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참뜻 : 무릇 사람은 평생 넋의 작용에 따라 살며 얼의 작용을 일으키지 않고 살아가기 쉬운 관계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얼의 작용을 일으켜 으뜸가는 신의 뜻과 으뜸가는 신을 겪지 못 한다. 고로 얼의 작용은 약해지고 넋의 작용은 강해져 결국 넋의 세계로 떨어진다. 고로 능엄경에서 말하길 ‘으뜸가는 신의 뜻을 찾은 의식은 으뜸가는 신의 마음으로 날아오르고 넋의 작용으로 인해 생긴 욕망에 집착하는 의식은 넋의 세계로 떨어진다.’고 한다. 배우는 이는 으뜸가는 신의 뜻을 찾으려 하기 보다는 욕망에 사로잡혀 넋의 세계로 떨어지기 쉽다. 오로지 넋의 작용을 그치며 살피면서 보면 으뜸가는 신의 뜻을 찾아 으뜸가는 신의 마음에 태어날 수 있는데 그리해야 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이와 같은 방식이 바로 거스르는 법(逆法)이다.
陰福經云機在目(음부경운기재목) 黃帝素問云(황제소문운) 人身精華皆上注於空竅是也(인신정화개상주어공규시야) 得此一節(득차일절) 長生者在茲(장생자) 超昇者亦在茲矣(초승자역재자의) 此貫徹三叫功夫也(차관철삼규공부야)
1. 번역 : 음부경에서 말하길 ‘기틀이 눈에 있다.’고 한다. 황제내경의 소문에서 말하길 ‘인간의 몸의 정화는 모두 위에 있는 비어 있는 구멍(空竅)에 부어진다.’고 한다. 이러한 말은 모두 장생을 얻는 것은 이곳에 있고 초월하는 것 또한 이곳에 있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는 세 곳(유∙불∙선)에서 말하는 공부를 모두 관철하는 가르침이다.
* 음부경 : 전설로 알려진 황제나 주나라의 강태공이 지었다는 설이 있으나 작자를 정확히 알 수 없는 책으로 전국시대에서 당나라시대 사이에 지어진 책으로 추정된다.
* 황제내경 : 황제내경은 전설적 인물인 황제와 명의인 기백과의 의술에 관한 토론을 기록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작자를 알 수 없는 글로 진한시대에 지어진 책으로 알려져 있다. 전반 9권은 소문(素問), 후반 9권은 영추(靈樞)로 불린다.
2. 참뜻 : 음부경에서는 일원신의 마음을 ‘눈에 있는 기틀’에 비유했고 황제내경에서는 공규(空竅)에 비유했다. 이러한 말은 장생과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이곳을 찾아 얻어야 함을 가리키는데 유불선 모두에서 공통되며 핵심이 되는 가르침이다.
光不在身中亦不在身外(광부재신중역부재신외) 山河日月大地無非此光(산하일원대지무비차야) 故不獨在身中(고부독재신중) 聰明智慧一切運轉(총명지혜일체운전) 亦無非此光(역무비차광) 所以亦不在身外(소이역부재신외) 天地之光華佈滿大千(천지지광화포만대천) 一身之光華亦自漫天蓋地(일신지광화자만천개지) 所以一回光(소이일회광) 大地山河一切皆回矣(대지산하일체회의)
1. 번역 : 빛은 몸 안에 있는 것만도 아니고 몸 밖에 있는 것만도 아니다. 산이나 물이나 해나 달이나 땅이 이 빛이 아닌 것이 없다. 고로 빛이 오직 몸 안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똑똑해지고 지혜로우며 마음에서 일체 움직이며 바뀌는 일이 이 빛에 의한 것이 아닌 것이 없다. 그렇기에 또한 몸 밖에 있는 것만도 아니다. 하늘과 땅을 이루는 빛은 수천 세상에 가득 퍼져 빛난다. 한 몸의 빛 역시 하늘에 가득하고 땅을 덮는다. 그렇기에 한 번 돌리며 비추는 일은 땅과 산과 물 일체 모두 돌리는 것이다.
