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일찍 집을 나섭니다.
오늘은 전국이 꽁꽁 얼어 부산은 영하 7도, 서울은 영하 15도랍니다.
저는 남들과는 정반대로 따뜻한 남쪽나라에서 추운 겨울나라로 이동하는 이상한 행보를 합니다.
이유는 단 하나! 국립중앙박물관의 '스투파의 숲' 특별전 개막날에 맞춰 첫 전시를 보기 위해서입니다.
최강한파로 KTX도 연착되어 중박에는 9시 40분에 도착하였습니다.
부산에서는 전혀 맛볼 수 없고 서울에서도 가끔 맛볼 수 있다는 매운 맛 강추위에도 벌써 열 분 넘게 줄을 서있습니다.
일본 도쿄박물관은 개장 전부터 늘 줄을 서 있어서 내심 부러웠는데, 이제 우리나라도 그런 반열에 오른 것 같습니다.
지난달 중국 북경국가박물관과 남경박물관을 방문했었는데, 이제 중국박물관들도 대기줄이 상상이상이었습니다.
당일치기로 부산에서 온 것이라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 식음과 화장실을 전폐하고 관람에 몰두했습니다.
실제 관람을 했던 작품들은 재회해서 반가웠고, 몇몇 작품들은 도록에서만 보다가 실견할 수 있어서 기분이 좋았습니다.
관람을 하면서 전시 큐레이터가 누군지 궁금해졌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전시 구성보다 설명 카드를 누가 작성했는지가 무지 궁금했습니다.
기존의 현상적인 설명이 아니라, 관람객들이 작품의 상징을 해석할 수 있도록 유도한 몇몇 설명은 일품이었습니다.
공동주최기관인 뉴욕 메트로폴리탄박물관의 큐레이터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큐레이터가 작성한 것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작품의 상징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전시작품 중 세 작품에 대한 제 개인적인 의견을 올립니다.
작품의 형식은 제각각일지 몰라도 작품의 상징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기에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드디어 입장을 합니다.
스스로 궁금증을 증폭시키기 위해서 전시에 대한 배경지식을 전혀 알아보지 않았습니다.
코끼리 등에 올라타고 그 시절 인도 속으로 뚜벅뚜벅 입장합니다.
첫 번째 작품입니다.
바르후트 스투파의 울타리 조각입니다.
항아리가 작품의 중심입니다.
솔직히 우리나라 전시에서 '풍요의 항아리'라는 표현을 본 기억이 거의 없습니다.
불교미술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미술과 심지어 우리나라 민화에도 '풍요의 항아리'가 수없이 나타납니다.
하지만 대부분 꽃병 또는 화병(花甁)이라는 용어를 사용해 왔습니다.
꽃병이나 화병은 육안으로 보이는 현상만을 말하는 것일 뿐, 그 안의 깊은 본질과 상징은 전혀 담아내지 못하는 용어입니다.
그렇기에 '풍요의 항아리'라는 표현이 놀랍고 반가웠습니다.
물이 가득 찬 항아리라고 해서 우리가 생각하는 그 물만을 생각하면 좁은 해석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 작품들을 보다 보면, '풍요의 항아리'는 그보다 훨씬 더 넓은 해석의 여지를 주기 때문입니다.
작품에 따라 우주의 대생명력, 절대진리 등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위 작품을 채색분석한 것입니다. 제가 한 것이 아니라 강우방 선생님이 하신 것입니다.
채색분석이란 작품의 밑그림을 그린 다음 다시 차례대로 색깔을 칠하면서 작품을 분석하는 것입니다.
그냥 작품을 살펴보는 것보다 훨씬 명징하게 분석할 수는 있으나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작업입니다.
학자들은 넝쿨 무늬를 당초문(唐草文) 또는 만초문(蔓草文)이라 부릅니다.
무늬가 넝쿨처럼 생겼다는 것이지, 진짜 식물의 넝쿨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넝쿨은 우주의 대생명력이 무한히 확장하는 모습을 가시적으로 표현한 조형 중에 하나일 뿐입니다.
연꽃의 넝쿨뿐만 아니라 다른 다양한 꽃들의 넝쿨 모두 우주의 대생명력이 무한히 펼쳐지는 모습이라 볼 수 있습니다.
