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그러니까 그걸 소문 내달라 그 뜻이지?
무영은 집무실에 들어서며 잠시 방 안을 둘러봤다. 오랜만에 와서 그런지 감회가 새로웠다. 그렇게 한참 동안 서 있자, 뒤에서 따라가는 사람들이 불만을 토해냈다.
"거 안 들어가고 뭐 하는 게냐?"
"방이랑 사랑이라도 나누는 거냐?"
당백형과 강악의 어침없는 말에 무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밖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이 하나둘 따라 들어갔다.
집무실 안이 순식간에 사람으로 가득 찼다. 방 한가운데 있는 커다란 탁자가 모자랄 정도였다.
가장 먼저 입을 연 사람은 강악이었다.
"생각보다 일찍 돌아왔구나."
강악의 말에 당백형도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반가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적어도 반 년, 길면 이 년에서 삼 년을 생각했다.
무영이 하고자 하는 일은 그 정도 시간이 필요한 일이었다. 한데 이렇게 일찍 돌아왔으니 기분이 좋아졌다.
기분 때문인지 강악의 말투도 예전으로 돌아왔다. 그래도 전에는 장주 대우를 해주느라 말도 조금 조심해주고 했는데, 그런 것이 아예 사라져 버렸다.
무영은 오히려 그것이 더 좋았다. 무영에게 있어서 강악과 당백형은 마치 할아버지와도 같았다. 다른 사람들도 가족 같은 사람들이다.
그렇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탁자에 앉은 사람들은 하나하나 둘러보던 무영은 생소하지만 묘하게 낯익은 얼굴 하나를 발견했다.
"음? 소저는 누구십니까?"
무영의 질문에 소소가 살짝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그 광경을 지켜보던 강악이 퉁명스런 말투로 입을 열었다.
"내 말에는 대답도 안 하고 여자만 눈에 들어온다 이거냐? 옆에 꽃 같은 여자를 셋이나 두고서도 모자라느냐? 허어, 바람둥이가 따로 없구나."
강악의 짓궂은 말에 무영이 크게 당황했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 말은......."
"저 소소예요. 못 알아보시겠어요? 오라버니?"
소소의 말에 무영의 눈이 살짝 커졌다.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하산하고 처음 겪은 일이었는데 말이다.
"네가 소소?"
소소가 부끄러운 듯 살짝 눈을 내리 깔며 고개를 끄덕이자, 무영의 표정이 환해졌다.
예전과는 달리 너무나 몸이 좋아졌기 때문이다. 당시네는 몸에 거의 살이 없을 정도였는데 지금 보니 혈색부터가 달랐다.
무영과 소소가 서로 잘 알고 있는 듯하자, 무영 옆에 앉아 있던 세 여인의 얼굴에 살짝 긴장감이 흘렀다.
그녀들이 보기에도 소소는 정말로 아름다웠다. 게다가 심성도 고와 보인다. 그리고 이런 자리에 당당히 앉아 있는 걸 보면 능력이 뛰어나거나 무영과 보통 사이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오라버니 덕분에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할 수 있게 되었어요. 그래서 이제부터는 제가 오라버니께 도움이 되고 싶어서 찾아왔어요. 괜찮죠?"
소소는 그렇게 물으며 서하린의 눈치를 살짝 살폈다. 소소도 소주 출신이다. 서가장의 금지옥엽인 서하린을 모를 리 없다.
그리고 서하린과 무영이 보통 사이가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소소의 눈이 서하린에게서 모용혜로 그다음 당비연에게로 옮겨갔다.
"당연하지. 소칠은?"
"거처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나중에 만나보세요."
무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무영과 소소의 대화가 대충 끝나자, 그때까지 참고 기다리던 서하린이 무영에게 말했다.
"오라버니, 누군지 제게도 소개를 시켜주셔야지요. 언제 어떻게 만난 분인지......"
서하린의 말에 모용혜와 당비연도 눈을 빛내며 무영과 서하린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녀들 역시 무영과 그녀의 관계가 너무나 궁금했다.
