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숭고(嵩高)한 여체(女體)
목불인견(目不忍見)의 대참상이었다.
"크악!"
"흐으악!"
죽는 자들은 목젖이 찢어져라 처절한 비명을 터뜨렸다.
숲속에는 난데없는 시체들이 속속 쌓여 갔다.
퍼펑!
차차창!
"케엑!"
"끄아악!"
탐욕이 부른 처참한 살육전이었다.
대웅곡의 구백여 녹림 무리들은 평소 자신이 받들던 두령조차 망각했다. 그들은 오직 황금을 차지하기 위해 허무한 목숨을 내던지고 있을 뿐이었다.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하늘도 외면하고 땅도 슬픔에 잠긴 추악한 싸움은 끝없이 계속되었다.
연우군과 녹령호리 일행은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들의 표정은 무겁게 굳어 있었다.
비록 연우군의 계획은 성공했지만, 그들의 마음은 어둡기만 했다.
황금을 쟁취하기 위해 동료들을 무참히 죽이고 있는 광경에서 그들은 인간의 추악함을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모두들 꼼짝도 하지 않고 사자(死者)들이 묻힌 봉분군에서 벌어지는 혈전을 지켜보았다.
대략 세 시진 가량이 흘렀다.
이제 남아 있는 사람은 불과 대여섯 명뿐이었다.
그들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그럼에도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그들 각자의 마음속에는 이십만 관의 황금을 혼자 독차지하겠다는 욕심이 이글거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죽어랏!"
"크에엑!"
음풍도귀가 휘두른 귀두도에 한 명이 가슴에서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이제 남은 것은 두 명뿐이었다.
음풍도귀와 한 명의 두령이었다.
두 사람 모두 심각한 중상을 입은 몸이었다. 그러나 지나친 탐욕은 그것을 망각시켜 주었다.
"흐흐…… 네놈도 목을 내놓아라."
음풍도귀는 귀두도를 치켜들며 두령에게 비틀비틀 다가갔다.
두령은 전신을 격하게 떨었다.
그는 비로소 느꼈다. 이십만 관의 황금보다 자신의 생명 하나가 더 소중하다는 엄연한 사실을…….
"사, 살려 주시오. 곡주…… 으으…… 살려 준다면…… 곱게…… 이곳을…… 떠, 떠나겠…… 으악!"
그는 털썩 무릎을 꿇고 애원하다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의 잘려진 머리가 낙엽 위로 굴러 떨어졌다.
음풍도귀는 귀두도를 집어 던졌다.
그는 여러 군데 상처를 입은 데다가 극도로 기진맥진해 있었다.
그러나 그는 황금을 바라보며 웃음을 흘려 냈다.
"크흐흐…… 이제야말로 이 황금은 내 것이다. 아, 아무도…… 뺏지 못한다."
그때 그의 등뒤에서 차가운 음성이 나직이 들렸다.
"과연 그럴까?"
"헉!"
음풍도귀는 크게 놀라 급급히 뒤돌아보았다.
그의 눈앞에는 한 명의 녹의소녀가 싸늘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활이 쥐어져 있었고, 활에는 녹색의 화살이 먹여 있었다.
"너, 너는?"
녹의소녀, 녹령호리는 눈가루처럼 차디차게 냉소했다.
"흐흥! 나를 알아보겠느냐?"
음풍도귀는 부르르 전신을 떨었다.
"어, 어떻게 네가 여길……."
"호홋…… 음풍도귀, 너를 이곳으로 초대한 사람이 바로 나이거늘, 어찌 내가 이곳에 오지 않았겠느냐?"
음풍도귀의 두 눈이 튀어나올 듯 부릅떠졌다.
"네, 네가…… 초대했다구? 그,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이……?"
녹령호리는 피를 토해 내듯 처절한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홋…… 그렇다! 네게 봉서를 전한 사람이 바로 나다. 뿐이겠느냐? 나는 의심 많은 네 두령에게도 네놈이 오늘 밤 황금을 독차지하려 한다는 흑심을 슬쩍 흘려 넣었지. 이 묘책은 제대로 들어맞아 네놈들은 대가리 터지도록 혈전을 벌이더구나. 호호홋……."
"으으…… 이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은 계집! 너를…… 너를 죽이겠다!"
음풍도귀는 광란하듯 울부짖었다.
자신이 여태껏 녹령호리의 농간에 놀아났다는 사실에 그는 자신의 심장을 후벼파 내고 싶을 만큼 분노하고 있었다.
그는 허덕이며 거구를 일으켰다.
"크으으…… 내가 죽더라도…… 네년과 함께 죽겠다. 흐흐…… 네년을 저승길의 동반자로 삼겠다."
그는 내던진 귀두도를 집어 들었다.
