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레오와 별이 보내는 편지
천체 관측과 교리와 기술, 종교적인 가르침 그리고 개인적인 견해 등이 아주 혼란스럽게
얽혀 있는 상태에서 17세기와 함께 갈릴레오의 시대가 열렸다.
1609년, 갈릴레오는 망원경을 처음 만들어 천체 관측을 시작했다. 안경에 끼는 렌즈가 알
려진 것은 13세기부터였으며 갈릴레오 역시 망원경을 만들 때 가끔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를
활용했다. 하지만 그는 항상 자기 혼자서 망원경을 발명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다른 사림
에게 광학 기술을 배운 적이 전혀 없기 때문에 케플러의 굴절 이론에 근거해 렌즈 체계를
만들었다고 했다. 갈릴레오가 과학에 기여한 가장 큰 부분은 망원경을 실용적으로 응용했
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이 직접 망원경을 발명했다고 주장하면서, 그것을 베니
스 공화국에 팔아 개인적인 소득을 올렸다.
그는 코페르니쿠스의 저작물에 영향을 받아 직접 관측한 결과, 지구가 태양 주변을 돈다
는 지동설에 대한 신념을 재차 확인할 수 있었다. 1610년, 그는 <별이 보내는 편지>를 출
간했다. 이 책을 통해 그는 목성에 네 개의 위성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갈릴레오는 에 개의 위성을 메디치 가문의 위성이라고 명명했다. 그것으로 메디치 가문의
환심을 사는 데 성공했다.
그후 갈릴레오는 관측 대상을 토성의 위성과 금성의 위성으로 돌렸다. 이 작업은 그에게
커다란 명성을 안겨 주었다. 그이 명성은 유럽 과학계에 질투를 불러일으켰으며, 이들은 갈
릴레오의 연구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물론 이들에겐 갈릴레오의 주장을 검증하는 데
필요한 망원경도 없었다. 게다가 특별한 장비의 도움 없이 눈으로 관찰 가능한 것만 믿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교회 내부에서도 저항이 일어났다. 다행히 케플러가 갈릴레오의 주장
을 대부분 확인해 그에 대한 불만을 해소시켰다.
하지만 이것이 교회가 갈릴레오의 해석을 받아들였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교회 권
위의 마지막 보루는 <성서>이며, <성서>구절은 지동설과 분명히 달랐다. 그럼에도 갑자기
치솟은 자신의 명성에 자극을 받은 데다가, 언제나 자신이 독실한 가톨릭 신자라고 고백하
던 갈릴레오는 로마를 방문해 교회 당국의 비위를 맞추려고 노력했다.
비록 그의 관측 내용이 예수회 천문학자들에 의해 확인되었고, 교황 파울루스 5세를 알현
할 수 있었지만, 갈릴레오의 해석은 문제를 일으킬 수 밖에 없었다. 비록 하느님이 달을 표
면이 울퉁불퉁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지만 실제로는 완벽한 평면이라는 교회의 주장에 대
해 갈릴레오는 이렇게 말했다. "이 주장은 상상력의 극치라 아니할 수 없다 . 안타싸운 사
실은, 이 주장이 검증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갈릴레오는 교회의 위험 인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태양 흑점에 대
한 관측 결과를 둘러싸고 예수회 과학자 샤이너 신부와 논쟁을 벌였다. 갈릴레오는 흑점이
원을 그리며 운동하는 걸 보면 태양이 움직이는 게 틀림없다고 주장한 반면, 샤이너 신부는
흑점이 하나의 별이라고 주장했다.
이 논쟁은 그 동안 잠잠했던 <성서>구절과 지동설의 논쟁을 또다시 불러일으켰다. <성
서>에는 여호와가 태양에게 "가만히 정지해 있어라" 하고 명령했다는 구절이 분명히 나와
있다. 갈릴레오는 하느님이 두 개의 언어를 사용했다고 하면서, <성서>에 담긴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언어와 과학에 사용한 수학적인 언어가 바로 그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전
자의 언어에서는 태양이 지구 주변을 돌지만, 후자의 언어에서는 지구가 태양 주변을 돈다
는 모호한 의견을 내놓았다.