세 여인의 너무나 과도한 관심에 무영이 살짝 당황하자, 소소가 먼저 나섰다.
오라버니께서는 제 생명을 구해주신 분입니다."
소소의 말에 세 여인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 무영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용혜나 서하린에게도 무영은 생명의 은인 아닌가. 몇 번이나 목숨을 구해줬으니 말이다.
"더 자세한 얘기를 원하신다면 해드리겠습니다만......"
소소는 은근한 미소를 띠고 그렇게 말했다. 세 여인은 그런 소소의 표정과 말투에 왠지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여기서 더 이상 소소의 입을 열게 놔두면 왠지 큰일이 날 것만 같았다.
"아니에요. 그런 개인적인 일에 대해 함부로 들을 수는 없지요. 그러니 이제 눈앞에 닥친 다른 일을 논하는 게 낫겠네요."
모용혜가 서둘러 수습했다. 무영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갔다. 순간 소소까지 포함한 네 명의 여인들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흘러갔다.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채금상단에 대한 얘기를 하는 게 어떨까요?"
소소의 말에 모두의 눈이 진지해졌다. 채금상단은 이번에 구대흉마 중 다섯을 끌고 왔다. 게다가 수백의 무사들도 함께 데리고 왔다.
만일 무영이 시기적절하게 도착하지 않았다면 엽광패는 물론이고 뇌룡대와 녹룡대는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그보다 영감님들이랑 싸우던 구대흉마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영감님들이라는 엽광패의 말에 당백형과 강악이 눈을 한 번 부라렸다. 하지만 그들의 대답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아 헛기침을 한 번 하고 입을 열었다.
"당연히 모두 황천으로 보내줬지. 왜? 도망이라도 갔을까요?"
"그게 정말입니까? 제가 목숨을 걸고도 어쩌지 못한 놈들 넷을 한꺼번에 죽였다고요?"
엽광패의 눈이 불신으로 물들었다. 강악과 당백형이 자신보다 몇 수 위의 고수라는 건 안다.
평소 대련을 할 때, 그들에게 타격을 주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목숨을 걸고 싸우면 얘기가 좀 달라진다.
엽광패는 이번에 흉마 중 하나를 상대하면서 목숨을 걸었다.
그런데도 흉마를 이기지 못했다. 만일 신선단을 먹어 체력과 내력을 회복하지 않았다면 마지막에 타격을 줄 수도 없었을 것이다.
엽광패가 의심스런 눈으로 강악과 당백형을 쳐다봤다. 두 사람의 눈이 대번에 불을 뿜었다.
"그 불손한 눈은 무슨 뜻이냐? 죽고 싶다든가, 독에 녹아버리고 싶다든가, 새까맣게 구워지고 싶다든가, 뭐 그런 뜻이냐?"
강악의 섬뜩한 말에 엽광패가 화들짝 놀라 상체를 뒤로 크게 젖히며 손사래를 쳤다.
"그, 그 무슨 무시무시한 말씀입니까. 전 그저 두 분께서도 그 신선단으로 기력을 회복해서 그놈들을 상대했는지 궁금했을 뿐입니다."
"흥, 우리가 네놈 같은 하수인줄 아느냐?"
"그게 무슨 섭섭한 말씀입니까? 하수라니요? 저 엽광패입니다. 십대고수라고요."
"쯧, 말석에 간신히 이름만 걸치고선 무슨, 구대흉마가 나타났으니 이미 십대고수에서는 물러나야지."
"으하하핫! 구대흉마가 다 뒈졌는데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씀이십니까. 전 여전히 십대고수입니다. 으하하핫!"
"끄응. 말을 말지."
강악은 그냥 고개를 돌려 버렸다. 성질 같아선 뒤통수라도 한 대 후혀치고 싶었지만 엽광패가 조금 떨어진 곳에 있어서 손을 쓰기가 껄끄러웠다.
이렇게 다들 모인 자리에서 체통 없이 설치고 싶지도 않았다.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전 아무리 생각해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솔직히 저한테 온 그놈은 다섯 중에서 제일 약한 놈이었습니다.
