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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간디의 불복종, 비협력, 비폭력의 무저항주의
인도의 독립투쟁 과정 중에 생긴 사회정치적·종교철학적 독트린으로 창시자 M.K. 간디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그 정치적 원리와 특징은
① 민중의 광범한 비폭력 해방투쟁 참여로 평화적 방법에 의한 인도 독립의 달성
② 인도 국회 지도하에 모든 인도 국민을 종교·국적·카스트(계급)를 초월하여 통일된 독립투쟁에 참여하게 한다는 것
③ 농민보호, 자본가의 노동자보호라는 이념으로 계급의 평화를 달성하고 중재로 계급분쟁을 해결할 수 있다는 주장
④ 가부장적(家父長的) 관계의 이상화
⑤ 인도의 부락공동체와 가내수공업의 혁신
⑥ 민중의 종교심에 대한 호소였다.
독립을 위한 비폭력투쟁 전술은 사티야그라하(진리파악)라 불렀는데 이것은 비협조와 시민
불복종이라는 두 형태로 표현되었다. 비협조는 영국에서 수여하는 직함의 거절 및 국가교육제도의 보이콧, 평화적 시위 편성을 포함하였고, 시민 불복종은 일부의 식민정부 법률위반, 정치적 스트라이크 또는 불매운동, 이례적으로는 납세거부형태로 나타났다. 간디주의는 철학적으로 간디가 진실과 동일시했던 신(神)의 뜻으로 이루어진 현실이란 점에 바탕을 두고, 상호양보로 영국 당국과의 특정분쟁과 사회적 모순을 협상·협정으로 해결하려는 데 특징이 있다. 진실의 달성은 도덕적 자아실현 과정에 연결되어 있으며 자아실현은 아힘사(비폭력)라는 개념과의 관련에서 이해되고 있다. 자아실현의 바탕은 사랑의 법칙과 인고의 법칙이므로 이에 따라 아힘사 신봉자들은 의식적으로 인고하도록 노력해야 하며 자기희생을 치를 각오가 되어 있어야한다. 이 개념에서 자기욕구의 의식적·자발적 자제(自制), 안락의 거절, 금욕적 생활방식의 수용이라는 가르침이 나왔다. 간디주의는 사회의 상태가 국민의 윤리 수준에 따라 결정된다고 하였으며 정치를 윤리에 바탕을 두고 운영하려 하였다. 또한 인간의 윤리적 의지의 표현인 수단은 결과보다 우위에 있음을 선언하고 수단이야말로 정치활동의 판단기준이 된다고 하였다.
2. 한계
- 민족주의 운동의 지도자들 중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은 바로 간디 였다.
간디는 농민의 옷을 입고 힌두교의 내용을 강조하면 영어를 사용하는 전문직 계급과 농촌의 인도 대중 사이의 언어와 문화의 차이를 메울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영국의 사립학교를 졸업하고 힌디어에 매우 서툴렀던 J 네루는 이렇게 할 수 없었다. 동시에 간디는 인도 의회에 기대어 시장을 보호받기를 원했던 인도 자본가들과도 가까웠다.
그런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하나로 합치려면 영국 자본가들 뿐 아니라 인도 자본가들에게도 불똥이 튈지 모르는 선동을 잠재워야 했다. 그래서 간디는 당국에 맞선 평화적이고 규율 있는 비협조를 강조했다.
4년전만 해도 독일과 영국의 전쟁에서 영국 제국주의를 지지할 것을 호소했던 간디는 이제 비폭력을 원칙으로 제기했다. 이런 평화적 비협조주의는 설사 그것이 계급 투쟁으로 전환될때조차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간디는 납세 거부를 호소하는 것을 거부했다. 왜냐하면 납세 거부는 농민이 인도의 토지 소유자(자민다르)에게 지대를 납부하지 않는 사태로 발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간디가 원하는 방식으로는 1918 - 1921년에 인도를 휩쓸었던 것 같은 운동을 통제할 수 없었다. 영국 경찰과 군대가 보여준 탄압 수준과 농민, 노동자, 도시 빈민의 투쟁 수준 때문에 평화로운 저항 운동이 거듭 폭력적인 충돌로 발전했다. 이런 일은 봄베이, 케다, 아마다바드 등에서 일어났다. 1922년 2월 바하르의 차우리 차우라 마을에서는 경찰이 시위대와 난투극을 벌이고서 시위대에게 총을 쏘았다. 마을 사람들은 경찰서를 불태우고 22명의 경찰을 죽였다. 경찰은 그 보복으로 12명의 농민을 죽였다.