넝쿨을 실제 식물의 넝쿨로 보면, 작품의 본질과 상징을 제대로 읽을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두 번째 작품입니다.
약샤가 작품의 중심입니다.
약샤는 탄생, 생장, 소멸하는 자연의 순환과 풍요의 정령을 의인화한 것입니다.
남성으로 의인화한 것은 약샤, 여성으로 의인화한 것은 약시라고 부릅니다.
약샤의 입에서 넝쿨 같은 것이 나와서 뻗어나갑니다.
표현공간과 상관없이 무한하게 뻗쳐나간다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자연의 풍요로움이 온세상에 펼쳐지는 것이고, 우주의 대생명력이 온누리에 끝없이 퍼져나가는 것이니깐요.
약샤의 입에서 현상적인 연꽃 넝쿨만을 뿜어낼리는 없겠지요.
자연의 정령인 만큼 동물과 식물 등 모든 자연물을 탄생시킬 수 있습니다.
넝쿨은 형태를 가진 모든 생명뿐만 아니라 형태 이전의 대생명력을 포괄하는 개념입니다.
약샤가 곧 넝쿨(우주의 무한한 대생명력)이라 인식할 수도 있겠네요.
약샤를 해부해 보면, 오장육부가 있는 것이 아니라 분명 넝쿨들이 무한히 얽혀 있을 것 같습니다.
여기에서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약샤의 입과 '풍요의 항아리'를 상징적으로 연결시키는 사람이 또 있을 줄 몰랐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전시의 큐레이터, 정확히 언급하자면 이 설명 카드를 쓴 사람이 궁금해졌습니다.
이 분이 어느 정도의 상징해석 능력이 있는지도 궁금하고, 같은 공부를 하는 사람으로서 깊은 동질감을 느낍니다.
약샤의 입뿐만 아니라, 마카라, 코끼리, 용, 봉황, 선학 등 '풍요의 항아리'와 같은 상징 조형들을 아는지도 궁금합니다.
세 번째 작품입니다. 정말 반가운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제 꿈에도 나온 적이 있을 정도로 많이 봐온 작품입니다.
이번 전시작품 중에서도 가장 많이 살펴본 작품 중에 하나이기도 합니다.
한 눈에도 풍만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뒷부분입니다.
앞부분의 풍만한 여인의 모습과는 달리 위로 자라나는 식물 넝쿨과 꽃, 새들이 보입니다.
인도 힌두교에는 세 분의 최고신이 있습니다.
브라흐만, 비슈누, 시바입니다.
락슈미는 비슈누의 아내이자 행운과 풍요의 여신으로 일컬어집니다.
이 설명 카드를 보자면, '풍요의 항아리'에서 연꽃이 나오고 그 연꽃 위에 락슈미가 서있다고 합니다.
또한 그녀의 몸 뒤로 연꽃 줄기가 휘감아 올라간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고개가 갸웃거려집니다.
항아리만 상징적인 '풍요의 항아리'이고, 연꽃과 연꽃 줄기는 그냥 현상적인 연꽃과 연꽃 줄기로 인식하는 것인가..
저는 이 작품을 '락슈미의 만병화생'이라고 부릅니다.
만병(滿甁)이라는 것은 이 전시에서 말하는 '풍요의 항아리'와 비슷한 개념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강우방 선생님, 일본에서는 안도 요시카 교수가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인도의 푸르나가타(Purnaghata)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가득 찬 병'이라는 뜻입니다.
가득 차긴 가득 찼는데 무엇으로 가득 찼느냐, 바로 우주의 대생명력(만물 생성의 근원인 물)입니다.
이 작품은 현실에서 보는 물항아리에서 생겨난 연꽃 위에 락슈미가 서있는 광경이 아닙니다.
우주의 대생명력이 가득 찬 '풍요의 항아리'에서 우주의 대생명력이 씨앗 형태로 조형된 연꽃(씨방)이 화생하고, 그 연꽃 씨방에서 풍요 자체가 여인으로 의인화된 락슈미가 다시 화생하는 장면을 묘사한 작품입니다.
작품의 앞쪽은 풍요를 풍만한 여인의 모습인 락슈미로 의인화한 것이고, 뒤쪽은 풍요를 연꽃 넝쿨과 새들로 표현한 것입니다.
