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지는 간 데 있고
2012. 금계
[차례]
제1부 : 폭풍 전야
제2부 : 황금시대
제3부 : 복직 이후
제4부 : 퇴직 이후
제5부 : 유붕자원방래
부록
들어가는 말
2005년 5월 12일, 나는 비금도 ‘하늬넘이’에 있었다. 정권율 선생이 꽤 비싼 디지털 카메라로 비금도 낙조를 찍었다. 바로 코앞의 맹감나무와 아스라이 먼 서쪽 바다 위로 처절하고 장엄한 빛을 뿌리는 태양을 어찌 그리 잘 대비시켰을까. 값싼 디카로 앵기는 대로 팍팍 셔터를 눌러버리는 나의 돌팔이 실력으로선 어림없는 작품이다.
어딘지 모르게 애잔하면서도 가슴을 뭉클하게 만드는 낙조가 아름답다. 이제 나이 70이 가까워진 나도 저 수평선 아래로 함몰하는 태양처럼 프롤로그 아닌 에필로그를 써야 할 때에 이르렀다. 디지털 카메라가 내 인생의 후반부에 출현한 탓도 있지만 내 컴퓨터에 저장된 사진을 뒤적거려보니 대부분 전교조와 관련된 인물들로 채워져 있다. 나는 내 보잘 것 없는 인생을 뜨겁게 달구었던 전교조의 행복한 동지들 얼굴을 하나하나 클로즈업 시켜 추억을 더듬고 내 인생을 되돌아보며 슬그머니 미소를 짓는다.
불러도 대답 없는 이름이라고? 아니지, 지금도 여전히 동지들은 이름을 부르면 달려온다니까. 허공에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라고? 아니지, 지금도 여전히 동지들은 끄떡없이 건재하다니까.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낀다고? 아니지, 지금도 여전히 동지들은 여기저기 잘들 계시고 왕성하게 활동하고 계신다니까. 깃발도 잘 나부끼고 동지는 간 데 있다니까.
나는 해묵은 사진첩을 뒤적이며 이제부터 저승에까지 보듬고 갈 만큼 소중하고 그리운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볼 작정이다.
동지는 간 데 있고
제1부 폭풍 전야
문저리 선생의 회상
1970년 군 제대 후 복직한 학교가 고흥군 점암남국민학교였다. 바다가 가까운 그 학교에서 나는 날마다 아침저녁으로 문저리 낚시질을 하다가 동네사람들한테 ‘문저리 선생’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1987년 10월, 나는 월간 ‘신동아’에서 공모한 넌픽션에 ‘문저리 선생의 회상’이라는 글로 우수상을 받았다.
그 글을 쓰게 된 동기가 야릇했다. 목포제일중학교 근무할 때였는데 교감이 교장 연수를 다녀오더니 다음 연수 때 제출해야 할 과제가 ‘학교 교육의 문제점과 그 대책’이란다. 날더러 그 리포트를 좀 작성해주라고 부탁했다.
학교가 싸구려 교육을 시키고 있다. 온갖 구호만 난무하지 실속이 없다. 지나치게 출석, 납부금, 청소만 챙기는 것도 문제가 있다. 학교가 오히려 학생들의 자유로운 창의력을 말살하여 멍청이를 만들고 있다. 현장연구보고대회 문제 있다. 승진하려고 눈에 불을 켜고 있다. 자율학습이 타율학습으로 변질했다. 교장 교감이 독선적이다. 학교를 자유롭고 민주적인 곳으로 만들고 살 맛 나는 곳으로 만들었으면 좋겠다.
이것저것 생각나는 대로 문제점과 대책을 작성해주었는데 곰곰 생각해보니 좀 살을 붙여서 넌픽션에 응모해도 괜찮겠다 싶었다. 덜컥 우수상으로 뽑혀 상금까지 두둑하게 챙겼으니 그때까지는 나도 기뻤고 아내도 기뻐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도 않아 이 ‘문저리 선생의 회상’이 빌미가 되어 전교조에 가입하고 해직까지 당했으니 돌이켜보면 그 때 받은 원고료 백 배 천 배로 대가를 톡톡히 치른 셈이다. 이런 경우를 ‘앞으로 남고 뒤로 밑지는 장사’라 하던가.
훗날 ‘문저리 선생의 회상’은 다른 글들을 합쳐 책으로 출간했다. 자비출판으로 가까운 사람들한테 나누어주었다. 물론 판매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남녀 합동 좌담회
나는 1980년부터 목포항도여중에서 5년간 근무했고 1985년부터 제일중으로 옮겨 근무했다.
