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수자기와 신미양요 답④
제시된 자료의 설명에 나타난 '어재연 장군이 미군과의 전투에서 빼앗긴 수자기(진중에 세우던 대장의 군기)'라는 사실에서 신미양요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1866년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까지 올라와 통상을 요구하며 난동을 피우다 평양 군민에 의해 불타 침몰한 사건이 있었어요. 미국은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이를 구실로 여러 차례 배상금 지불과 통상 조약의 체결을 요구하였습니다. 하지만 번번히 대원군이 이를 거부하자 미국의 로저스 제독은 5척의 군함을 이끌고 강화도를 침략하여 신미양요를 일으켰습니다.
미국 함대는 우수한 무기를 바탕으로 초지진과 덕진진을 점령하고 광성보를 공격하였어요. 이때 어재연 등이 이끄는 조선의 수비대는 광성보와 갑곶에서 결사적으로 항전하였지만 함락되고 말았어요. 그러나 조선 군민이 끈질기게 항전하고 조선 정부가 수교 협상에 응하지 않자 결국 미군은 퇴각하였습니다. 한편, 광성보 전투에서 어재연 장군의 수(帥)자기가 미군에 넘어갔는데, 2007년에 우리나라에 영구 임대 형식으로 돌려줬어요.
① 운요호 사건은 일본이 일으킨 것으로, 일본은 이 사건을 구실로 개항을 요구하여 강화도 조약이 체결됩니다.
②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은 퇴각하면서 강화도에 있던 외규장각 건물을 불태우고 의궤를 비롯한 각종 문화유산과
재물을 약탈해 갔습니다.
③ 병인양요 때 한성근의 부대는 문수산성에서, 양헌수의 부대는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에 맞서 싸웠어요.
④ 신미양요는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 배경이 되어 일어났어요.
⑤ 병인박해 당시 프랑스 선교사가 처형된 것을 빌미로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공격한 사건이 병인양요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④번입니다.
흥선 대원군의 내정개혁 정책
① 왕권 강화 정책 : 능력 위주의 인재 등용, 경복궁 중건(원납전 접수, 당백전 발행), 비변사 폐지, 의정부와 삼군부의 기능 회복, 대전회통 편찬
② 민생 안정
◦ 서원 철폐 : 서원들이 면세, 면역으로 재정 지원으로 국가 재정을 좀먹고 백성들을 수탈하는 역기능 → 전국에 47개만
남기고 만동묘를 비롯한 600여 개 서원을 철폐 → 양반 유생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강행
◦ 삼정 개혁 : 전정(양전 실시해 은결 색출, 양반 토호의 토지 겸병 금지), 군정(호포제 실시해 양반에게도 군포 부과 →
양반을 대신해 양번집 노비 이름으로 납부토록 해 양반 위신은 유지시켜 줌), 환곡(마을 단위로 자체 운영하는 사창제
실시)
흥선 대원군의 통상 수교 거부 정책과 양요
① 배경
◦ 서양 세력에 대한 경계심 고조 : 이양선의 잦은 출몰과 통상 요구, 국내 천주교의 확산, 서양 열강의 베이징 점령 소식,
러시아의 연해주 획득과 접근 등이 위기의식을 고조
◦ 통상 수교 거부 정책 : 서양세력이 통상과 천주교 전파를 통해 침략한다는 의기의식 속에 열강의 통상 요구를 거부하는
정책을 취하고 국방 강화에 힘을 기울여 무기를 개량하고 강화도에 포대를 설치하여 해안 경비를 강화
②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 과정 : 병인박해(1866. 1) ⇨ 제너럴셔먼호 사건(1866. 7) ⇨ 병인양요(1866. 10) ⇨ 오페르트 도굴 사건(1868) ⇨
신미양요(1871) ⇨ 척화비 건립
구분 | 배경 | 과정 |
병인양요 (1866) | 대원군은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국내에서 활동하던 프랑스 선교사를 만나 프랑스와의 원조 교섭 중재를 요구 ⇨ 선교사들의 거부 ⇨ 천주교 반대 여론 속에 9명의 프랑스 신부와 수천 명의 천주교도를 처형(병인박해)⇨ 이를 빌미로 프랑스가 침입 | 극동 함대 사령관 로즈가 이끄는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에 침입 ⇨ 문수산성(한성근 부대)과 정족산성(양헌수 부대)에서 이들을 격퇴 ⇨ 프랑스군이 철수하면서 강화도의 외규장각에 보관 중이던 각종 서적들을 약탈 |
신미양요 (1871) |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통상을 요구하며 행패를 부리다가 평양 군민의 화공으로 격침당한 사건 발생(1866) ⇨ 후에 미국이 이 사실을 알게 됨 | 아시아 함대 사령관 로저스 제독이 이끄는 미국의 함대가 강화도를 침략 ⇨ 초지진과 덕진진을 점령, 광성보 공격 ⇨ 어재연 부대가 분전(어재연 수자기 약탈) ⇨ 미군이 철수 |
③ 척화비 건립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戒我萬年子孫 丙寅作 申未立(서양 오랑캐가 침범했을 때 싸우지 않음은 곧 화의하는 것이요, 화의를 주장하는 것은 곧 나라를 파는 것이다. 이를 자손만대에 경계하노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운다.)
