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영혼을 팔아서라도 취직하고픈 현실이다
현대차 장기근속자 자녀 채용 가산점 논란을 보고
(사회디자인연구소 / 김대호 / 2011-04-29)
장문의 문자메시지 하나
4월20일 저녁 7시, 한 금속노조 관계자로부터 장문의 문자메시지가 날아왔다.
“금속노조 ***임다. 트위터 하나 부탁. 방금 현대차 지부 임시대의원대회에서 장기근속자 정년퇴직자 자녀 우선 채용 안건이 20표 차로 통과되었습니다. 안건 발의로 진보언론에서조차 비판을 받았는데 정말 부끄러운 일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하고 있네요, 세차고 엄하게 매를 들어주십시오. 여러분의 스마트폰이 이러한 몰염치한 행동을 반성하도록 만들어 주십시오. 저 자신 또한 깊이 반성합니다. 트윗 부탁”
메시지를 보낸 사람은 지난 몇 년 동안 노조·노동 문제 관련 토론회장에서 나와 여러 번 마주친 L박사였다. 대체로 정책적으로, 정서적으로 나와 많이 부딪혔기 때문에 자주 만났으되 그리 친하게 지내는 사이는 아니었다. 그는 1980년대 대부분의 운동가들이 그랬듯이, 노조운동의 진보·개혁적 역할에 큰 기대를 피력했다. 당연히 한국 노조운동의 한계(변질)나 그늘(기형)을 강조하는 나와 많이 부딪힐 수밖에! 나는 그를 볼 때마다 1980년대 운동권을 보는 느낌을 받았다. 한국의 바닥현실과 속살을 잘 모른다는 느낌. 너무 순진하다는 느낌. 노조운동에 대한 지나친 사랑과 기대가 지나친 미움과 절망으로 변하는 것을 많이 보아서인지 행여 故 권용목 위원장처럼, 뉴라이트 활동가들처럼 변하지 않을까 걱정도 되었다.
그는 자신의 핸드폰에 들어 있는 수백 개의 전화번호로 이 메시지를 무차별적으로 날린 것 같았다. 수신자 중에는 나 같은 사람도 있겠지만(나는 트위터를 잘 쓸 줄 몰라서 RE트윗을 못했다), L박사 같은 시각을 매우 불편해하는 노조 간부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단위 노조 출신이 아니라 전문가(해외 유학을 갔다 온 것으로 알고 있다)로 노조에 채용되었기에 이 메시지 한 방으로 잘릴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이 메시지는 민주노조운동의 위신과 그 존재 이유에 대한 엄청난 위기의식을 가진 사람이 정치적 생명을 걸고 날린 내부 비판·자정의 목소리였다. L박사가 긴급하게 날린 메시지를 보면서 현대차 노조의 단협요구안의 후폭풍을 예감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 다음 날부터 진보와 보수를 초월하여 종이 신문들과 인터넷에서는 “기득권 대물림”이니, “현대판 음서제도”니 하는 격한 비난의 글들이 쏟아졌다. 현대차 노조도 억울하다고 성명서를 발표했다.
울산시민연대는 성명서(4.21)에서 이렇게 말했다.
“현대차노조가 우리나라 노동운동에서 가지는 영향력과 상징성을 볼 때 이 같은 요구안 자체가 거론된다는 것은 한국 노동운동의 퇴행과 고립으로 이어진다……. 같은 라인에서 동일한 노동을 하고도 임금과 고용안정성에서 갖은 차별을 당하는 동료를 외면하고 자신들만의 고용안정성을 챙기는 것을 넘어 정규직 세습이라는 상황까지 치닫는 것은 우리나라 정규직 노동운동이 처한 위기를 보여주는 것……. 현대차노조의 반성뿐만 아니라 고용불안을 가중시키고 방기하고 있는 사측과 정부의 변화가 필요하다.”
최병천(진보신당 서울시당 부위원장)은 페이스북에 이렇게 썼다.