2. 참뜻 : 으뜸가는 신의 뜻은 물질과 공간으로 이루어진 세상에도 있고 마음에도 있다. 물질과 공간으로 이루어진 세상은 으뜸가는 신의 뜻이 변해서 된 것이다. 그러하기에 으뜸가는 신의 뜻은 마음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으뜸가는 신과 같은 마음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으뜸가는 신의 뜻이 변해서 된 것이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으뜸가는 신의 뜻이 물질과 공간으로 이루어진 세상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하늘과 땅을 이루는 으뜸가는 신의 뜻은 온세상을 이룬다. 그렇기에 한 번 으뜸가는 신의 뜻을 드러내는 일은 온세상 일체를 이루는 뜻을 드러내는 일이다.
人之精華上注於目(인지정화상주어목) 此人身之大關鍵也(차인신지대관건야) 子輩司之(자배사지) 一日不靜坐(일일부정좌) 此光流轉何所底止(차광류전하소저지) 若一刻能靜坐(약일각능정좌) 萬劫千生從此了徹(만겁천색종차료철) 萬法歸於靜(만법귀어정) 眞不可思議此妙諦也(진불가사의차묘체야)
1. 번역 : 사람의 정화는 위에 있는 눈에 모이니 이곳이 인체의 큰 열쇠이다. 그대들은 이 사실을 명심하라. 하루라도 조용하게 앉아있지 않으면 이 빛은 흘러 돌아다니니 어찌 안에서 멈추게 할 수 있게 하겠나? 헤아릴 수 없는 시간 동안 천 번의 삶을 살아도 벗어나지 못 하는 일을 이를 따름으로써 끝내며 통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가르침은 조용하게 있는 것으로 돌아가라고 가르친다. 참으로 생각하여 알기 어려운 것이 이와 같은 신비한 이치이다.
2. 참뜻 : 사람의 마음에 드러나는 으뜸가는 신의 뜻은 으뜸가는 신의 마음으로 돌아가니 이곳이 마음에 나타날 수 있는 일은 사람으로 태어나야 가능한 것이기에 그대들은 사람으로 태어난 일을 감사히 여기며 이러한 사실을 명심하라. 하루라도 넋의 작용을 그치지 아니하면 이곳의 으뜸가는 신의 뜻은 흘러 돌아다니니 어찌 으뜸가는 신의 뜻을 멈추게 하여 으뜸가는 신의 마음으로 돌아가게 할 수 있을까? 한 시각이라도 넋의 작용을 그쳐 얼의 작용을 일으켜 으뜸가는 신의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으뜸가는 신의 마음에 태어나 으뜸가는 신과 같이 될 수 있으니 이는 헤아릴 수 없는 기간 동안 천 번의 삶을 살더라도 이룰 없는 일이다. 달리 얘기하면 헤아릴 수 없는 기간 동안 천 번의 삶을 살더라도 넋의 작용을 그쳐 얼의 작용을 일으키지 못 하면 으뜸가는 신의 마음에 태어날 수 없다. 모든 참된 가르침은 넋의 작용을 그치라고 말하는데 이러한 가르침은 참으로 생각하여 알기 어려운 신비한 가르침이다.
然功夫下手(연공부하수) 由淺入深(유천입심) 由粗入細(유조입세) 總以不間斷為妙(총이불간단위묘) 功夫始終則一(공부시종즉일) 但期間冷暖自知(단기간냉온자지) 要歸於天空地闊(요귀어천공활) 萬法如如(만법여여) 方為得手(방위득수)
1. 번역 : 그렇기에 이러한 가르침을 익히는 일을 시작할 때에는 얕은 곳에서 시작하여 깊은 곳으로 들어가야 하고 거친 것에서 시작하여 세밀한 것으로 들어가야 한다. 항상 단절이 없으면 오묘해진다. 익히는 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一)에 달려 있다. 단지 익히는 동안 차갑고 뜨거움이 절로 느껴지는데 요컨대 하늘과 땅이 트인 것 같아 모든 이치가 같고 같더라. 그 정도는 되어야 바야흐로 실력이 생겼다고 할 수 있다.