그놈 둘이 모여야 남은 놈 하나를 이길 수 있을 정도인 듯하던데. 아무리 생각해도 영감님들 수준으로 그런 놈 넷을 한꺼번에 상대하기에...... 이크!"
엽광패는 강악의 표정이 바뀌는 걸 확인하고는 황급히 일어나 뒤로 펄쩍 물러났다. 그동안 하도 당해서 이제는 표정만 보고도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측이 가능했다.
하지만 엽광패의 예상과는 달리 강악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한 번 무섭게 노려봤을 뿐이었다. 엽광패는 온몸에 오한이 드는 느낌에 몸을 한 번 부르르 떨고 다시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노려보지만 마시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 좀 해 주시죠."
강악은 엽광패를 노려보다가 당백형을 한 번 쳐다보고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커험, 뭐, 그런 게 있다."
"그런 거라니요?"
이제는 방에 있는 모두의 눈에 호기심이 어렸다. 분명히 뭔가가 있긴 있는 모양이니 궁금증이 일었다.
모두의 초롱초롱한 눈빛을 받은 강악은 졌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나랑 독 늙은이랑 합결술 비슷한 걸 만들었다.
"합격술?"
사람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강악과 당백형이 합격술을 만들었다는 걸 얼른 이해하기 어려웠다. 사실 상극이라 할 정도로 상성이 맞지 않는 사람들 아닌가.
"뇌나 독 둘 중 하나는 포기하셨어야 할 텐데요?"
"흥, 누가 나한테 독만 있다고 했느냐? 내 진짜 힘은 독이 아니다."
당백형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당백형은 천수독왕이라 불릴 정도로 암기에 관해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하지만 암기 역시 뇌기와 상극인 것은 마찬가지다.
당백형이 주로 쓰는 암기는 가느다란 침(針)인데, 그것은 강렬한 뇌기 근처에서는 방향을 제대로 잡기 힘들다.
차라리 강력한 바람을 향해 던지는 게 훨씬 정확도가 높다. 특히 당백형과 같은 고수에게는 더 그렇다.
"뭐, 이렇게 되었으니 나중에 보여주마. 천뢰(千雷)라고, 우리가 만든 합격술의 이름이다."
"천뢰(千雷)라면...... 천 개의 벼락이 떨어진다는 뜻입니까?"
"비슷하다."
그 말에 사람들은 금세 천뢰라는 것을 머릿속으로 그릴 수 있었다. 수천 개의 벼락이 동시에 떨어진다면 아마 막을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크흠, 노파심에서 말하는 거지만,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해선 안 된다. 뭐, 어차피 앞으로 쓸 일도 거의 없겠지만."
강악이 말에 사람들은 내심 고개를 끄덕이며 의미심장한 눈으로 두 사람을 슬쩍 훔쳐봤다. 사이가 안 좋은 듯하면서도 상당히 친하다.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하면서, 알게 모르게 챙긴다.
"그 눈들은 뭐냐? 방 안에 천뢰 한 방 놔주랴?"
강악이 눈을 부라리며 말하자 다들 급히 시선을 돌렸다. 모두 시선을 돌리자, 강악이 첫기침을 하며 슬쩍 돌렸다.
"크흠, 크흠. 뭐, 천뢰라는 게 워낙 대단하니 입이 근질근질 할 수도 있겠지. 좋다. 천뢰에 대해서 말하는 걸 허락하마, 대신 그걸 쓰는 사람은 우리가 아니라 당악이다."
당악이라는 말에 사람들이 눈을 크게 뜨고 강악과 당백형을 번갈아 쳐다봤다. 두 사람은 쑥쓰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슬며시 돌렸다. 하지만 끝까지 말을 이었다.
"뭐, 한 자씩 땄다. 그냥 당가 놈으로 하자꾸나. 당가에서 당악이라는 놈이 천뢰를 특기로 쓴다고 알고 있으란 말이다. 알아들었느냐?"
아무도 섣불리 대답을 못했다. 어이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이 표정을 들키면 그냥 넘어가기 어려울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까 그걸 소문 내달라 그 뜻이지?'