“현자노조 <자녀 채용 가산점 제도>를 보며 드는 생각. 민주노조의 시대는 끝났다는 상징적 사건이다. ‘군부독재’에 맞선 대립쌍이었던 학생운동이 90년대 후반 종말을 고했듯, 이제 민주노조는 그냥 일개 ‘조합’일 뿐이다. 그 자체 진보성을 담지하지 못한다”
“혹자는 이번 채용 세습을 보며 ‘연대의 위기’를 말하지만, 사실은 연대는 이미 붕괴되었다. 연대 붕괴의 징표로 채용세습이 나온 것이다. 사태의 선후관계를 정확히 인식해야 한다. (중략) 민주노총과 현자노조가 사회변화의 ‘주도세력’이라는 (이제는) 낭만적 가정을 기각하면, 오히려 작금의 문제를 풀 수 있다. 대중은 원래 이기적 특성을 갖는다. 현자노조와 민주노총을 그저 ‘대중’으로 대하면 된다. (중략) 문제는 노조가 아니다. 그들은 그저 ‘조직된’ 일개 ‘대중’집단일 뿐이다. 진짜 문제는 오히려 ‘정치’의 몫이다. 연대적 사회를 창출하고자 하는 목적의식적인 정치활동가들의 몫이다.”
이계안(2.1연구소 이사장, 전 현대자동차 사장)은 한겨레신문 여론면에 이렇게 썼다.
“현대차 노조의 이런 단협안은 위기에 처한 우리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는 없이 “나만 잘살면 되지”라는 의식이 팽배한 현실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중략) 현대차 노조의 단협안이 제기된 근본적인 원인은 우리 사회가 좋은 일자리를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이 된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는 튼튼한 중소기업이 설 자리를 찾지 못하고, 거의 모든 영역에서 재벌이 지배하는 사회가 된 것이다. 누구도 새로운 사업을 찾아서 도전하지 못하는 사회, 아무리 열심히 해도 큰 부자가 될 수 없는 사회가 된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좋은 일자리가 만들어질 수 없다.”
김기원(방송대 경제학과 교수)은 그의 블로그에 이렇게 썼다.
“한국은 압축적 불균등발전을 겪어왔고, 그런 와중에 산업생산 면에서는 이미 선진국 수준에 도달했으나, 기업경영 면에선 전근대적 요소를 온존시키고 있습니다. 노조도 이를 모방한 셈입니다. 특별히 노조만 탓할 일은 아니지요…….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요. 언론들은 노조의 이기주의를 규탄하고 있습니다만, 제대로 된 해결방안을 제시하는 경우는 보이지 않습니다. (중략) 정규직 노동자의 자성을 요구하는 건 ‘소귀에 경 읽기’ 같습니다. 아니 이렇게 말하면 지나치고, 사실 노동자가 자신의 이익을 넘어서는 성인군자가 되기를 기대하는 셈입니다. (중략) 해결책은 뻔해지지요. 대기업 정규직의 특권을 축소시키는 것입니다. (중략) 쉽지 않습니다. 박정희나 전두환 때처럼 노조를 박살 내는 방법은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습니다. (중략) 비정규직과 중소기업 노동자들의 처지를 ‘실질적으로’ 향상시키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노동자 가계의 지출 중 교육비, 의료비, 주거비 지출을 줄여주고 노후안정을 도모하는 게 복지확대입니다. 무상급식이나 아동수당이나 무상의료나 반값등록금이 바로 그런 제도들입니다. 이는 유럽 선진국들이 실행하고 있는 사안이기도 합니다. (중략) 재벌기업이나 부자들뿐만 아니라 대기업 정규직에게서도 세금을 더 많이 거두고 이를 통해 사회복지를 확대하면 노동자 사이의 실질격차가 줄어듭니다.”
만시지탄의 성찰
사실 이번 단협안에는 조합원 정년을 59세에서 61세로 늘리는 안도 포함되어 있었고, 조합원의 대학생 자녀에 대한 학비 지원금을 대학생 자녀가 있으면 누구나 받는 수당으로 만드는 안도 포함되어 있었다. 즉 ‘수혜 대상인 조합원 자녀가 법령에 의해 학자금을 면제받거나 무상인 경우-KAIST, 사관학교, 성적 우수자 등- 그 금액만큼 지원하지 않는다’는 기존 학비 지원 관련 단협안을 삭제하는 것도 통과되었다. 그런데 이 안들은 그리 공분을 사지 않고, (현대차 노조의 말에 따르면) 그 실효성이 의심스러운 자녀 채용 가산점 제도가 엄청난 공분을 샀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아무래도 이 조항이 사내 비정규직의 기회를 직접적으로 빼앗는 측면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결정적으로는 권력과 지위의 세습에 대한 한국인의 뿌리 깊은 분노의 뇌관을 건드렸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이 단협안을 계기로 한국 노조운동과 진보 정치의 철학, 가치, 정책, 문화를 수백만 국민들이 함께 성찰하게 된 것은 만시지탄이지만 여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다.