유사 기출문제
내정 개혁 정책
23회 중급 30번 문제
30. 흥선 대원군의 개혁 정책 답③
문제에 제시된 자료에 나타난 내용은 세도 정치로 추락한 왕권을 강화하고 정권을 독점하고 있었던 세도 가문을 포함한 노론 세력을 축출, 약화시키는 한편, 당파, 지역, 신분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골고루 등용하겠다는 것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는 흥선 대원군이 왕권을 강화하여 정치 질서를 재정비하고자 하겠다는 것을 표방한 것이었어요.
흥선 대원군은 집권 후 왕권을 강화하고 국가의 재정을 튼튼히 하는 것을 목표로 한 강력한 개혁 정책을 추진합니다.
안동 김씨를 몰아내고 인재를 고루 등용하였으며, 면세, 면역을 누리며 농민을 괴롭히던 서원을 47개만 남기고 모두 철폐하였어요. 또한 삼정의 문란을 개혁하기 위해 양전 사업, 호포제, 사창제를 실시하였으며, 대전회통을 편찬해 통치 규범을 정비하였습니다.
특히, 세도 정치로 떨어진 왕실의 위엄을 회복하기 위해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경복궁을 중건합니다. 이때 경복궁 중건 비용 마련을 위해 원납전을 거둬들이는 한편, 당백전을 발행하였어요. 그런데 당백전은 상평통보에 비해 명목 가치(액면 가치)는 100배였으나, 실질 가치는 5~6배밖에 되지 않아 물가 폭등(인플레이션)이라는 사회 혼란을 가져왔습니다.
① 속대전은 영조 때 경국대전 시행 이후에 새로이 공포된 중요 법령을 모아 편찬한 법전입니다(1746).
② 과거제가 폐지된 것은 1차 갑오개혁(1894. 7~12) 때입니다.
③ 흥선 대원군은 기존에 상민에게만 부과하던 군포를 양반에게도 부과하는 호포제를 실시하여 조세 납부층을 늘리고
조세 부담을 공평하게 하였습니다.
④ 수원 화성을 축조한 것은 정조입니다.
정조는 화성을 새로이 건설하여 정치적·군사적 기능을 부여함과 동시에, 상공인을 유치하여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는 상징적 도시로 육성하고자 하였습니다.
⑤ 조사 시찰단은 개화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고종이 일본에 비밀리에 파견하였던 사절이었어요.
조사 시찰단은 4개월여 동안 근대 시설과 근대적 법률·조세 제도 등을 살펴보고 돌아와 이에 대한 보고서를 올려
개화 정책에 참고하도록 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③번입니다.
22회 중급 31번 문제
31. 흥선 대원군 집권 시기의 사실 답②
문제에 제시된 자료의 대화 내용 중에 '당백전'이 등장하네요.
당백전은 흥선 대원군 집권 시기에 왕권 강화 정책의 하나로, 경복궁을 중건할 때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주조한 화폐인 것 들어보셨죠? 이것이 실질 가치에 비해 명목 가치가 너무 높아 물가 폭등이라는 부작용을 가져왔다는 것 꼭 알아두세요.
흥선 대원군은 집권 후 왕권을 강화하고 국가의 재정을 튼튼히 하는 것을 목표로 한 강력한 개혁 정책을 추진합니다.
안동 김씨를 몰아내고 인재를 고루 등용하였으며, 면세, 면역을 누리며 농민을 괴롭히던 서원을 47개만 남기고 모두 철폐하였어요. 또한 삼정의 문란을 개혁하기 위해 양전 사업, 호포제, 사창제를 실시하였으며, 대전회통을 편찬해 통치 규범을 정비하였습니다.