그가 녹령호리를 향해 귀두도를 치켜들 때, 시위를 떠난 화살이 그의 심장에 깊숙이 쑤셔 박혔다.
슉 파악!
"크억!"
음풍도귀는 크게 휘청였다. 그러나 쓰러지진 않았다.
"이, 이…… 년!"
그는 이를 으드득 갈며 득달같이 녹령호리를 덮쳐 갔다.
슉슉!
그 순간 두 대의 화살이 허공을 갈랐다.
파팍!
화살은 음풍도귀의 양쪽 어깨에 틀어박혔다. 그러나 음풍도귀는 덮쳐 오던 기세를 늦추지 않았다.
"뒈져랏!"
그는 대갈일성과 함께 마지막 사력을 다해 귀두도를 내려쳤다.
쉬이익!
녹령호리는 추호도 겁내지 않고 번개같이 또 한 자루의 화살을 날렸다.
콰악!
화살은 음풍도귀의 미간 속으로 사라졌다.
"크아악!"
길고 처절한 비명성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음풍도귀는 그토록 소유하고 싶어하던 황금더미 위로 쓰러졌다. 녹령호리는 허탈한 표정으로 그의 주검을 바라보았다.
부친과 형제들의 원한을 마침내 갚았다. 그러나 남은 것은 과연 무엇인가?
게다가 그녀는 조금도 통쾌함 같은 것을 느끼지 못했다.
"해내셨군요. 아아…… 소저께서 마침내 원수를 갚으셨군요!"
"장하십니다. 릉주와 일백 형제들은 지하에서나마 기뻐할 겁니다."
어느새 달려온 관제릉의 청년들이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였다.
그들은 음풍도귀의 시신에 침을 뱉고 짓밟으며 쌓였던 한(恨)을 풀었다.
녹령호리는 천천히 사위를 쓸어보았다. 한 사람의 모습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녀가 찾는 사람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안색이 가볍게 굳었다.
"도련님께선 어디에 계시느냐?"
그녀가 수하들에게 급히 묻자 그제서야 그들은 당황하여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니, 방금까지도 여기 계셨었는데……."
"어, 어디로 가셨다는 말인가?"
녹령호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순간 그녀는 산 아래로 쏜살같이 쏘아 내려갔다.
휘익!
연우군은 마음이 무거웠다.
녹령호리는 원수를 갚았다. 그리고 벌레만도 못한 녹림 무리들을 구백여 명이나 깡그리 죽여 없앴다.
그렇지만 연우군의 마음은 편치 못했다.
죽은 자들이 제아무리 처벌을 받을 만한 죄인이라 해도 그들도 어디까지나 인간이기 때문이었다.
인간이란 평등하며 또한 그 각자의 생명은 귀중한 것이라고 배워왔던 그였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계획으로 인해 수많은 인명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다.
맹예림은 말없이 연우군 곁에서 걸었다.
그녀는 연우군의 착잡한 내심을 헤아리고 있었다.
그때 가벼운 파공성과 함께 두 사람의 전면에 녹령호리가 사뿐히 내려섰다.
휙!
그녀는 복잡한 표정으로 뚫어지게 연우군을 주시했다.
연우군도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처음에는 그토록 냉혹하고 괴팍하던 녹령호리였다.
그러나 그녀는 연우군에게만큼은 더 이상 냉혹한 녹령호리가 아니었다. 녹령호리는 어느새 한 소녀가 되어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렇게 훌쩍 떠나시다니 서운하군요."
"낭자!"
"제 이름은 정유빈이에요."
"정 낭자…… 내가 이렇게 떠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떠나야 하오?"
정유빈은 연우군의 말뜻을 단번에 간파했다.
그는 자신의 계획 때문에 죽어 간 구백여 생명들에 대한 자신의 처지를 항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아셔야 해요. 저 산 위에 죽어 있는 구백 명의 녹림 무리가 죽였던 무고한 백성들의 수효는 무려 구천 명 이상이라는 사실을……."
연우군은 정유빈을 똑바로 주시했다.
정유빈은 나직하지만 또렷하게 말을 이었다.
"우리가 죽인 것은 인간이 아닌 미친 들개들이었어요. 그들을 죽이지 않았다면 그들은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을 물어뜯을 거예요. 아시겠어요? 저도 당신처럼 마음이 괴롭지만 어쩔 수 없잖아요. 세상은 살 만한 자격이 있는 자들만 살아가는 곳이에요!"
'어쩌면 그녀의 말이 옳을는지 모른다.'
연우군은 내심 중얼거렸다. 그러나 지금은 어느 것이 옳고 어떤 것이 나쁘다고 감히 단언하고 싶지 않았다.
"가겠소."
연우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로 가시죠? 저도 이곳을 떠날 거예요."
될 수 있으면 함께 가자는 뜻이었다.