의회 지도부의 어느 누구와도 협의하지 않고 간디는 즉시 저항 운동 전체를 취소했고 영국 당국에게 숨돌릴 여유를 줬다. 봄베이 총독 로이드 경은 나중에 그 저항 운동이 '공포를 안겨줬고' , '거의 성공직전에 있었다'고 인정했다. 이제 영국 정부는 운동을 마음껏 탄압하고 간디를 체포했다.
운동은 10년 후퇴했다.
게다가 종교적 분열이 전면에 부상하면서 각각의 종교집단은 영국의 무력에 홀로 대응해야 했다. 1920년 대 중반과 후반에 인도 전역에서 힌두교도와 무슬림이 격렬하게 충돌했다.
출처 - 크리스 하먼 '민중의 세계사'
간디의 비폭력, 불복종 운동의 효과는?
침략 문명을 상징하는 기계에 반대하여 물레로 실을 잣고 신식 옷 대신 흰색
천을 몸에 두르고 둥근 안경을 쓴 간디의 모습은 영국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인도 민중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이런 간디의 모습과 함께 다가오는 것은 그가
주장한 비폭력, 불복종 운동이다.
영국 유학을 통해 변호사 자격을 얻고 돌아온 간디(20세)는 봄베이에 변호사
사무실을 냈으나 별로 성공하지 못했다. 그 후 남아프리카의 인도인 회사가 고
문 변호사를 구하고 있어 그 일을 맡기 위해 처자식을 인도에 둔 채 남아프리카
로 건너갔다. 그런데 그는 그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엄청난 인종차별에 큰 충격
을 받았다. 변호사였던 간디도 인종차별을 받기는 마찬가지였다. 역마차의 백인
전용 좌석에 앉았다가 끌려 나온 일이나 밤늦은 시간에 백인전용 도로를 걷다가
백인 경찰에게 구타당한 일 등은 간디로 하여금 자신의 반제국주의적 신념을 더
욱 굳게 하는 경험들이었다. 또한 그는 그곳 광산에서 일하고 있는 인도 노동자
들의 무권리 상태를 해결하기 위해 시민권 획득을 목표로 하는 운동을 전개하기
도 했다. 이렇게 남아프리카에서의 경험은 간디가 이후 인도에서 본격적인 반영
운동을 벌이는데 굳건간 기반을 제공해 주었다.
18세기 중엽부터 본격화된 영국의 인도 지배에 맞선 투쟁이 최초로 폭발한 것
은 1857년 세포이 반란이었으나 그것이 실패로 돌아간 이후 영국은 인도 지배를
더욱 공고히 했다. 이전에는 동인도 회사를 통해 지배하던 것을 1877년 영국 왕
을 황제로 하는 인도제국을 만들어 직접 통치하에 두었고 인도인의 모든 정치활
동에 대한 단속도 강화했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인들도 독립을 위한 새로운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1885년 말 봄베
이에서 최초의 국민회의가 개최되었다. 하지만 국민회의운동은 순조롭게 진행되
지 않았다. 내부가 급진파와 온건파로 갈라졌고, 또 영국의 공작으로 1906년 전
인도 이슬람 연맹이 결성되어 종교의 대립이 나타났다. 독립운동은 침체한 채 1
차대전을 맞이하게 되었다.
1차대전으로 독일과 전쟁에 돌입한 영국은 인도의 협력을 얻기 위해 전쟁이
끝나면 자치를 허용할 것을 약속하면서 인도를 회유했다. 국민회의는 이를 따를
태세를 취했으며 당시 남아프리카에 있던 간디도 이에 응했다. 영국에 대한 협
력이 인도의 자치를 가져올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기대는 헛된
꿈에 지나지 않았다. 실제 대전중 인도는 영국을 위해 150만 명의 병사와 식량,
광석, 고무, 목재 등 총 1억 4,000만 파운드에 달하는 물자를 부담했다. 이 중 전
사자는 3만 6,000명이 넘었고 부상자는 그 두배에 달했다.
그러나 이러한 인도의 희생에 대한 영국의 보상은 롤라트 법이었다. 이 법에
의하면 개인이든 단체든 간에 영국의 시책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모두 재판
없이 투옥할 수 있었다.