특히, 세도 정치로 떨어진 왕실의 위엄을 회복하기 위해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경복궁을 중건합니다. 그런데 경복궁 중건을 위해서는 막대한 비용이 필요했습니다. 당시 국가의 재정으로는 이를 부담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이를 마련하기 위해 1866년부터 당백전이라는 고가 화폐를 발행합니다. 그런데 당백전은 상평통보에 비해 명목 가치(액면 가치)는 100배였으나, 실질 가치는 5~6배밖에 되지 않아 물가 폭등(인플레이션)이라는 사회 혼란을 가져오죠. 결국 당백전 주조는 중지되었어요.
① 병자호란은 인조 때인 1636년에 일어났어요.
③ 속대전은 영조 때인 1745년에 편찬되었던 법전입니다.
④ 나선 정벌은 효종 때인 1654년 1658년 두 차례에 걸쳐 이뤄졌어요.
이는 청의 요청으로 러시아 세력을 물리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한 것입니다.
⑤ 예송 논쟁은 현종 때에 두 차례(기해예송(1659), 갑인예송(1674))이 발생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②번입니다.
20회 중급 32번 문제
32.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 답④
흥선 대원군과 관련하여서는 호포제, 서원 철폐, 경복궁 중건, 양요에 대한 문제가 출제되었습니다.
출제 비중이 높은 주제이니만큼 잘 공부해 두셔야 합니다.
제시된 신문 기사에 '서원을 헐고(서원 철폐)', '흥선 대원군의 정책'이라고 다 나와 있으니, 밑줄 친 정책이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이니 이 정책을 시행한 목적을 찾으면 되겠네요.
흥선 대원군은 영조의 서원 개혁 정책을 참조하여 서원 정리를 단행하였습니다. 원래 서원은 선현에 대한 봉사와 교육을 목적으로 세워졌지만, 면세와 면역의 혜택을 누려 국가 재정을 약화시키고, 제사 비용의 명목 등으로 백성을 수탈하고 있아 당시에 개혁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선, 고종 2년(1865) 3월에 서원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만동묘의 철폐를 명하였습니다. 그러나 서원 철폐는 경복궁 중건 공사와 병인양요를 치르는 동안 실행이 지연되다가, 고종 8년(1871)에 전국에 명을 내려 문묘에 모신 인물에 한하여 각각 서원 1개소씩만 남기고 모두 폐쇄하도록 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유림은 크게 반발하였으나, 명령을 위반하는 군현은 그 수령을 엄벌하고, 반항하는 유생들을 강경하게 추방하여, 결국 전국에 47개소의 서원만 남기고 대부분 철폐되었어요.
이러한 조치는 백성들로부터 환영을 받았고, 약화된 왕권의 강화에 기여하였습니다. 그러나 경복궁 중건에 따른 재정 비용 부담, 호포제 실시, 서원 철폐 등은 유림 세력의 반발을 크게 샀죠. 결국 흥선 대원군은 이들 유림 세력으로부터 배척을 받았고 결정적으로최익현의 상소로 권좌에서 물러나게 됩니다(1873).
ㄱ - 신분제 폐지는 갑오개혁 때 공식화되었습니다.
ㄴ - 서원은 면세와 면역의 혜택이 주어졌기 때문에 국가 재정을 약화시켰죠.
이에 전국에 서원을 정리해 국가 재정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ㄷ - 흥선 대원군은 세도 가문을 견제해 세도 정치를 없앴습니다.
ㄹ - 서원은 제사 비용의 명목 등으로 백성을 수탈하고 있었기에 민생 안정 측면에서 이를 개혁할 필요가 있었죠.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ㄴ, ㄹ로 묶인 ④번입니다.
16회 중급 31번 문제
31. 흥선 대원군의 대내 개혁 정책 답②
(가)에 들어갈 내용은 흥선 대원군이 실시한 내정 개혁 정책이네요.
흥선 대원군의 내정 개혁은 세도 정치에서 기인한 약화된 왕권을 강화하고, 삼정의 문란으로 피폐해진 민생을 안정시키려는 목표를 가지고 추진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두세요.
흥선 대원군은 왕권을 강화하여 정치 질서를 재정비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안동 김씨 일족을 몰아내고 인재를 골고루 등용하였어요. 왕권을 제약하였던 비변사를 축소·격하시키고 유명무실해졌던 의정부와 삼군부를 부활시켜 정치는 의정부에서, 군사는 삼군부에서 담당하도록 하였습니다. 또한 군사력을 증강하였으며, “대전회통”, “육전조례” 등의 법전을 편찬하여 통치 체제를 재정비하였습니다. 왕실의 권위와 위엄을 되찾기 위해 임진왜란 때 불타 버린 경복궁을 중건하였어요.