'뭐야? 이 영감탱이들이 노망이 들었나...... 그러니까 지들 둘이 합해서 당악이라 이거지? 그놈이 구대흉마를 죽였고? 이런 젠장, 어디 나중에 별것 아니기만 해봐라.'
엽광패는 속으로 그렇게 투덜거렸다. 하지만 천뢰라는 게 별것 아닐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면 천하에서 가장 강할지도 모르는 두 사람이 이렇게까지 자신 있게 말하지는 못했을 테니까.
사람들은 속으로 대부분 어이없어하면서도 기대감을 감추지 못했다. 과연 십대고수 둘이 만들어낸 합격술이 얼마나 대단할지 궁금했다.
이름 그대로 정말로 천 개의 벼락이 쏟아질 리는 없지만 그와 비슷한 효과만이라도 내면 정말로 굉장한 일이었다.
"자, 이제 슬슬 본론으로 넘어가죠."
사람들은 갑자기 들려오는 청아한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모두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소소가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그제야 그들이 채금상단에 대한 일을 논의하고 있었다는 게 생각났다.
소소는 사람들이 정신을 완전히 차리자 더욱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채금상단이 여기서 물러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그들이 가진 힘에도 한계가 있겠지요.
구대흉마를 다섯이나 동원할 수 있을 줄은 몰랐지만 어쩌면 그 이상의 힘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소소의 말을 시작으로 여러 가지 이야기가 오갔다. 주로 구대흉마와 그 뒤에 도사리고 있을 은왕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렇게 대놓고 움직이는 걸로 봐서 은왕이라는 작자가 더 이상 숨어만 있지 않고 모습을 드러낼 모양입니다."
"어쩌면 뭔가 다른 음모를 꾸미고 있을 수도 있고, 채금상단을 다시 한 번 이용할 수도 있습니다."
표중산은 은왕에 대한 이야기를 정리하면서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구대흉마를 모두 수하로 둘 정도면 그 힘은 가히 추측이 불가능할 정도다.
십대고수를 모두 수하로 두고 있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한데 은왕은 그런 힘을 가지고도 숨죽이고 무림 깊은 곳에 숨어 있었다.
'대체 왜 그랬을가? 게다가 무림맹 수뇌부도 장악을 했다지 않은가.
혈마맹도 움직일 수 있을 정도고, 흑사맹과 녹림 또한 그의 수중에 있다. 정협맹만 정리하면 된다는 뜻인데 왜 쥐죽은 듯 있었을까.'
표중산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무영이 입을 열었다.
"은왕이라는 자뿐 아니라 혈왕이라는 자도 있습니다."
무영은 자신이 아는 혈왕에 대해 차분히 설명했다. 그 설명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경악에 감추지 못했다.
은왕만 해도 전무림을 뒤집을 수 있을 판에 혈왕이라는 자가 또 있다니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게다가 혈왕은 왠지 은왕보다 더 무서웠다.
"무림에 암운이 드리웠군요. 그렇다면 일단 채금상단을 빨리 정리해야겠습니다."
표중산의 말에 모두 그를 바라보싸다. 표중산은 자신에게 모인 시선을 하나하나 마주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현재 채금상단은 벽력탄을 안고 있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그것을 터트려 버리겠습니다. 앞으로 열흘 안에 채금상단은 무너집니다. 더불어 정협맹도 크게 흔들릴 것입니다."
사람들의 낯빛이 살짝 어두워졌다. 정협맹이 못마땅한 건 사실이지만 막상 정협맹이 흔들리거나 무너지면 무림에 드리운 암운이 더더욱 짙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염려 마십시오. 정협맹이 비록 잠시 흔들리긴 하겠지만 금세 본래의 모습을 되찾을 것입니다. 다만, 그때부터는 우리 뇌룡장의 눈치를 살짝 볼 수밖에 없겠지요."
표중산의 말에 모두가 멍하니 입을 벌렷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처음부터 이렇게 될 것을 예상하고 일을 진행시킨 듯했다.
"허어, 대단하구나. 대단해."
