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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긴급 상황
근대리아에 도착한 북한 측 협상 대표는 하준일이다.
당 정치국원이자 부총리 겸 당비서, 거기에다 대외연락부장을 맡고 있는 그는 한때 서열 20위권 밖으로까지 밀려났다가 지금은 예전과 비슷한 서열 5위로 김정일의 신임을 되찾고 있었다.
반백의 머리에 날카로운 눈매의 하준일은 기가 센 인물이다.
미국과의 경수로 회담에서 강경 일변도의 자세로 나가도록 교섭단을 배후 지휘한 것도 그였고 그것이 성공적인 결과를 얻자 김정일의 신임이 더욱 두터워졌던 것이다.
저녁 무렵, 하준일은 대표부의 회의실에서 서일 이하 간부들과 함께 회의를 주재했다.
도착한 지 두 시간도 안 되었지만 내일 아침에는 남북한 대표회담이 열리는 것이다.
하준일이 테이블 좌우에 둘러앉은 사내들을 하나씩 바라보았다. 자신과 권위에 찬 표정이다.
「내일 회의에는 근대리아 측을 참석시킬 이유가 없지. 회의장소야 그들이 제공하겠지만 말이오.」
하준일이 얼굴에 웃음을 띄웠다.
「근대리아 측도 이미 알고 있을 거요.」
회담 5일 전에 북한은 대표단의 구성원을 한국 측에 통보해 주면서 이번에는 근대리아 측을 참석시키지 않겠다고 했던 것이다.
서일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부총리 동지, 회담 후에 총독을 만나시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만. 부총리 동지께서 이곳에 오신 것도 알고 있으니만치.」
「당연히 만나야지. 왜냐하면 북남회담을 마치고 근대리아와의 회담을 할 작정으로 왔으니까.」
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인 그가 좌우를 둘러보았다.
「근대리아와의 관계가 가장 중요하다고 지도자 동지께서도 여러 번 말씀하셨소. 결코 지난번과 같은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그의 시선이 부딪혀 온 순간 이금철이 입을 열었다.
「부총리 동지, 현재 이주민의 사업장 이탈사건이 증가되고 있습니다. 또한 사업장에서도 공화국 이주민의 고용을 기피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저는 공화국의 근대리아 정책이 전면적으로 수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갑자기 회의실 안에 무거운 정적이 덮여졌다. 파격적인 발언인 것이다. 정책은 지도자 동지가 결정하여 시달한다. 이것은 지도자에 대한 비판으로 볼 수도 있다. 하준일의 얼굴도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한동안 이금철을 바라보던 하준일이 입을 열었다.
「이동무, 그것은 사업장 관리를 맡은 이동무의 책임도 있소. 보다 강력한 세포조직이 형성되었다면 이탈자가 발생하지 않았을 거요.」
그는 얼굴을 부드럽게 했다.
「근대리아는 자본주의 세상이지. 우리도 이미 예상은 하고 있었소. 자본주의에 물든 반동들이 일부분 이탈할 것을 말이오. 보다 조직을 강화시키고 처벌을 엄격하게 해야 합니다.」
회의가 끝나 계단을 내려가는 이금철에게 박기환이 다가왔다.
「이 동무, 타운으로 가실 거면 같이 갑시다.」
하준일과 서일 등은 대표실로 들어간 모양이었다. 그들은 박기환의 벤츠를 타고 대표부를 나왔다. 밖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대로에 들어선 차가 속력을 내었을 때 박기환이 입을 열었다.
「동무, 가만있어도 될 걸 왜 문제를 만드는 거요? 누가 동무에게 반동들의 사업장 이탈 책임을 묻습디까?」
「‥‥‥‥」
「평양에선 알면서도 고칠 수 없는 모양이오. 감히 지도자 동지께 나서서 말할 사람이 없겠지. 저 하준일 동지도 마찬가지요.」
박기환이 입맛을 다셨다.
「생각해 보시오. 지도자의 은혜로 근대리아에 보내지면서 갖은 충성의 서약까지 한 이주민들이오. 그들은 성금을 내겠다고 서약도 했소. 거기에다 실제로 임금의 삼사 할만 갖고도 공화국에서보다 몇 배는 더 나은 생활을 합니다.」
「최태호가 동무의 소환을 막기 위해서 나에게 오만 달러를 주었는데 그것 때문은 아니오.」
소리를 죽여 말한 박기환이 얼굴에 웃음을 띄웠다.
「그 돈을 장동지에게 주려다가 명목이 생각나지 않아서 갖고만 있습니다. 만일 사실대로 말했다가는 최동무는 말할 것도 없고 이동무까지 중형을 받을 것 같아서.」
「최동무도 근대리아에 우리 공화국이 기반을 굳히는 데 한몫을 한 사람이오. 그래서 나는 입을 다물기로 한 거요.」
김상철의 저택에서 리조트 시티의 빌라로 숙소를 옮긴 이유미는 요즘 바쁘게 지내고 있었다. 전에 운영했던 두 개의 사업장을 되찾은데다가 그랜드 여행사의 근대리아 지사를 대폭 확장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근대시 상가에 위치한 그랜드 여행사는 서울의 본사보다도 규모가 컸다. 이한이 관리하는 7충 빌딩의 위쪽 3개 층을 무료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아래쪽 4개 층은 백화점이다. 근대리아에 도착한 지 열흘 만에 이렇듯 일이 빨리 진행된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김상철이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그와는 저택에 있는 이틀 동안 몇 번 얼굴만 보았을 뿐이지만 이한과 변순태가 적극 도와주었고 중간 역할을 해준 것은 김봉만이다.
오늘도 저녁 늦게까지 사무실에 앉아 있던 이유미는 김봉만이 들어서자 웃음을 띄웠다. 이한이나 변순태 등은 무섭고 차가웠지만 이 사내와는 시바다 시절부터 인연이 있는 것이다. 비록 표정 없는 얼굴에 필요한 말만 하더라도 김봉만이 믿음직했다.
「사장님께선 조금 더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서울은 아직 안심할 수 없다고 하시던데요.」
테이블 앞에 선 그가 말하자 이유미가 가볍게 한숨을 뱉었다.
「알겠어요. 그럼 더 있죠 뭐.」
「필요하신 것 있습니까?」
「아뇨, 충분해요.」
본사 업무도 이곳에서 결재하고 있었으므로 사업에 지장도 없다. 그녀가 서울에 가려던 이유는 부동산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이유미가 마악 몸을 돌리려는 김봉만을 불러 세웠다.
