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여자축구 / 홍속렬
1990년 중국에서 아시안 경기가 개최되었다
처음으로 여자축구종목이 추가되었는데 일본 중국 미국 등 많은 나라는 여자축구가 활성화 돼 있었으나 우리나라는 여자축구가 없었다.
문화 체육부 차관보가 축구기자출신으로 여자축구를 시작하기 위하여 여러가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 분의 앞을 내다보는 혜안이 없었다면 오늘날 평양에서 5만 관중이 모여 있는 공개 석상에서 용감하게 1대1의 무승부를 이끌어 낼 수 없었을 것이다 이화여대와 숙명여대에 자금을 지원 해 주며 여자 팀을 창단 하도록 유도하여 두 명문 여자 대학에서 팀을 창단한다.
중국아시안 경기에 참가하기 위하여 여자축구선수들을 공개모집을 하게 된다 타 종목의 운동을 했던 선수들을 공개테스트로 모집하여 상무에 입소 연습을 시작했다 그때 상무에 근무하고 있던 나는 이들의 뒷바라지를 책임진다. 당시 코칭 스텝은 감독에 박경화 코치에 신철순 이었다 이들을 뒷바라지 하는데 체육관에서 밤 연습을 하고 체육관 불을 안 꺼 책임자인 나는 곤혹을 치루 곤 했다
한 마디로 이들의 뒷바라지를 해주는 일은 매우 피곤하고 힘들었다.
그러나 열정이 있는 나는 군말 안 하고 묵묵히 이들의 뒷바라지를 정성과 사랑으로 해 댔다. 이들의 뒷바라지를 해주다보니 운전 면허시험도 미루고 개인적으로 부대에서 받는 스트레스와 여러 가지 어렵고 힘든 과정이 많았었다.
연습을 시작 한지 삼 개 월 만에 드디어 아시안 경기에 참가하여 참패를 당하고 돌아왔다 당연한 귀결이다 삼 개 월 연습하고 좋은 성적을 냈다면 말도 안 되는 얘기겠다 걸음마를 하는 아이와 선수의 경기였을 것이다
또한 북한에서 남북 평화 축구대회가 개최 되었는데 여자 대표 팀도 참가했으나 워낙 실력 차가 나 경기를 못 하고 남자축구만 시행 했었다
그렇게 전개된 여자축구를 보고 생각한 바가 있었다.
우리의 국격이 86, 88 올림픽을 개최한 나라 또한 경제적 으도 발전하는 국가인데 이렇게 참람한 결과를 보여줘 국민들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우리나라의 역사를 살펴보면 998회의 외침을 받았으면서도 끗끗이 오늘을 유지해 올 수 있었던 것은 우리의 어머니들이 강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대장에게 여군으로 축구팀을 만들어 한국의 여자축구를 발전시키자 건의를 했더니 부대장께서는 타당성을 인정하고 스키점프와 여자축구 두 종목을 청와대에 보고를 드렸다
이미 그때에 나는 여군으로 축구를 시작하여야 겠다 는 생각을 한 선각자였고 그 후 수년이 지난 시방 상무여자팀이 만들어져 활동을 하고 있다 상무 여자팀에게 쓴 소리를 한 다면 남자현역군인이 군인정신으로 힘차게 또 군인정신이로 가르쳐야지 나약한 군대가 뭔지도 모르는 현재의 여자 감독은 시간 낭비이며 효율적이지 못 하다 내가 고국을 떠나 온지 얼마 되었으니 시방도 상무의 감독이 그대로인지? 모르겠으나 그 친구도 내가 여자축구를 발전시킬 때 고등부 선수였고 일세 대 대표선수였다 군인선수는 현역군인이 지도해야 강해진다. 육군 충의 팀의 역사를 쓴 사람이 육군 상사 홍속렬이었다. 군인선수는 군인이 지도 해야 그 잠재능력을 극대화 시킬 수 가있다 여자팀은 더욱 그렇다 그래서 여군 팀은 민간인들보다도 더 빨리 성장 할 수 있다고 믿었다 대통령께서 허락을 하셨지만 당시 미군이 병력의 씨링을 갖고 있어 미군에서 허락을 안 해 시행될 수 가 없었다.
여자축구가 시작되기 전 앞서가던 분이 계셨다 이영근 당시 대축의 여성분과 위원장 나는 특수분 과에 속하여 장애자 및 특수 특수축구에 책임을 지고 있었는데 이영근 선배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이영근 선배는 사재를 털어 여자선수 몇을 키우고 있었다. 당신이 근무하던 외환 은행에 취직을 시켜 급여를 받게 하고 타 팀과의 연습경기도 하며 이미 시작의 장을 열어 놓고 있었다.
86,88올림픽 장애자 축구 및 각 종목의 경기를 상무에서 시행 했는데 나는 그 책임을 맡아 훌륭히 양대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냈다
여자축구에 대한 뜨거운 열망을 안고 있는 나에게 육군대표축구 감독으로 일을 하며 섬기던 체육인교회가 체육선교신학교를 만들고 여자축구를 하겠다고 나에게 팀을 맡아 달라고 요청을 해왔다
두 말 않고 허락을 하고 보장돼 있는 직장 현역군인 상무 감독 을 박차고 나와 여자팀을 창단한다. 미처도 보통 미친 것이 아니었다. 시방 생각해 보면 그렇다 그렇게 시작한 길이 가시밭길이요 고통의 연속이었다.
아화 여자 대학, 숙명여자대학, 인천전문대학, 그리고 우리 체육선교 여자팀 이렇게 4개 팀으로 시작한 한국의 여자 축구
그리고 문화 체육부에서 대표 팀에게 합숙 훈련을 할 수 있도록 최소한의 자금을 지원 해 주었고 감독 코치의 급여도 지급해 주었다
정작 주관 부서인 대한 축구협회는 두 손을 놓고 구경만 했고 골수 축구인들 조차도 여자가 무슨 축구야? 하고 비웃었다
그런데 요즘은 서로 여자축구를 하겠다고 달려드는 것을 보면 만감이 교차된다. 당시 대표 팀 감독은 이이우 코치는 윤홍근이었다
두 분은 지방으로 싸구려 여관으로 선수단을 끌로 다니며 고생 많이 했다
오늘의 발전이 두 분의 노고에 기인한다. 또 사재를 털어 여자팀을 이끌고 가장 많은 대표선수를 육성해 낸 서정호 전 위례상고 감독, 그리고 작고한 여성분과위원장이었던 최추경 이사
나는 여자 분과 부위원장으로 뒤 따라 다니며 뒷바라지를 다 해줬다
그렇게 시작된 여자축구가 평양에서 거대한 적들 앞에서 일방적인 응원에도 굴 하지 않고 선전을 하여 비기고 이제 골득실 차이로 누가 우승을 하느냐? 는 문제를 갖고 경쟁을 한다.
나는 먼 이국에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기도, 기도 밖에는 더 할 것이 없어 오늘 새벽에도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외쳐댔다 우리 어린선수들에게 힘과 능력 주셔서 북한을 이기고 목표를 이루고 돌아올 수 있게 해 달라고 그리고 감독 에게도 능력 주셔서 작전과 전술을 잘 해 꼭 우승 하여 사기가 떨어져 있고 남자축구에서 실망한 국민들에게 만족을 채워 줄 수 있게 스리 축복하여 주소서
첫댓글 숨은 공로자입니다
일대일로 비겼지만 적진에서 싸운 것이니 이긴것이나 같아요 ^^
네 그럼요 아주 잘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