강악과 당백형이 감탄을 토해내며 표중산을 바라봤다 표중산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당치앖습니다. 어찌 이런 대단한 일을 제가 혼자 계획했겠습니까. 모두 내총관과 양 소저의 도움 덕분입니다."
표중산의 말에 이번에는 모두의 시선이 소소와 소명학에게로 향했다. 두 사람 역시 표중산과 마찬가지로 쑥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소소는 부끄러운지 고개까지 숙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엽광패는 입에 침이 흐르는 것도 모른 채 그녀를 바라봤다.
"저저, 침 떨어진다. 입 닫아라."
강악이 한심하다는 듯 말하자, 엽광패가 화들짝 놀라 소매로 입을 닦았다.
"에잉, 한심해서 원, 쯧쯧쯧."
엽광패는 뭐라 대꾸도 못하고 소소의 눈치만 힐끗힐끗 살폈다.
소소는 그런 엽광패의 모습을 보며 손으로 입을 살짝 가리고 웃었다. 그 화사한 모습에 엽광패의 입이 다시 한 번 벌어졌다.
"이런 멍청한!"
서문공복은 성큼성큼 걸으며 인상을 한껏 찌푸렸다. 생각하면 할수록 한심했다. 어찌 이 거대한 상권을 한순간에 말아먹을 수 있단 말인가.
처음부터 채금상단을 크게 믿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최소한 버티는 정도는 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채긍상단의 능력은 그림자들로부터 들어 알고 있었기에 그렇게 판단했다. 한데 그 모든 판단이 틀어졌다.
서문공복은 더 이상 정협맹에 미련이 남지 않았다. 정협맹이 망하건 말건 전혀 상관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정협맹은 조금 더 버텨줘야만 했다. 그래서 흑사맹과 녹림맹, 무림맹과 혈마맹까지 모두 동시에 몰락해야만 했다.
'그래야 새로운 세상을 열 수 있지.'
서문공복은 은왕의 계획이 마음에 들었다.
은왕은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한다. 그 새로운 세상에서 서문공복은 새로운 서문세가를 세우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중요한 시기인데 정협맹이 흔들리고 있었다. 모두 뇌룡장과 채금상단의 싸움 때문이었다.
"멍청한! 멍청한! 멍청한 놈들!"
서문공복은 무한의 번화가 구석진 곳에 위치한 건물에 스며들었다. 그곳이 바로 채금상단 무한 본부였다.
채금상단은 근거지를 철저히 감춘다. 그랬기에 정협맹이나 뇌룡장의 손길에서 아직까지 무사할 수 있었다.
서문공복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세가 어찌나 흉흉했던지 그가 복도를 가로질러 가는 동안 아무도 그 앞을 가로막지 않았다.
그저 문틈이나 벽 뒤에 조심스럽게 무슨 일인지 살피는 것이 전부였다.
벌컥!
서문공복은 복도 끝에 있는 가장 큰 문을 활짝 열었다. 그 안에서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누, 누구시죠?"
여인이 겁먹은 목소리로 물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떨어뜨릴 것 같은 얼굴로 그렇게 묻자, 서문공복은 순간 눈살을 찌푸렸다. 만일 보통 사내가 봤다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것이다.
"수작 부리지 말고 옷 똑바로 입어라. 난 정협맹의 외당주다."
정협맹 외당주라는 말에 강옥조의 안색이 급변했다. 설마 정협맹에서 이곳의 위치를 파악하고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강옥조는 서문공복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그간 정협맹과의 거래는 모두 대리인이 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림자였지만 그것도 강옥조가 알 수는 없었다.
"흐응, 특이한 분이시군요."
강옥조의 말투가 대번에 바뀌자, 서문공복이 피식 코웃음을 쳤다. 강옥조는 어깨 아래로 흘러내린 옷을 다시 올려 정리를 했다. 어깨에서 가슴어림까지 드러나던 몸이 옷에 감춰졌다.
"무엇을 원하시나요?"
강옥조의 말에 서문공복이 눈을 이채를 띠었다. 너무나 당당한 태도를 보고 있으니 한편으로는 어이가 없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협맹을 완전히 말아먹었더군."