「저, 안인석 씨는 어떻게 되었어요?」
「찾고 있습니다.」
김봉만이 힐끗 그녀에게 시선을 주었다.
「곧 잡힐 겁니다.」
「요즘 사장님 바쁘세요?」
「예, 전하실 말씀 있습니까?」
「시간 나시면 제가 뵙고 싶다고 전해주세요.」
머리를 끄덕인 김봉만이 방을 나가자 그녀는 의자에 등을 기댔다. 문득 근래에 들어 술도 잘 마시지 않았고 남자를 가깝게 해본 지도 꽤 오래 되었다는 생각이 떠올랐으므로 이유미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전혀 그러고 싶지도 않았던 것이다. 친구들과 남자들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외로움을 자주 느꼈고 그것을 환락으로 채워 왔다. 자신에게 친구는 물론이고 남자 또한 순간의 환락이나 욕망을 채워 주는 도구에 불과했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김상철로부터 전화가 걸려온 것은 이유미가 빌라로 돌아온 후인 밤 10시 경이었다.
「요즘 바빠서 찾아가지도 못했는데, 무슨 일이야?」
「안인석이 갈 만한 데를 제가 대부분 알아요, 그래서.」
「아직 못 찾았다고 들어서요.」
「그럼 내일쯤 만나지. 내가 찾아갈 테니까.」
김상철이 부드럽게 말했다.
「그리고 밤에 카지노나 클럽에 놀러가지 그래? 직원들을 데려가든지. 이곳은 안심해도 좋으니까.」
「그럴게요.」
수화기를 내려놓은 이유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갑자기 술이 마시고 싶어졌던 것이다.
다음 날 아침, 오리엔트 호텔의 특실에서 남북한 대표회담이 개최되었다. 물론 비밀회의여서 호텔 종업원들도 회담이 열리는 것을 모르고 있다. 특실은 응접실과 회의실, 침실 등이 딸린 50평이 넘는 규모여서 회의장으로 넉넉했다. 나란히 붙은 특실 세 개를 빌려 양쪽 갓방은 남북한의 수행원이 각각 사용하고 가운데 방이 회의장이다.
10시가 되자 가운데 방 응접실에 남북한 대표들이 마주보며 앉았는데 이번에는 근대리아의 참관석은 없다. 그래서 세 명씩 나란히 앉은 대표단의 면면은 남쪽이 대통령 비서실장 이태준, 여당 대통령 후보 정동민, 그리고 안보수석 신형목의 순이었고 북쪽은 근대리아 대표부 대표 서일, 부총리 하준일, 당비서 오만규였다.
인사를 나누고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른 다음 먼저 입을 연 사내는 하준일이었다.
「지난번 합의내용이 새나갔는데 아무래도 이번 일에는 기밀을 지켜야 할 것 같아서.」
그는 한국 측 대표들을 향해 웃어보였다.
「될 수 있는 한 인원을 줄이는 것도 기밀보장의 한 방법이지요.」
한국 대표 정동민이 따라 웃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한국에 합의서 사본이 돌아다니는 바람에 애를 먹었습니다.」
「그건 우리 책임이 아닙니다.」
하준일이 부드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근대리아나 남조선 중에서 흘러나왔을 겁니다.」
잠자코 입을 다문 정동민을 향해 그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약속한 양곡대금을 근대리아에 떠맡기셨는데, 우선 그 문제부터 해결하고 넘어 갑시다.」
「아니, 근대리아는 북한과 해결했다고 하던데요. 십일월에 지불하기로.」
「그렇습니다. 하지만 대금은 남조선에서 직접 받겠습니다. 근대리아는 조정자 역할을 이용하여 횡포를 부리고 있어요. 다시 말하면 남조선과 근대리아가 연합해서 우리 공화국을 골탕먹이고 있습니다.」
이제 하준일의 얼굴은 딱딱해졌고 회의장의 분위기도 굳어져 갔다.
「양곡대금을 시월까지 직접 주시오. 본래 팔월이었던 것을 두 달 연장시킨 것입니다.」
합의서에는 11월이었던 것을 어부를 송환시켜 주면서 8월로 당겼던 것이다. 그것이 10월로 늦춰졌으니 따지고 보면 한 달 당겨진 셈이다. 한국 측 대표들이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이미 예상을 하고 있었던지 무덤덤한 표정들이었다.
이태준이 헛기침을 했다.
「드리기로 약속한 것이니 드려야지요. 우리도 준비는 하고 있으니까요. 시월이 되었건 십일월이 되었건 선거 전에는 확실히 드립니다.」
「시월이오, 비서실장 동지.」
「그런 식으로 말씀하지 마십시오.」
부드러운 말투였으나 이런 식의 발언이 한국측에서 나온 적은 드물다. 서일이 긴장한 듯 두 눈을 크게 떴고 하준일은 머리를 조금 뒤로 젖혔다. 이태준이 말을 이었다.
「조금 전에 합의서문제가 나왔었는데 어디에서 유출되었건 간에 우리는 곤란한 상황에 빠져 있습니다. 그래서 협조를 바라는 것이오. 어려울 때 서로 도와야 하지 않습니까?」
「잘 알고 계실 텐데.」
하준일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지만 잘 들렸다.
「선택은 우리가 한다는 걸 말이오. 양곡대금은 다른 곳에서 받을 수도 있단 말입니다.」
「이 일을 미국이 모르고 있다고 생각하시오? 그들은 단지 전쟁만 일어나지 않도록 억제하고 있을 뿐이오. 하지만 필요에 따라 대전까지 우리가 점령해도 내버려 둘 겁니다.」
「이것 보시오.」
하고 정동민이 입을 열었으나 이미 기세가 꺾여져 있었다.
「그, 전쟁 이야기는 그만둡시다. 우선 쌀대금 문제를 해결하고 차근차근히.」
반복된 일이다.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남북대화는 꼭 이런 식으로 진행되어 왔던 것이다.
「안녕하십니까?」
다가온 사내는 양쪽 어깨에 별을 네 개씩 붙인 제2군사령관 한기영이었다.
「어어, 한장군 아니시오?」
이대현은 그를 국회에서 두어 번 만난 적이 있었고 미국 대사 터너의 관저에서 무슨 파티인가가 열렸을 때도 이야기를 나눴었다. 대구공항의 비행기 안이었다. 대령 계급장을 붙인 장교 한 명만을 대동한 한기영이 탑승하자 그들이 마지막 손님이었는지 비행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구에 웬일이십니까?」
서둘러 자리에 앉으면서 한기영이 물었다. 그들의 좌석은 앞 열이었는데 이대현은 통로 건너편에 비서실장 전상국과 나란히 앉아 있었다.
