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최익현(1833~1907)의 활동 답④
‘1873년 계유 상소(흥선 대원군을 물러나게 한 상소)’, ‘1906년 전북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켰다가 체포되어 대마도에서 순국’이라는 사실을 통해 최익현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최익현은 위정척사 사상을 가진 대표적 인물이었으니, 그의 활동도 위정척사 운동과 흐름을 같이 합니다. 일찍이 서원 철폐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흥선 대원군을 물러나게 하였고, 강화도 조약 체결 전후에는 왜양일체론을 내세워 개항 5불가소를 올렸습니다. 이러한 활동으로 그는 유배를 자주 당하였어요.
을미개혁 당시 단발령에 반발해 궐기하려다 체포되었으며, 이때부터 1904년까지 고종은 계속해 관직을 내렸으나 모두 사직하였습니다. 그러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청토오적소'를 올려 조약의 무효와 박제순 등 어적을 처단할 것을 주장하였어요. 다음해에는 ‘창의토적소’를 올려 의거의 심경을 토로하고 8도 사민(士民)에게 포고문을 내어 항일 투쟁을 호소하였습니다. 자신도 74세의 고령으로 임병찬 등 제자들과 함께 전북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켜 정읍·순창 일대를 장악하였어요. 남원에서 관군과 마주치자 관군에게 의병에 합류할 것을 권하였으나 이를 수용하지 않자 같은 동포끼리 서로 싸울 수 없다며 결국 의병을 해산시키고 체포됩니다. 서울로 압송되었다가 일제에 의해 재판을 받고 대마도로 유배되었으며, 적이 주는 음식물을 먹을 수 없다며 단식을 하다 그곳에서 순국하였습니다. 이에 그의 시신이 우리나라로 운구될 때 수선사에 하룻밤을 머물렀는데, 1986년 한국인과 일본인이 힘을 합쳐 여기에 순국비를 세웠어요.
① 서재필은 갑신정변에 참여하였다가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하였으며, 갑오개혁을 계기로 사면을 받고 1895년
12월에 입국하였으며, 다음해 1월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습니다(중추원은 당시 내각의 자문 기관).
그는 개화 관료 및 지식인들과 함께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 협회를 창립하여 민중을 계몽, 자주 독립 사상을 고취
하고자 하였습니다.
② 박규수는 평양 감사로 있을 당시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까지 올라와 통상을 요구하며
행패를 부리자 군민과 함께 이를 불태웠습니다(1866). 이는 훗날 신미양요의 원인이 되었어요.
③ 임병찬은 스승 최익현과 함께 대마도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난 후 고종의 밀지를 받고 전국의 의병장과 유생들을
모아 비밀리에 독립의군부를 조직하였습니다(1912).
이 단체는 복벽주의 이념에 따라 국권을 회복한 후 고종을 복위시키려는 목표를 가졌으나 발각되어 해체되었어요.
④ 최익현은 강화도 조약 체결에 반대하며 지부복궐척화의소(도끼를 가지고 대궐 앞에 엎드려 척화의 상소를 올리며
답을 기다리는 것, 즉, 죽기를 각오하고 올리는 상소)를 올렸다가 흑산도로 유배당하였어요.
⑤ 이인영은 정미의병(1907) 때 원주에서 관동창의대장이 되어 활동하다가 양주에서 각지 의병과 13도 연합 부대(13도
창의군)를 편성하여 자신이 총대장, 허위를 군사장으로 하여 서울 진공 작전을 펼쳤어요(1908).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④번입니다.
위정척사 운동의 흐름
시기 | 배경 | 내용 |
1860 년대 | 서양 열강의 통상 요구 | 통상 반대 운동(척화주전론) → 이항로·기정진, 흥선 대원군의 통상 수교 거부 정책 지지 |
양이의 화가 금일에 이르러 비록 홍수나 맹수의 해로움일지라도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부지런히 힘쓰시고 경계하시어 안으로 관리들로 하여금 사학의 무리를 잡아 베시고, 밖으로 장병으로 하여금 바다를 건너오는 적을 정벌하게 하소서. - 이항로 상소문 - | ||
1870 년대 | 문호 개방(강화도 조약) | 개항 반대 운동(왜양일체론) → 최익현, 유인석 |
저들의 물화는 지나치게 사치스럽고 기이한 노리개이고 그 양이 무궁한 데 반하여 우리의 물화는 백성들의 생명이 달린 것이고 땅에서 나는 것으로 유한한 것입니다. …… 저들의 물화와 교역한다면 우리의 심성과 풍속이 패퇴될 뿐만 아니라 …… 불과 몇 년 안 가 땅과 집이 모두 황폐하여 다시 보존하지 못하게 될 것이니 이에 따라 나라 또한 망하게 될 것입니다. - 최익현 상소문 - | ||
1880 년대 | 개화 정책 추진, <조선책략> 유포 | 개화 반대 운동, <조선책략> 유포 반대 → 이만손의 영남 만인소, 홍재학의 만언 척사소 |
○중국은 우리가 신하의 예로써 섬기는 바이며 해마다 옥과 비단을 수레로 보내어 삼가 신의와 절도를 지키고 그 직분에 충실한지가 벌써 200년이나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무엇을 더 친할 것이 있겠습니까? ……러시아, 미국, 일본은 다같은 오랑캐입니다. 그들 사이에 누구는 후하게 대하고 누구는 박하게 대하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 영남 만인소- ○대개 서양의 학문은 천리(天理)를 어지럽히고 기강을 소멸시킴이 심함은 다시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서양의 물건은 태반이 음탕하고 욕심을 유도하며, 윤리와 강상을 깨뜨리고 사람의 정신을 어지럽히며, 천지에 거역하는 것들입니다. 서양의 학문과 물건은 귀로 들으면 창자가 뒤틀리고 …… 또한 십자가의 상을 받들지 않는다 해도 예수교의 책을 읽게 되면 성인에게 죄를 얻는 시작입니다. - 홍재학 상소문 - | ||
1890 년대 | 을미사변과 단발령 | 항일 의병 운동(을미의병) 전개 → 유인석, 이소응 |
상투가 있고 없음에 따라 중화와 오랑캐, 인간과 짐승이 구분되고,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를 지킬 수 있느냐 없느냐가 달려 있으니, 머리가 만 번 갈라질지언정 상투는 한 번도 잘릴 수 없고 - 유인석 - |
항일 의병 전쟁의 전개
을미의병(1895) | 을사의병(1905) | 정미의병(1907) | |
계기 | 을미사변과 단발령 | 을사조약 | ◦ 고종의 강제 퇴위, ◦ 군대 해산 |
의병장 | 유생 의병장(유인석, 이소응) | ◦ 유생 의병장(민종식, 최익현) ◦ 평민 의병장(신돌석) | 평민 의병장 증가(홍범도) |
특징 | ◦ 동학 농민군의 잔여 세력 가담 ◦ 친일 내각 붕괴, 단발령 철회, 고종의 해산 조칙으로 자진 해산 | 평민 의병장 등장(신돌석) | ◦ 해산 군인 합류로 전투력 증강 ◦ 전국적인 규모로 전개 ◦ 13도 창의군 서울 진공 작전 전개 ◦ 국내 진공 작전(홍범도, 이범윤) |
미래엔 한국사 교과서 인용
유사기출문제
위정척사 운동
25회 고급 36번 문제
36. 영남만인소 답①
제시된 자료의 '영남에 있는', '수신사 김홍집이 가지고 온 황준헌의 사의조선책략 유포', 그리고 '만인소'라는 출처에서, 영남 유생들이 조선책략과 그 내용에 반발하여 올린 영남만인소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2차 수신사(1880)로 일본에 파견된 김홍집은 주일 청국 공관에 왕래하며 청의 외교관 황준헌 등을 만나 외교 정책 등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죠. 황준헌은 김홍집이 귀국할 때 자신이 저술한 조선책략을 전해줍니다. 이 책에는 조선에 가장 위협적인 세력은 러시아이며, 조선은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중국, 일본, 미국과 연합(친중국 결일본 연미국)해야 한다고 제시되어 있었어요. 이는 당시 조선이 미국과도 외교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것을 제시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김홍집이 귀국해 이 책을 올리자 고종은 이 책을 대신들은 물론 전국의 유생들에게도 배포하였어요. 그러자 정부의 개화 정책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유생들은 이에 반발합니다. 특히, 영남 유생들은 이만손을 중심으로 공동으로 상소, 즉 영남 만인소를 올려 이 책의 내용을 조목조목 비판합니다(1881).
그 내용을 요약하면 "중국은 이미 우리가 오래전부터 예를 다해 섬겼던 나라니 더 친할 것이 무엇이고, 일본은 오래전부터 우리의 원수이며, 미국은 우리가 모르는 나라인데 이들을 끌여들였다가 해를 입을 수도 있고, 러시아는 우리와 별 혐의가 없는데, 이들을 까닭없이 배척하다가 분쟁의 구실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러시아, 일본, 미국은 같은 오랑캐이니 누구를 후하거나 박하게 대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었어요.