연우군은 실소를 흘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후후…… 정 낭자가 어디로 가든 나와는 방향이 다를 것이오."
"중원으로 가실 건가요?"
"그렇소."
"중원 어느 쪽인가요?"
그녀는 연우군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말하고 싶지 않소."
연우군은 가볍게 목례하고 걸음을 옮겼다.
정유빈은 움찔하다가 급히 말했다.
"당신은 우리들의 은인이에요. 무엇이든 말씀하시면 그대로 해드리겠어요!"
"후훗…… 황금으로 말이오?"
"그, 그래요!"
연우군은 여전히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황금으로 살 수 있는 것보다는 사지 못하는 것이 더 많소. 그대는 그 사실을 알아야 하오."
이어 그는 산 아래로 휘적휘적 걸어 내려갔다.
'이런 것이 아니었는데…… 이, 이건…….'
정유빈은 망연자실하여 연우군의 멀어져 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그녀는 자신도 놀랄 만큼 크게 외쳤다.
"나쁜 자식아! 똑똑한 체하면서 가장 간단한 사실도 모르느냐? 황금만 있으면 너보다 백배 훌륭한 사내를 천 명도 살 수 있어. 멍청한 놈아, 혼자 실컷 고고하게 살아라!"
대답은 물론 없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은은한 메아리만 빠르게 되돌아와 정유빈의 텅 빈 마음을 뒤흔들었다.
동쪽에서 뿌옇게 여명이 터오고 있었다.
그 아래 어딘가로 무정한 사내는 떠나고 있을 것이다.
"바보 같은 자식! 저를 좋아하는지도 모르고……."
허탈하게 중얼거리는 잔혹한 녹령호리의 갸름한 뺨으로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 * *
험하디 험한 산중이었다.
연우군은 심한 병을 얻었다.
전신이 불덩어리처럼 뜨거웠고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혼미한 상태에서 계속 헛소리만 했으며, 땀을 흘리면서도 극심한 추위로 온몸을 덜덜 떨어댔다.
녹령호리 정유빈과 헤어진 지 닷새째 되는 날부터 그는 아프기 시작했다.
연우군과 맹예림은 험준한 산길만을 택해 걷고 또 걸었었다.
추격을 떨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다행히 추격자들은 따돌린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모든 고통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극심한 허기와 추위, 그리고 분노가 두 사람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끈질기게 괴롭혔다.
"으으…… 추, 추워…… 흐으……."
그곳은 바위 숲이었다.
보이는 모든 것들은 삐죽삐죽 난립한 무수한 바위뿐이었다.
바위와 바위가 서로 기대고 있는 아래쪽의 우묵한 곳에 연우군과 맹예림은 잔뜩 웅크리고 있었다.
연우군은 옆으로 누운 채 몸을 새우처럼 웅크리고 전신을 사시나무 떨듯 떨어댔다.
"으으…… 으으……."
그렇지만 그의 얼굴은 온통 땀투성이었다.
그런데 옷 밖으로 드러난 그의 살에 좁쌀 같은 두드러기가 소름끼치도록 흉측하게 빽빽이 돋아 있지 않은가?
맹예림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발만 동동 굴렀다.
그녀는 무공을 익혔기에 웬만한 허기와 추위는 견딜 수 있었다.
'아아…… 어쩌면 좋아! 도련님을 저대로 놔뒀다가 변이라도 당하시면…….'
경험이 없는 그녀는 자신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고 연우군 때문에 속을 끓이고 있었다.
그들은 현재 산서성과 하북성(河北省)의 경계인 태행산중(太行山中)에 머물러 있었다.
태행산은 예로부터 바위가 많고 험악하기로 강북의 으뜸이었다.
두 사람은 지난 사흘 동안 줄곧 바위산만 지나왔었다.
그랬기에 산짐승 한 마리는커녕 불을 피울 마른 나뭇가지 하나 발견하지 못했다.
앞으로도 이 바위산은 얼마나 더 계속될지 알 수 없었다.
"하으으…… 크으……."
연우군은 격렬히 떨었다.
맹예림은 연우군보다 더 지독한 마음의 고통에 시달렸다.
어제였다. 너무도 극심한 허기에 지쳐 있던 두 사람은 잠시 바위 밑에서 쉬고 있었다.
보이는 모든 것이 바위투성이였으며, 먹을 것을 구하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맹예림은 혼자서 주위를 살폈다.
혹시 천우신조로 먹을 만한 것을 발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다가 그녀는 기적적으로 서너 개의 붉은 버섯을 발견했다.
기쁨에 겨운 나머지 그녀는 앞뒤 생각할 것 없이 그것들을 연우군에게 먹였다.
물론 연우군에겐 자신은 이미 많이 먹었다고 말했다.
연우군은 고마워하며 버섯을 먹었다.
