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년에 육군에 입대한 유성옥은 하사관을 자원하여 월남전선에 갔다. 맹호부대에서 근무하다가 1970년에 귀국하여 이듬해 중사로 제대 했다. 그해 정보부에 운전사로 취직했다가 박선호 과장에게 부탁하여 1급 근무지인 궁정동 안가로 옮겨 박 과장 차인 제미니 승용차 운전사로 일하게 되었다. 유성옥은 다음 달에 결혼을 하기로 날짜를 받아놓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합수부에서 진술할 때 '저는 직속상관인 박 과장이 당장 그 만두라면 그만 실직해야 할 입장입니다'라고 했다.
김재규-두 박씨-이기주, 유성옥으로 이어지는 이 다섯 명의 자객들 이 정보부의 경직된 상명하복 관계에다가 특수한 의리관계로 뭉쳐 다섯 명의 방심한 대통령 경호원들을 기습하게 된 것이다.
신관(가동) 경비원 대기실에 있던 이광철은 저녁 7시를 조금 지나 서 대통령의 저녁식사가 진행중이던 나동의 정문경비원 서영준이 들어오 기에 놀랐다.
"왜 이렇게 일찍 교대하고 오는 거요?" "정문에 이기주하고 과장님이 계셔요.".
7시25분쯤 경비원 관리책임자 이기주가 대기실로 뛰어왔다. 그는 황급하게 서영준이 차고 있던 38구경 리벌버 권총을 달라고 했다. 권총에는 네 발이 장전되어 있었다.
한 10분쯤 지나서 이번엔 동료 경비원 김태원이 오더니 서영준에게 "박 과장이 찾으니 식당쪽으로 가보라"고 했다.
서영준은 나동 정문으로 뛰어갔다. 과장은 안 보이고 이기주가 "권총차고 왔느냐?"고 물었다. 서영준은 다시 대기실로 달려가서 김태원이 차고 있던 권총을 받아왔다.
이기주는 그에게 경비를 서달라고 한 뒤 나동 주방쪽으로 가는 것이었다. 서영준은 오늘은 종잡을 수가 없는 날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곧 역사가 격동치려고 하는 나동 건물을 지키고 있었다.
운전사 유성옥은 박선호 과장이 시키는 대로 신관에 세워두었던 제 미니차를 골목길 건너편 나동으로 몰고왔다. 문은 박선호 과장이 열어 주었다.
나동 관리책임자 남효주는 대통령 비서실장도 못들어오게 되어 있 는 이곳에 제미니차가 들어온 것이 궁금하여 "어떻게 들어왔느냐"고 물었 다.
유성옥은 "과장님이 여기에 차를 대라고 하셨다"고 했다.
그는 제미니차를, 대통령 경호원들이 모여 있는 주방 벽면과 나란 히 세워두었다. 이때 대통령 경호원 박상범 김용섭은 대통령 차운전사 김용태, 정보부 식당차인 뉴코티나 운전사 김용남과 함께 주방 바깥에서 잡담을 하고 있었다.
뉴코티나의 앞지붕 위에다가 원동에서 사온 플라스틱 막걸리 통 (10되짜리)을 얹어놓고 김용남과 김용섭은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고 박상 범은 속이 거북하다면서 김용태가 주는 가스명수를 마셨다.
박상범 등 경호원들은 유성옥이 모는 제미니가 신관 경비원대기실 쪽에서 제2대문을 통해서 나동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박선호 과장 이 대문을 열어주는 것도 보았다.
주방 운전사 김용남이 한참 있다가 제미니로 다가가서 유성옥에게 "어떻게 해서 왔느냐?"고 물었다. 유성옥은 "과장님이 여기에 차를 대라 고 하셨다"고 했다.
무서운 과장이 시킨 일에 토를 달 수가 없었다. 대통령 경호원들 은 이곳의 대통령 경호는 정보부 소관으로 되어 있으니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는 타성에 지배되고 있었다. 제미니의 창이 검게 칠해져 있어 안에 누가 탔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대통령 측근 경호를 맡고 있었던 수행계장 박상범(현재 보훈처장) 은 고려대학을 졸업한 후 해병대에 입대하여 대위로 전역한 경력의 소유 자로서 해병대 선배인 박선호와도 알고지내고 있었다.