나는 그 전부터 왜 초등학교에서는 함께 공부하다가 중학교부터는 남녀가 갈라져서 다른 학교를 다녀야 하는지 의문이 많았다. 제일중으로 옮기자 ‘졸업을 앞두고’라는 제목으로 항도여중 3학년 대표와 제일중 대표 9명씩을 모아 좌담회를 열고 사이사이에 기타도 치고 노래도 불렀다. 모든 과정은 캠코더로 촬영하여 양쪽 학교 교실 TV에 방송하고 학교 신문에도 그 내용을 실었다.
사진 맨 오른쪽 앞이 장이천 선생, 맨 왼쪽 뒤가 김문선 선생, 둘 다 나중에 씩씩한 전교조 동지가 되어주었다.
항도여중 수학여행 때 사진. 장이천 선생과 나는 같은 학년 전반, 후반 네 학급씩 국어를 맡았는데 시험을 보면 장 선생 가르친 반이 평균 5-6점씩 높았다. 늘 그 모양이었다.
89년에 또 목여중에서 그미와 함께 근무했다. 나만큼 고집이 센 처녀였다. 전교조 탈퇴각서 쓰지 않고 해직 당하겠다고 버텼지만 내가 말렸다. 경기도로 가서도 조합비를 목포로 보내왔다. 경기도에서 결혼했다.
장 선생은 서울 집회 때 나를 만나보려고 30분 헤맸지만 찾을 수 없었다. 그 시각 나는 행사장 언저리의 포장마차에 있었다.
그미의 자세한 이야기는 졸저 ‘잠들지 못하는 나무들’에 ‘오수 큰애기’로 썼다.
목포여중에서 홍도 놀러갈 때는 김문선 선생도 나도 참 젊었던가 보다. 김 선생도 장이천 선생처럼 항도여중에서 만났다가 다시 목포여중에서 만났다.
전교조 창립대회 때 서울 올라갔다가 유치장에 들어갔는데 머리카락이 하얘서 젊은 나이에 유치장 좌장을 떠맡았더란다.
정말 끈질긴 인연이다. 퇴직 후에도 함께 ‘화백회’ 회원이 되어 함께 한들한들 팔도유람을 하고 다니니 말이다.
원정(園丁)
박원석 선생. 88년도엔가 강진 병영으로 천렵 갔을 때 찍은 사진 같다. 이 친구 재주가 한두 가지가 아닌데 천렵 갔을 때에도 그가 설치한 두 개의 피리통에 피라미가 득시글거려서 그야말로 물 반, 고기 반이었다. 물론 날로도 먹고 탕으로도 끓여서 안주로 잘 먹었다.
그와는 80년대, 90년대, 2000년대 거의 30년에 걸쳐 항도여중, 목여중, 청호중, 유달중 네 학교에서 만나 함께 근무했다. 나와 가장 많은 학교에서 만난 기록을 세운 장본인이다. 나는 교단생활 40년 동안 친목회를 한 번도 못 맡았는데 박 선생은 가는 곳마다 친목회를 맡았다. 그만큼 친화력이 훌륭하다는 증거다. 친목일마다 박 선생은 동료 교사들 잘 먹이려고 동분서주했다. 농어, 광어, 시장 단골집에서 싼 값으로 생선을 사다가 몇 시간 동안 회를 떴다.
나는 그에게 원정이라는 칭호를 선사했다. 가는 학교마다 국화를 재배해서 가을이면 교무실 현관이나 교실 복도가 훤했다. 아무 보상도 바라지 않고 다만 자기가 원해서 하는 봉사활동이었다. 국화에 얼마나 손이 많이 가는지는 길러본 사람만이 안다.
나는 정규수업 전후에 시행되는 타율적이고 강제적인 자율학습이 너무나 싫었다. 그래서 우리 반 학생들에게 멜로디언을 가져오라 해서 다른 반 조용히 자율학습 하거나 말거나 노래를 연주하게 했다. 또 벚꽃 화창한 봄날이면 살그머니 학급 학생들을 이끌고 학교를 빠져나와 가까운 수원지 벚나무 아래로 가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도록 하였다. 항도여중에서 내가 2학년 주임을 맡았을 때에는 열두 학급인가 되었는데 소질이 있는 학생들을 뽑아다가 시 낭독도 하고, 피아노도 치고, 독창 중창도 하게 해서 자율학습 시간에 2학년 교실로 방송하였다.
