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는 내 친구
서민들의 이야기가 살아 숨쉬는 곳, 생활 속의 기쁨과 슬픔이 공존하는 곳, 바로 라디오 세상이다.
라디오는 초기 방송극 시절부터 많은 이들의 삶을 대변하며 힘을 불어넣어 준 소중한 친구임에 틀림없다.
서울의 명물, 두 개의 안테나 : 최초의 라디오 방송국인 경성방송국은 건물이 완공되면서부터 서울의 명물로 불렸다.
높은 건물이 없었던 서울 시내에서 높다란 두 개의 안테나용 철탑이 단연 돋보였기 때문이다.
경성방송국이 개국했을 당시 국내 라디오 숫자는 겨우 1,440대, 그나마 한국인이 갖고 있는 건 275대에 불과했다.
당시의 라디오는 대단히 비싼 귀중품이었다. 한두 명이 들을 수 있는 광성식 라디오는 십 원, 가족이 함께 들을 수 있는 진공관식 라디오는 백 원에서 비싸게는 사백 원까지 쳐줘야 했다.
당시 쌀 한 가마니가 십오 원이었으니, 얼마나 귀했는지 짐작할 수 잇다. 게다가 일제 당국인 한국인의 사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해외 방송을 엄격히 금지했기 때문에, 라디오를 갖고 있더라도 체신청에 신고해 허강증을 받아야만 청취할 수 있었다.
철저한 검열제로 진행된 초기 한국어 방송의 주류는 방송극과 연예 프로그램이었다.
<인형의 집>, <춘향전> 등의 방송극이 인기를 끌었고, 각종 연예 프로그램에는 기생들이 동원되었다.
창을 하다가 틀린 기생들이 아나운서에게 "선생님, 미안해요"라고 던진 말이 그대로 방송되기도 해서 청취자들의 웃음을 유발했다고 한다.
최초의 아나운서 등장 : 우리 나라 최초의 아나운서는 바로 이 이옥경이라는 기혼여성이었다.
초기의 방송국에는 아나운서가 없었다. 그래서 기술을 맡은 남자 직원들이 돌아가며 일기예보와 뉴스를 진행하는 아나운서 역할을 맡았는데,
투박한 목소리로 방송을 하니 듣기에 상당히 껄끄러웠다고, 그러던 중 기술부의 중추적 역할을 하던 노창성이라는 사람이 새로운 대안을 제시했다.
일어에 능통한 자신의 아내 이옥경에게 아나운서 역항르 맡기자고 했던 것. 당시 방송에서는 일어와
한국어를 같이 사용했기 때문에 일본에서 학교를 다닌 이옥경은 딱 맞는 인재였다. 남편의
추천을 받은 그녀는 음성 테스트를 받고 정식 아나운서가 되었다. 전파를 타고 흘러나온 부드러운 여성의 목소리는 큰 화제를 불러모았는데,
<조선일보>는 "앵무새 같은 안내성". "아나운서라는 명칭을 가진 꽃 같은 여성"이라며 이옥경을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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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머리 선택 좋은 정보글로 하겠습니다.라디오에 관한 에피소드를 담은 글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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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 간만에 오셨네여 다이아몬드레이디님 즐거움으로 가득하신 한주되세여 날씨가 덥네여 ㅇ ㅏ ㅇ ㅣ ㄷ ㅓ 우 ㅓ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