삼정의 문란으로 피폐해진 민생을 안정시켜 재정 수입을 늘리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였어요. 양전 사업을 실시하여 전정을 바로잡고, 군역 제도를 개혁하여 양인호(양반 포함)를 대상으로 군포를 부과하는 호포제를 시행하였으며, 환곡제를 개혁하여 사창제를 실시하였습니다. 그리고 붕당의 근거지이자 면세, 면역을 누리며 농민을 괴롭히는 것으로 인식되던 서원을 전국의 47개만 남기고 모두 철폐하였어요.
① 세도 정권의 핵심 권력 기구로 왕권을 제약하였던 비변사를 축소·격하시키고 의정부와 삼군부의 기능을 부활시켜
정치는 의정부, 군사는 삼군부에서 담당하도록 하였습니다.
② 양전 사업을 실시하고 토지 대장에서 누락된 땅을 찾아내어 재정 수입을 늘리고자 하였지만, 지계 발급은 대한 제국
당시 실시한 광무 개혁의 내용입니다.
③ 왕실의 권위와 위엄을 되찾기 위해 임진왜란 때 불타 버린 경복궁을 중건하였습니다.
④ 양인 장정에게 인정마다 거두던 군포를 양인 호에 부과하는 호포세를 실시하였어요.
이에 따라 상민에게만 부과하던 군포를 양반에게도 부과하여 납부층을 늘리고 조세 부담을 공평하게 하였어요.
⑤ 관에서 운영하던 환곡제가 고리대와 유사하게 운영되어 폐단이 심해지자, 이를 폐지하고 군현민의 공동 출자로
운영하는 사창제로 개혁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②번입니다.
15회 중급 26번 문제
26. 흥선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의 목적 답④
고종이 즉위(1863)한 시기, 안에서는 전국 각지의 농민들이 봉기하고, 밖에서는 서양 세력이 통상 수교를 요구하며 위협적으로 접근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에 어린 고종을 대신해 정치적 실권을 잡은 흥선 대원군은 안으로는 내정을 개혁하여 왕권을 강화하면서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밖으로는 서양 세력의 침략에 통상 수교 거부 정책으로 단호하게 대응하였어요. 즉, 능력 위주의 인재 등용, 경복궁 중건, 비변사 폐지, 의정부와 삼군부의 기능 회복, 대전회통 편찬 등으로 왕권을 강화하였습니다. 또, 붕당의 근거지로 인식되어 온 서원을 47개소만 남기고 철폐하는 동시에, 농민 봉기의 원인으로 지목된 삼정을 개혁하여 국가 재정을 확충하고 민생을 안정시키려 노력하였습니다.
①, ⑤ 재정 확충을 위해 가장 힘쓴 것이 삼정의 개혁이었어요.
삼정의 문란을 시정하기 위해 양전을 실시하고, 양반에게도 군포를 징수하는 호포제를 실시하였으며, 환곡제를 폐지
하고 사창제를 실시하였습니다.
② 안동 김씨 등 세도 가문을 몰아내고 문벌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였어요.
③ 외세 침략에 대비해 삼수병을 강화하고 강화도 등에 포대를 쌓고 해안 경비를 강화하였으며, 전국의 포수를 모집하여
군사력을 증강하였습니다.
④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 임진왜란 때 불타 버린 경복궁을 중건하였어요.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④번입니다.
통상 수교 거부 정책
33. 신미양요의 배경 답⑤
문제에 제시된 자료에 나타난 내용을 요약하면 '미국 배(군함) 2척이 광성진을 습격해 함락시켰다. 이때 광성진을 지키던 중군 어재연을 비롯한 많은 군사들이 전사하였다.'라는 것입니다.
미군이 강화도 광성진을 침략한 사건은 신미양요입니다.
병인양요(1866.9)가 일어나기 직전에 미국의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 근처까지 올라와 통상을 요구하였습니다. 당시 평안도 관찰사였던 박규수는 조선은 외국과의 통상을 나라에서 금지하고 있다고 말하며 물러갈 것을 요구하였어요. 그러나 이들은 민가를 약탈하고 관리를 잠아 가두는 행패를 부리고 대포와 총을 발사하는 등 난폭한 행동을 하였습니다. 이에 분노한 평양의 주민과 관군이 합세하여 화공으로 제너럴 셔먼호를 공격해 불태워 침몰시켰어요(제너럴 셔먼호 사건, 1866.7).