전쟁중이던 1915년 병 때문에 귀국하여 조국에 머물고 있던 간디는 즉시 이
법에 대한 저항을 전 인도인에게 호소했다. 이 저항은 전 도시의 파업이라고 할
만한 것으로 모든 시민의 합심에 의해 대도시의 상업이나 교통을 마비시켜 식민
지 당국에 압력을 가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러한 비폭력, 불복종 운동을 `샤티아그라하` 투쟁이라고 한다. 사티아그라하
란 `진리를 파악한다`라는 뜻이다. 이 진리란 간디에게 사회에서 악한 것을 배제
하는 올바른 힘을 의미했다. 그것은 모든 비폭력 수단을 사용하여 현실 정치에
서 압제자의 마음을 바꾸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식민지 당국은 이 비폭력 저항 운동을 폭력으로 진압했다. 간디의 저
항 운동이 시작된 꼭 일 주일 만인 1919년 4월 13일 암리트살에서 열리고 있던
저항 집회를 영국군이 습격했던 것이다. 여기서 379명이 죽고 1,200명이 부상당
했다. 이 사건으로 인도 전역은 들끓었다. 국민회의는 12월 암리트살에 모여 학
살 사건의 책임 규명과 롤라트 법의 철폐 요구를 결의했다.
이듬해 1920년 간디는 국민 회의의 지도자로 추대되어 영국에 대한 철저한 불
복종 운동을 추진해 간다. 식민지 당국의 지배하에 있는 입법 기관에 대한 참가
거부, 영국 상품에 대한 불매, 당국 관리하에 있는 학교에 가지 않고 인도인이
운영하는 학교에 가기, 영국인 은행에 예금하지 않기, 관직 사직 등, 동시에 인
도제 면직물의 생산과 소비를 장려하는 스와데시(국산품 장려) 운동이 전개되었
다. 이러한 운동의 전개 속에서 간디의 명망은 높아졌으며 인도 민중은 그를 마
하트마(위대한 혼)라고까지 불렀다.
하지만 불붙은 대중 운동은 당국의 탄압 속에서 간디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발전했다. 1922년 2월 인도 북부의 촐리촐자 농민들이 경찰서를 습격, 경관 22명
을 살해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충격을 받은 간디는 불복종 운동을 중단했고
그도 당국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는 그 후 1928년까지 투쟁에 참가하지 않았다.
또한 1930년 시작된 제2차 불복종 운동 때 경찰 무기고 습격이나 시 행정권의
장악이 일부 지역에서 일어났을 때 간디는 단호히 이에 반대했다.
또한 민족 운동의 발전과 나란히 자본가나 지주에 대한 노동자, 농민의 투쟁
도 많이 나타났는데 간디는 이에 대해서도 반대했다. 자본이나 토지 등 기득권
에 대한 침범은 간디에게 일종의 폭력으로 보였던 것이다.
간디의 독특한 철학에서 나오는 비폭력, 불복종 운동은 당연히 한계가 있었다.
실제로 두 번에 걸친 투쟁은 스와라지(독립)를 이룰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영화 <간디>에 나오는 불복종 운동 참가자
들의 모습, 즉 경찰봉에 맞아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 전진하는 모습은 엄청난 반
향을 일으켰고 다음 단계의 투쟁을 위한 교두보로서의 역할을 했다. 그리고 실
제 이 투쟁의 최대의 공헌은 국민 회의가 인도 전역에 조직되어 모든 계급, 계
층의 사람들을 결집시키고 그들의 민족 의식, 정치 의식을 고양시킨 데 있다.
출처: Jonathan Ko의 Blog
-비폭력불복종 단순한 독립운동만은 아니다-
간디라는 인도의 독립운동가에 대해 처음 듣게 되었던 때는 중학교 도덕수업 시간이었는데 교과서 사진 속의 간디는 뼈 마디마디가 보일정도로 깡마르고 거무튀튀해 보이는 안경 낀 안쓰러워 보이는 사람이었다. 불과 하루 이틀 전에 배운 수업내용도 기억이 가물가물 하는데 무려 몇 년 전의 도덕수업시간에 잠깐 배운 간디라는 인물의 모습이 머릿속에 선명한 것은 올곧고 단호하게 빛나는 두 눈빛 때문이었을 것이다. 비폭력 불복종의 사상을 가지고 당시 최강의 제국인 영국에 저항하는 간디는 인도사람들과 세계의 모든 사람들에게 새로운 독립운동방법을 제시해 주고 좋은 본보기가 되어주었는데 그럼으로 인해 나에게도 강한 인상을 남겨주었다. 보통 사람들은 ‘Give&Take’라는 기본적인 특성이 있어서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받은 만큼 혹은 그 이상 돌려주게 되어있다. 그 사실과 같이 간디가 주관한 독립운동이전의 운동들은 지배하려는 사람들의 폭력에 맞서 크고 작은 폭력성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간디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사티아그라하 즉 비폭력 불복종의 신념을 지니며 사람들을 이끌어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지 않고 복종하지 않는 태도로 묵묵히 저항을 하여 독립을 이끌어내었다. 처음 간디의 독립운동에 대해 들었을때는 ‘이사람 정말 대책 없는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하였지만 이 책을 읽고 난 뒤에는 대단한 사람, 독한사람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영국의 강압적인 태도가 몇 달도 아니고 몇 년도 아니고 몇 십 년이나 지속되었는데도 많은 인구를 지도하며 단식과 영국의 원단을 거부하여 물레로 직접 옷을 짜서 입는 운동을 계속해왔던 것이다. 보통의 끈기와 강단으로 되는 일이 아님을 알기에 간디가 유명한 위인이 된 것은 알지만 사람의 한계를 초월한 것처럼 보였다.