2. 참뜻 : 아무리 어렵고 신비한 가르침이라고 하더라도 익히는 방법에 특별한 길이 있는 것은 아니다. 쉬운 것을 익히는 일에서 시작하여 숙달되면 어려운 것도 익힐 수 있게 되고 드러난 것을 익히다 보면 감추어진 것도 익혀지게 되는 법이다. 요컨대 익히는 일에 단절이 없어야 오묘해지는 법이다. 익히는 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막힘이 없고 무리가 없어야 하는데 익히는 동안 넋의 작용이 일어나기도 하고 얼의 작용이 일어나기도 한다. 하지만 익힘이 절정에 이르면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되어 통하는 것과 같아 모든 섭리가 같게 느껴져 딱 보면 아는데 그 정도는 되어야 비로소 도통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聖聖相傳不離反照(성성상전불리반조) 孔云致知(공운치지) 釋號觀心(석호관심) 老云內觀(노운내관) 皆已括盡要旨(개이괄진요지)
1. 번역 : 성인에서 성인으로 서로 전해지는 것은 되돌아가 비추는 것(反照)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공자가 말하길 ‘앎에 이른다.(致知)’고 하였고 석가는 ‘마음을 본다.(觀心)’라고 말하였고 노자는 ‘안으로 살핀다.(內觀)’고 말하였는데 모두 궁극에 이른 중요한 뜻을 가리킬 따름이다.
2. 참뜻 : 일원신의 뜻을 통해 일원신의 마음을 드러낸 이들은 모두 얼의 작용을 통해 으뜸가는 신과 같이 되어 생각하는 것(反照)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공자는 이와 같은 방법을 ‘앎에 이른다. (致知)’고 말하였고 석가는 ‘마음을 본다.(觀心)’라고 말하였고 노자는 ‘안으로 살핀다.(內觀)’고 말하였는데 이는 모두 반조(反照)를 달리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但反照二字(단반조이자) 人人能言(인인능언) 不能得手(불능득수) 未識二字之義耳(미식이자지의이) 反者自知覺之心(반자자지각지심) 反乎形神末兆之初(반호형신말조지초) 則吾六尺之中(오육척지중) 反求十天地未生之體(반구십천지미생지체) 今人但一二時中間靜坐(금인단일이시중간정좌) 反顧己私(반고기사) 便云反照(편운반조) 安得到頭(안득도부)
1. 번역 : 다만 되돌아가 비춘다(反照)는 두 글자는 누구나 말할 수 있긴 하지만 능히 되돌아가 비출 수 있는 실력을 얻지 못 한다면 두 글자에 간직된 뜻을 아는 것은 아니다. 되돌아감(反)은 절로 깨닫는 마음을 아는 것이며 육체(形)와 의식(神)이 나타나기 전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즉 고작 커 봐야 키가 180cm(6척)밖에 안 되는 나에게서 되돌아가 온세상이 생기기 전의 몸을 찾는 것이다. 오늘날의 사람은 단지 한두 시간 조용히 앉아 있다가 자기만의 사사로운 것을 떠올리고서 곧 ‘되돌아가 비추었다.’(反照)고 하는데 그래서야 어찌 깨달음을 얻어 극치에 이르겠는가!