현대차 노조의 노동의 양, 질에 비해 지나친 고임금, 안정된 고용, 생산 현장의 고령화 등은 노조와 회사의 담합에 의해, 전후방 협력업체와 청년세대의 몫과 기회를 많이 가져간 측면이 분명히 있다. 또한, 노조는 그 힘에 비해 정치사회적 책임을 너무나 등한시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보는 노조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관대한 측면이 있었다.
사실 나는 87년 민주화 투쟁과 노동자 대투쟁, 민주정부 10년으로 집약되는 민주·개혁·진보의 그늘을 우리가 앞장서서 해결하면서, 보수의 짙은 그늘을 공격해야 swing voter를 우리 쪽으로 결집시켜 진보집권이 가능하다고 줄기차게 말해 왔다. 하지만, 대체로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조직노동을 진보의 주력군으로 생각해서 인지, 진보나 조직노동에 대한 비판 자체를 불편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남한이 아무리 문제가 많아도 북한보다 훨씬 좋은 나라가 아니냐며, 이승만, 박정희에 대한 비판을 거북해하는 보수처럼) ‘보수의 그늘이 훨씬 짙은데, 진보의 그늘이 좀 있다손 치더라도 무어 그리 대수냐’는 반응도 적지 않았다. 한국 사회의 핵심 문제를 신자유주의의 범람에서 찾는 사람들은 진보가 만든 그늘이 도대체 뭐가 있느냐고 묻기도 하였다. 심지어 반신자유주의 투쟁의 주력군인 조직 노동에 대한 비판은 이적행위로 치부하기도 하였다. 현대차 고임금은 잔업, 특권을 밥 먹듯이 해서 받는 것이니 (기본급으로만 보면) 그리 높지 않다는 주장도 심심찮게 나왔다. “대기업 노동자들이 양보한다고 해서 그 혜택이 협력업체에 돌아가느냐”고 반박하며, 양보론은 자본의 이데올로기로 몰아붙이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이번 단협안에 대해서는 이런 식의 반박이 머리를 들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민주노조운동의 그늘에 대해서 다각적으로 심층적으로 살펴보게 되었다. 만시지탄의 성찰이긴 하지만…….
영혼이라도 팔아서 취직하고 싶은 현실
현대차 조합원 자녀 채용 특혜 관련된 소동의 뿌리는 현대차 조합원들의 고령화와 자녀들의 극심한 취업난에 있다. 2005년 1월 기아자동차 생산직 채용 비리 사건이 터졌을 때, 돈을 주고 입사에 성공한 한 청년이 검찰의 조사를 받고 나오면서 했던 말-“잘못인 줄은 알지만 영혼이라도 팔아서 취직하고 싶었다”-로부터 자유로운 청년은 별로 없을 것이다. 취업의 고통은 대학진학률이 95%가 넘는 현대자동차 조합원들의 자녀라고 해도 별수 없을 것이다. 용케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관문을 통과해도 아버지만큼 근로조건이 좋은 직장을 잡을 수 있는 사람 역시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런데 조합원들의 정년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다. 정년이 늘어나지 않는다면 2018년부터 한해 1,000명씩 정년퇴직을 한다고 한다. 바로 이 때문에 정년 연장안(59세->61세)과 자녀 채용 시 특혜를 주는 단협안이 가볍게 통과됐던 것이다. 그런데 몇몇 공기업과 대기업에서는 진작부터 이런 단협안을 합의하고 그에 따라 일자리를 물려주어 왔다. 그런 점에서 현대차 노조는 노조 운동에서 차지하는 위상 때문에 해 보지도 못하고 뭇매만 맞았으니 억울한 측면이 있을 것이다.