그 후 오래지 않아 연우군의 전신에 두드러기가 돋아나며 높은 열에 신음하기 시작했다.
맹예림은 자신의 잘못을 크게 자책했다.
자신이 무분별하게 해로운 버섯을 먹였기에 연우군이 병에 걸렸다는 것을 대번에 깨달았다.
원래 연우군의 체내에는 엄청난 태극지기(太極之氣)가 잠재되어 있었으므로 백독(百毒)이 그를 해치지 못한다.
그러나 그가 먹은 버섯은 독버섯이 아니었다.
그 버섯은 혈맥에 스며들어 전신에 반진이 나게 하며 심한 두통과 고열을 일으키는 음창균심이었다.
물론 버섯을 먹지 않은 맹예림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연우군은 어제부터 지금까지 고통에 허덕이고 있는 중이었다.
언제부턴가, 소담스런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흐으…… 으으……."
연우군은 혼미한 중에도 간간이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려 냈다.
맹예림은 소리없이 눈물을 흘리며 연우군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머지않아 밤이 찾아왔다.
휘이이 잉!
뼛속까지 얼릴 듯한 혹독한 한풍이 눈보라와 함께 몰아쳐 왔다.
"으으윽…… 흐으……."
연우군은 전신을 부들부들 떨어댔다.
맹예림의 가슴은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져 나갔다.
그녀 자신도 몹시 추웠다. 그러나 연우군이 겪고 있는 추위와는 견줄 수 없다고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안 돼! 이대로 있다가는 도련님은 얼어 죽고 말 거야! 어, 어떻게든 도련님을 살려야만 해!'
맹예림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이어 그녀는 무슨 생각에선지 무릎걸음으로 연우군에게 다가갔다.
연우군을 묵묵히 내려다보던 그녀는 돌연 자신의 옷을 훌훌 벗기 시작했다.
오래지 않아 그녀는 태어날 때 그대로인 알몸이 되었다.
휘이 잉!
차가운 눈보라가 그녀의 나신을 모질게 때렸다.
옥을 깎아 다듬은 듯한 아름다운 나신이었다.
전신에 소름이 돋아났다.
그러던 그녀는 결연한 표정으로 손을 뻗어 연우군의 옷을 벗겼다.
두드러기가 잔뜩 돋은 연우군의 알몸이 드러났다.
"아으으…… 흐으……."
알몸이 된 그는 더욱 거세게 몸을 떨었다.
맹예림은 천천히 그의 앞쪽으로 누웠다.
이어 연우군의 옷과 자신의 옷을 두 사람의 알몸 위에 덮었다.
옷이불 속에서 그녀는 잠시 가만히 있었다.
그러나 곧 두 팔을 뻗어 연우군을 끌어안았다. 살아 있는 육체(肉體)는 뜨거웠다.
훈훈한 육체를 접하자 연우군은 맹예림에게 거머리처럼 달라붙었다.
"아아……."
맹예림은 두 눈을 꼬옥 감았다.
표현할 수 없는 미묘한 느낌이 뱀의 혓바닥처럼 그녀의 전신을 핥았다. 두 사람의 몸은 바위 틈바구니에서 한 치의 틈도 없이 밀착되었다.
"흐으…… 으으……."
연우군은 그녀의 봉곳한 젖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의 신음소리가 점차 낮아지더니 오래지 않아 멈추었다.
두 사람이 누워 있는 발치로는 이미 한 자 이상의 눈이 쌓여 있었다.
맹예림은 연우군의 목을 두 팔로 힘주어 끌어안은 채 내심 오열을 금치 못했다.
'흐흐흑…… 돌아가시면 안 돼요! 이제 도련님께선…… 내게 있어서 더 이상 타인(他人)이 아니십니다! 그러나 도련님께선 단 한 번도 제게 시선조차 주시지 않았었지요.'
또르륵……
참고 참았던 눈물이 또다시 흘렀다.
'이제 소녀에겐 도련님을 사랑해야 할 명분이 생겼어요. 오르지 못할 나무이지만…… 소녀는 그 나무를 바라보다 죽을 수 있게 되었어요…… 사랑합니다, 도련님!'
대장장이 딸의 입가엔 진심으로 행복한 미소가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다.
연우군은 정말 지독한 악몽에 시달렸다.
그 악몽이 하나도 기억에 남지는 않았지만,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악몽임에는 분명했다.
그는 눈을 뜨다가 흠칫 놀랐다.
코앞에 전혀 생소한 물체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물체가 무엇인지 알아내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분을 바른 듯 뽀얀 융기는 두 개였고, 융기 끝에는 버찌만한 자줏빛 유실이 부끄럽게 매달려 있었다.
봉곳한 젖가슴이었다.
게다가 그는 지금 그 젖가슴에 코를 처박고 있는 해괴한 상태였다.