출처: 다음 세계사 카페
우리는 흔히 '간디'하면 평화부터 떠올립니다. 하지만 간디 책을 읽다보면 그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기위해서 평생 다툼이 있는 곳에서, 평생 그 다툼에서 평화를 일궈내기위한 간디의 삶이 있습니다. 부당함과 부조리, 불평등이 있었던 곳에는 꼭 간디가 있었습니다.
간디는 말보다 신념을 몸소 행동으로 옮기는 실천가, 사티아그라하라는 '불복종운동'의 비폭력주의, 희생정신이 투철한 박애주의자이기도 합니다. 간디의 희생정신은 정말 저 같은 범인은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위대함' 그 자체입니다.
특히 개인적으로 관심이 가는 것은 간디의 '사티아그라하'합니다. 불복종 운동이라고 하는데 권력자의 부당함에 비폭력으로 저항 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나라도 촛불 시위를 하면서 비폭력주의가 사람들의 공감을 얻었지요. 그러나 간디의 비폭력주의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갖고 있는 인식과 다릅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힘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힘으로 저항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 였을 때 세금을 내지 않는 방식이라든가 영국에서 수입한 옷은 절대 입지 않는 것...등 국민들의 단합으로 할 수 있는 저항입니다. 단결하지 않으면 원하는 뜻을 이룰 수 없는 것들이지요.
아메다바드에서 직물 공장 노동자들이 적은 임금으로 고통받자 간디는 폭력없이 비폭력 저항의 파업을 하도록 합니다. 하지만 쉽게 뜻을 이루기힘들자 간디는 문제가 해결 될 때까지 단식을 하겠다고 합니다. 간디가 단식에 들어간 사흘 째 되던날 공장주들은 임금 인상을 제안하게 됩니다.
비폭력주의의 그 이면에는 간디의 이런 희생정신이 큰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간디는 그 이후로도 수시로 감옥에 들어가고 단식도 하게 됩니다.
영국의 부당한 법에 대한 간디의 불복종 운동은 아주 독창적이고 특별한 것이었습니다. 간디는 지원자 78명과 함께 아메다바드 교외에 있는 아슈람을 출발하여 370킬로미터 떨어진 인도양 연안의 단디 바닷가를 향해 떠났습니다. (그 당시 영국은 소금을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금에 붙는 세금이 너무 높아서 인도 국민들이 허리가 휠 지경이었습니다. )
간디 행렬은 더위와 먼지를 뚫고 하루에 20킬로미터 정도 느린 속도롤 행진을 했고 지나는 마을마다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간디는 모여든 군중에게 인도인들이 직접 짠 옷을 입고 마약과 술을 절대로 가까이 하지 말것, 불가촉천민들을 차별하지 말것..등을 연설했습니다.