불과 500만 개의 괜찮은 일자리
이번 일자리 세습 소동을 포함하여 한국의 수많은 불안과 고통의 근원은 괜찮은 일자리가 너무 적은데서 연유한다. 박상현(고용정보원 고용조사분석센터장)의 기준-주당 36시간 이상 근로, 정규직, 100인 이상 사업장, 중위(median)소득 이상-에 따르면 괜찮은 일자리를 가진 사람은 2008년 현재 임금근로자 중에서 265만 6천 명, 비임금근로자 중에서는 276만 6천 명으로 도합 542만 3천 명이다. 문제는 이런 일자리가 획기적으로 늘어나도 시원치 않을 판에 경향적으로 줄어든다는데 있다. 2001년에는 괜찮은 일자리에 종사하는 사람이 655만 4천 명이었는데 2008년에는 542만 3천 명으로 줄었다. 이는 비임금근로자층의 감소가 결정적이다. 2001년 421만 1천 명에서 276만 6천 명으로 144만 5천 명이 줄었으니까.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중위소득은 그리 높은 편이 아니다. 2008년 기준 월 167만 원인데, 당시 월평균 소득은 203만 7천 원이었다.
학력별로 괜찮은 일자리 추이를 살펴보면 2008년 기준 고졸 이하가 240만 명(현대차 노조원들은 거의 여기에 속할 것이다), 4년제 대졸 207만 3천 명, 전문대졸 57만 3천 명이다. 고졸 이하는 2001년에 399만 2천 명에서 2008년 240만 명으로 줄었다. 4년제 대졸은 2001년에 169만 2천 명에서 2008년에 207만 3천 명으로 38만 1천 명이 늘었다. 그런데 2001년부터 2008년까지 쏟아져 나온 대졸자의 수는 대략 400~500만 명은 될 것이다. 한편, 연령별로 괜찮은 일자리 분포를 보면 20대는 56만 9천 명(10.5%), 30대는 163만 4천 명(30.1%), 40대는 190만 4천 명(35.1%), 50대는 109만 2천 명(20.1%)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 해 나오는 괜찮은 일자리가 몇 개나 될까? 그중에서 20대가 도전할 수 있는 일자리는 또 몇 개나 될까? 추측건대 아무리 많이 잡아도 20대가 도전할 괜찮은 일자리는 10만 개가 안될 것이다. 한 해 쏟아져 나오는 대졸자가 대략 60만 명이고, 이래저래 누적된 괜찮은 일자리를 갈망하는 사람은 적게 잡아도 1,000만 명은 되지 않을까? 이러니 고졸을 전제로 직무가 설계된 9급 공무원 자리 하나를 놓고도 대졸자들만으로도 100대 1의 경쟁을 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나는 경쟁을 부추기는 (서남표식)교육 제도 등을 ‘신자유주의’의 발로라고 성토하는 사람들이 이런 살인적 경쟁 구조에 대해 어떤 해법을 내놓는지 정말 궁금하다. (물론 나도 서남표식 교육제도와 현행 입시제도는 불합리하다고 생각한다)
분명한 것은 괜찮은 일자리 부족 사태는 고용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민간 기업, 그중에서도 중소기업의 열악한 처지 내지 실력(괜찮은 일자리 창출, 유지 능력)의 문제이기도 하고, 국가와 공공부문의 역할(무능, 헛발질)의 문제이기도 하고, 취업자(노동) 내 불공평한 기회·임금 분배의 문제이기도 하고, 취업자와 구직자의 눈높이의 문제이기도 할 것이다. 물론 대안은 이 문제 전반에 대해서 해법을 내 놓아야 할 것이다.
기업, 노동, 국가, 엘리트층의 책임
김기원 교수의 말대로 이번 사태의 뿌리는 현대차 노조가 1987년 이후 줄기찬 투쟁으로 만들어낸, 빛나는 성과인 노동 특권에 있다. 정확히 말하면 이 특권이 별로 늘어나지 않다 보니 스펙이 아버지보다 월등히 좋은 자식들이 그 특권에 좀체 접근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특권이란 노동 시장의 처우 수준에 비해 월등히 높은 처우를 의미한다. 당연히 김 교수의 제안대로 세금(고소득자 증세)과 복지(사회임금 상향+노동의 최저기준 상향)를 통해서 이 격차를 줄여나가야 한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모순 부조리의 하류에서 완화하는 해법일 뿐이다. 모순 부조리의 상류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는 그대로 있다는 얘기다. 이계안 전 의원이 강조하는 ‘거의 모든 영역에서 재벌이 지배하는 사회’ ‘누구도 새로운 사업을 찾아서 도전하지 못하는 사회’ 구조 혁파하는 것이 그 중의 하나이다.