그는 놀란 가슴을 진정하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야에 평화롭게 잠들어 있는 맹예림의 청순한 얼굴이 쏘아 들어왔다.
'맹 누이…… 대체 무엇 때문에…….'
크게 놀라 내심 소리치던 그는 곧 어떻게 된 영문인지 깨달았다.
그는 추위와 허기, 고열에 신음하면서도 자신이 어떤 처지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그는 지금의 상황이 맹예림의 헌신적인 행위임을 여실히 깨달은 것이다.
울컥!
말로는 형언하지 못할 격정이 그의 인후를 치받았다.
그제서야 그는 자신의 한 손이 맹예림의 엉덩이를 끌어안고 있으며, 다른 한 손은 허리를 바짝 감싸고 있음을 깨달았다.
게다가 그는 전혀 본의 아니게 맹예림의 하체와 밀착되어 있는 자신의 하체가 몹시 팽만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바보 같은 놈! 이 무슨 추태인가?'
자신을 살리기 위해 서슴없이 옷을 벗고 몸을 내던진 맹예림의 숭고한 희생 앞에서 수캐처럼 욕정이라니…….
비록 정신과는 다른 본능이었다고는 하지만 연우군은 그 사실이 이토록 가증스러울 수 없었다.
그때 맹예림이 몸을 뒤척였다.
"음……."
연우군은 눈을 감았다.
왜 눈을 감았는지 그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순간 맹예림의 나직한 탄성이 터졌다.
"아!"
곧이어 그녀의 나신이 바르르 떨리는 것을 연우군은 여실히 느꼈다.
잠시 동안의 침묵이 흘렀다.
연우군은 맹예림의 손끝이 자신의 코밑을 스치는 것을 느꼈다.
직후 연우군은 맹예림이 다시 한 번 온몸을 떠는 것을 느꼈다.
"살아나셨어…… 아아…… 하늘이여! 감사합니다. 아아……."
맹예림은 감동에 겨워 탄성을 터뜨렸다.
그녀의 뜨거운 눈물이 연우군의 뺨으로 떨어졌고 연우군은 똑똑하게 그것을 느꼈다.
'맹 누이…… 그대는……?'
연우군이 내심 격하게 중얼거릴 때 맹예림은 살며시 일어났다.
두 사람을 덮었던 옷이불이 벗겨졌다.
연우군은 한기를 느꼈다.
그때 맹예림의 짧은 경악성이 터졌다.
"어마?"
이어 연우군은 자신의 몸에 옷이 덮여지는 것을 느꼈다.
연우군은 깨달았다. 그녀가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고 말았다는 것을…….
그것은 연우군의 본심과는 하등 무관한 일이었지만 어쨌든 그것은 현실이었다.
'빌어먹을!'
연우군은 옷을 뒤덮은 채 내심 욕설을 퍼부었다.
잠시 후 맹예림은 조심스럽게 연우군의 옷을 입혔다.
서로를 위해서 연우군은 그녀가 옷을 모두 입혔을 때 부스스 일어났다.
"아! 깨어나셨군요, 좀 어떠세요?"
맹예림은 자신의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감추려는 듯 빠르게 물었다.
연우군은 그윽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매우 좋소."
"다행이에요. 정말 다행이에요……."
맹예림은 눈물을 글썽이며 다행이라는 말을 입 속으로 수없이 되뇌었다.
연우군은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들을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말하지 않더라도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자신의 모진 생명이 이 차디찬 태행산에서 어떻게 극적으로 소생했었는지를…….
그때 맹예림이 탄성을 터뜨렸다.
"아…… 들어 보세요, 물소리예요!"
연우군이 귀를 기울여 보니 과연 멀지 않은 곳에서 희미하게 물소리가 들려 왔다.
어제는 경황 중이라 그 소리를 미처 듣지 못했던 것이다.
맹예림은 나비처럼 팔랑거리며 바위산 저쪽으로 달려갔고 연우군도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 * *
항주(杭州).
절강성(浙江省)의 고도(古都)로써 수많은 명승지와 자랑거리를 지닌 곳이다.
송고종(宋高宗) 시대에는 임안(臨安)으로 불렸고, 진대(秦代)에는 전당(錢塘)이라고 불렸던 중원육대명도(中原六大名都)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예로부터 일컫기를 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땅에는 소주(蘇州)와 항주가 있다고 했다.[上有天當 下有蘇杭]
그만큼 항주의 아름다움은 빼어났다.
서호(西湖).
항주에 오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 이곳 서호를 그냥 지나치는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이다.
둘레 약 삼십여 리의 천하 절경인 호수.
서호 주위로 병풍처럼 늘어선 여러 산(山)의 그림자가 호수에 멋지게 드리워져 있으며, 그 산들에 크고 작은 많은 고찰(古刹)이 산재해 있었다.