하지만 신학자들은 이 같은 변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성서>에서 솔로몬운 "태양은
올라갔다가 내려간다. 그리고 자신이 있던 곳으로 서둘러 돌아간다."고 선언했다. 이것이야
말로 태양이 지구 주변을 돈다는 너무나 명쾌한 설명이다. 그래서 결국 갈릴레오는 1616녀
에 창조주를 모독했다는 죄명으로 법정에 섰다. 갈릴레오를 서게 한 판단 기준은 다음과
같은 <성서>구절이었다. "천사 두 명이 하늘로 승천하는 예수를 목격한 갈릴리 주민들에
게 더 이상 보이지 않을 터이니 오 이상 하늘에 눈을 고정시키지 말라고 말했다." 이 구절
이 갈릴레오를 비롯해 다른 천문학자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했다. 별들을 더 이상 바
라보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갈릴레오가 심각한 곤경에 이르지는 않았다. 교회가 그의 믿음을 의심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탈리아 밖에서 출판된 갈릴레오의 광범위한 활동 내용
은 골칫거리였다. 교황청은 지동설을 이단이라고 공식 선포했으며, 갈릴레오에게 생각을 비
꾸라고 명령했다. 만일 갈릴레오가 이 명령을 받아들이지 앉는 다면 감옥에 가둘 수밖에
없다고 선언했다. 그러자 갈릴레오는 교황의 명령을 정중하게 받아들였고, 가볍게 꾸중만
듣는 정도로 이 사건을 일단락 되었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 논쟁의 소지가 될 만한 작업은
하지 않으려고 무던히 노력했다.
1623년, 우르바누스 8세가 교황이 되었다. 그는 과학에 지대한 관심을 가진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갈릴레오는 이러한 성향을 가진 교황의 입성을 환호 했다. 그는 이제 계몸
기가 시작될 거라고 믿었다. 많은 과학자들이 관찰내용에만 몰두할 뿐 자신의 인간적인 결
점을 쉽게 외면하는 습성을 가지고 있듯이, 갈릴레오 역시 자신이 이룩한 업적을 들어내고
싶어 로마로 갔다. 교회의 1616년 결정은 번복되어야 옳지 않겠느냐는 갈릴레오의 질문에
대해 우르바누스 8세는 조심스런 자세를 취했다. 갈릴레오는 자신에게 닥칠 수도 있는 위
험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기고만장하게 행동했다. 우르바누스 8세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충고했다.
"설사 지구가 태양 주변을 돈다는 증거가 많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하느님이 태양에게
지구 주변을 돌도록 하면서 인간의 눈에 전혀 다른 환상이 보이도록 만든 것일 수도 있는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이 같은 언급은 두 진영을 확실하게 포섭하는 전형적인 자세
였다. 여기에 우르바누스 8세가 만일 지동설을 다시 심사하면 자신은 그 주장을 이단으로
규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측근 추기경에게 말했다는 소문을 들은 갈릴레오는 더욱 기고만장
해졌다.
그는 교황의 경고를 가볍게 흘려버린 채, 집으로 돌아가서 1616년의 결정을 재고해야 한
다는 캠페인을 벌였다. 교회측이 지구가 고정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근거 가운데 하나는, 무
거운 물체를 높은 곳에서 떨어뜨리면 수직으로 곧장 떨어지는데, 만일 지구가 움직인다면
그 물체는 다른 힘을 받아 옆으로 떨어져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움직이는 배의 제일
높은 돛대 위에서 물건을 떨어뜨리면 그 물건이 뒤로 떨어진다는 사실을 사례로 들어가며
강변하기도 했다.
갈릴레오는 이 같은 주장에 대해 자신이 직접 움직이는 배 위에서 동일한 실험을 해보았
지만 아무런 결과도 얻지 못했다고 보도했다. 침묵의 미덕을 강조하는 속담이 많이 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과학자들은 자신이 발견한 내용에 대해 떠벌리는 존재로 유명하다.