1인당 GDP의 창으로 한국 사회를 횡단하다
1인당 GDP를 기준으로 OECD국가들의 산업, 부문, 직능(제조업, 공무원, 교사, 의사, 자동차 산업 현장직 등)의 처우 수준을 비교하면, 한국의 그것이 유달리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단적으로 현대차 생산직의 평균 처우 수준은 1인당 GDP의 3배가량 되고(협력업체는 1~2배), 공무원은 2~2.5배지만 미국 등 대다수 OECD 국가들은 1~1.5배 수준이다. 4만 불 국가에서는 4~6만 불, 5만 불 국가에서는 5~7만 5천 불이라는 얘기다. 따라서 이 국가들은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차이가 크지 않고, 공공부문과 민간부문의 차이도 크지 않다. 당연히 좋은 일자리로 접근하는 통로인 좋은 학과, 학벌, 학위를 취득하려는 경쟁도 약하다.
또 하나의 한국의 유별난 특징은 노동의 처우 수준이 노동의 양과 질이 아니라 수익성과 교섭력의 함수라는 것이다. 그로 인해 모든 갈등 내지 경쟁은 좋은 곳에 들어가거나, 거기로부터 떨려나오지 않으려는 데서 일어난다. 노동의 질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좋은 곳에 들어가기 위해 스펙을 높이거나 관문(시험)을 통과하는 쪽으로 에너지가 경주된다는 얘기다.
이는 복지국가론자들이 부르짖는 ‘생산력 수준에 비해 낮은 복지 수준’보다 더 특이하고 심각한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분단과 수도권 집중만큼이나 특이한 우리만의 문제일 것이다.
노동 시장의 처우 수준과 수익성 및 교섭력이 좋은 사업장의 처우 수준의 엄청난 격차는 한국 사회의 격렬한 대립, 갈등, 경쟁, 억울함의 원인을 간명하게 설명해 준다. 왜 대기업. 공기업 생산현장의 고령화가 급격히 진행되는지(현대중공업은 생산직 평균 47~48세, 사무직 평균 40세. 현대자동차 생산직 평균은 43~44세 등), 왜 대기업 고용 비중이 급속히 줄어드는지, 왜 분사화, 외주화, 하청화가 급격히 진행되는지, 왜 비정규직 비중이 OECD 최고 수준인지, 왜 해고가 중소기업에서는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는 계기인데 반해, 대・공기업에서는 살인으로 되는지, 왜 한국 기업주들이 노조와 고용 확대를 그렇게 무서워하는지, 왜 미국, 일본의 자동차 산업의 구조조정과 한국의 구조조정 과정의 갈등 양상이 그렇게 다른지, 왜 공공부문 일자리가 그렇게 선호되는지, 왜 좋은 학과(자격증), 학벌, 학위를 따기 위해 엄청난 사적 비용을 지출하는지, 왜 노동을 대변한다는 정당이 그렇게 오랫동안 활동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지율이 답보 상태인지, 왜 노조 조직률이 10%에도 미치지 못하는지…….
과도하고 불합리한 특권·특혜와 배제·차별
한국 사회의 수많은 모순 부조리는 과도할 뿐 아니라 합리적이지도 않은 격차에서 온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과도하고 불합리한 특권·특혜와 배제·차별에서 온다는 것이다. 이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시장과 국가의 산물이다. 그러다 보니 이익집단의 힘에 밀려 과잉시장(경쟁)과 과소시장이 병존한다. 과잉 자본권(신자유주의)과 과잉 노동권과 과잉 관료권(규제, 처벌, 촉진권)이 병존한다. 이는 사회적 동기부여체계 혹은 상벌체계의 왜곡으로도 표현할 수 있는데, 이는 기업, 노동(노조), 국가(정치)는 물론이고 어느 나라나 특권 특혜를 누리는 엘리트(전문가)층에게도 작지 않은 책임이 있다.
‘독과점과 불공정거래 타파와 벤처중소기업에 대한 배려’를 얘기한 이계안은 주로 재벌대기업과 국가의 책임을 강조하였다고 할 수 있다. 세금과 복지를 얘기한 김기원은 국가와 정치의 책임을 강조했다고 할 수 있다. 김기원은 노조의 책임을 언급하긴 했지만 ‘정규직 노동자의 자성 내지 양보는 그들에게 성인군자’가 될 것을 요구하는 것이기에 무망하다고 비켜갔다. 최병천은 지금은 진보(좌파) 동네에만 남아있는 민주노총에 대한 ‘낭만적 가정’의 기각과 정치(활동가)의 책임을 주로 얘기했다. 어쨌든 하나같이 필요하고도 중요한 얘기다.