「지구당 위원장 모임이 있었소.」
「요즘 바쁘시겠습니다.」
「내가 선거운동 하러 다니는 건 아니오.」
웃음 띤 얼굴로 이대현이 말하자 한기영이 따라 웃었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달려 고공으로 솟아오르는 동안 기내는 조용해졌다. 아침 첫 비행기여서인지 좌석은 반도 차지 않았고 특히 앞 열에는 그들 네 사람뿐이었다. 비행기가 수평 상태로 돌아가자 이대현이 통로 건너편의 한기영에게로 상반신을 숙였다.
「얼마 전만 해도 야당 당수가 있으면 장군들은 자리를 피하든지 비행기에서 내렸을 텐데 세상이 변하기는 한 모양이오.」
「글쎄요.」
한기영이 흰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크게 변한 건 없습니다. 조금 세련되었을 뿐이지요.」
그는 턱으로 뒤 쪽 열을 가리켰다.
「저기 뒷좌석에 신사복을 입은 친구가 기무사 대령입니다. 지금 귀를 곤두세우고 있겠지요.」
「허어, 그렇군.」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대현은 그쪽으로 머리를 돌리지도 않았다.
「저 사람 놀랐겠소.」
「신경 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한기영도 업무차 대구에 들렀다가 돌아가는 길이다. 고공에 성층운이 많이 핀 날씨여서 비행기는 가끔씩 뚝 떨어져 내렸으나 그들은 김포에 착륙할 때까지 세상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로부터 한 시간 후, 안기부장 이근복은 서태영으로부터 보고를 받고 있었다.
「이대현 총재는 예약도 하지 않고 출발 40분 전에 공항으로 나와 탑승했습니다. 오전 열한 시에 긴급 당무회의를 소집했더군요.」
서태영이 말을 이었다.
「그들의 대화내용은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 부장님.」
비행기 안에는 이대현을 감시하는 안기부 요원도 탑승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근복이 입맛을 다셨다.
「이거, 우연 같지만 꽤 찜찜하군. 한기영과 비행기를 같이 타다니.」
「이총재는 본래 10시 30분 비행기를 탈 예정이었습니다. 그런데 대구지역 지구당 위원장 회의를 밤늦게까지 하고 나더니…」
지구당 위원장 회의의 분위기는 이미 파악되어 있었다. 이대현은 대구지역에서 승산이 없는 것이다. 위원장들의 심각한 보고가 그를 다급하게 만든 모양이었다.
「기무사에 연락을 해봐.」
이근복이 턱으로 전화기를 가리켰다.
「한기영은 기무사가 파악하고 있을 테니 그쪽 사정을 알아보라구.」
사령부 식당에서 점심을 마친 수경사령관 최무섭 중장은 안병석 참모장과 함께 연병장에 나와 서 있었다. 연병장에서는 병사들이 축구에 열중하고 있었는데 수준은 엉망이었다. 헛발질을 자주 했고 공이 라인 밖으로 자주 나왔다.
「민간인 대안으로는 이대현 씨밖에 없어. 적어도 그는 현 정권이나 정동민같이 부패하지는 않았다.」
연병장을 바라보며 최무섭이 말했다.
「이제 이대현이 승낙했으니 앞으로의 일들은 우리 손에 달려 있다.」
공이 그들 앞으로 굴러오자 축구를 하던 병사들이 긴장을 했다. 그 순간 옆쪽에 떨어져 서 있던 전속부관 박소령이 달려와 멋진 솜씨로 공을 차 돌려보냈다.
「정동민이 하준일과 어떤 비밀합의를 했는가를 알아내는 것으로 우리 일은 반 이상이 끝난다.」
앞쪽을 바라보며 최무섭이 말하자 안병석이 옆으로 바짝 다가섰다.
「지난번 비밀합의서 공개는 시기가 늦을까요?」
「시기도 그렇지만 정부 측에서 안전장치를 단단히 해놓았어. 근대리아로 망명한 대검의 고차장 말을 들으면 정부에서 합의서를 조작품으로 공개하려고까지 했다니까.」
「이번에도 김상철이 빼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만.」
「이번에는 근대리아도 참석시키지 않은 남북 단독 비밀회담이야. 더구나 지난번의 전철도 있으니 아예 합의서를 작성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점심시간이 끝나자 축구시합도 끝났으므로 그들은 몸을 돌렸다.
이미 수경사 예하 부대장들은 물론 수도권의 2개 정예사단장까지 합류한 상황이다. 남북간의 비밀합의서를 본 그들은 수치심과 굴욕감으로 치를 떨었고 배신감으로 선뜻 거사에 응했던 것이다.
본부 건물로 다가가던 그들은 현관 앞에 서 있는 장교를 보았다. 기무사의 파견대장 백대령이다. 그는 최무섭을 향해 절도 있는 동작으로 경례를 하고는 얼굴에 웃음을 띄웠다.
「운동하기 좋은 계절입니다, 사령관님.」
「안형, 이렇게 지내실 것 없이 같이 북으로 갑시다. 그렇다고 평양에서 사시라는 건 아니오.」
강영택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얼굴도 미남이었고 목소리도 굵은 바리톤이다. 밝은색 양복을 맵시 있게 차려입은 그는 대성자동차의 영업 소장이었다.
「곧 해외로 나가실 수가 있습니다. 해외에서 사셔도 돼요. 우리 보호를 받고 말입니다.」
유성의 한적한 카페 안이었다. 저녁 무렵이어서 술 마시기에는 이른 시간이었으므로 손님은 그들 두 사람뿐이다.
「안형, 이러고만 계실 수도 없지 않습니까? 솔직히 한국에서 우리 능력은 한계가 있고 말입니다.」
「‥‥‥‥」
「지금도 서울의 병원이나 안형 아파트는 감시를 받고 있어요. 김상철이 어떤 놈인가는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고정간첩인 강영택은 30대 중반으로 번듯한 직장에 처자식이 있는 엄연한 대한민국 국민이다. 그는 대학시절에 운동권에도 뛰어들지 않았으므로 그의 기록은 깨끗했고 안기부나 대공 관계기관의 주의인물에 들어 있지도 않다.
안인석이 머리를 들었다.
양주 몇 잔에 이미 눈가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김상철이 정말 나를 노립니까?」
「안형은 참 순진하시오.」
서너 번 혀를 찬 강영택이 테이블 위로 상반신을 굽혔다.