갈릴레오 역시 이 같은 실수를 저질렀다. 그는 세 명이 등장하는 희곡 같은 대화집을
발간했는데, 첫 번째 사람은 천동설의 우수성을 늘어놓았고, 두 번째 사람은 지동설을 주장
했으며, 세 번째 사람은 중립을 지켰다. 그런데 이 희곡집의 내용 일부가 갈릴레오의 운명
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등장 인물 세 명이 여러 가지 형태로 해석될 수 있었기 때
문이다. 우르바누스 8세는 천동설을 주장한 인물이 바로 자신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와중
에 스페인 대사는 대륙에서 일어난 정치적 분쟁으로 인해 우르바누스 8세가 이단자들과 어
울린다는 비난을 들었다. 게다가 샤이너 신부와 갈릴레오 사이에는 흑점을 둘러싼 오래된
갈등이 해결되지 않은 채 앙금으로 남아 있었다. 강력한 음모가 싹틀 요소가 충분했던 것
이다.
1632년 겨울, 갈릴레오는 즉시 재판정에 출두하라는 긴급 명령을 받았다. 갈릴레오가 그
명령을 취소하도록, 아니 최소한 다음해 봄까지 연기하도록 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한 후, 재
차 발행된 소환장에는 교황청의 분노가 잘 나타나 있다.
교황청의 본 성성(교황과 추기경들로 이뤄지는 교황청 최고 회의)은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로마로 출두하라는 명령에 즉시 복종하지 않은 것에 대해 매우 불쾌하게 생각한다. 이 같
은 불복종을 계절 탓으로 돌릴 수 없다. 지금 이 시간에 오지 않는 건 갈릴레오 자신의 잘
못이기 때문이다. 갈릴레오는 지금 아픈 척하면서 여러 가지 문제를 회피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성하를 비롯해 여러 추기경들께서는 갈릴레오가 하는 말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으
신다. 만일 갈릴레오가 지금 당장 복종하지 않는다면, 주교 대리 한 사람과 의사를 파견해
갈릴레오를 잡아와 이곳 대법정 감옥에 가둘 것이다. 지금 이 시간까지 갈릴레오는 본 성
성의 자비를 남용해 왔다. 따라서 이후 벌어질 사태에 대해 갈릴레오는 모든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갈릴레오는 1633년 1월, 69세의 노구를 이끌고 아무런 희망도 없이 낙담한 표정으로 로마
를 향한 힘든 여행을 시작했다. 당시 그는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기록했다. 곰곰이 생각하
니, 오랜 세월에 걸친 연구와 노력의 결실이 여전에는 이름없는 학자의 귀까지 내 이름을
전달해주었지만, 지금은 내 평판에 심상치 않은 오점으로 변했구나. 그래서 내 적들이 내 친
구들을 핍박하고, 마침내 내가 커다란 죄를 짓고 성성의 대법정 앞에 서게 되었다며 비난할
빌미를 주는구나.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모든 연구에 투자한 시간 전부가 혐오스럽
게 여겨질 뿐이다! 내가 오랫동안 연구에 몰두한 이유는 여러 학자의 케케묵은 관념으로부
터 내 자신을 분리시키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내 글 일부를 세상에
내보인 것을 후회하게 만들고, 이 두 손에 남아 있는 열정을 억누르며 저주하도록 만들어,
내 적들의 굶주린 배를 채워주는구나. 그들에게 내 생각은 문젯거리에 불과하구나.
갈릴레오에겐 기회가 없었다. 감정적인 공격만 가득할 뿐 과학적으로 논쟁할 여지가 전
혀 없었던 것이다. 갈릴레오로서는 너무 고통스럽고 피곤해 제대로 자기 주장을 펼 수도
없었다. 그래서 코페르니쿠스의 이론 전체가 엉터리라고 공식적으로 선언했고, 무릎을 꿇고
한 손을 <성서>에 올려놓은 채 반성문을 낭독했다. 나, 갈릴레오, 피렌체 지방의 빈센초
갈릴레이의 아들은 70의 나이가 되어 재판정에 소환되어 가톨릭 정신에 위배되는 이단적인
악행을 물리치는 성화와 너무나 고귀한 추기경님들 그리고 재판관님들 앞에 무릎을 꿇고,
신성한 <성서>를 눈앞에 두고, 한 손을 성서에 올려놓은 채 성 가톨릭과 성하의 교회가 가
르치고 설교하는 모든 내용을 지금까지 계속 믿어왔으며, 지금 현재도 믿고 있으며, 하느님
의 도움을 받아 앞으로도 영원히 믿을 거란 사실을 맹세 합니다.