몇년이 지난 뒤늦게 이 소식을 알게 된 미국은 이 사건을 빌미로 통상을 얻어내기 위해 1871년에 로저스 제독을 파견하였습니다. 로저스 제독은 군함을 이끌고 강화 해협으로 침략해 들어와 초지진과 덕진진을 점령하고 광성보를 공격하였어요. 이때 어재연 등이 이끄는 부대는 광성보에서 미군과 끝까지 싸우다 전멸하였으나, 이후에도 계속된 저항에 결국 미군은 물러났습니다(1871).
① 천주교 박해 사건인 병인박해가 계기가 되어 일어난 사건은 병인양요입니다.
② 조선책략 유포는 이만손 등 영남 유생들이 이에 반대하여 영남만인소를 올리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③ 스티븐스는 제1차 한·일 협약(1904)에 의해 일본에 의해 대한제국의 외교 교문으로 파견되었던 미국인입니다.
이후 스티븐스는 미국에 돌아가서도 일본의 한국 지배를 옹호하는 활동을 펴자, 이에 분노해 장인환은 스티븐스를
사살하였습니다(1908).
④ 별기군은 개화 정책 과정에서 창설된 신식 군대입니다.
⑤ 신미양요는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구실 삼아 미국이 강화도에 침입한 사건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⑤번입니다.
흥선 대원군의 통상 수교 거부 정책과 양요
① 배경
◦ 서양 세력에 대한 경계심 고조: 이양선의 잦은 출몰과 통상 요구, 국내 천주교의 확산, 서양 열강의 베이징 점령 소식,
러시아의 연해주 획득과 접근 등이 위기의식을 고조
◦ 통상 수교 거부 정책: 서양세력이 통상과 천주교 전파를 통해 침략한다는 의기의식 속에 열강의 통상 요구를 거부하는
정책을 취하고 국방 강화에 힘을 기울여 무기를 개량하고 강화도에 포대를 설치하여 해안 경비를 강화
②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 과정: 병인박해(1866. 1) ⇨ 제너럴셔먼호 사건(1866. 7) ⇨ 병인양요(1866. 10) ⇨ 오페르트 도굴 사건(1868) ⇨
신미양요(1871) ⇨ 척화비 건립
구분 | 배경 | 과정 |
병인양요 (1866) | 대원군은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국내에서 활동하던 프랑스 선교사를 만나 프랑스와의 원조 교섭 중재를 요구 ⇨ 선교사들의 거부 ⇨ 천주교 반대 여론 속에 9명의 프랑스 신부와 수천 명의 천주교도를 처형(병인박해)⇨ 이를 빌미로 프랑스가 침입 | 극동 함대 사령관 로즈가 이끄는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에 침입 ⇨ 문수산성(한성근 부대)과 정족산성(양헌수 부대)에서 이들을 격퇴 ⇨ 프랑스군이 철수하면서 강화도의 외규장각에 보관 중이던 각종 서적들을 약탈 |
신미양요 (1871) |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통상을 요구하며 행패를 부리다가 평양 군민의 화공으로 격침당한 사건 발생(1866) ⇨ 후에 미국이 이 사실을 알게 됨 | 아시아 함대 사령관 로저스 제독이 이끄는 미국의 함대가 강화도를 침략 ⇨ 초지진과 덕진진을 점령, 광성보 공격 ⇨ 어재연 부대가 분전(어재연 수자기 약탈) ⇨ 미군이 철수 |
③ 척화비 건립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戒我萬年子孫 丙寅作 申未立(서양 오랑캐가 침범했을 때 싸우지 않음은 곧 화의하는 것이요, 화의를 주장하는 것은 곧 나라를 파는 것이다. 이를 자손만대에 경계하노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운다.)
22회 중급 36번 문제
36. 오페르트 도굴 사건(1868) 답④
흥선 대원군 집권 시기에 일어난 병인박해-제너럴셔먼 호 사건-병인양요(1866_-오페르트 도굴 사건(1868)-신미양요(1871)-척화비 건립에 대한 흐름과 그 내용에 대한 문제도 자주 출제되는 주제입니다.
'덕산 묘지(흥선 대원 군 아버지인 남원군의 묘가 있었던 곳)에서 저지른 사건'을 통해, 이것이 오페르트 도굴 사건에 대한 것임을 바로 파악할 수 있어요.
흥선 대원군은 국내에서 천주교를 반대하는 기운이 높아지자, 그의 정치적 지위를 안정시키기 위해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해 9명의 프랑스 선교사와 함께 수많은 천주교도를 체포해 처형합니다(병인박해, 1866). 프랑스는 자국 선교사의 죽음을 구실 삼아 통상 수교를 요구하며 강화도에 침입하였으나, 한성근과 양헌수 부대의 활약으로 퇴각하였습니다(1866. 병인양요).