그러나 이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조선에서도 미국과 조약을 맺어 근대적 제도와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되어, 결국 청이 조선과 미국의 수교를 적극 알선하면서 미국과 수호 통상 조약을 체결합니다(1882).
① 영남 유생들은 영남 만인소를 통해 러시아를 막기 위해 미국과 수교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적극 반대하였어요.
② 의회 설립과 자유 민권 운동을 편 것은 독립협회입니다.
③ 갑신정변 당시 개화당이 제시한 14개조의 개혁정강에 해당하는 설명입니다.
유생들은 성리학적 사회 질서를 지키고자 하였으니, 신분제 폐지 등에는 절대 반대하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어요.
④ 폐정 개혁안은 동학 농민 운동 당시 농민군이 제시한 것으로, 이는 갑오개혁에 일부가 반영되었습니다.
⑤ 한반도 중립화론은 거문도 사건(1885) 등으로 조선을 둘러싼 열강의 대립이 격화되는 상황 속에서 조선 주재 독일
외교관 부들러, 그리고 조선의 유길준이 제안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①번입니다.
22회 고급 31번 문제
31. 영남만인소에 나타난 미국 답⑤
황준헌은 조선책략에서 조선은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친중국 결일본 연미국', 즉 중국, 일본, 미국과 연합해야 한다고 제시하였어요. 제시된 자료는 조선책략의 내용에 반발하여 올린 글이니, 이만손 등 영남 유림들이 올린 상소, 즉 영남 만인소(1881)임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제시된 자료의 (가)에 들어갈 나라에 대한 설명을 보면, '우리가 평소 잘 모르던 나라'라고 했으니, 청과 일본은 아니네요. 그리고 '저들의 권유를 받아들여 끌여들여야 하는 나라'라고 했으니 러시아도 아니니, 미국임을 알 수 있어요.
따라서 미국과 관련한 내용을 찾으면 되겠네요.
19세기 후반 러시아는 베이징 조약을 통해 연해주를 획득(1860)하고 조선과 국경을 접하게 됩니다. 일본은 강화도 조약을 통해 조선과 수교를 맺은 상태였구요. 이에 청은 러시아의 남하와 일본의 영향력 확대를 견제하고 조선에서의 영향력을 키우려고 의도하고 있었습니다.
이 시기 2차 수신사(1880)로 일본에 파견된 김홍집은 주일 청국 공관에 왕래하며 청의 외교관 황쭌셴 등을 만나 외교 정책 등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죠. 황쭌셴은 김홍집이 귀국할 때 자신이 저술한 조선책략을 전해줍니다. 이 책의 주요 내용은 조선에 가장 위협적인 세력은 러시아이며, 조선은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중국, 일본, 미국과 손을 잡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외교 관계가 없는 미국과도 외교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것을 제시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김홍집은 귀국해 고종에게 <조선책략>을 올립니다. 고종은 이 책을 대신들에게 검토하게 하면서 전국의 유생들에게도 배포하였어요. 그러자 정부의 개화 정책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유생들은 이에 반발합니다. 특히, 영남 유생들은 이만손을 중심으로 공동으로 상소, 즉 영남 만인소를 올려 이 책의 내용을 조목조목 비판합니다(1881).
그러나 이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조선에서도 미국과 조약을 맺어 근대적 제도와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됩니다. 신미양요를 일으켜 통상 조약을 체결하려다 실패한 미국도 조선에 진출하기 위한 기회를 모색하고 있었죠. 이에 청은 조선과 미국의 수교를 적극 알선하면서 서양 국가들 가운데 최초로 수호 통상 조약을 체결합니다(1882).
19세기 후반~20세기 초 우리나라와 미국과 관련된 주요 사건도 알아보죠.
먼저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오며 통상을 요구하였어요. 이들이 행패를 부리자 성난 평양 군민들이 이를 불태운 제너럴 셔먼호 사건(1866)이 있구요. 이를 배경으로 미군이 강화도에 침입한 신미양요(1871)가 있습니다. 그리고 청의 알선으로 1882년에 서양 국가들 중 최초로 미국과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을 체결하였죠. 이 조약에는 관세 부과, 거중 조정 조항, 최혜국 대우 조항 등이 반영되었어요. 아관파천을 전후한 시기에 운산 금광 채굴권, 경인선 철도 부설권, 전등·전화·전차 부설권 등의 이권을 침탈했죠.
20세기 초에는 러·일 전쟁 때 포츠머스 강화 조약을 중재하였고, 일본과 가쓰라·태프트 밀약(1905)을 통해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승인하는 모습을 보였죠.
① 영국에 대한 설명입니다.
갑신정변 직후 조선은 청의 지나친 내정 간섭에서 벗어나려고 러시아와 외교 관계를 강화하고자 하였습니다.
이에 조선에서의 러시아의 세력 확장을 우려한 영국이 거문도를 불법 점령(거문도 사건, 1885~1887)하였어요.
② 러시아에 대한 설명입니다.
1897년 러시아는 저탄소(선박 연료인 석탄을 보관하는 장소)를 설치를 위해 절영도(오늘날 부산 영도)를 조차하려고
시도합니다. 그러나 독립협회가 이권 수호 운동을 펼쳐 이를 좌절시켰어요.
③ 프랑스가 일으킨 병인양요(1866)에 대한 설명이네요.
프랑스는 병인박해 때 프랑스 선교사가 순교한 것을 이유 삼아 강화도에 침입합니다.
이때 프랑스가 강화 행궁 외규장각에 보관되던 많은 수의 의궤를 약탈하여 자국으로 약탈해 갔습니다.
④ 일본에 대한 설명입니다.
1873년에 고종의 친정으로 흥선 대원군이 물러나고 민씨 세력이 집권하자 일본은 한반도 침략을 노리며 운요호 사건
(1875)을 일으켰죠. 이를 계기로 일본은 조선에 문호 개방을 강요해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였습니다(1876).
⑤ 미국이 일으킨 신미양요(1871)에 대한 설명입니다.
미국은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빌미로 통상을 요구하며 강화도로 침략하였다가 어재연 등의 분전으로 물러갔죠.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⑤번입니다.
21회 고급 39번 문제
22. 위정척사 운동의 흐름 답④
위정척사 운동은 먼저, 개항 반대→개화 반대→의병 운동으로 흐름이 이어졌다는 것을 알아두세요.
따라서 제시된 자료에서 이 내용을 생각하고 풀면 됩니다.
(가)는 이만손 등 영남 유림들이 올린 상소, 즉 영남 만인소(1881)입니다.
일본에 2차 수신사(1880)로 다녀온 김홍집이 귀국할 때 청의 외교관 황쭌셴이 저술한 <조선책략>을 가지고 귀국해 이를 고종에게 바칩니다. 이 책의 주요 내용은 조선에 가장 위협적인 세력은 러시아이며, 조선은 러시아의 남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중국, 일본, 미국과 손을 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외교 관계가 없는 미국과도 외교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고종이 이를 전국에 유포하자, 이에 반발하여 영남 유림들이 공동으로 상소를 올렸는데, 이것이 영남 만인소입니다.
(나)는 이항로가 올린 척화주전 상소(1866)입니다.
병인양요(1866)가 일어나자 기정진, 이항로 등은 서양의 통상 요구를 반대하며 서양의 무력 침략에 맞서 싸우자는 척화주전론(斥和主戰論)을 폈습니다. 이들은 서양 열강이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조선을 이용하고 약탈할 뿐 아니라 백성을 짐승으로 만들 것이라고 주장하여 사회의 각계 각층에서 폭넓은 호응을 얻었으며, 흥선 대원군의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뒷받침하였습니다.
(다)는 최익현이 올린 개항 반대 상소(1876)입니다.
1870년대 들어 일본이 운요 호 사건을 일으켜 조선에 개항을 요구하자 최익현을 비롯한 유생들은 일본은 이미 서양에 문호를 개방하였으므로 서양 세력과 다를 것이 없다는 왜양일체론을 주장하며 일본과의 수교를 반대하였어요.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나)-(다)-(가)로 연결된 ④번입니다.
20회 고급 22번 문제
22. 위정척사파 답②
위정척사 운동과 관련한 문제는 조선책략과 관련하여 가장 많이 출제되었고 의병 운동에 대한 문제로 출제되었어요.
그리고 답지의 일부로 출제되었습니다.
제시된 자료의 핵심은 '양적(서양 세력, 프랑스)의 침입에 국론이 교(화의)와 전(싸움)으로 양분되어 있는데, 싸우자는 주장은 내 나라 사람이고, 화친해야 한다는 주장은 적국 사람이다. 싸워 물리치면(척사, 척화 주전론) 조선의 문화와 전통을 보전할 수 있다(위정)'는 것이네요.
이를 통해 위정척사 사상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자료의 출전도 "화서집"이라고 명시되어 있으니, 병인양요 당시 이항로가 올린 척화주전의 상소임을 알 수 있어요.
흥선 대원군이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펼 때 그리고 정부의 개화 정책 추진에 대해 전통적인 유생층은 성리학적 전통 질서를 지키고(위정) 외세를 배척하자(척사)는 위정척사((衛正斥邪))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이들은 개항과 개화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정부의 정책에 반발하였고, 일제의 침략적 행위에는 의병 운동을 폈습니다.