「파코 식당에 투입되었던 여섯 명 대원 중에 한 놈이 아직도 실종상태요. 그것이 뭘 의미하는가 하면 그놈이 잡혀서 제가 알고 있는 것을 모조리 털어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빈 카페 안을 둘러보았다.
「그날 밤에 안형이 피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앉아 술을 마실 수도 없었을 거요.」
「난 미국으로 갈 겁니다.」
결심한 듯 안인석이 말하자 강영택이 눈을 껌벅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미국으로 말입니까?」
「친척도 있으니 그곳에 눌러 살 거요.」
「뭐, 꼭 안형이 그렇게 하신다면.」
그들이 카페를 나왔을 때는 밤 9시가 되어 있었다. 유흥가가 붐비는 시간이다.
「그럼.」
거리에 나서자 이쪽을 향해 머리를 끄덕여 보이는 강영택의 뒤로 서너 명의 사내가 다가오고 있었다. 안인석의 시선을 의식한 강영택이 반쯤 몸을 돌렸을 때는 이미 사내들이 뒤에 서 있었다.
「당신들, 잠깐 봅시다.」
사내 두 명이 재빠르게 강영택의 양쪽 팔을 끼었고 다른 한 명은 안인석의 어깨 위로 손을 얹었다.
「당신들 누구야?」
강영택이 소리쳐 말하고는 어깨를 흔들었으나 두 팔은 빠지지 않았다. 잘생긴 그의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지는 것을 보는 순간 안인석의 두 다리에는 힘이 풀렸다.
안인석은 머리를 저었다. 온몸에서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으나 두 팔이 뒤쪽으로 묶여져서 얼굴의 땀도 닦을 수가 없다. 지하실 안이었다. 열 평쯤 되는 방 안에는 세 사내가 제각기 앉고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들은 잠시 입을 열지 않았다. 강영택은 다른 방으로 끌려갔으므로 이 방의 주인공은 자신이다.
「이 새끼 고춧가루나 먹여.」
철제 의자에 앉아 있던 사내가 억양 없는 목소리로 말하자 사내 한 명이 구석에서 주전자를 들고 다가왔다. 그는 안인석의 머리칼을 한 손으로 움켜쥐더니 와락 뒤로 젖혔다.
「잠깐만요, 잠깐만요.」
안인석이 천장을 향해 부르짖었다.
「무엇이든 물어만 보십시오.」
그러나 곧 코와 입으로 물이 쏟아져 들어왔으므로 그는 몸부림을 쳤다. 사내 한 명이 다가와 그의 어깨를 눌렀다. 고춧가루를 섞은 물이다. 가슴이 터질 듯이 부풀어 올랐고 숨이 막혔으며 눈과 코가 찢어질 것만 같은 고통으로 안인석은 비명을 질렀다. 이윽고 사내가 손을 떼자 그는 의자와 함께 바닥으로 쓰러졌다.
「이 새끼는 보기보다도 더 여리구만.」
의자의 사내가 느긋해진 얼굴로 안인석을 내려다보았다.
「자, 이제 일어나서 이야기를 해보실까?」
대통령 선거가 3개월도 남지 않은 9월 하순, 근대리아로의 이민은 70만 명을 돌파하여 올해 안에만 100만이 넘을 예상이었다. 대다수 언론은 새로운 영토를 찾는 대이동, 또는 새로운 한국의 개척 등 근대리아와 한국의 동질성을 강조하면서 오히려 이주현상을 정당시하였으나 일부는 대탈출(Exodus), 붕괴 등의 표현을 썼고 난파선의 쥐떼와 비유하여 싸잡아 양쪽을 공격하는 언론도 있었다. 그러나 한국의 경제지표는 거의 변동이 없었고 수출도 그대로였다. 땅값이 폭락한 여파로 은행금리가 높아졌고 대출이 까다로워졌지만 정부는 강력하게 단속하여 대처해 나갔다. 시장물가 단속도 마찬가지였다. 투자액을 제한하지 않은 까닭에 정부가 계산한 수치로 약 300억 달러, 한화로 24조억 원 가량의 현금이 빠져나갔으나 아직 경제계에 겉으로 크게 드러난 현상은 보이지 않았다. 정부가 전력을 다해 대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부의 대책과 통제, 또는 언론의 호도만으로 사회 분위기를 바꿀 수는 없는 것이다. 우선 광범위하게 퍼져나간 사회의 냉소현상이 그것이다. 중산지식층에서 시작된 이 현상은 이제 서민들에게까지 번져 있었는데 정치와 정권에 대한 불신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이는 곧 정치와 정권, 나아가 국가와 국민에 대한 무관심 현상이다. 양쪽의 선거 관계자들은 이번의 대통령 선거가 사상 최저의 투표율을 기록할지도 모른다는 것에는 같은 의견이었다.
청와대의 안보수석 보좌관 민정길이 집에 도착했을 때는 밤 10시가 되어 있었다. 오늘도 안보수석실에서 늦게까지 일을 하고 나온 참이다. 그는 서초동의 아파트에 살고 있었는데 이웃 주민들은 그가 시청의 꽤 높은 자리에 있는 공무원인 줄로만 안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경호실 소속의 운전사 미스터 정이 인사를 하고는 차를 몰고 떠나자 그는 아파트의 현관 계단을 올랐다. 가을밤의 서늘한 대기가 피부에 닿았고 화단의 풀냄새가 싱그럽게 맡아졌으므로 그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조용하고 쾌적한 환경의 아파트였다.
경비실은 비어 있었다. 민정길이 엘리베이터 앞에 섰을 때 뒤쪽에서 인기척이 났다. 사내 두 명이 다가오고 있었다.
「민정길 씨, 잠깐 봅시다.」
사내 하나가 그렇게 말하고는 어깨에 손을 얹었으므로 민정길이 와락 눈을 치켜뜨고는 사내의 손을 잡아 내렸다.
「너희들 누구야?」
목소리가 컸으므로 아파트의 현관을 울렸다. 그러나 주위에는 그들 셋뿐이다.
「이 새끼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네.」
사내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한 순간 민정길은 뒤통수에 거센 충격을 받고는 휘청거렸다. 다시 한 번 충격이 왔을 때 그는 털썩 한쪽 무릎을 끊고 현관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는 사내 한 명이 자신의 겨드랑이에 두 팔을 끼워 들어올리는 것을 느꼈지만 몸은 이미 말을 듣지 않았다.