태양은 이세상의 중심으로 움직이지 않고, 지구는 이 세상의 중심이 아니며 움직이고 있
다는 잘못된 의견을 전면적으로 포기해야 한다는, 말이든 글이든 어떤 형태로도 위의 잘못
된 주장을 가지고 있거나 주장하거나 가르치면 안 된다는 정당한 가르침을 받은 후에도, 그
리고 위의 주장이 <성서>내용에 위배된다고 지적을 받은 후에도, 제가 위의 저주받은 주
장이 담긴 책을 집필하고 출간했으며, 어떤 해결책도 제시하지 않은 채 그 주장을 변명하려
고 노력했기 때문에, 저는 존경하는 성성에 의해 이단이라는, 태양이 이 세상의 중심으로 움
직일 수 없으며 지구는 이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 움직인다고 믿고 주장했다는 엄중한 혐의
를 받고 있습니다.
따라서 제가 받고 있는 이 엄중한 혐의를 존경하는 성성를 비롯해 신실한 모든 신자의 마
음속에서 씻어내기를 기원하면서, 진실한 마음과 거짓 없는 믿음으로 저는 위의 오류와 이
단적 주장 그리고 성 교회에 위배되는 다른 모든 오류와 이단과 분파주의를 저주하고 경멸
하고 멀리하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저 자신에게 이와 유사한 혐의를 씌울 가능성이 있
는 내용을 결코 두 번 다시 입에 담거나 주장하지 않겠다고 맹세합니다. 하지만 만일 이단
혐의가 있는 사람이나 이단자를 발견하면, 저는 그 즉시 그 자를 이 성성 또는 제가 머무르
는 곳의 재판관에게 고발할 것입니다. 나치나 매카시의 강요에 의한 자기 비판과 너무나
유사한 표현들이 아닌가!
갈릴레오의 <두 개의 주된 우주 체계, 프톨레마이오스와 코페르니쿠스, 에 관한 대화>는
코페르니쿠스 학파의 모든 저술서와 함께 금서 목록에 들어가, 그후 200여 년 동안 사람들
에게 전달되지 못했다. 갈릴레오는 장님이 되어 말년을 보내는 동안 문제의 소지가 있는
분야에 결코 손을 대지 않았다. 사망하기 1년 전인 1641년 3월, 갈릴레오는 이런 글을 썼
다. "코페르니쿠스 학파가 틀렸다는 주장은 어떤 식으로든 반박될 수 없으며, 특히 우리 가
톨릭 신자는 교황청의 가르침에 따라야 한다. "
1642년, 갈릴레오가 사망하자, 교회는 그의 무덤에 어떤 기념비도 세우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100년 정도가 지난 후, 교회는 갈릴레오를 가엽게 여겨 코페르니쿠스 학파
이론을 언급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내걸고 기념비를 세울 수 있도록 허락했다. 1822년 교회
는 마침내 갈릴레오와 코페르니쿠스의 저서를 금서 목록에서 해제하는 데 동의했다.
우리는 교회측이 조금만 겸손했어도 갈릴레오가 그 같은 고통을 겪지 않았을 거라는 사실
을 명심해야 한다. 갈릴레오의 천체 관측의 내용은 그가 성능이 우수한 30배율의 망원경을
만드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는 걸 암시한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같은 과학자들은 그 같
은 기술 비법을 공개하길 꺼려했다.
로마의 권력층 내부에서 갈릴레오가 행한 정치 활동은, 그가 발견한 내용의 중요성을 이
해할 수 없는 사람들의 믿음과 지위를 위협했다는 점에서 아주 경솔했다. 일반적으로 볼
때, 오늘날까지 권력층은 과학자들을 그다지 환영하지 않는다. 그리고 갈릴레오와 같은 사
례는 정기적으로 반복되는 경향이 있다. 3세기 후의 인물인 오펜하이머가 좋은 사례다.
빛의 역사 [지은이: 리차드바이스/ 옮긴이: 김옥수 ]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