그 흐름을 살펴 보죠.
1860년대 들어 천주교가 유포되고 서양 세력의 통상 요구가 거세어지자 유생들은 이에 대한 반대 운동을 폈습니다.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기정진, 이항로 등은 서양의 통상 요구를 반대하며 서양의 무력 침략에 맞서 싸우자는 척화주전론(斥和主戰論)을 폈습니다. 이들은 서양 열강이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조선을 이용하고 약탈할 뿐 아니라 백성을 짐승으로 만들 것이라고 주장하여 사회의 각계 각층에서 폭넓은 호응을 얻었으며, 흥선 대원군의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뒷받침하였습니다.
1870년대에는 일본이 조선에 개항을 요구하자 최익현을 비롯한 유생들은 일본과의 수교를 반대하는 개항 반대론을 주장하였습니다. 일본은 이미 서양에 문호를 개방하였으므로 서양 세력과 다를 것이 없다는 왜양일체론을 주장하며 강화도 조약 체결에 반대하였어요.
1880년대에는 정부가 개화 정책을 추진하면서 ‘조선책략’을 유포하고 미국과 통상 조약을 체결하려 하자 유생들은 집단 상소를 올려 반발하였습니다. 이만손을 중심으로 한 영남 유생들은 ‘만인소’를 올려 "조선책략"에서 제시한 내용들을 나라별로 조목조목 비판하였습니다. 이를 계기로 유생들이 전국적으로 상소를 올려 정부의 개화 정책을 비판하였습니다.
1890년대 들어서는 명성 황후 시해와 단발령 실시에 반발해 의병(을미의병)을 일으키며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는 의병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① 문명 개화론은 서양의 근대 기술 문화뿐만 아니라, 사상이나 제도까지 수용하자는 주장입니다.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은 일본의 메이지 유신과 문명 개화론에 영향을 받아 급진 개화파를 형성하였으며,
민영익, 김홍집, 김윤식 등은 청의 양무 운동을 본받아 동도서기론의 입장의 온건개화파로 분화되었어요.
③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민영익, 유길준 등의 개화 사상가들은 박규수의 영향을 받았어요.
박규수와 오경석, 유대치 등은 일찍부터 통상 개화의 필요성을 주장하였어요.
이들의 영향을 받은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민영익, 유길준 등 젊은 양반 지식인들은 박규수의 사랑방에 모여 개화에
대한 지식을 키워 갔으며, 문호 개방을 전후하여 개화파라는 하나의 정치 세력을 형성합니다.
④ 조사 시찰단으로 파견된 박정양, 어윤중, 홍영식, 유길준 등은 개화파 관료들이었어요.
⑤ 통리기무아문은 1880년에 정부가 개화 정책을 주관하기 위해 설치한 기구로, 그 밑에 12사를 두었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②번입니다.
19회 고급 31번 문제
31. 조선책략 답③
조선책략과 관련하여서는 조선책략의 내용과 끼친 영향, 조선책략에 나타난 나라들에 대한 사실들이 문제로 출제됩니다.
청의 관리 황쭌셴이 저술한 조선책략은 2차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김홍집이 귀국할 때 가져와 고종에게 올렸으며,
고종이 조선책략을 배포하자 이에 반대하여 이만손을 비롯한 영남 유생들이 주축이 되어 위정척사 운동을 벌여 영남만인소를 올렸으며,
이 책에는 조선에 위협적인 러시아를 막기 위해서 조선은 '친중국 결일본 연미국' 해야 한다는 내용이 쓰여져 있는데, 이에 따라 중국의 중계로 서양 국가 중 최초로 미국과 수교를 하였다는 것을 알아두면 됩니다.
2차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김홍집은 청의 외교관 황쭌셴이 쓴 <조선책략>을 가지고 와 고종에게 올립니다(1880).
이 책에는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조선은 중국, 일본, 미국과 손을 잡아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고종은 이 책을 대신들에게 검토하게 하면서 전국의 유생들에게도 배포하였습니다.
그러나 1880년대에 개화 정책이 추진에 반발하던 유생들은 <조선책략>이 유포되자 영남 유생들은 이만손을 중심으로 집단 상소인 만인소를 올려(1881) 정부의 개화 정책과 서양과의 수교 추진에 격렬하게 반발하였습니다.
이 당시 러시아는 연해주를 획득(1860)하고 조선과 국경을 접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은 이미 강화도 조약을 체결(1876)하여 조선과 수교하고 세력을 넓히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청은 러시아의 남하와 일본의 영향력 확대를 견제하기 위해 조선과 미국의 수교를 적극 알선하였습니다.
결국 유생들의 반대 속에서도 미국과 조약을 맺어 근대적 제도와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되면서 서양 국가들 가운데 최초로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을 체결하였습니다(1882).
ㄱ -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조약은 강화도 조약(1876)으로 조선책략 유포(1880) 이전의 사실입니다.
ㄴ - 이만손을 중심으로 한 영남 유생들은 조선책략 유포와 개화 정책에 반대하며 영남 만인소를 올렸습니다.
ㄷ - 청의 외교관이었던 황쭌셴은 이 책에서 조선이 러시아를 막기 위해서 중국, 일본, 미국과 손잡아야 한다고 했어요.
당시 조선은 중국과 일본과는 외교 관계를 맺고 있었으니, 이는 미국과 수교를 하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봐야죠.
ㄹ - 최익현이 왜양일체론을 주장한 것은 강화도 조약 체결 시기입니다.
일본이 조선에 개항을 요구하자 유생들은 일본이 서양에게 문호를 개방하였으므로, 서양 세력과 다를 것이 없다는
왜양일체론을 주장하며 일본과의 수교를 반대하였습니다.
특히, 최익현은 개항 5불가소를 올려 일본과 서양에 대한 문호 개방이 가져올 위험을 예리하게 지적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ㄴ, ㄷ으로 묶인 ③번입니다.
16회 고급 33번 문제
33. 영남만인소의 등장 배경(조선책략) 답⑤
문제에 제시된 자료도 엄청 많이 본 사료죠?
이 문제도 위정척사 운동과 관련하여 자주 출제되는 주제 중에 하나입니다.
중국, 미국, 일본, 러시아에 대한 평가를 하는사료가 나오면 이만손의 영남만인소, 이 상소는 <조선책략> 유포를 배경으로 나온 것이다라고 공식처럼으로 알아두세요.
2차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김홍집은 청의 외교관 황쭌셴이 쓴 <조선책략>을 가지고 와 고종에게 올립니다. 이 책에는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조선은 중국, 일본, 미국과 손을 잡아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고종은 이 책을 대신들에게 검토하게 하면서 전국의 유생들에게도 배포하였습니다.
그러나 1880년대에 개화 정책이 추진에 반발하던 유생들은 <조선책략>이 유포되자 영남 유생들은 이만손을 중심으로 집단 상소인 만인소를 올려(1881) 정부의 개화 정책과 서양과의 수교에 격렬하게 반발했지만, 미국과 외교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주장이 점차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 당시 러시아는 연해주를 획득(1860)하고 조선과 국경을 접하고 접근해 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미국은 조선에 진출하기 위한 기회를 모색하고 있었죠.
이에 청은 러시아의 남하와 일본의 영향력 확대를 견제하기 위해 조선과 미국의 수교를 적극 알선하였습니다. 조선에서도 미국과 조약을 맺어 근대적 제도와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되면서 서양 국가들 가운데 최초로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을 체결하였습니다(1882).
①~④번은 시기상으로 문제에 제시된 주장(1881) 이후의 일입니다.
① 삼국 간섭은 청·일 전쟁 승리 후 일본이 청으로부터 랴오둥(요동) 반도를 할양받자 이 지역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러시
아가 프랑스, 독일과 함께 일본에게 랴오둥 반도를 청에게 돌려주도록 압력을 넣어 반환하게 만든 것입니다(1895).
② 한반도 중립화론은 갑신정변 이후 거문도 사건 등으로 조선을 둘러싼 열강의 대립이 격화되자, 조선 주재 독일 외교관
인 부들러, 유길준이 구상하였습니다(1885).
③ 동학 농민 운동 당시 군대를 보낸 일본은 조선의 철수 요구에도 불구하고 조선에 대한 간섭을 유지하기 위해 경복궁을
점령하고 내정 개혁을 강요하였습니다(1894).
④ 조·미 수호 통상 조약 체결에 따라 조선 주재 미국 공사가 파견되자 정부는 미국에 보빙 사절단을 파견했어요(1883).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⑤번입니다.
15회 고급 39번 문제
39. 영남만인소에 나타난 세 나라 답③
이 문제도 위정척사 운동과 관련하여 자주 출제되는 주제 중에 하나입니다.
문제에 제시된 사료는 이만손을 비롯한 영남 유생들이 올린 영남만인소의 내용입니다.
따라서 사료에 들어갈 (가)는 중국(청), (나)는 미국, (다)는 러시아입니다.
