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 정중부의 일기
오영선(서울학연구소선임연구원)
1144년(인종 22) 12월 00일(39세)
오늘은 섣달 그믐날이다. 고향 해주를 떠나 군대에 들어온 후 비교적 순탄한 길을 걸어왔다. 그런데 저 새파랗게 젊은 놈한테 이런 수모를 당하다니. 자랑스러웠던 내 수염은 검게 그슬려 있다. 김부식과 그 아들 김돈중, 정말 씹어 먹어도 분이 풀리지 않을 것이다. 오늘밤도 여느 섣달 그믐날 밤처럼 귀신을 쫓는 나례가 행해졌다. 온갖 잡기가 벌어졌고, 임금께서도 친히 나오셔서 구경을 하셨다.
내시. 견룡 등 시종하는 신하들도 모두 나와 뛰놀며 즐겼고, 나 역시 견룡군의 장교로서 참석하였다. 그런데 내시 김돈중이라는 놈이 갑자기 촛불을 내 얼굴에 들이대는 바람에 수염이 타 버렸다. 놈은 올해 5월 과거에 합격하였는데, 자기 아버지 김부식의 위세를 믿고 기세가 등등하다. 원래 2등으로 합격한 것을 임금께서 김부식의 체면을 봐서 1등으로 삼았다고 하는데,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기 혼자 잘난 척하는 놈이다. 딴에는 무신인 내가 임금의 관심을 받는 게 샘이 나서 그랬겠지. 놈을 늘씬하게 패주기는 했지만,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는다.
그놈의 잘난 아버지 김부식은 전후 사정은 아랑곳없이 나를 못 죽여서 안달이었다. 다행히 임금께서 나보고 어서 도망하라고 하시고 김부식을 달래셔서 화는 면했지만. 임금께서도 내 수염을 보시고는 어이없어 하시는 모습이 역력했다.
사실 요즈음 나라꼴이 말이 아니다. 김부식이 묘청의 난을 진압하고 정권을 잡은 후로 유교를 바탕으로 나라의 기틀을 잡았다느니, 제도를 정비했다느니 하면서 이전에 있었던 개혁의 바람을 잠재우기에 열심이다. 현 임금께서 초기에 이자겸의 난을 진압하신 후로는 묘청, 정지상 등의 말에 따라 사회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키려고 노력하셨는데. 약간 과격하긴 했지만, 개경의 문벌가문을 중심으로 굳어져 있는 보수적인 분위기를 일신하기 위해서는 어쩌면 불가피했는지도 몰라. 하지만 결국 문벌가문들의 반격으로 좌절되고 말았지. 묘청이 성급하게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김부식이 토벌군의 총사령관이 되어 난을 진압한 후 완전히 제멋대로다. 임금도 두 번이나 과오를 반성하는 성명서를 낼 정도로 위축되셨고, 김부식에 적대적이었던 정지상. 백수한 등 서경 출신의 관리들은 모두 숙청당해, 이제 그들의 주장은 모두 배척되었다. 하지만 군인인 내 입장에서 볼 때 이건 도대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금나라를 공격하자는 주장은 좀 무리였는지 모른다. 또 수도를 서경으로 옮기자는 주장은 서경 출신 관리들의 지역적인 의도가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임금께서 황제를 칭하고 우리나라의 연호를 따로 정하자는 주장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사실 금나라가 현재 비록 강국이라 하나 원래는 오랑캐가 아닌가. 오랑캐인 주제에 우리에게 도대체 뭐라고 한단 말인가. 그것 때문에 쳐들어온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설사 쳐들어온다고 해도 한번 붙어보면 그만이지. 예전 그 막강한 요나라도 무찔렀는데, 싸워보지도 않고 지레 겁을 먹고 항복한 것은 너무 한심스럽다.
김부식이 묘청의 난을 진압하면서 총사령관이 되었던 일만 해도 그렇다. 문신과 무신을 나눴으면 그 직책도 정확히 구분해야지. 총사령관은 항상 문신이 담당하고, 무신들은 그 밑에서 단위 부대나 지휘하게 하고 있으니, 도무지 말이 안된다. 물론 예전에 강감찬이나 윤관도 문신으로서 군대를 지휘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때는 문무반의 구별이 지금 같지는 않았다. 문신들도 무예나 군사지휘에 익숙하였고, 강감찬이나 윤관 같은 이는 특히 군사방면에 뛰어나 장군이라고 불러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물론 무신들도 문신의 직책을 맡을 기회가 종종 주어졌다. 하지만 지금은 문신의 직책을 무신이 전혀 못 맡게 하면서 출정군의 총사령관을 문신들이 독점하는 것은 도대체 말이 안 된다.