"어쩔 수 없었답니다. 그렇게나 완벽히 준비된 상대인 줄 몰랐거든요. 어차피 제가 아니었어도 정협맹은 그렇게 될 운명이었어요."
"흥, 그따위 말이나 듣자고 온 게 아니다."
강옥조는 자세를 조금 비틀며 묘한 웃음을 입가에 머금었다. 그 모습이 꽤 요염해 서문공복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대단한 계집이군.'
냉정히 말해 강옥조는 얼굴이 대단히 아름답지는 않았다. 예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서하린처럼 누구나 눈이 돌아갈 정도의 미모는 아니었다.
하지만 묘한 매력이 있었다. 남자의 눈길을 잡는 요염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 요염함은 이미 차갑게 굳은 서문공복의 마음마저 움직일 정도였다.
서문공복의 눈빛이 바뀌자 강옥조의 미소가 조금 더 짙고 요염해졌다. 그녀의 어깨에서 옷자락이 조금씩 내려갔다. 이번에는 서문공복도 그것을 제지하지 않았다.
이내 강옥조의 옷이 완전히 아래로 내려갔다. 눈부신 나신이 서문공복의 눈을 휘어잡았다.
"자아, 일단 이리로......."
강옥조가 색기 가득한 목소리로 요염하게 손가락을 까닥였다. 서문공복은 그 손짓에 따라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강옥조는 자신 앞으로 다가온 서문공복의 옷을 하나하나 정성을 다해 벗겨냈다. 그녀의 입술이 살짝 벌어지고, 새빨간 혀가 나와 윗입술을 핥았다.
남궁무학은 다급한 표정으로 서문공복을 맞이했다.
"어떻게 되었소? 그들을 잡았소?"
서문공복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그들로부터 뭔가를 바라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소."
남궁무학의 얼굴이 있는 대로 일그러졌다.
"그게 무슨 소리요? 그들 때문에 우리 사업체들이 어떤 꼴이 되었는지 몰라서 하는 소리요?"
서문공복은 냉정한 얼굴로 말했다.
"일단 단죄를 했소. 상단주를 제외한 모두의 목을 잘랐소."
한 치의 감정도 담기지 않은 서문공복의 말에 남궁무학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왠지 차가운 기운이 방 안에 가득한 것처럼 느껴졌다.
"정작 잘못한 것은 상단주이거늘 애꿎은 상인들을 죽일 필요가 있었소? 게다가 상당주는 살려두다니......"
"상단주를 이용해 할 일이 있소. 어쨌든 돈은 있어야 하지 않겠소?"
서문공복의 말에 남궁무학이 앓는 소리를 냈다.
"끄응. 외당주의 책임이 크니 알아서 하시오."
서문공복의 눈에서 일순 섬뜩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남궁무학은 미처 그것을 보지 못했으나, 갑작스럽게 드는 오한에 몸을 부르르 떨고는 서문공복을 바라봤다.
"내가 틀린 말을 했소? 애초에 외당주가 채금상단을 끌어들이지 않았소."
서문공복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맞소. 사실 나도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소. 어쨌든 내가 벌인 일, 내가 마무리하겠소."
"어찌 하실 생각이시오?"
"일단 뇌룡장의 자금을 끌어들일 생각이오."
"뇌룡장의 자금을 말이오?"
"그렇소. 채금상단의 상당주로 하여금 우리가 가진 사업체를 되도록 높은 가격에 팔도록 할 생각이오."
남궁무학이 못마땅한 얼굴로 서문공복을 노려봤다.
"우리 사업체가 비록 처참하게 박살나긴 했지만 그래도 그게 정협맹의 기반이오. 그걸 넘긴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요?"
서문공복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그러니 대리인을 내세우는 것 아니겠소? 채금상단이 뇌룡장에 우리 사업체를 위탁받아 팔긴 하겠지만...... 결국 뇌룡장은 그것을 사지 못할 거요."
"그게 무슨 말이오?"
"뇌룡장은 그저 돈만 토해내고 사업체는 가져가지 못할 거란 뜻이오. 우리 정협맹은 애초에 채금상단에 사업체의 처분권을 넘긴 적이 없으니까 말이오."