여기에는 빠져 있지만 영남만인소에는 일본에 대한 내용도 언급하였어요.
미국, 러시아, 일본 모두 오랑캐라고 결론짓고 누구를 후하게 대하고 누구를 박하게 대하기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영남만인소가 나오게 된 배경은 2차 수신사로 일본에 갔던 김홍집이 가지고 온 <조선책략>을 고종이 관리와 유생들에게 배포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황쭌셴이라는 중국의 외교관이 동아시아의 정세와 조선의 외교 정책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쓴 것인데, 그 주요 내용은, 러시아가 남쪽으로 침투하는 상황에서 조선이 이를 막기 위해서는 '친중국, 결일본, 연미국'의 외교를 추진하면서 서양의 기술과 제도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고종은 이 책의 내용에 큰 관심을 가지고 서양과 수교하려는 뜻을 가졌으며, 이를 복사하여 관리와 유생들에게 배포하도록 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정부의 개화 정책을 반대하는 유생들은 전국적으로 개화 반대의 상소를 올리면서 위정척사 운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영남의 유생들은 만인소를 올려 이에 강하게 반발하였습니다.
영남만인소의 내용이 바로 문제에 제시된 사료죠.
① 청은 군대를 동원해 임오군란을 진압한 후 조선에 군사 고문과 외교 고문 등을 파견하여 내정에 간섭하였습니다.
② 조선이 일본과 수교를 맺자 조선에서의 영향력 축소를 우려한 청은 조선과 서양의 수교에 적극적으로 나섭니다.
이에 따라 조선은 서양 국가들 중 가장 먼저 청의 알선으로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을 체결하였습니다.
③ (나)는 미국인데 영국에 대한 내용을 설명하고 있으니 이게 답이네요.
러시아는 연해주를 차지(1860)하여 조선과 국경을 접한 후 조선에 접근하였습니다.
갑신정변 후 조선은 청의 지나친 내정 간섭에서 벗어나려고 러시아와 외교 관계를 강화하고자 하였습니다.
이에 조선에 대한 러시아의 세력 확장에 불안을 느낀 영국은 거문도를 불법으로 점령하였습니다(거문도 사건 1885).
두 나라가 대치하는 상황에서 러시아가 조선에 침입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자 영국군은 3년 만에 철수하였습니다.
④ 조·미 수호 통상 조약(1882)은 치외법권과 최혜국 대우를 규정한 불평등 조약이었습니다.
최혜국 대우 조항은 이후 다른 나라와의 조약에도 포함되었는데, 이는 훗날 아관 파찬 시기 열강의 이권 침탈이 가속
화되는 원인이 됩니다.
⑤ 일본이 청·일 전쟁 승리의 대가로 요동 반도를 차지하자 러시아가 프랑스와 독일을 끌어들여 이를 청에 돌려주라고 압
력을 가해(삼국 간섭) 일본은 요동 반도를 반환할 수밖에 없게 되죠.
삼국 간섭으로 러시아 세력의 우위가 드러나자, 일본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던 고종과 명성황후는 러시아 세력을 이용
하여 일본을 견제하려는 정책을 추진해 조선과 러시아가 급격하게 가까워지게 됩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③번입니다.
8회 고급 33번 문제
33. 조선책략과 관련된 사실 답③
이 문제의 자료도 요약하면 '조선의 급무는 러시아를 막는 것이며, 이를 위해 조선은 중국과 친하고(친중국) 일본과 맺고(결일본) 미국과 연대(연미국)하여 자강을 도모해야 한다'는 것이네요.
이는 황쭌셴이 저술한 <조선책략>의 내용이죠.
위 두 문제에서 계속 공부한 내용이니 이제 눈감고도 알 수 있겠네요?
<조선책략> 유포에 반발해 양반 유생들이 영남만인소를 올리는 등 위정척사 운동을 전개하며 반발하였지만,
결국 이것이 계기가 되어 청의 알선으로 조선은 미국과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을 체결하게 되죠(1882).
① 조선책략은 김홍집이 집필한 것이 아니라, 청의 외교관인 황쭌셴이 저술한 것입니다.
김홍집은 귀국할 때 이를 국내에 가지고 와서 고종에게 올렸을 뿐입니다.
② 청의 외교관인 황쭌셴이 지은 것으로 후쿠자와 유키치와는 관련이 없어요.
일본의 후쿠자와 유기치가 주장한 문명개화론은 김옥균 등의 급진개화파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③ 조선책략 유포에 반발해 양반 유생들이 영남만인소를 올리는 등 위정척사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④ 조·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은 임오군란을 진압한 청이 조선에 강요하여 체결한 것입니다.
⑤ 임오군란을 진압한 후 청은 마졘창, 독일인 묄렌도르프를 조선에 고문으로 파견하여 내정을 간섭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③번입니다.
6회 고급 42번 문제
42. 영남만인소의 배경 답②
이 자료도 위 문제에서 자세하게 공부했죠?
자료에 나타난 일본, 미국, 아라사(러시아)에 대한 견해을 통해 볼 때 이 자료가 <조선책략>에 대한 반박 내용임을 쉽게 알 수 있어요.
이 자료는 일본에 2차 수신사(1880)로 다녀온 김홍집이 귀국할 때 가져온 <조선책략>을 고종이 유포하자, 이에 반발하여 영남 유림 세력들이 올린 영남 만인소(1881)의 내용입니다.
이 책의 주요 내용은 조선에 가장 위협적인 세력은 러시아이며, 조선은 러시아의 남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중국, 일본, 미국과 손을 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외교 관계가 없는 미국과도 외교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었어요.
결국 청의 알선으로 조선은 서양 국가와는 처음으로 미국과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을 체결하게 됩니다.
ㄱ - 영남만인소는 김홍집이 가져온 <조선책략>의 유포에 반발하여 올린 상소문입니다.
ㄴ - 동학 농민 운동을 계기로 국내에 들어온 일본군은 전주 화약으로 국내 잔류 명분이 사라지자 경복궁을 포위하고 내
정을 개혁할 것을 요구합니다. 이미 내정 개혁을 준비중이던 조선은 1차 갑오개혁(1894)을 추진하게 됩니다.
일본군이 철수하지 않고 내정 개혁을 강요하는 등 무력 시위를 벌인 것에 반발해 동학 농민군은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 2차 봉기를 하게 됩니다(1894. 9).
ㄷ - 개항 이후 정부는 수신사와 영선사, 조사 시찰단을 파견하는 등 선진 문물을 시찰하게 하고 이들을 중심으로 개화 정
책을 추진합니다. 이러한 개화 정책에 반발해 유생들을 중심으로 위정 척사 운동을 벌입니다.
ㄹ - 거문도 사건(1885)은 영남 만인소(1881) 이후의 사건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ㄱ, ㄷ으로 묶인 ②번입니다.
5회 고급 41번 문제
33. 조선책략에 나타난 나라와 관련한 사실 답⑤
문제에 제시된 자료 서두에 <조선책략>이 언급되어 있으니, (가)~(라)에 들어갈 나라는 조선책략에서 언급하고 있는 나라들이겠지요.
이 자료는 <조선책략> 유포에 반대해 영남 유림들이 올린 영남만인소의 내용입니다.
<조선책략>은 일본에 있던 청나라 외교관 황쭌셴이 지은 것으로, 김홍집이 2차 수신사로 일본에 갔다가 들어오면서 가지고 들어온 책입니다.
이 책에는 조선이 남하하는 러시아를 막아내기 위해서는 '친중국 결일본 연미국'하는 외교 정책을 펴야 함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많이 들으셨죠?
그럼 <조선책략>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러시아, 중국, 일본, 미국이니 자료의 설명을 보고 (가)~(라)에 한 나라씩 넣어보죠.
(가)를 보면 우리가 신하로 섬겼던 나라라고 하니 중국,
(나)는 우리에게 매여 있던 나라, 즉 우리가 예전부터 한수 아래로 취급하던 나라이니 일본,
(다)는 본래 우리가 모르던 나라, 또 불러들인다(적이 아니라 친하게 지낸다는 의미이니)고 했으니 미국이겠죠?
(라)는 우리와 혐의가 없는 나라인데 남의 말을 듣다가 틈이 생긴다고 했으니(적대 관계 내지 견제를 해야할 나라로 지목한 나라겠죠?) 러시아입니다.
따라서 빈 칸에 들어갈 나라들은 (가) 중국, (나) 일본, (다) 미국, (라) 러시아입니다.
ㄱ - 한반도 중립화론을 주장한 조선 주재 외교관은 독일 부영사 부들러였습니다.
ㄴ - 경인선 부설권은 처음에 미국이 획득했다가 후에 일본으로 넘어갔습니다.
당현 금광 채굴권은 독일이 얻었습니다.
ㄷ - 운산 금광 채굴권은 미국이 획득하였지요.
ㄹ - 절영도(부산 영도)를 조차하려고 시도한 나라는 러시아입니다.
그러나 이는 독립 협회가 만민 공동회를 열어 강력히 규탄하면서 저지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ㄷ, ㄹ로 묶인 ⑤번입니다.