「순순히 따라왔으면 너도 좋고 우리도 이 고생을 안 할 거 아니냐, 이 개자식아.」
그러나 그의 다리를 들어올린 사내가 투덜거리는 말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이 새끼, 되게 무겁군 그래.」
잠시 후에 그의 귀가를 기다리던 이영주 여사는 청와대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안보수석실의 장서기관입니다.」
처음 듣는 목소리였지만 수석실의 서기관이 누구인지 이여사는 알지 못한다.
「보좌관님이 오늘 기밀작업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한테 대신 연락해 달라고 해서요.」
「아, 그러세요. 조금 전에는 돌아오는 중이라고 하셔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긴급한 일이 있어서요.」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상냥하게 인사한 이영주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밤 10시 30분이 되어 있었다.
삼성동의 사무실에 들어선 백석호 대령은 기다리고 있던 현창복 준장 앞자리에 앉았다. 그들은 모두 사복 차림인 데다가 사무실도 일반회사 분위기였다. 이곳이 기무사의 강남지역 안가(安家)인 것이다. 호주머니에서 구겨진 손수건을 꺼낸 백석호가 얼굴의 기름기를 닦았다.
「술좌석이 꽤 길어졌습니다. 수경사령관하고 5군단장이 오입까지 하는 바람에.」
이맛살을 찌푸린 그가 바짝 다가앉았다.
「이번 회동은 내용이 없습니다. 그저 술 먹고 오입한 것뿐입니다.」
「참석자는 셋이었어?」
「넷이었습니다. 수경사령관, 제 오군단장, 거기에다 참모장 둘까지.」
「최 중장이 요즘 자주 모이는데.」
「제가 어제 올린 보고서에도 기록해 두었지만 A급 상황입니다.」
백석호는 기무사의 수경사 파견대장이다. 수경사 지휘관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 보고할 책임이 있는 그에게 요즘은 대단히 분주한 나날이었다. 수경사 지휘관들의 모호한 회동, 몇 시간씩의 잠적이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A급 상황은 특, A, B, C의 네 등급으로 나뉘어진 지휘관 동향분석에서 두 번째로 위험한 상황이다. 특급은 쿠데타 모의가 적발되었을 때이고 A급은 그보다 한 등급 아래지만 가능성이 있는 상황이다. 지휘관급은 B등급 이상이 되었을 경우 별도로 분류하여 감시를 받는다. 현창복이 머리를 끄덕였다.
「사령관도 이미 알고 계시니까 곧 조처가 있겠지.」
「이젠 노골적으로 만난단 말씀입니다. 얼마 전만 해도 사격장에서 이야기를 하거나 연병장에서 쑥덕거렸는데 요즘은 공공연히 술집이나 음식점에서 모입니다.」
「지휘관실에 도청장치가 있다는 걸 알고 있어서 지휘관실에서 나누는 대화는 꼬투리 잡을 것이 없습니다.」
지휘관 치고 자신의 집무실에 도청장치가 설치되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모두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있는 것이다.
「말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조심해.」
현창복이 정색을 하자 백석호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건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 분담하여 감시를 하기 때문에 자료를 집합, 평가하는 건 저 뿐이니까요.」
「최중장이 장악력은 있나? 부하 여단장들을 말이야. 빈통이 소리만 크다고 그 사람은 그런 스타일로 알려져 있는데.」
「장악력이 있습니다.」
백석호가 자신 있게 말했다.
「저도 군생활을 이십 년 가깝게 해서 상관을 보는 부하들의 눈빛만 봐도 부대 분위기를 압니다. 최중장은 휘하의 부대를 철저히 장악하고 있습니다.」
「위험인물이군.」
「그렇습니다, 참모장님.」
육사 출신의 백석호는 그야말로 직분에 충실하고 그것이 국가에 충성하는 것이라고 믿는 철저한 군인이다. 그가 다시 다짐하듯 말했다.
「위험인물입니다, 참모장님.」
그 시간에 청와대에서는 대통령이 안기부장 이근복과 독대하고 있었다. 창밖은 맑은 가을햇살이 비치는 화창한 날씨였지만 그들의 표정은 어두웠다.
「북한이 근대리아를 배제한 남북간 회담을 고집한 걸 보면 쌀대금 문제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근복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북한은 근대리아에 압력을 행사할 입장이 못 되니 대신 우리를 추궁하겠지요.」
「이실장이 예상은 하고 갔어.」
피로한 듯 대통령이 의자 등받이에 머리를 기댔다.
안기부장 이근복이 청와대의 대북정책에 깊숙이 간여하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근대리아의 K공작을 주도하여 수행하고 있었지만 대북 비밀협상에 대해서는 기밀유지 차원에서 다소 소외되었던 그였다. 그러나 신형목이 관리하던 검경의 핵심 실무자가 반역을 했고 그것을 그가 잡아내었다. 이제 그는 대북정책에 있어서도 대통령과 독대하는 입장이 된 것이다.
「각하, 여론이 좋지 않습니다. 지난번 비밀합의서가 시중에 돌아다닌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이근복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근대리아의 김상철이가 유포시킨 것 같습니다.」
「그자는 근대리아로 돌아갔다면서?」
「예, 각하.」
대통령이 입맛을 다셨다.
「도대체 경찰은 뭘 하고 있었는지, 원.」
「어쨌든 그런 소문은 곧 걷히게 될 거야. 선거 전에는 온갖 루머가 떠도는 법이니까.」
몇 십 년 전에는 야당의 대선후보가 공산당으로 몰린 적도 있었는데 선거가 끝나자 유야무야 되었다. 야당 후보가 선거에서 졌기 때문인데 다시 4년 후의 대선 때 그 후보가 나서자 또 공산당 시비가 일었다. 선거용 시비이고 루머이다. 선거에 지면 끝없이 루머에 시달리지만 이기면 모든 누명을 벗는다.
대통령이 상반신을 세우고는 이근복을 바라보았다.
「쌀대금은 잘 해결될 것이고, 그런데 근대리아 사업은 어때?」
이른바 K공작이다.
「빠르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각하. 이미 행정청과 경비대, 각 정부투자기관에 상당수가 자리를 잡았고 민간투자단체는 거의 대부분 우리가 주도하고 있습니다.」
그의 목소리에 열기가 묻어 있다.