서문공복의 말에 남궁무학의 눈이 커졌다.
"하면 뇌룡장을 상대로 사기를 치겠다는 뜻이오?"
"사기를 치는 건 나나 정협맹이 아니오. 채금상단이지."
남궁무학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쩔 수 없다는 점이 또 마음에 안 들었다. 그의 표정이 절로 일그러졌다.
혈마맹주 마철령은 핏빛 운무에 싸인 채로 서서히 떠올랐다. 그의 눈에서 혈광이 뻗어 나왔다. 혈광과 운무 때문에 그 앞에 높이 서 있는 절벽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흐으으으, 여긴가?"
절벽은 하늘에 닿을 듯 높았다.
마철령의 눈은 절벽 전체를 훑었다. 뭔가를 찾는 듯 날카로운 눈빛으로 절벽을 자세히 살피던 마철령은 결국 자신이 찾던 것을 발견하고는 그쪽으로 날아올랐다.
"제대로 찾아왔군. 흐으으으."
절벽 한가운데 커다란 원모양의 문양이 음각되어 있었다. 그 문양은 마철령이 가진 혈옥패의 그것과 완벽히 일치했다.
마철령은 품에서 혈옥패를 꺼냈다.
혈옥패에서 은은한 혈광이 흘러나왔다. 혈옥패에서 뿜어져 나온 혈광이 절벽의 문양에 닿자, 이번에는 문양에서 빛이 솟아났다. 그 빛 역시 새빨간 핏빛이었다.
마철령은 손가락 하나를 혈록패 위로 가져갔다.
푸슛.
손가락 끝이 터지면 피가 뿜어져 나왔다. 그렇게 쏟아진 피가 혈옥패 위로 떨어졌다.
우우웅.
혈옥패가 나직이 짐동하며 피를 빨아들였다. 그렇게 잔뜩 피를 먹고 나니 점점 투명해지다 나중에는 마치 피를 뭉쳐 만든 것처럼 섬뜩한 빛을 뿜어냈다.
마철령의 손가락 끝에 났던 상처가 순식간에 아물었다. 마철령은 혈옥패를 앞으로 들어올렸다. 그리고 혈옥패에 내공을 불어 넣었다.
우우우웅!
혈옥패가 다시 진동을 시작했다. 그 진동이 만들어낸 기파가 절벽으로 뻗어나갔다.
우르르릉!
혈옥패의 기파를 받은 절벽이 마치 무너질 것처럼 울어댔다.
그그그긍!
돌 긁는 소리와 함께 절벽 간운데 있던 문양이 천천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 문양은 마치 절벽과 분리된 것처럼 따로 돌아갔다. 돌가루가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완전히 한 바퀴 회전한 문양이 점점 절벽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세 바퀴를 회전하고 나니 완전히 안으로 들어가 절벽 한가운데 커다란 동혈이 생겨났다.
마철령은 서서히 움직여 동혈로 다가갔다. 그의 몸을 감싼 핏빛 운무가 동혈 안으로 맹렬히 빨려 들어갔다.
마철령의 얼굴에 두려움이 떠올랐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한 번도 가져 보지 못했던 기분이기에 너무나 생소했다.
"흐으으으."
마철령은 길게 숨을 내쉰 후, 서서히 동혈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몸을 가렸던 운무는 완전히 사라진 상태였다. 동혈 안에서 빨아들이는 힘이 정말로 엄청났다.
동혈로 들어간 마철령은 눈을 크게 떴다. 밖에서 보기에 안은 한 치 앞도 안 보일 정도의 암흑이었는데, 막상 안에 들어오니 상당히 밝아서 구석구석이 너무나 잘 보였다.
"흐으으. 기분이 좋구나."
안은 온통 붉었다. 마치 동굴 벽에 빛나는 피를 잔뜩 바른 듯했다. 실제로 피 냄새가 났다. 그리고 혈기(血氣)가 느껴졌다.
