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218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사순절 제1주일)
무지개 - “때가 찼다”
창9:8~17; 벧전3:18~22; 막1:9~15
오늘 우리는 세 군데 본문을 읽었습니다. 창세기 9장은 대홍수로 모든 것이 쓸려가 버린 후에 하나님께서 노아와 다시 언약을 맺으시는 장면입니다. 홍수가 끝난 후에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땅을 파멸시키는 홍수가 다시는 없을 것이고 살아 숨 쉬는 모든 것들을 기억하시겠다고 말씀하시며 새로운 창조(재창조)를 약속하십니다.
베드로전서 3장에서는, 옛날 노아 시대에 세상이 물에 잠겼던 것을 물속으로 들어가는 세례의 상징으로 보고, 거기서 구원받은 노아네 식구들이 새로운 구원을 받은 것으로 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우리에게 “선한 양심으로 하나님께 응답하도록” 이끌어줍니다.
또 마가복음 1장은,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물로 세례를 받으신 후에 광야로 나가 40일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신 후에 갈릴리로 가셔서 복음을 전하셨다 하는 내용입니다.
여기 세 본문에 공통적으로 나오는 것이 “물속에 들어감”, 즉 세례와 “새로운 약속으로 들어감”, 즉 부활입니다. 물속에 들어가는 것, 세례가 “작은 죽음”이라면, 새로운 약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새로운 창조”요, “하나님 나라”라고 할 수 있겠지요.
여러분, 노아 홍수 이야기를 다 아시지요? 창조 이후 사람들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 찬 것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셨음을 후회하십니다. 그래서 사람부터 세상에 창조한 모든 것을 쓸어버리겠다고 하시면서도, 노아라는 사람에게는 방주를 만들라고 하시고, 살아있는 짐승들을 방주로 이끌라고 하십니다. 40일 간의 큰 홍수로 세상의 것들은 모두 쓸려가고, 노아의 가족들은 150일 간의 큰 혼돈의 시간을 보냅니다. 그런 후에 비둘기가 물고 온 올리브 잎을 보고 다시 뭍으로 내려가 하나님께 제단을 쌓는 이야기입니다.
노아의 홍수 이야기가 담고 있는 주제는 큰 혼돈 다음에 오는 새로운 질서, 새로운 구원, 새로운 창조입니다. 노아의 식구들이 홍수를 겪었던 시간은, 성경의 문자 그대로 따진다면, 14개월 가까이 걸립니다. 방주에 들어간 지 1년 2개월 후에 노아의 식구들이 방주에서 나왔을 때,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홍수에 쓸려가 버리고 황량한 벌판만 드러났습니다. 온전하게 살아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이 혼돈과 무질서로 가득 찬 처참한 세상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것을 카오스(혼돈)라, 더 심하게 말하면 파국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세상이 창조되기 전,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었다” 라고 한 바로 그 상태로 되돌아간 것입니다.
홍수를 겪고 난 노아에게 하나님께서 한 가지 약속을 하시지요. “이제 다시는 홍수로 생명 있는 모든 것을 멸하지 않겠다... 무지개가 나타날 때 땅 위에 있는 살아 숨 쉬는 모든 것과 세운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겠다.” 그러면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9:1)고 말씀하십니다. 한 마디로 이 땅에 다시 생명들로 가득 차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창조 때 아담과 하와에게 주셨던 축복을 상기시켜 줍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할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이라는 분이 너무 변덕스러운 것이 아닌가? 창조할 때는 언제고 또 창조한 것을 후회하고 홍수로 모든 것을 쓸어가 버리고, 또 땅을 저주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시고... 그러니까 홍수 이야기 자체만 보면, 하나님은 종잡을 수 없고, 우리 인간은 두려움 속에서 하나님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존재처럼 보인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을 너무 평면적이고 결정론적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책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전지적 시점을 가진 자가 그저 일어난 일을 단순히 기사화해서 내놓은 책이 아니라는 겁니다. 여기엔 인간들이(특별히 이스라엘이), 삶이란 무엇인지, 어떻게 사는 것이 제대로 사는 것인지, 다시 말해 어떻게 사는 것이 복을 받는 삶인지, 자신들의 신앙 안에서 자신들이 경험한 하나님을 오랜 숙고와 반성 가운데 내어놓은 것입니다. 이 과정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전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비슷한 씨름을 하게 될 때 성경 속에서 우리 믿음의 조상들이 공통적으로 만났던 어떤 삶의 원형들을 발견하게 되고, 그 속에서 우리의 신앙과 삶을 비추어 어떤 지혜의 빛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쓸려가 버리고 혼돈 가운데 처하는 일들은 우리 삶 가운데서도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에게도 혼돈과 무질서로 가득찬 시간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갑작스런 외적 환경에서도 오지만, 우리의 내면의 풍경들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가 새로운 단계로 들어서거나 새로운 질서로 들어서기 위해서 이런 혼돈과 무질서를 먼저 만나야 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깨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혼돈과 무질서를 만나면, 그 다음 과정은 사실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파국이 온 것만 같고, 이제 끝났다는 생각이 먼저 듭니다. 