이 시기 독일인 오페르트는 조선에 통상을 요구하다가 거절당하자, 충남 예산에 있는 남연군(흥선 대원군의 아버지)의 묘를 도굴하여 이를 볼모로 흥정하려고 계획합니다. 그러나 묘를 도굴하려다 발각되어 달아났습니다(1868). 이 사건을 계기로 조선에서는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이 더욱 강화됩니다.
1871년에는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알게 된 미국 함대가 강화도에 침입하는 신미양요가 일어났어요(1871). 이에 맞서 어재연이 이끈 조선군은 광성보에서 격렬한 전투를 벌였으며, 한때 광성보를 점령하였던 미군은 조선 군민의 강력한 저항에 버티지 못하고 물러갔습니다.
이와 같이 두 차례에 걸친 서양의 침략을 물리친 조선 정부는 서양과의 통상 수교를 반대하는 정책을 백성들에게 알리기 위하여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웠습니다.
① 병인양요는 천주교 박해 사건(병인박해)를 구실 삼아 프랑스가 강화도에 침입한 사건입니다.
②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구실 삼아 미국이 강화도에 침입한 사건입니다.
③ 운요호 사건(1875)은 일본이 조선을 개항할 목적으로 일으킨 것입니다.
일본 군함 운요호는 조선의 허가 없이 부산을 지나 한강 하구 강화도 해안에 정박하였다가 선원 일부가 작은 배로
한강 하구를 거슬러 항해합니다. 초지진 포대에서는 이를 저지하고자 포격을 가하자 기다렸다는 듯 운요호는 함포
사격으로 초지진을 파괴하였으며, 다음날 영종도에 상륙하여 다수의 민간인을 살상하고 관아와 민가를 노략질한 뒤
일본으로 돌아갔습니다. 이후 일본은 조선에 운요호 사건에 대해 책임 문제를 제기하면서 해결책으로 조약 체결을
요구하여 강화도 조약 체결로 이어집니다.
⑤ 제너럴 셔먼호 사건은 병인양요가 일어나기 직전 통상을 요구하며 행패를 부리다가 불에 탄 사건입니다.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는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까지 올라와 통상을 요구하였어요. 조선 관리들은 외국과의 통상을
나라에서 금지하고 있다고 말하며 물러갈 것을 요구하였으나, 이들은 배에서 내려 민가를 약탈하고 관리를 잠아 가두
는 등 행패를 부렸습니다. 이에 분노한 평양의 관민은 제너럴 셔먼 호를 불살라버렸어요.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④번입니다.
20회 중급 31번 문제
31. 병인양요(1866) 당시의 사실 답⑤
문제에 제시된 자료는 천주교 탄압(병인박해)으로 프랑스군이 침입한 사건, 즉 병인양요(1866)와 관련한 자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병인양요 당시 있었던 사실을 찾으면 되겠네요.
고종의 즉위로 집권한 흥선 대원군은 대외 정책에 있어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폈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알고 계시죠?
1860년대 들어 천주교 금지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흥선 대원군은 천주교를 탄압하여 수많은 천주교 신자와 프랑스 선교사 9명을 처형합니다(병인박해, 1866). 이에 프랑스는 자국의 선교사가 처형 당한 것을 구실 삼아 군함을 보내 갑곶진에 상륙해 우수한 화력을 바탕으로 강화읍을 점령합니다. 그러나 서울로 진격하던 프랑스군을 한성근 부대가 문수산성에서, 양헌수 부대는 정족산성에서 물리치니 프랑스군은 약 1개월 만에 철수했어요(병인양요, 1866)
당시 강화도에는 1782년에 정조가 왕실 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설치한 외규장각이 있었어요. 규장각의 부속 도서관 역할을 하던 이곳에는 왕실이나 국가 주요 행사의 내용을 정리한 의궤(儀軌)를 비롯해 총 1000여 권의 서적을 보관해왔습니다. 그런데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이곳 외규장각에 보관 중이던 의궤를 비롯한 각 종 도서 등 귀중한 문화유산과 재물을 약탈하고 불을 지르고 후퇴하였습니다.
① 고종이 헤이그 만국 평화 회의에 특사를 파견해 을사조약이 불법임을 세계에 알리고자 하였는데, 일제는 이를 구실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켰어요(1907).
② 강화도 조약이 체결된 것은 1876년입니다.
③ 영국은 조선이 러시아와 가까워지는 것을 막는다는 구실로 1885~1887년까지 거문도를 불법 점령하였습니다.