하지만, 나는 노동(노조)의 책임과 역할이 좀 더 강조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1차 분배 구조인 시장의 합리화/정상화는 훨씬 더 강조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말하는 1차 분배구조는 재화를 분배하는 경제적 시장뿐만 아니라 권력을 분배하는 정치적 시장도 포함한다.
현대차 노조와 진보 언론의 간극
사실 전후방 가치생산 사슬의 약탈하는 힘센 노조와 재벌대기업의 문제는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미 90년대 초중반부터 대두된 문제였다. 이를 풀기 위해 전국적 계급적 요구를 체현한다는 전노협과 민주노총이라는 해법도 제시됐고, 민주노동당과 산별화라는 해법도 제시됐다. 하지만, 문제는 점점 더 악화되어 갔다. 그러다가 지금은 친노조적 정서를 가진 진보 언론과 여론주도층조차도 감내 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것이다. 이들의 비판을 반박한 현대차 노조의 성명서(4.22)-언론사의 현대차 노조 죽이기 즉각 중단돼야 한다-는 현대차 노조와 진보 언론의 간극을 다시금 확인시켜 주었다. 성명서의 요지는 이렇다.
“요구안은 25년 장기근속 자녀 중 채용규정상 하자가 없을 시 우선 채용을 원칙으로 한다는 것이지, 무조건적인 고용 대물림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가산점을 부여한다고 해서 채용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고 장기근속자 사기진작을 위한 상징적 배려……. 관련 조항은 이미 기아차, 한국GM 등 많은 단위사업장에서 이미 오래전부터 적용돼왔던 내용인데 현대차 노조에만 비판을 가한다(중략) 소위 자본의 언론인 조중동은 그렇다 치더라도 서민과 사회적 약자를 대변해온 진보언론마저 앞다투어 현대차노조를 맹비난하는 것에 우려를 금할 수 없다……. 오늘날 청년실업과 비정규직 확대는 정치권력의 무능함과 자본의 탐욕에서 비롯된 것……. 본질적 문제를 제쳐놓고 같은 노동자인 정규직이 비정규직을 해결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언론으로서의 역할을 포기하는 것”
과거 기아차, 대우차(한국GM)에서 이런 조항이 만들어진 것은 노조의 특권·특혜가 그리 높은 수준이 아니었던 시절이었다. 장기근속을 장려하고, 회사에 대한 충성심을 고취하기 위한 인센티브 차원에서 만든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현대차의 사정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단적으로 장기근속은 인센티브까지 주면서 장려할 사항이 전혀 아니다. 성명서를 보면 현대차 노조의 수많은 퇴행성의 근원은 자신들이 아직도 진보 언론이 무조건 지지 옹호해 주어야 할 ‘서민과 사회적 약자’라는 의식인지도 모른다. 사회적 약자 의식은 정치, 사회적 무책임성으로 가게 되어 있다. 현대차 노조는 ‘청년실업과 비정규직확대’는 ‘정치권력의 무능함과 자본의 탐욕’ 탓이라고 한다. 하지만, 구청장이나 국회의원 등 자리를 탐할 때는 노동의 대표로 자처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기여, 부담, 책임은 극소화하고, 권리, 이익, 혜택은 극대화 하면 사회적 고립과 퇴행은 필연이다.
10여 년 전과 지금의 의식 변화
대기업에서는 10여 년 전만 하더라도 사실상의 노사 묵계로 유사시 정규직 고용 안전판으로 15% 내외의 비정규직을 두었다. 지금도 외형은 비슷하지만, 이젠 ‘비정규직의 고용안전판화’는 현실일지라도 노조 이름으로는 감히 할 수 없는 주장으로 되었다. 지금은 왼쪽 바퀴를 조립하는 정규직과 오른쪽 바퀴를 조립하는 비정규직의 차별은 실정법과 정서법으로 용납할 수 없다는 수준까지 왔다. 이대로 가면 오래지 않아 유럽국가들처럼 노동의 양과 질이 비슷한 원청과 하청 노동의 차별도 부당하다는 주장-진정한 의미에서의 동일노동 동일임금-도 크게 설득력을 얻지 않을까 한다. 또한, 과거에는 이익의 1/3은 종업원 성과급으로, 나머지 1/3은 주주 몫으로, 나머지 1/3은 사내 유보로 돌려야 한다는 주장이 노조와 경영자들이 공공연하게 주장되었다. 하지만, 조만간 협력업체에게 돌려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크게 얻지 않을까 한다. 정운찬과 이계안이 얘기하는 이익공유제는 그 효시일 것이다. 이처럼 과거에는 씨알이 먹히지 않은 소리들이 조금씩 먹혀들어간다.