「근대리아의 한국화에는 모두 사명감을 갖고 있습니다, 각하. 총독이 독자적인 한인국가를 표방하여 남북한을 경원시하고 있지만 뿌리는 한국입니다. 곧 이상과 현실의 차이를 알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곧 대통령의 주장인 것이다. 대통령은 기업인으로 북쪽의 대륙에 새로운 한인령(領)을 세운 강총독을 이상주의자로밖에 보지 않았다. 국가를 통치하는 일은 기업경영과 다르다. 너무 맑은 물에는 고기가 살지 못하는 법이다. 그는 이태준으로부터 뇌물 몇천 달러를 받았다고 총살을 시켰다는 근대리아 정부의 실정을 보고받고는 확신이 섰던 것이다. 현재 근대리아 행정부나 민간단체의 간부 대부분이 한국계 이주민이다. 근대리아는 어쩔 수 없이 고급인력을 한국계로 채울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대통령이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우선 당면문제는 12월의 대선이야. 그리고 지금 근대리아에서 열리는 회의 내용이 중요하다고. 근대리아 통치는 대선이 끝나고 나하고 정대표가 같이 해야 될 일이지. 물론 정대표가 당선이 돼야겠지만.」
회의장 안에는 담배연기가 자욱했으므로 신형목이 일어나 창문을 조금 열었다. 북한 측 세 명이 담배를 계속 피워대고 있는 것이다. 쌀대금 문제에 대한 양측의 합의가 마악 끝난 참이었다.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끈 하준일이 정동민을 바라보았다.
「남조선의 정세를 보면 자주(自主)를 부르짖는 이대현 씨가 차츰 인기를 얻고 있는 모양입디다. 현 정권과 그 뒤를 이을 정선생께선 조금 밀리는 것 같던데.」
「글쎄, 선거야 투표함을 열어봐야 아는 겁니다. 그리고 선거 전략이라는 것이 대개가 이기고 보자는 발상으로 만든 것이어서.」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정동민의 안색은 밝지 않았다. 민간 조사기관 세 곳을 시켜서 조사한 결과로는 두 곳이 3에서 5퍼센트 차이로 이대현의 당선을 예측했고 한 곳은 자신의 1퍼센트 우위였다. 그가 말을 이었다.
「그 자들은 특별한 대안도 없이 대북관계에 대한 비판이나 하면서 국민들의 자존심을 건드려 표를 모으고 있어요. 하지만 대다수의 중산층은 안정을 바랍니다. 야당이 외치는 변화나 자주외교 등이 현실성이 없고 위험한 발상이라는 걸 잘 알아요.」
하준일이 머리를 끄덕였다.
「미국도 마찬가지 생각입디다. 평양 대표부의 미국 대표도 이대현의 사상이 위험하다고 합디다.」
「나도 미국 대사 터너 씨와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웃었다. 그러자 이태준이 헛기침을 했다.
「이렇게 뜻을 맞춰 일을 추진한다면 얼마나 좋습니까?」
부드러운 표정으로 그가 말을 이었다.
「이건 모두 남북한 국민들의 평화와 안정을 위한 일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비밀은 지켜 주겠다. 그것은 도리야.」
쓴웃음을 지은 총독이 앞에 앉은 이남호와 강미현을 바라보았다.
오후 4시가 되어가고 있었지만 오리엔트 호텔에서는 아직도 회의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번에 우리를 배제시킨 것에 연연할 필요는 없어. 별로 도움이 될 만한 일도 아닐 테니까.」
「한국의 대선 대책회의라고 하더군요.」
이남호가 총독의 말을 받았다.
「지난번의 비밀합의서 누출사건도 있겠다 이번에는 보안에 꽤 신경을 쓰는 모양입니다.」
「북한의 제의로 우리가 참관인이 되었었는데 이번에도 북한의 주장으로 우리가 제외되었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북한은 호위대 추방에다 이주민의 입국금지 조처로 감정이 상해 있는 상황입니다. 저희들은 기껏 호의를 베풀었는데 보상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번에 우리를 제외시킨 것은 당연합니다.」
머리를 끄덕인 총독이 강미현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한국 이주민들이 폭주해 오는 바람에 사회질서가 많이 문란해졌다. 경비대의 보고에 의하면 범죄의 종류가 갑자기 두 배로 증가했다는 거야. 그 대부분이 한국에서 넘어온 것이다.」
잠시 말을 멈춘 그가 입맛을 다셨다.
「투자이민이랍시고 와서는 흥청거리는 놈들을 몰아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사회를 안정시키려면 산업기반부터 단단해야 돼. 그래야 떠도는 돈이 바닥에 깔린다.」
「단체장들을 만나보았는데 제일 문제는 노동력 부족이었어요.」
「곧 채워진다.」
「북한계 고용원들의 능률이 낮고 이탈자가 많아서 불평을 하고 있었어요.」
「김상철이를 만나보아라.」
그러자 강미현이 놀란 듯 머리를 들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총독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왜? 무슨 문제가 있느냐?」
「무슨 일로 만납니까?」
「김상철이 그쪽으로도 조직을 확장할 것이다. 한국에서 이주해온 기업체를 대상으로 말이다.」
「‥‥‥‥」
「너도 알다시피 이주 기업체들이 급속히 단체로 모이고 있어. 각 단체별 시장개척이나 권익보호에는 이점이 있겠지만 이것들이 모이면 상공국이 힘들어져.」
강미현도 알고 있는 일이다. 종합기획실의 보고에 의하면 한국을 주(主)시장으로 하는 한국 기업들은 한국 정부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가장 간단한 일로 근대리아로의 원부자재 반출을 억제하거나 또는 한국으로의 제품 반입을 통제한다면 근대리아의 한국계 기업은 금방 망하게 되는 것이다. 총독이 말을 이었다.
「물론 사업체의 기반을 굳힌 다음 시장을 개척해야 되겠지만 우선 각 단체들의 한국색(色)을 경계해야 돼. 그래서 김상철의 조직력이 필요한 거야.」
「만나서 상의해라, 네 일이니까.」
자르듯 말한 총독이 이남호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자, 그럼 유전 생산량 이야기를 듣자.」
「안인석은 제주도에 외가 쪽으로 친척이 있어요. 대학 시절에 그곳에 자주 갔었는데.」
이유미가 힐끗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알고 계세요?」
「알고 있었어.」
포크를 내려놓은 김상철이 물잔을 쥐었다.
