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해는 1천 이랑의 둔전이 수백 개의 염조만 못하다고 보면서, 염업이야말로 진실로 재물을 모을 상책이라고 파악하였다. 그가 소금에 대해 적극적으로 인식한 것은 해안적인 기반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산해는 “소금을 굽는 일에 대해서만은 신이 바닷가에서 생장한 탓에 대충 그 요점을 알기 때문에 스스로 농포(農圃)의 지식을 믿고 감히 지리한 말씀을 올린 것입니다”라고 표현할 만큼 자신이 바닷가 출신임을 강조하였다. 그만큼 어릴 때부터 해안에서 성장하였기 때문에 소금의 중요성과 활용에 대해 상당한 식견이 있음을 자부하고 있다. 이어서 “신에게 호서 지방의 소금을 감독하는 칭호를 하사하신다면, 비록 제대로 걷지 못하더라도 오히려 말을 타고 내려가서 부축을 받고 해도(海島)의 염정(鹽井)이 있는 사이를 왕래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명령만 내리면 염정 개발을 주도할 수 있음을 밝혔다. 이산해의 자염에 의한 국부 증진책은 실용적인 사상에서 기인한 것으로, 다수의 성리학자들과는 달리 의(義)와 리(利)를 대립적인 것으로만 이해하지 않고 상호보완적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말년의 삶
1599년 이산해는 다시 영의정에 복귀하였다가 1600년에 중책에서 벗어났다. 당시 이산해는 권력의 중심에 섰던 홍여순(洪汝諄)과 정치적으로 크게 대립했는데, 당쟁사에서는 대북(大北) 내의 이산해와 홍여순의 대립을 북인 내에서 골북(骨北)과 육북(肉北)의 분당으로 파악하고 있다. 선조 후반 이산해는 정치권의 중심에 있으면서 당쟁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동인과 서인의 분당, 남인과 북인의 분당, 북인 내의 대북과 소북, 골북과 육북의 분당에서, 그의 이름은 늘 동인, 북인, 대북, 골북의 중심에 자리했다.
1600년 이산해는 남양의 구포(鷗浦)에 우거하였다가 잠시 뒤에 신창(新昌)의 시전(柿田)으로 이사하였다. 이후에는 주로 보령, 남양, 신창, 노량 등지에서 만년의 삶을 즐겼다. 1607년의 연보에서, “공이 경자년(1600)부터 7년 사이에 출세에 대한 아무런 생각이 없어서 기교(畿郊)에 거처하기도 하고 강호에 거처하기도 하였는데, 심부름하는 아이와 말 한 필로 행색이 조촐하였다. 때로 시흥이 일어나 언어로 표현하여, [구포록], [시전록], [노량록]이 문집에 실려 있다”는 기록은 당시의 처세와 생활상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최고의 관직인 영의정까지 지냈지만, 검소한 삶을 지향한 그의 모습은 평생을 가난한 자와 함께 한 숙부 이지함의 모습을 연상하게도 한다. 이 무렵 이산해는 노량에 작은 정자를 세웠다. 조정의 하례 참석 등 서울에 왔을 때 거처할 곳이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1608년 2월 선조가 사망하였다. 이산해는 선조 왕릉의 지문(誌文: 죽은 사람의 행적 따위를 적은 글)을 지어 올리는 것으로서 선조와 함께 했던 인연을 마지막까지 이어갔다. 1609년 3월 이후 이산해의 병세는 날로 악화되어, 8월 23일 장통방(長通坊) 집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의 나이 72세 때였다. 충청도 예산현 동쪽 대지동에 그의 무덤이 조성되었으며, 이미 사망한 부인 양주 조씨의 무덤을 보령 관두산에서 옮겨와 부장(祔葬)하였다. 사위 이덕형은 영의정으로 호상(護喪: 상가 안팎의 일을 지휘하고 관장함)을 맡았다. 막내 사위 안응형은 한산군수로, 외손 이여규는 아산현감으로 장례에 참여한 것에서도 보이듯 한산과 아산 일대를 기반으로 한 이산해 가문의 위상은 후대까지도 계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김학수, [세상에 끝내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삼우반, 2005; 이종묵, <유배지 평해를 빛낸 이산해>, [조선의 문화공간] 2책, 휴머니스트, 2006; 이성무 외, [아계 이산해의 학문과 사상], 지식산업사, 2010.
- 글 신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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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국사학과와 동 대학원 졸업.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학예연구사를 거쳐 현재 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역사의 대중화에 깊은 관심을 가져 KBS <역사추리>, <역사스페셜>, <한국사 傳> 등의 자문을 맡았고, 쓴 책으로는 [고전소설 속 역사여행], [조선 왕실 기록문화의 꽃 의궤], [조선 중, 후기 지성사 연구], [규장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들], [이지함 평전], [조선평전], 등이 있다. 최근에는 조선시대 사학회 총무이사,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건립 전문위원, 외교통상부 외규장각도서 자문포럼 위원으로 활동하며 조선 시대의 왕실 문화와 기록 문화에 깊은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