이것이 어떤 급작스런 시건이나 사고로가 아니라 만성적인 느낌으로 오는 경우는 더욱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노아의 이야기가 보여주는 사실은 바로 그 혼돈과 공허와 어둠의 자리에 무지개가 선명하게 떠오른다는 것입니다. 노아는 그 무지개를 보면서 하나님의 새로운 약속을 듣습니다. 자신과 온 인류가 저주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심판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와 약속은 늘 새롭게 갱신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럼으로써 그는 그 혼돈과 무질서를 절망의 소재로 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새롭게 창조하시려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보게 됩니다. 아, 이곳에도 하나님의 빛이 비치고 있구나, 이곳에도 하나님의 사랑이 유효하구나, 이곳에도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고 있고, 하나님의 약속은 살아있구나! 이것을 깊이 체험했다는 것이 오늘 창세기 본문입니다. 독일의 신학자요 설교가인 헬무트 틸리케 목사님은 이러한 노아의 태도를 한 마디로 말하는데, “믿음의 모험”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보여주신 것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늘 새롭게 창조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빛이 조그만 틈도 뚫고 비추려 하듯이, 하나님의 사랑은 틈만 있으면, 어디든 뚫고 들어가십니다. 저는 이것이 하나님 사랑의 속성이라고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보여주신 것이 바로 이 하나님의 사랑이고, 우리의 삶 속에, 그 삶이 지금 어떠한 상황 속에 있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그 사랑이 비추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사랑만 제대로 잘 받을 수 있다면, 우리가 노아가 경험한 하나님 사랑의 약속 안에 있다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신 하나님 은혜 안에 있다면, 우리는 우리가 매 순간 만나는 삶의 위기 속에서도, 알아차리는 순간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그분의 이끌림을 받으며, 더욱 온전한 전체를 향하여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나 우리가 잘 알다시피, 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 약속을 붙잡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 사랑과 은혜는 쉽게 경험되지 않습니다. 자신의 평범한 일상의 삶 가운데서, 그것도 다람쥐 체바퀴 도는 것과 같은 지루한 일상 가운데서, 어쩌면 고통스럽고 혼돈스런 일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하기보다 그 홍수 속에 빠져 쓸려가 버리는 경우가 더욱 많이 있습니다.
노아가 받았던 그 약속을 어떻게 받을 것입니까? 그래서 우리의 삶이 어떤 상황 속에서도 저주 아래 있는 것이 아니고, 그럴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심판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경험할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로서, 오늘 베드로전서가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힘입어서 선한 양심이 하나님께 응답하는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오늘 마가복음 본문에서 예수님은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는 하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리고 곧 이어 성령은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다고 합니다. 여기서 “내보내셨다”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엑크발로”라고 하는데, 문자적으로는 “내 던진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몰아낸다, 쫓아내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개역성경은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라고 번역하고 있지요. 세례 받고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라는 소리를 듣고 나서, 예수님은 “곧바로”(유두스, 곧장, 즉각적으로, 마가는 이 단어를 문장 맨 앞에 놓아 강조하고 있습니다) 광야로 내던져 집니다. 그리고 거기서 사십일 동안 사탄에게 시험을 받습니다. 마가복음은 마태나 누가와는 달리 예수님이 여기서 어떤 시험을 받았는지는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들짐승과 함께 지내셨다는 말을 통해 그 자리가 매우 황량하고 공포스러웠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런 중에도 천사의 동행도 있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세례 받고 하늘의 음성을 들은 후에 곧바로 광야로 내던져 졌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이것은 우리 모든 인간들이 갖는 숙명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약속을 좇는 사람들, 이 땅에서 “숨겨진 온전함”을 알아보고 그것을 받아들이려는 사람들에게, 광야는 선택과목이 아니라 필수과목입니다. 이것은 조셉 켐벨이 영웅의 여정에서, 모험에의 소명-시련의 길-귀환이라고 구조화한 것과도 비슷합니다. 그래서 오늘 노아도 그 엄청난 홍수를 견뎌야 했고, 아브라함도 약속을 따라가는 긴 여정을 거쳐야 했으며, 이스라엘도 40년 광야생활을 거쳐야 했습니다.