결국 이 작품은 우주의 대생명력에서 만물이 생성되어 풍요로워지는 과정을 보여주는 담대한 상징을 담고 있습니다.
'풍요의 항아리'라는 표현의 반가움과 '풍요의 항아리'와 약샤의 입을 연결시키는 큐레이터와의 동질감에 만병(滿甁)에 대한 제 견해를 올렸습니다.
원래는 여기까지만 하려고 했으나, 이왕 만병(滿甁)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으니 조금 더 진도를 나가보겠습니다.
사리는 보통 석가모니의 사리를 말합니다. 즉 깨달은 자(覺者, 붓다)의 사리입니다.
진신사리가 없을 때에는 작은 보석이 사리를 대신하기도 하지만, 사리는 결국 석가모니의 사리입니다.
석가모니의 사리는 물질적으로는 석가모니의 유골의 일부이지만, 단지 석가모니의 육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리는 석가모니가 깨달은 진리가 압축되어 있는 씨앗(씨알) 같은 것으로 온 세상에 불법(佛法)을 싹 틔우는 보주(寶珠)입니다.
부처의 진리는 우주의 대생명력과 같은 것으로 만물생성의 근원입니다.
바로 사리는 만물생성의 근원이자 우주의 대생명력이자 부처의 진리를 압축한 절대씨앗과도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사리가 담기는 사리병입니다.
사리가 담기는 순간, 사리병은 부처의 진리로 가득 찬 '풍요의 항아리'가 됩니다.
사리를 담은 사리병이 담기는 사리 단지입니다.
사리는 사리병에 담기고, 그 사리병은 다른 사리병에 다시 담기고, 그 사리병은 또 다른 사리 단지에 담깁니다.
이 사리 단지 또한 부처의 진리가 가득 찬 '풍요의 항아리'가 됩니다.
사리가 사리병에 담기고, 그 사리병이 사리 단지에 담기고, 그 사리 단지는 스투파 속에 모셔집니다.
결국 온 세상을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풍요롭게 만드는 부처의 진리의 압축인 사리가 스투파 안에 모셔지는 것입니다.
이 스투파는 석가모니의 죽음의 무덤이 아니라, 온세상을 풍요롭게 만들 부처의 진리가 가득 찬 '풍요의 항아리'입니다.
보통 산치대탑이라고 부릅니다.
증축과 개축이 되었지만, 거의 완전한 모습을 유지하는 가장 오래된 불탑(佛塔)입니다.
산치대탑의 탑문입니다.
4개의 탑문 중에 가장 잘 남아 있으며 조각 또한 훌륭합니다.
산치대탑 탑문에 조각되어 있는 '풍요의 항아리'(만병)입니다.
'풍요의 항아리'에서 연꽃과 연꽃 넝쿨이 뻗어 나오고 있습니다.
연꽃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씨앗입니다.
현실의 씨앗이 아닌 우주의 대생명력이 압축된 위대한 절대씨앗입니다.
'풍요의 항아리'에서 우주의 대생명력이 넝쿨처럼 뻗쳐가고 우주의 대생명력이 압축된 씨앗에서 다시 생명이 순환합니다.
'풍요의 항아리'에서 넝쿨이 뻗쳐나가듯, 풍요의 정령들의 입에서도 넝쿨들이 힘차게 순환하며 뼏쳐나갑니다.
여기에서는 석가모니의 진리의 말씀(佛法)이 넝쿨처럼 뻗어나가 삼천대천세계를 가득 채운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스투파의 숲> 설명 카드에 쓰인 것처럼, 자연의 정령의 입과 '풍요의 항아리'에서 공히 우주의 대생명력이 넝쿨처럼 뻗어나갑니다.
'풍요의 항아리'처럼, '자연의 정령'처럼, 마카라의 입에서도 넝쿨무늬가 뻗쳐나갑니다.
조형예술 작품에서 넝쿨무늬를 뿜어내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보는 것도 참 재미있는 일입니다.
혹시 저 조각에서 새의 입을 보셨나요?
새가 연잎을 물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럼 아직 현실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조형예술의 세계에서는 현실세계의 현상을 그대로 표현하지 않습니다.