「나도 이유미 씨만큼 그놈을 알아. 뭔가 귀찮아지고 짜증이 날 때 그놈이 도망가던 곳이야.」
「‥‥‥‥」
「언젠가는 당신하고 둘이서 그곳으로 간 것도 알지.」
근대시 교외의 해산물 레스토랑이다. 바이칼 호에서 공수해 온 생선인 오무리가 맛이 있기로 소문이 난 집이어서 바다 식당은 만원이었다. 유리창 밖으로 지평선 위에 걸쳐진 저녁 해가 보였다. 눈에 덮인 평원에는 이미 그림자가 덮여졌고 굵은 석양의 빛줄기도 점점 줄어들고 있는 중이다.
오무리는 맛이 있었으므로 이유미는 접시를 깨끗이 비웠다. 서울의 양식당 파코에서도 같이 식사를 했지만 이렇게 안정된 분위기는 아니었던 것이다. 김상철이 생각난 듯 말했다.
「관광회사를 차리는 것이 어때? 내가 지원해 줄 테니까.」
그는 이유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여행사와 관광회사를 같이 운영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얼굴이 달아오른 이유미가 시선을 내렸다.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막대한 자금이 드는 사업이어서 추진할 엄두도 내지 못했던 것이다. 근대리아의 관광사업은 황금사업이다. 연간만 해도 벌써 관광객이 500만 명에 육박하고 있고 내년에는 700만 명의 목표를 1,000만 명으로 수정할 정도인 것이다.
「그레고리의 운송회사에서 우선 차량을 지원해 줄 수 있을 것이고, 그리고 나머지는 한사장과 상의를 하면 될 거야.」
한사장이란 그의 경제고문 한영석을 말하는 것이다. 모스크바 태생의 고려인인 그는 40대 후반으로 러시아 정부 내의 유일한 고려인 관리였었다. 근대리아로 이주해 온 그는 근대리아 정부의 고위직 제의를 마다하고 김상철의 경제고문이 된 것이다.
이유미가 머리를 들었다. 그의 조직이 지원해 준다면 당장에 근대리아 굴지의 관광회사가 된다.
「고맙습니다, 상의해 보겠어요.」
「지분은 반반이야.」
「그것도 과분해요.」
상기된 얼굴로 그녀가 웃었다.
「너무 기뻐요. 꼭 해보고 싶었던 사업이었지만 자금이 원체 부족해서 생각도 못했는데.」
「나도 당신의 능력이 필요했어. 서로 잘 된 것이지.」
김상철이 창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안인석은 지금 대전에 있어 . 조그만 아파트를 가명으로 빌려놓고 매일 술에 취해 사는 모양인데.」
「‥‥‥‥」
「밖에도 잘 나오지 않는 모양이야.」
이제 어둠이 짙어져 가는 창밖을 바라보며 김상철이 쓴웃음을 지었다.
「앞으로 나한테 그놈 이야기는 할 필요 없어. 당신이 그놈한테 감정이 있는 것도 아닐 테니까.」
「‥‥‥‥」
「내가 알아서 처리하겠어.」
갑자기 이유미가 소리 없이 웃었으므로 김상철이 눈을 껌벅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이용만 당하고 살았다는 그 사람의 이야기가 맞는 것 같네요. 그 사람 이야기를 핑계로 만나자고 했으니까.」
「이제 동업자관계가 될 테니 자주 만나게 되겠지.」
김상철이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저녁 8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다음 날은 아침부터 눈발이 휘날렸다. 기온도 영하로 떨어져 있어서 총독의 접견실에 들어선 하준일과 서일은 모피 슈바 차림이었다. 외투를 받아든 직원이 물러가고 접견실에 둘이 남게 되자 하준일이 서일을 바라보았다.
「부국장급이 우리 영접을 한 걸 보면 지난번보다는 나은가?」
지난번에 서일이 청장을 방문했을 때 외무국 평직원이 현관에서 맞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 대표부의 대표는 외무국의 과장이 현관에서 맞는 것이 통례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보다 한 단계 위의 부국장이었지만 하준일은 못마땅한 기색이었다. 서일이 마악 입을 열 적에 문이 열리더니 총독과 행정청장 이남호가 들어섰으므로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각하, 이분은 저희 공화국의 부총리이신 하준일 동지십니다.」
서일이 예의바르게 소개를 하자 총독이 얼굴에 웃음을 띄웠다.
「반갑습니다. 말씀 많이 들었소.」
「각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하준일이 공손한 자세로 총독의 손을 잡았다. 20년이 넘는 연륜의 차이도 있었지만 근대리아 총독은 일국의 국가원수급이다.
인사를 마친 그들은 자리에 앉았다. 하준일이 김정일 지도자의 안부를 전했고 총독이 화답하면서 접견의 분위기는 부드러워졌다. 날씨 이야기를 마친 다음 하준일이 정색을 했다.
「각하, 어제 남조선과의 회담을 성공리에 마쳤습니다. 모두 각하께서 여러 가지로 배려해 주신 덕분입니다.」
「다행이오. 한 시간 후에 한국 대표와도 면담이 있어요. 기쁜 소식을 두 번 듣게 되겠습니다.」
서일이 힐끗 이남호를 바라보았다. 그는 한국보다 먼저 총독 면담일정을 잡으려고 이남호에게 매달렸던 것이다. 녹차잔을 든 총독이 하준일을 바라보았다.
「부총리께서는 한국뿐만 아니라 근대리아 문제도 책임지고 계신다던데, 맞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각하.」
「책임이 크시겠소.」
「막중합니다, 각하.」
하준일은 남북한 회담내용을 말하려 들지 않았고 이쪽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으므로 부드러운 분위기로 대화가 계속되었다. 이윽고 하준일이 본론을 꺼내었다.
「각하, 이것은 저회 지도자 동지께서 여쭙는 말씀입니다만 북조선 노동자의 근대리아 이주계획을 알고 싶습니다.」
「‥‥‥‥」
「저희 공화국 노동자들은 근대리아 발전에 이바지할 모든 준비를 갖추고 있습니다, 각하.」
그러자 총독이 이남호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청장이 말씀드려.」
이남호가 상체를 세웠다.
「현재 근대리아에 이주해 온 북한 노동자의 생산능력이 매우 낮아요. 그래서 사업주들이 고용하기를 기피하는데다가 이탈자가 많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금시초문입니다만.」
놀란 듯 하준일이 눈을 크게 떴다.