맨 음 79명으로 시작한 행렬은 엄청나게 불어났고 수천명에 이르게 됩니다. 바닷가에 도착한 간디 일행은 소금을 직접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영국의 소금법을 어기는 방법의 불복종운동이었습니다. 곧이어 사람들이 소금 창고를 점거하고 시위도 하게 됩니다. 경찰들이 시위대를 곤봉으로 내려첬지만 아무 반항도 없이 끊임없이 시위를 하게 됩니다. 10만명에 달하는 인도인들이 시위에 참가해서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것을 견디다못해 총독은 간디와 협상을 하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간디는 시대를 앞서서 산 위대한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예전의 시위와는 달리 평화로운 시위를 원하고 있고 실제로 촛불시위는 예전에 비한다면 정말 평화 시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부 시위대는 다소 과격하지만...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3.1운동도 일제의 무력 탄압에 대항한 평화시위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평화를 사랑하는 나라, 아니 어쩌면 평화보다 단지 조용하게 사는 것을 원하는지도 모르지만...하지만 간디의 비폭력주의와 우리나라의 비폭력주의는 상당부분 다릅니다. 간디의 비폭력주의는 저항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비폭력 저항을 의미합니다. 우리나라는 불만이 있어도 시위에 대해서는 부정적입니다. 옛날에는 대부분 대학생들이 시위를 주도했고 과격한 무력 시위로 일반 시민들의 공감을 얻기 힘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습니다. 간디처럼 불복종 운동을 했어야 하지만 방법을 몰랐다고 볼 수도 있겠지요. 지금은 어떻습니까? 시민단체들이 여러 방법으로 비폭력 저항을 하고 있습니다만 이것은 일부 시민들만 참여하기때문에 아직까지 활동이 미약합니다.
언소주의 특정 기업 제품 불매 운동에 대해서 정부에서는 위법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그것이 간디가 말하는 불복종운동이 되지 않을까요? 우리나라는 아직도 시민 단체의 활동에 대해서 부정적인 사람들도 많고 참여도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지 않습니다. 간디의 불복종 운동은 단지 평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저항을 의미합니다. 무력이 아니라 다른 방법의 저항을 말하는 것인데 우리나라의 경우 정부나 한나라당의 독선적인 정책에 대해 반발은 심하고 불만은 끓고 있지만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많이 참여하는 불복종 운동이 효율적으로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참여 정부의 노무현 대통령이 시민단체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독려했지만 시민들의 적극적 참여도가 낮은 것과 다양한 방법들이 모색되지 못한 것이 작금에 이르러 독재적인 정부의 정책에 맞설 수 있는 국민의 힘을 운집시키는데 한계를 가져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간디는 단지 신문에 기고하거나 종교인으로서 국민들의 정신적 지도자 역할만을 한 사람이 아닙니다. 스스로의 목숨을 내놓고 희생하면서 비폭력 저항을 하도록 이끌었습니다. 말만 앞세우며 말바꾸기를 밥먹듯이 하는 우리나라 지식인들과도 다르며 거짓말로 유권자를 현혹시켜 권력잡는 정치인들과도 다릅니다. 간디는 신념을 행동으로 옮기는 실천가입니다. 간디가 행동을 했기때문에 많은 국민들을 변화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평화는 지켜내야지 원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폭력시위가 싫고 반대한다면 말로만 할 것이 아니라 비폭력 저항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정부의 일방적인 정책을 반대한다면 정부를 압박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통해서 비폭력 저항을 보여주는 것이 맞지 시위가 폭력적이라고 욕하는 것은 아무 쓸데도 없는 것입니다.
일상생활에서 정치가 바로 설 수 있도록 힘을 합해서 저항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 앞으로 우리나라가 민주주의를 제대로 구현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입니다.
출처: 다음 아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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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고르가 간디를 비판한 이유
지난 글 보기 2011/10/27 16:51 이프
19세기에 독립을 추구했던 여전사로 잔시의 여왕 락슈미바이가 있었지만, 20세기가 되어 인도의 지식인들이 본격적인 민족운동을 시작했을 때는 오히려 걸출한 여성이 눈에 띄지 않는다. 시인 사로지니 나이두(Sarojini Naidu) 같은 이가 있긴 했지만, 그녀의 역할과 명성은 다른 (남성) 독립 운동가들에 비해서는 부수적이거나 주변적으로 보인다는 것이 솔직한 인상이다.
가부장적인 인도 민족주의 운동
그 이유는 우선여성의 교육은 물론이고 사회 활동에 대하여 긍정적이지 못했던 당시의 시대상황에 있을 것이다. 여성의 사회 참여에 부정적인 사회에서 여성 지도자가 나오기 어려운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런 시대에는 전통적으로 여성의 ‘후견인’ 역할을 하는 아버지나 남편이 열린 마음으로 딸이나 아내를 교육받을 수 있도록 후원한 경우에 그녀가 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런 모순적인 일이 어디 있나!’ 싶은 생각에 속이 상하지만, 지금까지 이 글에서 다뤘던 사비트리바이 풀레, 술탄 라지야, 라마바이 등 자신의 이름을 가지고 살았던 여성들도 모두 그런 경우였다. 홀로 성장한 여성들도 많이 숨겨져 있을 것이라고 믿고 싶지만, 어쨌든 드러난 사실은 이렇다.