마카라의 입에서도 넝쿨이 무한히 뻗쳐나가고, '풍요의 항아리'에서도 넝쿨이 한없이 뻗어나갑니다.
온 세상은 우주의 대생명력으로 석가모니의 진리로 가득 찰 것입니다.
산치대탑 아래쪽으로 내려가면 제2스투파가 있습니다.
울타리에는 정교한 조각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지금껏 넝쿨무늬를 뿜어내는 것을 몇 개나 보셨나요?
'풍요의 항아리', 자연의 정령, 마카라... 이번에는 코끼리입니다.
여기에는 마카라가 있습니다.
넝쿨무늬는 위쪽에 공간이 있으면 위쪽으로, 옆쪽에 공간이 있으면 옆쪽으로 무한히 뻗어나갑니다.
이번에는 자라입니다.
공간이 원형이다 보니, 이번에는 자라의 입에서 뻗쳐 나온 넝쿨무늬가 둥근원을 가득 채웁니다.
이번에는 자연의 정령입니다.
꼭 입으로만 뿜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손으로 쥐고 있는 것 또한 같은 상징입니다.
넝쿨, 꽃(씨방), 새가 보입니다.
새가 씨앗(우주의 대생명력)을 물어다가 생명을 퍼뜨리는 역할을 할 것입니다.
산치 스투파와 쌍벽을 이루는 바르후트 스투파의 울타리 조각입니다.
바르후트 스투파는 현재 거의 터만 남아 있는 실정이지만, 울타리는 이렇게 박물관에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스투파의 숲>에 출품되어 있는 '락슈미의 만병화생'과 거의 같은 도상입니다.
그게 락슈미이든 약샤이든 약시이든 어떤 다른 신이든 우주의 대생명력(풍요)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이런 항아리는 현실의 항아리가 아니라, 푸르나가타(Purnaghata), '풍요의 항아리', 만병(滿甁)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제는 이 의인화된 존재가 누구인지 짐작이 되시나요?
굳이 이름을 알 필요는 없습니다. 왜 입에서 무엇을 뿜어내는지, 그리고 그 무엇이 어떤 상징인지를 해석해 보시면 됩니다.
아래쪽에 '풍요의 항아리'가 보이시나요?
현실의 물항아리가 아니라, 우주의 대생명력(풍요)이 담겨있는 '풍요의 항아리'라고 느껴지시나요?
인도의 오래된 석굴 중에 규모도 크고 가장 조각이 훌륭한 차이티야 석굴(예배굴)입니다.
중앙에 스투파가 있습니다. 스투파는 단순한 무덤이 아니라 석가모니의 진리 그 자체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항아리 주춧돌 위에 기둥을 올려놓았다고 말합니다.
이건 구조적이고 현상적인 설명입니다.
'풍요의 항아리'라는 개념을 알면, 이야기는 훨씬 더 풍성해집니다.
'풍요의 항아리'에서 넝쿨무늬가 생겨나듯, '풍요의 항아리'에서 기둥이 뻗쳐올라가는 것입니다.
'풍요의 항아리' 속에 담겨있던 우주의 대생명력이 넝쿨무늬와는 다르게 직선으로 곧게 쭉 뻗어나가는 것이 기둥입니다.
부처님을 예배하고 기도하는 차이티야(예배굴)라는 석굴이 '풍요의 항아리'에서 생겨나고, 종국에는 차이티야 석굴 전체에 우주의 대생명력(부처님의 진리)으로 가득 차게 된다는 상징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찰에도 '풍요의 항아리' 주초석이 왕왕 있습니다.
완전한 항아리 형태라기보다는 항아리의 위쪽 절반 또는 항아리 주둥이 부분으로 남아 있으니 한번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넝쿨무늬가 시작되는 아래쪽을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인도에서 보셨던 넝쿨무늬를 뿜어댔던 영수(靈獸)들과 비슷한 상징임을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부탄의 대표적인 사원이자 왕의 집무실이 있는 곳입니다.
그곳에 국기게양대가 높게 솟아 있습니다.
국기게양대에 '풍요의 항아리'가 있습니다.
인도 카를라 석굴의 '풍요의 항아리' 기둥이 생각나시나요?
아마 이곳 '풍요의 항아리'에는 부탄 국민들의 자부심과 희망, 고난과 극복의 역사 등 부탄의 모든 것이 담겨져 있을 것입니다.