2. 참뜻 : 되돌아가 비추는 방법(反照)을 어디서 주워 듣고서 일원신과 같이 될 수 있다는 말을 전해들은 사람들이 모두 되돌아가 비출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되돌아가 비추는 말에 간직된 참된 뜻을 아는 것도 아니다. 되돌아감(反)은 절로 아는 마음, 즉 일원신의 마음을 찾아 아는 것인데 이는 육체와 의식, 나아가 세상이 있기 전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즉 커 봤자 2m밖에 안 되는 사람에게서 온세상이 있기 전부터 있는 존재를 찾는 것이다. 오늘날의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이들은 한두 시간 조용히 앉아 있다가 넋의 작용에 의해 떠오른 억지스런 견해를 진리나 진실로 여기며 ‘되돌아가 비추었다.’(反照)고 우기기도 하는데 그래서야 어찌 으뜸가는 신과 으뜸가는 신의 마음을 드러나게 하여 궁극의 경지에 이르겠나!
佛道二祖(불교이조) 教人看鼻尖者(교인간비첨자) 非謂著念於鼻端也(비위저념어비단야) 亦非謂眼觀鼻端(역비위안관비단) 念又注中黃也(념우주중황야) 眼之所至(안지소지) 心亦至焉(심역지언) 何能一上而一下也(하능일상이일하야) 又何能忽上而忽下也(우하능홀상이홀하야) 此皆誤指而為月(차개오지이위월)
1. 번역 : 불교와 도교의 큰 스승들이 사람들에게 '코 끝을 보라.'고 가르치는 것은 '생각을 코 끝에 두라.'는 말이 아니며 또한 눈으로 코 끝을 보면서 '생각을 으뜸가는 신의 마음(中黃)에 부어라.'는 말도 아니다. 눈이 이르는 곳에 마음 또한 이른다. 어찌 하나는 위에 있게 하고 하나는 아래에 있게 하겠는가? 또한 어찌 갑자기 위에 있다가 갑자기 아래에 있다가 하겠는가? 이는 모두 손가락을 달로 잘못 이해하는 것과 같다.
2. 참뜻 : 불교와 도교에서 참된 깨달음을 얻은 큰 스승들은 참된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이들에게 ‘코 끝을 보라.’고 가르친다. 이 말은 '코 끝에 집중하라.'는 말도 아니고 '코 끝을 보면서 생각하라.'는 말도 아니고 '코 끝을 보면서 으뜸가는 신의 마음을 찾으라.'는 말도 아니다. ‘코 끝을 보라.’는 가르침은 마음이 얼굴 앞에 있는 것과 같이 여겨지기에 마음에서 으뜸가는 신의 마음을 찾으라는 비유적 표현일 따름이다. 어찌 코 끝에 집중하며 생각할 수 있겠으며 코 끝을 보았다가 생각했다가 하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는 달을 보라고 손가락으로 가리켰더니 손가락만 쳐다보고 있는 꼴이다.
畢竟如何(필경여하) 曰鼻端二字最妙(왈비단이자최묘) 只是借鼻以為眼之准耳(다시차비이위안지준위) 初不在鼻上(초불비상) 蓋以大開眼(개이대개안) 則視遠(즉시원) 而不見鼻矣(이불시비의) 太閉眼(태폐안) 則眼合(즉안합) 亦不見鼻矣(역불시비의) 大開失之外走(대개실지외도) 易於散亂(이어산란) 太閉失之內馳(태폐실지내치) 易於昏沉(이어혼침) 惟垂簾得中(유수렴득중) 恰好望見鼻端(흡호망견비단) 故取以為准(고취이위준)
1. 번역 : 그러면 어찌해야 하겠는가? 코 끝(鼻端)이라는 두 자가 참으로 묘하다. 이는 코를 빌려서 눈길을 둘 곳을 정하는 것에 불과하다. 처음 익히는 이가 코 위에 집중하지 않고서 눈을 크게 뜨면 먼 곳을 보게 되어 코를 보지 않게 된다. 눈을 너무 감으면 눈꺼풀이 합쳐져 또한 코를 보지 않게 된다. 크게 뜨면 바깥으로 달아나 잃게 되어 쉽게 흩어지고 어지러워진다. 너무 감으면 안으로 달려가 잃어서 멍해진다. 오직 발을 들여놓는 것처럼 눈을 감는 것이 맞는 것인데 보는 듯 보지 않는 듯 코 끝을 보아야 한다. 고로 물끄러미 코 끝을 보는 것을 표준으로 삼는다.