을미의병-을사의병-정미의병순으로 제시합니다.
항일 의병 운동
11회 고급 34번 문제
34.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 사건, 1895)의 배경과 영향 답⑤
이 문제도 3점 배점을 줄만한 문제는 아니라고 판단되네요.
3점이라고 하면 옥호루를 주고 이와 관련된 내용을 물어보는 문제가 출제되어야 한다고 보여지네요.
제시된 그림에서 교사가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대해 물어보고 있으니, 굳이 옥호루는 몰라도 상관없네요.
다음 시험에서 나올지도 모르니 옥호루가 명성황후 시해 사건 장소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죠....
그럼 명성 황후 시해 사건에 대해 알아볼까요.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에 더욱 심한 내정 간섭을 하게 됩니다. 이제 중국은 물리쳤으니 견제 세력이 없어진거죠. 당시 일본은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후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중국으로부터 요동 반도를 빼앗았지요.
그런데 이에 대하여, 일찍부터 남하 정책을 추진하고 있던 러시아는 이 지역에 오래 전부터 이해 관계를 가지고 있는 프랑스와 독일을 끌어들여 요동 반도를 청에 돌려줄 것을 일본에 요구하는 삼국 간섭을 합니다.
일본은 삼국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어 이에 굴복해 요동 반도를 중국에 돌려주게 됩니다. 삼국 간섭으로 러시아 세력의 우위가 드러나자, 일본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던 고종과 명성황후는 러시아 세력을 이용하려는 정책을 추진합니다.
조선에 대한 침략 정책을 추진하던 일본은 삼국 간섭 이후 세력이 약화되고 있었는데, 조선의 이러한 움직임에 크게 당황하였겠죠? 결국 일본은 명성황후를 일본의 조선 침략에 방해가 되는 인물로 지목하여 일본 공사의 지휘하에 일본군과 일본인 불량배들이 궁귈에 침입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명성 황후 시해 사건(을미사변,1895)을 일으킵니다. 기가 막힌 일이죠....개자슥들. 이쯤에서 욕한번 해야합니다. 한 나라의 국모를 일개 낭인들까지 동원하여 그런 일을 저지르는.....양아치 새끼들...ㅠ.ㅠ
이 사건 후 개화파 정부는 개혁 사업을 다시 추진하면서 단발령 등을 실시합니다(을미개혁).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에 정치인들이 책임을 다하지 못할 때 전국의 유생과 농민은 명성 황후 시해와 단발령 실시에 항거하여 대대적으로 의병을 일으킵니다. 이 때의 의병은 유인석, 이소응, 허위 등 위정척사 사상을 가진 유생이 주도하였고, 농민층이 가담하여 전국적으로 확대되었지요.
그러나 을미의병은 고종의 해산 조치가 내려지자 고분고분하게 해산하는 착한 행동으로 끝났네요.
갑 - 갑신정변 실패 이후, 조선이 러시아와 가까워지려는 움직임이 일자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기 위하여 영국이
거문도를 점령하여(거문도 사건), 한반도를 둘러싸고 국제적 위기가 됩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대두된 것이
조선을 중립국으로 하자는 중립화론입니다(독일 영사 부들러, 유길준이 주장).
을 - 동학 농민군이 재봉기한 이유는 청·일 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일본이 경복궁을 포위하고 내정 개혁을 강요하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⑤번입니다.
23회 고급 38번 문제
38. 을미의병 답①
의병 문제는 22회 최익현과 관련하여 을사의병이 출제되고 이번에도 출제되었네요.
문제 난이도는 물론, 출제되는 주제도 비슷하게 하니 시험 수준이 체감적으로는 더 쉬워 보입니다. 답지도 아래 유사 기출문제를 보면 알겠지만 비슷합니다.
제시된 자료에 "짐이 머리카락을 이미 깎았으니, 너희 백성들도 어찌 받들어 시행하지 않겠는가?" 라는 첫 구절을 통해 단발령을 떠올릴 수 있죠? 단발령에 반발하여 일어난 의병은 을미의병입니다.
단발령을 포함한 을미개혁, 명성 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이 을미의병의 배경이죠.
19세기 말~20세기 초 항일 의병 운동은 크게 세 시기에 일어났습니다.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반발해 일어난 을미의병(1895),
을사늑약에 반발해 일어난 을사의병(1905),
고종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에 반발하여 일어난 정미의병(1907)으로 나뉘어 볼 수 있습니다.
그중 을미의병에 대해 간단하게 알아보죠.
삼국간섭 후 명성황후가 중심이 되어 조선이 러시아를 끌여들여 일본을 견제하려 하죠. 이에 일본은 명성황후를 일본의 조선 침략에 방해가 되는 인물로 지목하여 일본 공사의 지휘하에 일본군과 낭인들이 궁귈에 침입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일(을미사변, 명성 황후 시해 사건, 1895)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김홍집, 유길준 등을 중심으로 하는 친일 내각을 성립시켜 단발령 등이 포함된 개혁을 실시합니다(을미개혁).
이에 전국의 유생과 농민은 명성 황후 시해와 단발령 실시에 항거하여 대대적으로 의병을 일으킵니다. 이 때의 의병은 유인석(제천), 이소응(춘천) 등 위정척사 사상을 가진 유생이 주도하였어요.
그러나 을미의병은 고종이 단발령을 철회하고 의병 해산 조치가 내리자 바로 해산하였어요.
① 을미의병은 유인석, 이소응 등 위정척사 사상을 가진 유생이 주도하였고, 농민층이 가담하였어요.
②, ③, ⑤ 정미의병에 대한 설명입니다.
고종 퇴위와 군대 해산을 배경으로 전국적으로 일어난 정미의병은 해산된 군인의 합류로 규모와 화력을 갖춰 전투력이
증강되었습니다. 특히, 이 시기에는 의병 부대 간에 연합 전선이 추진되어 전국의 의병들이 연합해 13도 창의군을 결성하
고 서울 진공 작전을 펼쳤어요(1908). 이 당시 이인영은 의병을 국제법상의 교전 단체로 승인해 줄 것을 요구하는 편지를
각국 대사관에 보내기도 하였어요.
④ 1910년대의 사실입니다.
최익현의 제자인 임병찬은 쓰시마 유배에서 풀려난 후 고종의 밀지를 받고 전국 곳곳의 의병장과 유생들을 모아 비밀
결사인 독립 의군부를 조직하였습니다(1912).
이 단체는 복벽주의 이념에 따라 국권을 회복한 후 고종을 복위시키려는 목표를 세우고, 전국적인 의병을 일으키려 하
였습니다. 그러나 일제의 총리대신과 조선 총독에게 국권 반환 요구서를 보내려고 계획하던 중에 조직이 발각되어 해
체되었어요(1914. 5.).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①번입니다.
24회 고급 36번 문제
36. 을사늑약(을사조약, 제2차 한·일 협약, 1905) 답③
'협박을 통해 강제로 체결된 조약', '외교권 강탈'이라는 내용을 통해 을사늑약을 떠올릴 수 있어요.
일제가 대한제국의 국권을 강탈하였던 주요 조약의 흐름은 꼭 알아두세요.
그 순서는 한·일 의정서(1904. 2.) → 제1차 한·일 협약(1904. 8. 고문 정치) → 을사늑약(제2차 한·일 협약, 1905. 11. 통감 정치) → 한·일 신협약(정미 7조약, 1907. 7. 차관 정치)-군대 해산(1907. 8.) → 기유각서(1909, 사법권 박탈) → 경찰권 박탈(1910. 6.) → 한·일 병합 조약(1910. 8. 29.)입니다.
러·일 간에 전쟁의 기운이 높아지자 대한제국은 한국이 전쟁터로 변하는 것을 막고자 국외 중립을 선언합니다. 하지만 전쟁을 도발한 일본은 한반도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나아가 일본이 한국에 군사 기지를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한·일 의정서(1904.2.)를 체결하였습니다. 전세가 일본에 유리해지자 일제가 추천한 재정·외교 고문을 대한제국이 초빙한다는 것을 주 내용으로 하는 제1차 한·일 협약(1904. 8.)을 강요합니다.
일본은 러·일 전쟁에서 승기를 잡자 미국과 가쓰라·태프트 비밀 협약(1905. 7.), 영국과는 제2차 영·일 동맹(1905. 8.), 러시아와 포츠머스 강화 조약(1905. 9.)을 각각 체결해 열강으로부터 한국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인정받습니다. 이후 일본은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외교권 박탈을 포함하는 조약 체결을 강요하였어요. 고종과 정부 대신들이 강력히 반대했으나 일본은 이완용 등 이른바 을사 5적을 앞세워 조약 성립을 일방적으로 공포하였죠(을사늑약, 1905. 11.). 을사늑약으로 대한 제국의 외교권은 일본에 강탈되었고 통감부가 설치되어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통감으로 부임하여 내정과 외교를 장악합니다.
