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늪 공소(사지 공소) 2012년 5월 3일 -최대건 앤드류 -
1. 창녕군 대합면 주매리 [主梅里, Jumae-ri] 모래늪(砂旨) 공소
대합면 주매리는 대부분 평지와 해발 100m 이하의 낮은 산지로 이루어져 있고 주매지가 있고 남쪽으로 창녕우포늪이 있다. 매화가 많이 있었다 하여 주매동이라 하였다.
주매리는 자연마을 마산터, 모래늪, 안골, 인불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현재 우포늪이라 불리는 이곳은 얼마 전(1970년대)까지 만해도 소벌이라 불렀다. 소벌의 유래는 이곳에 늪이 형성되어 온갖 풀들이 많이 자라 고암면, 대지면, 이방면, 대합면 소들이 이곳에서 풀을 뜯어 배불리 먹였다고 해서 소벌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곳 주매리는 6.25때 격전지였다.
1)마산터 마을은 모래늪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뒷산이 말이 달리는 형국이라 하여 마산터라 불린다.
2)모래늪 마을은 주매리에서 으뜸되는 마을이다. 모래가 많으며 늪이 있다 하여 모래늪 또는 사지동이라 한다. 모래늪은 화왕산 계곡에서 생긴 토평천의 힘찬 물줄기가 우포늪으로 들어서기 전 사지포를 휘감고 지나면서 산 모랭이 쪽에서 물줄기가 느려져 이곳에 모래언덕을 만들었다.
현재 이 마을은 두 곳으로 분리되어 있는데, 큰 도로의 양쪽으로 형성된 마을과 모래늪의 바로 옆, 산언덕 아래의 일제시대 이전에 형성된 원래 모래늪 마을(강성삼 신부가 방문했던 모래늪 공소로 추정됨)로 구성되어 있다.
전자의 마을은 임불마을 근방에 살던 주민들이 일제시대 일본군들의 군사 훈련장소로 사용하게 되면서 쫒겨나게 되는데 대부분의 주민들은 이곳 모래늪 마을로 강재이주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후자의 마을은 천주교 교우들이 박해를 피해 살 곳을 찾아 정착한 갈대가 무성한 버려진 땅, 비가 많이 올 때면 마을 전체가 물에 잠기는 사람이 살기엔 척박한 이곳에 숨어들어 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가 낙동강 제방 공사를 한 이후에도 많은 비가 오면 이 마을은 농사는 물론 집 앞까지 물이 들어차 살기가 어려웠으나 배수펌프를 설치하고부터는 물난리를 피할 수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1960년대 90호에 가까웠던 모래늪 마을은 현재 20호 남짓 남아있으며 그의 대부분이 노인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마을은 盧氏들의 집성촌이었으며, 3대째 살고 있다는 85세의 촌노는 천주교인이 살았다는 말을 전해 듣지 못했다고 전언하고 있다. 현재 이 마을에는 천주교 교우는 한명도 없다.
강성삼 신부님이 방문하였다는 이곳 모래늪 공소의 발자취를 찾는 것은 현재로는 어려워 보이나 박해를 피해 청도에서 비슬산 고개를 넘어 성산면 운봉리, 안심리을 지나 이곳 모래늪에서 삶의 여정을 풀었던 신앙 선조들의 향기는 남아 있는듯하다.
이곳에서 낙동강 현창 나루를 건너면 의령군 유곡면의 덕천공소와 지정면의 성당공소가 있었고 (1893년 죠조 신부의 교세통계표) 합천군 삼가면 어전리에 늘밭 공소(1888년 로베르 신부의 교세통계표), 쌍백면 평지리 고무정 공소(1893년 죠조 신부의 교세통계표, 당시 삼가군), 대병면(당시 삼가군) 성리마을? 황개공소가 있었다.
1890년대 합천의 고무정 공소와 의령과 대산지역의 공소들이 왕래했다는 기록이 있다. 의령 지정면의 성당공소는 함안 대산쪽으로 가는 유일한 통로였으며 현창나루를 건너온 피난교우들은 함안 대산의 동천공소, 논실공소, 밤대공소를 세웠을 것이다. 낙동강을 따라 영산 쪽으로 내려갔을 복음의 이동경로를 추정하여본다.
논실공소는 함안군 가야읍 산서리 답곡마을에 있었으며 1883년부터 1900년까지 로베르 신부의 보고서에 끝까지 등장하고 있다. 1890년대 후반부터 논실공소 신자수가 줄어들면서 반면 가등이 공소의 신자수는 점차 늘어난다. 가등이 공소는 함안지역을 대표하는 공소가 되었고 대산본당의 모체가 되었다.
3)안골은 모래늪 마을 뒤쪽 산 너머 사지벌이 내려다보이는 낮은 계곡처럼 안으로 들어가 있는 마을이라 하여 안골이라 불렀다. 安氏들이 많이 살았다고 하여 안골이라 하기도 한다. 현재는 마을이 없어졌다.
4)인불(人佛)은 모래늪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뒷산에 절이 있었다 하여 인불이라 한다.
※ 창녕군 대합면 주매리 모래늪 마을에서 3대째 살고 있는 노상구(85세), 노상인(80세) 형제의 증언으로 기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