2. 참뜻 : ‘코 끝을 보라.’는 말은 마음에서 일원신의 마음을 찾으라는 말인데 코 끝을 볼 때 그냥 보지 말고 눈을 지그시 감고서 보라고 한다. 여기서 눈이 뜻하는 바는 무엇일까? 눈은 육체적 감각 기관을 가리킨다. 눈을 크게 뜨는 것은 육체의 감각 기관에 의해 드러난 것에 집착하는 것을 가리키고 눈을 아예 감아버리는 것은 육체의 감각 기관에 의해 드러난 것을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어느 경우에나 일원신의 마음을 드러나게 할 수 없다. 눈을 지그시 감고서 보라는 말은 육체의 감각 기관을 사용하되 넋의 작용을 그친 채 육체의 감각 기관을 통해 드러난 대상을 마음에서 살펴보라는 말이다. 그리해야 일원신의 마음 역시 도망치거나 감추어지지 않고서 드러난다.
只是垂簾恰好(지시수렴흡호) 任彼光自然透入(임피광자연투입) 不勞你注射與不注射(불로이주사여불주사) 看鼻端(간비단) 只於最初入靜處舉眼一視(지어최초입정처거안일시)
定箇准則便放下(정개준즉편방하) 如泥水匠人用線一般(여이수장인용선일반) 彼自起手一挂(피자기수일괘) 便依了做上去(편의료주상거) 不只管把線看也(부지관파선간야)
1. 번역 : ‘발을 드리우는 것(垂簾)’과 같이 하라는 말은 저 빛이 절로 뚫고 들어오게 하라는 말인데 애써 내려 쬐게 하거나 내려 쬐게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코 끝을 보라’는 말은 단지 처음 들어간 조용한 곳(靜處)을 눈을 떠서 한 번 보라는 말이다. 기준을 확고히 정하면 아래로 내버려 두어야 한다. 이는 이수에 사는 장인이 줄을 사용하는 것과 같은데 손으로 줄을 한 번 걸어 놓으면 끝날 때까지 줄에 의지하여 일을 하지 줄을 잡고서 매번 보면서 맞추는 것이 아니다.
2. 참뜻 : ‘발을 드리우는 것(垂簾)’과 같이 눈을 감거나 뜨라는 말은 넋의 작용을 그친 채, 나아가 억지스러움을 내려놓은 채 마음에 드러나게 하라는 말이다. 즉 억지로 드러나게 하는 것도 아니고 애써 드러나지 않게 하는 것도 아니다. ‘코 끝을 보라.’는 말은 마음에서 으뜸가는 신의 마음을 찾아 보라는 말이다. 억지스러움을 내려놓아 으뜸가는 신의 마음을 보게 되어 으뜸가는 신의 뜻이 드러나기 시작하면 그대로 내버려 두어야 하지 개입해서는 아니 된다. 이는 장인이 줄을 이용하여 제작하는 것과 같다. 기준을 잡아 줄을 한 번 걸어놓으면 줄에 의지하여 일을 하지 일할 때 마다 매번 기준을 정하여 줄의 위치를 번번이 바꾸지 않는다.