고용, 노동 문제를 풀어가는 첫 단추
나는 한국의 공공부문과 조직노동과 전문 직능에 종사하는 3~4백만 명이 누리는 처우가 우리의 생산력(1인당 GDP)에 비해 과도하다는 인식이 한국의 너무 심각한 고용, 노동 문제를 풀어가는 첫 단추가 아닐까 한다. 이들이 극소수의 ‘신이 내린 직장’과 자신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2000만 명 살고, 자기 자식들이 살아가야 하는 ‘아래’와 비교해야 하후상박식 처우 개선에 대한 국민적 합의가 형성될 것이고, 이를 바탕으로 수십 년에 걸쳐서 격차를 축소하고 합리화(공평화) 할 수 있을 것이다. 3~4백만 명의 자제와 필요하다면 소폭이나마 양보가 있어야 최저임금 대폭 인상, 사회임금 상향, 일자리 나누기 등이 가능할 것이다. 또한, 기업도 고용과 노조에 대한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신규 고용에 대해서는 2개의 노동 트랙; 즉 정년보장(철밥통) 트랙은 주로 비지식(육체) 노동에 적용하며, 그 처우는 다소 낮게 가져가고, 유연한 계약제 노동 트랙은 주로 지식노동에 적용하며 유연한 만큼 그 처우는 다소 높게 가져가는 원칙을 실행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또한 엘리트(전문직)층이 가진 특권·특혜의 적정 수준으로 조정해야 청년 인재들이 국내에서만 통하는 자격증의 성채 안으로 들어가려고 기를 쓰는 것이 아니라 글로벌 경쟁이 일어나는 민간 시장 영역에서 승부를 보려고 할 것이다.
사람은 성인군자가 될 수도 없지만, 자기만 아는 몰염치한 사람이라는 비난을 받는 것도 싫어하기에 격차와 청년 실업의 고통이 극에 달한 시점부터는 과거에는 씨알이 먹히지 않던 소리도 먹힐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네덜란드는 바세나르협약, 대한민국은?
나는 현재의 정규직/공무원/전문직도 비정상이며, 비정규직도 비정상이라는데 사회적 인식의 일치가 필요하고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상향평준화도, 하향평준화도 아닌 중향평준화를 전략적 방향으로 설정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향후 창출할 일자리는 노동 시장 수준에 비해 그 처우 수준이 그리 높지 않은, 중위(median) 수준의 ‘중규직’ 과 유기(3년) 계약직 일자리라는데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을까 한다. 이런 공감대가 형성된다면 10년 내 5백만 개 이상의 일자리를 추가적으로 만드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한다. 이는 현재의 공공부문, 조직노동의 기득권을 인정하고, 이를 시간(정년)을 통해 해소하며, 동시에 노동의 최저 기준과 사회임금 상향을 통해 노동 시장의 처우 수준을 전반적으로 다소 가파르게 올리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의 노동 기득권을 타파하는 것이 가능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기득권 노동이 누리는 일자리(괜찮은 일자리 중에서도 좋은 쪽)를 대량으로 창출하는 것(한마디로 상향평준화)도 가능하지도 않은 상황에서는 이런 형태의 사회적 합의라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노조가 자기가 가진 기득권을 납득할 만한 수준으로 내놓으면서, 기업과 국가와 사회에 대해서도 양보를 요구하는 사회적 대타협을 주도하는 기대를 아직은 버리지 않고 있다. 네덜란드가 1982년에 “바세나르협약”을 통해 경제, 고용 위기를 돌파했다면 2010년대 중반에 한국이 맺을 사회 협약은 어떤 형태일까? 한국 노총과 민주노총이 답해 줬으면 좋겠다. 이 비전이 그럴 듯하고 감동적이어서 수백만 명의 가슴을 뛰게 하면 진보는 집권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김대호 / 사회디자인연구소장