1147년(의종1) 12월 00일(42세)
요즘은 정말 신나는 날의 연속이다. 새 임금께서 왕위에 오르시니, 사회 전체가 새롭게 시작하는 느낌이다. 나도 대정에서 한 등급 승진하여 교위가 되었다.
임금께서는 수시로 나를 비롯한 몇몇 무신들을 불러 관심을 보여 주신다. 오늘도 어사대에서 나와 산원 사직재가 봉쇄되어 있는 수창궁 북문을 마음대로 열고 출입한 것을 문제 삼아서 탄핵했으나, 임금께서 물리치셨다고 한다. 아무래도 임금께서 우리를 가까이 하시는 것이 못마땅한 모양이다.
사실 임금께서 왕위에 오르시는 과정에는 곡절도 많았다. 태자로 책봉되실 때에도 선왕께서는 못 미더워하셨고, 태후께서는 아예 둘째 아들 대령후를 태자로 삼으려고 하셨다. 정습명이 힘쓰지 않았더라면 어찌 되었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소문이 나돌고 있다. 최근 임금께서 태후를 모시고 앉아 있다가 동생을 세우려 했던 일에 대해 섭섭한 말을 하자, 태후께서 맨발로 뜰에 내려가 하늘을 보면서 원망하셨다. 그러자 갑자기 하늘에서 천둥. 번개가 심하게 쳐서 임금께서 겁을 먹고 태후의 치마 속으로 기어들어가자 벼락이 바로 궁전 기둥을 쳤다는 것이다. 임금께서 심약한 면이 있기는 하지만, 설마 일국의 제왕으로서 그랬을 리는 없다. 저 김부식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부류들이 임금이 즉위하는데 자신들이 큰 역할을 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과장한 것이 아닐까. 물론 그 중 정습명은 임금께 큰 은인인 것은 사실이지만, 김부식이 그랬듯이 신하로서 임금이 하시는 일에 지나치게 간섭해서는 아니 될 일이다. 임금께서 우리 무신들에게 관심을 보이시는 이유도 아마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1164년(의종18) 2월 00일(59세)
요즘 임금께서 예전 같지 않으시다. 즉위 초기 의욕과 활기에 넘치시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임금께서는 오늘도 인지재로 놀러가셨다. 정말 시도 때도 없이 놀러만 다닌다. 아무데나 가다가 문득 경치가 아름답다 싶으면 행차를 정지시키고 연회를 베푸는 것이 일상사가 되었다. 그리고는 간사한 문신들과 술을 마시고 시를 짓거나 글을 읊으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궁궐에는 아예 돌아갈 생각도 안한다. 나 같은 무신들은 글도 모르는 무식한 것들이라고 실컷 문신 놈들 노는 것을 호위하고 있어야 하는 내 신세가 정말 한심하다. 그래도 한때는 무관들도 신임하시고, 큰일을 하시려는 포부도 있었는데, 요즘은 젊은 문신들하고만 어울려 쳐다보지도 않는다. 성질이 괄괄한 젊은 무관들은 불평이 대단하다. 무관들의 대표로서 그들을 달래야 할 입장이지만, 도리가 없다.
1170년 4월 00일(65세)
오늘 견룡군의 행수로 있는 산원 이의방과 이고가 정변을 일으킬 것을 제의해 왔다. 사실 이들이 오래 전부터 정변을 계획하고 있다는 소문은 이미 듣고 있었다. 얼마 전에는 우학유 장군을 찾아가 정변을 주도해 줄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그 때 우장군은 “문관이 해를 당하게 되면 우리에게도 화가 미칠 것이니, 너는 조심하라”는 아버지의 유언을 들어 거절했다고 한다. 사실 같은 무관이라고 해도 우학유 장군은 집안이 좋아 문신들에게도 어느 정도 대접을 받고 있으니, 크게 아쉬울 것이 없었겠지. 하지만 나 같은 무신들은 언제나 대접을 받겠는가. 그래서 아마도 다음에는 나를 찾아올 것이라 짐작했었다. 이의방. 이고의 제안을 흔쾌히 허락하기는 했지만,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여하튼 이런 세상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세상이 이런 줄도 모르고 임금은 지금도 스스로 ‘태평세월에 글을 좋아하는 임금(태평호문지주)’을 자처하고 있으니, 한심한 노릇이다.
1170년 8월 30일
아직도 치가 떨린다. 한뢰, 이놈의 새끼. 새파랗게 젊은 놈이 왕의 총애만 믿고,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있으니. 임금도 같은 족속이다. 옛날의 정은 손톱만큼도 찾아보기 힘들다. 모든 의욕을 잃고 술과 계집에만 빠져 있고, 모든 정사는 승선 임종식이나 한뢰 손에서 이루어진다. 요즘 무신들 분위기가 어떤지도 모르고 이놈들이 무신 알기를 발가락에 낀 때만도 못하게 여기고 있다.