매일 일정시각이 되면, '풍요의 항아리'에 담겨있던 부탄의 모든 것이 기둥처럼 솟구쳐서 깃발로 펄럭일 것입니다.
'풍요의 항아리'가 마르지 않는 한, 부탄은 영원할 것입니다.
아름다움에 넋이 나갈 지경이었습니다.
부탄이 그립습니다.
'풍요의 항아리' 입에서 흘러나오는 넝쿨잎과 깃대의 색깔이 초록색으로 같습니다.
깃대가 항아리 위에 단순히 올려져 있는 것이 아니라, '풍요의 항아리'에서 솟구쳐 뻗어나가는 것임을 암시합니다.
'풍요의 항아리'에서 넝쿨무늬와 용이 솟구쳐 오르고 있습니다.
'풍요의 항아리'에는 우주의 대생명력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 대생명력이 식물의 형태인 넝쿨무늬로, 동물의 형태인 용의 모습으로 구상화되어서 솟구쳐 오릅니다.
결국 조형예술에서 형태만 다를 뿐, 넝쿨무늬와 용은 비슷한 상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목가구 앞면 전체에 '풍요의 항아리'가 그려져 있습니다.
이 '풍요의 항아리'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요?
이 목가구를 들인 집안에는 부와 명예, 가족의 안녕과 건강이 끊임없이 샘솟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풍요의 항아리'에서 넝쿨 무늬와 꽃무늬가 흘러넘칩니다.
꽃무늬 한가운데 '여의보주(如意寶珠)'가 있습니다.
불교미술에서는 보주(寶珠), 용 도상에서는 여의주(如意珠)라고 부릅니다.
여의보주의 개념은 만병(풍요의 항아리)의 개념과 마찬가지로 너무 깊고 오묘하여 한마디로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여의보주는 현실세계의 씨앗 같은 형이하학의 개념이 아니라, 씨앗(씨알)을 승화한 형이상학적인 개념입니다.
여기에서는 우주의 대생명력이 초압축된 절대씨앗(씨알) 정도로 하겠습니다.
'풍요의 항아리'에서 솟아난 꽃 속에 여의보주가 있습니다.
이 여의보주는 온 세상에 생명, 자비, 사랑, 희망, 평화, 진리 등 누구나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싹 틔울 수 있습니다.
누구나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다고 말합니다.
저는 용이 넝쿨무늬를 뿜어내고 여의주를 발산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우주의 대생명력을 온 세상에 무한히 공급하는 장면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아마 용이 뿜어내는 식물 넝쿨무늬 끝에 달린 꽃에는 여의보주가 있을 것입니다.
꽃봉오리로 표현되어 여의보주가 보이지 않아도, 설사 여의보주의 표현이 생략되어도 여의보주는 항상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티베트의 어느 거리에서 만난 무늬들입니다.
티베트 용도 부탄 용과 마찬가지로 여의보주와 넝쿨무늬를 내뿜고 있습니다.
부탄 용(바로 위위 사진)이 현실의 식물에 가까운 형태의 넝쿨을 발산했다면, 티벳 용은 추상화된 넝쿨 무늬를 발산하고 있습니다.
식물 형태로 구상화된 넝쿨무늬든 단순한 선으로 추상화된 넝쿨무늬든 모두 우주의 대생명력을 표현한 것입니다.
우주의 대생명력이라고 하는 것이 인간의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원래는 가시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지요.
하지만 부득이 조형예술에서는 사람들이 인식하기 쉽도록 현실세계의 어떤 것을 차용하여 표현했을 것입니다.
차용한 형태와 현상을 마치 진짜인양 해석하다 보면, 오류에 빠져서 본질과 상징을 읽을 수가 없습니다.
금강경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무릇 형상이 있는 것은 모두가 다 허망한 것이니, 만약 모든 형상을 형상이 아닌 것으로 보면 곧 여래를 보게 되리라"
위쪽을 보면 사태극 무늬에서 넝쿨무늬가 발산합니다.
사태극 자리에 꽃(씨방), 용, 마카라, 자연의 정령, '풍요의 항아리', 여의보주가 있어도 본질은 변함없습니다.