마철령은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동굴은 깊었다. 그리고 아래로 완만하게 경사져 걸어갈수록 조금씩 밑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마철령은 이쯤이면 땅속 깊은 곳까지 내려왔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이 듦과 동시에 동굴이 끝났다. 마철령은 커다란 동공에 도착했다.
"이곳이 혈곡인가? 흐으으."
지금까지 지나온 길이 아마 혈곡일 것이다. 핏빛 동굴은 혈곡이라는 이름에 너무나 잘 어울렸다.
그것은 이곳 동공도 마찬가지였다. 온통 피 냄새로 가득했고, 혈기로 꽉 차 있었다. 그리고 동공 한가운데 커다란 제단이 놓여 있었다.
마철령은 천천히 제단으로 다가갔다.
제단 위에는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이 누워 있었다. 하지만 얼굴에 핏기가 하나도 없었고, 숨소리도 나지 않는 걸로 보아 시체임이 분명했다.
마철령은 한 발 더 다가가 여인의 시체를 내려다봤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이었는데, 몸 위에 기이한 문양이 가득 그러져 있었다.
마철령은 그 문양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아니, 읽어 내려갔다.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읽을 수 있었다. 그 문양은 문자임이 분명했다. 뜻도 알 수 없었는데, 어느새 문자가 머릿속에 박혀들었다. 저절로 외워졌다.
여인의 몸에 새겨진 모든 문양을 외우고 나니 그 뜻이 저절로 이해가 되었다. 정말로 기이한 일이었다.
더 신기한 건 여인의 몸에 새겨졌던 문자가 모두 사라졌다는 점이다. 마철령은 마치 자신이 여인의 몸에 새겨진 문자를 먹어치운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마철령은 문자가 사라진 여인의 몸을 바라봤다.
여인은 정말로 아름다웠다. 마철령의 눈에 음욕이 어렸다. 여인의 몸을 범한 후, 갈기갈기 찢어 먹고 싶은 욕구가 맹렬히 치솟았다.
순간 여인이 눈을 번쩍 떴다.
마철령은 감짝 놀랐다. 여인에게서는 여전히 숨소리로 들리지 않았다. 죽은 여인이 눈을 뜬 것이다.
눈을 뜬 여인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마철령을 향해 요염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몸이 흐느적거리며 마철령에게 다가가 그의 품에 안겼다. 마철령은 자연스럽게 여인을 감싸 안았다.
"흐으으으."
마철령이 내뿜는 숨소리만 동공에 가득 찼다. 여인은 신음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당연히 숨도 쉬지 않았다. 하지만 표정만은 색정이 가득했다.
마철령은 여인의 몸 안에 정기를 토해냈다. 그 순간 여인의 몸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마철령의 눈에 당혹감이 어렸다. 여인의 몸이 가루가 되어 흩어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가루가 동공에 가득 찼다. 마치 핏빛 운무 같았다. 그것은 마철령의 숨을 따라 콧속으로 남김없이 빨려 들어갔다.
마철령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몸속에 들어온 혈기가 마구 요동쳤다. 혈기를 완전히 다스린 마철령이 눈을 떴다.
번쩍!
쩌저적!
혈광이 동공을 가득 메웠다. 혈광이 훑고 지나간 자리에 모두 거미줄 같은 금이 그려졌다.
"크하하하핫!"
마철령은 희열에 가득 찼다. 그가 얻은 것은 잊혀진지 수백 년이나 지난 혈교의 힘이었다.
수많은 강시를 만드는 비법과 피를 통해 힘을 얻는 법을 알아냈다. 그 힘을 제대로만 쓸 수 있다면 전 무림을 손아귀에 쥘 수도 있으리라.
"크하하하하핫!"
마철령의 웃음이 동공을 뒤흔들었다.
이내 동공이 무너져 내렸고, 이이서 절벽까지 이어진 동굴도 모두 무너졌다. 혈곡이 무너지자, 혈곡의 입구 역할을 하던 절벽도 뒤흔들렸다.
우르르르릉!
콰과광!
결국 절벽이 박살났다. 마철령은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먼지를 바라보며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시체가 필요해."
그렇게 중얼거린 마철령의 신형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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