止觀是佛法(지관시불법) 原不秘的(원불비적) 以兩目諱觀鼻端正身安坐(이양목휘관비단정신안좌) 系心緣中(계심연중) 不必言頭中(불필언두중) 但於先天祖竅繫念便了(단어선천조규계념편료) 光是活潑潑的東西(광시활발발적동서) 系念於祖竅之中(계념어조규지중) 光自然透入(광자연투입) 不必著意於中宮也(불필착의어중궁야) 此數語已括盡要旨(차수어이괄진요지) 其餘入靜出靜前後(기여입정출정전후) 以下止觀書印証可也(이하지관서인정가야)
1. 번역 : 그치면서 살피는 것(止觀)은 불교에서 전하는 방법인데 본래 비밀스러운 방법은 아니었다. 두 눈으로 코 끝을 보며 몸을 바르게 하고 편안하게 앉아서 마음을 연중(緣中)에 묶어두는 것이다. 반드시 생각을 머리 속에 둘 필요는 없고 다만 원래부터 있는 시초가 되는 구멍(先天祖竅)에 생각을 매어두면 된다. 빛이라는 것은 살아서 팔팔 뛰는 것인데 생각을 시초의 구멍에 매어두면 빛은 절로 뚫고 들어온다. 반드시 뜻을 마음(中宮)에 매어둘 필요는 없다. 이 몇 마디 말로 중요한 뜻을 모두 다 전했다. 나머지 내용, 즉 조용함(靜)에 들어가고 나오는 앞과 뒤의 일은 그친 채 살핌에 관한 글과 맞추어봄으로써 알 수 있다.
2. 참뜻 : 넋의 작용을 그치고 얼의 작용을 일으키며 으뜸가는 신의 마음을 드러내는 일을 불교에서는 그치면서 살피는 일(止觀)이라고 불렀다. 여기서 그쳐야 할 대상은 넋의 작용이 되는데 넋의 작용을 멈추어 얼의 작용을 일으키라는 뜻이 숨겨져 있다. 살펴야 할 대상은 으뜸가는 신의 마음이 되는데 으뜸가는 신의 마음을 불교에서는 연중(緣中)이라고 불렀다. 연중이라고 불리는 으뜸가는 신의 마음을 도교에서는 원래부터 있는 시초가 되는 구멍(先天祖竅)이라고 불렀는데 으뜸가는 신의 뜻을 알기 위해서 이렇게 머리를 굴리고 저렇게 머리를 굴리는 일은 의미가 없고 연중, 혹은 선천조규(先天祖竅)라고 불리는 으뜸가는 신의 마음을 그저 살피기만 하면 된다. 으뜸가는 신의 뜻은 마음에 나타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며 인간의 마음에는 얼의 작용과 넋의 작용이 동시에 나타나기에 마음에 나타난 뜻이 으뜸가는 신의 뜻인지 분별하기 어렵다. 하지만 으뜸가는 신의 마음을 찾아 살피노라면 으뜸가는 신의 뜻은 절로 마음에 모여 명확히 드러난다. 반드시 으뜸가는 신의 특정한 뜻에 집착할 필요는 없고 그저 으뜸가는 신의 마음을 틈틈이 찾아 살피면 된다. 이 몇 마디 말로 으뜸가는 신의 마음과 으뜸가는 신의 뜻을 드러나게 하는 핵심적인 방법을 모두 설명하였다. 나머지 내용은 핵심은 아니며 그러한 내용은 그친 채 살피는 일(止觀)을 직접 해보면 절로 알게 된다.
緣中二字極妙(연중이자극묘) 中無不在(중무부재) 遍大乾旨在裏許(편대건지재리허) 聊指造化之機(료지조화지기) 緣此入門耳(연차입문이) 緣者緣此為端倪(연자연차위단예) 非有定著也(비유정착야) 此二字之義(차이자지의) 活甚妙甚(활심묘심)
1. 번역 : 인연이나 이유를 뜻하는 緣(연)이라는 글자와 가운데나 속을 뜻하는 中(중)이라는 글자는 지극히 신비하다. 중(中)은 있지 아니함이 없음을 뜻한다. 모든 세상들이 속에 있다. 즉 중은 세상을 이루어지게 하는 기틀(造化之機)을 가리키는 말이다. 緣(연)이라는 글자는 실마리를 뜻하는 단어인데 특정 대상을 가리키는 말은 아니다. 이 두 글자에 간직된 뜻은 지극히 살아 움직이고 지극히 신비하다.