고종은 을사늑약의 무효를 선언하고 외교 활동을 펴는 한편, 1907년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 평화 회의에도 이상설, 이준, 이위종을 특사로 파견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일본은 이를 빌미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킨후 한·일 신협약(정미 7조약, 1907)을 강요하여 통감의 내정 간섭 권한을 크게 강화한 다음, 그 후속 조치로 한국인 대신 밑에 일본인 차관을 임명하는 차관 정치를 실시하고 군대를 해산시켰습니다.
이후 사법권(기유각서, 1909)과 경찰권(1910. 6.)을 차례로 빼앗고 마침내 한일 병합 조약(1910. 8. 29.)을 체결해 대한제국의 국권을 강탈하였습니다.
① 러·일 전쟁 중 강제로 체결된 것은 한·일 의정서(1904.2.)와 제1차 한·일 협약(1904. 8.)입니다.
② 한·일 신협약(정미 7조약, 1907)에 첨부된 비밀 각서를 통해 군대를 해산하였습니다.
③ 을사늑약에 반발해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는데, 대표적인 을사의병장은 최익현, 민종식, 신돌석입니다.
④ 제1차 한·일 협약(1904. 8.)의 내용입니다.
이를 근거로 재정 고문으로 일본인 메가타와 외교 고문으로는 미국인 스티븐스를 파견하여 일본은 한국의 내정과 외교에
본격적으로 간섭하였습니다.
⑤ 조·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1882.9)의 결과입니다.
이 조약으로 청 상인이 양화진과 한성에서의 점포 개설(한성 개잔)을 할 수 있게 되면서 내지 통상이 허용됩니다.
이에 따라 외국과 체결한 통상 조약의 최혜국대우 조항에 의거에 다른 국가들에게도 내지 통상이 허용되었어요.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③번입니다.
22회 고급 32번 문제
32. 최익현과 을사의병 답②
문제에 제시된 내용을 정리하면 '전북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켰다가 체포되어 쓰시마 섬으로 끌려와 단식 순국한 항일 의병장의 순국비'입니다.
이는 위정척사 운동과 의병 운동을 이끌었던 최익현에 대한 설명입니다.
최익현이 전북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킨 것은 을사조약 체결에 반발하여 일어난 을사의병(1905) 때입니다.
최익현은 일찍이 상소를 올려 흥선 대원군을 물러나게 하였고, 개항 당시 왜양일체론을 내세워 개항 5불가소를 올렸던 위정척사 사상을 가진 대표적인 인물이었어요.
1906년 74세의 고령으로 을사늑약에 반발해 임병찬 등 제자들을 모아 전북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켜 정읍·순창 일대를 장악하였어요. 그러나 남원에서 관군과 마주치자 관군에게 의병에 합류할 것을 권하였으나 이를 수용하지 않자 같은 동포끼리 서로 싸우면 안된다고 하며 결국 의병을 해산시키고 체포됩니다. 이후 일본에 의해 쓰시마 섬으로 유배된 최익현은 적이 주는 음식물을 먹을 수 없다며 단식을 하다 그곳에서 순국하였습니다. 이에 그의 시신이 우리나라로 운구될 때 수선사에 하룻밤을 머물렀는데, 1986년 한국인과 일본인이 힘을 합쳐 여기에 순국비를 세웠어요.
얼마전 TV 모 프로그램에서 쓰시마 섬이 소개되면서 이 순국비가 나왔는데 어느분이 순국비 앞에 바나나 우유를 놓고 간 것이 보였어요. 그것을 보는 순간 울컥하며 눈물을 막 흘렸던.....ㅜㅜ
① 을미의병(1895)에 대한 설명입니다.
을미의병은 명성 황후 시해 사건(을미사변)과 단발령 실시에 항거해 일어났어요. 이 때의 의병은 유인석, 이소응, 허위
등 위정척사 사상을 가진 유생이 주도하였고, 농민층이 가담하여 전국적으로 확대되었지요.
그러나 을미의병은 고종의 해산 권고 조칙이 내려지자 고분고분하게 해산하는 착한 모습을 보입니다.
② 외교권을 박탈한 조약은 을사늑약이니, 이에 항거하여 일어난 의병은 을사의병(1905~1906)입니다.
③, ④, ⑤ 정미의병에 대한 설명입니다.
고종 퇴위와 군대 해산을 배경으로 전국적으로 일어난 정미의병은 해산된 군인의 합류로 규모와 화력을 갖춰 전투력이
증강되었습니다. 특히, 이 시기에는 의병 부대 간에 연합 전선이 추진되어 전국의 의병들이 연합해 13도 창의군을 결성
하고 서울 진공 작전을 펼쳤습니다(1908). 이때 의병을 국제법상 교전 단체로 승인해 줄 것을 요구하는 편지를 각국 대
사관에 보내기도 하였어요.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②번입니다.
15회 고급 28번 문제
28. 한말의 의병장 답④
(가)는 이인영, (나)는 최초의 평민 의병장 신돌석, (다)는 최익현입니다.
① 이인영은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이어서 단발령이 내려지자, 유인석, 이강년등의 의거에 호응해
원주에서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1907년 고종이 강제 퇴위되고 군대가 해산되자 이를 계기로 정미의병 활동을 재기하였습니다.
13도 창의군이 서울 진공 작전을 전개할 당시 총대장을 맡았습니다.
② 신돌석은 을사의병 당시 활약한 의병장으로, 한말 최초의 평민 의병장이었습니다.
태백산 호랑이로 불린 신돌석은 평해, 울진. 영해 등지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는데, 한때는 그 수가 수천 명에 이르렀습
니다.
③ 흥선 대원군이 만동묘를 비롯한 서원 철폐를 단행하자 최익현은 1873년에 상소를 올려 그 시정을 건의하였습니다.
이 상소를 계기로 대원군의 10년 집권이 무너지고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었습니다.
④ 정미의병을 일으켰던 이인영은 1909년 국내에서 잡혀 수감되었다가 그해 사망하였습니다.
신돌석도 의병으로 활동하다가 1908년 말에 부하에게 피살되었습니다.
⑤ 이인영과 최익현은 위정척사 사상을 지닌 대표적인 유생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④번입니다.
25회 고급 33번 문제
33. 서울 진공 작전을 펼친 13도 창의군 답⑤
제시된 신문 기사에 나타난 '서울 진공의 영'이 밑줄 그은 '전군(全軍)'을 파악할 수 있는 핵심이네요. 이를 통해 서울 진공 작전을 떠올려 이를 펼친 것이 13도 창의군임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기사가 대한매일신보(1904~1910)의 기사이니, 최소한 이 시기의 활동 내용이어야겠죠?
일제는 고종 황제가 헤이그 만국 평화 회의에 특사를 파견한 것을 트집잡아 고종 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곧이어 대한 제국의 군대(시위대, 친위대, 진위대)까지 해산시킵니다. 이를 계기로 의병의 항쟁이 더욱 격화됩니다. 특히 당시 해산된 대한 제국의 군인들이 의병에 합류함으로써 의병 부대는 조직력과 화력이 강화되었고, 전국적인 항일 의병 전쟁으로 발전합니다.
이 시기에는 의병 간에 연합 전선이 추진되어 유생 의병장들이 중심이 되어 13도 연합 의병 부대(13도 창의군)가 결성됩니다. 13도 연합 의병 1만여 명은 경기도 양주에 집결하여 이인영을 총대장, 허위를 군사장으로 추대하고 서울 진공 작전에 나서 한때 허위가 이끄는 선발대가 동대문 밖 12km 지점까지 진격하기도 했으나 우세한 화력을 지닌 일본군에 막혀 결국 실패하였습니다. 한편, 서울 진공 작전 당시 의병은 각국 영사관에 편지를 보내 의병 부대를 교전 단체로 승인해 줄 것을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① 14개조 개혁 정강은 개화당이 주도한 갑신정변 당시 발표한 개혁안입니다.
② 임오군란에 대한 설명입니다.
임오군란은 구식 군인인 무위영과 장위영 군인들이 일으킨 군란이었어요.
③ 애국 계몽 운동 단체인 신민회에 대한 설명입니다.
④ 을미의병(1895)에 대한 설명입니다.
을미의병은 명성 황후 시해 사건(을미사변)과 단발령 실시에 반발하여 일어났으나 고종이 해산 권고 조칙을 내리자
대부분 해산하는 착한 모습을 보였어요.
⑤ 13도 창의군은 서울 진공 작전을 펼치기 전 각국 대사관에 의병을 국제법상 교전 단체로 승인해 줄 것을 요구하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⑤번입니다.
19회 고급 35번 문제
35. 정미의병(1907 ~1908)의 활동 답⑤
문제에 제시된 사진은 의병 운동에서 자주 제시되는 것입니다.
사진에 나타난 의병을 보면, 의병들 모두가 신식 무기인 총으로 무장하고 있고, 이들을 지휘하는 사람(붉은색 원)은 멋진 제복을 입고 있는 것을 통해 정미의병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광무 11년이라는 시기가 나타나 있는데 대한제국이 1897년에 성립(그때 정한 연호가 광무)되었으니 광무 11년은 1907년이니 정미의병임을 쉽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 사진이 제시되면 고종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을 계기로 일어난 정미의병이라는 것, 그리고 이 당시 전국의 의병들이 연합해 13도 창의군을 구성해 서울 진공 작전(1908)을 폈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정미의병에 대해서 알아보죠.