우리가 맞는 고난들, 특별히 외적인 고난들이 모두 다 내일을 위한 고난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모든 고난을, 우리의 메마른 삶을 어떤 태도로 받아들이는가는 우리의 내일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러므로 광야의 여정을 걷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광야의 황량함과 메마름에 빠져 매몰되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는 것입니다. 노아가 홍수에 쓸려간 다른 사람들과 달랐던 것은 홍수에 매몰되지 않는 방주에 타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 방주는 하나님의 약속을 상징합니다. 그 결과 그는 마침내 단단한 땅에 발을 딛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또 다른 약속의 상징으로 무지개가 나옵니다. 오랜 비가 내린 후에 선명한 무지개는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탄성을 지르게 합니다. 아마도 광학 지식이 없던 고대의 사람들이 홍수로 인해 큰 재난을 겪고 나서 비가 그치고 하늘에 뜬 선명한 무지개를 보았을 때 그것을 하나님의 새로운 약속으로 보았다는 것은 쉽게 납득될 수 있습니다. 오늘날 하늘에 뜬 무지개를 그런 식으로 보는 사람들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에 뜬 무지개가 아니라, 우리 안에 뜨는 무지개를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하나님의 약속을 상기하고 다시 붙잡아야 합니다.
내 안의 무지개, 그것은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선포하신 하나님의 복음,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라는 말씀을 상기시켜 줍니다. 예수님은 “때가 찼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때”는 그냥 흘러가는 시간인 “크로노스”가 아닌, 은총의 시간, 현재의 충만함, 지금 여기의 충만함인 “카이로스”입니다. 지난 주 재의 수요일에 읽었던 사도바울의 말씀, “보십시오. 지금이야말로 은혜의 때요, 구원의 날입니다.”(고후6:2)의 이 시간이 바로 “카이로스”입니다. 이 “때”(카이로스)를 알아본 순간 우리는 우리 안에 무지개를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때를 알아보는 것은 뭔가를 빨리 얻어내려는 우리네 조바심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이것은 조급함으로 되지 않고 오히려 겸손함으로 가능합니다. 겸손은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초연하게 볼 수 있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이 때를 알아볼 때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특징은 기쁨입니다. 사도 바울도 “하나님 나라는 먹는 일과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희와 평화와 기쁨입니다.”(롬14:17)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번 사순절은 무엇보다 온전한 기쁨을 회복하는 사순절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먹고 마시는 것도 일종의 기쁨이 되겠지만, 그것이 참 기쁨이 되기 위해서는 성령 안에서 누리는 기쁨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 다음 예수님은 “회개하여라” 말씀하십니다. 토마스 키팅은 이 말을 “행복을 찾는 방향을 바꾸어라”라는 말이라고 풀어줍니다. 먹고 마시는 기쁨보다 더 온전하고 참된 기쁨, 먹고 마시는 기쁨을 진짜 기쁨으로 만들어 주는 기쁨을 찾으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예수님은 복음을 믿으라고 합니다. 복음의 요약은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딸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믿을까요? 기분 좋을 때 잠시 보이다가 기분이 꿀꿀해지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사라지는 무지개를 어떻게 믿을까요?
저는 이 일을 위해 우리가 모여서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혼자서는 힘들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서로 힘을 주고 받으면서 작은 공동체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공동기도에서 기도했지만, 우리의 하나님 자녀됨을 방해하는 수없이 올라오는 두려움과 의심을 넘어 하나님의 현존 안에 잠길 수 있을 때까지 우리는 서로 힘을 주고받으며 같이 나갈 수 있습니다.
이 “함께”는 “홀로”를 동반해야 합니다. “홀로”는 “함께”를 가능하게 하는 원천이며, 또 “함께”는 “홀로”를 계속할 수 있는 힘입니다. 혼자만 할 수 밖에 없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도입니다. 혼자서 주님 안에 있어보는 시간입니다. 그것이 꼭 향심기도이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향심기도는 여러 기도 방법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나 기도의 가장 기본적인 태도를 향심기도는 가르쳐 주고 경험하게 합니다. 그것은 내가 붙잡고 매달리고 있는 것들에서 떨어져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행복을 찾는 방향을 바꾸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말로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실제로 삶에 참여함으로 가능하다는 것도 알려줍니다.
오늘 테오리아에 올린 바실 페닝턴의 말을 읽어보겠습니다.
"향심기도를 배워서 지속적으로 할 수 있다면, 우리는 기대했던 것보다 더 빨리 카이로스의 삶, 분명한 현존, 대단한 평화, 끊임없는 기쁨 속에서 충만한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 지상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기도
사랑의 하나님, 우리가 주님의 약속을 다시 굳게 붙잡는 사순절을 맞았습니다. 우리의 실수와 약점에도 불구하고 거듭거듭 때를 찾고 회개하며 복음을 믿는 모험에 뛰어들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