2. 참뜻 : 불교에서는 으뜸가는 신의 마음을 연중(緣中)이라고 불렀는데 이 두 글자는 으뜸가는 신의 마음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기에 지극히 신비하게 여겨진다. 中(중)은 모든 세상과 모든 대상이 으뜸가는 신의 마음에 있음을 전달한다. 모든 세상이 으뜸가는 신의 마음 속에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으뜸가는 신의 마음에서 모든 세상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으뜸가는 신의 마음은 세상의 기틀이 된다. 緣(연)은 모든 원인의 시초는 으뜸가는 신의 마음임을 전달한다. 즉 으뜸가는 신의 마음은 모든 존재를 품고 있으며 모든 대상이나 사건의 원인이 된다.
止觀二字(지관이자) 原離不得(원리부득) 即定慧也(즉정혜야) 以後凡念起時(이후범념기시) 不要仍舊幾坐(불요잉구기좌) 當究此念在何處(당구차념재하처) 從何起(종하기) 從何滅(종하멸) 反複推究(반복추구) 了不可得(료불가득) 即見此念起處也(즉견차념기처야) 不要又討過起處(불요우토과기처) 覓心了不可得(멱심료불가득)
1. 번역 : ‘그친다’라는 뜻을 지닌 지(止)와 ‘살핀다’라는 뜻을 지닌 관(觀) 두 글자는 본래 다른 뜻을 지녀 떨어져 있지만 따로 떨어진 채 익혀서는 깨달음을 얻지 못 하는데 지관은 곧 선정(禪定)에 들어 깨달음을 얻는 정혜(定慧)를 가리킨다. 선정에 들어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게 된 후에는 생각이 일어날 때 예전처럼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것에 기댈 필요가 없다. 마땅히 이 생각이 ‘어느 곳에 있는지’ 알아야 하고, 어디에서 일어나 어디로 사라지는지 거듭 살피며 규명해야 하겠지만 끝내 규명은 불가능하고 그저 생각이 일어나는 곳을 쳐다볼 뿐이며 또한 생각이 일어나고 지나는 곳을 연구할 필요가 없게 된다. 마음을 찾는 일도 결국 이룰 수 없는 일이었다.
2. 참뜻 : 그친 채 살피는 법(止觀)을 익혀야 한다고 하니 그치는 법이 따로 있고 살피는 법이 따로 있어 각각의 수련법을 따로 익혀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이는 그릇된 생각이다. 지관은 정혜(定慧)라고도 불리는데 정혜는 선정에 들면 절로 깨달음을 얻는다는 뜻을 지녔다. 얼의 작용을 일으키면 넋의 작용은 절로 사라진다. 얼의 작용을 일으키는 존재는 누구인가? 다름 아닌 으뜸가는 신이 얼의 작용을 일으킨다. 깨달음이란 다름 아닌 진리와 진실로 이루어진 으뜸가는 신의 뜻을 가리킨다. 즉 얼의 작용이 일어나기 시작하면 넋의 작용은 그치고 으뜸가는 신과 으뜸가는 신의 뜻이 절로 드러나는데 따로 익히는 법 같은 것이 있을 리가 있겠나? 하여간 이와 같은 경지에 이르면 가부좌를 틀고 앉아 궁리할 필요가 없게 된다. 물론 가부좌를 틀고 앉는 일도 처음부터 필요 없는 일인데 이 말 역시 비유적 표현으로 볼 수 있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 코 끝을 보라.’는 말은 지관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사람은 평상시 가부좌를 틀고 조용히 앉아 숨쉬기 운동에 집중하지 않는다. 즉 넋의 작용을 그쳐 얼의 작용을 일으키라는 말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조용히 있으라는 말이고 으뜸가는 신의 마음을 보라는 말이 ‘코 끝에 집중하라.’는 말에 간직되어 있는 참된 뜻이다. 생각이 어디에서 일어나 어디에 머물며 어디로 사라지는지 명백히 규명해야 하겠지만 그러한 규명은 결국 필요없게 되는데 그러한 장소를 있게 하는 일원신의 마음을 결국 찾아 접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장소는 결국 일원신의 마음이 변해서 된 것인데 무엇을 규명한단 말인가?