오보일정(五步一亭), 십보일각(十步一閣), 산색도영(山色倒影), 춘화추월(春花秋月)이란 말은 서호를 가장 잘 표현하고 있었다.
서호는 원래 두 개의 호수를 하나로 터놓은 것이었다.
큰 쪽이 정심호(亭心湖)이며, 작은 쪽을 이호(裏湖)라고 부른다.
산 그림자가 아름답게 드리워지고 여러 줄기의 강이 흘러들며 고찰들이 산재해 있는 곳이 이호 쪽이었으며, 항주성과 맞닿아 매우 번화하고 복잡한 곳이 정심호 쪽이었다.
석양 무렵.
서산으로 지는 해가 서호를 진홍빛으로 물들여 놓았다.
서호는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루고 있었다. 정심호 쪽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 대자연(大自然)의 장관을 넋을 잃고 구경하였다.
그곳은 항주성과 접해 있었으므로 매우 변화했고 온갖 점포들과 주루들, 그리고 서호의 명물인 기루(妓樓)들이 처마를 맞대고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한 그루의 아름드리 노송(老松) 아래 일남일녀(一男一女)가 서호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남루한 옷차림의 두 사람.
그들은 다름 아닌 연우군과 맹예림이었다.
산서성의 보덕현을 떠난 그들이 일만오천여 리나 떨어진 먼 이곳에 나타난 것이다.
두 사람은 매우 피로해 보였다. 게다가 그들은 몹시 수척한 몰골이었다.
하기야 그들은 이곳까지 오는 석 달 동안 변변히 따뜻한 음식 한 끼 제대로 먹어 보지 못했었다.
무일푼인 그들은 때때로 남의 일을 거들어 주곤 끼니를 때웠었다.
그나마 일거리가 없을 때에는 굶기가 일쑤였다.
유난히도 추웠던 지난 겨울 동안 그들은 그야말로 풍찬노숙(風餐露宿)하며 천신만고 끝에 이곳까지 흘러왔던 것이다.
연우군은 무심한 표정으로 호수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경치를 감상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머리 속에는 수만 가지 상념들이 꽉 차 있었다.
부친의 죽음과 유운장의 멸문, 천인공노할 원수가 다름 아닌 친형이라는 믿을 수 없는 사실, 태형산에서의 죽을 뻔했던 고난, 지난 겨울 동안 겪었던 무수한 치욕과 고초, 그리고 자신의 태령오절맥(太靈五絶脈).
"도련님."
그때 맹예림이 공손히 그를 불렀다.
연우군은 천천히 그녀를 돌아보았다.
초라한 모습이었다.
머리카락은 마구 헝클어진 채였고 안색은 누렇게 떴다.
게다가 옷은 때에 절었으며 눈과 뺨이 움푹 꺼진 몰골이었다.
연우군은 차마 그녀를 더 바라볼 수가 없어서 홱, 외면했다.
궂은 일은 모두 그녀가 하였다.
연우군이 일을 할라치면 그녀는 펄쩍 뛰며 극구 만류했다.
일거리가 없을 때 그녀는 간혹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돌아왔다.
그때마다 그녀는 차디찬 음식을 가져왔다.
연우군은 오래지 않아 그 음식이 그녀가 구걸해 온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절망하고 비통했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입을 여는 순간 참고 참았던 오열이 터져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겨울을 보낸 모진 두 목숨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잠시…… 다녀오겠어요."
맹예림은 죄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떨구며 기어드는 목소리로 겨우 말했다.
연우군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가 지금 이 순간 무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다만 자신의 무능함을 한없이 저주할 뿐이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곧 돌아오겠어요."
맹예림은 공손히 허리를 굽힌 다음 거리 쪽으로 걸어갔다.
그제서야 연우군은 그녀를 쳐다보았다.
힘없이 늘어진 초라한 어깨가 그의 시야로 쏘아져 들어왔다.
그녀는 필경 구걸을 하러 가는 것일 게다.
그녀에겐 무공이 있었다.
지난 석 달 동안 연우군은 많은 무공초식을 그녀에게 전수해 주었었다. 그 초식들은 국상엽이 연우군에게 주었던 이름 모를 비급에 기록된 것들이었다.
연우군은 자신이 해독할 수 있는 무공들을 모두 맹예림에게 전수했다. 그리하여 맹예림의 무공은 예전과 비할 바가 아닐 정도로 급증했다.
또한 그녀는 이후 더욱 눈부신 발전을 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토록 훌륭한 무공을 지녔더라도 한 끼의 음식을 구하는 것과는 전혀 무관했다. 도적질이나 나쁜 짓은 때려 죽여도 못하는 그녀였으므로…….
"맹 누이!"
순간 연우군은 외치듯 그녀를 불렀다.
맹예림은 뚝,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다.
연우군이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그녀는 간절한 표정을 지었다.