임금이 어제 흥왕사로 갔을 때 이제는 한번 거사해 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의방. 이고에게, “이제는 우리가 거사할 만하다. 왕이 만약 바로 궁궐로 돌아간다면 좀 더 참고 기다리자. 만약 또 보현원으로 옮겨간다면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라고 약속했었다. 아니나 다를까 임금은 오늘도 궁궐에 돌아갈 생각은 전혀 없이 보현원으로 가자고 했다. 가다가 오문 앞에 행차를 멈추고 여느 때처럼 술판을 벌이고는, 술에 취하자 우리 무신들에게 오병수박희를 하라고 했다. 딴에는 무신들에게 미안한 마음도 있었겠지. 오병수박희가 끝나면 술 한 잔 주고 달랠 생각이었을 테지,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어.
그런데 한뢰 이놈은 그것도 배 아파서 못 참고 있으니. 나이 많은 이소응 장군이 재수 없게 팔팔한 젊은 무관과 상대를 하게 된 것이 문제였다. 물론 이장군이 이길 수는 없었지. 그래서 적당히 상대하다가 기권하고 물러난 건데, 한뢰 이놈이 갑자기 이장군 앞으로 가서 뺨을 치다니. 쳐죽일 놈. 아무리 무신 알기를 우습게 안다 하더라도 그래도 이장군은 명색이 삼품인 대장군인데, 젊은 내시 놈이 그런 짓을 하다니. 임금이나 나머지 놈들도 마찬가지다. 임금은 완전히 손뼉을 치며 박장대소했고, 임종식, 이복기 이런 놈들도 이장군을 욕하고 비웃었다. 주위에 있는 무신들은 모두 안색이 변했고, 모두 나를 주목했다. 나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한뢰 이놈에게, “이소응이 비록 무부이지만 벼슬이 삼품인데, 어찌 이리 심한 모욕을 주는가?” 큰 소리를 쳤다. 성질 급한 이고가 칼을 빼어들고, 내 눈치를 살폈다. 임금도 그때서야 내 손을 잡고 위로했지만, 그게 어디 진심이었겠는가. 하지만 오늘밤의 거사를 생각해서 일단 참기로 했다. 이제 거사가 몇 시간 남지 않았는데 이의방과 이고가 모든 준비를 잘 해놓았을까. 실패하면 나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들도 모두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다. 아! 시간이 왜 이렇게 더딜까.
1170년 9월 1일
내가 다시 일기를 쓰고 있다니. 지금도 거사가 성공한 건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 아까 김돈중의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등골이 오싹하다. 한순간에 거사가 실패로 돌아갈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임금은 어제 일에도 아랑곳없이 계속 보현원으로 향했다. 한뢰 이놈들도 임금에게 궁궐로 돌아가자고 할 생각을 못했다. 물론 궁궐로 돌아가자고 했으면 계획을 바꿔서 바로 거사할 생각이었지만. 거사가 계획대로 보현원에서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정말 다행이었다. 임금이 보현원으로 들어가고, 나머지 신하들이 밖으로 나올 때 이의방과 이고를 시켜 임금을 시종하던 무신과 대소 신료 및 환관들을 모두 죽일 계획이었다. 한뢰, 임종식, 이복기 이놈들이 아무것도 모르고, 보현원 밖으로 나오고 있는 것을 이고가 공격했다. 임종식과 이복기는 그 자리에서 쳐 죽였는데, 한뢰 이놈은 혼자 살아보겠다고 보현원으로 다시 들어가 왕의 침상 아래 숨었다. 가능하면 임금 몰래 처단하고 나중에 알릴 생각이었지만, 일이 이렇게 된 마당에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임금에게 한뢰를 내보내라고 강요한 후 한뢰가 나오자 바로 처단하였다.