「그 말씀이 사실이라면 심각한 문제입니다. 제가 즉시 사실을 확인한 다음 조처하지요.」
「앞으로 결코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을 것입니다.」
「추가 이주민 문제를 거론할 상황이 아닌 것 같습니다. 현재 이주해온 사람들도 문제인 실정이라.」
「지난번에 내가 여기 계신 서대표께 말씀드린 상황을 들으셨을 줄 믿습니다. 뭐, 쉽게 말하면 근대리아는 한국과 다른 나라지요. 그리고 동족이라고 해서 무조건 받아들이지도 않습니다.」
굳은 표정의 하준일이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모두 들었습니다.」
「근대리아는 남북한 문제에 관계할 생각이 없습니다. 지난번에는 북한 측의 제의에 참관자 입장이 되었지만 그러다 보니 남북한 양국의 어렵고 귀찮은 일만 맡게 되더군요.」
이남호가 목소리를 부드럽게 했다.
「어제처럼 남북문제는 양국이 해결하시지요. 그리고 장소도 구태여 근대리아로 하실 것 없습니다. 비밀회담을 하시려면 앞으로는 제 삼국으로 가 주십시오.」
한 시간 후, 같은 장소에 방문객만 세 사람이 바뀌어졌는데 그들은 물론 정동민과 이태준, 신형목이다. 비슷한 인사말과 날씨 이야기, 거기에다 덕분에 회담을 성공리에 마쳤다는 공치사도 비슷하게 끝이 났다. 또한 세 사람 모두가 밝은 표정이다. 그러나 정동민의 자세를 보면 전에 만났을 때보다 뻣뻣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이것은 요즘 들어 심해진 정동민의 처신으로 내년이면 대통령이 된다는 의식 때문이다. 물론 하준일과의 회담 때에는 그런 의식이 나타나진 않았다. 정동민은 특별한 용건이 있어서 온 것이 아니라는 듯 채 20분이 지나지 앉았을 때 자세를 바로 잡더니 말했다
「각하, 한국 정부는 시월 초부터 근대리아에 대표부를 두기로 했습니다. 아직도 정부 일각에서는 근대리아와 한국을 동국(同國)시하는 경향이 있지만 현실에 따라야 할 것 같아서요.」
그는 얼굴을 펴고 웃었다.
「곧 근대리아 정부에 공문이 올 것입니다. 각하께서 배려해 주셨으면 합니다.」
총독이 잠자코 머리를 끄덕였고 이남호는 헛기침을 했다. 대표부 설치는 당연한 일이었던 것이다. 물론 근대리아와 한국의 뿌리는 같다. 가장 교류가 활발한 국가가 한국이었고 지도층의 대부분이 모두 한국 출신인 것이다. 한국 정부의 관료들에게 근대리아가 한국의 속국이라는 의식이 사라진 것은 최근의 일이었다.
이남호가 입을 열었다.
「한국 정부의 요청이면 검토해 보지요. 하긴 한국 이주민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범죄 발생률이 배 이상 늘었습니다. 대책을 협의할 대표부가 있는 것이 서로 편리하겠지요.」
한국이 근대리아를 동등한 국가로 공식 인정한 것이다. 총독은 내색하지 않았으나 이남호는 득의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박기환율 제거해야겠다.」
길가에 선 이금철이 말하자 최태호가 퍼뜩 머리를 들었다.
「아니, 위원장님. 도대체 왜.」
「우리 공화국에는 도움이 안 되는 놈이다.」
「돈을 먹고 날 구제해 주었다니.」
이금철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들은 타운의 대동강 클럽 앞길에 나란히 서 있었다. 밤 12시가 넘어 있었지만 클럽 안은 손님들로 가득 차 있었고 밖으로까지 홀의 소음이 흘러나왔다.
「감찰대장이라는 작자가 썩은 것은 심장이 썩는 것과 같다.」
「위원장 동지, 돈은 내가 주었습니다.」
눈발이 한두 점씩 얼굴에 묻었으나 최태호는 아랑곳하지 않고 한 걸음 다가섰다.
「그것도 위원장 동지를 소환시키지 않으려고 말이오.」
「동무는 상관없어. 큰 사업에 별로 영향을 끼치지 않는 입장이니까.」
이금철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클럽의 현관 주위에 서 있던 대여섯 명의 사내가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 그의 경호원들이다.
「위원장 동지, 그렇게 되면 내가 다칩니다. 위원장 동지는 말할 것도 없고, 모두 처벌을 받는단 말이오.」
이제 다급해진 최태호가 눈을 치켜뜨자 이금철이 머리를 저었다.
「병신같이 공개하지는 않겠어. 내가 생각해 둔 방법이 있다.」
「위원장 동지, 우리한테는 박기환이 감찰대장으로 있는 것이 낫습니다. 그 자가 없어진다면 어차피 새로운 감찰대장이 올 것이고, 그렇게 되면 나는 물론이고 동지도 위험하게 됩니다.」
최태호가 그를 쏘아보았다.
「저를 생각해서라도 다시 한 번 생각해 주십시오.」
옷자락에 묻은 눈을 털어낸 이금철이 그의 시선을 받았다.
「동무를 생각해서 이렇게 말하는 거야.」
「김상철도 마찬가지겠지만 나도 근대리아를 개척했다는 보람이 있었다. 북조선 인민의 새로운 땅으로 만들겠다는 희망이 있었어. 그것을 이룩하는 데 목숨을 바치려고 했다.」
취객 서너 명이 뒤쪽으로 지나갔으므로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당에서 본다면 박기환이나 동무나 똑같은 반역자다. 뇌물을 먹고 일처리를 한 감찰대장이나 자본주의에 물들어 술집과 색시집을 만들고 마약을 암매하고 고리대금을 하는 조직관리인이나 말이야.」
「난 이런 상황에서 살아갈 수 없어.」
「새로운 감찰대장한테 내가 또 뇌물을 주고 내 사업의 입막음을 할지도 모릅니다.」
「그땐 너도 내 손에 죽는다.」
「그래서 옛 의리를 생각해서 말해 주는 거야. 동무가 날 구제하려고 뇌물까지 쓴 신세를 갚으려고 말하는 것이다.」
「동무도 이제 어지간히 재산을 모았을 테니 정리하고 떠나는 것이 나을 거야. 새로운 감찰대장이 와서 업무파악을 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테지. 동무는 시간이 그만큼은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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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님, 근대리아 배경은 고르바쵸프나 엘친 시대쯤 되겠지요?
푸틴은 지금 세계적으로 욕을 먹고 곧 암살되거나 추방될지도 모르는 급박한 상황!!!
러시아를 소제로 한 소설은 비록 픽션이어도 현 시국에서는 이질감이 많아 작가님 상상력 반감으로 갈까 걱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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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게 읽고 지냅니다, 감사합니다
즐감요~~~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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