그 박선호가 아까 주방 안에 몇 번 왔다가 갔다가 하더니(그는 경 호원들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이번에는 제미니차까지 가서 기웃거리고 가는 것이 보였다(이때 박선호는 유성옥에게 격려를 하고 갔다). 유성옥 은 1979년12월12일 육군보통계엄군법회의에서 신호양 변호인의 신문에 대 하여 주목할 만한 발언을 한 적이 있다.
"박 과장의 암살지시에 반항하면 나중에라도 죽을 것으로 생각했습 니다. 저는 주방으로 차를 옮겨 놓고 제미니차에 타고 있다가 문을 열 어달라고 했는데 경호원이 모르고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때 문을 열어 주었다면 도망하려고 했습니다.".
경호원이 다가와서 제미니차 문을 열어주면 "각하가 위험하다"고 알린 뒤에 달아날 생각을 했다는 뜻인 것 같다. 만약 그 경호원이 문 을 열어주었더라면 역사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주방에 있던 두 명의 경호원과 대기실에 있던 두 경호원이 자위조 치를 취했을 것이고, 오히려 김재규쪽이 당했을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유성옥이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은 경호원이 그의신호를 듣지 못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가 어리벙벙한 상태에서 어느 쪽으로도 확실한 행동 방향을 정하지 못하고 그냥 상황에 끌려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보통사람의 의지로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판이 짜여져 있었다.
그는 운이 나쁘게도 '연출자' 박선호에 의하여 이 역사의 무대에서 한 배역을 맡도록 지명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날 밤 드라마의 한 조역인 정보부장 수행 비서관 박흥주(당시 40세) 대령과 김재규와의 인간관계도 박선호에 못지 않을만큼 끈끈한 것 이었다. 그는 서울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 육군사관학교 생도 18기로 들어갔다. 졸업 후 제6사단의 포병대대에 배속되었다.
이곳에서 브리핑 솜씨가 사단장 김재규의 눈에 띄여 그의 전속부관 으로 발탁된 것은 1964년8월이었다. 6사단 포병사령관 박재종 대령이 차를 보내 "사단장이 부르니 가보라"고 했다.
사단장실에 갔더니 김재규 사단장은 이름을 물어보고 위 아래로 한 번 훑어보고는 말했다.
"자네 오늘부터 내 부관좀 하게." 박흥주는 누가 자신을 추천한 것 이 아니고 며칠 전에 화력시범을 할 때 브리핑, 시범, 통제를 담당한 자 신을 사단장이 잘 보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김재규의 제6사단은 한일회담 반대 데모가 폭력화되어 이를 진압하 기위하여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자(1964년6·3사태) 계엄부대로 서울에 출 동했다가 본대로 돌아와 있었다.
박흥주는 1966년1월에 김재규가 6관구 사령관으로 옮길 때도 같이 따라가서 여섯 달 동안 전속부관으로 근무했다.
그는 월남전선을 지원하여 1966년10월부터 2년간 파월 9사단(백마 부대)52포병 제3포대 전포대장으로 근무했다.
귀국한 뒤에는 21사단 제1포대장을 거쳐 육군 보안사령부 서울지구 대(506부대)에 있으면서 3년6개월간 수경사 파견대 조장, 영등포 팀장, 한수이북 대공팀장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이때도 보안사령관은 김재규였다.
육군본부 교육참모부 장교로 근무중이던 1978년4월 정보부장 수행 비서관으로 다시 불려와 근무하기 시작한 것이 김재규와의 네 번째 인연 이었다.
10·26 당시 그의 생활수준은 자필진술서에 따르면 '시가 1천5백만 원짜리인 대지20평 건평18평의 슬라브 집과 약4백만원어치의 부동산에 약 40만원의 월급으로서 중하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