문제는 김돈중이었다. 이놈은 예전의 원한도 있고 해서 내가 직접 죽이려 했는데, 보이지 않았다. 약삭빠른 놈이 벌써 사태를 눈치 채고 술에 취한 척해서 중간에 빠져나간 것 같았다. 만약 이 놈이 도성 안에 들어가서 태자를 중심으로 성문을 닫고 우리를 역적으로 몰면 거사는 끝장이었을 것이다. 이의방은 벌써부터 “만약 그렇게 되면 남해로 피신하거나, 북쪽 오랑캐에게 투신하자”고 난리였다. 먼저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사람을 시켜 성안에 있는 김돈중의 집에 가서 동정을 살피게 하였더니, 돌아온 흔적이 없다는 보고였다. 다행이다 싶어 바로 순검군을 이끌고 성안으로 들어가 “무릇 문신의 관을 쓴 자는 비록 서리일지라도 씨를 남기지 말라”고 외치게 하니, 군졸들이 벌떼 같이 일어나 우리에게 호응하였다. 그 동안 무신들뿐만 아니라 군인들도 현 정부에 엄청난 불만을 갖고 있었던 것을 적절히 이용한 거지. 아직 얼마나 죽였는지 정확한 숫자는 보고받지 못했으나, 수백 명은 죽었을 것이다. 임금이 나에게 난을 진정시켜 달라고 애원했으나, 대꾸하지 않았다. 어차피 일어난 혁명(?), 혁명은 희생과 피를 요구하게 마련이지. 아직까지 우리에게 동조하지 않는 무신들을 포섭하기 위해서도 문신에 대한 그들의 적개심을 북돋을 필요도 있고. 그나저나 김돈중 이 놈은 어디로 숨었을까. 기껏 자기 혼자 살아보겠다고 도망쳐버리다니, 정말 비겁한 놈이다.
1170년 9월 2일
요즘은 피비린내 나는 날의 연속이다. 오늘도 숱하게 많은 무신들을 잡아 죽였다. 무엇보다 통쾌한 일은 김돈중을 잡아 죽인 일이다. 놈이 도성으로 돌아갈 생각은 못하고 파주에 있는 감악산으로 도망했는데, 현상금을 걸고 수배하니, 놈을 따라가던 하인이 현상금을 노리고 고발해 왔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 처치하게 했다.
정말 큰 문제는 임금을 어떻게 처리 하느냐 였다. 사실 거사할 때는 폐위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일이 진행되는 것이 보통이 아니었다. 임금이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지, 그것도 모를 일이었다. 왕광치란 놈이 우리를 공격할 것도 어쩌면 알고 있었을 수도 있다. 어제 우리가 밤늦게 임금을 강안전으로 데려갈 때 왕광치란 놈이 우리를 공격하려 했다. 다행히 미리 알려주는 사람이 있어 그 일당을 잡을 수 있었는데, 모두 임금 주변에 있던 내시와 환관놈들이었다. 약 스무명 쯤 되었는데 모두 죽였지만, 임금의 태도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벌써 모든 것을 포기했는지, 음악을 연주하게 하고는 술을 마시고 있다가 새벽녘에야 잠자리에 들었다. 죽이자는 사람도 있고, 살려두어야 한다는 사람도 있었는데, 내 생각에도 지금 당장 임금을 죽이는 것은 곤란할 것 같았다. 하지만, 임금 자리에 그냥 놔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임금을 폐위시키지 않았더라면 혁명의 명분이 서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임금은 거제도로 추방시키고 태자는 진도로 쫓아버렸다. 태자의 아들은 별 문제가 없을 것 같아 죽여 버렸다.
새 임금으로는 전 임금의 아우 익양공을 맞았다. 대부분의 무신들의 생각을 따른 것이었다. 이제는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여 이전 정부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 텐데, 모든 것이 막막하다. 앞으로 잘 할 수 있을까. 이의방, 이고를 비롯한 많은 무관들은 벌써부터 제 세상을 만났다고 저 난리들인데. 나를 비롯하여 이의방, 이고 등 무관들이 고위관직을 모두 차지하였고, 장교들도 모두 벼슬을 몇 등급씩 올려주었다. 이들의 마음을 계속해서 잡아둘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많은 문신들을 모두 죽일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오늘도 중방에서는 이고가 남아 있는 문신들을 모두 죽이자고 주장하였으나, 내가 말렸다. 이제는 나라를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가를 걱정해야 할 시점이기 때문이었다. 사실 나를 비롯해서 무신들이 앞으로 어떻게 정치를 해야 할지 정말 답답한 노릇이다. 문극겸, 이공승 등 비교적 우리들에게 우호적이었던 문신들은 앞으로 여러모로 이용할 가치가 많을 것이다. 물론 우리에게 적대적인 문신들은 살려둘 이유가 없겠지만.
에필로그
정중부는 이후 이의방, 이고 등을 제거하고 최고집권자의 위치에 오른다. 거제도로 쫓겨난 전 임금 의종은 1173년(명종 3) 김보당의 난에 연루되어 결국 천인 출신의 장군 이의민에게 잔인하게 살해된다. 하지만 정중부 역시 명종 9년 청년장군 경대승에 의해 살해된다. 경대승. 이의민에 이어 1196년(명종 26) 최충헌이 권력을 장악하였으며 1258년(고종 45) 까지 60여 년간 최씨 집권기가 지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