④ 어재연 장군이 광성보에서 전사한 것은 미군이 강화도에 침입한 신미양요(1871) 때의 일입니다.
⑤ 병인양요 당시 한성근 부대는 문수산성에서, 양헌수 부대는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을 각각 물리쳤어요.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⑤번입니다.
19회 중급 27번 문제
27. 흥선 대원군의 통상 수교 거부 정책 답⑤
3점 배점 문제라고 하기에는 쉬운 문제죠?
'양요', '척화비'만 보고 바로 흥선 대원군의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흥선 대원군은 안에서는 전국 각지의 농민들이 봉기하고, 밖에서는 서양 세력이 통상 수교를 요구하며 위협적으로 접근하는 상황에서 집권하였습니다(1863~1873). 이에 흥선 대원군은 안으로는 내정을 개혁하여 왕권을 강화하면서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켰습니다. 밖으로는 서양 세력의 침략에 통상 수교 거부 정책으로 단호하게 대응하였으며,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를 거치면서 전국에 척화비를 세우고,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더욱 확고하게 유지하였어요.
그러나 이러한 대외 정책은 외세의 침략을 일시적으로 저지하는 데에는 성공하였으나, 조선의 문호 개방을 늦춰 근대 국가로의 발전을 저해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습니다.
① 백두산 정계비와 관련된 탐구 주제로 적합합니다.
② 강화도 조약의 내용과 관련된 탐구 주제입니다.
③ 19세기 들어서의 항일 의병 운동은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처음 일어났어요.
⑤ 제시된 내용은 흥선 대원군이 통상 수교 거부 정책과 관련된 탐구 주제들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⑤번입니다.
18회 중급 29번 문제
29. 신미양요의 원인이 된 제너럴 셔먼호 사건(1866) 답①
문제에 제시된 자료는 평양 감사 박규수가 올린 장계이고 그 내용은 '대동강을 거슬러 와 평양에 정박한 이양선이 총포를 쏘고 행패를 부리자 불을 질러 배를 태워버렸다'는 것이네요.
이는 제너럴 셔먼호 사건입니다.
그럼 제너럴 셔먼호 사건과 관계된 학습 주제를 찾으면 되겠네요.
병인양요(1866.9)가 일어나기 직전에 미국의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 근처까지 올라와 통상을 요구하였습니다.
이에 평안도 관찰사였던 박규수는 외국과의 통상을 나라에서 금지하고 있다고 말하며 물러갈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민가를 약탈하고 관리를 잠아 가두는 행패를 부리고 대포와 총을 발사하는 등 난폭한 행동을 하였습니다. 분노한 평양의 주민과 관군이 합세하여 화공으로 제너럴 셔먼호를 불태워 침몰시켰어요(제너럴 셔먼호 사건, 1866.7).
뒤늦게 이 소식을 알게 된 미국은 이 사건을 빌미로 통상을 트기 위해 1871년에 로저스 제독을 파견하였습니다. 로저스 제독은 군함을 이끌고 강화 해협으로 침략해 들어와 초지진과 덕진진을 점령하고 광성보를 공격하였어요. 이에 어재연 등이 이끄는 부대는 광성보에서 미군과 끝까지 싸우다 전멸하였으나, 이후에도 계속된 저항에 미군은 물러났는데, 이를 신미양요라고 합니다(1871).
② 메이지 유신(1868) 후 일본은 조선과 새로운 외교 관계를 맺으려 했으나, 조선은 일본이 보낸 외교 문서가
무례하다며 이를 물리친 서계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에 일본은 무사 계층의 불평을 해외로 돌리기 위해 조선을 무력으로 침공하자는 정한론이 일어났으며, 이는
운요호 사건으로 이어졌습니다.(1875)
③ 병인양요(1866.9)와 관계 있는 사실입니다.
당시 강화도에 침입한 프랑스 군은 외규장각 등을 불태우고 의궤와 금, 은 등을 약탈해 갔습니다.
우리나라가 꾸준히 반환을 요청한 외규장각 도서는 이때 약탈해 간 것이었습니다.
④ 개항 후 정부가 추진한 개화 시책의 하나입니다.
정부는 개화 정책에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일본에 조사 시찰단을 파견해(1881) 근대 시설과 산업 시설을
돌아 보고 각 분야별로 보고서를 작성하여 제출케 하였습니다.
⑤ 오페르트 도굴 사건은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강화하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두 차례 통상을 요구하다가 거절 당한 독일인 오페르트는 1868년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충남 덕산)
를 도굴하려다 발각되자 달아났는데, 이를 계기로 서양인을 오랑캐로 보는 풍조가 널리 퍼졌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①번입니다.