창틀에 활짝 핀 꽃과 여의보주가 번갈아 그려져 있습니다.
조형예술에서 꽃의 상징을 생각해 볼 수 있는 도상입니다.
우리나라의 가야금과 비스무리한 부탄의 악기입니다.
악기에 이렇게 아름다운 꽃과 넝쿨무늬를 그린 의도는 무엇일까요?
첫 번째는 당연히 악기를 아름답게 장식하려는 것이겠지요. 그럼 두 번째는요?
악기가 '풍요의 항아리'(만병)라고 하면 공감하실까요?
항아리라는 형태에 집착하다 보면 본질을 놓칠 수가 있습니다.
악기는 소리를 담은 그릇(풍요의 항아리, 만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음악소리를 듣고 사람들이 치유받고 위로받고 흥이 난다면, 음악소리 자체가 우주의 대생명력이고 악기 자체가 '풍요의 항아리'입니다.
쓸까 말까 고민하다가 '풍요의 항아리'라는 개념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또한 쉽지 않다는 의미에서 썼습니다.
인간도 '풍요의 항아리'입니다.
인간은 생각으로 말로 행동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서로 영향을 끼칩니다.
'풍요의 항아리'와 만병(滿甁), 푸르나가타(Purnaghata)는 가득 차 있는 그릇이라는 말입니다.
무엇으로 가득 차 있을지는 개개인의 마음가짐과 수행에 달려 있습니다.
모든 분들의 '풍요의 항아리'에서 선함이 흘러넘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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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12. 22.
길 떠나는 답사객, 무애
첫댓글 전혀 생각지 못했습니다.
감동적인 글에 감사드립니다.
작품의 양식보다는 상징에 관심이 많은 답사객의 개인적인 생각일 뿐입니다.
생소한 이야기였을텐데 긴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잠시지만 오랜만에 뵈서 너무 반가웠습니다~ 상징적인 표현들이 많아 무애님이 좋아하시겠구나했는데 멋진 글입니다~
혹시 큐레이터가 일향 선생님에게 배우거나 영향을 받은 분이 아닐지..
진짜 반가웠어요. 너무 오랫동안 못뵈었는데 너무 짧은 만남이라 더 아쉬웠습니다.
육아 졸업하시고 다시 답사지에서 만나길 바랍니다.
푸르나가타라는 개념이 알려지고 있는 것인지, 일향샘의 영향인지 저도 궁금합니다.
불교미술에 종교철학이 결합되어 범인이 접근하기 어려운 경지라 생각됩니다
당초문이나 용의 입의 서기를 볼 때마다
이 글이 떠오를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부끄럽게시리, 과찬이십니다.
종교미술가는 그 종교 철학과 사상에 능통해야 제대로 종교적 진리를 표현할 수 있었을 겁니다.
현대의 시각이 아닌, 그 시대의 시각으로 해석해 보려고 늘 노력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불교미술에서도 유사한 도상들이 널려 있습니다.
답사지에서 하나씩 찾아보는 것도 소소한 재미입니다. 감사합니다.
민화책에 나온 락슈미상이 왔군요~
절집 전각에서도 종종 보이는 만병을 자세히 볼 수 있고...
4회차 관람하실만 합니다
저도 마감 전에 꼭 가보겠습니다
락슈미 좋아하심? 아님 글래머 좋아하심?
우리나라 사찰에도 만병이 수두룩하지요. 만병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꽃병으로 봐서 그렇지요.
강화 정수사의 꽃병이 만병으로 보이는 순간이 개안의 순간이지요.
약시하면 델리의 대학 博物館에서 본 官能的인 이 像이 떠오르는건 추착翁의 雜想...
글쿠 덩쿨무늬는 우리의 唐草紋 맞아요?
글쿠 唐草紋은 페르시아 由來라고 정수일 교수의 글
맞아요?
저도 관능이라면 사람이든 신이든 정령이든 다 좋습니다ㅎ
당초문을 풀어서 넝쿨(덩굴) 무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당초문이 페르시아에서 유래된 것이라...
고대 이집트와 그리스 미노아 문명에도 있는데 과연 어디가 더 빠를까요..
풍요의 항아리 설명문을 보는 순간
"강우방 선생 님" 글인가 하면서 옆에 사람에게 "무애가 4 번째 돌고 있다는 카톡이 이해된다고 했었지요.