'제발…… 제발 아무 말씀도 마세요. 도련님…….'
그녀의 표정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연우군의 뺨이 보기 싫게 씰룩거렸다.
마침내 그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돌렸다.
맹예림은 한참이나 그의 떨리는 어깨를 바라보았다.
'알아요. 도련님의 마음을…… 그러나 참고 견디셔야 해요. 도련님께서 병을 고치는 그날까지…… 소녀는 아무래도 괜찮아요. 도련님의 병만 고칠 수 있다면 소녀야 어떻게 되든 개의치 않겠어요.'
뿌연 눈물이 그녀의 두 눈 가득 고였다.
그녀는 누가 볼세라 눈물을 훔치며 인파 속으로 사라져 갔다.
연우군은 석상처럼 핏빛 호면만 응시했다.
'맹 누이…… 내 그대의 노고를 결코 잊지 않겠소. 결코…….'
그는 입 속으로 몇 번이고 그렇게 되뇌었다.
주위는 곧 어두워졌다.
그와 함께 거리는 불야성(不夜城)을 이루었다.
수백의 기루와 주루에서 홍등(紅燈), 청등(靑燈)을 내걸었다.
또한 장사치들의 외침과 노류장화들의 호객이 어우러져 매우 시끄러워졌다.
연우군은 주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개의치 않고 깊은 상념에만 빠져 있었다. 새해를 객지에서 보낸 그의 나이는 올해로 열일곱, 그러나 그의 성격은 지난 몇 개월 동안 크게 변해 있었다.
말이 없어졌으며 웬만한 일에는 표정조차 변하지 않았다.
또한 세상에는 착한 사람보다는 악인이 더 많다는 사실을 체험했기에 세상을 보는 눈도 달라져 있었다.
그는 생(生)에 대한 환멸을 절감했다.
그때 근처에서 뾰족한 비명성이 터졌다.
"악!"
그러나 연우군은 쳐다보지 않았다.
뒤이어 은은한 호통성이 터졌다.
"죽어 마땅한 놈! 감히 대로(大路)에서 투적질( 소매치기)이라니, 네놈의 손모가지를 꺾어 놓겠다!"
음성으로 미루어 젊은 청년인 듯했다.
퍼퍽!
"으악!"
매질하는 소리와 고통에 찬 비명성이 연이어 터졌다.
그제서야 연우군은 천천히 그곳을 돌아보았다.
그곳은 그리 멀지 않은 대로상이었다. 길바닥에는 한 소년이 쓰러져 있었다.
행색은 매우 초라했고 대략 십칠팔 세 가량 되어 보였는데, 눈이 찢어졌고 입이 터져 붉은 피가 줄줄 흘렀다.
소년의 전면에는 이십여 세 가량의 화복청년이 오만하게 서 있었다. 화복청년은 매우 화려한 행색이었고, 허리에는 값진 보검을 차고 있었다.
화복청년 좌우에는 두 소녀가 있었는데 좌측의 소녀는 홍의를 입었고 생기발랄한 모습이었다. 우측의 소녀는 백의를 입었는데 청순하면서도 매우 착한 인상이었다.
나이는 백의소녀가 한두 살 위인 것 같았다.
"강(姜) 오라버니! 저런 놈은 절대 용서할 수 없어요! 당장 손목을 잘라 버려요!"
좌측의 홍의소녀가 아미를 찌푸리며 화복청년에게 말했다.
"내 생각도 용매(蓉妹)와 같소. 저런 놈은 살아 있을 하등의 가치조차 없는 놈이오! 아예 죽여 버리겠소!"
소매치기 소년은 홍의소녀의 주머니를 슬쩍 했던 것이다.
화복청년은 경멸스런 미소를 지으며 소년에게 다가갔다.
"네놈의 간이 무슨 색인지 반드시 봐야겠다. 감히 취봉선자(翠鳳仙子)의 주머니를 털다니……."
그는 거칠게 소년의 멱살을 잡아 일으켰다.
그때 그가 취봉선자라고 하는 말에 구름처럼 모여 있던 구경꾼들은 한결같이 탄성을 터뜨렸다.
"아아! 저분 소저께서 바로 이번 오룡대회(五龍大會)에서 맹룡풍(猛龍風)이 된 청성파(靑城派)의 취봉선자 안부용(安芙蓉)이었군!"
"그러고 보니 저기 백의를 입은 소저는 같은 맹룡풍인 아미파(峨嵋派)의 아미옥녀(峨嵋玉女) 상관영(上官英)이 틀림없다."
"이런 곳에서 무림계의 쟁쟁한 여고수들을 보게 되다니……."
그들의 말은 틀림없었다.
홍의소녀는 청성파 장문인(掌門人) 백염객(白髥客)의 제자였다.