17회 중급 30번 문제
30. 병인양요(1866) 답⑤
(가)에 들어갈 사건은 문제에 제시된 자료에 '병인일기', '1866년', '프랑스가 강화도를 침략한 사건'이라는 내용을 통해 병인양요임을 알 수 있습니다.
양헌수는 병인양요(1866) 때에 강화도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을 격퇴한 장군입니다.
흥선 대원군은 처음에는 천주교에 대해 비교적 관대하였어요.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천주교 선교사를 통하여 프랑스 세력을 끌어들이고자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고, 유생들이 천주교 금지를 강력히 요구함에 따라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가해 9명의 프랑스 선교사와 8천여 명의 신자들을 처형하였습니다(병인박해, 1866).
그해 프랑스는 병인박해 때의 자국의 선교사 처형을 구실로 문호를 조선에 개방할 것을 요구하며 무력으로 침략해 왔습니다. 프랑스군은 양화진까지 들어왔다가 강화도에 침입하여 강화부를 점령하자 한성근 부대는 문수산성에서, 양헌수 부대는 정복 산성에서 프랑스군과 전투를 벌였습니다. 양헌수 부대의 활약으로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에서 사상자가 나오자 프랑스군은 결국 모두 퇴각하였습니다. 퇴각하던 프랑스군은 외규장각 등을 불태우고 의궤와 금, 은 등을 약탈해 갔습니다.이 사건을 병인양요라고 합니다(1866).
① 임오군란(1882)과 갑신정변(1884)에 해당하는 설명입니다.
② 통신사는 개항 이전 조선에서 일본에 파견되었던 사절단이었습니다.
③ 신미양요(1871)에 대한 설명입니다.
신미양요 때에는 어재연 등이 이끄는 부대가 광성보에서 미군을 막아 내었습니다.
④ 북인 정권은 광해군 때 집권하였으며, 서인이 일으킨 인조반정(1623)으로 몰락하였습니다.
⑤ 병인양요는 천주교 박해 사건인 병인박해가 계기가 되어 일어났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⑤번입니다.
15회 중급 27번 문제
27. 신미양요(1871)와 관련된 자료 답⑤
병인양요(1866)에 앞서 미국의 상선 제너럴 셔먼 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평양 가까이 와서 통상을 요구하며 행패를 부리다 분노한 평양의 관민에 의해 불에 탄 사건이 있었습니다.
후에 이 사실을 알게 된 미국 함대가 강화도에 침입하였어요(신미양요, 1871). 이에 맞서 어재연이 이끈 조선군은 광성보에서 격렬한 전투를 벌였습니다. 한때 광성보를 점령하였던 미군은 조선 군민의 강력한 저항에 버티지 못하고 물러갔어요. 이때 어재연 장군의 수(帥)자기가 미군이 가져갔는데, 최근에 이를 우리나라에 영구 임대 형식으로 돌려줬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⑤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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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자세한 설명 정말 감사합니다~ㅎㅎ
제너럴 셔먼호 사건, 병인양요, 신미양요 정확히 알아야 될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자세한 설명 감사합니다.
흥선대원군 시기 문제는 꼭 한문제씩 나오는 것 같네요 ^^
댓글은
감사합니다....라는 글은 달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문제에 대한 난이도, 자료 등에 대한 느낌이나
개인적인 문제풀이 접근법 등을 달아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유의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댓글 단 분은 등업 안됩니다.
예전에 배웠던 역사와 같은 내용인데...문제가 넘 고급틱하네요...단순암기는 꿈도 못꾸겠지만 ...열심히 해여겠어요~~
해설 내용과 유사기출 문제 내용만 꼼꼼히 정리해도, 흥선대원군이라는 인물과 관련사건들이 유기적으로 정리가 되네요^^
감사합니다.
예전에 배운 건데 기억이 안 나네요. 그리고 화폐 문제가 자주 나오는 것 같아요ㅎㅎ
이제 처음하는건데...ㅋㅋㅋㅋ어려워요
중급인데..어렵네요....ㅠㅠㅠㅠ
개화기의 전체적인 흐름을 알아야만 할 것같네요. 신미양요라던가 흥선대원군 문제를 보면 딱 정해진 틀이 있다기보다는 흐름과 의의를 이해해야 쉽게 풀 수 있게끔 출제가 되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ㅎㅎ
한국사 공부하면 할 수록 너무 재밌는 거 같아요~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와.. 한눈에 보기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