일제는 고종이 헤이그 만국 평화 회의에 특사를 파견한 것을 트집잡아 고종 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대한 제국의 군대(서울의 시위대, 지방의 진위대)를 해산시킵니다.
이를 계기로 유생과 농민, 해산 군인뿐 아니라 노동자, 상인, 교사와 학생 등 전 계층이 의병에 참여하여 의병의 조직과 활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항일 의병 전쟁으로 발전합니다.
특히 해산된 군인들이 의병에 합류함으로써 의병 부대는 조직력과 화력이 강화되었습니다.
이 시기에는 의병 간에 연합 전선이 추진되어 유생 의병장들이 중심이 되어 13도 연합 의병 부대(13도 창의군)가 결성됩니다. 13도 연합 의병 1만여 명은 경기도 양주에 집결하여 이인영을 총대장, 허위를 군사장으로 추대하고 서울 진공 작전에 나섰습니다. 이때 각국 영사관에 편지를 보내 의병 부대를 교전 단체로 승인해 줄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습니다.
허위가 이끄는 선발대가 동대문 밖 12km 지점까지 진격했으나 우세한 화력을 지닌 일본군에 막혀 결국 실패하였습니다.
당시 13도 연합 의병은 양반 의병장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되었습니다.
신돌석, 홍범도 등은 평민 출신이라는 이유로 여기에 참여가 배제되는 등 조직력 결속의 한계가 있었습니다.
또한, 총대장 이인영은 부친상이 나자 작전 도중에 고향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① 최익현이 전북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킨 것은 을사의병(1905) 때입니다.
그는 상소를 올려 흥선 대원군을 물러나게 하였고, 개항 당시 왜양일체론을 내세워 개항 5불가소를 올렸던 인물이죠.
1905년에는 을사늑약에 반발해 임병찬 등 제자들을 모아 전북 태인에서 봉기하여 정읍·순창 일대를 장악하였어요.
그러나 남원에서 관군과 마주치자 같은 동포끼리 서로 싸우면 안된다고 하며 결국 의병을 해산시키고 체포됩니다.
이후 쓰시마 섬으로 유배된 최익현은 적이 주는 음식물을 먹을 수 없다며 단식을 하다 그곳에서 순국하였습니다.
②, ④ 을미의병(1895)에 대한 설명입니다.
을미의병은 유인석, 이소응, 허위 등 위정척사 사상을 가진 유생이 주도하였으며, 고종이 해산 조칙을 내리자 스스로
해산하였습니다.
③ 최익현의 제자인 임병찬은 쓰시마 유배에서 풀려난 후 고종의 밀지를 받고 전국 곳곳의 의병장과 유생들을 모아 비밀
결사인 독립 의군부를 조직하였습니다(1912).
이 단체는 복벽주의 이념에 따라 국권을 회복한 후 고종을 복위시키려는 목표를 세우고, 전국적인 의병을 일으키려 하
였습니다. 그러나 일제의 총리대신과 조선 총독에게 국권 반환 요구서를 보내려고 계획하던 중에 조직이 발각되어 해
체되었습니다(1914.5).
⑤ 정미의병 당시 전국의 의병들이 연합해 13도 창의군을 구성하고 서울 진공 작전을 폈으나 실패하였죠.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⑤번입니다.
미국 언론인 맥켄지는 정미의병 당시 충북 제천에서 위 문제에 제시된 사진의 의병들을 취재한 내용을 책에 실었어요. 내용을 보면 정말 가슴이 아픕니다...ㅠ.ㅠ
제천은 1907년 늦가을까지 2천에서 3천의 인구를 가진 농촌의 중요한 중심지였다. 의병이 활동을 시작했을 때, 그 일부가 제천 맞은 편의 산들을 점령하였다. …(중략)…일본군은 증원군을 증파하여 얼마간의 전투 후 재점령하였다. 그들은 그 때 제천을 지방 주민의 본보기로 보이기로 결정하여 전시에 방화하였다. …(중략)…내가 제천에 도착한 것은 이른 가을 더운 날이었다. …(중략)…나는 일찍이 이렇게 철저한 파괴를 본 적이 없었다. …(중략)…제천은 지도에서 사라졌다. …(중략)…해질 무렵 심부름하는 아이가 그릇을 떨어뜨리며 소리쳤다. “선생님 의병이 나타났습니다.” 순간 5~6명의 의병이 뜰로 들어섰다. 나이는 18세에서 26세 사이였고 그 중 얼굴이 준수하고 훤칠한 한 청년은 구식 군대의 제복을 입고 있었다. 나머지는 낡은 한복 차림이었다. 그들은 각기 다른 종류의 총을 들고 있었는데 하나도 성한 것이 없어 보였다. 그 중 인솔자인 듯한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문 : 당신들은 언제 전투를 했습니까? 문 : 일본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답 : 이기기 힘들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차피 싸우다 죽게 되겠지요. 그러나 좋습니다. 일본의 노예가 되어 사느니 자유민으로 싸우다 죽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중략)…나는 솔직히 한국에 오기 전에는 한국보다는 일본에 호감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직접 한국을 돌아본 결과 내 생각이 잘못이었음을 깨달았다. 일본군은 양민을 무차별 학살하고 부녀자를 겁탈하는 비인도적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반면 한국인은 비겁하지도 않고 자기 운명에 무심하지도 않다. 한국인들은 애국심이 무엇인가를 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맥켄지, <한국의 독립 운동> 사진속 의병,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
14회 고급 32번 문제
32. 정미의병의 성격 답③
이 문제도 수능에서 자주 출제되었던 문제죠?
수능을 공부한 지 얼마 안된 분들에게 유리한 문제입니다.
이들 의병이 누구인지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니, 먼저 이들의 정체를 알아봅시다.
우선 주어진 첫번째 자료인 사진을 잘 살펴보세요.
의병들 모두가 총을 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도자로 보이는 사람(붉은색 원)은 제복까지 멋지게 입고 있네요.
의병들이 신식 무기인 총으로 무장하고, 군복을 입은 사람이 지도하고 있는 모습은 정미의병(1907)입니다.
두번째 자료를 보면, 내용 중에 '각 도의 의병을 통일하여......서울에 진공'이라는 것이 나오네요.
서울 진공 작전은 전국 13도의 의병이 연합하여 13도 창의군을 결성하고 서울로 진격하였던 사건(1907)이었습니다.
따라서 두 자료를 통해 이 자료는 정미의병임을 알 수 있습니다.
19세기 말~20세기 초 항일 의병 운동은 크게 세 시기에 일어났습니다.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반발해 일어난 을미의병(1895),
을사늑약에 반발해 일어난 을사의병(1905),
고종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에 반발하여 일어난 정미의병(1907)으로 나뉘어 볼 수 있습니다.
이 문제에 나타난 정미의병에 대해서 알아보죠.
일제는 헤이그 만국 평화 회의에 특사를 파견한 것을 트집잡아 고종 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대한 제국의 군대까지 해산시킵니다.
이를 계기로 의병의 항쟁이 더욱 격화됩니다.
특히 일제에 의해 해산된 대한 제국의 군인들이 의병에 합류함으로써 의병 부대는 조직력과 화력이 강화되었죠.
이때의 의병을 후기 의병이라고도 하는데, 유생과 농민, 해산 군인뿐 아니라 노동자, 상인, 교사와 학생 등 전 계층이 참여한 전국적인 항일 의병 전쟁으로 발전합니다.
이 시기에는 의병 간에 연합 전선이 추진되어 유생 의병장들이 중심이 되어 13도 연합 의병 부대(13도 창의군)가 결성됩니다. 13도 연합 의병 1만여 명은 경기도 양주에 집결하여 이인영을 총대장, 허위를 군사장으로 추대하고 서울 진공 작전에 나서 한때 허위가 이끄는 선발대가 동대문 밖 12km 지점까지 진격하기도 했으나 우세한 화력을 지닌 일본군에 막혀 결국 실패하였습니다(이때 각국 영사관에 편지를 보내 의병 부대를 교전 단체로 승인해 줄 것을 요구하기도 했답니다).
이후 전국 각지에서 의병 전쟁이 계속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큰 활약을 한 것은 호남 의병이었습니다.
그러나 일제가 1909년 9월부터 2개월 간 대대적인 의병 토벌(남한 대토벌 작전)에 나서 많은 의병들은 물론 가옥과 촌락을 초토화시켜 국내에서의 의병 활동은 크게 위축되어 의병들은 만주와 연해주 등 국외로 이동하여 항전을 지속하게 됩니다.
①, ④, ⑤ 을미의병(1895)에 대한 설명입니다.
을미의병은 민비(명성 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과 단발령 실시에 반발하여 일어났으며, 을미의병을 주도한 것은 양반
유생층이었습니다. 그러나 을미의병은 아관 파천으로 친일적인 내각이 무너지고(이때 고종의 환궁도 요구함) 고종이
단발령을 취소하면서 의병 해산 권고 조칙을 내리자 대부분 해산하였습니다.