간만에 일향 선생님의 책을 읽는 느낌입니다.
나도
문안 작성자가 누군지 궁금합니다.
저도 뉴욕 메트로폴리탄박물관의 설명카드를 그대로 옮겨 쓴 것인지, 우리 큐레이터가 푸르나가타를 해석하여 조어한 말인지, 아니면 자신이 직접 공부하고 인식해서 깨달은 것으로 만든 말인지 정말 궁금합니다.
도록을 구입하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혹시 도록에 쓰여 있으면 꼭 알려주세요~
@무애 메트로폴리탄박물관 홈페이지
https://naver.me/Gt1nUIhk
Railing pillar fragment: flowering vase of plenty
많이 배웠습니다.
마지막 문단을 기억합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까지 찾아주시다니.. 감사합니다.
푸르나가타를 영어식으로 번역한 것이 flowering vase of plenty인 모양이군요.
plenty란 말이 힌트가 되겠네요. 덕분에 저도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어쩜... 세상에... 전시도록의 탁월한 논고를 한편 읽은것보다 더한 감동입니다. ^^*
무애님 정말 .. 늘.. 감탄에 또 감탄을!! ^^
전시 도록엔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전시때의 설명을 그대로 옮긴건지 어쨌는지에 대한 언급은 아직 못 봤습니다. 저는 오늘 첨으로 도록 비닐 뜯어 읽고 있는 중이라서요. ㅎㅎ
전시 도록 글, 편집엔 이번 전시를 기획한 류승진 학예사의 이름이 보이네요. 뒷쪽 이주형 선생님의 논고에서도 풍요의 항아리가 등장하긴 합니다.^^ 몇장 살짝 보여드립니다. 전시장 안내글과 도록 내용이 많이 겹치네요. 자세한 설명을 해주기 위한 배려였나봐요. ㅎㅎ
앗, 궁금한 것을 꼭 짚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전체 논문을 읽어봐야겠지만, 보여주신 도록 글로만 추정해보면 푸르나가타를 번역한 말로 보입니다.
'풍요의 항아리'와 '충만한 항아리' 중에 풍요의 항아리란 말이 선택된 것으로 보이구요.
간다라 미술 권위자인 이주형 교수의 표현일 개연성이 많아 보이네요. 류승진 학예사는 이주형 교수의 제자인 것 같고.
류승진 학예사의 논문이 학위논문 외에는 없는 것 같아서 좀 아쉽네요.
아란두님 덕분에 궁금증이 풀렸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주형 선생님의 논고에서...
한번도 가보지 못한 인도 .......
무한한 영감과 상상을 일으킵니다.
오늘 중박 특별전 다녀와서 선생님의 글을 보니 이해가 쉽습니다.
감사합니다.
역시 작품은 실제 보아야 제맛이지요.
제 글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셨다니 저 또한 기쁜 일입니다.
저는 다음주 금요일이면 인도에서 한창 답사 중일 겁니다.
예닐곱번째 인도 답사이지 싶은데, 역사만큼이나 크기만큼이나 대단한 나라입니다.
산천초목님께서도 꼭 인도를 답사해 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
무애 항아리에서 나온 넝쿨을 열심히 받아 갑니다. 저는 아직 씨앗에 지나지 않지만, 여러 길에서 듣고 배워 저도 생명의 넝쿨을 벋을 수 있도록 힘쓰겠습니다.
사람은 부지불식간에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습니다.
또르 님도 이미 풍요의 항아리에서 수많은 넝쿨을 뻗어내고 있지요.
그 풍요의 항아리가 마르지 않도록 유지만 잘 해주시면 되겠네요.
용산 국박의 스투파의 숲을 다녀왔습니다.
미리 '옛님의 숨결. 그 정취를 찾아' 카페에서 공부하고 간 것이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아는만큼 보인다는 말대로 국박을 나올때 뿌듯함을 느꼈습니다.
카페 글이 도움이 되셨다니 저 또한 기분이 좋으네요.
저는 지금 남인도를 답사 중입니다.
인도 미술, 종교, 문화에 감탄과 겸손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배움에는 끝이 없지만 행복한 시간입니다.
카페에 자주 방문해 주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