또 다른 이유로, 당시 인도 민족주의 운동의 가부장적 성격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크게 보면 첫 번째 이유인 시대상황과 관련되는 이유다.
인도의 이름난 민족 운동가들은 높은 교육수준과 깨인 사회의식을 자랑하는 사람들이고 많은 사회개혁을 이루어낸 것도 사실이지만, 여러 자료를 통해 민족운동 진영을 들여다보면 봉건적이고 가부장적인 구석이 눈에 띄는 것을 어쩔 수 없다. 인도사람들이 들으면 불만스럽게 느낄 수도 있다는 점을 감안하여 사족으로 덧붙이자면,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을 비롯한 각종 ‘~운동’ 진영에도 가부장주의적인 사고, 분위기를 찾아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서론이 너무 장황해졌지만, 간디의 리더십을 통해 당시 인도 민족운동의 여러 단면들을 살펴보자는 것이 이 글의 골자다. 불쑥 가부장제 얘기를 먼저 꺼냈지만, 간디는 정말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그 중에는 나 같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기괴하게 느껴질 만한 행동도 있었다. 그 다양한 모습들은 수많은 해석과 찬반 논쟁을 낳고 있다.
독립 인도의 아버지로서 전 세계 인도인의 추앙을 받는 위대한 영혼(마하트마) 간디이지만, 보는 시각에 따라서는 민족의 영웅뿐만 아니라 고리타분한 수구세력으로도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양반이다. 선량한 미소, 인도의 아버지, 인도인의 영웅, 위대한 영혼 간디.
간디의 상징 비폭력 무저항 운동
간디(Mohandas Karamchand Gandhi)는 20세기 인도의 독립운동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최고의 ‘스타’였다. 명색뿐인 스타가 아니라, 간디가 이룬 업적도 혁혁하다.
당시 대영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 식민지 남아프리카에서 비폭력적인 인종차별 반대운동으로 국제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45세의 나이에 인도로 귀국한 이후에도 비폭력의 초심을 끝까지 잃지 않으며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또한 간디가 합세한 이후에 인도의 민족운동은 비로소 엘리트 운동이라는 한계를 벗어나 진정한 대중운동, 인도국민의 운동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인도에서는 간디'만'이 영웅인지도 모른다. 총 7종에 달하는 지폐의 모델은 모두 간디 선생. 사실, 간디 선생만큼 인도에서 보편적인 지지를 받는 위인도 흔치 않을 것이다.
간디의 트레이드마크인 ‘비폭력 무저항’ 정신은 ‘시민 불복종’과 짝을 이루어 구현되었다. 이 두 가지 원칙 하에서 진행하는 운동을 인도에서는 ‘사티야그라하’라고 부르며 의미상으로는 ‘진리를 움켜쥔다’는 뜻이다.
간디가 주축이 되어 했던 사티야그라하는 주로 영국의 차별적이고 억압적인 악법에 대항했던 것으로 남아프리카의 아시아인 포고령(8세 이상 아시아인은 열 손가락 지문날인을 한 통행증을 만들어 지참해야 함)에 반대하는 사티야그라하, 인도의 소금법(이전까지 자유롭게 채취하던 소금을 불법화하고 생필품인 소금에 고율의 관세를 부과함)에 대항한 소금행진 같은 것이 있었다.
이 과정에서 사티야그라하 참가자들은 불법으로 규정된 행위를 자진해서, 매우 공개적으로 행함으로써 정부 등 그 법을 강제한 사람들이 자신을 처벌하도록 만들며, 이 때 폭력을 당하더라도 저항하지 않고 무조건 감수했다. 이는 진리에는 어긋나지 않으나 법에는 어긋나는 행위의 상징이 됨으로써 운동에 구심력을 더하고, 처벌자의 부도덕함, 또는 진리에 반하는 행위를 널리 알리고자 하는 의도인 것이다.
▲소금행진 당시의 간디 선생과 독립운동가 사로지니 나이두. 사로지니 나이두는 '인도의 나이팅게일'이라 불린 시인이기도 했다.
