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상인들의 조선 진출 교두보는 인천이었다. 인천에서 창간된 일본어 신문도 침략이 가속화되는 시류를 타고 사세를 확장하면서 발전을 거듭했다. 일본어 신문인 ‘조선신문’의 처음 제호는 ‘인천경성격주상보’(1890. 1. 28)였다. 독립신문(1896. 4. 7)보다 6년 앞선 출발이었다.
인천의 ‘조선신문’은 제호와 발행인이 볓 번 바뀌었지만 대표적인 인물은 하기야 도시오였다. 1899년 조선으로 건너와 ‘조선신보’ 기자로 근무하다가 인천 일본인상업회의소 서기장을 거쳐 조선신보의 사장을 맡았다.
강제병합 후 총독부는 매일신보 이외의 우리말 신문은 모두 없애버렸으나, 조선신문은 오히려 한국어 지면을 신설하면서(1911. 10. 1) 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와 쌍벽을 이루는 형국으로 사세를 키워낚다. 1913년 8월에는 조선왕실이 조선신문에 200엔을 하사했다.
조선신문 발전 기념호 발행을 격려한다는 명목이었다. 1914년에는 300엔, 1916년에도 500엔을 하사했다. 왕실이 침략의 대변기관을 지원하는 어처구니없는 행태였다.
일본 상공인들의 중심무대가 인천에서 서울로 옮겨지자 조선신문도 본사를 서울로 이전(1919. 12. 18)하는 동시에 마키야마 고조가 신문을 인수하여 사장에 취임했다. 마키야마는 신문을 발판으로 정계와 실업계를 넘나들던 인물이다.
1906년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부 졸업 ggn 한국으로 와서 창간을 준비 중이던 ‘경성일보’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친일파 송병준 등과 친밀한 관계를 맺었고 대한제국 정부의 고관들을 전화로 불러서 취재하는 솜씨가 뛰어났다. 1909년 5월 1이레는 ‘일본전보통신’ 서울지국 주간(지국장)이 되었다.
지국장 재직 때 편찬한 ‘조선신사명감(1911. 5)은 조선의 유력인사가 망라된 인명사전이었다. 고종, 순종, 이은을 비롯하여 합병 직후 일본 작위를 받은 공작 2명(이강, 이재면), 후작(박영효 등 6명), 백작(이완용 등 3), 자작(송병준 등 22명), 남작(유길준 등 45)을 서열별로 등재하고 작위가 없는 주요 인명은 일본어 발음순으로 배열했다.
총독부의 주요관서, 조선의 신문 통신 잡지사, 은행, 회다, 여관 등 여러 분야에서 활용할 수 있는 편람 성격으로 편찬하여 판매대상을 넓힐 수 있도록 했다. 마키야마의 사업적인 수완이 드러나는 책이다.
1913년 4월 1일 그는 ‘조선공론’을 창간 발행하면서 ‘일본전보통신’ 경성지국장을 겸하다가 출신지 나라사키의 중의원 의원에 당선(1917)되어 정계에 진출했다. 조선신문사를 인수하던 때는 이미 정치인 신분이었다. 마키야마는 충남 청양의 광산을 경영하는 등 실업계에도 손을 뻗어 자산을 축적했다 1932년에는 해군성 차관까지 올라가는 등 관운도 좋았다.
1937년에는 문명기를 조선신문 사장에 앉혔다가 이듬해 친일 부호 김갑순에게 매도하였으나, 이 신문은 1942년 2월 28일 지령 제 14,666호를 끝으로 폐간되었다. 총독부의 언론통폐합의 결과였다. 남대문 옆 사옥에서는 광복 후에도 세계일보(자유당 말기), 민국일보(4․19 이후) 등 여러 신문이 발행되었다.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언론정보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