그녀의 성격이 오만하고 차갑다는 것은 무림계가 다 아는 사실이었다.
백의소녀 아미옥녀 상관영은 아미파 장문인 천허불(天虛佛)의 제자였고, 그녀는 매사에 공정하고 선(善)하여 많은 칭송을 받고 있었다.
그녀들이 오룡고수의 마지막인 맹룡풍의 지위에 오른 것으로 미루어 그녀들의 무공을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구경꾼들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자 취봉선자 안부용은 도도히 턱을 치켜들었다. 그러나 아미옥녀 상관영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소매치기 소년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때 화복청년이 한 손으로 소매치기 소년의 멱살을 잡은 채 소년의 가슴을 주먹으로 서너 차례 강타했다.
퍼퍽!
"우욱!"
소년의 입에서 핏물이 뿜어져 나왔다.
청년은 소년의 멱살을 거머쥔 채 수도 없이 뺨을 후려갈겼다.
소년의 얼굴은 금세 피떡으로 변했다.
소년은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이를 악물고 화복청년을 쏘아보았다.
"이놈이 그래도 정신을 못 차렸군!"
화복청년은 내뱉듯 외치며 검을 뽑았다.
스르릉
그러나 소년은 겁먹지 않고 도리어 피를 토하며 부르짖었다.
"그래 죽여라! 구차하게 사느니 깨끗이 죽겠다!"
"건방진 놈!"
화복청년은 소년을 내려놓고 검을 치켜들었다.
검자루에는 값비싼 보석들이 여러 개 박혀 있었다.
소년은 가슴을 활짝 폈다.
"오냐! 죽여라! 내 비록 소매치기지만 너 같은 졸부보다는 백배 낫다!"
"째진 아가리라고 잘도 중얼대는구나! 죽는 게 소원이라면 단칼에 죽여 주마!"
화복청년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번쩍, 검을 휘둘렀다.
그때 느닷없이 날카로운 외침이 터졌다.
"멈춰요!"
화복청년은 뚝, 행동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영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를 제지한 사람은 다름 아닌 아미옥녀 상관영이었다.
상관영은 걸어 나와 소년을 막아서며 똑바로 화복청년을 쏘아보았다.
"그만두세요! 돈주머니도 찾았고 그만큼 때렸으면 됐어요!"
"영매, 그렇지만 저놈은 용서를 빌지도 않았소. 게다가 저 눈빛을 보구려. 저게 사죄하는 놈의 눈빛이오?"
상관영은 소년을 힐끗 돌아보았다가 다시 말했다.
"그러나 비룡패(飛龍覇)인 해천검룡(海天劍龍) 강집현(姜集玄)이 일개 소매치기 소년을 죽였다는 소문이 무림에 파다하게 퍼져서 좋을 건 없잖겠어요?"
해천검룡 강집현.
그는 곤륜파(崑崙派)의 다음대 장문인으로 내정된 쟁쟁한 인물이었다. 곤륜파 장문인 곤륜신옹(崑崙神翁)의 수제자로서 곤륜파의 오장로(五長老)를 제외하곤 곤륜 제일고수였다.
또한 당금 무림의 후기지수 중에서도 단연 손꼽히는 청년고수였다.
구경군들은 해천검룡 강집현이란 말을 듣고 크게 놀라 수군거리며 화복청년을 새롭게 보았다.
강집현은 중인들의 시선을 느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좋소. 만약 저놈이 내게 사죄한다면 용서하겠소."
상관영은 소년을 쳐다보았다.
"어서 잘못했다고 말해요."
그러나 소년은 고개를 흔들었다.
"소저의 호의는 고마우나 나는 용서를 빌지 않겠소!"
상관영은 깜짝 놀랐다.
"무슨 말이에요?"
"상대가 다른 사람이었다면 나는 당연히 사죄했을 것이오! 그러나 저런 자에겐 결코 사죄하지 않겠소!"
"어, 어째서 그런……."
"비키시오, 영매! 이놈은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는 놈이오!"
그때 강집현이 상관영을 밀며 나섰다.
"네놈을 죽여 시체를 개에게 먹이겠다!"
그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소년에게 덮쳐 갔다.
그때 돌연 나직한 일갈이 터졌다.
"멈추시오!"
강집현은 검미를 꿈틀거리며 호통이 터져 나온 쪽을 쳐다보았다.
그와 함께 중인들의 시선도 그곳으로 집중되었다.
모든 사람의 시선을 받으며 남루한 행색의 한 소년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는 다름 아닌 연우군이었다.
연우군은 휘적휘적 걸어와 강집현의 면전에 멈춰 섰다.
이어 그는 깊숙이 가라앉은 눈빛으로 강집현을 뚫어지게 쏘아보았다.
그 눈빛을 접하는 순간 강집현은 부지중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제1권 끝>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즐감했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