왜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는가
사실 간디가 이끌던 사티야그라하가 폭력적으로 변질된 경우가 없진 않았다. 소금행진도 그러했고, 스와데쉬 운동(우리나라 현대사의 물산장려운동과 비슷한 개념이다)도 마찬가지였다. 소금 사티야그라하는 소금창고에 대한 사보타지, 경찰서 습격 등으로 얼룩졌고, 영국제 의류나 기타 수입품들을 불태우고 인도인의 손으로 만든 것을 사용하자고 외친 스와데쉬 운동에서는 과격해진 운동원들이 수입품을 빼앗아 불속에 던져 넣었다. 광기의 불길이 전국을 휩쓸었고, 반대 의견을 가진 사람들은 두려워서 입을 다물었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문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Rabindranath Tagore)도 이런 ‘폭력적인’ 상황을 반대했다. 반대의 목소리를 냈던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타고르의 반대 요지는 ‘왜 자신의 논리를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강요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는 간디의 논리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개개인은 자신의 생각을 가질 자유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말로는 비폭력을 외치지만, 물리적인 방식을 제외한 지극히 폭력적인 상황 하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이 무엇인지 따져볼 겨를도 없이 간디의 생각에 동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어째서 남에게 자신의 생각을 강제하는가?
▲어느 문명 게이머가 게임 중 간디한테 당하고 나서 디시인사이드에 올렸던 글과 그림이다.
목숨을 담보로 한 강요 ‘단식’
오쇼 라즈니쉬(Osho Rajnishi)도 이와 비슷한 논지로 간디의 활동을 비판한 바 있다. 이 부분은 간디의 활동 중에도 ‘단식’과 관련이 있다.
간디는 몸과 마음을 정화하고 죄를 씻기 위하여 여러 번 단식을 했다. 그가 주도한 사티야그라하가 폭력적으로 흘러갈 때, 힌두와 무슬림의 갈등이 폭력적으로 분출될 때, 불가촉천민들이 분리 선거를 통해 분열을 일으키려고 할 때 간디는 이런 상황들을 죄악이라고 생각했고, 그 죄를 씻기 위해 음식을 끊겠다고 선언하곤 했다.
특히 불가촉천민들의 분리 선거 문제에 대해서는 ‘죽음에 이르는 단식’을 선언하며 천민들이 분리선거권을 포기하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음식을 먹지 않겠다고 하였다.
라즈니쉬는 이러한 상황을, 비폭력을 외치며 스스로의 목숨을 담보로 하여 남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이야말로 최악의 폭력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이와 같이 간디가 자신의 생각을 남들이 따르도록 강력하게 밀어붙일 수 있었던 근저에는 늘 자신의 생각이 ‘옳다’는 강한 신념이 있었을 것이다. 그의 굳건한 신념은 분열의 시기에 민의를 모아 독립의 길로 나아가는 리더십을 발휘하게 하였다. 그럼에도 그의 비상한 신념이 혹시 독선은 아니었는가 하는 의구심은 떨쳐버릴 수 없다.
실제로 간디는 인도의 독립을 논의하기 위해 영국의 내각 의원들과 인도 측 대표단이 만난 자리에서 이런 요지의 발언을 한 바 있다.
“국민회의는 힌두, 무슬림, 여성, 천민, 지방의 군주국 거주민 등 모든 인도인을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국민회의의 대표인 내가 전 인도의 대표이며, 무슬림, 여성, 천민 등을 대표해서 여기 참석한 다른 대표들은 사실 올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이만하면 독선 중에서도 수준급이 아닌가!
한동안 온라인을 달구던 유명 게임 중에 <문명>이라는 것이 있었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지도자들이 서로 영토를 차지하고 문명을 발전시키며, 그러는 와중 전쟁을 해서 영토를 넓히는 시뮬레이션 게임이다.
인도 문명권의 대표선수로 등장하는 사람이 바로 간디인데, <문명> 게이머들 사이에서는 악명 높은 존재로 통했다. “옥수수를 줄 테니 다이아몬드를 내놓으시오.” 이런 식으로 말도 안 되는 제안을 한다는 것이다. 거절하면 처절한 응징이 뒤따른단다.
이런 게임 속에서의 간디를 두고, ‘협상이 안 되는 무대뽀’, ‘대화가 안 통하는 막무가내’ 등의 수사가 따라다닌 모양이다. 어쩌면 게임기획자는 간디의 신념이 만들어낸 어두운 그림자를 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문화 미래 이프
1. 생애
간디는 인도 항구도시 포르반다르에서 태어났으며, 일곱살때 아버지가 수상으로 부임한 라지코트로 이사했다. 아버지는 배움은 없었으나, 아들의 말을 믿어주고 배려하는 분이었으며, 어머니는 힌두교의 가르침에 따라 사는 독실한 힌두교 신자였다. 이러한 가정환경은 간디에게 고지식할 정도로 정직한 성격과 독실한 신앙을 심어주었다. 열 세살이 되던 해에 부모의 뜻에 따라 카스톨바이와 결혼했으며, 1887년 열 여덞살때 사밀러스 대학교에 입학했다. 대학생 시절, 아버지 친구의 충고로 영국 런던대학교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 (University College London: UCL) 에서 법학을 공부하여 1891년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라지코트와 봄베이에서 변호사생활을 하던 그는 일년간의 계약으로 남아프리카의 인디아계 상사에서 근무하기로 하였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의 생활은 간디가 백인들에게 차별당하는 동족들을 보게 했다.