② 최초의 평민 의병장은 신돌석으로, 그는 을사의병 때 태백산 지역에서 활약한 인물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③번입니다.
8회 고급 40번 문제
40. 정미의병 답⑤
이 문제도 정미의병(1907) 당시의 서울 진공 작전을 편 의병 부대에 대해 묻는 문제입니다.
'동대문 밖 삼십 리(10리는 4km이니 30리면 12km)되는 곳에 나아가....서울로 진격'라는 내용을 통해 이 자료가 13도 연합 의병(서13도 창의군)의 서울 진공 작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위에서 정미의병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했으니 이 문제는 답지 설명 위주로 하겠습니다.
ㄱ - 신돌석은 을사의병 때 활약하였습니다.
ㄴ - 활빈당은 동학 농민 운동이나 을사의병에 참여했던 빈농, 영세 상인, 유민, 걸인 등이 조직한 무장 결사 조직입니다.
활빈당은 반봉건·반침략 활동을 펴, 각지에 출몰하여 관청을 습격하거나 외국인을 공격하기도 하였으며, 부호의 재
물을 빼앗아 빈민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1905년 무렵 지도부 대부분이 체포된 뒤에는 잔여 세력이 의병에 합류하였습니다.
ㄷ - 13도 연합 의병(13도 창의군) 1만여 명은 경기도 양주에 집결하여 이인영을 총대장, 허위를 군사장으로 추대하고 서
울 진공 작전을 폈으나 일본군에 막혀 결국 실패하였습니다.
ㄹ - 이들은 각국 영사관에 의병 부대를 국제공법상의 교전 단체로 인정해 줄 것을 요구하는 격문을 보냈으나, 외교권 박
탈 이후의 고립된 상황이라 지원받지는 못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ㄷ, ㄹ로 묶인 ⑤번입니다.
3회 2급 32번 문제
32. 정미의병 답⑤
이 문제를 포함하여 순수하게 의병에 대해 묻는 문제는 8회 고급 40번 문제, 그리고 14회 고급 32번 문제 3문제가 출제되었는데, 모두 정미의병을 묻는 문제로 출제되었어요.
그러니 정미의병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알아두셔야 합니다.
이 문제는 2점 배점이지만 1점에 가까운 문제입니다.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초창기인 2~3회 시험 때는 고급 시험 문제가 1급과 2급이 별도 시험 문제로 출제되었었습니다.
이 문제는 2급용 문제이니 고급 중에서도 조금 쉽다고 보면 됩니다.
주어진 자료에 '1907년', '해산 군인 합류', '의병 전쟁으로 확산되었다'는 내용이 아주 친절하게 나와 있네요.
그러니 이 시기의 의병이란 정미의병(1907~1908)임은 쉽게 파악되죠?
바로 답지 설명으로 가겠습니다.
① 정미의병을 비롯해 의병장의 대다수는 양반 유생들이었습니다.
을사의병 때 처음으로 평민 의병장이 등장하였는데, 그가 바로 태백산 호랑이라 불린 신돌석이었죠.
그러다가 정미의병 때는 평민 의병장이 여럿 등장하게 됩니다.
평민 의병장이 이끄는 의병 부대는 봉건적 신분 의식이나 위정척사 사상에 얽매이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단결된 힘을
가지고 항일 투쟁을 전개할 수 있었습니다.
② 정미의병 때는 유생과 농민, 해산 군인뿐 아니라 노동자, 상인, 교사와 학생 등 전 계층이 참여한 전국적인 항일 구국
전쟁으로 발전하였습니다.
③ 해산된 군인의 합류로 의병 부대는 조직력과 화력이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④ 정미의병 때 유생 의병장들이 중심이 되어 13도 연합 의병 부대(13도 창의군)가 결성됩니다.
13도 연합 의병 1만여 명은 경기도 양주에 집결하여 이인영을 총대장, 허위를 군사장으로 추대하고 서울 진공 작전에
나서 선발대가 동대문 밖 12km 지점까지 진격하기도 했으나 일본군에 막혀 결국 실패하였습니다.
⑤ 13도 연합 의병은 양반 의병장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되었습니다.
신돌석, 홍범도 등은 평민 출신이라는 이유로 여기에 참여가 배제되는 등 조직력 결속의 한계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⑤번입니다.
효율적인 한국사능력검정시험 공부법
26회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국사사랑방/한국사능력검정시험합격률/한국사능력검정시험기출문제/한국사기출문제해설/
한국사능력검정시험난이도/한국사능력검정시험합격률/한권으로끝내는한국사능력검정시험
첫댓글 이번 시험을 보고온 분들을 포함해
이 문제에 대한 생각들을 미리 적어보자구요.
1906 년도 의병 1907 년도 대마도(쓰시마섬) 이라는 단어를 본순간 바로 정답으로가는 기술만 있었어도 풀수 있는 문제였는데.. 요즘 최익현 관련 내용과 이야기가 수능, 모의평가에도 나오더니 이번 문제에도 나왔네요
최익현 - 왜양일체론은 그냥 머릿속에 박혀잇음
그 유명한 익현 할아버지...ㅎㅎ...기출풀이에 날마다 나왔어요...
전 오히려 왜양일체론보다 지'부'복궐 저 도끼에 꽂혔어요... ㅋㅋㅋ양반인데 도끼라니 인상에 많이 남았나봐요.
하하하.. 익현 할배였구나...
최익현 는 참진정한선비 이라고생각
맞아요. 고지식해 보이지만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위해 초지일관 주장하고 실천하였으며,
목숨을 내놓고 그 길을 걸었던 인물이죠.
소위 요즘 보수주의자라고 하는 이들을 인정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잘알듯.....
댓글은
감사합니다....라는 글은 달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문제에 대한 난이도, 자료 등에 대한 느낌이나
개인적인 문제풀이 접근법 등을 달아주세요.
부탁드립니다......^^
한국사를 공부하면서 여러 선인들의 훌륭한 모습을 배우자고 여러번 다짐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닮고 싶은 분중 한분이네요. 어떠한 상황에서도 휩쓸리지 않고 신념을 내세울 수 있을지... 부족함을 많이 느끼네요
도움이 많이 됩니다 !
문제만 보고서는 바로 최익현이라고 생각하기 쉽지 않네요 ㅎㅎ
더 공부해야겠습니다.
최익현관련 도움이 많이 됫습니다.
지부복궐척화의소 라는 단어가 생소했지만 왜양일체론 으로 정답을 추리할 수 있었습니다
아랫글에도 언급했지만, 설명 기술법이 너무 길어지는 것 같아서 끝까지 읽어내는데 한계를 보일 것 같아요.
<항일 의병 전쟁의 전개> 도표처럼 한눈에 들어오게 요점을 잡아주고 서술 하든지, 되도록이면 인용 글은 '궁서체'를 쓰지 않은 것이 좋을 것 같아요. 꼭 써야 한다면... 글씨 크기를 좀 크게하면 시야가 넓게 느껴져 보기 좋은 것 같네요. '최익현' 선생님 내용은 개인적으로 의미를 두고 있는 분이라 이렇게 길게 설명해 주셔도 좋은 것 같은데...
문제는 저처럼 관심있는 대목은 차근차근 읽게되지만 역사 파트 중에서도 취약하고 피하고 싶은 부분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한두군데는 있게 마련이거든요? 이점 고려하셔서 편집하거나 올려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항일 의병 전쟁의 전개>처럼 깔끔하게 도표로 정리해 주시니 화~ 맵핑화 되니까 좋았어요.
(그리고 실사 그림이나 지도를 표현되는 첨부자료를 더 많이 보강해 주신다면 평면적인 역사가 입체적이게 다가와서 암기로만 느껴지지 않은 것 같네요. - 저야 뭐 <역사>는 옛날 이야기니 읽어 나가는 맛이라 생각 하는 사람이긴 하지만~ ㅋㅋ)
읽고 많은 도움 되었네여
문제 난이도가 많이 높은거 같아요!! ㅠㅠ 틀렷네요
진작에 이 카페를 알았더라면.. 얼마나 도움이 됐을까요? 정말 대단하십니다. 열심히 공부해야겠어요.
최익현 선생님 잘알게되엇습니다. 대마도 순국. 을사의병 흑산도위배. ..
정미의병의 사진과 관련하여 인터뷰 넣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진짜 파바바박!! 하고 각인되었네요. 새벽에 복습하다가 난데없이 눈물흘리고있어요 ㅜㅜ
도움 많이 되는 해설 감사합니다!
정리 정말 잘되어있네요! 이해가 바로 되용!!ㅎㅎ 감사합니당:)
최익현에 관한 문제는 앞으로 틀리지 않겠네요
도움많이될것같아요감사합니다~~
해설 감사합니다.
좋은 해설 감사합니다^^
최익현 선생님에 대해 자세히 알수 있었네요 감사합니다!!
해설감사합니다 눈에 쏙 들어오네요^^
해설 감사합니다..새로운 걸 알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당
시기별로 정리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