박 선생이 체육과였다. 나는 박 선생과 상의하여 어느 오후 자율학습 시간에 2학년 전체를 운동장 스탠드에 앉히고 각 학급 달리기 대표들을 뽑아 학급 대항 400미터 이어달리기 시합을 벌였다. 아이들은 기뻐서 어쩔 줄 모르고 운동장이 떠나가도록 함성을 질러댔다. 깜짝 놀란 교장이 방송으로 2학년 주임을 불렀다. 교장한테 불려간 이후로 다시는 작은 체육대회를 열 수 없었다. 박 선생과 나는 그 뒤로 술만 마시면 이어달리기 하던 항도여중을 회상하면서 씁쓸하게 웃었다. 박 선생은 가는 곳마다 분회원 동지가 되어 항상 나를 든든히 지켜주었다.
박 선생 집안은 예부터 부유한 편이었지만 늘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나도 자전거로 출퇴근했다. 그는 내가 쓸쓸하고 외로워 보일 때마다 술을 사주었다. 그는 술이 세지만 나는 약한 편이었다. 주막에서 나온 내가 위태롭게 자전거 위에서 비틀거리면 그는 꼭 우리 집까지 따라와 안전을 확인하고 귀가했다. 따라오지 마라고 말리면 나중에는 몰래 따라왔다가 작별 인사를 했다. 그러니까 평생 나의 경호원이자 보호자인 셈이었다.
목포제일중학교 교사협의회
지내놓고 나니 꽤 역사적인 사진이 되었다. 흐릿하다고 이상하게 생각 마시라. 그 때는 디카가 없어서 사진첩의 사진을 디카로 다시 찍었으니 희미할 수밖에. 소설에도 분위기 소설이 있다. 이 사진도 분위기 소설 비슷하니 구체적인 얼굴은 자세히 안 보여도 모임의 분위기만 대강 파악하면 되겠지 싶다.
왼쪽 끄트머리 박현송 선생만 무사태평으로 웃고 있지 다들 심각한 표정들이다. 그도 그럴 것이 노태우 군사독재정권 시절에 교육 민주화를 외치며 교사협의회를 창립했으니 앞일을 가늠하기 어려울 때였다. 1987년 내가 ‘문저리 선생의 회상’을 쓸 무렵에 제일중학교 교사협의회가 만들어졌다. 우리는 교실에서, 때로는 중국집에서 끝없이 지루하게 토론과 회의를 계속하면서 학교 현장을 고민했다.
제일중학교 뒷산이 ‘코끼리산’이었다. 우리는 ‘코끼리떼’라는 모임을 만들어 20년 넘게 방학 때마다 친목과 우의를 다지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교장과 반목하던 ‘코끼리떼’에서는 상당히 많은 교장이 나왔다.
목포여자중학교 교사협의회
87년에 제일중학교 평교사협의회를 만들고 내가 회장을 맡았다가 교장한테 미운털이 박혀 88년 3월에 목포여중으로 강제 전보발령을 받았다.
이 사진도 진짜 희미하게 나왔다. 89년 봄에 목포여중 교사협의회가 만들어졌다. 교사협의회가 전교조로 전환하면서 정부 탄압이 시작되었고 시국이 어수선해지면서 다수의 교사들이 빠져나갔다.
89년 8월, 결국 나는 탈퇴각서를 쓰지 않고 버티다가 목포여중에서 해직 당했다. 소나기가 억수로 퍼붓던 날, 처녀 선생 셋이 우리 집을 찾아왔다. 절대로 전교조 탈퇴각서를 쓰지 않고 끝까지 버티다가 함께 해직당하겠다고 울먹였지만 나는 그들을 말렸다. 안에만 있어도 안 되지만 밖에만 있어도 안 된다. 이 학교 해직은 나 하나로 족하니 멀리 미래를 내다보고 안에 남아서 열심히 참교육을 위하여 활동해주기 바란다. 특히 처녀 선생들은 시집도 가야 하지 않겠는가.
전교조 목포지회 창립
1989년 6월, 교사협의회를 거쳐 드디어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목포지회가 창립되었다. 지금의 목포과학대 강당. 크고 작은 깃발에 가슴이 쿵쾅거리고, 천여 명의 함성이 강당을 뒤흔들었다. 운동권 가요가 울려 퍼질 때마다 코끝이 찡했다. 권리는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온갖 난관을 돌파하고 쟁취해야만 획득하는 것이었다. 산다는 것은 싸운다는 것이었다. 험준한 산맥과 소용돌이치는 강물이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목포여상고 오영석 선생이 초대지회장을 맡았다. 내가 부지회장을 맡았다. 오른쪽 사진 맨 왼쪽에 문태중학교 김정만 선생님이 보인다. 나보다 열 살 더 자셨다. 참교육 때문에 무척 노고가 많으셨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그분이 혈육처럼 그립다. (1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