2. 업적
그는 일생 동안 정치적인 목적을 위한 폭력을 거부했는데, 그의 비폭력주의는 나라 안 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큰 영향을 주었다. 1918년 인도 국민회의의 지도자 역할을 맡은 것을 전후로 자유를 얻기 위한 투쟁의 선봉에 서면서, 간디는 인도의 상징 중의 하나가 되었다. 또 그 때부터 ‘위대한 영혼’이라는 뜻의 ‘마하트마(Mahatma)’로 불리게 되었다. 간디 자신은 이런 명예를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지금도 마하트마 간디로 불린다.
3. 비판
간디는 활발한 사회운동을 했지만, 노동자들에게 간디는 기득권층을 위한 지식인에 불과했다. 실례로 그는 1917년 파업권이 없는 노동조합 결성지원을 자본가들에게 제의해서 구자라트 주의 노동운동을 침체시켰는데, 이는 활발한 노동운동으로 권리를 쟁취해 간 봄베이의 노동자들과는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또한 1935년 가족임금제도(가족중 한 명이 실직시 다른 가족의 임금을 인상)를 받아들여, 여성과 노인노동자들이 해고당하게 하는 등 사회적 약자의 편을 대변하지 못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때에는 인도의 전쟁가담을 주도했는데, 이는 그의 비폭력주의와는 모순되는 모습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식민지 인도 청년들을 총알받이로 징병해 사지로 내몬
사람, 바가트 싱을 비롯해 여러 혁명가들을 서둘러 처형해 달라고 영국
정부에 요청한 사람, 통념과 달리 정치적 목적에 따라 때로는 대중 폭동을 조장하고 방치한 사람, 민주적 절차에 따라 인도국민회의당(이하 ‘국민회의’) 의장이 된 수바스 찬드라 보세에게 압력을 가해 사퇴시키고 결국 쫓아낸 사람. 충격적이게도 이 사람들 모두 "마하트마 간디" 이다.
이 책은 진보적 관점으로 간디를 조명한 간디 평전으로,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완전무결한 ‘성인’이 아니라 문제적 인물, 논쟁적 인물이였던 간디에 대해 인도 진보운동의 거목 남부디리파드가 냉철한 비판지성과 깊은 존경심으로 써내려갔다. 저자는 텐둘카르의 전기를 레퍼런스로 준용하고 사회적, 역사적 맥락, 국내외 경제 상황과 국제 정세의 변화를 고려해 간디의 유산과 공과(功過)를 총체적으로, 균형 있게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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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인터넷에서 자료 찾는 중이었거든요. .자료 감사합니다. 교수님
세계의 역사 교수님 강의를 듣고 싶은데 거리가 멀어서 안타까운 마음뿐이랍니다.
부디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셔요...
그럼 분명 좋은 결과만 있으실 겁니다...
홧팅!
감사합니다 교수님 ^^
부디 홧팅....열공하셔요...
어디서부터 해야하나 막막했는데 교수님이 계서서 큰도움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
가슴이 답답했습니다.
어디서 부터 해야하나 걱정만 하고있었는데 감사하게 잘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말대로 잘 읽고 하루에 완성하도록 하겠습니다
교수님 좋은 자료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교수님 암담,갑갑 했는데 다섯군데 전국서점 찾아서 겨우 한권 택배로 받아놓고 한줄도 못쓰고 있었는데
용기를 내서 열심히 작성해 보겠습니다.감사 ~감사합니다~꾸~벅 ^^
감사합니다.. 후배님들 많이들 오라고 해야겠어요~
자료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교수님.담아갑니다.
좋은자료 감사합니다...덕분에 한결 잘할수 있을거 같습니다...
인도의 킬라파트운동이 과제인데.
폭넓은 자료와 전체의 맥락으로 주변국까지..
세계의 역사에 빠져드내요
자료가 있어도 어떤식으로 정리해야 할지 막막했는데 정말 감사합니다...
교수님 넘~ 감사드립니다. ^^
감사합니다 이제 과제가 완성되어 갑니다
담아갑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