회는 근동 마을 사람들의 잔치 분위기였고 큰 구경거리였다. 임진각 콩 축제도 그때 그 시절 생각나는 그런 분위기였다. 그래서 <콩들의 축제>라고 했던 것인데 말하자면 오늘은 콩들이 주인공이고 사람들이 구경꾼이 된 듯 싶다. 콩들이 여러 가지 맛있는 먹거리로 변해가는 과정도 구경하고 사람 구경도 하고, 맛있는 콩 음식도 맛보는 행사다. 어린아이들의 재롱을 구경하는 운동회처럼 많은 사람과 어울려 콩들의 변신하는 모습을 재롱처럼 바라보는 기분이다.
그런데 그뿐이 아니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그 옆의 임진강 위로 놓여있는 독개다리 위에는 수많은 외국인들로 북적북적했다. 웬일인가 해서 살펴보니 전쟁의 참상과 분단의 현장을 직접 보러 온 외국 관광객인 듯 싶었다. 군데군데 외국어로 설명해 주는 관광 해설사들의 모습도 여러 곳에서 볼수 있었다. 녹슬은 기찻길과 부서진 기관차의 육중한 모습은 저편에서 벌어지고 있는 콩 축제와 대단히 상반되는 또 다른 감상적 분위기였다는 느낌도 없지 않았다. 임진강 너머 저쪽 산마루만 넘으면 갈수 있는 옛 장단군 땅은 나랏님께 진상하던 그 유명한 <장단 콩>의 고향이 아니던가.
힘들다는 농사를 나 또한 젊은 시절 군대 다녀오듯 한 삼 사년 겪어 봐서 잘 안다. 뙤약볕에 콩밭 매는 일은 정말로 힘든 중노동이었다. 한 여름 보리를 베어내고 심는 그루 콩밭을 맬 때는 노래에도 나오듯이 베적삼이 땀에 흠뻑 젖는 힘든 일이었다. .
아침 일찍 새벽같이 일어나 논두렁 밭두렁을 거닐며 내가 심고 가꾸는 전장을 둘러 볼 때면 베잠방이가 이슬에 젖어 들어도, 콩 포기가 넌출 넌출 싱싱하게 자라 올라오면 귀엽게 무럭무럭 성장하는 자식들 바라보는 것처럼 입가에 흐뭇한 웃음이 번지곤 했다.
그렇게 정성으로 키워낸 콩 포기가 보답이라도 하듯 통통한 콩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고 여물어 갈 때면 배가 저절로 부른 법이다.
찬 바람이 아침저녁으로 불고 하얗게 무서리가 내릴 즈음이면 또 한번 농부들의 잰 발걸음이 들녘을 누비게 된다, 잎을 떨군 앙상한 콩대에 꼬투리를 주렁주렁 잔뜩 매단 콩포기들이 농부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들판은 점차 한해의 농사가 갈무리 되어가며 황량하게 변해가는, 또 한해의 세모(歲暮)가 어김없이 찾아 오는 계절이었다.
콩 이야기를 하다 보니 인류로서는 크게 고마움을 잊어서는 안될 것 같다. 콩이야 영양학적으로 말하면 나야 문외한이지만 듣기로 밭에서 나는 단백질이라고 모두들 침이 마르도록 칭송를 한다..
육식에서 단백질 섭취하기를 거부하는 채식주의자나 동물 애호 단체들의 기사들도 이따금 언론에 나오기는 하지만, 그런 면에서 콩의 역할은 한없이 크게 느껴진다.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는 특히나 콩의 중요성은 삼척동자도 알만 한 일이다. 한국 사람이지만 콩의 중요성을 모르는 사람이 많다고 말하면 아마도 <콩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곧이 들을 사람이 없을>듯 하다. 간장, 된장, 고추장에는 모두 콩으로 쑨 메주가 있어야 하니 약방에 감초처럼 안 끼는 곳이 없는 콩이다. 요즘은 또 청국장이 건강에 좋다고 난리들이다. 누군가 또 뭐가 좋다고만 하면 반짝하고 그저 잠깐 사이에 우루루 몰려드는 냄비근성을 비난하곤 하지만 콩으로 된 음식이야 마땅히 존중받아도 뭐하나 부족함은 없을 듯 하다.
오늘 아침에도 두부를 잔뜩 썰어 넣은 구수한 된장찌개와 밥 한공기를 맛있게 뚝딱 해치웠지만, 사실 매일 먹어도 물리지 않는게 콩으로 만든 된장찌개다. 친구들과 더러 점심이라도 함께하다 보면 된장찌개는 누구나 좋아 하는 우리 오천만의 음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반찬으로 이용되는 콩의 가치도 높지만, 밥밑콩으로 강낭콩이며 검정콩을 밥에 두면 그 또한 맛과 영양에서 속된 말로 끝내준다. 그런데 콩의 형제들이라고 할 수 있는 팥이며 녹두등은 입도 벙긋 안 했으니 좀 섭섭하다고 생각하겠지 싶어 살짝 미안하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콩 이야기는 할 이야기가 너무 많다.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이처럼 콩에게 단단히 신세를 지고 있다. 이번에 콩들의 축제에 다녀와서 생각해 보니 사람들도 콩에게 감사함을 잊지 말아야겠다.
<끝>
*2023년 11월24일부터 11월26일까지 파주 장단 콩 축제를 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