吾與汝安心竟(오여여안심경) 此是正觀(차시정관) 反此者(반차자) 名為邪觀(명위사관) 如是不可得已(여시불가득이) 即仍舊綿綿去止(즉잉구면면거지) 而繼之以觀(이계지이관) 觀而繼之以止(관이계지입지) 是定慧雙修(시정혜쌍수) 此為回光(차위회광) 回者止也(회자지야) 光者觀也(광자관야) 止而不觀(지이불관) 名為有回而無光(명위유회이무광) 觀而不止(관이부지) 名為有光而無回(명위유광이무회) 志之(지지)
1. 번역 : 나와 너가 마음을 안정시키는 일(安心竟)이 바로 바르게 살피는 일이다. 이와 반대로 하는 일은 그릇되게 살피는 일이다. 이와 같은 일은 억지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고 즉 오래도록 그치는 일(止)을 지속적으로 하면 살피는 일(觀)로 이어지고 살피는 일(觀)은 그치는 일(止)로 이어진다. 이것이 선정과 깨달음을 동시에 수련하는 법(定慧雙修)이며 이것이 빛을 돌리는 것, 혹은 돌리며 비추는 일(回光)이기도 하다. 돌리는 일을 뜻 하는 회(回)는 그치는 일을 뜻하는 지(止)에 해당되고 빛, 혹은 비추다라는 뜻을 지닌 광(光)은 살피다라는 뜻을 지닌 관(觀)에 해당된다. 그쳤으되(止) 살피지(觀) 않으면 돌리는 일(回)은 있으나 비추는 일(光)이 없다고 하고 살피는 일(觀)은 있으나 그치지(止) 않으면 비추는 일(光)은 있으나 돌리는 일(回)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알아두거라.
2. 참뜻 : 얼의 작용을 일으켜 으뜸가는 신의 뜻과 으뜸가는 신의 마음을 살피는 일이 마음을 안정시키는 일(安心竟)이다. 이와 반대로 넋의 작용을 일으켜 넋의 뜻을 마음에 드러내는 일은 그릇된 길이다. 얼의 작용을 일으켜 으뜸가는 신의 뜻과 으뜸가는 신의 마음을 살피는 일은 억지로 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고 얼의 작용을 일으키는 일을 지속적으로 하다보면 으뜸가는 신의 뜻과 으뜸가는 신의 마음 역시 드러나게 된다. 또한 으뜸가는 신의 뜻과 으뜸가는 신의 마음이 드러나면 넋의 작용은 그치고 얼의 작용이 일어난다. 이것이 선정과 깨달음을 동시에 수련하는 법으로 알려진 정혜쌍수(定慧雙修)이다. 즉 정혜쌍수는 별도의 두 개의 방법이 존재해 따로 익히는 것이 아니라 한 가지 방식으로 동시에 익히는 것을 가리키며 정혜쌍수가 곧 돌리며 비추는 일(回光)을 가리킨다. 돌리는 일은 그치는 일에 해당되고 비추는 일은 살피는 일에 해당된다. 그쳤으되 살피는 일이 없으면 돌리는 일은 있으나 비추는 일이 없다고 하고 살피는 일은 있으나 그치지 않으면 비추는 일은 있으나 돌리는 일은 없다고 한다. 하지만 돌리면 비추어지고 비추어지면 돌려지는 법이기에 어느 것 하나가 결여되어 있으면 제대로 그친 것도 아니고 제대로 비춘 것도 아니다. 즉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에 헛수고를 하고 있는 것인데 한 가지가 결여되어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명심하거라.
출처 : 창천소요파
첫댓글
回光守中
한자한자가 으뜸가는 신의 뜻~참뜻을 밝혀주어
이리 만날수있으니 참 고맙습니다. 감쏴~~♡
귀하고 참 귀하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